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카타유 > 토요일 오후에 온 택배에는..

10년 전에 구매한 <로마제국 쇠망사>를 다 읽지도 못했네요. ㅜㅜ
1권 읽을 때 재미있었는데 2권에서 기독교 이야기가 나오면서 지쳤던거 같아요. 또한, 새로운 책이 계속 나오니 관심이 멀어진 것도 이유중의 하나인거 같습니다.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25년에는 완료할 수 있도록 노력할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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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부하들은 이해 관계로 묶인 약한 연결 고리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히데요시가 난세를 평정할 때 오슈의 다테 가문, 주고쿠의 모리 가문, 시코쿠의 조소카베 가문, 규슈의 시마즈 가문을 항복시킬 때 "반항해 봤자 손해다. 항복하면 그에 걸맞는 대우를 하겠다."라는 식으로 이해 관계로 회유했지, 주종 관계나 도덕적인 면모로 그들을 설득하지 않았습니다. 

벤자민 프랭클린이 말한 "설득을 하려면 이성이 아니라 이해 관계에 호소하라"는 말을 이미 16세기에 히데요시는 실천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해 관계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습니다.



이해 관계가 어떻게 바뀌었기에 히데요시가 죽은 후에 바로 도요토미 가문의 권력은 무너졌을까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영화 <한산 : 용의 출현>에서 구로다 요시타카(구로다 간베에)라는 절음발이 인물이 와키자카 야스히루에게 칠본창 중의 한 명이라고, 치켜 세우는 장면이 나옵니다. 와키자카는 용인 광교산 전투에서 조선군 6만명을 약 2천명의 왜군으로 무찌른 장수입니다. 참으로 답답하고, 안타까운 일이었죠. 

만약, 상주에서 패한 이일이 문경새제로 후퇴해서 고개를 지키고, 신립이 충청도, 전라도 지역 조선군을 모아서 고니시 유키나가 장수가 이끄는 왜군 제1군 후위를 공격하면서 시간을 끌었다면, 허무하게 한양성이 무너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물론 가토 기요마사 장수가 이끄는 왜군 제2군이 고니시 군대를 뒤따르고 있었기 때문에 생각대로 흘러가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조선 최고의 무장이라던 이일과 신립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조선 정규군을 소멸시켜 버렸습니다. 



1583년 오다 노부나가가 암살당한 후 시바타 가쓰이에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권력을 다투고, 이로 인해 발생한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히데요시는 가쓰이에 군대를 무찌릅니다. 이 전투에서 공을 세운 7명을 칠본창이라고 불렀습니다. 히데요시 측근에서 함께 하는 장수들이 없어서 칠본창이라는 호칭을 일부러 만들어서 구색을 맞추었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칠본창에 속하는 인물들은 아래와 같습니다. 



  1. 후쿠시마 마사노리 : 임진왜란 당시 제5군 대장

  2. 가토 기요마사 : 혼슈 히고국 구마모토 25만 석 다이묘, 임진왜란 당시 왜군 제2군 사령관, 정유재란 당시 울산 왜성을 조명 연합군에게 지켜낸 장수

  3. 가토 요시아키 : 임진왜란 당시 수군 지휘관, 안골포 해전(이순신) 패배, 칠천량 해전(원균) 승리

  4. 히라노 나가야스 : 임진왜란 미참여

  5. 카타기리 카츠모토 : 제2차 진주성 전투 참여

  6. 와키자카 야스히루 : 용인 광교산 전투 승리, 한산도 대첩(이순신) 패배

  7. 카스야 타케노리 : 제2차 진주성 전투 참여



임진왜란 당시 참전한 왜군 장수들은 아래와 같습니다. 칠본창이 거의 참전한 것을 알 수 있죠. 



  1. 제1군 고니시 유키나가

  2. 제2군 가토 기요마사

  3. 제3군 구로다 나가마사 : 구로다 요시타카의 아들

  4. 제4군 모리 요시나리 또는 시마즈 요시히로

  5. 제5군 후쿠시마 마사노리

  6. 제6군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7. 제7군 모리 데루모토 : 히데요시의 5대부로

  8. 제8군 우키타 히데이에

  9. 제9군 도요토미 히데카츠



왜군 장수들이 조선에서 어떤 전투를 하면서 조선에게 어떤 해악을 끼쳤는지 모두 밝히고 싶지만, 주제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후일을 기약합니다.



조선에서 왜란이 벌어졌을 때 히데요시 주변에는 누가 있었을까요?


먼저, 히데요시 다음의 서열을 가진 5명의 다이로를 알아보겠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마에다 도시이에를 제외하고, 다른 다이로는 모두 임진왜란에 참전했습니다. 히데요시가 죽으면서 이에야스에게 후시미성에서 정국을 안정시켜 달라고 부탁하고, 도시이에에게 오사카성에서 도요토미 가문의 후손인 히데요리를 보살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다이로끼리 견제하도록 만든거죠. 



  1. 도쿠가와 이에야스 : 간토 지방 8국, 256만 석, 나이다이진으로 불림

  2. 마에다 도시이에 : 주부 지방 가가국(현 이사카와현), 83만 석, 다이나곤으로 불림 → 마에다 도시나가(도시이에의 아들)

  3. 우키타 히데이에 : 주코쿠 지방 동쪽(현 오카야마현) 동쪽 지역, 57만 석

  4. 모리 데루모토 :  주코쿠 지방 서쪽(현 히로시마현, 야마구치현), 120만 석

  5.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 규슈 지방 지쿠젠국 (현 후쿠오카현), 33만 석 → 우에스기 가게카쓰 : 아이즈국, 120만 석



그러면, 실제 정치는 누가 했을까요? 히데요시 아래에서 집정관 역할을 한 5명을 부교라고 불렀습니다. 5명이지만, 히데요시가 가장 총애했던 인물은 이시다 미쓰나리였습니다. 



  1. 아사노 나가마사 : 사법 담당, 22만 석, 오와리 출신, 아들인 아사노 요시나가는 임진왜란 참전

  2. 이시다 미쓰나리 : 행정 담당, 19만 석, 오미 출신

  3. 마시타 나가모리 : 토목 담당, 22만 석, 오미 출신

  4. 나쓰카 마사이에 : 재정 담당, 5만 석, 오미 출신

  5. 마에다 겐이 : 종교 담당, 5만 석, 오와리 출신



결과적으로 세키가하라 전투는 도요토미 가를 유지하기 위한 이시다 미쓰나리 편과 새로운 권력자가 되고자 한 도쿠가와 이에야스 편의 싸움이었습니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임진왜란에 참전하지 않고, 간토 지방 8국에서 힘을 모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가를 따르는 다이묘들을 물리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그리 단순하지 않죠.

좀 더 파악하기 위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부부관계를 들여다 보아야 합니다. 



히데요시의 정실인 기타노만도코로(애칭 오네네)는 히데요시와 같은 오와리국 출신이었습니다. 오네네는 히데요시가 오다 노부나가의 잡역부 생활을 하던 때부터 함께 있었습니다. 정치에 깊숙이 관여했던 그녀는 먼 친척의 아들인 가토 기요마사와 나무통 집 아들인 후쿠시마 마사노리 등을 키우다시피 했습니다. 그리고, 오와리국 출신들과 친밀하게 지냈습니다. 



히데요시의 측실 필두인 요도도노가 있었는데, 그녀는 오미국 출신이었습니다. 요도도노는 명문가 아자이 출신으로 아버지는 나가마사, 어머니는 오다 노부나가의 여동생 오이치였습니다. 그녀는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어머니입니다.



오네네는 히데요리가 자신의 아들이 아니기 때문에 굳이 지킬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거 같습니다. 그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친하게 지내면서 칠본창을 비롯한 장수들이 도요토미 가문을 배신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오네네는 오와리국 출신이었으므로, 오미국 출신인 이시다 미쓰나리를 안 좋아했습니다. 아마 측실인 요도도노의 영향도 있었겠죠.



그런데, 칠본창을 비롯한 임진왜란 참전 장수들도 미쓰나리를 안 좋아했습니다. 그들은 히데요시와 함께 많은 전투를 치루었고, 히데요시의 명에 따라 조선 침략에 앞장섰습니다. 하지만, 미쓰나리는 히데요시가 정권을 잡은 후 재능에 의해 발탁된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조선 침공을 위한 운수 작전을 총 지휘한 것으로 보아 집정관으로서 행정 업무를 잘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히데요시가 미쓰나리에게 조선으로 넘어가서 전쟁 현황을 파악해 보라고 한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미쓰나리는 원칙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전쟁을 수행하면서 잘못한 점을 모두 정리해서 히데요시에게 보고합니다. 미쓰나리가 가토 미요마사, 아사노 요시나가, 구로다 요시타카 등에게 군사 회의를 요청 하지만, 이를 무시한 것도 미쓰나리를 화나게 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전략가인 구로다 요시타카도 히데요시의 미움을 사서 일선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임진왜란 참전 장수들은 자신들은 죽을 고생을 다하는데, 히데요시 옆에서 편하게 행정 업무를 하면서 자기들의 잘못을 보고하는 미쓰나리에 대한 미움이 컸습니다.

하지만, 전쟁 중이었으므로 일본에 귀국할 수는 없었고, 증오만 키우고 있었던 것이죠.

조선에 온 모든 왜군을 살려서 보내지 말라는 이순신 장군님의 뜻이 실패한 것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많은 왜군 장수들이 무사히 일본으로 돌아갑니다. 



6살 히데요리가 도요토미 가를 이어가야 하는데, 히데요리의 지지 기반이 없는 불안한 상황에서 임진왜란의 원흉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습니다. 게이초 3년 8월 18일 밤에 63세의 나이였습니다. 개이초는 일본의 연호로 음력 1596년 10월 27일부터 1615년 7월 12일까지 입니다. 즉, 1598년 8월 18일 입니다.

좀 더 일찍 죽었다면, 좋았을텐데 아쉽습니다.



이제 도요토미 가의 정권을 계속 유지할 거냐, 새로운 다이묘에 의해 새로운 막부가 생길 것이냐 하는 관심 속에서 조용히 웅크리고 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움직입니다. 간토 지방 8국의 막강한 경제력, 임진왜란에 참전하지 않아서 보존된 군사력, 뛰어난 처세술과 모략을 지닌 이에야스의 앞을 누가 막을 수 있었을까요?



2025.8.6 Ex. Libris HJ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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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동북아 역사에 대한 사유가 식을 줄 모릅니다. 


이번에 김영진 저자의 <임진왜란>을 구입했습니다. 조선, 명나라, 일본의 정세 및 외교까지 포괄하는 임진왜란 역사책이라서 한층 더 시야가 넓어질 것으로 기대합니다. 

그리고, 신작 도서인 <항일로드 2000Km>도 구입했습니다. 일본 역사와 지리에 관심이 생기다 보니 일본에서 다시 만난 독립 투사들이라는 내용이 자연스럽게 이 책을 장바구니에 넣게 만들었습니다. 한국의 역사 유적지 방문도 하고, <항일로드 2000Km>에 소개된 장소들도 여행하고 싶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유명 장소를 돌아다니는 것보다 테마 여행을 다니고 싶습니다. 제가 가장 선호하는 테마는 역사이겠죠. 같은 장소를 방문해도 그곳에 관련된 역사를 하면 훨씬 재미있고, 보람찬 여행이 될거 같습니다. 



항상 새 책을 구입하면 기분이 좋은데, 알라딘은 이런 기분을 꼭 망칩니다. 신간은 괜찮은데, 출판 후 시간이 흐른 책의 상태는 별로 안 좋습니다. 포장 상태는 교보문고가 정말 좋습니다. 그런데, 알라딘은 포장 상태도 안 좋고, 기본적으로 책 상태도 안 좋습니다. 알라딘이 책 보관에 좀 더 신경쓰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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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5-08-07 11: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16세기 동북아역사에 관심이 많으시다면, 한명기 교수의 저작들을 읽어보세요. 우리나라에서 16세기 동북아 정세 몇 안되는 권위자입니다. 책도 매우 명쾌하고 쉬워요~

카타유 2025-08-07 16:38   좋아요 0 | URL
넵 정보 감사합니다. ~~~
 

# 해당 글은 일본 역사 소설을 읽으면서 나오는 다이묘와 그들이 통치하는 지역을 파악하기 위한 시도로 시작되었습니다.


일본의 국토는 크게 4개의 섬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가장 북쪽의 홋카이도, 가운데 가장 큰 섬인 혼슈, 혼슈 아래에 있는 시코쿠, 가장 남쪽의 규슈입니다. 오키나와는 규슈에 포함시켜서 부른다고 합니다. 규슈, 혼슈, 시코쿠 사이에 세토 내해가 있습니다. 

대마도와 이키섬을 거쳐 부산까지 갈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지역이 바로 규슈이고, 실제로 임진왜란 당시 후쿠오카 하카다 만을 통해 조선 침공을 위해 왜군이 출발했습니다.



<세키가하라 전투> 역사 소설의 주인공 중의 한 명이 이시다 마쓰나리입니다.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집정관 중의 한 명이었는데, 그가 히데요시의 명령을 받아서 임진왜란 당시 도항 운수를 총괄했던 사람입니다. 당시 4만 척의 배를 이용해서 단기간에 20만 명의 병력, 말, 군량, 마량, 화약, 탄환, 화살 등을 부산포로 실어나르는 일을 총괄한 것이죠. 



일본은 광역 자치 단체와 기초 자치 단체로 나눌 수 있는데, 광역 자치 단체는 1도 도쿄도, 1도 홋카이도, 2부 오사카부, 교토부, 43현의 행정 구역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도쿄도와 홋카이도는 끝 글자인 도의 한자가 다른데 그것까지 알 필요는 없을거 같네요.



그런데,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를 더 알아야 합니다. 지방이라는 부르고 있는 지역 구분입니다. 북쪽부터 차례로 홋카이도 지방, 도호쿠 지방, 간토 지방, 주부 지방, 간사이 지방, 주고쿠 지방, 시코쿠 지방, 규슈 지방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각 섬, 지방, 현을 한 지도에 표현하면 <그림 1>과 같습니다. 그런데, 각 현의 이름이 잘 안 보이네요. 각 현의 이름은 <그림 2>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그림 1. 일본 지역 지도>






<그림 2. 일본 행정 체계> 출처 : 워크투데이




그런데, 히데요시가 집권하던 시대에는 지금의 현이 아니었습니다. 국으로 구분을 했고, 지금의 현과 꼭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쌀 생산량이 1만 석이 넘는 지역을 받은 무사를 다이묘라고 불렀고, 다이묘들이 각 국을 통치했습니다. 한 가문의 다이묘가 여러 국을 통치할 수도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교토 인근의 기나이와 7개의 도를 구분하기도 했습니다. 기나이에 속한 국은 야마시로국, 야마토국, 가와치국, 이즈미국, 셋쓰국입니다. 각 도에 속한 국들이 있었겠죠.

현재의 교토는 야미시로국에 속했고, 오사카는 셋쓰국에 속했습니다. 아래 <그림 3>을 보면 각 도와 도에 속한 국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림 3. 기나이와 7개 도> 출처 : Wikimedia commons




<세키가하라 전투>을 읽다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1590년 히데요시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혼슈 동부의 간토 지방의 통치권을 하사합니다. 혼슈 섬의 동부인 간토 지방은 <그림 2>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원래 이에야스는 주부 지방 나고야 동쪽의 미카와국을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미카와국 위치는 현재 미에현 지역을 보시면 됩니다. 당시 중심지인 간사이 지방과 가까운 미카와국에서, 외지인 간토 지방으로 쫓아낸 것이었습니다. 간토 지방은 염전밖에 없는 벌판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위로하기 위해 간토 8국 모두 통치권을 허락했다고 하네요.



<그림 3>을 보면 간토 지방은 도카이도 6국과 도산도 2국이 합쳐진 지역입니다. 

간토 8국은 아래와 같습니다. 



  • 무사시국(현 도쿄도, 사이타마현, 가나가와현 일대)

  • 시모사국(현 지바현 북부)

  • 가즈사국(현 지바현 남부)

  • 히타치국(현 이바라키현)

  • 시모쓰케국(현 도치기현)

  • 고즈케국(현 군마현)

  • 소우마국(현 가나가와현 남부)

  • 아와국(현 지바현 남동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권을 잡고 에도 막부 시대를 열었는데, 에도성이 바로 무사시국, 현재로 보면 도쿄도에 위치했습니다. 일본의 중심지가 간사이 지방 교토-나라에서 간토 지방 도쿄로 바뀌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만 더 설명하면, 히데요시 당시 모리 데루모토는 주고쿠 지방의 대부분을 통치했습니다. 현재의 오카야마현, 히로시마현, 야마구치현, 시마네현, 돗토리현입니다. <그림 4>를 보면, 좀 더 정확하게 해당 국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그림은 <세키라하라전투> 1권 책에서 제공하는 지도인데, 책이 오래되어서 가운데가 갈라졌네요. 재출간되면 소장하고 싶은데, 그럴 일은 없겠죠. 

모리 데루모토가 모리령이라고 되어 있는 부분이 있는 국들을 통치했습니다. 확대해서 보면 나가토국, 스오국, 아키국, 이와미국, 빈고국, 빗추국, 호키국이 모리 가문의 통치를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림 4. 도요토미 막부 시대의 일본 전국 지도> 출처 : 세키가하라전투 1권




항상 저는 역사책이나 역사소설을 읽을 때 지도를 같이 봅니다. 이 책도 읽으면서 지도를 보려고 했는데, 현재 지명과 달라서 찾아 보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지역부터 먼저 조사하게 되었네요. 많이 부족해도 제가 일본 역사를 이해할 때 많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2025.8.2 Ex. Libris HJ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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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자민 플랭클린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설득하려면 이성이 아니라, 이해관계에 호소하라.˝

얼마전에 겪은 일입니다.
제품의 기능이 있는데, 전략 방향에 안 맞고, 사용률도 그다지 높지 않아서 삭제를 논의한 적이 있었습니다.
담당 부서는 중요한 지표 중의 하나인 월간 사용자 수가 줄어들 것이라고 반대 입장을 내놓았습니다.
일정 사용자가 매달 사용 횟수가 적지 않다는 데이타 분석도 내놓았죠.
그런데, 데이터 분석을 디테일하게 해보니 매달 사용하는 사람 중에 매일 쓰는 사람은 2%밖에 안되고, 약 40%는 한 달에 한 번 사용하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정확한 데이터 분석 결과를 제출하고, 논의를 하는데, 결국 담당 부서는 지금 하는 일이 많아서 간소화까지 할 수 없다, 간소화하면 당장 좋아지냐 등의 의견을 제시하며 반발을 했습니다. 당연히 그들 입장에 대해 이해를 합니다. 우선 순위 선정은 중요하기 때문이죠.

지나고 나서 정확한 데이터 분석 결과로 그들의 이성에 호소해봤자 설득이 안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어쩌면 비일관성 회피 경향이 발동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의 이해관계, 즉 그들에게 미치는 영향 및 이익에 대해 설명을 하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단기적으로 일이 늘어나지만, 중기적으로 업무는 더 줄어든다거나 담당부서의 상위부서에게 인정받는 일이 아니라면, 움직일 리가 없습니다. 더구나 회사 분위기가 간소화보다 신규 기능 도입에 관심이 더 높다면 말이죠. 아쉬운 것은 기능 담당 개발 부서는 간소화 방안에 동의했지만, 하위 조직이다 보니 상위 조직인 담당부서에게 이견을 제시할 수가 없었습니다.

찰리 멍거가 말한 심리적 경향들을 직접 경험한 일에 대입해 보는 것도 심리적 경향들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재미있기도 하구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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