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앞의 생 (특별판)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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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가, 작가, 화가 중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사람들이 다른 부류보다 많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지 않을까요? 요즘 책을 읽으면, 작가의 인생을 눈여겨 보는데, 인생 후반부에 불운한 삶을 산 사람들이 많습니다. 치열한 고민 끝에 자신만의 작품이 탄생하다 보니 삶을 보는 눈이 보통 사람과 달라서 급진적인 선택을 하는 것은 아닐지.. 


이 책의 저자 에밀 아자르(본명은 로맹 가리입니다)도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합니다. 1956년 '하늘의 뿌리', 1975년 '자기 앞의 생'  두 작품으로 프랑스의 가장 권위 있는 공쿠르 상을 두 번이나 받을 만큼 유명한 작가였지만, 끝내 언론에 나서지 않고, 로맹 가리가 저자임을 숨겼다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사후에야 로맹 가리가 에밀 아자르임을 알게 됩니다.

권총 자살 후 유서를 통해 세상에 자기를 알린 부분에서 본인의 인생을 마감하기 위해 미리 시나리오를 짠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아니면, 살아서는 본인에게 쏟아지는 관심과 언론, 비평 등을 모두 접할 용기가 없어서 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모하메드입니다. 매춘부의 아들이고, 3살 때 버려져서 역시 매춘부를 은퇴한 할머니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자랍니다. 이 할머니는 매춘부로부터 정기적으로 일정한 돈을 받고, 아이들을 보살펴 줍니다. 모하메드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부모가 모두 회교도입니다. 

소설 배경이 프랑스 뒷골목인데, 회교도, 유태인, 흑인, 아시아인 등 여러 인종이 프랑스에 모여서 빈민가를 형성하며 살고 있습니다. 모하메드가 비뚤게 자라도 누가 뭐라 욕할 수 없을 정도의 환경이지만, 모하메드는 본인만의 상상력과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잘 극복해 나갑니다. 

자신은 부모로부터 버림받고, 국가의 도움도 전혀 받지 못하지만, 그나마 자신을 보살펴준 로자 아줌마를 끝까지 지키고, 사랑하는 모습에서 잔잔한 감동을 받습니다. 소설 후반부에 이 모든 현실이 지겹다고 소리지르는 모하메드에 공감을 안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이 없으면 살 수 없다는 의미를 깨닫고,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어쩌면 나이하고 전혀 상관없이 우리 주변의 14세의 소년, 소녀에게도 분명 배울점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도처에 애만도 못한 어른이 많이 있는데, 우리도 누군가에게 이런 말을 듣지 않기 위해서라도 가끔 모하메드를 떠올려 보면 좋겠습니다.  


2014.08.24 Ex Libris HJ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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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박준 지음 / 난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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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2017년 방영된 로맨스 드라마인 <이번 생은 처음이라>에 빠져 있다.

서로의 필요로 월세 계약 결혼을 한 남녀가 사랑에 빠지는 과정을 그린 드라마이다.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정소민님과 이민기님이 주연인데, 두 명의 연기가 참 좋다. 물론, 배우도 좋지만, 그들이 연기한 캐릭터에 빠지는 성격이라서 정소민님이 연기한 윤지효와 이민기님이 연기한 남세희에 대한 감정이 가슴 속에 남아 있다. 당분간 이들 배우가 연기하는 다른 드라마는 보기 힘들거 같다. 

남녀간의 사랑만이 아니고, 집, 연애, 결혼, 사랑에 대해 기존의 사고 방식과 다르게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 드라마에서 몇 권의 책이 나온다. 그 중 한 권이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이라는 산문집이다. 드라마에 빠져서 살다 보니 책에도 관심이 생겼다. 바로 주문 후 읽었다. 

드라마에 소개된 부분 이외에도 좋은 내용들이 있었다. 산문을 읽으면서 무엇인가 가슴에 맺히는 글을 발견할 때 느끼는 떨림이 산문을 읽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그 느낌을 정확하게 표현할 단어를 모르겠다.



나는 타인에게 별생각 없이 건넨 말이 내가 그들에게 남긴 유언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같은 말이라도 조금 따뜻하고 예쁘게 하려 노력하는 편이다. (중략) 말은 사람의 입에서 태어났다가 사람의 귀에서 죽는다. 하지만, 어떤 말들은 죽지 않고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살아 남는다. (P.19)


평생 동안 만나서 대화를 하는 사람들이 몇 명이나 될까? 앞날이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지금 내가 한 말이 상대방에게 기억되는 마지막 말이 될 수 있다. 내가 말한 것이 귀에서 죽으면 다행이지만, 마음속으로 들어가 살아 남는다면, 내가 말할 때 엄중함을 느껴야 하지 않을까? 내가 말한 것을 듣는 상대방이 나를 어떻게 기억할지 생각한다면 내 기분대로 말을 내뱉으면 안 될거 같다. 상대방이 나를 기억하는 마지막 말일 수가 있다는 생각에 두려움까지 느낀다.



내가 들었던 욕이나 비난들은 대부분 말로 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다 오해가 풀리거나 화가 누그러졌을 때 종종 상대에게 사과를 받기도 했는데, 곰곰 생각해 보면 이러한 사과는 말보다 글을 통해 받는 경우가 많았다. (P.26)

    

정말 그렇다. 화를 낼 때는 글로 표현하지 않는다. 내 감정을 표출해야 하는데, 글은 시간이 오래 걸린다. 일단 빨리 내뱉어야 한다. 물론, 감정을 표현 안 하고, 마음속에만 간직하면 스트레스가 될 수 있지만, 대부분 빠르게 내뱉고 나서 후회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글로 표현하다 보면 마음을 어느 정도 진정하는 경우가 많다. 나의 감정이 과민하게 대응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과를 글로 하는 것보다 욕이나 비난을 글로 써 보면 어떨까? 이런 습관이 나에게 도움을 줄 것이다.



외로움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생기는 것일 텐데, 예를 들면 타인이 나를 알아주지 않을 때 드는 그 감정이 외로움일 거야. 반면에 고독은 자신과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것 같아. 내가 나 자신을 알아주지 않을 때 우리는 고독해지지. 누구를 만나게 되면 외롭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독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야. 고독은 내가 나를 만나야 겨우 사라지는 것이겠지. 그러다 다시 금새 고독해지기도 하면서. (P.51)


가끔 많은 사람들과 어울려 정신 없이 놀다가도 갑자기 처절하게 고독해질 때가 있다. 이유는 모른다. 갑자기 여기가 어디이고, 나는 왜 여기에 있느냐는 생각이 든다. 고독과 가까워진다고 두려울 필요는 없다. 나의 내면과 친해질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고독사는 사람이 그리워져 죽는 것이 아니고, 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내 자신을 미워해서 죽는 것이 아닐까?



일상의 공간은 어디로든 떠날 수 있는 출발점이 되어주고 여행의 시간은 그간 우리가 지나온 익숙함들을 가장 눈부신 것으로 되돌려놓는다. 떠나야 돌아올 수 있다. (P.111)


이제까지 한 번도 혼자서 여행을 해 본적이 없다. 혼자 식당에서 밥 먹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이제까지 손가락으로 셀 정도이다.

하지만, 이제 사랑하는 사람과 잠시 멀어지는, 혼자서 떠나는 여행을 꼭 해보고 싶다. 

<이번 생은 처음이라> 드라마에서 계약 결혼을 종료하고, 그(녀)는 사랑하지만 떠난다. 계약을 끝내고 떠나야지 다시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떠나서 고독을 느끼며 나 자신과 마주해야 한다. 상대방의 소중함을 느끼는 순간이 시작점이다.

 


2025.4.21 Ex.Libris HJK 

 



남들이 하는 일은 나도 다 하고 살겠다며 다짐했던 날들이 있었다.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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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헤로도토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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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역사책인 역사를 읽었다. 이 책은 유시민의 <거꾸로 읽는 세계사>를 읽으면서 알게 되었다. 약 1000페이지에 육박하는 두꺼운 벽돌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면서 느꼈던 성취감은 특별했다. 최재천 교수님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두껍고 어려운 책을 한 권 읽으면 자신감이 생긴다. 성취감과 함께 찾아온 자신감은 나를 다시 두껍고 어려운 책으로 이끌 것이다.


 

역사는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을 서술한 것이다. 일기나 에세이처럼 읽어도 괜찮다. 하지만, 나는 역사를 읽을 때 반드시 두 가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지리에 대한 파악이고, 하나는 맥락을 파악하는 것이다. 인간들이 끊임없는 선택을 통해 역사를 만드는데, 이런 선택을 한 이유를 이해하려면 지리와 앞서 일어난 일, 현상들에 대한 파악이 중요하다. 역사책을 읽을 때 지도를 펼쳐 보고, 메모장에 플로우 차트같은 기록이 필요하다. 전후 맥락을 파악하기 위해서 인터넷 검색도 필요하다. 역사책을 읽는 재미를 알기 위해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접근이 중요하다. 이렇게 말하면서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 많이 부족하다.


  

헤로도토스의 <역사>를 읽는 것은 쉽지 않다. 쉽지 않은 이유 중의 하나가 책에서 쓰인 명칭이 현재 쓰는 명칭과 다르다는 것이다. 지역, 단위, 장소명 등이 당시의 언어로 표현했기 때문에 별도의 매칭 테이블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헬라스가 그리스를 통칭하는 말인지를 알 수 없다면 내용을 이해하기 어렵다. 지리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는데, 지도를 봐도 당시의 명칭으로 표기가 안되어 있어서 매칭 테이블을 통해 현재의 지역을 지도에서 찾아야 한다. 뤼디아 왕국의 수도였고, 페르시아에 병합된 중요한 지역이었던 사르데이스는 현재 튀니키예 마니사주 샤르트이다. 다행히 <역사> 장의 지도가 있다. 당시의 지역명으로 표기된 지도를 통해 전체적인 조망이 가능하지만, 책에 언급된 모든 지역과 도시를 포함하고 있지는 않다.






이 책의 저자인 헤로도토스는 기원전 485년에 태어났다고 한다. 처음에 <역사>가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에 대한 역사책으로 알았다. 그래서, 당연히 헤로도토스가 그리스인이라고 생각했는데, 책을 구매 후 읽어 보니 그는 소아시아 서남부 카리아 지방의 할리카르낫소스 시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이곳은 현재 튀르키예 남서부 물라주에 있는 보드룸 도시이다. 당시 이오니아 지방은 그리스 문화권이었기 때문에 헤로도토스도 그리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이다. 이오니아는 에게해에 접한 튀르키예 남서부 지역를 칭하는 말이다.


 

헤로도토스는 방대한 기록을 남겼다.

헤로도토스가 대단한 저술가라고 말할 수 있다. 기원 전 시대에 기록물이 있던 것도 아니고, 교통이 편한 것도 아니지만, 많은 지역을 직접 방문하고, 탐문하면서 기록을 남겼다는 것은 놀랄 일이다. 북아프리카, 이집트, 에티오피아, 시리아, 이라크, 이란, 튀르키에, 불가리아, 그리스, 시칠리아 등을 여행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여행하면서 기록하고, 듣고, 정리하고, 후대에 글로 남겼다는 점은 존경스럽다. 물론, 헤로도토스가 남긴 많은 내용들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하나의 사건에 서로 다른 내용을 들었다면, 그것들을 밝히고, 자신의 견해를 남긴다. 헤로도토스는 헬라스 도시국가들과의 전쟁의 도화선이 된 이오니아 반란을 다루기 전까지 550페이지 정도를 페르시아에 할당했다. 페르시아에 대해 적대적이지 않고, 객관성을 유지한다. 영화 300에서의 어처구니 없는 페르시아의 묘사나 시오노 나나미의 그리스, 로마에 대한 지나친 칭송보다 헤로도토스가 더 객관적인 저술가라고 생각한다.

헤로도토스의 서술이 정확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 당시에 리뷔에(아프리카 리비아) 내륙의 기후, 네일로스강(나일강)의 기원, 아이귑토스와 아이티오피아의 관계 등을 설명했고, 각 민족의 문화 및 생활 등에 대해 소개를 했다. 참으로 대단한 열정을 소유한 뛰어난 저술가라고 생각한다.

 


이제 페르시아의 발자취를 따라가보자

페르시아의 퀴로스가 메디아와 뤼디아를 멸망시키고, 페르시아 제국을 만든다. 그리고, 퀴로스의 아들인 캄뷔세스가 즉위 후 바뷜론, 이오니아, 소아시아, 아이큅토스를 침공해서 점령한다. 아이큅토스는 오늘날의 이집트이다. 캄뷔세스가 폭정을 일삼자 다레이오스가 반란을 일으켜 페르시아 왕이 된다. 다레이오스는 스퀴티스족을 징벌하기 위해 헬레스폰토스(현재 다르다넬스 해협) 해협을 건너 트라케 지역을 넘어서 현재의 우크라이나까지 진출가지만, 유목민인 스퀴티스는 일정한 거처가 없었기 때문에 정벌은 실패한다. 그후 이오니아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아테나이가 지원 병력을 파견함으로써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전쟁이 시작된다.

당시 페르시아는 엄청난 제국이었고, 아테나이, 스파르타 등은 도시국가일 뿐이었다. 페르시아는 그리스 도시 국가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었지만, 아테나이를 비롯한 헬라스 도시국가들의 페르시아의 속주 지역인 이오니아에 자꾸 관여함에 따라 페르시아 제국의 힘을 보여주기로 한다.

 


페르시아의 정복은 피지배 국가를 멸망시키는 것이 아니었다. 항복을 하면, 속주로 만들어서 세금을 부과했고, 세금만 낸다면 과도한 간섭을 안했다. 물론, 페르시아가 전쟁을 할 경우에는 속주에서 군대를 제공해야 했다. 만약, 항복을 안하고 버틴다면 쳐들어가서 함락하고, 피지배국가의 요인들을 모조리 숙청한 후 그들의 피지배층은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도록 했다. 헬라스 도시국가들은 자유를 위해서 페르시아와 전쟁을 했다고 하지만, 그들도 노예가 있었고, 신분제도가 있었다. 어쩌면 지배 계급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함이지 민중의 자유를 위해서 페르시아와 전쟁을 했을까?

 


사실 페르시아의 왕, 다레이오스는 아테나이의 존재를 몰랐다. 이오니아 지역의 밀레토스가 반란을 일으켰고, 이를 도와준 것이 아테나이라고 들었을 때 비로소 알았다고 한다. 아테나이가 사르데이스까지 쳐들어 오자 다레이오스는 아테나이를 반드시 굴복시키겠다는 다짐을 했다. 사실 아테나이같은 도시국가가 페르시아와 전쟁을 하겠다는 생각 자체가 무모한 짓이기 때문에 아테나이는 전면전을 할 생각이 없었고, 전쟁을 해도 이오니아 지역에서 국지전을 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누구나 그럴 듯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 막상 당하기 전에는 말이다.

 


다레이오스는 이오니아 반란을 평정하고, 아테나이를 정복 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다. 이들이 마라톤 평야에 상륙하면서 기원 490 1차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이 시작된다. 페르시아 군은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지만, 그들은 경보병, 기마병 위주였고, 다양한 피지배민족으로 구성된 군대였다. 페르시아 정예군인 불사부대도 있었지만, 전체 군대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낮았다. 페르시아군의 단점은 전투에서 질거 같다는 신호가 보이면, 피지배민족의 군대들은 도망갈 생각만 한다는 것이었다.

헬라스 도시국가는 중보병 위주였고, 긴 창과 방패를 활용해서 페르시아와 대적했다. 마라톤에서 페르시아군과 대적한 아테나이군은 10명의 지휘관이 이끌고 있었다. 그중에서 10번 째 지휘관인 밀티아데스가 주로 언급되는 것을 보니 그가 주도적으로 전쟁을 이끌었던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페르시아와의 전투를 이야기할 때 헬라스 지휘관들의 뛰어난 역활을 이야기할 것이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후 그들은 모두 모함을 받거나 시기를 당해서 쫓겨난다. 힘들 때는 단합하고, 지도자를 지지하지만 먹고 살만하면 자기들끼리 싸우면서 권력 투쟁을 하는 헬라스 도시국가의 모습에서 그들의 미래를 엿볼 수 있다.

마라톤은 헬라스 도시국가 중 아테나이와 인근 도시 국가인 플라타이아이만 참전한 전투였는데, 예상외로 헬라스의 중보병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는 전투였다. 페르시아에서 그리스 본토까지 거리는 결코 가깝지 않기 때문에 페르시아군은 싸울 수 있는 병력이 더 있었지만, 페르시아로 돌아갔다. 잘못하면 퇴로가 끊겨서 더 많은 피해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다레이오스의 아들인 크세르크세스가 아버지의 복수를 하기 위해 4년 동안 준비한 페르시아 침공군의 규모는 약 120만 명, 약 1200 척의 함대였다. 헤로도토스는 비교적 자세하게 각 민족에서 보낸 군대의 규모를 설명했다. 물론, 전체 인원이나 동원된 함선의 수가 정확하다고 볼 수는 없다. 페르시아가 당한 수모를 되갚기 위해 크세르크세스는 직접 참전하기로 하고, 육군과 수군 양용작전을 펼쳐서 그리스를 침공하기로 한다. 헬레스폰토스 해협에 수교를 설치해서 말을 타고 건넌 후에 트라케, 마도니아, 텟살리아를 거쳐 앗티케로 쳐들어가는 계획이었다. 동시에 함대는 바다로 육군과 보조를 맞추어 에게해의 그리스 섬들을 거치지 않고, 해안 지대를 따라 그리스 본토로 진입했다.   

 


페르시아 해군도 다민족으로 구성된 군대였다. 이들이 병참을 맡았다고는 볼 수 없다. 왜냐하면, 페르시아는 점령 지역에서 병참을 해결했기 때문이다. 지역에 거주하는 민족을 굴복시키고, 그들에게 병참 지원을 강요했기 때문에 굳이 배를 통한 병참 지원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면 왜 페르시아에게 해군이 필요했을까? 페르시아 제국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머나먼 땅으로 진군했고, 에우로페(현재 유럽)로 넘어오기 위해 헬레스폰토스 해협에 수교까지 설치했다. 만약, 전쟁에서 진다면 후퇴를 해야 하는데, 그리스 연합 해군이 먼저 헬레스폰토스 해협으로 가서 수교를 끊어버린다면, 그들의 퇴로는 막힐 것이다. 바다에서 그들을 지켜 줄 군대가 필요했다. 페르시아가 그리스 본토로 깊숙이 들어올 수록 해군의 지원은 필수적이었다.

 


반대로 그리스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페르시아 육군을 모두 무찌르지 않아도 그들을 후퇴시킬 수 있는 방법은 바다에서의 승리였다.

앞서 마라톤 전쟁의 지휘관이면서 승리를 이끈 밀리아데스를 언급했다. 10 기원 480년에 시작된 2 페르시아 전쟁은 명의 영웅이 나타나서 헬라스를 지켜낸다. 아테나이인 테미스토클레스는 전쟁이 있기 전부터 해군이 절대적으로 중요하고, 해전을 통해 페르시아를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300척의 함대를 조직했고, 해군을 훈련시켰다. 육지를 빼앗긴다고 해도 많은 섬들로 구성된 그리스 앞바다에서 페르시아를 물리친다면 페르시아는 물러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때 헬라스 연합군 총대장은 스파르테 출신 지휘관이었는데, 함대를 물리고, 좁은 코린토스 지협을 방어하거나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물러나서 페르시아군을 대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테미스토클레스의 설득으로 역사적으로 유명한 살라미스 해전이 발생할 있었다.

정확한 비교는 무리지만, 임진왜란 해군을 해체하고, 육지에서 전투하라는 지시를 조선군 총대장 권율과 바다를 포기하면 조선은 끝이다라고 주장하면서 바다를 지킨 이순신을 떠올리게 한다. 한양을 점령하고도 승리하지 못한 왜군처럼 아테나이 도시를 점령하고도 끝내 후퇴할 밖에 없었던 페르시아군의 상황은 비슷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살라미스 해전은 조선 수군과 이순신의 많은 전투 업적에 비할 수는 없지만, 페르시아 숙주로 전락할 있었던 헬라스를 지켜낸 전투였다.

 


영화 300 많은 사람은 스파르테의 영웅 레오니다스를 기억할 것이다. 그는 테르모퓔라이 전투에서 끝까지 자리를 지키면서 페르시아 군과 싸우다가 장렬한 전투를 맞이한 스파르테의 왕이었다. 영화에서 크세르크세스를 마치 원시 종교의 제사장처럼 묘사한 것을 보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당시 엄청난 부와 권력을 가진 제국은 페르시아였고, 크세르크세스의 위세는 엄청났다

페르시아 육군은 좁은 협곡인 테르모퓔라이로 진군했고, 해군은 아르테미시온 곶에서 헬라스 연합해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페르시아 육군은 불사부대 1 명을 포함한 20 명이었고, 헬라스 연합군은 1 명이었다고 한다. 좁은 협곡을 막은 채로 번의 전투에서 페르시아를 물리쳤던 헬라스 연합군은 페르시아가 협곡의 우회로인 좁은 샛길을 발견해서 자신들을 포위당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고, 대부분의 연합군은 후퇴했지만, 스타르테군은 남기로 했다. 레오니다스는 남았을까? 헤로도토스는 레오니다스 자신이 남아서 장렬히 전사하면, 명예를 얻고, 스파르테에게 이익이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견해에 동조한다. 그의 희생을 통해 페르시아의 예봉을 무디게 하면서 페르시아군에게 약간의 두려움과 긴장감을 유발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영화 300에서 심한 눈병에 걸려서 전투를 못하므로 스타르테로 돌아간 사람이 나온다. 그의 이름은 아리스토데모스인데, 스타르테로 돌아온 스타르테인들에게 치욕과 불명예를 받지만, 1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용맹하게 싸워서 완전히 명예를 회복했다.

 


테르모퓔라이 전투에서 헬라스 연합군이 패배한 헬라스 연합 해군은 살라미스로 후퇴한다. 그리고, 아테나이 도시를 비운다. 페르시아 군대가 아테나이로 무혈 입성하고, 도시를 파괴한 헬라스 연합 해군을 격파할 계획을 세운다. 헬라스 연합 해군과 맞붙지 말고, 육지를 점령한 채로 헬라스 도시국가 간의 분열을 획책함으로써 도시국가들이 스스로 무너지도록 하자는 현명한 의견을 제시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미 테르모퓔라이 전투에서 승리하고, 많은 헬라스 도시국가를 점령한 크세르크세스는 전쟁에서 가장 위험한 자만에 빠져 있었다.

 


헤로도토스가 헬라스를 구원한 것은 아테나이인들 때문이고, 그들이 이긴 살라미스 해전을 높이 평가한다. 테미스토클레스는 뛰어난 지휘관이었지만 개인적으로 돈을 많이 밝혀서 사적인 재산을 축적했다는 말도 덧붙인다. 페르시아 해군의 주력인 페니키아 해군이 무너지면서 페르시아 군대의 최대 약점인 전투에서 같으면 전장에서 이탈하는 피지배민족의 군대의 도주는 여지없이 나타났다. 해전을 지켜보던 크세르크세스는 많은 병력의 육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페르시아로 돌아갈 길이 끊어질 있다는 불안감에 부하인 마르도니우스에 많은 병력을 맡기고, 자신은 페르시아로 돌아간다. 당시 최고의 제국을 가진 왕으로서 번의 전투에서 패배했다고 집에 가버리는 모습이 황당하지만, 어찌 보면 리스크 관리 차원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살라미스 해전 기원 479년에 헬라스 연합군이 육지에서 남아 있던 페르시아군을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무찌른다. 이때 헬라스 연합군 총사령관은 스타르테인 파우사니아스이다. 그는 레오니다스의 조카였는데,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삼촌의 복수를 셈이었다. 이제 헬라스 전역에서 페르시아 군은 자취를 감추었고, 헬라스 연합해군이 이오니아 지역의 페르시아 해군의 본거지인 뮈칼레를 공격해서 페르시아 해군을 무찌른 북진해서 헬레스폰토스 해협의 수교를 제거하고, 보스포로스 해협의 뷔잔티온까지 함락시킴으로서 페르시아가 다시 헬라스를 넘볼 없도록 만들었다.

 


그리스 페르시아 전쟁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아시아로부터 유럽을 지킨 최초의 전쟁, 그리스 민주주의를 지킨 전쟁, 그리스가 지중해의 패권을 차지하게 만든 전쟁 여러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과연 그리스는 승자였을까? 전쟁에서 이겨서 그리스를 지켜냈지만, 그들은 몰랐다. 그리스의 식민지였던 시칠리아 북쪽에서 로마가 점차 힘을 키우고 있다는 , 그리고 마케도니아에서 엄청난 영웅이 나타날 것이라는 점을 몰랐다. 만약 알았다면, 그리스 도시국가 간의 분열과 전쟁을 안했을까? 그들은 강대한 제국이었던 페르시아를 물리치고, 자기들끼리 싸웠을까?

그건 하나의 책을 통해 밝혀질 것이다. 헤로도토스와 함께 뛰어난 역사가로 칭송받는 투퀴디데스를 만나볼 차례이다.





2025.2.24 Ex. Libris HJK

페르시아 학자들에 따르면, 헬라스인들과 비헬라스인들이 반목하게 된 것은 포이니케인들 탓이라고 한다.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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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이 먼저입니다 - 한동훈의 선택
한동훈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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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대단한 것이 알라딘 서재에 글 한 편 없는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서평 쓰고 있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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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이 먼저입니다 - 한동훈의 선택
한동훈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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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태세전환 대단하다. 윤석열과 함께 21년 검사 생활한 것을 부정하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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