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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헤로도토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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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역사책인 역사를 읽었다. 이 책은 유시민의 <거꾸로 읽는 세계사>를 읽으면서 알게 되었다. 약 1000페이지에 육박하는 두꺼운 벽돌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면서 느꼈던 성취감은 특별했다. 최재천 교수님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두껍고 어려운 책을 한 권 읽으면 자신감이 생긴다. 성취감과 함께 찾아온 자신감은 나를 다시 두껍고 어려운 책으로 이끌 것이다.


 

역사는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을 서술한 것이다. 일기나 에세이처럼 읽어도 괜찮다. 하지만, 나는 역사를 읽을 때 반드시 두 가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지리에 대한 파악이고, 하나는 맥락을 파악하는 것이다. 인간들이 끊임없는 선택을 통해 역사를 만드는데, 이런 선택을 한 이유를 이해하려면 지리와 앞서 일어난 일, 현상들에 대한 파악이 중요하다. 역사책을 읽을 때 지도를 펼쳐 보고, 메모장에 플로우 차트같은 기록이 필요하다. 전후 맥락을 파악하기 위해서 인터넷 검색도 필요하다. 역사책을 읽는 재미를 알기 위해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접근이 중요하다. 이렇게 말하면서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 많이 부족하다.


  

헤로도토스의 <역사>를 읽는 것은 쉽지 않다. 쉽지 않은 이유 중의 하나가 책에서 쓰인 명칭이 현재 쓰는 명칭과 다르다는 것이다. 지역, 단위, 장소명 등이 당시의 언어로 표현했기 때문에 별도의 매칭 테이블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헬라스가 그리스를 통칭하는 말인지를 알 수 없다면 내용을 이해하기 어렵다. 지리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는데, 지도를 봐도 당시의 명칭으로 표기가 안되어 있어서 매칭 테이블을 통해 현재의 지역을 지도에서 찾아야 한다. 뤼디아 왕국의 수도였고, 페르시아에 병합된 중요한 지역이었던 사르데이스는 현재 튀니키예 마니사주 샤르트이다. 다행히 <역사> 장의 지도가 있다. 당시의 지역명으로 표기된 지도를 통해 전체적인 조망이 가능하지만, 책에 언급된 모든 지역과 도시를 포함하고 있지는 않다.






이 책의 저자인 헤로도토스는 기원전 485년에 태어났다고 한다. 처음에 <역사>가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에 대한 역사책으로 알았다. 그래서, 당연히 헤로도토스가 그리스인이라고 생각했는데, 책을 구매 후 읽어 보니 그는 소아시아 서남부 카리아 지방의 할리카르낫소스 시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이곳은 현재 튀르키예 남서부 물라주에 있는 보드룸 도시이다. 당시 이오니아 지방은 그리스 문화권이었기 때문에 헤로도토스도 그리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이다. 이오니아는 에게해에 접한 튀르키예 남서부 지역를 칭하는 말이다.


 

헤로도토스는 방대한 기록을 남겼다.

헤로도토스가 대단한 저술가라고 말할 수 있다. 기원 전 시대에 기록물이 있던 것도 아니고, 교통이 편한 것도 아니지만, 많은 지역을 직접 방문하고, 탐문하면서 기록을 남겼다는 것은 놀랄 일이다. 북아프리카, 이집트, 에티오피아, 시리아, 이라크, 이란, 튀르키에, 불가리아, 그리스, 시칠리아 등을 여행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여행하면서 기록하고, 듣고, 정리하고, 후대에 글로 남겼다는 점은 존경스럽다. 물론, 헤로도토스가 남긴 많은 내용들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하나의 사건에 서로 다른 내용을 들었다면, 그것들을 밝히고, 자신의 견해를 남긴다. 헤로도토스는 헬라스 도시국가들과의 전쟁의 도화선이 된 이오니아 반란을 다루기 전까지 550페이지 정도를 페르시아에 할당했다. 페르시아에 대해 적대적이지 않고, 객관성을 유지한다. 영화 300에서의 어처구니 없는 페르시아의 묘사나 시오노 나나미의 그리스, 로마에 대한 지나친 칭송보다 헤로도토스가 더 객관적인 저술가라고 생각한다.

헤로도토스의 서술이 정확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 당시에 리뷔에(아프리카 리비아) 내륙의 기후, 네일로스강(나일강)의 기원, 아이귑토스와 아이티오피아의 관계 등을 설명했고, 각 민족의 문화 및 생활 등에 대해 소개를 했다. 참으로 대단한 열정을 소유한 뛰어난 저술가라고 생각한다.

 


이제 페르시아의 발자취를 따라가보자

페르시아의 퀴로스가 메디아와 뤼디아를 멸망시키고, 페르시아 제국을 만든다. 그리고, 퀴로스의 아들인 캄뷔세스가 즉위 후 바뷜론, 이오니아, 소아시아, 아이큅토스를 침공해서 점령한다. 아이큅토스는 오늘날의 이집트이다. 캄뷔세스가 폭정을 일삼자 다레이오스가 반란을 일으켜 페르시아 왕이 된다. 다레이오스는 스퀴티스족을 징벌하기 위해 헬레스폰토스(현재 다르다넬스 해협) 해협을 건너 트라케 지역을 넘어서 현재의 우크라이나까지 진출가지만, 유목민인 스퀴티스는 일정한 거처가 없었기 때문에 정벌은 실패한다. 그후 이오니아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아테나이가 지원 병력을 파견함으로써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전쟁이 시작된다.

당시 페르시아는 엄청난 제국이었고, 아테나이, 스파르타 등은 도시국가일 뿐이었다. 페르시아는 그리스 도시 국가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었지만, 아테나이를 비롯한 헬라스 도시국가들의 페르시아의 속주 지역인 이오니아에 자꾸 관여함에 따라 페르시아 제국의 힘을 보여주기로 한다.

 


페르시아의 정복은 피지배 국가를 멸망시키는 것이 아니었다. 항복을 하면, 속주로 만들어서 세금을 부과했고, 세금만 낸다면 과도한 간섭을 안했다. 물론, 페르시아가 전쟁을 할 경우에는 속주에서 군대를 제공해야 했다. 만약, 항복을 안하고 버틴다면 쳐들어가서 함락하고, 피지배국가의 요인들을 모조리 숙청한 후 그들의 피지배층은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도록 했다. 헬라스 도시국가들은 자유를 위해서 페르시아와 전쟁을 했다고 하지만, 그들도 노예가 있었고, 신분제도가 있었다. 어쩌면 지배 계급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함이지 민중의 자유를 위해서 페르시아와 전쟁을 했을까?

 


사실 페르시아의 왕, 다레이오스는 아테나이의 존재를 몰랐다. 이오니아 지역의 밀레토스가 반란을 일으켰고, 이를 도와준 것이 아테나이라고 들었을 때 비로소 알았다고 한다. 아테나이가 사르데이스까지 쳐들어 오자 다레이오스는 아테나이를 반드시 굴복시키겠다는 다짐을 했다. 사실 아테나이같은 도시국가가 페르시아와 전쟁을 하겠다는 생각 자체가 무모한 짓이기 때문에 아테나이는 전면전을 할 생각이 없었고, 전쟁을 해도 이오니아 지역에서 국지전을 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누구나 그럴 듯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 막상 당하기 전에는 말이다.

 


다레이오스는 이오니아 반란을 평정하고, 아테나이를 정복 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다. 이들이 마라톤 평야에 상륙하면서 기원 490 1차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이 시작된다. 페르시아 군은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지만, 그들은 경보병, 기마병 위주였고, 다양한 피지배민족으로 구성된 군대였다. 페르시아 정예군인 불사부대도 있었지만, 전체 군대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낮았다. 페르시아군의 단점은 전투에서 질거 같다는 신호가 보이면, 피지배민족의 군대들은 도망갈 생각만 한다는 것이었다.

헬라스 도시국가는 중보병 위주였고, 긴 창과 방패를 활용해서 페르시아와 대적했다. 마라톤에서 페르시아군과 대적한 아테나이군은 10명의 지휘관이 이끌고 있었다. 그중에서 10번 째 지휘관인 밀티아데스가 주로 언급되는 것을 보니 그가 주도적으로 전쟁을 이끌었던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페르시아와의 전투를 이야기할 때 헬라스 지휘관들의 뛰어난 역활을 이야기할 것이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후 그들은 모두 모함을 받거나 시기를 당해서 쫓겨난다. 힘들 때는 단합하고, 지도자를 지지하지만 먹고 살만하면 자기들끼리 싸우면서 권력 투쟁을 하는 헬라스 도시국가의 모습에서 그들의 미래를 엿볼 수 있다.

마라톤은 헬라스 도시국가 중 아테나이와 인근 도시 국가인 플라타이아이만 참전한 전투였는데, 예상외로 헬라스의 중보병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는 전투였다. 페르시아에서 그리스 본토까지 거리는 결코 가깝지 않기 때문에 페르시아군은 싸울 수 있는 병력이 더 있었지만, 페르시아로 돌아갔다. 잘못하면 퇴로가 끊겨서 더 많은 피해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다레이오스의 아들인 크세르크세스가 아버지의 복수를 하기 위해 4년 동안 준비한 페르시아 침공군의 규모는 약 120만 명, 약 1200 척의 함대였다. 헤로도토스는 비교적 자세하게 각 민족에서 보낸 군대의 규모를 설명했다. 물론, 전체 인원이나 동원된 함선의 수가 정확하다고 볼 수는 없다. 페르시아가 당한 수모를 되갚기 위해 크세르크세스는 직접 참전하기로 하고, 육군과 수군 양용작전을 펼쳐서 그리스를 침공하기로 한다. 헬레스폰토스 해협에 수교를 설치해서 말을 타고 건넌 후에 트라케, 마도니아, 텟살리아를 거쳐 앗티케로 쳐들어가는 계획이었다. 동시에 함대는 바다로 육군과 보조를 맞추어 에게해의 그리스 섬들을 거치지 않고, 해안 지대를 따라 그리스 본토로 진입했다.   

 


페르시아 해군도 다민족으로 구성된 군대였다. 이들이 병참을 맡았다고는 볼 수 없다. 왜냐하면, 페르시아는 점령 지역에서 병참을 해결했기 때문이다. 지역에 거주하는 민족을 굴복시키고, 그들에게 병참 지원을 강요했기 때문에 굳이 배를 통한 병참 지원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면 왜 페르시아에게 해군이 필요했을까? 페르시아 제국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머나먼 땅으로 진군했고, 에우로페(현재 유럽)로 넘어오기 위해 헬레스폰토스 해협에 수교까지 설치했다. 만약, 전쟁에서 진다면 후퇴를 해야 하는데, 그리스 연합 해군이 먼저 헬레스폰토스 해협으로 가서 수교를 끊어버린다면, 그들의 퇴로는 막힐 것이다. 바다에서 그들을 지켜 줄 군대가 필요했다. 페르시아가 그리스 본토로 깊숙이 들어올 수록 해군의 지원은 필수적이었다.

 


반대로 그리스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페르시아 육군을 모두 무찌르지 않아도 그들을 후퇴시킬 수 있는 방법은 바다에서의 승리였다.

앞서 마라톤 전쟁의 지휘관이면서 승리를 이끈 밀리아데스를 언급했다. 10 기원 480년에 시작된 2 페르시아 전쟁은 명의 영웅이 나타나서 헬라스를 지켜낸다. 아테나이인 테미스토클레스는 전쟁이 있기 전부터 해군이 절대적으로 중요하고, 해전을 통해 페르시아를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300척의 함대를 조직했고, 해군을 훈련시켰다. 육지를 빼앗긴다고 해도 많은 섬들로 구성된 그리스 앞바다에서 페르시아를 물리친다면 페르시아는 물러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때 헬라스 연합군 총대장은 스파르테 출신 지휘관이었는데, 함대를 물리고, 좁은 코린토스 지협을 방어하거나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물러나서 페르시아군을 대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테미스토클레스의 설득으로 역사적으로 유명한 살라미스 해전이 발생할 있었다.

정확한 비교는 무리지만, 임진왜란 해군을 해체하고, 육지에서 전투하라는 지시를 조선군 총대장 권율과 바다를 포기하면 조선은 끝이다라고 주장하면서 바다를 지킨 이순신을 떠올리게 한다. 한양을 점령하고도 승리하지 못한 왜군처럼 아테나이 도시를 점령하고도 끝내 후퇴할 밖에 없었던 페르시아군의 상황은 비슷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살라미스 해전은 조선 수군과 이순신의 많은 전투 업적에 비할 수는 없지만, 페르시아 숙주로 전락할 있었던 헬라스를 지켜낸 전투였다.

 


영화 300 많은 사람은 스파르테의 영웅 레오니다스를 기억할 것이다. 그는 테르모퓔라이 전투에서 끝까지 자리를 지키면서 페르시아 군과 싸우다가 장렬한 전투를 맞이한 스파르테의 왕이었다. 영화에서 크세르크세스를 마치 원시 종교의 제사장처럼 묘사한 것을 보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당시 엄청난 부와 권력을 가진 제국은 페르시아였고, 크세르크세스의 위세는 엄청났다

페르시아 육군은 좁은 협곡인 테르모퓔라이로 진군했고, 해군은 아르테미시온 곶에서 헬라스 연합해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페르시아 육군은 불사부대 1 명을 포함한 20 명이었고, 헬라스 연합군은 1 명이었다고 한다. 좁은 협곡을 막은 채로 번의 전투에서 페르시아를 물리쳤던 헬라스 연합군은 페르시아가 협곡의 우회로인 좁은 샛길을 발견해서 자신들을 포위당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고, 대부분의 연합군은 후퇴했지만, 스타르테군은 남기로 했다. 레오니다스는 남았을까? 헤로도토스는 레오니다스 자신이 남아서 장렬히 전사하면, 명예를 얻고, 스파르테에게 이익이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견해에 동조한다. 그의 희생을 통해 페르시아의 예봉을 무디게 하면서 페르시아군에게 약간의 두려움과 긴장감을 유발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영화 300에서 심한 눈병에 걸려서 전투를 못하므로 스타르테로 돌아간 사람이 나온다. 그의 이름은 아리스토데모스인데, 스타르테로 돌아온 스타르테인들에게 치욕과 불명예를 받지만, 1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용맹하게 싸워서 완전히 명예를 회복했다.

 


테르모퓔라이 전투에서 헬라스 연합군이 패배한 헬라스 연합 해군은 살라미스로 후퇴한다. 그리고, 아테나이 도시를 비운다. 페르시아 군대가 아테나이로 무혈 입성하고, 도시를 파괴한 헬라스 연합 해군을 격파할 계획을 세운다. 헬라스 연합 해군과 맞붙지 말고, 육지를 점령한 채로 헬라스 도시국가 간의 분열을 획책함으로써 도시국가들이 스스로 무너지도록 하자는 현명한 의견을 제시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미 테르모퓔라이 전투에서 승리하고, 많은 헬라스 도시국가를 점령한 크세르크세스는 전쟁에서 가장 위험한 자만에 빠져 있었다.

 


헤로도토스가 헬라스를 구원한 것은 아테나이인들 때문이고, 그들이 이긴 살라미스 해전을 높이 평가한다. 테미스토클레스는 뛰어난 지휘관이었지만 개인적으로 돈을 많이 밝혀서 사적인 재산을 축적했다는 말도 덧붙인다. 페르시아 해군의 주력인 페니키아 해군이 무너지면서 페르시아 군대의 최대 약점인 전투에서 같으면 전장에서 이탈하는 피지배민족의 군대의 도주는 여지없이 나타났다. 해전을 지켜보던 크세르크세스는 많은 병력의 육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페르시아로 돌아갈 길이 끊어질 있다는 불안감에 부하인 마르도니우스에 많은 병력을 맡기고, 자신은 페르시아로 돌아간다. 당시 최고의 제국을 가진 왕으로서 번의 전투에서 패배했다고 집에 가버리는 모습이 황당하지만, 어찌 보면 리스크 관리 차원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살라미스 해전 기원 479년에 헬라스 연합군이 육지에서 남아 있던 페르시아군을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무찌른다. 이때 헬라스 연합군 총사령관은 스타르테인 파우사니아스이다. 그는 레오니다스의 조카였는데,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삼촌의 복수를 셈이었다. 이제 헬라스 전역에서 페르시아 군은 자취를 감추었고, 헬라스 연합해군이 이오니아 지역의 페르시아 해군의 본거지인 뮈칼레를 공격해서 페르시아 해군을 무찌른 북진해서 헬레스폰토스 해협의 수교를 제거하고, 보스포로스 해협의 뷔잔티온까지 함락시킴으로서 페르시아가 다시 헬라스를 넘볼 없도록 만들었다.

 


그리스 페르시아 전쟁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아시아로부터 유럽을 지킨 최초의 전쟁, 그리스 민주주의를 지킨 전쟁, 그리스가 지중해의 패권을 차지하게 만든 전쟁 여러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과연 그리스는 승자였을까? 전쟁에서 이겨서 그리스를 지켜냈지만, 그들은 몰랐다. 그리스의 식민지였던 시칠리아 북쪽에서 로마가 점차 힘을 키우고 있다는 , 그리고 마케도니아에서 엄청난 영웅이 나타날 것이라는 점을 몰랐다. 만약 알았다면, 그리스 도시국가 간의 분열과 전쟁을 안했을까? 그들은 강대한 제국이었던 페르시아를 물리치고, 자기들끼리 싸웠을까?

그건 하나의 책을 통해 밝혀질 것이다. 헤로도토스와 함께 뛰어난 역사가로 칭송받는 투퀴디데스를 만나볼 차례이다.





2025.2.24 Ex. Libris HJK

페르시아 학자들에 따르면, 헬라스인들과 비헬라스인들이 반목하게 된 것은 포이니케인들 탓이라고 한다.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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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이야기 1 - 민주주의가 태동하는 순간의 산고 그리스인 이야기 1
시오노 나나미 지음, 이경덕 옮김 / 살림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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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인 시오노 나나미에 대한 나의 평가는 그리 좋지 않다. 시오노 나나미의 제국주의를 찬양하는 듯한 행동이나 언행에 대해 비판하는 입장이다. 하지만, 한쪽으로 치우쳐진 그녀의 역사 생각에 대한 비판과 달리 그녀의 글은 재미있고, 잘 읽힌다. 이해하기 쉽게 쓰면서 풍부한 지도와 체계적인 전개는 칭찬할 만 하다. 물론, 그녀의 글에 대한 개인적인 평가이다.


이 책의 표지에 "민주주의가 태동하는 순간의 산고" 라는 글이 적혀 있다. 서구 문명에서의 그리스는 엄청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민주주의 뿐만이 아니고, 철학과 예술을 발전시키고, 동양에서의 침략을 막아내었다. 당시에 훨씬 발전한 동양 세력의 침략을 막아내면서 오늘날의 유럽이 있도록 도와준 것이 그리스이다.
그리스는 권력 분산과 시민의 참여를 통해 민주주의를 발전시켰지만, 민주주의의 폐해도 잘 보여주었다. 파벌 정치, 반대파 숙청, 계급 사회, 모함, 다수결의 문제점 등을 고스란히 표출시켰다.

1차 페르시아 전쟁의 마라톤 전투를 승리로 이끈 아테네 사령관 밀티아데스를 아테네에서 추방한 사람들은 아테네 시민들이었다. 2차 페르시아 전쟁의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300 인(부상자 1명이 스파르타로 돌아갔으니 실제로 299명이 맞다.) 의 스파르타 군인과 운명을 함께 한 레오니다스를 기억하는가? 그의 조카인 파우사니아스가 총사령관이 되어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페르시아 군을 물리치지만, 그 역시 스파르타 권력자들의 모함을 받아 전쟁이 끝난 후 죽음을 당한다. 2차 페르시아 전쟁의 살라미스 해전을 승리로 이끈 아테네의 영웅인 테미스토클레스도 모함을 받아서 죽을 뻔 했지만, 페르시아로 넘어가서 그리스-페르시아 평화에 이바지한다. 나라가 위급할 때는 존경하면서 열광하지만, 나라의 위기가 없어지만 바로 돌변하는 사람들이 그리스 시민들이었다. 물론, 그리스 시민들을 이용해서 권력을 탐한 소인들이 문제의 원인이지만, 그리스 시민들을 그만큼 이용하기 쉬웠다는 말이다.
그리스의 많은 영웅들이 있지만, 테미스토클레스를 최고 중의 한 명으로 생각한다. 아테네를 지키려는 열정, 전쟁을 준비하는 그의 자세, 스스로 물러날 줄 아는 지혜 등 배울 점이 많다. 페르시아 침략을 맞서 싸우기 위해 아테네에서 200 척의 배를 준비하고, 페르시아의 병참을 끊고, 해전에서 승부를 내야 한다는 그를 보면 우리 나라의 영웅인 이순신 장군이 생각난다. 하지만, 테미스토클레스를 모든 전투를 승리로 이끈 이순신 장군과 감히 비교할 수는 없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현재는 어떨까? 정치와 언론에 의해 국민들이 얼마나 이용당하기 쉬운지 알 수 있는 사례를 찾기는 어렵지 않다. 그리스 시민들도 자신들은 똑똑하고, 민주주의 시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도 마찬가지 아닐까? 하지만, 위기가 찾아왔을 때 그리스 시민들은 뭉쳐서 싸웠다. 그리스를 침공한 페르시아에 맞서서 모든 그리스 도시국가는 한 팀으로 싸웠다. 서로 경쟁하던 정치인들도 함께 힘을 모았다. 만약, 위기가 찾아왔을 때 조차 위기를 인식하지 못하고, 올바른 판단을 하지 않는다면, 그 나라는 쇠퇴할 것이다. 국가가 나에게 해준 것이 없다고 매번 비난하고, 불만을 제기해도 국가가 당신을 위해 해주는 것은 없다. 왜냐하면, 정치에 관심이 없는 당신을 신경 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 앞에 놓인 중요한 선택의 순간이 찾아오고 있다. 무엇을 선택할 지는 각자의 자유이지만, 부디 후회 없는 선택을 하기를 바란다. 결국, 각자의 선택이 각자의 삶에 영향을 끼칠 것이다.


이 책은 페르시아 전쟁까지 그리스 역사를 담고 있다. 시오노 나나미의 필력에 의해 상당히 스피드하게 읽혀진다. 전쟁의 여러가지 면을 다각적으로 쉽게 설명하고, 적절하게 나오는 지도로 인해 그 당시 그리스를 상상하면서 읽었다. 바로 이어서 이 책과 함께 대여한 앙드레 보나르의 그리스인 이야기 1권을 읽을 예정이다. 비슷한 주제의 책을 연속해서 읽으면 그리스 역사에 대한 이해가 더욱 깊어질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유비소프트에서 나온 어새신 크리드 시리지의 오디세이 게임을 좋아하는데, 페르시아 전쟁 이후의 이야기라서 아쉽지만, 그리스 배경과 역사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강력 추천하는 게임이다. 그 당시 그리스의 모습을 디테일하게 접할 수 있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을 인용한다.


인간이란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는 한편으로 어처구니없이 어리석은 것을 저지르는 생물이기도 한다. 이렇게 성가신 생물인 인간에게 이성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철학이다. 반대로 인간의 현명함과 어리석음을 일괄해서 그 모든 것을 써가는 것이 역사이다. 이 두 가지를 그리스인이 창조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P.409)

2024.03.02 Ex. Libris HJK


그리스에서 4년에 한 번씩 열리는 경기의 개최지를 올림피아로 정한 것은 상당히 교묘한 선택이었다. -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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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읽는 세계사 - 전면개정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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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부제를 나름대로 만들어 보자면, "외면하고 싶은 불편한 역사"라고 생각한다. 20세기를 흔든 대사건 위주이지만, 우리가 피상적으로 한쪽만의 일방적인 입장으로 알고 있는 역사를 담대하게 마주 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책이 아닐까 싶다.


첫번 째 이야기, 드레퓌스 사건을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유대인을 탄압하고, 학대한 사람은 히틀러와 그의 추종자들로 알고 있지만, 사실 19세기부터 유럽 전반적으로 유대인을 차별했다. 

프랑스 육군 대위 알프레드 드레퓌스를 독일과 내통한 반역자로 몰아 1894년 12월 22일 드레퓌스 재판을 통해 유죄판결을 내린 사건이다. 당연하겠지만, 이렇게 끝났으면 더 이상 이야기가 전개되지 않았겠지만, 에밀 졸라를 비롯한 소수의 지식인들이 서로 연대하여 무죄를 주장하여 1906년 7월 12일 ~ 13일 무죄가 확정되었다.

나중에 드레퓌스는 무죄였음이 많은 증거와 진술을 통해 확인되었지만, 그가 억울하게 누명을 쓴 것은 단지 그가 유대인이었고, 많은 프랑스 언론과 시민들은 유대인에 대한 안 좋은 시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에밀 졸라 등은 탄압을 받기까지 했다. 박근혜 정권 때의 문화, 예술계에 적용된 블랙리스트처럼 말이다. 

유시민 작가는 이 사건을 지식인들의 연대를 통해 진실을 밝혀내고, 이런 기조를 20세기의 서막을 여는 중요한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그 정도까지 모르겠고, 유대인 차별이 독일만의 모습이 아니었고, 자유와 혁명의 프랑스도 지식인 탄압과 진실에 대한 외면이 만연했다는 사실이다. 

로마 교황청과 기독교인들은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인정하기 전 그들을 박해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중세기 내내 유대인을 박해했다고 한다. 자신들이 받은 박해를 그대로 유대인에게 전달하는 기독교인은 정말 올바른 것인가? 한 가지 더 어처구니 없는 것은 이렇게 박해를 받았던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에게 자행한 만행이다. 2천년 전에 살았던 땅이니 내놓고 꺼지라는 식의 사고 방식을 이해할 수 없다. 만약, 이런 생각을 모두 가지고 있다면, 지구는 전쟁으로 뒤덮일 것이다. 

박해를 받고, 박해를 주고, 20세기는 이런 행위의 반복적인 역사가 아닐까 싶다. 


홀로코스트라는 말은 본래 구약에서 희생물을 통째로 태워 버리는 특수한 종교의식을 가리키는데, 1948년 이스라엘공화국을 수립한 시온주의자들이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지칭하는 용어로 공식 사용했다. 유대인의 역사는 유럽 기독교 문명의 어둡고 살벌했던 뒷골목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배신한 '유다 이스카이옷'만 유대인이었던 게 아니다. 나사렛 예수, 어머니 마리아, 다른 제자와 사도 바울까지 신약의 주요 인물은 모두 유대인이었다. 기독교는 팔레스타인 유대교에서 갈라져 나온 종파였지만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공인하고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국교로 선포한 이후 로마제국의 권력과 결합해 유럽 전역에 퍼졌다. 유대인의 '죄'는 예수가 오기 2천여 년 전부터 지닌 종교적 신염을 버리지 않은 것이었다. (P.194)


유대 군대가 도시를 어떻게 파괴했는지는 영국군이 주둔했던 항구도시 하이파의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은 1947년 12월부터 산비탈에서 드럼통 폭탄을 굴려 내려보내고 도심에 박격포를 쏘았다. 영국군이 하이파를 물러난 1948년 4월 21일에는 도심을 집중 폭격하고 눈에 보이는 모든 아랍인에게 총을 쏘았으며 불에 타는 모든 것에 방화했다. 하이파 주민들은 물에 뜨는 것은 무엇이든 붙잡고 항구를 탈출했다. 밝혀 죽거나 버려진 아이들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유대 군대는 나사렛을 비롯한 다른 도시들도 비슷한 방식으로 파괴했는데, 주로 아랍인이 거주하던 예루살렘 동부까지 폐허로 만들었다. 동유럽 점령지의 유대인을 마을 단위로 학살한 나치 친위대 못지않게 잔인했던 것이다. (P.219)


역사에 대한 인식이 중요하다는 점을 사라예보 사건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사라예보 사건은 1914년 6월 28일 일요일에 보스니아에서 태어난 세르비아계 청년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와 황태자비인 조피를 암살한 사건이다. 이 사건이 유명해진 것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에 선전 포고한 구실을 제공했고, 이로 인해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기 때문이다.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조금만 역사를 알았다면 일찍 죽음을 맞지 않았을 수도 있다. 세르비아 민족 통일 원칙, 보스니아 주민 중 절반 이상이 세르비아 민족이라는 점, 세르비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갈등 관계 등을 고려할 때 그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굳이 찾아갈 이유도 없었고, 이미 폭탄 테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붕이 열린 차를 타고 이동을 했어야 할 이유도 없었다. 

사라예보 사건이 아니어도 제1차 세계대전은 필연적으로 발생했을 것이라는 의견이 대다수이다. 다른 나라와 땅을 빼앗아 식민지화를 진행하던 제국들이 더 이상 빼앗을 곳이 없으니 서로에게 본때를 보여주기 위한 전쟁이 제1차 세계대전이었다는 사실은 분명히 개연성이 있다. 조선도 제국 식민지에 희생당한 나라였다. 당시 제국이 되느냐, 식민지가 되느냐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안타깝게도 조선은 귀중한 시간을 허무하게 보내고,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우리가 선진국이라고 동경했던 미국,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은 모두 식민지 운영을 통해 성장한 제국주의 국가였다. 독일, 구 러시아도 마찬가지이다. 인도, 인도차이나, 필리핀, 아프리카 여러 국가들이 이들 국가에게 피해를 입었다. 식민지 운영을 원만하게 했더라도 이후 그 나라의 독립을 둘러싸고 많은 잡음이 나왔다. 일본이 이들을 모방해서 조선을 식민지화하고, 만주를 침략하고, 동남 아시아로 쳐들어갔다. 

끊임없는 전쟁을 겪으면서 살아남은 한국처럼 베트남 근대사도 대단하다. 베트남은 프랑스, 일본, 미국, 캄보디아, 중국과 차례로 전쟁을 했다. 침략을 받으면서도 많은 위기를 극복하고, 통일된 지금의 베트남 국가를 만들었다는 것에서 분명히 배울 점이 있다. 비록 그들이 공산국가라고 하더라도 스탈린의 대숙청이나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 같은 야만행위는 없었다.  

한국도 6.25 전쟁 때 중공을 물리치고, 민주주의 통일 국가가 되었다면 지금보다 더 발전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마음 편하게 대동강, 금강산, 백두산을 구경할 수 있었을 텐데 안타깝다. 내수 시장을 뒷받침할 인구수가 되어서 경제적으로도 발전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물론, 가정일 뿐이다.


20세기 미국은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세계의 경찰을 자처하며 좋은 일도 많이 했지만, 그들도 언제나 옳았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자신의 이익들을 위해 모든 일을 계획하고, 운영했다. 

그들이 유대인의 국가 이스라엘을 지원해서 팔레스타인을 점령하도록 하고, 중국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 장제스를 지원하고, 베트남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 부정 부패로 찌든 남베트남, 베트남 공화국을 지원했다. 그리고, 일본의 조선 식민지화를 묵인했고, 그들에게 각종 무기, 석유 등을 제공했다. 일본이 점차 야욕을 드러내면서 미국의 이익에 영향을 미치자 일본에게 석유 수출을 금지했고, 일본은 진주만 침공으로 그에 대한 답을 했다. 

장제스가 대만으로 넘어가 원주민을 대량 학살하고, 땅을 빼앗은 것이나 베트남인들이 통일 베트남을 만들기 위해 그토록 엄청난 희생을 했다는 점,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한국의 엄청난 피해 등에 대해서 미국이 자유로울 수 있을까? 

미국이 우리에게 정말 고마운 나라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들이 우리를 좋아하고, 사랑해서 우리를 무작정 도와주고, 아직까지 한반도에 있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들의 이익을 위해 움직일 뿐이다. 


북아메리가 원주민을 대량 사살하면서 그들의 땅을 빼앗고, 아프리카의 주민들을 납치해 노예로 부린 국가가 미국이다. 심지어 당시에 모두 합법적이었다. 국가라는 것, 인종이라는 것도 모두 관념일 뿐이다. 유전자는 99.9% 이상 동일하다고 한다. 인종 개념은 생물학적 근거가 없다. 하지만, 백인이라는 우월성을 만들고, 다른 집단을 착취하고, 차별한 중심에 미국이 있었다.


미국 인종문제의 책임은 '소수인종'이 아니라 '백인'에게 있다. 그들은 인종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미국을 건립했으며 인종주의적 특권의식에 의거해 흑인 노예를 부렸다. 누가 백인인지는 자기들도 모른다. 처음에는 앵글로 색슨계 이민지만 백인이었다. 독일, 아일랜드와 북유럽 이민지가 뒤를 이었고, 이탈리아와 그리스를 비롯한 남유럽인과 동유럽 유대인이 합류했다. 그들은 피부색과 신체 특성이 모두 달랐고 자기네끼리 혼인해 유전자가 뒤섞였다. 백인의 경계는 불분명하고 내부 구성은 복잡 다양하다. '인종'과 마찬가지로 '백인'도 객관적인 실체를 확인할 수 없는 사회적 발명품이라는 말이다. (P.303)


아직도 전쟁중이라는 국내외 인식을 바꾸기 위해 정전이 아니고 종전협정을 맺으려고 하는데, 누군가 그딴 것을 해봤자 떡이 나오냐고 반대하는 입장을 이야기했다고 한다. 이런 역사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다니 정말 한심하게 느껴진다. 종전 협정으로 인해 부정적인 측면이 있다면 그 문제를 풀어야 하고, 그 문제를 정확하게 지적해야 함이 타당하다. 한 국가의 흥망성쇠, 그리고 그로 인한 국민들의 의식, 생활 수준, 사회 시스템은 단 1명 때문에 엄청나게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역사는 증명한다. 


20세기 처럼 21세기도 지구 전체적인 측면에서 다양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 물론, 20세기에 비해서 과학과 기술의 발전, 전세계가 모두 연결된 네트워크의 힘 등으로 인해 보편적으로 좀 더 나아졌다고 볼 수 있지만, 여전히 위기는 여전하다. 중국과 대만의 갈등,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갈등 등으로 인해 전쟁이 날 경우 그 피해 는 20세기와 차원이 다를 것이다. 20세기와 달리 세계 대전으로 나아가면 곧 지구의 종말이 올 것이다. 전쟁 뿐만이 아니고, 기후 변화, 생태계 오염 등으로 인해 인간이 더 이상 지구에서 살 수 없는 시기가 올 지도 모른다. 국가, 민족, 종교 라는 관념에 사로잡혀 서로를 적대시하고, 지구 환경과 생태계를 지키자는 공동의 노력을 외면하면 지구의 끝은 더 일찍 찾아올지도 모른다.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지구의 주인이자 생태계 파괴자인 호모사피엔스가 신이 되려고 한다면서, 힘은 세지만 책임의식은 없는 신이 가장 위험하다고 지적했다. 인간이 당장 신이 된다면 틀림없이 그런 신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인간이 신이 되리라고 보지 않는다. 인류가 유전자를 조작해 생명을 창조하고 파괴하는 능력을 확보할 때까지 살아남을 확률이 핵전쟁이나 기후변화로 그 이전에 절멸할 확률보다 높다는 보장이 없다. 만약 절멸의 운명을 피하는 데 성공할 만큼 인류가 현명해진다면 어느 정도 책임의식을 지닌 신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예상치 못한 결론에 이르렀다. 어떤 경우든 우리가 아는 '역사의 시간'은 머지 않아 끝난다. 논리적으로는! (P.386)

 

2021.01.09 Ex. Libris HJK




이 책은 20세기 세계사의 열한 가지 큰 사건을 다룬 보고서다. - P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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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2-01-09 2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정판에서는 유발 하라리도 인용되나봅니다! 판매지수가 굉장히 높은 책인지라, 궁금했는데 아타락시아 님께서 부제까지 제시해주시니 고맙습니다!

아타락시아 2022-01-10 13:54   좋아요 1 | URL
그동안 잘 몰랐던 부분을 알 수 있었고, 세상을 좀 더 객관적으로 들여다 볼 수 있을 거 같아요. 물론, 쉽지 않겠죠. 댓글 감사합니다. ^^
유발 하라리는 맨 마지막 부분에 살짝 언급되네요. 인류의 미래를 이야기하다 보니 언급한 거 같아요. ^^
 
피의 기록, 스탈린그라드 전투 - 히틀러와 스탈린이 만든 사상 최악의 전쟁
안토니 비버 지음, 조윤정 옮김 / 다른세상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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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욕심은 끝이 없었다.


현재 우크라이나 서쪽, 러시아 남쪽에 흑해와 카스피 해 사이에 위치한 지역이 있다. 카프카스로 불리는 지역인데, 2차 세계대전 당시 유전지대로 유명한 곳이었다고 한다. 

카스피 해에 위치한 바쿠라는 곳을 통해 미군의 많은 전쟁 물자가 소련에게 전달되었고, 흑해를 거쳐 지중해로 갈 수 있는 바닷길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에 중요한 전략적 위치로 평가받는 세바스토폴도 있다. 


히틀러는 모스크바를 함락하기 어려워지자 갑자기 우크라이나를 거쳐 카프카스로 진군하는 것을 선택한다. 석유를 확보하기 위함이라고 하는데, 남동쪽으로만 이렇게 깊이 들어가는 것이 맞았는지 잘 모르겠다. 이때쯤이면 이미 독일군의 전력은 많이 약해졌고, 충분한 식량, 의복, 무기 보급이 원활하지 않은 상태였다. 독일의 공업 생산력이 소련보다 뒤처지고 있었고, 미국의 엄청난 보급을 독일이 따라잡을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힘든 여건에도 독일 국방군은 돈 강을 넘어 볼가강까지 이르렀고, 이곳의 관문인 스탈린그라드를 함락하기 위한 작전에 돌입한다. 현재의 불고그라드라고 불리는 스탈린그라드는 당시 소련의 공업지역이었고, 소련 독재자 스탈린의 이름을 딴 유명한 도시였다. 

히틀러는 스탈린의 이름을 딴 이 도시를 함락해서 카프카스 지역을 확실히 점령하고, 볼가강을 넘어서 진군할 교두보를 마련하겠다는 생각이었다. 반면에 스탈린은 자신의 이름을 딴 이 도시만큼은 절대 빼앗길 수 없었다. 결국, 히틀러와 스탈린의 자존심 싸움이 2차 세계 대전 전투에서 가장 유명한 전투 중의 하나인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만들었다. 


독일군은 쉽게 함락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뜻밖의 저항에 마주쳤다. 기갑사단을 주축으로 하는 기갑 군의 빠른 전개 속도와 기동전이 독일군의 장점이었는데, 스탈린그라드라는 거대한 도시의 시가전에서 장점을 살릴 수 없었다. 더구나 스탈린그라드는 도시 동쪽으로 볼가강을 접하고 있는데, 볼가강의 동안을 점령하지 못하면, 볼가강을 통한 소련군의 지속적인 투입을 막을 수 없었다. 

빠른 시간 안에 스탈린그라드를 점령하고, 볼가강 동안을 통한 소련군 지원을 막으려는 독일군은 소련 제62군의 치열한 저항에 부딪혔고, 소모전인 시가전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충분한 기갑전력이 있었다면 우회해서 볼가강 동안을 점령해서 스탈린그라드를 완전히 포위할 수 있었지만, 독일군은 그럴만한 힘이 없었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 동안 극동지역에서 일본군을 박살 낸 시베리아 주둔군 정예부대가 이곳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소련은 일본과 불가침 조약을 맺어서 후방을 안전하게 만들고, 독일군에 집중할 수 있었다. 러일전쟁 승리로 소련을 우습게 봤던 일본은 소련에게 박살이 나고, 자원이 풍족한 동남아시아로 침공을 했다. 독일 침공 당시 재빠르게 소련 동쪽 깊숙하게 이동시킨 군수 공장에서는 많은 전쟁 물자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이 책의 저자인 안토니 비버는 전쟁의 참상을 전달하기 위해 노력했다. 전투에 대한 묘사와 각 군대의 공격 방향, 전투 전개 및 양상 등에 대한 설명도 좋지만, 무엇보다 소련군, 독일군 병사들의 심리 상태, 그들이 처한 상황, 민간들의 희생, 2 명의 미친 독재자로 인한 엄청난 전쟁의 피해를 묘사했고, 이 책을 읽고 난 후 전쟁은 다시는 일어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탈린그라드와 그 주변 지역의 전투에서만 독일군 약 50만 명, 소련군 약 48만 명이 죽었다. 민간인은 얼마나 많이 죽었을까? 히틀러 때문에 끝까지 항복을 안 하고, 스탈린그라드에서 버티었던 독일 제6군은 루마니아군과 함께 약 19만 명이 포로로 잡혔는데, 종전때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얼마 안 되었다고 한다.  


히틀러의 무능함으로 인한 전략적 판단 미스와 미친 광기, 우둔한 고집이 스탈린그라드에서 최고 절정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소련군이 스탈린그라드를 포위하는 작전을 진행 중이었을 때 독일 제6군은 남쪽으로 탈출해서 호크의 제4기갑 군과 조우한 후 서쪽 우크라이나로 탈출할 시간은 있었다. 하지만, 히틀러는 무조건 스탈린그라드를 지키라고 했고, 승세가 기울었을 때 스탈린그라드에서 끝까지 싸우다 죽은 독일 장병들을 영웅으로 만들어서 독일 국민들의 애국심을 일깨우는 수단으로 활용할 생각을 했다. 그리고, 새롭게 제6군을 창설할 생각이었다고 하니 정말 미치지 않고 할 수 없는 생각이다. 


구데리안, 롬멜, 만슈타인(비겁하지만, 능력은 좋은), 호크 등의 능력 있는 장군을 멀리하고, 그들의 의견을 무시했던 히틀러에 비해 스탈린은 주코프라는 걸출한 장군의 말을 경청하고 따랐다는 점에서 둘 다 미쳤지만, 차이는 분명히 있다.  


구데리안 자서전과 독일 진격전 책을 읽으면서 독일군의 프랑스 침공에 대한 역사를 알았고, 롬멜 자서전을 읽으면서 북아프리카 전선에서의 독일군 전쟁사를 알았고, 이번 피의 기록, 스탈린그라드 전투 책을 읽으면서 소련에서의 독일군의 가장 큰 패배를 알게 되었다. 

이제 다음은 히틀러의 마지막 미친 짓인 1944 아르헨 대공세를 읽을 예정이다. 


독일군의 흥망성쇠를 통해 역사에서 영원한 것은 없다는 사실과 한 인간의 광기와 대중의 무비판적인 복종이 함께 한다면 이 세상이 얼마나 무섭게 변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이것이 겸허한 마음으로 역사를 접해야 하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2021.09.08 Ex. Libris


1941년 6월 21일 토요일 아침은 완벽한 여름날을 예고했다. - P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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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데리안 - 한 군인의 회상
하인츠 구데리안 지음, 이수영 옮김 / 길찾기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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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 국방군 소속 장군 중에 가장 관심 있었던 3명이 있었다. 그들은 롬멜, 구데리안, 만슈타인이다. 

일전에 <롬멜 전사록>을 읽었고, 이번에 <구데리안>을 읽었다. <롬멜 전사록>은 B.H. 리델 하트라고 쓴 책인데, <구데리안>은 구데리안 본인이 직접 쓴 자서전이다.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것은 히틀러이다. 독일 국방군은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이기도 하다. 독일군은 누구를 위해서 싸운 것일까? 히틀러를 위해? 자신들의 조국 독일을 위해? 

한 국가의 지도자는 한 국가를 번영으로 이끌기도, 수렁으로 이끌기도 한다. 지도자의 사고방식과 행동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우리 한국인들도 불과 몇 년 전에 확실히 알 수 있었다. 


1940년 5월 10일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할 때 구데리안과 롬멜은 같은 전선에 있었다. 만슈타인은 프랑스 침공 작전을 설계했지만, 히틀러의 미움을 받아서 해임되었기 때문에 프랑스 침공 당시 그에 대한 기록은 없다. 

구데리안은 A집단군 제22기갑군 제19기갑군단장이었고, 제19기갑군단에는 제1기갑사단, 제2기갑사단, 제10기갑사단, 그로스도이칠란트 보병연대가 배속되어 있었다. 

롬멜은 A집단군 제4군 제15기갑군단 제7사단장이었다. 제7사단에는 제25기갑연대, 제37기갑정찰대대, 제6차량화보병연대, 제7차량화보병연대, 제7오토바이대대 등이 배속되어 있었다. 

구데리안이 속한 제22기갑군이 프랑스 세당을 관통하는 주공이었고, 롬멜이 속한 제15기갑군단은 북쪽에서 조공의 역할이었다. 이들은 프랑스를 가로질러 대서양에 도착하기 위해 열심히 달렸기 때문에 서로 만난 적은 없다. 


이후 롬멜은 1941년 2월 6일 아프리카 군단장이 되어서 아프리카로 향한다. 말이 군단이지 1개 경장비사단과 1개 기갑사단으로만 구성되어 있었고, 제5경사단, 제15기갑사단이 추후 배치되었다. 

구데리안은 좀 더 늦은 1941년 6월 22일 중부집단군 제2기갑집단을 맡아서 소련 침공의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제2기갑집단에는 제24기갑군단, 제46기갑군단, 제47기갑군단, 기갑집단 직할부대가 배속되었다. 중부집단군의 역할은 겨울이 오기 전에 모스크바를 점령하는 것이었다. 


소련 침공은 확실히 도박이었다. 히틀러의 고집과 무지로 인한 도박은 엄청난 희생으로 돌아왔다. 만약, 구데리안과 롬멜의 생각대로 북아프리카를 통해 이집트로 진격해서 지중해를 손에 넣었다면 제2차 세계대전 향방은 어떻게 되었을까? 역사에 만약이란 없지만, 상상하는 것도 역사를 알아 가는 재미 중의 하나이다.


1941년 동계 바르바로사 작전(모스크바 함락) 실패 후 구데리안이 제2기갑군에서 해임되고, 1943년 1월 볼가강에 위치한 스탈린그라드에서 독일군 남부집단군 제6군이 포위되어 항복을 한 후 1943년 2월에 구데리안은 기갑 총감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1944년 6월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성공한 후 1944년 7월에 구데리안은 독일군 육군 총사령부 참모 총장으로 임명되었다. 


구데리안은 끊임없이 히틀러에게 직언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로 인해 미움을 많이 받았지만, 능력 때문에 계속 해임과 임명을 반복적으로 일어났다. 전쟁에 대한 히틀러의 무식, 히틀러의 편협된 고집, 히틀러 주변에서 아첨을 일삼던 괴링, 힘러, 보어만 같은 인물, 그리고, 독일 자체가 감당할 수 없는 전장 범위의 확대 등으로 인해 독일은 끝내 패전한다. 

모스크바 함락 실패 후 순차적으로 후퇴하면서 전장 범위를 좁히고, 기갑사단들의 궤멸을 막았다면, 전쟁에서 승리는 못했어도 강화 조약을 맺을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물론, 강화 조약 후에도 히틀러가 계속 정권을 잡고 있었다면, 또 다른 전쟁이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어찌 보면 인류 전체를 위해 베를린이 철저하게 함락된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당시 히틀러가 사라지지 않으면 독일은 항복하지 않았을 것이다.   

롬멜은 히틀러 암살에 관여한 일로 발각된 후에 자살을 한다. 사실은 가족을 살리기 위해 롬멜은 히틀러가 명령한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독일 국방군의 신화같은 인물인 롬멜이 히틀러 암살에 관여한 것을 숨기기 위해 히틀러의 꼼수였다.

구데리안은 히틀러 암살 제의를 거부했고, 어찌 하면 전쟁을 종료하고 독일을 보존할 수 있을까 고민하며 히틀러에게 끊임없이 직언을 하지만, 이미 미쳐 버린 히틀러는 전혀 듣지 않았다. 


군인의 입장에서 봤을 때 롬멜이나 구데리안은 멋있는 군인이다. 그들은 무장친위대 SS사단이 아닌 국방군 소속이었기 때문에 오로지 전투를 통해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한 군인이었다. 물론, 현재까지의 밝혀진 자료에 의한 것이다.  

유태인이나 슬라브인들을 말살하기 위한 인종 청소 등을 수행한 군인들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그들에 대한 책이 출간되는 것이 아닐까? 유태인 생체 실험을 한 멩겔레 같은 쓰레기 인간과 같이 취급당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다음에 읽고 싶은 책은 1940년 아르헨 공세로 시작되는 지헬슈니트 계획을 설계하고, 나중에 독소전쟁에서 돈집단군 사령관으로 부임해서 독일 제6군을 구출하지 못했지만, 쿠르스크에서 남부집단군을 맡아서 소련군을 저지했던 만슈타인에 관한 평전이다. 

만약 만슈타인, 구데리안, 롬멜이 하나의 독일 집단군 안에 있었다면 어떻게 전투를 했을까? 기갑사단 위주의 공세를 주도하기를 좋아했던 그들이 하나의 목표로 서로 협력했다면 엄청난 군대가 탄생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요즘 Think Again이라는 책을 읽고 있다. Think Again이 왜 중요한지 아래의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다.


히틀러는 그 뒤에도 여러 번 시무룩한 눈빛으로 이렇게 말했다. "지난 2년 동안 왜 모든 일이 실패만 하는지 도통 모르겠소." 나는 매번 "방법을 바꾸십시오."라고 말했지만 히틀러는 그 대답을 듣지 않았다.(P.465)


2021.06.05 Ex. Libris. HJK


운명은 우리 세대에 두 번의 세계대전을 치르게 했고, 두 번 모두 독일 민족의 패배로 끝나게 했다. - P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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