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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카타유 >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

10년전에도 알라딘 서재와 함께 했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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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키가하라전투 1 - 히데요시의 죽음
시바 료타로 지음, 서은혜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2년 7월
평점 :
절판


<이순신의 바다>를 읽고, 한산 : 용의 출현을 보면서 조선을 침략한 왜군에 대해 아는 것이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대해서 들어 보았지만, 조선을 침략한 많은 장수들에 대해 아는 것은 별로 없었습니다. 1598년 임진왜란의 원흉인 히데요시가 죽은 후에 내분이 발생하고, 동군, 서군으로 나누어서 세키가하라 전투를 했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승리를 함으로써 전쟁의 주도권을 잡고, 도요토미 가를 멸망시켰습니다. 



이 책 <세키가하라 전투>를 고른 이유는 책을 통해서라도 도요토미 가의 멸망을 지켜보고 싶었습니다. 이 책은 2002년에 출판되었고, 현재 절판된 책이라서 구하기 어려워서 상호 대차 서비스를 통해 도서관에서 대여했습니다. 제가 주로 다니는 도서관에도 해당 책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상호 대차 서비스를 처음 써봤는데, 만족했습니다. 도서관에서 대여할 수 있는 책의 범위가 넓어졌습니다. 읽고 싶은 책은 많은데, 어찌 감당할 지 모르겠습니다. 



야마오카 소하치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에야스를 미화시키는 경향이 있지만, 시바 료타로의 <세키가하라 전투>는 히데요시 입장에서 최대한 객관화시킨 소설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객관화 여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 책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이시다 미쓰나리의 만남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후 그의 아들인 6살 히데요리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이시다 미쓰나리와 정권을 잡으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갈등이 불거지는 상황까지 1권을 마무리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일본으로 출병한 왜군은 적지 않은 피해를 입고, 철수합니다. 더 많은 왜군을 죽지 못한 것이 애통하지만, 이것 또한 역사입니다. 그런데, 히데요시가 죽은 날부터 분열이 시작됩니다. 충성스러운 부하들이 명령 하나로 조선으로 가서 죽을 기회를 넘기면서 싸웠는데, 이들이 왜 도요토미 가를 지키지 않았을까요? 


가장 큰 이유는 히데요시와 다이묘들은 이해 관계로 엮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임금과 신하의 관계보다는 힘이 센 놈에게 피해를 보지 않기 위해 엎드린 놈의 사이였기 때문입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의 5대로(다이로) 중의 한 명이었습니다. 

히데요시가 다이묘들을 포섭할 때도 "설득하려면 이성이 아니라 이해 관계에 호소해야 한다"를 철저히 따랐습니다. 다이묘들이 자신을 따르면, 좋을 것이고, 따르지 않으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분명히 이해시킨 것입니다.  


     

또한,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는 측실 요도도노가 낳은 자식이었습니다. 정실인 기타노만도코로(애칭 오네네)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오네네는 히데요시와 같은 오와리국 출신이었고, 정치에 깊숙히 관여하면서 히데요시와 함께 목숨을 무릅쓰고 싸웠던 오와리국 출신 장수들과 파벌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히데요시의 칠본창 중 후쿠시마 마사노리와 가토 기요마사와 친했습니다. 오네네는 히데요시가 오다 노부나가의 잡역부일 때부터 일생을 함께 했습니다. 


반면에 요도도노는 오미국 출신이고, 당시에 오미국은 오와리국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요도도노 역시 오미국 출신들과 친밀한 파벌을 형성했습니다. 오미국 출신으로 가장 성공한 사람이 히데요시 옆에서 집정관 역할을 하던 5부교 중의 한 명인 이시다 미쓰나리입니다. 요도도노는 명문가 아자이 출신으로 어머니는 오다 노부나가의 여동생인 오이치였습니다. 가문부터 오네네와 비교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여기까지 읽으시면 궁금한 부분이 많을 것입니다. 대체 다이묘는 뭐고, 칠본창은 뭐고, 오와리국, 오미국은 대체 어디이고, 5부교는 뭔지 답답할 수 있습니다. 왜군 장수인 와키자키 야스히로에게 히데요시의 책략가인 젊음발이 구로다 요시타카가 칠본창 중의 한 명이라고 칭찬을 합니다.이것들을 모르면, 소설을 제대로 즐길 수 없습니다. 

마치 예전에 삼국지를 읽으면서 중국 지도를 펼친 것처럼 히데요시 당시의 지도를 먼저 펼쳐서 파악해야 합니다. 뭐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생각할 수도 있지만, 역사와 지리는 떨어질 수 없는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을 읽기 위해 필요한 보충 설명은 별도의 페이퍼로 작성할 생각입니다. 제가 일본 역사 책을 읽으면서 계속 참고하기 위함입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바로 오네네를 통해 오와리국 출신 다이묘들에게 접근하고, 이에야스의 의도를 눈치 챈 이시다 미쓰나리는 정도를 내세우면서 이에야스를 견재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을 1권에서 다룹니다. 



머릿속에서 16세기 조선, 일본이 떠나지 않네요. 김영진의 <임진왜란> 책도 알라딘 보관함에 있는데, 이 책까지 읽으면 16세기 명나라까지 생각날 거 같습니다. 



2025.7.31 Ex. Libris HJK


지금 옛일을 떠올려본다. -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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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 패망사 - 태평양전쟁 1936~1945 걸작 논픽션 17
존 톨랜드 지음, 박병화.이두영 옮김, 권성욱 감수 / 글항아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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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무려 1400 페이지입니다. 너무 두꺼워서 읽기에 불편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중요한 전선 중의 하나였던 태평양 전쟁을 자세히 서술한 책은 한국에서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저자는 일본 제국 패망사를 다룬 책이므로 일본 관점에서 써야 했겠지만, 일본이 서양 제국주의에 맞서서 아시아를 독립 시킨다는 이론인 대동아 공영권을 설명하면서 일본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사실 일본은 동남아 국가들을 독립시키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제국주의 기반의 식민지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영국(버마), 프랑스(인도차이나), 네덜란드(동인도), 미국(필리핀)을 보면서 자신들이 그들을 대체하기를 바랬습니다. 일본은 자신들이 중국과 인도차이나를 점령하는데 미국이 왜 이렇게 난리인지 이해를 못했습니다. 미국,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모두 제국주의 국가이고, 자기들도 모두 식민지를 건설했는데, 왜 일본은 안되냐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니깐요.



일본의 아시아 국가의 독립이 아니고, 전쟁이 필요한 자원을 식민지에서 조달하기를 원했습니다. 물론, 일본이 동남아 국가의 지도자들을 불러서 아시아의 단결을 도모하자고 하면서 각 국가는 독립국이라고 선언을 하기도 했지만, 이때는 미국에게 연패하면서 점차 승세가 기울여져 가고 있을 때였습니다.   



하지만, 일본이 처음부터 동남아시아로 진출할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본 관동군은 중국 화북 지역까지 진출하면서 중국을 점령할 야욕을 내세웁니다. 독일군이 짧은 시간안에 프랑스군을 격파했듯이 일본군은 중국군에게 연승을 하면서 쉽게 중국을 점령할 줄 알았지만, 중국은 생각보다 너무 광대한 영토를 가진 국가였습니다. 패배하고 후퇴해도 다시 군대를 모아서 일본군에게 대항했습니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 1939년까지 일본은 중국의 항복을 받아내지 못했습니다. 만주에 주둔하고 있던 관동군은 1939년 5월 노몬한 지역에서 소련군과 충돌합니다. 관동군은 군국주의 일본의 대명사이면서 가장 최악의 악질적인 군대 중의 하나입니다. 생체 실험을 일삼던 731부대를 운영했고, 온갖 음모, 공작을 꾸며대면서 반인륜적인 전쟁 범죄를 자행했습니다. 하지만, 주코프가 이끄는 제57저격군단에게 박살이 납니다. 이후 독일군의 모스크바 공세 시 주코프는 공세를 막아내어 소련의 영웅으로 불리웁니다. 모스크바 광장에 그의 동상이 있습니다. 



만약, 1941년 6월 22일 독일이 소련을 침공할 때 일본이 소련을 침공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확실한 것은 소련의 극동군이 독일 방어전에 투입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주코프가 시기적절한 타이밍에 서부 전선으로 이동했을지 알 수 없습니다. 소련에게 엄청난 부담이었겠죠.     



프랑스가 독일에게 무너진 후 괴뢰정권인 비시 정부가 들어섭니다. 이런 정부가 해외 식민지에 관리할 여력이 없었겠죠. 이때 일본은 프랑스 식민지인 인도차이나(현재의 베트남)을 점령합니다. 일본이 만주를 침공할 때 우려섞인 시선을 보냈던 미국은 일본이 중국 화북 지역을 점령하니 일본을 비난하고, 원유 공급을 중단합니다. 



결국, 일본은 자원이 풍부한 동남아를 차지하기 위해 남방 작전을 계획합니다. 싱가포르를 점령하고 있는 영국, 동인도(현재 인도네시아)를 점령하고 있는 네덜란드는 별로 문제가 아니었지만, 필리핀을 점령하고 있는 미국을 상대하지 않고는 동남아 진출이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진주만 공습을 준비합니다. 

일본군은 싱가포르에 주둔한 영국군 함대, 필리핀 클라크 기지에 있는 미군 극동항공대, 진주만에 있는 미군 태평양 함대를 동시에 공격할 계획을 세웁니다. 일본군의 계획에 반대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일본군 연합 함대 사령관이었던 야마모토 제독도 몇 개월 동안은 미군에 승리할 수 있지만, 장기로 전쟁이 지속된다면 미군에게 진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일본군의 자만심은 엄청났습니다. 미국에 심대한 타격을 가하면, 일본을 우습게 보지 못할 것이고, 태평양을 포기하거나 평화 조약을 맺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드디어 일본은 선전포고 없이 1941년 12월 7일 일요일 아침에 일본군 항모 모함에서 발진한 항공기들이 진주만 기지를 폭격합니다. 동시에 말레이 반도에 상륙해서 싱가포르로 남하합니다. 또한, 대만 공군 기지에서 발진한 항공기들이 필리핀 루손섬 중앙부에 위치한 미군 클라크 기지를 폭격합니다. 

일본군은 진주만 폭격 시 실수를 저지릅니다. 18척의 함정을 격침 또는 파손시키고, 항공기 188대를 파괴했지만, 유류 저장 탱크와 잠수함 대피소를 폭파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미군 항공 모함은 진주만 기지에 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싱가포르에 주둔했던 영국 극동 함대와 필리핀에 있던 미군 태평양 항공대를 박살내는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동인도 자바섬에 배치되어 있던 영국, 네덜란드, 미국 연합 해군도 무너뜨립니다. 일본의 남방작전은 성공했고, 남은 곳은 맥아더 장군이 필리핀에서 도망간 호주 뿐이었습니다. 



일본의 자만심은 하늘 끝까지 도달했습니다. 진주만 공격에서 미군 항공모함을 부수지 못한 아쉬움을 풀기 위해 미군 대규모 해군 병력을 미드웨이 지역으로 유인해서 격파를 하겠다는 계획을 세웁니다. 일본이 동남아에서 영국, 네덜란드, 미국 해군을 무찌른 것은 그 지역의 미국 공군 병력을 먼저 제거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항모가 아니고, 함대전을 통한 전투에서 승리를 한 것이었죠. 

일본의 계획은 진주만 처럼 미드웨이 지역을 급습하고, 진주만에서 미군 항모 선단이 지원을 오면 급습 부대 뒤에 위치한 일본군 항모 선단이 미군 항모를 격침시킨다는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미군은 일본군 암호 해독을 통해서 일본의 계획을 사전에 파악합니다. 그리고, 바로 미드웨이 항공 기지를 강화하고, 항공기 배치를 증가시켰습니다. 미군 항모는 일본군 항모에 비해 1대가 적었지만, 진주만 이후 미군 태평양 함대 총사령관이 된 니미츠 제독은 불침 항모인 지상 항공기 기지를 활용하면, 일본군 항모 선단을 대적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더구나 일본군은 미군 항모를 2대로 봤지만, 미군은 엄청난 보수 능력을 통해 항모 요크 타운을 수리해서 미드웨이 해전에 참여시킬 수 있었습니다.



1942년 6월 4일 일본군은 계획대로 미드웨이 공군 기지를 폭격하지만, 강렬한 저항에 부딪히고, 공군 기지에서 출격한 미군 항공기들이 일본군 항모를 위협하자 공군 기지에 대한 2차 공격을 하기로 결정합니다. 공군 기지 폭격을 위한 소열탄과 항모를 공격하기 위한 어뢰, 폭탄은 다르기 때문에 항모에서 출격하기 전에 교체를 해야 합니다. 일본군은 미군 항모가 아직 도착할 시간은 안 되었다고 판단해서 항공기들을 항모에 착륙시키고, 다시 소열탄을 장착합니다. 그런데, 일본군 정찰기가 미군 항모 선단을 발견합니다. 일본군은 기겁을 하고, 다시 어뢰를 장착하기 위한 준비를 합니다. 일본군 항공기들이 모두 항모에 착륙해 있을 때 미군 급강하 폭격기들이 일본군 항모를 발견하고, 공격을 합니다.

사실 미군 어뢰기 편대와 급강하 폭격기 편대가 항모에서 동시에 출격했는데, 어뢰기 편대는 일본군 항모 위치로 바로 왔기 때문에 일본군 제로기와 조우했고,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습니다. 

하지만, 미군 미드웨이 해군 기지에서 출격한 항공기들을 요격하기 위해 제로기들은 계속 방어를 담당했고, 미군 어뢰기 편대까지 공격한 후에 연료와 무기 재보급을 위해 항모에 착륙해야만 했습니다.. 

이때 미드웨이 해전의 운명의 시간이 다가옵니다. 단, 몇 분동안 미군 급강하 폭격기 편대는 일본군 항모 4척을 격침시킵니다. 일본군은 방어할 제로기가 없었고, 연료와 무기 재보급을 위해 한 곳에 꺼내서 모아놓고 있었기 때문에 타격이 컸습니다. 미군 폭탄 중량도 무거워서 갑판을 뚫고, 격납고까지 내려가서 폭발을 했습니다. 



미국에 비해 산업 역량이 떨어지는 일본에게 4척의 항모 손실은 치명적이었습니다. 전통적으로 일본은 전함과 순양함 위주의 해전을 선호했는데, 항모에서 출격하는 항공기에게 치명적으로 약했습니다. 항모 전력이 떨어지므로 일본군은 대규모 선단의 대양 전투를 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초기 일본군 제로기의 성능에 뒤쳐졌던 미군 전투기들의 성능이 개선되면서 미군은 공중에서의 우위를 차지합니다. 이로써 일본군이 태평양 전쟁에서 이길 가능성은 점차 낮아집니다. 



그렇다면, 일본의 전략은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점령을 한 섬들의 공군 기지를 방어하면서 인근 해안에서의 함대전에서 승리를 해야 했습니다. 솔로몬 제도의 과달카나 섬에 공군 기지를 짓기 시작합니다. 미군이 태평양을 못 넘어오도록 마리아나 제도의 사이판섬, 뉴 브리튼 섬의 라바울 기지, 과달카나 섬 기지를 중요 전략 거점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공병 부대의 기술이 부족했기 때문에 생각보다 기지 건설이 늦어졌고, 미군이 상륙해서 일본군을 몰아내고, 핸더슨 공군 기지를 건설합니다. 그리고, 항공기들을 발바쁘게 배치하죠. 

일본군은 다시 과달카나를 빼앗기 위해 몇 차례의 상륙전과 인근 바다에서의 해전을 시도하지만, 결과적으로 일본군의 참패로 끝납니다. 



미군은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해서 맥아더는 뉴기니섬, 뉴브리튼섬을 거쳐 필리핀으로 진격하고, 니미츠 제독은 태평양 섬들을 점령하면서 사이판 섬으로 향합니다. 

항모가 부족하니 전함 위주로 가봤자 미군 항모의 급강하 폭격기, 어뢰기에 의해 격침될 것이니 할 수 있는 것은 섬에서 틀어 막혀서 죽을 때까지 싸우는 것이었습니다. 이게 용기인지, 객기인지 아니면 무식한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 의미없는 반자이를 외치면서 죽어가는 것이 자랑스럽다고 생각하는 신념이 한심합니다. 전략적인 후퇴와 재집결을 통해 휴전을 도모하는 것이 일본이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해결책이었지만, 군부가 장악한 일본 정부는 오로지 결사 항전만 외쳤습니다.



1944년 7월 9일 미군은 사이판 섬을 점령하고, 1944년 12월 15일 필리핀 레이테만 전투에서 승리합니다. 1945년 3월 27일 미군은 이오섬 점령을 하면서 점차 일본 본토에 다가섭니다. 그리고, 마지막 관문이 오키나와 섬을 마주하는데, 전투에서 지면 할복하겠다는 비장함을 드러내는 일본군을 마주합니다. 

죽겠다고 덤비는 적에게 죽이겠다고 덤비면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1945년 7월 2일 오키나와 섬의 일본군은 무너집니다. 하지만, 3개월을 버티면서 미군에게도 피해를 줍니다. 미군은 일본 본토를 상륙할 때 얼마나 많은 피해를 입을까 걱정했습니다. 



일본이 할 수 있는 공군 작전은 오로지 가미가제 밖에 없었고, 오키나와를 지원하기 위해 출항한 일본군 전함, 순양함, 구축함들도 미군에게 격침 당했기 때문에 일본군은 더 이상 전투를 지속할 힘이 없었습니다. 일부 군인들은 오로지 깡만 남아서 휴전을 하고자 하는 일본 정부에게 쿠데타를 일으킬 정도로 우둔했습니다.   



미군 폭격기들이 아무런 방해 없이 마음대로 일본 영공을 날라다녔기 때문에 미군이 원자폭탄을 떨어뜨릴 때도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 폭탄이 투하됩니다. 1945년 8월 8일 일본 나가사키에 원자 폭판이 투하됩니다. 많은 민간들이 방사선 피해를 고스란히 받았습니다. 



태평양 전쟁의 죄인은 일본군 군부였습니다.  

일본이 점령한 한치의 땅도 뺏기지 않겠다는, 아무 의미도 없는 신념에 매몰되어서 많은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본토에 상륙한 미군을 무찌르겠다는 일념을 불살랐던 일본 군부로 인해 일본은 두 번의 원자 폭탄 피해를 감수해야 했습니다. 미국의 원자 폭탄 공격이 인도적이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군 731대 부대의 생체 실험, 난징 30만 대학살, 100인 연속 머리 자르기 등의 일본군 잔혹 행위는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이 책을 읽으면서 일본제국이 왜 패망했는지를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이 정도로 국력을 키운 일본이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역사는 반복됩니다. 그들이 또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떤 행동을 할지 모릅니다. 

우방 국가와 협력을 강화하면서 우리 나라의 국력을 키워야 합니다. 미국은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만드는 것을 동의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됩니다. 오늘의 우방이 영원할 수 없습니다. 모든 국가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 움직입니다. 이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다행히 여러 지표를 조사해서 발표한 2025년 강대국 순위에서 한국은 전세계 6위에 등극했습니다. 프랑스는 7위, 일본은 8위였습니다. 그리고, 2025년 국방력 순위에서 한국은 전세계 5위에 등극했습니다. 우리보다 강한 국방력은 미국, 러시아, 중국, 인도 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일관된 국방력 강화와 정치적 안정이 한국을 지정학적 위기에서 구하고, 평화를 유지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제2차세계대전의 한 축이었던 태평양 전쟁을 살펴보았습니다. 일전에 읽었던 <중일 전쟁>과 함께 이 책도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아시아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중일 전쟁>을 쓴 권성욱 작가가 <일본제국 패망사>를 감수했습니다. 이 책을 통해 태평양 전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특히, 일본 군부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존 톨런드는 일본은 패망 후 25년 후 다시 세계 국가들 사이에서 존중과 칭찬받는 국가가 되었다고 저술합니다. 마치 이처럼 위대한 국가가 왜 전쟁을 저질렀는가에 대한 의문을 가집니다. 일본이 실수했던 걸까요? 아닙니다. 역사는 계속 반복됩니다. 임진왜란, 정유재란, 정한론, 청일전쟁, 러일전쟁, 조선의 식민지화, 독도 영토 주장, 역사 왜곡 등 그들의 침략적이고, 야만적인 전쟁에 대한 민족적 습성,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왜곡을 일삼는 치졸한 행태를 들여다 봐야 합니다. 제가 존 톨런드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이유입니다.

일본과 협력하면서 동북아 안정과 평화를 함께 도모해야 합니다. 하지만, 일본이 자신들의 잘못에 대해 인정하고, 무조건적이고, 처절한 반성을 먼저 해야 합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말을 다시 마음속에 새깁니다.   




2025.07.29 Ex. Libris HJK


1936년 2월 25일 오후, 도쿄의 하늘은 불길할 만큼 어두컴컴했다. - P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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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의 바다 (리커버) - 그 바다는 무엇을 삼켰나
황현필 지음 / 역바연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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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저는 조선 시대 위인 3명을 존경합니다. 세종대왕, 이순신, 정조 입니다. 

반대로 가장 혐오하는 2명도 있습니다. 선조와 인조 입니다. 

선조는 임진왜란, 정유재란 관련 조선의 죄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백성을 버리고, 혼자 살겠다고 중국으로 귀부(망명)을 가려고 한 것이나 나라를 지킨 의로운 이들을 죽이거나 괴롭히는 파렴칙한 짓을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이순신에 대해서 황현필의 <이순신의 바다>를 추천합니다.  

저는 황현필 역사가를 좋아합니다. 그는 자신의 주장에 대해 논증을 합니다. 그냥 아니면 말고 하는 식으로 내뱉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그를 진보, 좌파 역사가라고 평가할 수 있지만, 저는 민족주의 사학자로 생각합니다.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은 다를 수도 있지만, 저는 민족주의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방향에 동의합니다. 이상하게도 한국 사람은 친일사관 때문인지 민족의 역사를 무시하거나 등한시합니다. 자신들과 상관없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습니다.   

그를 폄하하는 사람들은 전한길은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합니다.



이 책을 추천하는 이유는 많은 사진과 지도를 통해 당시의 전투 현장, 무기 등을 설명하고, 각 해전 결과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서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썼기 때문입니다. 여러 문헌을 통해 선조와 원균이 얼마나 나쁜 짓을 저질렀는지 논증을 합니다. 물론, 같은 책을 읽어도 다른 견해를 가질 수 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스스로 판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책은 이순신에 대해서 체계적으로 알고 싶거나, 아이들에게 이순신을 가르쳐주고 싶은 분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징비록>, <난중일기>도 함께 읽으면 좋겠죠. 



만약, 이순신이 없었다면 조선 한반도가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을 해봅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전라좌수영과 전라우수영을 무너뜨리고, 충청도 연안을 거쳐 평양까지 올라왔다면, 조선은 무너졌을 것입니다. 또한, 왜군은 전라도 곡창 지대를 점령함으로써 군량을 확보했을 것이고, 더 많은 왜군이 조선으로 넘어와서 조선 8도를 점령하고, 결국 조선은 멸망했을 것입니다. 선조는 명나라로 도망가거나 압록강에서 죽었을 것입니다. 명나라와 일본이 전쟁을 하고, 만약 일본이 패했다면, 다시 조선이 살아났을 지, 아니면 일본 대신 명나라가 조선을 지배했을지 알 수 없습니다. 위대한 한글도 없어졌겠죠.  


  

이순신 생애와 그의 발자취에 대해 저의 생각을 글로 쓰고 싶습니다. 

이순신을 다룬 영화, <명량>, <한산>, <노량> 영화를 다시 볼 생각인데, 영화를 보고 당시의 상황과 저의 생각을 써볼까 합니다. 아는 만큼 보이듯이 이번에 영화를 다시 보면 훨씬 재미있을 거 같네요.



2025.7.25 Ex. Libris HJK




대한민국에 이순신 연구자만 5,000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 P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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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일본이 남방 작전을 계획한 이유

2. 남방 작전의 목표

3. 인도차이나(베트남)

4. 싱가포르

5. 동인도(인도네시아 자바섬)

6. 필리핀(바탄 반도와 코레히도르섬)

7. 남방 작전 목표 수정

8. 남방 작전이 성공한 이유

9. 역사적 교훈


1. 일본이 남방 작전을 계획한 이유


1937년 7월 17일 루거우차오 총격전으로 중일 전쟁이 시작됩니다. 만주을 집어삼킨 일본군이 중국 북부로 진격을 하죠. 1938년 여름에 일본은 소련을 우습게 보고, 소련과의 접경 지역에서 충돌을 일으키지만, 5만 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면서 패배합니다. 러일 전쟁에서의 승리로 소련을 우습게 본 것이겠죠. 하지만, 소련은 러일 전쟁 당시의 러시아가 아니었습니다. 일본을 박살낸 소련군 지휘관이 주코프입니다. 그는 2차 세계 대전사에서 엄청난 유명인입니다. 나중에 소련의 영웅이 됩니다. 그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지만, 주제를 벗어나기 때문에 다음 기회로 미루겠습니다.

중일 전쟁이 시작되자 그동안 일본에게 석유를 제공하면서 우호적이었던 미국은 일본의 침략을 맹렬히 규탄합니다. 일본 입장으로는 당시 필리핀을 식민지로 가지고 있던 미국이 규탄할 줄은 몰랐습니다.

일본은 중일 전쟁을 빠른 시일내에 승리해서 중국 본토를 손에 넣으려고 했습니다. 임진왜란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꿈을 이루고자 했던거 같습니다. 하지만, 중일 전쟁이 쉽게 끝나지 않습니다. 엄청난 피해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항복을 하지 않고, 버티었습니다. 그로 인해 일본군 전력은 약해졌고 초조했습니다.

1939년 8월 23일 소련 스탈린은 독일 히틀러와 불가침 조약을 맺습니다. 그리고, 1939년 9월 1일 독일군 150만 명이 폴란드를 침공하고,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합니다.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과 전쟁이 돌입한 것입니다. 1939년 5월 10일 독일군은 프랑스로 진격전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한 달도 안돼 프랑스는 항복하고, 영국은 본토 섬으로 쫓겨납니다. 일본군은 독일군의 승리를 보고, 동남 아시아로 진격하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왜 그런 마음을 먹었을까요? 당시 동남 아시아는 서구 제국주의의 식민지로 전락한 상태였습니다.

인도차이나(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지였고, 동인도(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 식민지였고, 싱가포르는 영국 식민지였습니다. 필리핀은 미국 식민지였죠. 독일군에게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 모두 무너졌기 때문에 이들 식민지 점령은 손쉬워 보였습니다.

또한, 동남아시아는 석유 및 기타 자원들을 얻을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이미 대만, 중국 남부 해안까지 진출한 일본군에게는 군침 나는 곳이었죠.

1940년 9월 27일 삼국 동맹이 체결됩니다. 독일, 이탈리아, 일본이 서로 동맹을 맺습니다.

1941년 6월 22일 독일군은 국경을 넘어 소련으로 쇄도합니다. 그리고 엄청난 성과를 내죠. 소련군 비행기 1200대, 전차 3000대가 박살납니다. 일본은 고민합니다. 소련 시베리아로 쳐들어갈까 아니면, 남방 작전을 승인할 것인가? 영국, 프랑스, 소련이 무너지고 있으니 미국은 동남 아시아에 관심이 없을 것이라고 판단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동남아시아는 일본이 탐내는 석유 등의 자원이 풍부했습니다.


그러나, 남방으로의 진출을 결정한 일본군을 고민하게 만든 3가지가 있었습니다.



2. 남방 작전의 목표


어디까지나 남방 작전은 일본의 국방력을 지탱하기 위한 자원 공급처를 확보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를 가능하게 하려면 3가지를 먼저 해결해야 했습니다.


첫번 째 진주만이 있는 미국 태평양 함대

두번 째 필리핀 클라크 기지에 있는 미국 극동항공대

세번 째 싱가프르에 있는 영국 Z기동부대


동인도 자바섬에도 영국 함대 중순양함 1척, 미국 함대 중순양함 1척, 네덜란드 경순양함 2척 및 구축함들이 있었지만, 싱가포르에 배치된 영국 함대 중순양함 2척을 포함한 Z기동부대가 주력이었습니다.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한다고 해도 미국과 전면전을 하려는 마음은 없었습니다. 그저 우리도 이 정도의 힘이 있으면 동남아는 일본이 차지할 것이고, 미국은 개의치 말라는 의도였죠. 미국 본토에서 태평양을 건너서 아시아까지 오기에 시간이 오래 걸리니 그전에 남방 작전을 성공하고, 국방력을 키워 놓자는 생각이었습니다.

이걸 가능하게 하려면 중간 기착 지점인 하와이 진주만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던 거죠.

진주만 공격은 남방 작전을 위한 준비였다고 판단되어 남방 작전에서는 다루지 않으려고 합니다.

일본군은 인도차이나를 침공해서 영국이 중국을 지원하는 루트를 막고, 필리핀에 주둔한 극동항공대와 싱가포르에 주둔한 Z기동부대를 무력하시키고, 동인도 자바섬을 점령해서 석유를 차지할 생각이었습니다. 당시 일본군의 엄청난 군사력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영국, 네덜란드, 미국은 이런 일본군의 병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고, 이에 대한 피해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3. 인도차이나(베트남)


일본군에게 인도차이나(베트남)은 손쉬운 먹이감이었습니다. 이미 프랑스는 독일에게 점령당하고, 괴뢰 정부인 비시 정부가 있었으니 식민지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었죠.

1940년 9월 22일 일본군은 인도차이나 북부로 진출합니다. 비시 정부에게 중국을 지원하는 영국 보급로를 막기 위함이라고 말하죠. 비시 정부는 아무 힘이 없었습니다. 1940년에 일본은 중국을 항복시키지 못합니다. 그리고, 1941년 7월 24일 일본군은 방향을 바꾸어 인도차이나 남부로 향합니다. 그리고, 사이공을 점령합니다. 2일 뒤 미국은 일본군과 전쟁을 시작하지 않지만, 미국내 일본 자산을 모두 동결합니다. 일본으로 수출되는 석유도 중단되죠. 그동안 제국주의를 지향하면서 우호한 관계였던 미국과 일본의 사이가 틀어집니다.


4. 싱가포르


1941년 12월 7일 일본군은 3가지 작전을 진행합니다.

하와이 진주만을 폭격하고, 말레이 반도로 침공하고, 필리핀 클라크 기지를 폭격합니다. 일본군의 전력이 대단했습니다. 말레이 반도를 침공한 이유는 바로 싱가포르 였습니다. 싱가포르는 영국의 방어 기지이고, 영국군 Z기동함대가 배치된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싱가포르를 바로 공격하지 않고, 말레이 반도로 공격했을까요? 싱가포르는 강력한 요새화된 곳이었는데, 웃긴 것이 모든 대포가 해안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고정식이라서 육지 방면으로 돌릴 수도 없었습니다. 처칠이 이 사실을 알고 어이없어 했다고 하네요.

1941년 12월 10일 순양 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스와 리펄스는 싱가포르를 벗어나 말레이 반도 동쪽으로 북상하다가 일본군 뇌격기와 폭격기에 의해 격침 당합니다. 일본군은 순양 전함이 항공기에 의해 격침당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고 합니다. 이 교훈을 얻었다면, 항공모함 위주로 해군을 강화했어야 하는데, 다행스럽게 일본 해군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항공기의 지원을 받지 못한 전함의 운명은 잔인했습니다.

1942년 2월 15일 영국군 사령관 퍼시벌이 일본군 사령관 야마시타에게 항복함으로써 싱가포르도 일본군에게 넘어갑니다.


5. 동인도(인도네시아 자바섬)


동인도는 네덜란드의 식민지였습니다. 네덜란드 본토는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1941년은 독일군에 의해 점령당한 상태였죠. 동인도의 중요한 섬은 자바섬으로 반둥이 중심지였습니다. 이 섬은 석유가 많아서 일본군이 원하는 섬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 있는 연합군 함대를 무찌르면 동남아시아 주변에서 일본 해군을 위협할 존재가 없어집니다.

당시 연합군 해군의 병력 규모는 네덜란드 함대의 경순양함 2척, 구축함 2척, 영국 함대의 중순양함 1척, 구축함 3척, 미국 함대의 중순양함 1척, 구축함 5척, 호주의 경순양함 1척이었습니다. 적지 않은 병력이었기 때문에 연합군은 자바섬 상륙을 저지하기 보다는 바다에서 승부를 낼려고 했습니다.

연합군 해군과 처음 맞붙은 일본 제3함대 제5전대는 중순양함 2척, 경순양함 2척, 구축함 14척으로 대등했습니다. 하지만, 제5전대가 자바섬 동부로 접근하는 중에 자바섬 서부로 접근하는 일본군 해군이 있었습니다. 항모 1척, 중순양함 4척, 경순양함 3척, 2개 구축함 전단이 수송선 56척을 호위하면서 접근하고 있었습니다.

일본 제5전대는 새롭게 설계된 어뢰와 야간 작전의 성공으로 연합군 해군에 타격을 가했습니다. 경순양함 2척, 구축함 3척를 격침 시킵니다. 연합군 함대 사령관도 배와 함께 운명을 같이 하죠.

호주로 도망간 미국 구축함 4척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제5전대에 합류한 서부 방면 일본 해군과 항공기들에 의해 각개격파를 당합니다.

1942년 2월 26일 일본군은 자바섬을 점령되고, 동남아시아 재해권을 완벽하게 소유합니다.


6. 필리핀(바탄 반도와 코레히도르섬)


본국에서 지원을 받지 못하는 영국과 네덜란드에 비해 필리핀에 주둔한 미군은 유리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드넓은 태평양이 있지만, 중간 지점인 하와이 진주만에 미군의 태평양 함대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일본은 필리핀을 공격하기 위해 후방에 위치한 진주만에 타격을 가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미군의 지원을 막기 위함이었습니다.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습에서 10시간 뒤에 일본군은 필리핀 미군 클라크 공군 기지가 폭격합니다. 당시 미국 극동 사령관인 맥아더는 대만을 먼저 폭격하자는 미군 극동항공대 사령관의 요청을 거절합니다. 맥아더는 부관을 통해 적대적인 행위를 하지 말라는 답변을 합니다. 대만에 대한 정찰도 안했기 때문에 효과가 없을것이라고 명령합니다. 하지만, 대만에는 일본 항공대가 배치되어서 필리핀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클라크 기지에 있던 B-17 중폭격기, 전투기, 수색기 등이 모두 파괴되고, 미군 극동항공대도 무너집니다.

일본군의 시간 순서로 보면, 진주만에 주둔한 태평양 함대 공격, 필리핀에 주둔한 극동항공대를 공격해서 후방에서의 지원을 끊고, 동남아시아의 연합군 해군을 지원할 항공대를 제거한 것이었습니다.

1942년 1월 1일 일본군은 마닐라를 점령합니다.

맥아더는 코레히도르섬으로 후퇴하고, 바탄 반도에 방어선을 구축합니다. 코레히도르섬은 해상으로부터 마닐라만을 보호하는 군사 기지였습니다. 미군이 바다를 통해 지원한다면 꼭 필요한 중요한 섬이었죠.

약 1만 5천명 미군과 6만 5천명의 필리핀군은 바탄 반도에 배치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들밖에 없었습니다.

1942년 3월 10일 맥아더는 호주로 도망갑니다. 모든 부대는 남겨놓고, 가족과 측근만 데리고 빠져나갑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다는 말도 합니다. 하지만, 당시 필리핀 주둔 미군이 모두 죽거나 포로가 될 때까지 그는 오지 않습니다. 이 시점에서 싱가포르, 자바섬이 모두 일본군에 넘어갔기 때문에 미군 본토에서 지원 병력이 오지 않으면, 필리핀 미군의 운명은 정해져 있었습니다. 더구나 1942년 1월 루스벨트는 처칠과 만나 영국을 지원하기로 합니다.

1942년 4월 9일 일본군이 바탄 반도를 점령하고, 1942년 5월 8일 미군은 항복합니다.


7. 남방 작전 목표 수정


남방 작전의 성공은 상당히 고무적이었습니다. 당초 계획은 동남아시아의 천연자원을 장악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제한적이고, 방어적인 역할을 해야 하지만, 일본군은 오스트레일리아, 하와이, 인도까지 넘볼 생각을 합니다. 인도양으로 진출해서 독일군과 손을 잡는다는 생각도 합니다. 오스트레일리아를 점령하기 위해 미군의 보급로를 끊어야 한다는 생각도 합니다. 하지만, 독일군은 인도양 진출보다는 현재의 아제르바이잔을 지나 이란을 점령하는 것을 원했습니다. 역시 석유 때문이었죠. 독일 해군은 영국 해군에 열세였기 때문에 인도양까지 진출하는 것은 무리였을 것입니다.

일본군은 인도 진출을 포기하고, 사모아, 피지, 뉴칼레도니아 등을 점령해서 오스트레일리아를 고립시킨 후에 일본 육군을 상륙시켜 오스트레일리아를 점령할 계획을 세웁니다. 하지만, 야마모토 제독은 미군 태평양 함대를 유인하기 위해 태평양 미드웨이를 공격하자고 합니다. 미군에 직접적인 타격을 가하자는 생각이었습니다.

두 가지 계획이 서로 대립될 때 갑자기 도쿄가 공습을 당합니다.  

일본 본토에 접근한 미군 제16기동부대에 속한 항모 호넷에서 이륙한 16대의 B-25 폭격기가 일본을 공습합니다. 미국의 자존심을 세우고, 국민들을 단결시키기 위한 작전이었습니다. 최초로 일본 본토가 공격 당하니 충격이 컸습니다. 모든 일본인의 지지를 받고 있던 군부가 공습 사태를 심각하다고 판단합니다. 그리고, 미드웨이 공격을 감행하기로 결정합니다. 제2차세계대전의 가장 유명한 전투 중의 하나인 미드웨이 해전이 이렇게 탄생합니다.


8. 남방 작전이 성공한 이유


주관적인 관점에서 나름대로 생각했습니다.

일단, 일본의 군사력과 준비가 뛰어났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중국과 힘든 전투를 하고 있었지만, 육군의 피해에 비해 공군과 해군은 작았습니다. 동시 목표를 한 번에 타격할 수 있다는 저력을 보여 주었죠. 당시에 다수의 항모를 운영할 수 있는 군사력, 경제력을 갖춘 나라가 일본이었습니다.

제국주의에 의해 식민지로 있던 동남 아시아 나라들이 조선보다 처지가 낫다고 해도 식민지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식민지에서 군대를 조직해도 일본군의 정신을 따라갈 수 없었습니다. 유럽과 북미 본토에서 파병된 병력들은 식민지 관리를 위함이지 전쟁을 하기 위한 규모는 아니었습니다. 물론, 일본은 계속 침략의 야욕을 알 수 있게 하는 시그널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영국, 미국은 계속 외면했죠. 왜 그랬을까요? 자신들이 살고 있는 본토가 아니고, 식민지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9. 역사적 교훈


조선이 세도 정치, 당파 정치로 나라를 말아먹고 있을 때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근대화를 성공합니다. 일본과 미국은 경제적 파트너였고, 인적 교류도 활발했습니다. 하지만, 영원한 우방은 없습니다. 각자 이익에 의해 행동합니다.

미국은 필리핀을 지켜준다는 말을 계속 했습니다. 필리핀이 일본에게 항복한다고 해도 하지 말라고 하죠.

남의 나라가 우리의 영토와 주권을 지켜주지 않습니다. 대만이 중국의 침공을 걱정하면서 정작 대만 국민들은 지킬 생각이 없는거 같습니다. 석유 수입을 위한 루트 때문에 한국과 일본이 대만에 관심이 있는 것이지 이 루트만 보장된다면 대만이 어느 나라에 속하던 상관이 없습니다. 물론, 중국을 신뢰할 수 없으므로 개인적으로 대만이 중국의 일부가 되는 것을 반대합니다.

역사를 가르치는 유명한 강사 한 명이 자기를 건드리면 미국과 일본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고 큰소리를 쳤다고 합니다. 그는 역사를 보면서 대체 무슨 생각을 한건가요? 이런 수준의 사람이 역사를 가르친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갑니다. 아마 미국의 52번째 주가 되거나 일본의 한 현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역사를 보고, 배우는 것만으로 부족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역사를 생각하고, 사색하고, 올바른 판단을 해야 합니다. 현재 우리의 고민이 이전 역사에 다 나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계속 동일한 실수를 하고, 그로 인해 역사는 반복되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근현대사 역사를 보면 참으로 암담하고,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역사를 직시해야 합니다. 일본이 어떻게 힘을 키워서 제국이 되었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역사에서 증명된 그들의 잘못된 행위와 실수를 기억해야 합니다. 역사가 항상 우리 곁에 있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책 제목 : 일본 제국 패망사

지은이 : 존 톨런드

옮긴이 : 박병화/이두영

펴낸 곳 : 글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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