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쿠라 진다 - 전후 70년, 현대 일본을 말하다
우치다 타츠루.시라이 사토시 지음, 정선태 옮김 / 우주소년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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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꽃은 사쿠라, 사람은 사무라이"라는 말이 있다. 일본인들은 '사쿠라'를 좋아한다. '사쿠라'는 '사무라이'와 함께 일본을 상징하는 아이콘이다. 그런데, 일본을 상징하는 '사쿠라'가 진다니, 무슨 뜻일까? 2011년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은 '첨단 기술과 번영하는 일본'이라는 가면을 벗고 일본의 민낯을 보는 계기를 만들었다. 기술이 뛰어난 일본에서 원전사고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단언했지만, 일본의 첨단 기술은 허황된 신기루였다. 자연재해에 대비해서 정밀한 매뉴얼을 준비하고 안전한 일본을 만들었다는 고정관념도 허울 좋은 망상이었다는 사실을 목도했다. 그렇게 사쿠라는 지고 있다.

  "영속패전론"을 읽고 일본의 민낮을 본 이후, 시라이 사토시의 다른 책을 읽고 싶어졌다. 같은 동아시아 문화권에 살지만, 너무도 다른 일본인들의 정신구조를 이해하기 위해서 "사쿠라 진다."를 꺼내 들었다. 거리의 철학자 우치다 다쓰루와 "영속패전론"이라는 명저를 쓴, 시라이 사토시의 대담을 통해서 현대 일본의 민낯을 보자. 


1. 스스로를 파괴하는 일본인

 아베가 그토록 고대하던 '2020 도쿄 올림픽'이 연기되었다. 그러나, 도쿄 올림픽이 올해 열릴 가능성은 아베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분들에게 무릎 꿇고 사과할 가능성보다 낮다. 아베는 '2020 도쿄 올림픽'을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극복한 일본'이라 포장하여 세계에 선전하려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종결된 사건이 아니라, 현재 진행중인 재앙이다. 도쿄까지 고농도 방사능 오염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특정비밀보호법으로 언론을 통제하면서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종결되었다며 일본 국민을 속이고 있다. 빨리 도쿄 올림픽을 손절매하고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진실을 알려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피해를 줄이려 노력해야함에도 일본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덮으려고만 한다. 일본속담에 "냄새나는 것에 뚜껑을 덮다.(臭いものに蓋をする くさいものにふたをする)"라는 말이 있다. 일본은 덮을 수 없는 것을 덮으려한다. 시간이 지나면 후쿠시마 원전의 재앙은 더욱 커지고 섬나라 일본은 더 이상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이 될 것이다. 왜? 일본은 스스로를 파괴하는 일을 하는 것일까?

  우치다 다쓰루는 재미 있는 일화를 소개한다. 2대 혹은 3대째 이어져 내려오는 여관의 주인이, 지역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 넣기 위해서 내려온 젊은이를 미워하고, 지역 경제를 소생하는 일을 방해한다. 결국 여관은 도산하고, 여관 주인은 타여관의 지배인이 되거나 연금 생활을 한다. 그런데, 도산한 여관의 주인은 더욱 행복한 모습이라고 한다. 왜일까? 여관일을 하고 싶지 않지만, 가업이기에 자기 손으로 여관을 문닫게 할 수 없었다. 여관주인은 차라리 지역 경제가 나빠져 도산을 한다면, 여관일을 그만해도 되기에 오히려 여관이 도산하기를 고대했다고 한다. 

  우리는 10대째 가업을 잇는 일본인을 바라보며, '전통과 가업을 중요시하는 일본의 장인정신'이라 칭찬한다. 하지만, 그러한 칭찬을 하기 이전에 가업을 넘겨 받는 사람이 진정으로 원해서 가업을 잇는지 물어보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가업을 잇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자신이 원하는 것과 과업이 일치하지 않는다면, 보통의 한국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일을 선택한다. 그러나 일본인은 가업을 선택한다.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타인의 바람에 부응해서 삶을 사는 노예들의 전형적인 모습을 일본에서 찾을 수 있다. 교토의 "시미센"을 보면서 '전통을 사랑하고 지키는 일본인'의 아름다운 모습이라 생각하기 이전에, 자신의 바램과 의지를 꺽고 전통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야하는 일본인의 노예적 삶을 생각해야했다. 

  '전통의 노예'가 되어 파산하기를 고대하는 일본인의 모습을 일본 엘리트들에게서도 볼 수 있다. 아베정권의 실정을 지적하며 아베를 권좌에서 끌어내야하는 일본 엘리트들은 자신의 책무를 방기하고 오히려 아베의 눈치만 보고 있다. 시라이 사토시와 우치다 다쓰루가 지적했듯이, 일본 엘리트들에게는 '파괴 본능'이 있는 것 같다. 마치 미국과의 전쟁은 자멸의 길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상부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면서도 1945년 8월 15일 폐허가 된 제국의 수도를 바라보면서 전쟁이 끝났다며 환한 표정을 지었다는 다수의 일본 국민들을 보는 듯하다.

  건강상의 문제로 아베는 권좌에서 물러났지만, 아베의 뒤를 이은 스가는 아베의 우경화 정책을 계승하고 있다. 아니, 더욱 강화시키고 있다. 후쿠시마 오염수를 방류하겠다며 태평양을 방사능으로 오염시키려하고 있고, '한일 위안부 합의'와 '한일 협정'을 근거로 한국과 역사 갈등을 증복 시키고 있다.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는 섬나라 일본은 물론이고, 지구의 바다를 오염시키는 일이다. 이는 물고기 소비량 세계 1위인 일본인의 건강을 위험에 빠뜨리는 것이다.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가 지구의 바다를 오염시키는 일이라면,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강제 징용 문제 부정은 한국은 물론이고 아시아 국가들의 정신을 오염시키는 일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본의 우경화 정책은 일본군부가 침략전쟁을 확대시키다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폭탄을 맞고 패망했듯이, 일본을 파멸로 몰고갈 것이다. 방사능으로 오염된 바다는 정화할 수 없으며, 역사문제로 신뢰를 잃어버린 국가는 세계의 정의로인 시민들에게 지탄의 대상이 될 것이다. 


2. "대미 종속을 통한 대미 자립"을 추구하는 일본

  2019년 아베는 트럼프에게 275만톤, 약 600억엔(약 6650억원)의 옥수수를 강매당했다. 아베는 “아베 정부가 미국에 아양 떨려고 세금을 마구 쓰고 이를 또 은폐했다”는 비난을 일본 국민들에게 들었다. 한국에게는 너무도 뻔뻔한 일본이, 미국에게는 너무도 작아진다. 이해할 수 없는 일본의 저자세 대미외교를 일본의 우익정치인들은 "대미 종속을 통한 대미 자립"정책이라 말한다. 

  "대미 종속"과 "대미 자립"은 서로 상반된 말이다. 마치 술을 마시고 운전대를 잡았으나, 음주운전은 아니라는 말과 비슷하다. 일본의 "초사대주의" 외교를 우치다 다쓰루는 오다 노부나가에게 잘보여 출세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예로들어 설명한다. 천한 신분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벼락 출세할 수 있었던 이유는 추운 겨울에 주인의 신발을 가슴에 품으며 오다 노부나가에게 충성을 했기 때문이다. 가게 점원이 열심히 일을 해서 가계 주인에게 잘보이면, 주인이 점원에게 분점을 차려줄 것이라는 헛된 기대를 일본은 하고 있다. "대미 종속을 통한 대미 자립"정책으로 오키나와를 돌려 받았고, 미국의 핵우산 아래 경제 성장을 이뤘다. 이러한 행운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는 헛된 기대를 일본 우익은 하고 있다. 

  "대미 종속을 통한 대미 자립"을 이루기 위해서 일본은 미국에게 굴욕적인 비밀 조약을 체결했다. 아베의 외할아버지인 기시 노부스케는 CIA 요원으로 일했다. 그뿐 아니다. 점령국 소속 장교(장군)가 자신의 부인이 마음에 든다고 하면, 자신의 아내를 내주기까지 했다. 자신의 침실을 미국 장교(장군)에게 내어주고, 아내를 첩으로 바치면서도 "대미 종속을 통한 대미 자립"을 꿈꾼 것이 일본 우익들이다. 그러면서도 이러한 굴종적인 모습을 일본 국민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미국과 대등하게 겨루는 일본국 대표", "미국은 일본에 변함 없는 애정을 갖고 있다."라는 모습을 연출하기 위해서 굴종적인 대미외교를 계속한다. 

  미군 점령기 일본의 우익들은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미치지 않고서는 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일본 우익들은 이 시기를 참고 견딘다. 칼이 지배하는 천년이 넘는 막부시대를 살아온 그들이기에 분노와 울분을 참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필수적 행동임을 잘 알고 있다. 자신의 상관에게 잘보이려 마음에도 없는 말을 잘하는 사람은 비루해진다. 비루한 사람은 강자에게는 한없이 비굴해지고, 약자에게는 한없이 폭압적으로 굴림한다. 미국에게는 굴종적 저자세 외교를 하지만, 한국과 아시아의 약소국에게는 태평양전쟁시기 일본의 만행을 부정하며 폭압적 외교를 전개는 일본의 모습에서 '비루함'을 엿본다. "대미 종속을 통한 대미 자립"이라는 외교전략을 계속 유지하는 이상 일본의 '비루한' 외교는 계속될 것이다. 


3. 무엇이 프랑스를 전승국으로, 일본을 전범국으로 만들었는가?

  프랑스는 전승국일까? 전범국일까? 드골의 '자유 프랑스'를 처칠과 루스벨트는 처음부터 프랑스의 대표로 인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비시 괴뢰정권을 프랑스 대표로 인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리를 드골의 '자유 프랑스'와 레지스탕스가 해방시키고, 샹젤리제 거리를 행진하자, 미국과 영국은 드골을 인정했다. 패텡의 비시정권을 프랑스의 대표로 본다면, 프랑스는 점범국가이다. 반면, 얼마 안되는 드골의 '자유 프랑스'를 프랑스의 대표로 인정한다면, 프랑스는 전승국이된다. "좋은 프랑스인이 모두 일치하여 대독 협력자와 싸워 독일군을 내쫓았다."라는 이야기는 만들어진 신화이다. 사실 레지스탕스가 본격적으로 활동한 것은 독일군의 패전이 눈앞에 다가왔을 때이며, 독일에 협력했던 상당수의 사람들이 스스로 레지스탕스임을 주장하기도 했다. 

  우치다 다쓰루는 프랑스 이야기를 하면서, 패전을 부인하는 상태를 일컫는 "영속패전"은 프랑스에서도 계속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비시 정권 참여자가 제4공화국에 참여한 프랑스나, A급 전범임에도 전후 일본 수상이 되거나 정치무대 뒤에서 영향력을 행사한 일본이나 "영속 패전"상태인 점은 비슷하다. 그렇다면, 일본과 프랑스의 차이가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무엇이 프랑스를 '전승국'으로 만들고, 일본을 '전범국'으로 만들었을까? 

  우치다 다쓰루와 시라이 사토시는 프랑스와 일본이 "영속 패전" 상태라는 점은 같지만, 그속에서 프랑스와 일본의 다른점을 찾아내지는 못했다. 프랑스가 나치에 협력한 자들을 숙청하고 미국의 독주에 대해서 당당히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는 국가로 인식되는 반면, 일본은 점범들이 다시 정권을 잡고 과거의 잘못에 반성을 하지 않는 비도덕적인 국가로 인식되고 있다. 같은 "영속패전"상태이지만, 프랑스와 일본은 너무도 다른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프랑스와 일본은 무엇이 다를까?

  그차이는 너무도 작은 차이에 있다. 비시정권이 활개칠때, 드골은 "자유 프랑스"를 만들어 독일에 대항했다. 비록 미약하지만 레지스탕스들이 독일에 대항해 투쟁했다. 반면, 일본에는 "자유 프랑스"도 없었고, "레지스탕스"도 없었다. 천황을 부정해야하는 공산주의자들 마져도 눈물을 흘리며 천황제를 버릴 수 없다며 전향서를 썼다. 그리고 일본인들을 그 전향서를 감동 깊게 읽는다. 

  김구 선생 암살범 안두희를 처단한 박기서 의사는 "바다가 썩지 않는 이유는 3%의 소금 때문이다."라는 말을 했다. 바닷물에 녹아 있는 소금의 양은 바닷물에 비하면 너무도 작다. 그러나 3%의 소금이 있기에 바닷물은 썩지 않는다. 프랑스에는 3%의 소금과 같은 존재가 있었지만, 일본에는 소금과 같은 존재가 3%조차 되지 않았다. 로마의 시인 유베날리우스는 제정 초기 로마 주민들을 "정치적 소신도 없이 물질적 이득과 쾌락만 쫓는다."라고 비판했다. 3%의 소금과 같은 깨어 있는 시민이 없는 로마는 결국 공화정이 무너지고, 제정이 등장했다. 이렇듯, 작은 차이가 폭주하는 일본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영속패전"의 상태로 만들었다. "대중을 다루는데는 빵과 서커스면 충분하다."라는 히틀러의 말이 일본에는 아직도 유효한 명제로 남아 있다. 3%의 소금과 같은 깨어 있는 시민이 없다면, 히틀러의 말은 앞으로도 유효할 것이다.



  영화 "고질라"를 기억하는가! "고질라"는 원래 일본에서 창작된 작품이다. 우치다 다쓰루는 고질라를 "근대 일본 시스템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폭력적 억압, 죽은 자들의 원한, 잃어버린 전통, 더럽혀진 산하와 같이 일본인이 내버린 것들의 복수담"으로 해석한다. 일본이 내다 버린 것에는 아시아 태평양의 수많은 희생자들도 있다. 그렇다면, "고질라"의 출현을 막기 위해서, 수많은 희생자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서 일본이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무엇일까? 그것은 올바로 역사교과서를 서술을하고 이를 일본 학생에게 가르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한다. "냄새 나는 것에 뚜껑을 덮는다."고 냄새가 사라지지 않는다, 뚜껑의 틈을 비집고 냄새는 다시 새어 나온다. 역사를 가르치지 않는다고 일본이 저지른 전쟁범죄가 사라지지 않는다. 전세계의 소녀상을 없앤다고 일본의 전쟁 범죄가 사라지지 않는다. 일본이 아시아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증대 시키길 원한다면, 과거의 잘못을 직시하고 반성하고 반성을 행동으로 증명해야할 것이다. 그러나, 일본에게서 이러한 모습을 기대하는 것은 너무도 요원한 일이다. 과거를 반성하지 않고, 피해국이 약소국이라며 무시하는 일본의 태도가 변하지 않는다면, 2011년 3월 11일 후쿠시마에서 "고질라"가 출현했듯이, 다시 한번 "고질라"가 출현하여 일본 열도를 삼킬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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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용한글역주 - 도올 선생의
도올 김용옥 지음 / 통나무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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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올 김용옥! 1948년 6월 14일생으로 올해 나이 72세이다. 적지 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활발한 저술활동과 강연을 하는 철학자이다. 일생을 고전과 힘든 씨름을 하던 그가, 이제 인생의 황혼기에 자신의 연구를 집대성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그의 책 '논어 한글 역주'를 시작으로 '대학 한글역주'를 읽고, '중용 한글역주'를 읽었다. 고전은 단번에 읽어 버리기 힘든 책이다. 일명 '사서'로 불리우는 책들은 하루 한줄씩, 일주일에 한줄씩 적어가며 음미해야 그뜻과 맛을 느낄 수 있다. 조급한 마음을 가지고 책에 메달려서도 안된다. 여유로운 마음으로 인생을 음미하며 곱씹어봐야 겨우 그 의미와 맛을 느낄 수 있다. 유튜브에서 '도올-중용, 인간의 맛(1~36강)'을 보면서, 책을 함께 읽었다. 도올의 '중용한글역주'를 읽으며 놀라운 것은, 고전에 대한 학설도 패러다임 쉬프트(paradigm shift)를 한다는 사실이다. 이토오 진사이의 중용 3분설, 타케우찌 요시오의 중용2분설을 비롯한 기존의 정설은 '중용'이 자사의 초간 이후에, 후대학자들이 제1장과 21장 이후를 추가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무덤에서 발견된 곽점본 죽간이 출현하면서 기존학설들이 무너졌다. 도올 김용옥은 '중용한글역주'를 저술하면서 이러한 새로운 학설들을 종합해서 자신만의 관점을 정립하고 중용을 해설하였다. 끊임 없이 절차탁마하는 노학자의 모습에 경외감을 느낀다. 도올 김용옥! 그가 '팔만대장경 판본보다 중용한줄이 낫다'라고 극찬한 중용의 맛을 맛보자.


1. 민폐 종교인에게 경종 울리기.

우리는 좀비들과 살고 있다. 옳고 그름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고 일부 목사의 독단적인 말을 무조건 추종하는 좀비들이 모여서 코로나19를 옮기는 숙주역할을 하고 있다. 정부에서 집회를 금지시키자, 표현의 자유를 말살한다며 발악을 한다. 놀이 공원은 허용하면서 종교집회는 금지한다며 생떼를 쓴다. 중용 28장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자왈 우이호자용천이호자전생호금지세반고지도여차자재급기신자야(子曰 愚而好自用賤而好自專生乎今之世反古之道如此者災及其身者也,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어리석으면서도 자기 생각만을 고집하려 하고, 신분이 낮으면서도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려 하고, 지금 세상에 태어나 지금 세상의 법도로 살고 있으면서도 옛날의 도로만 돌아라려고 하는 자들이 많다. 이와 같은 사람들은 재앙이 그 몸에 미칠 수밖에 없다.)


 어리석은 자들이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지 못하며, 현정권을 비판한다. 그 내용을 들어보면 황당한다. 한예로 문재인 대통령이 금20톤을 뇌물로 받았다.라는 내용은 너무도 황당하다. 우리 한국은행에 있는 금보다도 더 많은 금을 물리적으로 가지고 있을 수 없음을 그들은 모르고 있다. 자기 생각만을 고집하며, 행동을 제멋대로 하고, 민주 정권 시기를 살면서 깡패가 활개치는 자유당 정권에 사는 것처럼 행동하고 그 시절로 돌아가려한다. 결국 그들에 의해서 코로나 19 재앙이 그들 뿐만 아니라, 이 사회에도 미친다. 

  그들은 또 말한다.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지 말라고... 나는 그들에게 유학의 "예법"을 배우라고 말하고 싶다. 


  "공자가 말하는 "예법"이나 제식은 현재 기독교나 유대교 이슬람류의 교리가 말하는 제식이 아니다. "예법"은 "예배"가 아니다. 모든 "예배"란 결국 "귀신에 대한 복종과 찬미와 희생"을 의미한다. 유교의 "예"에도 "배"는 있으나, 그 "배"는 신 앞에 무릎을 꿇는 "절"이 아니라, 신에게 경외감을 표현함으로써 신을 차단시키는 인문의 결단이다. "예법"은 신에 대한 "신앙"을 유도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신과 인간의 사이에 거리를 확보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아무리 주대의 예법 사회가 진행되어도 서양의 종교전통에서 문제가 되는 사회병폐는 일체 발생하지 않았다. -123~124쪽


  원시유가에서는 '교회가 교회를 탄압'하는 잘못이 벌어지지 않았다. 신에게 경외감을 표현하고, 신에게 거리를 확보한다면, 종교가 인간을 억압하는 서양 중세의 병폐는 없었을 것이다. 중세시기 흑사병이 전유럽을 휩쓸고 다니는데도 사람들은 교회라는 밀폐된 공간에 모여서 구원을 빌었다. 그러나, 밀폐된 공간에서 흑사병은 더 쉽게 전파되었고 많은 사람이 죽어갔다. 일부 교회의 대면예배와 소모임이 코로나 19를 전파 시키고 있는 현실은 중세 흑사병의 유행과 너무도 유사하다. 그들은 "예배"가 아닌, 유교의 "예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 그것이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는 지혜일 것이다. 


2. 못난 정치인에게 경종 울리기

  적폐세력들이 개혁세력을 비판하는 아이런이한 정치현실이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 독재세력들이 하던 방식으로 검찰권력과 국정원, 경찰 등의 권력기관을 이용해서 폭압 통치를 했다면, 찍소리 못하고 숨죽였을 세력들이, 민주세력이 집권하면 민주주의를 악용하여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인권과 자유, 민주주의를 외친다. 민주적 헌법에 의해서 국가조직이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적폐세력이 집권하면 민주적 시스템이 망가진다. 민주 세력이 집권하면 그들은 민주적 시스템을 이용해서 민주세력을 비판한다. 이에 대해서 중용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자왈 문무지정 재방 기인존즉기정거 기인망즉기정식(子曰 文武之政 布在方策 其人存則其政擧 其人亡則其政息) 공자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시었다. "문왕과 무왕의 훌륭한 정치는 목판이나 간책에 널브러지게 쓰여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가치를 구현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그 정치는 흥할 것이고, 그러한 사람이 없으면 그 정치는 쇠락하고 말 것입니다." -중용 20장


  훌륭한 정치에 대한 책들이 널브러져 있다 할지라도, 그 가치를 실현할 사람이 있으면 정치는 흥하고, 그러한 사람이 없으면 정치는 쇠락하게 된다. 사람이 아니라, 시스템에 의해서 사회와 국가가 움직여야한다. 그러나 그러한 시스템이 갖춰졌다한들, 이를 현명하게 움직일 사람이 없다면, 민주적 시스템은 쉽게 붕괴한다. 적폐세력의 못난 행동에 두눈 부릅뜨면서 감시하는 깨시민이 되어야한다. '깨어있는 참된 시민'이 되어야한다. 그리고 민주주의를 수호할 수 있는 정치인을 뽑는 현명한 투표가 행해져야한다.

  깨어있는 백성, 깨어있는 시민들이라면, 어리석은 정치인들의 사탕발림말에 속지 않을 것이다. 반드시 많이 배웠다고 깨어있는 시민이 되는 것은 아니다. 많이 배우지 못한 자라할지라도, 인생의 지혜를 갖춘자라면 몸으로 참된 정치인과 어리석은 정치인을 구분할 수 있다. '중용한글역주'에 소개된 '회남자'의 일부분을 살펴보자. 


 동언이신 신재언전야(同言而民信 信在言前也동령이민화 성재령외야 (同令而民化 誠在令外也) 똑같은 언어로 말을 해도 백성들이 그 것을 믿는 것은 그 믿음이 바로 언어 이전에 있기 때문이다. 보통사람들이 내리는 똑같은 명령을 내렸는데도 백성들이 그것을 받아들어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은 그 지도자의 성의가 그 정령 밖에 있었기 때문이다. -234~235쪽


  아무리 사탕발림말을 국민에게 한다할 지라도 현명한 국민은 적폐 정치인들에게 믿음을 주지 않는다. 우리가 '바보 노무현'과 그의 친구를 지지하는 것은 '바보 노무현'과 그의 친구들의 말 이전에 그들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 민주세력이 보여주었던 '성의'가 너무도 감동적이기 때문에 민주세력에 대한 지지를 철회할 수 없는 것이다. 반면 적폐세력이 뭐라해도 그들을 믿지 않는 것은, 그들이 지난 10년 동안 보여준 적폐세력의 막장행동 때문이다. 말보다는 '정성(誠)'과 '애정(情)'이 먼저라는 동양적 사고방식을 적폐세력은 명심해야할 것이다. 

  중용에는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 적폐세력을 배려하는 말도 있다. 중용 20장을 보자. 


 성신 유도 불명 호선 불성호신(誠身 有道 不明 乎善 不誠乎身矣)자기 몸을 성실하게 하는 것은 방법이 있으니, 선을 명료하게 인식하지 못하면 몸을 성실하게 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중용 20장


  자신의 몸을 성실하게 해야 수신제가 치국평천하할 수있다. 갈피를 못잡고 있는 수구세력은 사회가 원하는 정도를 걷지 못하고 있다. 일정한 목표없이 민주세력을 물어뜯고 흠집내기에 혈안이 되어있다. 몸을 성실하게 하기 위해서 우선 수구세력은 사회의 '선'을 명료하게 인식해야한다.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면 할 수록 그들은 자신의 몸을 성실하게 하지 못하게 된다. 그들이 사회의 '선'을 명확히 인식하고 이를 실천하려 한다면, 그들은 더 이상 적폐세력일 수 없다. 수구세력이 적폐에서 벗어나, 사회적 공공선을 추구하는 대열에 참여하길 바래본다. 


3. 배우고 가르치는 자에게 경종 울리기

  유학은 교육을 강조한다. 중용에도 학문을 어떻게 해야하는지 안내하는 글이 있다. 


 박학지심문지 신사지 명변지 독행지(博學之 審問之 愼思之 明辨之 篤行之) 널리 배우십시오. 자세히 물으십시오. 신중히 생각하십시오. 분명하게 사리를 분변하십시오. 돈독히 행하십시오. - 중용 20장


  학문을 배우면서 널리 배우고, 자세히 묻고, 신중하게 생각하며, 사리를 분명하게 판단하고, 돈독히 행하는 자세야 말고 참다운 배움의 자세이다. 학급의 급훈으로도 손색없는 명문이다. 

  그렇다면,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에게 좋은 글귀는 없을까? 중용 22장에 교사들이 가슴에 담으면 좋은 글귀가 있다. 


   유천하지성 위능진기성(唯天下至誠 爲能盡其性) 능진기성 진인지성(能盡其性則 能盡人之性 ) 오직 천하의 지극한 성이라야 자기의 타고난 성을 온전히 발현할 수 있다. 자기의 타고난 성을 온전히 발현할 수 있게 되어야 타인의 성을 온전히 발현케 할 수 있다. -중용 22장


  교사가 학생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부단히 자신을 갈고 닦에야한다. 교사는 자신이 타고난 재능을 온전히 발현해야, 학생들의 재능을 온전히 발현시킬 수 있다. 못다핀 꽃은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자신의 재능을 발현시키지 못한 교사는 학생들의 재능을 온전히 발현시킬 수 없다. 교사가 온전히 자신의 재능을 발현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까? 오직 천하의 지극한 정성이라야 자신의 타고난 재능을 온전히 발현할 수 있다. 한마디로 부단히 절차탁마해야한다는 말이다. 아무리 탁월한 재능을 가진 자라 할지라도 열심히 재능을 가록 닦지 않으면 빛을 발할 수 없다. 옥을 갈고 쪼듯이 자신의 재능을 계발하고 부족한 점은 채울 때만이 좋은 교사가 될 수 있다. 

  중용14장에는 교사와 학생 모두가 가슴속에 새겨듣는다면 좋은 글귀도 있다. 


  정기이구어인즉무원(正己而不求於人則無怨) 상불원천(上不怨天) 하불우인(下不尤人) 오직 자기 자신을 바르게 할 뿐, 타인에게 나의 삶의 상황의 원인을 구하지 아니 하니 원망이 있을 수 없다. 위로는 하늘을 원망치 아니 하며, 아래로는 사람을 허물치 아니 한다.-중용 14장, 391쪽


  사람이라면 누구나 불행이나, 자신의 잘못을 남탓으로 돌린다. 때로는 하늘을 원망하기도 한다. 인간이라면 자연스럽게 발동하는 방어기재일 수도 있다. 그러나 굳은 신념을 가진 사람이라면 자신의 불행이나 잘못을 외부에 돌리기 보다는 자신의 내면을 성찰할 것이다. 그래서 중용에는 오직 자기 자신을 바르게 할 뿐, 타인에게 나의 삶의 상황의 원인을 구하지 아니한다고 했다. 또한 위로는 하늘을 원망하지 아니하고, 아래로는 타인의 허물을 탓하지 않는다. 자신의 책임을 절대 존재에게 돌리거나, 자신보다 힘이 약한 아랫사람에게 돌리지 않는 유교 철학에 깊은 경의를 표한다. 우리 학교 현장의 교사와 학생이 이러한 마음 가짐을 가진다면, 학교는 보다 즐겁고 아름다운 곳이 될 것이다. 


4. 세계 정치인들에게 경종 울리기

  트럼프라는 세계에서 가장 별난 정치인이 미국을 뒤흔들고 있다. 그리고 트럼프가 이끄는 미국이 무섭게 부상하고 있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 무역전쟁을 벌이고 있다. 미국은 중국을 가상의 적으로 생각하며 미리 견제를 하고, 중국은 발톱을 숨기고 힘을 키우는 '도광양회(韜光養晦)'에서 벗어나, 강대국으로 도약하는 '대국굴기(大國崛起)'를 하려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과 중국의 대결은 필연적이라 할 수 있다. 미국과 중국의 정치인들에게 도움이 될 수있는 글귀가 중용에 있다. 


  후왕이박래 소이 회제후야(厚往而薄來 所以懷諸侯也) 가는 것은 후하게 하고 오는 것은 박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제후를 회유하는 것이외다. - 중용 20장, 509쪽

  

  남녀 사이가 연인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먼저 베풀어야한다. 국가와 국가 사이도 마찬가지이다. 가는 것이 후해야 오는 것이 후할 수 있다. 중국과 미국이 후하게 주고 박하게 받으려하지 않고, 서로 작하게 주고 후하게 받으려 한다면 두세력 사이의 불화는 끝이 없을 것이다. 춘추 전국 시대를 살았던 공자와 공자의 손자 자사가 추구했던 평화로운 시대는 더 갖으려는 욕심보다, 보다 많이 배풀려는 풍성함이 이루어낼 수 있다. 

  유교의 황금률이라할 수 있는 문장을 살펴보면, 중국과 미국이 어떠한 관계를 맺어야하는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시제기이불원 역물시어인(施諸己而不願 亦勿施於人) 자기에게 베풀어보아 원하지 아니 하는 것은 또한 남에게도 베풀지 말지어다. - 중용 13장, 353쪽


 이 문장은 '논어'에도 실려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라 하여 이를 남에게 강요한다면 이는 자기중심적 사고에 빠져 타인에게 폭력을 행하는 것이다. 제국주의자들이 자신들이 가진 물질문명을 선한 것으로 여기고 타문화를 야만적으로 몰아붙인다. 그리고 자신의 문화를 '글로벌 스탠다드'라며 받아들이기를 강요한다. 

  반면, 유가에서는 자기에게 베풀어 보아 원하지 아니하는 것은 타인에게도 강요하지 말라한다. 내가 싫은 것은 타인도 싫어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설령 내가 싫어하는 것을 타인이 좋아할 수도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내가 강요하지 않았다고해서 타인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은 아니다. 이는 미국과 중국 사이의 관계에서도 적용될 수 있다. 미국과 중국이 각자의 문화를 절대선으로 여기며 강요한다면 이는 새로운 문화 제국주의 시대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중용'에서 말하는 아름다운 세상은 어떠한 세상일까?


  물병육이불상해 도병행이불상패(萬物竝育而不相害 道竝行而不相悖) 저 대자연에 피어나는 만물들을 보라! 저 만물들은 서로 같이 자라나면서도 서로를 해침이 없다. 저 대자연을 수놓은 무수한 길들을 보라! 저 길들은 서로 같이 가면서도 서로 어긋남이 없다. - 중용 30장, 608쪽


  불교의 화엄세상을 보는 듯하지 않은가! 광활한 들판에 다양한 종류의 꽃들이 장엄하게 제각각 피어있는 세계!! 그 세계가 바로 화엄의 세계이다. 놀랍게도 '중용'에도 그 화엄의 세상을 노래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 대자연에 피어난 수많은 꽃과 풀들이 서로를 해치지 않고, 수많은 세상의 길들이 서로 어긋나지 않은 세상! 바로 그것이 유교에서 말하는 이상 세계이다. 

  우리 세상이 이러한 화엄 세상이 된다면 얼마나 아름답겠는가! 서로 못난 것도 없으며, 잘난 것도 없다. 제각각 자신의 모습으로 세상을 수놓으면 된다. 미국을 따를 필요도 없으며, 중국을 따를 필요도 없고, 나와 같아지라 강요하지 않는 세상!! 그것이 바로 화엄 세상이다. 어떠한가! 시진핑과 트럼프는 화엄세상을 이땅에 만들 용의가 없는가?


5. '중용'에 경종 울리기

  '중용'은 좋은 고전이다. 그러나, 고전의 모든 부분이 현대 사회에 어울리는 것은 아니다. 고전이 만들어지던 시기의 시대적 한계를 뛰어 넘지 못한 부분도 엄연히 존재하기 대문이다. 고전을 맹종하고 고전에 대한 비판적 수용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또다른 도그마에 갖혀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된다. '중용'이 좋은 고전이기는 하나, 우리 삶에 적합하지 못한 구절들을 살펴보고 현대적 의미에 맞도록 새롭게 해석해보자. 

  

君子之道四 '丘'未能一焉 군자지도사 ''미능일언 (중략) 所求乎臣 以事君 未能也 (소구호신 이사군 미능야) 군자의 도는 넷이있구나, 나 구는 그 중 한가지도 능하지 못하도다! (중략) 신하에게 바라는 것으로써 임금을 잘 섬겼는가? 나는 이것에 능하지 못하도다. -중용 13장, 364쪽


  신하에게 바라는 것으로써 임금을 잘 섬긴다면, 제대로 국가가 잘 통치될까? 임금이 신하에게 요구하는 것은 절대적 복종일이다. 선조처럼 백성의 안위보다는 자신의 왕권의 안정만을 추구하는 임금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한 마음으로 임금을 섬긴다면 백성의 삶이 편안해질 수 있을까? 또한 신하는 특권층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만을 옹호하며 백성들의 삶에 반하는 정책을 입안할 수도 있다. 조선시대 대동법이 전국으로 확대되는데 100년의 시간이 필요했던 이유는 기득권층으로 대표되는 신하들과 조선의 양반 지주들의 반발 때문이다. 요즘, 사법부의 사법농단에 대한 제대로 된 법의 심판이 이뤄지지 않는 것도 사법부가 특권 세력화 되었기 때문이다. 검찰개혁이 이렇게 지지부진한 것도 검찰이 특권세력화 되었기 때문이다. 신하에게 바라는 것으로써 임금을 섬긴다면, 기존의 특권세력이 이익은 증대되겠지만, 백성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질 것이다. 

  그렇다면, 이를 어떻게 수정해야할까? '백성에게 바라는 것으로써 임금을 잘 섬겼는가?(所求乎民 以事君)으로 수정해야한다. 나라의 기반인 백성의 마음으로 임금을 섬겨야 나라가 건강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현재에도 유효한 문장이 될 것이다. 


 去讒遠色 賤貨而貴德 (거참원색 천화이귀덕) 所以勸賢也 (이권현야) 모함하는 이들을 제거하고 여색을 멀리하며, 재물을 낮게 여기고 덕을 귀하게 여김은 현인을 권면하는 것이외다.-중용 20장, 508쪽


  재물을 낮게 여기고 덕을 귀하게 여김은 현인을 권면하는 것이라는 문장이 이의를 달아본다.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재문을 더러운 것으로 여기고 덕을 귀하게 여긴다. 그러나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는 자본 즉, 돈을 귀하게 여긴다. 재물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은 가난하게 살 수 밖에 없다. 절대빈곤의 상태에 빠지면, 덕을 갖춘 선비로서의 품위조차도 유지하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덕'과 '재물'을 대비시켜 마치 '덕'과 '재물'이 상극인 것처럼 표현한 것은 오늘날에 맞지 않는 표현이다. '덕을 귀하게 여기면서도 재물에 노예가 되지 않고, 재물에 주인이 되는 사람이 현명한 사람이다.'로 수정해야한다. 돈에 노예가 된다면 그 사람의 삶은 삭막해질 것이다. 그러나 돈에 주인이 된다면, 돈을 의로운 곳에 쓰면서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 것이다. 돈을 더러운 것으로 여겨 가난에 허덕이기 보다는 돈에 주인이 되어 돈으로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도록 해야한다. 


  仁者人也 親親爲大 (인자인야 친친위대) 인이라는 것은 발음 그대로 인입니다. 사람의 근본바탕의 감정이지요. 인의 세계에 있어서는 가장 친근한 사람을 친근하게 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중용 20장, 478쪽


  '親親爲大 (친친위대)'를 어떻게 해석해야할까? 친족을 친하게 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해석할 수도 있고, '가장 친근한 사람을 친근하게 한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학연과 지연, 혈연을 중시여기는 우리와, 관시를 중시여기는 중국 사회의 모습이 '親親爲大 (친친위대)'에서 출발한 것은 아닐까? 학연과 지연, 혈연을 중시여기는 우리의 풍토가, 각종 불합리한 결과로 이어지는 결과가 많이 나온다는 사실을 우리는 직시해야한다. 중용의 여러 문장 중에서 우리가 이부분을 가장 유의해서 읽어야한다. 친한 사람을 친하게 대하는 것과, 친하다는 이유로 각종 불합리한 특혜를 준다는 것은 분명 다른 이야기이다. 친함이 지나쳐, 불합리한 특혜가 발생하지 않도록 우리는 '親親爲大 (친친위대)'를 주의해서 해석하자.

  '중용'의 일부 문장이 현재 우리의 삶과 어울리지 않는 문장이 있지만, 놀랍게도 현재에도 유효한 문장이 많다. 그중 한문장을 살펴보자. 


 군자지도 조단호부부(君子之道 造端乎夫婦) 기지야 천지(及其至也 察乎天地) 군자의 도는 부부간의 평범한 삶에서 발단되어 이루어지는 것인, 그 지극함에 이르게 되면 하늘과 땅에 꽉 들어차 빛나는 것이다.-중용 12장, 346쪽


  보통 유학이 여성을 비하한다는 비난을 받는다. '논어'에도 소인과 여자는 다루기 힘들다는 공자의 말이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중용'에는 '부부'를 군자의 도가 부부에서 시작이 된다고 말하고 있다. 남자와 여자의 조화로운 관계가 군자의 도가 시작되는 시초라는 말은, 독신을 사제의 조건으로 여기는 타종교와는 대조적인 부분이다. 음과 양의 화합과 조화를 추구하는 유교와 달리, 일부 종교에서는 본성과는 배치되는 독신을 강요한다. 참다운 깨달음은 부부의 인연을 맺으면서도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니 유교의 합리성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알 수 있다. 도가에서 은거하는 방법중에서 산속에 들어가 속세와 인연을 끊고 사는 것보다, 군중 속에서 은거하는 것을 가장 높은 경지로 보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부부사이의 조화로운 관계를 이룬는 것을 중시여긴 점을 긍정적으로 해석한다면, 유학이 여성 비하적이라는 주장에 반론을 제기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중용'은 4서 중에서 가장 어려운 경전으로 알려져있다. "天命之謂性(천명지위성)이요 率性之謂道(솔성지위도)요 修道之謂敎(수도지위교)니라"라는 장엄한 문구로 시작하는 '중용'은 불교와 같은 고차원적 철학서적보다는 읽기가 약간 수월했다. 이 책을 읽을 때 박학다식한 도올 김용옥의 풍부한 설명이 '중용' 이해를 수월하게 해주었다. 때로는 도올이 인용한 많은 책들이 중용의 글귀보다도 더 가슴에 와닿았다. 특히 '순자-불구'편의 한구절이 인상 깊다. 


  "하늘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지만 사람들은 그 높음을 예찬하고, 땅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지만 사람들은 그 후덕함을 존숭한다. 사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지만 사람들은 그의 예견된 움직임에 따라 삶을 설계한다. (天不言而人推高焉(불언이인추고언地不言而人推厚焉(지불언이인추후언), 四時不言而百姓期焉(사시불언이백성기언).)"


 대자연은 아무런 말도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대자연을 숭상하고 그에 맞춰 살아간다. 사람도 그와 같은 도량을 갖춘다면 주변 사람이 추앙하지 않겠는가! 스승이나 부모가 대자연과 같이 살아간다면, 학생들과 자녀가 참다운 사랑을 받으며, 참다운 사랑을 베풀며 삶을 살아갈 것이다. '중용'을 덮으며, 그러한 삶을 살아가기를 기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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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박은정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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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 우리에게 전쟁은 어떠한 이미지인가? 헐리우드 블럭버스터에서 전쟁은 대부분 남성 영웅이 남성성을 과시하는 장이다. 여성들의 역할은 남성들보다 빛나지 않는다. 전쟁은 남성의 것이며, 여성은 전쟁의 피해자라는 등식을 머릿속에 새기고 전쟁을 바라본다. 이러한 편견에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도전한다. 직접 전쟁을 겪은 여성들을 찾아가 그녀들의 목소리를 듣는다. 남성들의 영웅 서사에 가려져, 침묵을 강요받았던 그녀들의 이야기를 역사 속에서 되살려냈다. 전쟁은 남성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며, 영웅들만을 등장시키는 서사시가 아님을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증명한다. 남성들의 영웅서사에 의해서 지워지고 가리워졌던 여성들의 전쟁이야기를 들어보자.

 

 

1. 무엇이 소녀들을 최전방으로 이끌었는가?

당신은 총알이 빗발치는 최전선에 자원할 수 있는가? 행정병으로 안전한 후방에 있으라는 권유를 뿌리치고 최전선으로 보내달라며 최고 지위관 동지에게 당당히 요구할 수 있는가? 남성들도 쉽지 않은 행동을 여성이, 그것도 17, 18살 소녀들이 했다. 그리고 당당히 최전선에 배치되어 저격병으로, 전투기 조종사로, 빨치산 대원으로 활약했다. 스탈린으로 상징되는 공산당에 의해서 전쟁에 강제로 떠밀려 갔을 것이라는 우리의 추측은 산산조각났다. 책을 읽는 동안, 나의 머릿속에 맴돌았던 가장 큰 의문점은 "무엇이 소녀들을 최전방으로 이끌었는가?"이다. 조국을 지키기 위해서 어머니의 간곡한 만류를 뿌리치고 최전선으로 전투병으로 자원해서 나갔다. 무엇이, 무엇이 그녀들을 이끈 것일까?

이 책에 등장하는 수많은 소녀들이 중앙위원회와 모병사무소를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며 최전선에 보내달라고 요구했다. 어느 모녀 일가족이 단체로 자원입대하기도 했으며, 남편과 아내가 같이 자원입대하기도 했다. 때로는 군에 입대하지 말것을 간곡히 요구하거나 심지어 묶어 놓는 경우에도 집을 탈출하여 전쟁터로 나갔다. 어느 어머니는 '너의 아버지도 전쟁터에 갔으니, 이제 너도 전쟁터에 나가야하지 않겠니?'라며 자신의 딸을 전쟁터로 보냈다. 공산당의 강요에 의해서 그렇게도 많은 소녀들이 전쟁터에 갔다고 볼 수 없다. 그녀들이 전쟁터에 스스로 달려간 이유를 추측해보았다.

우선, 교육의 힘을 떠올릴 수 있다. 소녀들은 나라를 사랑해야한다고 학교에서 배웠다. 조국이 파시스트들에게 짖밟히는 현실을 피끓는 소녀들이 가만히 지켜볼 수 없었다. 당시 소련은 독일과의 전쟁을 '대조국전쟁'이라 부르는 이유도 이러한 맥락에서 였을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전쟁은 곧 끝날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그녀들이 학교 교육만으로 조국을 사랑할 수 있을까?

두번째로 추측할 수 있는 것이,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서면서, 일대 개혁이 이뤄졌다는 사실이다. 공산정권은 차르체제를 전복시켰으며, 자본가와 귀족, 지주들을 없애버렸다. 농노로 노예처럼 살아야했던 농민들의 입장에서는 공산정권이 고마웠을 수 있다. 이 책에 등장하는 한 여성의 아버지는 공산정권이 들어서지 않았다면, 자신은 지주 밑에서 노예처럼 일을 해야했을 텐데, 공산정권이 들어서고 나서 노예에서 해방되어 교육을 받고 다리 건설자가 되었다고 말한다. 공산 혁명 초기 노예상태에서 벗어난 러시아의 농민들은 공산정권이 고마울 수밖에 없다. 그러했기에 스탈린에 의해서 아버지와 오빠가 강제 수용소에 끌려간 상태인데도, 스탈린을 미워하는 것은 나중에 하고 조국을 먼저 구하자며 전쟁터에 자원입대한 것이다.

그렇다. 애국심은 강제로 주입한다고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조국이 나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주며, 조국은 우리 것이라는 사실을 피부로 느낄 수 있어야만이 애국심이 생겨날 수 있다. 외부의 충격에 한 나라가 쉽게 무너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정치가들은 어떠한 정치를 해야하는지를 독·소 전쟁시기 소녀병사들의 자원입대를 바라보며 깊이 있게 고민해야할 것이다.

 

2. 여성들이 기억하는 전쟁은 남성의 전쟁과 무엇이 다른가?

여성들의 전쟁 이야기를 남성들은 들으려하지 않는다. 그녀들에게 침묵을 강요한다. 여성들의 목소리를 담은 이 책에 대해서 "유치한 사실주의"라는 비판은 애교로 넘어갈 수 있다. 그러나 "여성영웅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비난과 "이런 책을 쓰면 누가 싸우러 나가겠소?"라는 비판은 남성들이 여성들의 목소리를 짖밟는 이유를 추측할 수 있게 해준다. 여성의 기억은 남성과 다르다. 남성은 적을 얼마나 죽이고, 전공을 얼마나 세웠는지에 촛점이 맞춰진다. 남성이라면 군대간 이야기를 하면서 마치 자신이 제대하면 대한민국 군대가 쓰러질 듯이 말하는 경험을 하거나, 그러한 군대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남성중심의 전쟁 서사는 새로운 영웅을 만든다. 그러한 영웅 서사는 전쟁이 일어나면 수많은 사람들을 전선으로 이끌 수 있는 마력을 제공해준다. 영웅주의는 인간을 비인간화하는 첩경이다. 인간이 영웅이 되는 순간, 일상은 없어진다. 인간은 국가의 도구로 전락한다. 그래서 출판 검열관이 "이런 책을 쓰면 누가 싸우러 나가겠소?"라며 여성의 목소리를 비판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여성들의 목소리는 전쟁을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 소녀병사들은 전쟁영웅이기 앞서, 생명을 사랑하고 예뻐지고 싶어하는 소녀였다. 최전선으로 보내달라던 소녀들이 전쟁터에서 소녀의 감성을 버리지 못했다. 몇일을 제대로 먹지 못한 소녀가 송아지를 쏘아야만 하는 현실에 괴로워한다. 오랜만에 송아지 고기가 식탁에 올라왔지만, 소녀는 먹지를 못하고 울어버린다. 다른 소녀병사들은 우는 소녀를 다독인다. 독일군을 괴롭힌 저격병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런데, 독일군을 쓰러뜨린 저격병은 대다수가 소녀 저격병이었다. 독일병사 10명을 정확히 같은 곳을 맞추어 죽인 소녀 저격병을 포로가된 독일군 장교가 만나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만나게해줄 수 없었다. 붉은 목도리를 좋아했기에 전쟁터에 나가서 붉은 목도리를 하고 있다가 표적이 되어 죽었다. 목욕하다가 목욕탕 옆에 미용실을 보자, 눈썹을 물들이며 예뻐지고 싶어한 소녀들이다. 남자들과 모닥불에서 이를 잡을 수 없어서 그 추운 겨울에 스웨터를 버린 수줍은 소녀들이다. 전쟁이 그녀들에게 군인이 될 것을 강요했지만, 그녀들은 소녀의 감성을 숨길 수 없었다. 누가 이 소녀들을 사람을 죽이는 일에 익숙하도록 만들었는가?

독일군에게 가족이 죽고, 전우가 죽임을 당했다. 그런데, 당신이라면 적국의 가족에게 자비를 베풀 수 있겠는가? 이 책에 소개된 증언에는 믿을 수 없는 일화가 많다. 먹을 것을 달라는 독일군 포로에게 자신이 가진 빵을 나눠주는 소련군 위생사관, 기관단총을 들고 달려드는 독일군 소년을 제압하고 차마 죽이지 못하고 돌려보내는 여성병사, 독일군 포로를 간호하는 간호병의 일화를 읽으며 이 이야기를 믿어도 될까?하는 생각을 했다. 독일군은 소련인을 인간취급을 하지 않았다. 수많은 학살을 저지른 독일군에게 소련군도 만만치 않은 보복을 했다. 그런데, 소련의 여성군인들의 증언에는 사랑과 용서가 녹아있다. 믿기지 않는 일화를 어디까지 믿어야할지 혼란스러우면서도 이것이 여성의 목소리로 전해진 전쟁 이야기 이기에 들을 수 있는 일화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현실이 냉혹한 전쟁시기이지만, 그녀들은 병사이기 이전에 인간으로서 가져야하는 고뇌를 잃지 않았다. 살인병기가 아닌, 인간으로서 사랑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감성을 잃지 않을 때만이, 전쟁의 비극이 다시 일어나는 것을 막을 수 있으리라...

 

3. 전쟁터의 여성들은 어떠했을까?

전쟁터에서 그것도 최전방에서 여성병사들은 어떠했을까? 동료 병사들로부터 차별과 괄시를 당하지 않았을까? 솔직히 걱정되는 부분이었다. 물론 모두다 그러하지는 않았을 것이지만, 이 책에 소개된 대부분의 증언은 남성병사들이 여성병사들을 동료로 대했다. 생리작용으로 바지가 피로 물들때는 여성병사의 다리를 보지 않으려 노력했고, 위험하다며 남성병사가 여성병사를 몸으로 보호했다. 물론, 남성병사는 부상을 당했다.

여성병사들이 남성들의 보호를 받으며 편안하게 전쟁터에서 생활한 것은 아니다. 소녀 간호병들은 전투가 벌어지는 상황에서 부상자에게 응급처치를 하고 부상자와 그의 총을 끌어 참호속으로 옮겼다. 이 과정에서 수 많은 간호병들이 죽었다. 최전선에서 활약하는 여성병사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남성병사들을 위해서 빨래를 하는 부대, 취사부대, 통신부대에서 여성들은 남성 못지 않은 활약을 했다. 그러나, 그런 여성들에게 여성이라는 이유로 훈장을 주지 않기도 했다. 조국을 지키는데 남성과 여성이 따로 있을 수 없었다. 그런데, 남성위주의 전쟁관은 여성에게 인색하게 대했다.

피끓는 남성병사와 여성병사가 전우로 만났다면, 둘 사이에 사랑은 없었을까? 어떤 남성병사는 여성병사를 형제자매로 보았기 때문에 남성병사와 여성병사들이 사랑했을리가 없다고 증언한다. 그런데, 어느 여성병사는 남성병사에게 '그 수많은 여성병사들을 당신들은 어떻게 했나요? 그녀들은 홀로 쓸쓸히 살아가요'라며 오열했다. 동료로, 형제자매로 보았다면, 남성병사들이 여성병사들이 홀로사는 것까지 책임질 필요는 없다. 그런데, 그녀는 왜? 오열한 것일까?

피끓는 청춘 남녀는 자석이 서로를 끌어 당기듯이, 서로를 끌어당긴다. 어느 커플의 경우, 전쟁터에서 전쟁이 끝나면 결혼하자고 약속했다. 전쟁이 끝나자, 둘은 결혼했고, 남편의 고향에 갔다. 그런데, 큰시누이가 '당신은 그 어떠한 권리도 없다', 여성병사가 가져온 음반을 부수고, 전선에서 가져온 사진을 찢었다. 남편의 어머니는 '네가 이러면 너의 두 동생은 어떻게 시집가니?'라며 아들을 나무랐다. 조국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싸운 전우다. 파시스트들로부터 조국을 구한 그녀에게 남편의 가족이 차마할 수 없는 말과 행동을 했다.

이 이야기는 그래도 나은 편이다. 둘은 결혼했으니까.... 많은 경우, 전쟁이 끝나자 남성병사는 여성병사를 외면했다. 혹은 결혼 했으나, '당신에게서는 군화냄새가 나지만, 다른 여성에게서는 향수 향기가 난다', 이혼을 하고 다른 여성에게 가버린 사례도 많다. 남성병사가 전쟁터에서 살아돌아오면 전쟁영웅이 되지만, 여성병사가 전쟁터에서 살아돌아오면, 자신의 훈장을 숨기고, 조국을 위해서 목숨바쳐 히틀러의 병사들과 싸웠다는 사실을 입밖에 내서는 안되었다. ? 여성병사들이 이러한 모욕을 겪어야하는가? 남성병사와 여성병사가 무엇이 다르기에???

그러나, 이들 여성보다 더 가여운 여성이 있다. 페페제라는 불리는 여성들이다. 번역하면 '전장의 아내'라는 뜻이다. 남성들로 둘러싸인 전선에서 안전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한남자를 선택하는 편이 났다고 판단한 여성들이 지휘관의 여성이 된다. 전쟁터에서는 사랑을 나누지만, 전쟁이 끝나면 남성은 자신의 아내와 아이들에게 가버린다. 이책의 페페제는 전쟁이 끝나지 않기를 바라기도했다. 자신을 버리고 가족에게로 가버린 남성을 생각하며, 그의 딸을 키운다. 자신을 버린 남성이 죽자, 눈물을 흘리기도한다. 딸로부터 핀잔을 들으면서...... 전쟁이 누구에게는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로 기억되기도한다. 사랑과 전쟁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 아이러니한 상황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아이러니들 속에서 수많은 여성 병사들은 슬픔을 겪어야했다.

 

4. 참혹한 전쟁을 겪은 그들은 전쟁을 다시는 일으키지 않을까?

옥사나라는 소녀가 있었다. 먹을 것이 없어 말똥을 먹으며 살아남았다. 그 혹독한 상황에서 살아남은 옥사나가 전쟁터에 나가 싸우다가 죽었다. 전쟁은 참혹한 것이다. 인간이 살아 남기 힘든 곳이다. 이러한 전쟁의 비극을 우리는 너무도 쉽게 잊어버린다.

 

"전쟁이 끝나면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해할까! (중략) 서로 사랑할꺼야. 달라질거야. (중략)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서로 미워해. 다시 서로를 죽이고, 나는 그게 제일 이해가 안돼 (중략) 어떻게 그럴수가 있지?"-552

 

움냐기나 위생사관의 말은 전쟁의 참속함으로 부터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한자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다. 현명한자는 고난을 통해서 교훈을 배우지만, 우둔한 사람은 고난을 겪고도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한다. 전쟁을 통해서 그들은 아무런 교훈도 배우지 못했다. 어느 여성병사는 자녀들에게 총과 대포 장난감을 갖고 놀게해주는 부모를 이해못한다고 말한다. 어느 여성 병사는 정육점을 갈 수 없어 남편을 보낸다. 어느 여성병사는 붉은 핏방울이 생각나서 붉은 색을 집안에 두지 못한다. 붉은 색을 보면 몸에 이상반응이 발생한다. 여성들은 여성들만의 예민한 감성으로 전쟁의 참혹함을 기억한다. 그리고 전쟁의 비극이 다시 발생하지 않기를 고대한다.

신이 인간을 창조한 이유는 무엇일까? 추다예바 고사포 지휘관은 이렇게 말한다.

 

"인생은 사랑과 기쁨이라는 걸 깨달았고 전쟁이 끝나면 그렇게 살고 싶었으니까. 하느님은 총을 쏘라고 사람을 창조하신게 아니야. 서로 사랑하라고 만드셨지."-224

 

추다예바 고사포 지휘관은 전쟁이라는 비극을 통해서 신이 인간을 창조한 이유를 깨달았다. 전쟁의 비극 속에서도 사랑과 희망을 발견하고 삶이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다운지를 말하고 있다. 우리도 추다예바 고사포 지휘관이 발견한 삶의 의미를 가슴에 새겨야할 것이다. 삶이 전쟁인 우리 사회에서 절망에 빠지기 보다는 희망을 잃지 않고 사랑을 나누고 실천하자. 그것이, 전쟁이 다시 일어나지 않게하는 유일한 길일 것이다.

 

 

이 책에는 수많은 증언이 수록되어 있다. 하나 같이 가슴 아프면서도 삶을 생각하게하는 내용이다. 한 쳅터를 읽고서 바로 다음 쳅터를 읽을 수 없었다. 그녀들의 이야기를 다시 생각하며 사색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녀들의 소중한 이야기를 그냥 흘려보낼 수가 없었다. 가장 가슴 아픈 이야기는 "소련의 장교는 결코 포로가 되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포로는 없다. 반역자만 있을뿐"이라는 스탈린의 말 때문에 벌어진 이야기이다. 전투중에 포로가 되었지만, 탈출하여 우크라이나 빨치산에 들어가 전공을 세웠고, 포상도 받았지만, 포로였다는 이유로 수용소 생활을 하고, 가족은 비난과 차별을 받아야했다. 도조히데키의 '전진훈'을 떠올리게하는 스탈린의 말은 전쟁영웅도 반역자로 만들었다. 수많은 유능한 지휘관을 처형하고 독일군이 침략한다는 첩보를 보고한 병사를 처단한 스탈린의 잘못은 묻어버린채, 조국을 위해서 전쟁터로 나가 싸우라 말하는 스탈린이라는 존재를 생각하면 치가 떨린다.

수많은 소녀병사들이 자원에 전쟁터로 갔지만, 소련군 총사령과 주코프는 소련군 병사의 생명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직 그에게는 전쟁 승리만이 중요했다. 국가가 위기에 닥치면 이를 극복하는 것이 힘없는 국민들일 뿐이라는 현실은 소련도 마찬가지였다. 2천만의 소련 병사의 목숨을 댓가로 독일과의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세계의 여러 나라 사람들은 미국의 노르망디상륙작전으로 2차세계대전에서 독일을 꺾었다고 믿고 있다. 미국주도의 세계질서 속에서 남성중심의 역사관은 2차세계대전 중에(러시아에서는 대조국전쟁으로 불리는 전쟁중에) 죽어간 수많은 소련의 젊은이들의 역사를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여성의 목소리는 더더욱 기억하는자가 적다. 이러한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지 않는 여성의 목소리를 기록한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라는 책은 너무도 소중한 책이다. 다시는 소녀들이 '조국을 지키기 위해서 전선으로 가겠다.'라는 말을 할 필요가 없는 세상이 되기를 기대하며 책장을 덮는다.

 

PS. 인상 깊은 증언의 일부분을 소개한다. 

"전쟁 전까지 나는 음악인 집안에서 자랐어. 특히 독일 음악을 좋아했지. 바흐, 베토벤, 아, 위대한 바흐! 하지만 나는 사랑하는 이 이름들을 내 세상에서 지워버렸어. 나중에 화장터를 보여주는데 .... 아우슈비츠 수용소 말이야 ... 아, 산더미처럼 쌓인 여자 옷가지며 아이들 장화...... 회색 잿더미.... 그 재들을 들판으로 내가서 양배추에 부리고 .... 상추에 뿌렸다는 거야 .... 정말이지 더이상 독일 음악을 들을 수가 없더라고 ... 내가 다시 바흐에게 돌아가기까지, 모차르트를 다시 연주하기까지 수많은 시간이 럴렸어."-519쪽, 아글라야 보리소브나 네스테루크, 중사, 연락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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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환의 시대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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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단해요?", "외국에서는 상상도 못해요"라는 말을 연발하는 동영상을 보았는가? 유튜브 채널 '어썸 코리아(Awesome KOREA)'에는 한국에 사는 외국인들이 한국에 대한 존경과 놀라움을 연발하는 동영상이 너무도 많다. 그들의 진심이 일부 있겠지만, 동영상 조회수를 늘리기 위한 짜여진 각본에 의해서 연출된 장면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왼지모를 뿌듯함에 취하곤한다. 그런데, 러시아의 아들 박노자는 '어썸 코리아' 속의 외국인들이 해주는 국뽕발언을 해주지 않는다. 오히려 한국인들보다 더 날카롭게 한국사회를 들여다보며 차가운 메쓰를 들이댄다. 그의 날카로운 말을 들으며, 제발 한국에 대한 칭찬도 해달라는 말을 하고 싶어진다. 그럼에도 그의 책을 1년에 한권정도는 읽을 수 밖에 없는 이유는 한국사회를 제대로 바라보기 위함이다. '전환의 시대'라는 책에서 박노자는 어떠한 쓰디쓴말을 내 놓을까?


1. 진보가 집권한다고 사회는 변화할까?

  고 노무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이후, 노무현을 욕하던 많은 사람들이 노무현을 그리워했다. 이명박과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면서 노무현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숫자는 더 늘어만 갔다. 그를 소재로한 '변호인', '노무현입니다.'라는 영화들이 제작되고, 영화속 노무현을 보면서 인간 노무현을 오늘 우리 곁으로 소환했다. 우리에게 노무현은 사랑하는 대통령이자, 다시 돌아오기를 고대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런데, 박노자는 노무현을 우상시하는 우리에게 일침을 가한다. 노무현과 박근혜의 구체적 정책을 비교하면 두사람의 기본적 노선은 그렇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 박노자의 주장이다. 친자본주의적이며, 친미정책을 펼쳤다는 점에서 노무현과 박근혜는 별반 차이가 없다는 지적이다. 노무현 정권시기 모 대기업의 엘리트들이 노무현 정권의 정책 결정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면, 박근혜 시기에는 모 대기업이 박근혜에게 뇌물을 주었다는 점이 다를 뿐이었다는 생각이 들정도로 냉혹하게 노무현과 박근혜 정권의 기본 정책에 차별성이 없다고 지적한다. 

  노무현과 박근혜를 비교하는 것 자체가 나를 불편하게 했다. 친기업정책을 펼쳤다는 사실은 그대로 인정한다 하더라도, 미국의 부시정권이 테러와의 전쟁을 하는 분위기 속에서 북한에 선제공격을 할 수도 있다는 공포감을 갖았던 그때의 상황을 박노자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박노자는 사회학자 로베르트 미헬스의 '과두정치의 철칙'을 소개한다. 독일 사민당의 내부 행태를 보면서 보수단체처럼 사민당도 실권을 소수 엘리트가 잡고, 조직을 과두지도부가 장악해 움직인다고 지적했다. 정권이 바뀐다하더라도 근본적 구조가 바뀌지 않는 이상, 변화를 기대할 수 없다는 박노자의 주장에 동의한다. 절대자, 권위자에 의존하는 삶과 절대자의 생각을 맹목적으로 추종한다면, 미헬스의 '과두정치의 철칙'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박노자가 지적한 탈권력, 탈권위를 실천하려한 대통령이 있었다. 탈권위적이었으며, 검찰이라는 칼자루를 내팽겨쳤던 노무현이, 정권이 바뀌자 힘없이 쓰러졌다. 지역감정을 해체하려 노력했고, 권위주의와 이별하려 노력했지만, 그러한 노무현의 노력은 소위 일베들과 극우 인사들에 의해서 희화화 되었다. 노무현이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들의 조직된 힘입니다."라고 말하며, "깨어있는 시민"이 될 것을 강조했다. 그렇다. "깨시민이 되자!" 박노자와 노무현은 사회를 변혁시키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잘 알고 있었다. 박노자가 유대인이자, 러시아 출신의 귀화인으로, 노르웨이에 살고 있는 학자라면, 노무현은 대한민국에서 상고를 나와서 인권변호사가 되었고, 지역주의와 권위주의에 맞섰던 정치인이었다. 외부자의 시선으로 대한민국의 변혁을 주장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내부자로서 현실의 벽과 부딪치며 구정물에 손을 담그면서 대한민국을 개혁하려는 자는 좌절을 맞보고, 고뇌에 찬 결정을 내릴때가 많다. 현실의 벽을 고려하지 않고 매몰차게 노무현과 박근혜를 비교한 점은 박노자의 주장을 이해하면서도 못내 애석함을 지울 수 없다. 


2. 한국의 부끄러운 "갑질"문화

 "재벌", "아줌마", "김치" 말고도 "갑질"이라는 단어가 브리테리커 사전에 등재되었다. 사회에서 권력을 갖고 있는 존재들이 그 권력을 이용해서 약자들에게 상식 이상의 만행을 저지르는 현실을 종종 목격한다. 박노자가 소개한 "인분 교수 사건", "서울 명문대 악마 대학원생 사건"은 우리의 부끄러운 민낯을 여과없이 보여주고 있다. 학문의 전당이어야하는 대학에서 사회적 지식인들이라고 존경받는 교수들이 저지른 일이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들이 벌어졌다. 아니, 벌어지고 있었는데, 이것이 드러난 것이 지금일 뿐이다. 패거리문화, 마피아 문화가 우리 사회에 얼마나 만연해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렇다. 우리 주변에서 "갑질"은 너무도 만연해 있다. 과거 성과급이 교사에게 주어질때, 너무도 많은 꼼수들이 이뤄졌다. 해당 학교에 근무한 년수를 집어 넣는 학교도 있었으며, 교직 경력을 평가 점수에 집어 넣고, 서류상으로 위조하기 위해서 동료 평가를 한 것으로 서류를 조작하는 일들도 암암리에 있었다고 한다. 교원평가제와 성과급제가 도입되는 것을 앞장서서 막자고 교원단체에서 부르짖을 때는 조용히 눈치나 살피던 존재들이, 성과급에서 자신의 불이익을 없애기 위해서 경력 낮은 교사를 희생냥으로 삼은 것이다. 악날하기 그지 없는 일부 경력교사의 만행에 조용히 당하고 만 있는 저경력 교사의 모습을 보며, 노예로 잘 길들여진 불쌍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이러한 만행이 없어졌으리라 믿고 싶다. 

  박노자는 말한다. "한번 권력을 쥔 사람의 세계관은 대게 바로 바뀌게 된다." "인간은 약한 존재이다." 교직사회에 먼저 발을 딛인 것이 대단한 업적인냥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려하는 존재들을 보면, 인간은 진실로 약한 존재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박노자는 어떤 대안을 제시했을까? 박노자는 "우리에게 진실로 필요한 것은 그 어떤 권력가에게도 압력을 가할 수 있는 권력 견제 시스템이다."라고 단언한다. 교원평가제가 처음 도입되었을 때, 교원평가제가 교사 구조조정의 도구가 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앞섰다. 물론, 학령 인구가 줄어드는 현실에서 교원평가제를 교사 구조조정의 도구로 사용하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다. 그러나, 순기능도 있다. 20평 교실에서 제대로 수업준비 없이 수업을 하는 존재가 있었다. 술마시고 수업이 있는데도 학교에 출근하지 않아서, 선배 교사라는 이유로 그 작자의 수업에 대신 들어가야하는 일도 있었다. 그런데, 그 작자가 수업에 신경을 쓰기 시작한 것이 교원평가제 때문이었다. 교원평가에서 낮은 점수를 받게 되자 그도 수업준비를 할 수밖에 없었다. 특별연수까지 갔고, 그사실을 암암리에 교사들은 알고 있었다. 그래, 우리 사회를 변화시키는 견제장치는 반드시 있어야한다. 그래야 세상이 바뀐다. 


3. 입장바꿔 생각하지 못하는 한국

한국 언론에 비춰진 북한은 군사강국이며, 너무도 무서운 존재이다. 그러나 한해 국방비를 비교해보면 북한은 너무도 초라하다. 박노자는 입장바꿔서 남북관계를 바라보지 못하는 우리를 꼬집는다. 

  2016년 보수언론들이 "북한 지도부 참수 작전"을 보도하고, 2017년 "유사시 김정은 제거 합동 한미 특수부대 훈련"보도를 예로들며 우리 언론의 철없는 보도에 일침을 가한다. 침략행위를 금지한 유엔 헌장 제2조 4항을 위반한 행동임을 생각한다면, 이러한 보도는 한국의 위신을 추락시키는 가공할 보도이다. 한미 연합훈련이 얼마나 두려웠으면, 김정은이 트럼프를 만나서 한 합의에 한미 연합 훈련을 중지한다는 내용이 담겼겠는가! 그런데, 한국 언론에서 떡하니, 북한 지도부 참수 작전을 보도했으니, 얼마나 북한으로서는 두려웠겠는가! 그리고 세계 사람들에게 대한 민국이 유엔 헌장 제2조 4항을 위반할 준비가 되었다는 신호를 보냄으로서 대한민국의 위신을 추락시키는 보도였다. 

  "기레기"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상식이 있고, 생각이 있는 기자라면, 이 보도가 대한민국과 동아시아 정세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는 생각하고 기사를 작성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언론인들이 "기레기"라는 말을 들은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들이 과연 생각을 하고 기사를 썼는지, 지적 수준이 국민 평균에 미치기는 한 건지 의심이 들때가 많다. 

  박노자는 러시아계 유대인이다. 이제는 대한민국에 귀화했지만, 대한민국에 살지 않고 노르웨이 오슬로대학에서 교수로 살고 있다. 그는 철저히 외부인의 시선에서 한국을 바라볼 수 있다. 이로인해서 박노자는 대한민국의 현실을 냉철하게 분석하는 눈을 갖았으며, 국가 보안법이 무서워서 자신의 생각을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지 않을 수 있는 특권을 누리게 했다. 2013년 9월 월북을 시도하는 사람을 한국군이 사살한 것을 비판할 수 있는 것도 박노자 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박노자의 시선에 동의할 수 없는 것도 있다. 


  "한반도의 평화정책을 지지해 달라고 호소하면, 미국의 양심적 유권자들은 얼마든지 한반도평화 프로세스를 응원할 것이다."-128쪽


  참으로 감상적인 주장이다. 하노이 회담이 결렬된 사실을 상기한다면, 군산복합체국가 미국은 절대, 한반도에서 미군이 철수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미국의 국민들도 자국의 이익을 절대시한다. 박노자가 지적한 "양심적 유권자"는 재미동포뿐이다. 그들만이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진정으로 발랄 것이기 때문이다. 트럼프이기에 비록 결실을 맺지는 못하고 있지만,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가 이정도까지 온 것이다. 한반도 국제정세를 너무도 감상적으로 이해하는 박노자의 글에는 공감이 가지 않는다. 이부분만은 박노자가 내가 제신한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기 바란다. 



박노자는 책을 마무리하며 자신이 원하는 대한민국을 그려본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다들 골고루 살기 편한 사회"로 개조하길 바라는 것이 박노자이다. 혈통을 중시하면서도 전라도를 차별하고, 북한을 적대시하며, 러시아를 비롯한 잘살지 못하는 지역에 사는 동포를 얕잡아 보고, 국회의원의 상당수가 서울대 출신인 점을 꼬집는 것도 대한민국을 사랑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우슈비츠의 한 팻말에 조지 산티야나의 글이 적혀있다고 한다. 


  "역사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 그 역사를 다시 살게 될 것이다."-117쪽


 박노자의 '전환의 시대'를 내려 놓으며, 조지 산티야나의 글을 다시 되뇌인다. 박노자가 지적한 한국사회의 부끄러운 민낯을 기억하고 이를 개혁하려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부끄러운 현실을 계속 살아가야할 것이다. 박노자는 우리의 현실을 깨닫고 보다 아름다운 대한민국을 만들길 바라며 우리에게 책속의 메시지로 울부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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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큼 가까운 중국 이만큼 가까운 시리즈
이욱연 지음 / 창비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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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인과 같이 살아야한다면, 당신은 어떠한 선택을 할 것인가? 중국이라는 거인을 옆에 두고 살아와야하는 우리로서는 거인과 살기 위해서 거인을 먼저 알아야한다. 거인에 짓눌려 나라가 사라진 민족도 많지만, 거인의 어깨에 올라탄다면 더 먼 세상을 바라볼 수도 있다. 팟캐스트를 통해서 알게된 이욱연 교수의 책을 선택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중국 전문가로 중국을 속속들이 설명하는 그의 탁월함을 이 책에서 다시 만나고 싶었다. 


1. 베이징인, 상하이인. 광저우인.

전공서적의 무게로 고민하며 책을 읽기 바라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너무 가볍게 느껴질 것이다. 사실 이 책은 중국 입문서 정도 되는 책이었다. 흥미로운 사진들과 이욱연의 가벼운 글솜씨는 이 책을 쉽게 읽을 수 있게 만들었다. 가벼운 책이기에 전공서적이라면 알지 못할 내용들이 눈에 띄였다. 

  외계인이 출현한다면 베이징인들은 정치에 대해 묻고, 상하이 사람들은 전시회를 열어 돈벌궁리를 하고, 광저우 사람은 목욕을 시킨 뒤요리방법을 생각한다. 지역별 경제관념을 표현한 다른 이야기도 있다. 베이징 사람은 "내것이 네것이고, 네 것이 내것"이라 말한다. 인정많고, 경제관념이 없다는 말이다. 반면 상하이 사람은 "내 것은 내것이고, 네 것은 네것"이라 말한다. 구분을 확실히하는 상하이 사람이다. 그리고 광저우 사람은 "내것은 내것이고, 네 것도 내것"이라고 말한다. 재이에 밝은 광저우 사람들의 모습을 잘 표현한 말이다. 중국을 설명할때 사용하면 참 유용할 것 같다.


2. 관시 중심의 중국, 학연과 지연 중심의 한국

중국은 광활한 대륙이다. 하나의 나라로 보기에는 너무도 땅덩어리가 크다. 중국인들은 거대한 바다에 살고 있는 물고기와 같다. 이 광황한 중국이라는 바다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내 주변에서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관시'를 만드는 이유일 것이다. 이 책에 소개되어 있듯이, 한국인 사장이 형광등을 사러가면 16위안, 산둥출신 직원을 보내면 14위안, 동네 출신 직원이 사러가면 12위안을 받는 것이 중국의 관시이다. 같은 중국인이 일본군에 의해서 공개 처형을 당하는데도 분노하기 보다는 재미있는 볼거리로 생각하는 중국인을 보며 루신은 분노했다. 그러나 거대한 중국이라는 바다에서 살다보니, 중국인이라는 관념보다는 나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사람을 중시하는 관시가 더 중시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모습으로도 볼 수 있다. 

  '관시'는 우리의 학연이나 지연과도 다르다. 작은 나라 대한민국은 중국의 한개 성과 면적이 비슷할 정도로 작다. 하나의 국가가 잘 운영되기에 딱 알맞은 크기가 한반도인 것 같다. 좁은 한반도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는 우리편을 찾아야한다. 우리편을 찾기 위해서 학연이나 지연을 만든다. 나와 일면식도 없는데, 같은 지역 혹은 같은 학교를 나왔다는 이유로 친근감을 표시하고 서로 밀어주고 끌어준다. 

  '관시' 중심의 중국과 '학연'과 '지연' 중심의 한국사회는 '글로벌스탠다드'라는 잣대로 볼 때 불합리한 것들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자신들만의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관시'와 '학연과 지연'은 세상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삶의 방법일 수있다. 단지 지역마다 다른 형태와 모습으로 작동할 뿐이다.


3. 거인과 잘사는 방법은?

중국말에 "이웃집은 바꿀 수 있어도 이웃나라는 바꿀 수 없다."라는 말이이 있다. 우리는 중국과 국경을 맞대모 살아야한다. 더욱이 남북의 평화통일을 위해서는 중국의 역할이 중요하다. 이렇게 중요한 중국이 세계 초강대국으로 부상하고 있다. 저가 물건만 만들더 중국이 이제는 고급 제품을 만들고, 4차 산업혁명을 선도하고 있다. 중국의 부상을 두려워하는 미국이 중국과 무역전쟁을 일으키고 있다. 이 과정에서 한국은 선택을 강요받고 있다. 광해군이 후금과 명나라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 받았던 것과 같이, 우리는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고 있다. 우리의 선택은 미국을 선택할 것 인가? 중국을 선택할 것인가?

"이웃집은 바꿀 수 있어도 이웃나라는 바꿀 수 없다."라는 중국말을 우리는 기억해야한다. 중국이라는 거인을 적으로 돌린다면 우리는 거인과 대를 이어서 싸워야한다. 만약 거인과 친구가 될 수 있다면 거인의 어깨위에 올라서서 더 넓은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 광해군 처럼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하며, 두 거인을 친구로 삼는다면 우리는 더 많은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중국위협론, 중국 붕괴론이 솔솔 나오고 있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중국이라는 거인이 두렵고, 중국이 빨리 붕괴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저변에 깔려있다. 우리는 중국의 붕괴를 바라기 보다는 중국과 공생하며 그들의 장점을 배우려는 노력을 해야하지 않을까? 이욱연의 '이만큼 가가운 중국'을 덥고, 생각에 잠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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