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한의 경험 - 유발 하라리의 전쟁 문화사
유발 하라리 지음, 김희주 옮김 / 옥당(북커스베르겐)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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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발 할라리!! '사피엔스'를 읽었을 때, 그에게 받은 강력한 계시(새로운 깨달음)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사피엔스의 역사를 한권의 책으로 엮어 냈을 뿐만 아니라, 인류의 역사를 새로운 역사로 바라보며, 나에게 강력한 계시를 주었다. 그의 전공이 중세 전쟁사이고, 한국에 번역된 책이 '호모 데우스'말고서도 2권이 더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호모 데우스'도 '사피엔스' 만큼은 아니지만, 나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주었기에 그의 책을 더 읽기로 결심했다. '대담한 작전'과 '극한의 경험' 중에서 어느 것을 먼저 읽을 것이지를 고민했다. '대담한 작전'이 단편적인 에피소드의 모음으로 보인 반면에, '극한의 경험'은 유발 하라리 만의 통찰이 묻어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감이 느껴졌다. "'호모 사피엔스' '호모 데우스' 이전에 전쟁하는 인간 '호모 벨리쿠스'가 있다."라는 표지글이 나를 강력하게 끌어 당겼다. 그리고 책장을 넘겼다.

 

1. 고통이 우리에게 새로운 '계시'를 줄 수 있을까?

  유발 하라리는 이 책에서 '계시(revelation)'이라는 단어를 자주 쓴다. '계시'라는 단어를 종교적 의미의 단어로 받아들인다면, 이 책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오히려 '새로운 깨달음'으로 해석하는 것이 유발 하라리가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깨달음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고통이 우리에게 '계시'를 줄 수 있을까? 특히 극한의 경험인 전쟁을 통해서 '계시'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은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본다. '군대 갔다와야 사람된다.'라는 말을 흔히 듣고, 번지 점푸를 하거나 커다란 동물을 사냥하고, 고통을 참을 줄 알아야 성인으로 인정하는 풍습이 인류의 문화 속에 녹아 있다. '고통'이 새로운 '계시'를 준다는 인류의 인식은 과연 타당한가? 이 책을 읽는 내내 나의 머릿속을 맴도는 화두이다. 우리는 이 화두에 앞서 해답을 얻었던 씻다르타의 경험을 되새겨 보아야할 것이다. 씻다르타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고행'을 했다. 그러나 그가 얻은 것은 고행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는 결론이다. 그리고 보리수 아래에서 '명상'을 한다. 그리고 그 명상을 통해서 위대한 종교적 깨달음을 얻는다.

  반면 예수의 죽음, 십자가의 죽음, 예수의 수난 등, 서양 근대초기의 문화속에는 고통을 새로운 깨달음이나 개종의 장으로 해석하는 견해가 많이 있었다. 상해를 무거운 벌로 다스리는 서양인들! 백인들의 경우, 동양인들 보다 진통제 처방을 많이 사용한다고 한다. 고통을 잘 참아내지 못하는 백인들이 오히려 고통을 통해서 계시를 얻을 수 있다는 역설적인 인식을 만들어 낸점이 아이러니컬하다.

  진정으로 전쟁이라는 극한의 체험이 인간을 종교적 계시, 새로운 깨달음의 세계로 이끌 수 있을까? 전쟁 후에 군인들이 수도원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떠올리는 사람들은 그렇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유발하라리가 지적했듯이, 수도원에 상이군인 수용시설로 많이 활용되었다는 사실을 주목한다면, 전쟁이 새로운 깨달음을 준다는 결론은 유보되어야한다. 예수회를 만든 로욜라도 전쟁의 참상을 보고 종교적 계시를 받은 것이 아니라, 병원에서 이뤄진 독서와 명상이 그를 새로운 깨달음의 세계로 이끌었다. 전쟁이 계시를 주진않았다. 깊은 성찰과 독서가 그에게 계시를 주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 경험이 종교적 계시를 주었다는 주장이 있는 것은 왜일까? 뇌과학에서 입증되었듯이, 인간은 합리적이지 않다. 단지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할 뿐이다. 상이 군인이 은둔자 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삶을 합리화했을 가능성이 크다.

  귀향한 군인을 부모 형제들이 알아보지 못했다는 기록을 유발 하라리는 전쟁이 이들을 성숙시켰기 때문이라고 서술했다. 이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전쟁이라는 커다란 풍파가 그들을 빨리 늙고 살기 등등한 존재로 만들었을 뿐이다. 대학에서 복학한 예비역들이 아저씨 처럼 나이들어 보이는 이유를 생각해 본다면 쉽게 이해갈 것이다.

 

2, 한국군대 문화의 뿌리를 해부하다.

  흔히들 우리 군대문화는 일제 강점기 일본군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다. 만주군과 일본군에서 군대생활하던 친일군인들이 한국군의 주류가 되었고, 그들이 만든 한국군에는 일본군에서 흔히보이는 구타와 얼차려 등의 비인간적인 악습들이 그대로 일제의 잔재로 이어졌다고 말한다. 조국을 위해서 스스로 독립군에 입대한 군인들에게는 구타와 무조건적 강요가 필요 없을 것이다. 반면에 강제로 군대에 끌려와 자신과 상관없는 전쟁에 동원되는 사람을 움직이려면 구타와 강요는 필연적이다.

  현재 우리군의 모든 악습은 일본군에서 왔다는 선입견은 타당할까? 유발 하라리는 나에게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군대가면 똑똑한 사람도 생각을 못하는 멍청한 행동을 한다. "내가 왜그랬을까?"라는 말을 외치며 얼차려를 받는 훈련병들을 생각하면, 군대에 들어와서 왜? 생각을 못하는 존재로 변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런데, 군대에서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는 존재가 된 것은 데카르트 때문이었다. 데카르트? 그는 위대한 철학자가 아닌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유명한 말을 한 그가, 군인을 생각하지 않는 존재로 만드는데 기여를 했다니..... 그러나 사실이다. 데카르트는 프랑스의 젊은 귀족으로 전쟁에 참여하기 위해서 장교로 입대했으며, 30년 전쟁이 한창일때 보헤미아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서 가던 중에, 화로에 몸을 녹이다가 '고기토 에르고썸'을 생각해 낸다. 데카르트의 이론은 군대에 적용된다. 데카르트의 정신이 육체를 통제하듯, 장교들이 사병을 확고히 통제하도록 군대가 만들어진다. 머스킷총 발사에서 장전까지 32개의 개별동장으로 나눠 반복 연습시키고, 기계처럼 전장에서 총을 쏘도록 훈련시킨다. 아는 것이 가장 적은 사람이 가장 잘 복종한다. 사병은 생각하지 않는 육체적 존재로 전락한다. 오직 생각은 장교들이 할 뿐이다.

   정신과 육체라는 이분법적 생각! 그리고 정신이 육체를 지배한다는 데카르트의 사상은 놀랍게도 한국군에서도 목격된다. 군에 입대하고 특히, 신병교육대에서 오직 생존만을 생각하며 군사훈련을 받았다. 생각하는 존쟁기 보다는 조교의 명령에 절대복종하는 기계로 만들어졌다. 자대에 배치받고 나서도 시키는데로만 하면 편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계급이 올라가 생각을 해야할 때는 머리가 아팠다. 군대는 나를 기계적 존재로 만들어 갔다. 그 시초는 데카르트에서 부터 시작되었다.

 

3. 생각하는 군대가 강한 군대이다.

  17.18세기 구체제 군대는 나폴레옹의 군대에게 철저히 유린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구체제의 사병들은 감시의 대상이었다. 언제 탈영할지 모르기에 산림에서 산개대형의 훈련을 하지 않았다. 오직 연병장에서 기계와 같은 반복된 훈련만을 했다. 기병은 적을 감시하기 보다는 보병의 탈영을 감시했다. 이는 군사천재였던 프리드리히 대왕의 군대도 마찬가지 였다. 더욱이 프로이센 군대는 '태형'이라는 악습이 오랫 동안 남아있었다. '태형'과 같은 강한 체벌은 군인의 명예심을 말살 시키고, 전투의지를 상실시킨다. 군인 개개인을 존중하지 않고 감시와 처벌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군대와 스스로 생각하고 그들을 고귀한 인간으로 대하는 프랑스군대 중에서 어느 군대의 전투력이 강하겠는가? 구체제의 군대가 프랑스군대의 문화와 훈련법을 받아들이기 전까지 프랑스군대는 연전연승을 할 수밖에 없었다.

  놀랍지 않은가? 프로이센의 군대에서 보였던 감시와 처벌이라는 문화가 한국군대에도 있다. 내가 군복무 중에도 구타는 암암리에 있었다. 구타를 없애려는 노력을 군대를 몰라서 하는 망상정도로 치부하는 사람도 많았다. 생각하지 말고 선임병의 명령에 복종만 할것을 강요하고 이를 따랐다. 프랑스 군대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도록 훈련받았다. 부사관도 사병도 작전계획을 이해해야한다고 프랑스 군은 믿었다. 반면 우리는 어떠한가? 로봇군대! 스스로 생가하지 못하도록 만들고, 훈련중에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하고 무조건 뛰도록 훈련받았다. 우리군대문화는 아직도 프랑스 군대의 앞선 문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프로이센 군대의 낡은 문화에 취해있다. 적어도 내가 군대에 복무하던 시절까지는 말이다.

  클라우 제비츠는 '전쟁론'에서 "군대 정신이 훈련 숙달보다 훌씬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한국군대를 강한 군대로 만들고 싶다면, 생각하는 군대, 군인에게 강한 자부심을 주는 군대 문화를 만들어야할 것이다.

 

4. 전쟁이 계시를 준다는 믿음의 탄생! 그리고 비극의 시작

  낭만주의와 민족주의가 광기처럼 퍼져나가면서 전쟁을 '숭고한 것'으로 여기고 '평화를 상업적 정신을 따르는 천박한 사리사욕'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참전 경험을 '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인식과 경험'이라며 동생의 입대를 축하하는 사람까지 출현한다. 낭만주의 시기에 제국주의와 전체주의의 싹이 트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람을 죽이는 체험이 축복일 수 없다. '평화만 아니라면, 그곳에서 겪은 것을 제 아이에게 경험하고 싶'다는 글 속에서 소름돋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전쟁의 경험을 새로운 계시를 받는 숭고한 경험으로 생각하는 수 많은 사람들이 출현한다. 물론 전쟁의 비참함 속에서 환멸을 느끼고 자신이 생각했던 전쟁의 숭고함이 망상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는 탈영을 결심하는 병사들도 출현한다. 그러나 이러한 개별 병사들의 깨달음이 낭만주의와 민족주의라는 커다란 '주의'를 꺾어 놓지는 못했다. 그리고 1차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소위 남자다움을 폭력과 근육에서 찾는 사람들이 있다. 남자라면 군대에 갔다와야 사람이된다고 생각하는 살마들! 남자는 거칠고 강하게 키워야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이러한 믿음이 더큰 폭력을 낳고 인류를 파멸로 몰아 넣는다. 진정한 남자다움은 인간다움에 있다는 사실을 우린 기억해야한다. 폭력은 숭고한 것이 아니라 야만적인 것이며, 근육은 남성적인 것이 아니라 건강미일 뿐임을 깨달아야한다.

 

  유발 하라리는 "전쟁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 사담 후세인"에게 감사를 표현하며 이책을 저술했다. 전쟁을 빼 놓고 인류의 역사를 서술할 수 없다. 그러하기에 우리가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연구할 수밖에 없다. 유발하라리의 전쟁 문화사 '극한의 경험'을 통해서 새로운 계시를 얻었다. 그것은 강한 군대는 폭력에 의해서 병사를 기계로 만들으로써 완성되는 것아 아니라, 존중하고 스스로 생각하는 군대로 탈바꿈함으로서 이뤄질 수 있다는 진리이다. 우리 학교도 마찬가지다. 강하게 학생을 억압함으로써 명품교육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존중하고 스스로 생각하도록 함으로써 참된 인간을 길러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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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 역사인물 다시 읽기
한명기 지음 / 역사비평사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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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해군!! 그 처럼 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이 많은 임금도 드물 것이다. 광해군을 소재로한 많은 드라마와 영화에서 그는 탁월한 비운의 군주로 그려졌다. 광해군과 고 노무현 대통령을 오버랩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그리워했다. 한반도 균형자론을 주장하면서 강대국들 틈바구니 속에서 중진국 지도자의 리더십을 발휘하려 노력했던 고 노무현대통령!! 임진왜란과 명청 교체기에 조선이라는 나라를 살리기 위해서 중립외교정책을 펼치면서 부던히도 노력했던 비운의 광해군!! 두사람의 비극적 죽음은 우리에게 더욱 많은 그리움을 남긴다. 학생들에게 한명기 교수의 광해군을 추천해주면서도 정작 나는 '광해군'이라는 책을 읽지 않고 있었다. 이번 기회에 광해군이라는 책을 단숨에 읽기 시작했다.

 

1. 광해군은 폭군인가?

  오항녕을 비롯한 노론중심의 사관을 가지고 있는 학자들은 광해군을 폭군으로, 혹은 혼군으로 묘사한다. 물론, 오항년의 책은 읽지 않았지만, 그가 기고한 글들을 읽으면서, 그의 노론중심의 역사관에 자못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는 광해군이 무척이나 백성들을 쥐어짰으며, 그가 제대로 준비를 하지 않았기에 병자호란의 비극이 있었다는 주장이다. 그의 단편적이 기고글들을 읽으면서, 노론 중심의 역사관에 찌들어 있는 모습에 씁쓸함을 금치 못했다.

  그렇다면 과연 광해군은 백성을 괴롭힌 폭군이었을까?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당시, 다른 왕자들의 집은 불탔지만 광해군의 집은 멀쩡했다. 또한 송유진의 난이 일어났을 때, "임금이 스스로 허물을 뉘우치고 동궁에게 왕위를 넘겨주도록 종용"하겠다는 그들 주장은 참으로 신선했다. 광해군이 군주로서 가져야할 탁월한 자질과 역량을 짐작하게 하는 기록이다. 광해군은 백성들로 부터 탁월한 군주가 될 수 있는 역량이 있는 왕자로 인식되고 있었다.

  광해군을 비판하는 자들은 '조선왕조 실록'의 사료적 가치를 주장하며, 승리자의 기록인 '광해군 일기'의 기록을 근거로 광해군을 혼군으로 배척한다. 그러나, 광해군의 눈부신 분조활동을 기록흐나 유대조의 상소문이 정족산본 '광해군 일기'에는 없다. 의도적으로 광해군의 좋은 기록을 말살하려한 증거이다. 우리가 알 수 있는 이러한 사례 말고서도, 인조반정을 일으킨 서인들에 의해서 얼마나 많은 광해군의 업적을 기록한 기록들이 사라졌을까? 이것을 생각해본다면, '광해군 일기'를 근거로 광해군을 비난하는 것에는 일정한 경계를 해야할 것이다.

  광해군 시기를 병자호란을 막을 수 있는 기회를 무위로 만든 시기라 주장하는 사람들은 광해군이 궁궐 조영에만 힘쓸 뿐이지, 후금을 막을 만한 군사력 증강에는 노력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기민한 외교전략으로 명과 후금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펼치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후금의 주요 진격로상에 방비를 강화하고, 기마병이 장점이 그들을 대항하기 위해서 화포를 배치하는 노력을 그들은 애써 외면한다. 광해군이 그토록 군사력 증강을 위해서 노력한 역사를 외면한다. 그래야 진정한 혼군인 인조와 서인정권을 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2. 광해는 왜? 궁궐 공사와 왕권에 집착했는가?

  임진왜란이라는 7년 동안의 참혹한 전쟁이 휩쓸고 가자, 많은 사람들이 도가나 운수에 빠져들게 된다. 사람의 생명이 파리 목숨보자 못한 취급을 받는 비극적인 시대상황속에서 어쩌면 그들의 피난처는 도가와 운수였을지도 모른다. 광해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당시의 시대상황뿐만 아니라, 후궁 소생의 왕이라는 태생적 한계가 그를 더욱 작아지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뿐인가? 광해군에게 열등감을 느끼는 못난 아버지, 선조는 그를 박대하며 문안조차 받지 않았다. 선위파동을 수시로 일으켜 자신의 왕권과 신하들의 충성심을 확인하고 싶어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입지가 약화된 광해군! 세자에서 폐위된다면 잔혹한 정치권력의 속성상, 자신의 목숨조차도 보존할 수 없었다. 그는 왕위에 더욱 집착했다. 큰 궁궐을 지어 왕의 위엄을 드러내고 싶어했다. 그러나 진정으로 왕권을 강화하고 싶다면, 백성들의 고혈을 뽑아서 으리으리한 궁궐을 짓기 보다는 백성들의 삶을 어루만지며, 백성들의 지지를 국정과제 추진의 원동력으로 삼아야한다는 진리를 그는 몰랐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로'에서 시민에게 사랑을 받는 군주는 성을 높이 쌓지 않는다고 했다. 시민들의 군주의 성채가 되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광해군에게는 좋은 신하를 얻는 복도 없었다. 그를 지지했던, 대북들은 정치적 감각이 너무도 미숙했다. 적을 살려주어 은전을 베푸는 길이 권력을 강화시키는 길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몰랐다. 폐모살제의 어리석음은 서인과 남인들에게 반정의 명분을 제공해주었다. 북인들이 독점한 권력이 강해보이지만, 독점된 권력은 모래성과 같다. 강한 강철일 수록, 충격에 깨지기 쉽다. 노자 '도덕경'에 상선약수(上善若水)라 했다. 가장 강한 것은 강철이 아니라, 유약해보이는 물과 같은 부드러움을 지닌자이다. 정치적 감각이 미숙한 북인들과 권력을 지켜야했던 광해군!! 북인은 광해군을 지켜주지 못했다.

 

3. 광해군, 그는 왜? 몰락했는가?

  '외교는 내정의 연장이다.'라는 한명기의 말처럼, 광해군의 탁월한 외교적 성과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내정에서 반정의 명분을 제공했다. 광해군은 외교의 성과를 내부 결속을 다질 수 있는 원동력으로 삼기 위해서 '대내협상'을 했어야했다. 그러나 시대적 한계속에서 다수 사림들의 지지를 얻어내는데 실패했다. 심하전투로 인해서 많은 백성들이 고통을 받는데도, 사림들은 '재조지은'을 지켜야한다며 광해군을 비난한다. 백성은 백성대로, 사림은 사림대로 불만이 쌓여갔다. 광해군은 백성의 지지를 끌어내어 이를 통해서 국내 정치에서 주도권을 장악해야했다. 그러나 광해는 그러지 못했다.

  1622년 광해군은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 폐모살제를 부추긴 북인 정권에 진절머리가 난듯하다. 북인에 의해서 내쳐졌던, 서인과 남인 중진들을 다시 벼슬길에 나서도록 배려한다. 그러나 이때 풀려난, 최명길과 이귀는 1년 후에 인조반정을 일으킨다. 적을 끌어 안지 않은 것이 광해군의 실수라기 보다는, 끌어 안아야할 적과 내쳐야할 적을 구분못한 것이 광해군의 패착이었다. 물론, 그 구분선이 참으로 불분명하다.

  자신들의 권력 강화를 위해서 광해군을 이용하려했던 북인들과, 현실을 모르고 명분만을 주장하는 서인과 남인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광해군은 벗어나고 싶었을 것이다. '바닷가에서나 살며 여생을 마치고 싶다'라고 스스로 말할 정도로 그는 지쳐있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정치판에서 진절머리가 난 광해군! 인저반정이 일어나고도 19년을 더 살아, 삼전도의 치욕을 보며 세상을 관조할 수 있었던 것은, 그리도 집착했던 왕권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홀가분함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4. 광해와 노무현!! 그리고 문재인

  한명기는 '광해군'이라는 책 곳곳에서 오늘과 광해군이 살았던 당시를 비교하며, 현명한 선택을 할 것을 당부한다. 재조지은을 배풜었다며, 후금을 공격할 것을 종용하면서도, 조선에게 염초제조법을 알려주지 않는 명나라와, 한미동맹을 강조하면서도 한국의 미사일 사정거리를 180km로 묶어 놓는 미국을 비교하며, 자국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냉혹한 국제관계의 현실을 직시하게 만든다.

  그리고 우리는 그 속에서 광해와 노무현을 보게 된다. 중립외교정책을 추진하며, 조선이 살길은 '재조지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강대국의 틈바구니 속에서 백성과 나라를 지키는 일임을 강조한 사람이 광해군이라면, 노무현 대통령은 북한과 대화하며 강대국들 속에서 균형자역할을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퇴임할 무렵, 외국언론에서는 중진국 지도자의 리더십을 보여주었다며 그의 리더십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이들은 사림들과 국민들의 지지를 얻지 못한다. 명나라에 사대를하며, 재조지은을 지켜야한다는 꼴통들에게 광해군의 현명한 외교전략은 '배은망덕'한 말일 뿐이었다. 북한과는 대화할 수 없으며, 미국의 주장에 반대해서는 안된다는 '종미주의자'들에게는 노무현은 이상주의자이고 현실을 모르는 사람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타의에 의해서, 또한 사람은 임기가 끝나서 자리에서 물러나야했다. 그리고 광해군은 19년 동안을 모진 고통속에서도 세상을 달관하며 살았고, 노무현은 정치적 보복속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리고 광해군은 미국에서 중국으로 세계의 패권이 옮겨가는 시기에 다시 부활했고, 노무현은 이명박근혜정권을 거치면서 국민들에 의해서 다시 소환되었다. 우리는 광해와 노무현과 같은 리더를 필요로하고 있었다.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대통령이 되었다. 탁월한 외교전략을 구사하는 모습을 보면서, 어쩌면 광핸군이 다시 환생한 것 처럼 보인다. 그러나 광해군에게서 문재인 정권은 교훈을 얻어야한다. '외교는 내정의 연장이다.' 아무리 외교를 잘한다해도 내정을 못한다면 정권의 불행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문재인 정권의 '한반도 운전자론'이라는 자주적 외교는 국내 경제가 얼마나 살아나느냐에 따라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도 있고, 수구세력에게 다시 정권을 내놓아야할 수도 있다. 이것이 냉엄한 정치 현실이다.

 

  우리는 광해군과 노무현을 끊임없이 소환하고 있다. 그들의 리더십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는 아직도 기득권을 가진자와 그 후손들이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광해를 무덤에서 다시 불러들이는 것을 두려워하고, 노무현과 같은 지도자가 다시 나타나는 것을 극도로 혐오하고 있다. 그들 수구세력에서 광해와 노무현을 떠올리는 문재인이라는 정치가는 얼마나 두려운 존재일까?? 역사는 오늘을 비추는 거울이다. 명청 교체기라는 격변기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서 겪은 고통을, 미국에게서 중국으로 패권이 넘어가는 오늘을 사는 우리는 잊지 말아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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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8-07-03 15: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강나루 2018-07-03 18:10   좋아요 0 | URL
감사^^ 감사^^

레삭매냐 2018-07-03 15: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정말 오래 전에 읽은 책이네요.

조선시대 유삼(노산군-연산군-광해군)한
세 명의 군주 중의 하나로, 인조반정으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 군주가 아닌
가 싶습니다.

동아시아 질서가 바뀌던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친명배금 정책을 고수하다
망국으로 나라를 이끈 서인세력이 반성을
했던가요? 아니죠.

503호를 앞세워 호가호위하던 정치세력
과 어찌나 그렇게 비슷한지 모르겠습니다.

강나루 2018-07-03 18:10   좋아요 1 | URL
맞아요 당시의 시대상과 오늘날이 자꾸 오버랩되었어요

야상곡(夜想曲) 2018-07-03 18: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작금의 헬조선에선 조조나 손권,제갈량,관중,왕맹,유기,강희제같은 리더들이 필요하다. 그리고 지금의 헬조선에선 더더욱 왕맹의 리더쉽이 매우 많이 필요하다.(지금의 중국은 절대 한족들만의 중국이 아닌 북방과 서방의 힘으로 거대해진 대륙의 집합체로서 다민족국가의 장점으로 운영되는 나라이다)

만화애니비평 2018-08-10 16: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향녕 교수의 그런 시점은 기축옥사 관련 도서입니다. 상당히 어이 없는 글입니다.
임진왜란의 불씨가 기축옥사와 관련 있는 이유가 대부분의 의병장들이 동인(북인)들이 위주이고, 그 중에 정인홍이나 곽재우 장군은 남명 조식 선생의 수제자들 점에서 많은 여파가 나옵니다.
군권에서도 동인(남인) 세력은 이순신을 지원하고, 서인은 원균을 지지하죠....
광해군이 집권하자 원균의 집에 내려준 녹봉을 없애버리는데, 인조반정 이후 다시 원균의 집안에게 녹봉을 하사합니다. 그런 겁니다..허허
 
라틴어 수업 - 지적이고 아름다운 삶을 위한
한동일 지음 / 흐름출판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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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틴어 수업'!!이라는 제목을 보고서, 무척이나 어려운 책이라는 선입관이 생겼다. 라틴어에 관심이 없는 나로서는 읽을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팟캐스트 '최영아의 책하고 놀자'를 통해서 저자 한동일의 '라틴어 수업'에 대해서 새롭게 알았다. '라틴어 수업'을 단순히 라틴어 문법과 단어를 배우는 수업이 아니라, 유럽의 문화와 역사를 배우는 인문교양수업으로 꾸며갔으며, 인생의 깊이를 더해주는 수업으로 20명으로 시작한 수업이 200명의 수강생과 수 많은 청강생들로 채워졌다. 감동이 있는 수업을 꿈꾸는 나에게, 한동일의 '라틴어 수업'은 그 열쇄를 줄 것만 같은 기대감을 주었다. 어느덧, 그의 책을 형광펜을 들고 밑줄 그으며 읽기 시작했다.

 

1. Non scholae, sed vitae discimus.(논 스콜래, 세드 비때 디쉬무스, 우리는 학교를 위해서가 아니라, 인생을 위해서 공부한다.)

  내가 00고등학교에 재직하고 있던 그해에, MB 정권에서는 일제고사를 밀어붙였다. 보수적인 학교분위기와 시대분위기 속에서 공부잘하는 학생들을 주말에도 나와서 공부하도록 했다. 명분은 "학교의 명예를 위해서..."였다. 일제고사에서 학교의 성적이 낮게 나오면 안된다는 것이다. 중간고사 시기가 눈앞에 다가오자, 한학생이 "중간고사 준비를 위해서 학교에 나와 공부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지금은 정년퇴임한 학년부장님과 그 학생의 담임교사는 "학교의 명예보다는 개인의 이익을 우선시한다."며 나무랐다. 과연 그 학생의 선택은 잘못된 것일까? 학교의 명예와 개인의 이익이 충돌할때, 학교의 명예를 우선시해야할까?

  Non scholae, sed vitae discimus.(우리는 학교를 위해서가 아니라, 인생을 위해서 공부한다.)라는 라틴어 경구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공부는 학교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의 인생을 위해서 해야한다. 그리고 우리는 시험을 위해서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꿈을 위해서 공부한다.!! 나는 이 아름다운 말을 학급 게시판에 붙여 놓았다. 그리고 종례시간에 이 명문을 읽어주며, 진정한 공부 이유를 생각해보도록 했다. 철저히 국가와 가문, 학교를 위해서 공부하도록 강요받았던 지난날의 학생들이 이제는 자신의 꿈을 위해서, 자신의 인생을 위해서 공부해야하지 않을까?

 

2. Postquam nave flumen transiit, navis relinquenda est in flumine.(포스트쾀 나베 플루멘 트란시이트, 나비스 렐린쿠엔다 에스트 인 플루미네. 강을 건너고 나면 배는 강에 두고 가야한다.)

  고 신영복 교수의 '강의'라는 책에, 득어망전(得魚忘筌, 得鱼忘筌)이라는 말이 있다. 물고기를 얻었으면 통발은 잊어버리라는 말이다. 그런데, 고 신영복 교수는 고기는 잃어버려도 통발은 버려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통발이 있으면 얼마든지 고기를 잡을 수 있으니, 물고기 보다는 통발이 중요하는 주장이다. 고 신영복 교수의 주장이 일면 타당하기도 했지만, 그의 주장에 100% 공감할 수 없었다. 이러한 나의 생각을 한동일은 라틴어 경구로 설명해주었다. 강을 건너고 나면 배는 강에 두고 가야한다. 아주 좋은 배라서 그 배를 짊어지고 길을 떠난다면, 그 배는 인생을 도와주는 도구가 아니라, 인생을 방해하는 짊덩어리일 뿐이다. 물고기를 잡으면 물고기를 맛있게 요리해서 먹을 준비를 해야한다. 그런데, 통발에 집착한 나머지 물고기를 내팽겨친다면 그사람은 물고기의 참맛을 볼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통발'과 '배'에 집착한다. 수업에 쓰이는 '협동학습 모형', '토론학습 모형' 등등의 모형들은 수업을 위한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다. 수업을 얻으려면, 과감해 그 모형들을 버려야한다. 모형에 집착해서 수업을 망칠수는 없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다. 각종 모형들의 무게이 짖눌려 수업을 망치는 선생님들이 얼마나 많은가?

  결혼하기 전에, 활발한 성격과 친화적인 모습은 그사람의 장점일 수 있다. 그러나 결혼하면 대외적인 활동을 많이하느라, 가정에 소홀히 한다면, 그의 활발하면서도 친화적인 모습은 버려야할 '통발'이요. '배'이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는 말이 한때 유행이었을 때가 있다. 그러나 사랑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사랑은 끊임없이 변해야한다. 애인 사이의 불꽃 튀는 사랑에서, 부부사이의 애틋한 사랑으로 사랑은 변해야한다. 과거의 '통발'에 갖혀서 새롭게 변하지 않는다면, 그 사랑은 영원할 수 없다. 동서양의 지혜가 이렇게 만날 수 있다니, 참으로 놀랍다.

 

3. Do ut des.(도 우트 데스. 네가 주기 때문에 나도 준다.)

 Give and take라는 말을 알고 있는가? 많은 사람들이 믿음과 신뢰를 쌓기 위해서 아낌없이 이웃들에게 나눠주어야 한다는 착한사람 컴플랙스를 가지고 있다. 그러서인지, Give and take를 좋지 않은 뜻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나도 그랬다. 그러나, "Do ut des."라는 경구를 설명하면서, 로마가 주변 도시국가 주민들에게 로마 시민과 동등한 여러 권리를 주었기 때문에 그 국가들이 로마의 정치적 동맹국이 되었다는 한동일의 역사 설명이 뒤따르자, Give and take에 대한 나의 기존관념은 새롭게 업그래이드 되었다. '상호주의'!! 공짜를 바라지 말고 서로의 약속을! 계약을 주고 받으며 정당한 댓가를 서로에게 지불하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깊은 성찰의 시간이 나에게 다가왔다. 과연, 나는 타인의 유형 혹은 무형의 노력의 산물에 대해서 정당한 댓가를 지불하며 살아왔는가? 그들의 유형, 무형의 산물들을 친하다는 이유 하나로, 공짜로 얻으려하지 않았는가? 부모 자식 사이에라도, 정당한 댓가를 지불하지 않았다면, 받지 말아야하고, 혹여 받았더라도 반드시 다른 어떠한 형태로라도 정당한 댓가를 지불해야한다. 아침 산책을 하면서 'Do ut des.'를 되뇌이며, 나 자신을 반성해 보았다.

  한편으로는, '네가 주기 때문에 나도 준다.'라는 말이 '네가 안주기에 나도 안준다.'라는 삭막함으로 이어지지는 않을까? 라는 걱정도 들었다. 그리고 '내가 줄테니, 당신도 달라'는 폭력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생각까지 머릿속에 떠올랐다. 같은 명언이라도,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 지혜로운 해석을 해야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4. Dilige et fac quod vis.(딜리제 에트 팍 쿼드 비스. 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하라.)

  '문제아는 없다! 단지 문제 부모가 있을 뿐이다.!! '라는 명언이 있다. 문제아의 부모를 만나보면, 문제학생이 이해가 될 때가 있다. 때로는 이러한 부모 밑에서 살아가는 학생이 대견해 보일때도 있다. 자식을 망치는 부모들 중에서 가장 많이 보아온 종류의 부모는 자신의 자녀를 아바타로 생각하는 부류이다.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자녀가 대신 이뤄주기를 바라며, 자신의 뜻대로 자라지 않는 자녀를 윽박지른다. 자신의 꿈이 아니기에, 이에 저항하며 학교에서 퇴학당하기 위해서 갖가지 문제를 일으키는 학생들을 보면서,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하라.'라는 명언울 문제 부모를 둔, 학생들에게 들려주고 싶다. 학생 인생의 주인은 부모가 아니라, 학생이다. 자녀는 부모의 아바타가 아니다! 하나의 인격체일 뿐이다. 실업계를 가고 싶어하는 학생에게 강제로 인문계로 진학하도록 하고, 법대에 진학해서 자신이 못이룬 법관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못난 부모가 결국은 자녀가 고등학교를 마치지 못하고 퇴학당하게 만들었다. 그 학생의 인생은 누구에게 보상받아야할까? 상담이 필요하고, 정신과 진료가 필요한 것은, 문제아가 아니라, 그 문제아의 부모였다.

  Dilige et fac quod vis!! 삶은 유한하다. 사랑하며,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어 하는 것을 하자! 그것이 내 자신이 인생의 주인으로 살기 위한 조건이니까....

 

5. Dum vita est, spes est.(둠 비타 에슽, 스페스 에스트. 삶이 있는 한, 희망은 있다.)

  희망이 있기에 삶이 있고, 살아 있기에 그래도 희망은 있다. 이명박근혜 정권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면서,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희망을 보라고 말했다. 헬조선을 말하며 한국을 떠나고 싶다는 사람들에게 '두려워서 도망친 곳에 천국이란 없다.'며, 천국을 찾아 떠나지 말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을 천국으로 만들자고 말했다. 현실이 아무리 절망적이라도 우리는 희망을 보아야한다. 칠흑같은 어둠속에서 보이는 한줄기 빛이 바로 희망이다. 희망은 현실이 절망적이기에 더욱 빛을 발한다. 그 희망을 잃지 않았기에 우리는 '촛불 혁명'을 이뤄냈다. 삶이 있는 한, 희망이 있기에 오늘도 우리는 살아간다.

  절망을 노래하는 삶이, 희망을 노래하는 삶으로 바뀌었을때, 우리는 삶을 어떻게 살아야할까? 한동일은 '인간은 죽어서 그 육신으로 향기를 내지 못하는 대신 타인에 간직된 기억으로 향기를 낸다.'라는 말을 한다. 나는 남에게 얼마나 향기로운 기억을 남기며 살고 있는가? 가장 가까운 부모에게 얼마나 아름다운 향기를 남기려 노력했는가? 그래! 살아가며 희망을 노래하고, 나의 주변에 가까운 사람들부터 향기로운 기억을 선사하자! 그것이 인생인 것을....

 

6. 옥의 티

  '라틴어 수업'에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한동일은 이슬람교에 대해서 부정적인 서술이 눈에 거슬리는 면도 있다. 그래, 한동일이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을 말하고 있다. 이슬람교 국가들이 자국민에게 이슬람교를 강요하는 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타국에서도 강도는 약하지만 있는 일이다. 미국 대통령이 성경에 손을 대고 맹세한다. 이는 묵시적으로 그리스크교를 국민들에게 인정하기를 강요하는 미쟝센이다. 호주에서는 가벼운 범죄를 저지른 사람은 교회에가서 목사님의 변호서를 받아오라고 한다. 이 또한 크리스트교를 믿으라는 압력이 아닐까? 이슬람교 국가보다 약하긴하더라도 묵시적으로 존재하는 압력을 행사하는 나라들이 있는데, 유독 이슬람교 국가만 더 비판할 필요가 있을까?

  한 쳅터당 하나의 라틴어 명언이 제시되어 있다. 이 책의 장점을 더 살리려면, 그 라틴어 명언을 한 사람을 적어두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Tantum videms quantum scimus.(탄툼 비데무스 콴툼 쉬무스. 우리가 아는 만큼, 그만큼 본다.) 즉, 아는 만큼 보인다. 라는 이 문장은 유홍준 교수가 그의 책에서 한말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혹시 유홍준 교수는 라틴어 명언을 옮긴 것이 아닐까?라는 의문이 든다. 그러나, 이를 확인할 길이 없다. 한동일이 각각의 라틴어 명언에 대한 출처를 제시했다면, 나의 지적 호기심을 더 많이 충족해 주었을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신영복 교수의 '강의'가 떠올랐다. 감옥이라는 작은 세상을 통해서 인생의 진리를 깨닫고 이를 '강의'를 통해서 우리를 깨우쳐 주신, 시대의 스승 신영복! 쉽지만은 않은 '강의'라는 책을 읽고 받았던 감동을 이책에서 다시 느꼈다. 저자 한동일은 자신의 삶 속에서 우러나온 인생의 지혜를 라틴어를 통해서 표현하고 우리의 가슴에 감동의 울림을 주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강의를 듣고 삶의 자세를 배웠다는 감사함을 전하는 학생있고, 그를 존경한다는 제자들고 많다. 그는 단순히 라틴어 문법을 가르치지 않고, 삶을 가르치려했다. 삶을! 사랑을! 가르치며, 자신의 인생 내공으로 학생들의 마음을 우렸다. '라틴어 수업'이 단순히 라틴어를 가르치는데 머무르지 않고 유럽문화! 더 나아가서 인생을 곱씹을 수 있는 화두를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오늘도 삶을 살아가야하는 이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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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drailmin 2018-09-22 16: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작가 이상으로 생각의 폭이 넓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서평, 잘 읽었습니다

2018-09-23 18: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괴짜 심리학 - 생각의 오류를 파헤치는 심리학의 유쾌한 반란
리처드 와이즈먼 지음, 한창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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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괴짜 심리학'이라! 얼마나 재미있는 제목인가! 즐거운 책읽기를 원하는 독자로서는 이책의 제목에 끌리지 않을 수 없다. 일상의 괴롭고 무거움에서 해방되어 유쾌한 책읽기로 그 스트레스를 벗어던지고 싶던 마음에서 이 책을 선택해서 읽기 시작했다. 책의 내용은 너무도 유쾌, 상쾌, 명쾌했다.

 

1. 행복하고 싶은가? 행운을 잡고 싶은가? 그럼 웃어라!!

  괴짜 심리학이라는 제목에 어울리게 이 책에는 약간은 의아스러운 주제에 대해서 실험을 하고 있다. 그 중에 하나가 '행운아는 여름에 태어나는 것이 맞을까?'라는 질문 아래 시행된 수많은 실험이다. 자신이 불운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자와 자신이 행운아라고 생각하는 자에게 갖가지 실험을 했다. 행운이 있는자는 여유있게 신문을 살펴보다가 신문속의 행운을 찾았으나, 불행한 자는 신문속의 행운을 읽지 못했다. 상황은 똑 같았다. 그러나 그것을 발견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는 개인의 그사람의 심리상태에 달려 있었다. 행운아는 낙관적이며 정력적이고 개방적인 반면에, 불행아는 수줍고, 재치가 없으며, 걱정이 많다. 또한 폐쇄적이다. 자신이 어떠한 마음을 갖느냐에 따라서 자신의 운명이 달라지는 것이다. 보통 우리가 운명은 개척하는 것이라는 말을 많이한다. 심리학적 연구결과가 말해주듯이, 운명은 우리가 어떻한 생각을 하고 어떻게 삶을 살아가는지에 따라서 달리 결정되는 것이었다.

  우리의 운명을 바꾸는 우리의 행동중에 하나가 바로 '웃음'이다. 재미있는 것은 웃음도 전염된다는 사실이다. 이를 이 책에서는 인간이 진화하는 과정에서 얻게된 결과로 설명한다. 생존을 위해서 인간은 타인의 표정을 따라하며 타인의 감정을 이해한다. 인간이 사회생활을 하면서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본능적으로 타인의 표정을 따라한다. 우리가 웃는다면 타인도 웃을 것이다. 그 웃음 바이러스가 퍼진다면 우리 사회는 보다 밝아질 것이다. 아내의 웃는 얼굴을 보면, 나의 마음이 편해지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일 것이다. 그래 웃자!! 내가 웃는다면 그 웃음 바이러스는 우리 주변의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운명도 바꾸어 놓을 것이다. 왜냐고? '노인' 혹은 '교수'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인간은 노인처럼 행동하거나 교수처럼 똑똑해진다는 실험 결과 때문이다. 또한 이름과 관련된 직업을 갖는 사람들이 많다는 연구결과도, 인간이 얼마나 무의식에 지배되는 인간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래 그래서 우리는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우리 주변의 이웃을 좋은 이름으로 부르며, 함께 웃으며 살자! 그럼 진실로 운명이 긍정적으로 바뀔 것이다.  

  그런데, 한가지 유의할 일이 있다. 우리가 웃기 위해서 '유머'를 던진다. 그런데, 어떠한 유머를 즐기는가에 따라서 타인에게 편견을 줄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같은 유머라도 특정 상대를 비하하고 편견을 심어주는 유머보다는 모두를 유쾌하게하는 유머를 즐기자!!

  물론, 유머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바로 한국사회의 정치인들과 종교인들이다. 그들은 금기의 유머의 금기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과거 보수정권의 국회의원이 특정 코미디 프로그램의 특정 꽁트를 문제삼아서 비난하자, 그 콩트가 폐지된 일이 있었다. 정치인들은 웃음의 위력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이 책의 연구결과 근본주의적인 사람일수록 농담이 사라진다고 한다. 그들에게는 유머가 신성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어질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정확한 것은, 우리가 부패한 정치인들과 유연성을 잃은 종교인들을 상대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는 유머라는 점이다.

 

2. 나약한 인간이라는 존재!

  사주팔자를 믿는가? 많은 사람들이 새해가 되면 토정비결을 본다. 올해는 무슨 좋은 일이 있을까? 나에게도 행운이 올까? 라는 기대심은 인터넷 토정비결을 보면서 일희 일비하게 만든다. 결혼에 대해서, 직업에 대해서 불안감이 들때, 사주카페에가서 사주를 보며 불확실한 미래를 점쳐본다. 이 책에서는 사주팔자 부터, 점성술 등에 관한 흥미 있는 다양한 실험이 소개되어 있다.

  운동선수 중에서 특정월에 태어난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이 통계로 확인된다면 당신은 별점을 믿을 것인가? 이 책은 경기 시즌 처음 몇달 안에 생일이 있는 선수가 그렇지 않은 선수보다 많다는 점을 설명하면서, 같은 나이의 선수라할지라도 그가 어느 월에 태어났느냐에 따라서 스카우터들로부터 피지컬이 좋은 선수로, 혹은 그렇지 않은 선수로 판단될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한다. 특정 종목에 특정 월에 태어난 선수가 많은 것은 별의 기운 때문이 아니라, 경기 시즌의 시작월 때문이었다. 그래서 한국의 부모들이 자녀를 초등학교에 조기 입학 시키려고 노력하다가, 이제는 일년 정도 늦게 입학시키려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사주팔자는 믿는가? 이 책에 소개된, 제프리는 2천명의 기록을 분석해서, 같은 날 비슷한 시간에 태어난 사람들의 유사성 검사를 했으나, 유사성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사주팔자가 통계학적 검토를 한 결과 전혀 신빙성을 얻지 못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물론, 명리학자들은 그들을 둘러싼 부모와 친구들의 사주도 봐야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사람이 태어난 사주팔자만가지고 그 사람의 운명을 파악할 수 없는 것은,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영향이 많기 때문이라는 반론이다. 만약 그 명리학자의 반론이 맞는 말이라면, 우리 주변의 인물들을 선택해서 만난다면,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여기서 한발자국 더 나가보자. 당신은 영매를 믿는가? 이 책에는 재미 있는 실험이 있다. 골동품 가게에서 싼값에 산 골동품을, 권위와 시간적 암시만으로 비싼 값에 사려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강령회'에서 영매가 간단한 암시를 주자, 사람들이 그 분위기와 영매의 암시만으로 움직이지 않은 탁자가 움직였다고 주장한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이 얼마나 쉽게 속는 존재인가?

  인간이 타인의 암시에 의해서 쉽게 속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자신의 기억도 조작한다. 어린 시절의 사진을 조작하여 열기구를 타고 있는 사진을 만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타지도 않은 열기구를 어린시절에 탔다고 강변한다. 자신의 기억을 조작한 것이다. 박정희 시대를 살았던 많은 노인분들이 자신의 과거가 행복했다고 믿는 것과 유사한 현상이다. 인간은 자신에 의해서이든 타인에 의해서이든 속기 쉬운 존재이며, 그 거짓을 진실이라 믿는다.

  사주팔자, 별점에 대한 다양한 실험은 운명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인간이 운명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경제적 상황이 나쁠수록 미신과 관련된 글이 많아지며, 위험한 지역에 살수록 미신적 행동을 한다고 한다. 불안과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인간을 미신에 의존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하면 미신에서 벗어나, 우리의 운명을 개척해 나갈 수 있을까? '화성효과'의 진실이 우리가 보다 현명해지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성공한 사람들 중에는 생일을 바꾼 사람들이 많이 있다. 즉, 태어난 날짜가 위대한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상서로운 날짜에 태어났다.'라는 믿음이 위대한 인물을 만든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한다. 신념과 믿음이 위대한 인물을 만든 것이다. 우리가 미신과 무지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자신의 강인한 신념을 가지고 인생이라는 불확실하고 매몰찬 현실을 웃으면서 돌파하는 수밖에 없다.

 

 

3. 친절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일본언론에서 한국과 일본의 사기범죄 통계를 근거로 한국사람들은 사람을 잘 속인다는 기사를 쏟아냈던 적이 있다. 물론, 법률체계가 다른데 이를 단순비교하는 것이 무리라는 반론이 있었다. 이때 내가 알게된 사실은 일본언론은 한국을 무척 싫어한다는 점이다. 암튼, 지구상에서 가장 친절한 도시는 어디일까? 이에 대해서 연구한 심리학자가 있다. 편지봉투를 바닥에 던져, 이것이 우체통에 넣어주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를 바탕으로 세계 여러나라의 친절도를 조사한 실험이다. 그런데, 이 실험은 단순히 세계 여러나라 친절도를 줄세우기 하는데 그친 것이 아니라, 왜? 그러한 결과가 나왔는지를 연구했다. 인구밀도가 높을 수록 불친절했으며, 삶의 속도가 빠를 수록 타인에 대한 배려심은 낮아지고, 생명도 줄어든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이 실험은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할까? 물론, 이 책에 서울의 친절도는 나와 있지 않다. 아직까지 한국의 위상이 크지 않아서, 심리학자들이 한국에서는 실험을 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럼에도 우리는 한국의 삶의 속도가 매우 빠르며, 서울의 인구밀도는 과히 살인적이라고 할만하다는 사실을 안다. 국가 정책상으로는 도시집중화를 완화시키는 다양한 정책을 실시해야하며, 도시를 설계할 때도 삶의 속도가 너무 빠르지 않도록, 인구밀도가 높지 않도록 설계해야한다. 한편, 우리는 삶의 여유를 잃지 않는 마음가짐을 갖아야한다. 그러나 이것이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다. 도시개발에 자본의 논리가 앞서며, 국가 정책은 5년 마다 청와대의 주인이 바뀌기에 장기적으로 세울 수 없다. 빨리빨리를 중요시하는 한국문화에서 개인이 삶의 속도를 줄이는데는 한계가 있다. 친절도를 높이는 사회를 마들 수있는 방법은 알았지만, 현실에서 이를 실천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당신의 해결책은 무엇인가? 혹시 대책이 있다면, 댓글로 알려주길 바란다.

 

4. 인생의 팁!!

  빅터 프랭크의 '의미치료'를 아는가? 빅터 프랭크가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에서 자신의 수용소 생활을 토대로, 인간이 어떠한 의미를 갖는가에 따라서 죽을 수도, 극한상황에서 살아남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소개하고 있다. 빅터 프랭크의 결론은 이 책에서도 실험적으로 증명되었다. '사회적 행위로서의 죽음'이라는 연구에서 중국 '중추절' 전에 사망율이 35% 떨어지지만, 중추절 이후에는 사망율이 올라간다고 한다.  빅터 프랭크의 '의미 치료'는 죽음의 수용소에서만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었다. 바로 우리 현실에서 뚜렷히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하수는 상대를 쫓아다니지만, 고수는 상대가 따라오도록 한다. 연인을 만날 때도, 하수는 연인을 쫒아다니지만, 고수는 연인이 따라오도록 한다. 이성을 유혹하는 데 뛰어난 사람은 상대가 스스로 특이하고 재미있고, 기상천외한 발언을 하도록 유도한다. 예를 들어 "당신이 피자 토핑이라면 어떤게 되고 싶으세요?"라고 묻는다. 내가 움직이지 말고 나를 중심으로 상대가 움직이게 하라! 북극성은 가만있지만, 별들은 북극성 주변을 돌고 있다. 연인을 만들때 뿐만 아니라, 삶을 살아갈 때도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움직이도록 하자!!

 

  괴짜 심리학이라는 제목은 쓸모는 없지만, 재미있는 심리학 이라는 선입관을 갖게 했다. 그러나 책을 읽고난 지금, 괴짜 심리학은 우리가 연구가치가 없는 주제라며 무시하는 분야를 연구해서 사회에서 꼭 필요한 진실을 우리에게 알려준다는 결론을 내렸다. 무심코 지나쳐 버리는 해변에서 진주를 주워 올리는 학문이 '괴짜 심리학'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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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정요 (반양장) - 리더십의 영원한 고전
오긍 지음, 김원중 옮김 / 글항아리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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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대에는 삼국지를 읽고, 30대에는 정관정요를 읽어라.'라는 일본의 어느 정치가의 말이 있다. 한국에서 삼국지는 사내아이라면 몇번이고 읽는 책이지만, 정관정요는 읽었다는 사람이 별로 없다. 또한 정관정요에 대한 강의를 유튜브와 팟캐스트에서 찾아보았지만, 관련 강의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 정도로 정관정요는 우리에게 친숙하지 않은 책이다. 그럼에도 '정관정요'를 읽기로 마음 먹은 것은, '제왕학의 교과서'라는 별칭 외에도, 고려 광종이 옆에 두고 읽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호족들을 제거하고 고려왕조를 반석 위에 올려 놓은 광종! 그가 그토록 애독했던 '정관정요'에는 어떠한 내용이 적혀있을까? 그 속으로 들어가 보자.

 

1. 무서운 사람 당태종!!

  정관정요가 잘 읽히지 않은 이유중에 하나는, 당태종 이세민이 고구려를 쳐들어왔다는 사실도 한가지 이유이다. 우리에게는 원수지만, 중국인들에게는 '정관의치'라고 불리는 태평성대를 이룬 존경받는 황제이다. 전쟁광으로 여겨질만한 그가 어떻게 중국인들에게 그토록 존경을 받을까? 정관정요를 읽으며, 그 비밀을 몇가지 알아냈다. 당태종은 '현무문의 변'을 일으켜, 자신의 형을 죽이고 황제가 된 사람이다. 그가 자신이 능력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는지, 정관정요의 행간에 당태종의 자제력과 인내력이 속속들이 들어있다.

  당태종이 무서운 사람이라고 느낀 것은 자신이 죽인 형의 신하를 자신의 신하로 품어 앉은 것에서 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그 신하를 항상 가까이에 두고 자신에게 간언을 하도록 했다. 그가 죽자 당태종은 몹시도 슬퍼했다. 그 신하의 이름은 '위징'이다. 위징은 태자에게 태종을 죽여 우환을 없애자고 건의를 하기까지 했다. 그런 위징을 당태종은 죽이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그가 반역을 꾀한다는 고변이 들어오자, 오히려 고발한 자를 서둘러 참수했다. 적의 신하! 자신을 죽이라고 했던 적의 신하! 그리고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고발을 받은 자! 그를 끌어 안았다. 그러했기에 당태종은 '정관의 치'를 이룰 수 있었다.

  제 40편 신종편은 위징의 장문의 상소문으로 채워져 있다. 날카롭게 당태종을 비판하는 그 상소문을 당태종은 쾌히 받아들이고, 위징에게 황금 10근과 궁궐 구유의 명마 2필을 하사했다. 당태종의 이러한 모습은 당태종을 더욱 두렵게 느껴지게 한다. '정관정요' 곳곳에 자신에게 간언을 한 신하들에게 비단을 비롯한 명주를 20필~40필을 하사한 기록이 있다. 재정이 튼실한 중국이기에 황제가 신하에게 막대한 하사품을 내릴 수 있다. 그 재정의 튼실함을 간언을 쾌히 받아들임으로서 이룰 수 있었고, 그렇게 이룬 재정을 신하들에게 쾌히 상으로 내렸다.

  여기서 잠깐, 위징과 고려의 서필은 왕이 내린 상을 받는 태도가 다르다. 당태종은 잘못된 정책을 반대한 위징에게 금항아리, 왕규에게는 명주 50필을 하사했다. 그런데 비슷한 사례가 고려 광종에게도 있다. 서희의 아버지 서필에게 금그릇을 하사했더니, 서필은 신하가 금그릇을 사용하면 왕은 무엇을 사용하릿까? 라며 거절했다. 반면에 위징은 사양하지 않고 받았다. 한편으로는 위징보다 고려의 서필이 더 충직한 신하라는 느낌이 든다.

  당태종이 무서운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사례가 있다. 태자 승건이 간언을 하는 장현소를 말채찍으로 때리고 그가 칟던 북을 찢어버렸다. 그래도 간을 하자 자객을 보내 죽이려고 했다. 결국 태자는 폐위된다. 자질이 없는 태자를 폐위시킨 것은 당 태종의 탁월함이다. 주어진 지위를 이용해 갑질하는 사람은 단죄함이 마땅하다. 그런데도, 자신의 혈육이기에 단죄하지 못하고 제위를 넘겨주었다가 나라가 망하거나 신하에 의해서 폐위되는 경우를 우리는 성종과 연산군의 사례에서 살펴볼 수 있다.

  당신은 부모의 피골음을 입으로 빨아낼 수 있는가? 당태종은 황제의 신분으로 고구려를 정벌하면서 백암성 전투에서 화살을 맞은 이사마의 상처를 입으로 빨았다. 이를 보고 장졸들이 감격해서 자신의 목숨을 돌아보지 않고 고구려 공격에 나섰다. 전쟁터에 나간 자신의 아들의 피골음을 '오기'라는 장군이 친히 입으로 빨았다는 소식을 듣자, 그 아들의 어머니는 자신의 아들이 죽을 것이라 한탄했다고 한다. 자신을 인정해주는 자에게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남성들의 감성을 이용해서 당 태종은 그들이 당 태종을 위해서 자신의 가장 중요한 목숨을 버릴 수 있도록 했다. 고구려 정벌을 위해서라면 부하들의 피골음도 빨 정도로 그는 무서운 사람이다.

  당태종의 무서움을  느낀 마직막 사례는, 화난척하여 충신과 간신을 구분하라는 상소문을 일언지하에 거절한 일이다. 당태종은 큰 신의를 행하려는 것이지 속임수로 세속 사람을 가르치려는 것이 자신의 의도가 아님을 강조하며 그 상소문을 물리친다. '한비자'에는 간사한 신하를 알아내기 위해서 거짓으로 신하를 속여서 신하의 본심을 알아보라는 글이 있다. 자신의 손톱을 숨기고 신하들에게 자신의 손톱을 찾도록하면, 한신하가 손톱을 찾았다고 손톱을 들고 온다. 그러면 그 신하는 간신으로 판명나는 것이다. 제왕학의 교본인 '한비자'와는 상반된 당태종의 사례를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덕치가 법치보다 더 효율적이라는 당태종의 통치 철학 때문으로 해석해야할까? 아니면, 현무문의 변을 일으켜 형을 죽이고 황제가 된 자시의 아킬레스건을 숨기기 위한 술책으로 보아야할까? 나의 생각으로는 신하를 속이라는 신하의 건의를 대놓고 받아들이기 힘들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가득이나 쿠데타로 황위에 오른 자신이 신하들을 속이며 제위를 지키려한다면 그는 신하들의 마음을 얻을 수 없는 처지가된다. 그는 자신의 분수를 잘 알았다. 그리고 덕치를 표방하며 신하들의 마음을 얻는 용인술의 달이이 되어갔다.

  정관정요를 읽는 내내, 고구려를 쳐들어온 당태종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이지를 뼈속 깊이 느꼈다. 수많은 적중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적이 가장 무섭다. 당태종은 자신의 본심을 숨기며 자신의 적까지 품어 자신의 충직한 신하로 만드는 무서운 통치자였다.

 

2. 고구려에 대한 당태종의 집착

  정관정요 제 35편 '정벌'편은 당태종에게 고구려 정벌을 하지 말라는 간언으로 채워져 있다. 정관정요의 곳곳에 고구려 정벌의 위험성과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정치를 할 것을 강조하는 내용이 스며들어 있다. 위징은 위나라 이극의 말을 인용하여 '전쟁을 좋아하면 반드시 멸망한다.'라고 간언했다. 그런데 당태종은 위징의 이 말에 맞장구를 쳤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당태종은 너무도 전쟁을 좋아했으며, 북방민족을 정벌하여 '천가한'이라는 칭호까지 받았다. 또한 고구려 정벌에 과도할 정도로 몰두했다.

  그렇다고 그가  백성의 생활을 돌보지 않은 것도 아니다. 당태종은 '밥을 아느냐? 농사 짓기가 힘들다. 농사 짓는 때를 빼앗지 않아야 이런 밥을 먹을 수 있다.', '너는 배를 아느냐? 배를 임금에 비유하고 물을 백성에 비유할 수 있다. 물은 배를 띄워 줄 수 도 있지만 배를 뒤엎을 수도 있다.', '모든 일은 근본에 힘써야하고, 나라는 사람을 근본으로 삼고, 사람은 의식을 근본으로 삼는다.' 이렇게 당태종은 백성을 생각하고 백성의 생업을 위협해서는 안된다고 그 스스로 말하고 있다. 더욱이 궁중이 습하니 높은 누각을 지어 거주하라는 공경대부의 말을 '많은 경비를 쓰는 것은 부모된 도리가 아니다.'라며 거절한 것이 당태종이다. 그런데 당태종은 고구려원정에 집착한다. 신하들이 고구려를 정벌해서는 안된다는 간언을 올려도 끝내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정관정요'에도 나와 있듯이, 야광주보다 더 귀한 것이 바로 사람의 목숨이다. 재물을 사랑한다하여 재물보다 더 귀한 목숨을 잃는다면 이 어찌 안타까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당 태종은 당나라 백성의 목숨보다도, 고구려 땅을 더 얻고 싶어했다. 그는 고구려 원정에 당의 백성과 말을 동원해 죽음으로 몰아 넣었다. 당의 백성들이 생업을 잃고 전쟁의 아비규환에서 목숨을 잃도록 했다.

  그의 모순된 말과 행동을 어떻게 해석해야할까? 그가 백성을 진심으로 사랑했다면 고구려원정에 집착하지 말았어야했다. 당나라는 충분히 넓다. 그럼에도 그는 고구려 원정에 집착했다. 그가 고구려 원정에 집착한 것과 백성을 사랑한 것, 어느 것이 그의 본심일까? 당태종은 정쟁을 하기 위해서 백성을 사랑했다. 백성이 잘살아야 그들에게 군량미를 착취하고, 그들을 병사로 사용할 수 있다. 이러한 사례는 우리 주변에, 술을 마시기 위해서 운동을 하는 50대 분들을 보면 이해가 쉽게 된다. 체력이 되어야 술을 마실 수 있다. 경제가 뒷받침 되어야 전쟁을 할 수 있다.

 

3. 위징을 평가하다.

  당태종 제일의 책사는 단연 '위징'이다. 어떤이는 '방현령'을 당 태종 제일의 책사로 꼽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방현령은 당태종이 화를 내며 꾸짓으면 바로 잘못했다고 꼬리를 내린다. 반면에 위징은 당 태종이 꾸짖어도자신의 의견을 논리적으로 제시해서 당 태종을 설득시킨다. 방현령에게는 없는 당당함과 탄탄한 논리력이 위징에게는 있다. 이것이 바로 충신의 조건이다. 

  위징은 '충언도 의견을 잘 절충해서 조용하고 은근하게 풍자해야한다.'라고 말한다. '한비자' 세난편이나 '카네기 인간 관계론'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아무리 올바른 말이라도 함부로 말했다가는 미움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것이다. 상대방의 마음을 읽고, 상대방이 진정으로 흥미있어 하고, 상대방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그를 설득해야 설득이 가능하다. 이 어려운 일을 위징은 하고 있었다. 

  그래서, 위징이 죽자 당태종은 '나의 거울을 잃었다.'라고 통곡했다. 당태종이 고구려원정에 실패하자, 위징이 살았다면 말렸을 것이다.라며 한탄한 사실을 보더라도 위징의 충언과 당태종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강력했다. 각도에 척출사를 파견하려할 때, 신하들은 '위징'을 추천했다. 당태종은 자신을 바로 잡는 사람은 위징이라며 그와 떨어질 수 없다고 말한다. 결국 위징 대신 이정을 척출사로 파견한다. 만약 그가 오래 살았다면, 당 태종의 고구려 원정을 막을 수 있었을까? 그리고 한국사는 변했을까? 

  그럼, 위징은 어떠한 신하로 평가할 수 있을까? 그가 올린 상소문을 근거로 그를 평가해보자. 위징은 '설원'을 근거로 신하를 육정과 육사로 나눈다. 바른 신하 여섯과 사악한 신하 여섯! 위징은 육정중에서 어떠한 신하일까? 공문을 준수하고 법령을 받들어 관리를 임명하고 업무를 맡길 때 뇌물을 받지 않고 녹봉은 사양하고 포상은 양보하면서 음식가지 절약하는 신하를 정신이라한다. 신하가 녹봉도 사양한다면 그 신하는 무엇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현실에 존재할 수 없는 신하이다. 아니면, 대기업 회장 처럼 돈이 차고 넘쳐서 녹봉을 받지 않아도 될 사람이라면 가능한 신하가 정신이다. 위징은 녹봉을 사양하지도 않았으며, 더욱이 당태종이 내린 백금과 비단을 사양하지도 않았다. 그는 '정신'은 아니다. 국가가 혼란에 빠졌을 때 아첨하지 않고 감히 임금의 존안을 범하면서 면전에서 임금의 과실을 말하는 신하를 '직신'이라한다. 위징은 '정신'이 아니라, '직신'이다. 직신은 왕의 미움을 받아 죽을 수 있음에도, 그는 죽지 않고 당 태종의 '거울'이 되어 당태종의 무한한 신뢰를 받았다.

 

4. 우리의 현실을 되돌아 보다.

  00000의 갑질 기사가 연일 신문지면을 뒤덮고 있다. 그들의 동영상과 녹취파일을 읽다보면, 과연 그들의 가정교육이 이루어지는 집안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정관정요'에는 소위 제벌 2세에게 귀감이 되는 격언들이 있다. 당태종은 민가에서 자라 나라를 창업한 왕은 민생의 진위를 알고 패방하지 않지만, 보위를 이은 왕은 태어나면서  부귀를 누리고 백성의 고통을 알지 못해 멸망으로 치닫는다.'고 말한다.  이는 창업주가 맨손으로 기업을 일구었기에 서민의 삶을 이해하고 고난을 극복하여 기업이 잘 경영되지만, 재벌 2세, 3세는 주어진 부귀에 취하여 갑질을 하고 회사이름에 먹칠을 하는 경우가 종종있는 현실과 너무도 유사하다.

   비단 황제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공신에게도 그들의 자녀에게 경종을 울리는 말을 서슴치 않고 한다. '요순에게도 불초자식이 있다.' 즉, 소위 공신을 사랑하는 행동이 바로 그들의 자녀를 해치는 원인이된다. 공신자손에게 봉읍을 하사할 때도 그들의 재능과 행적을 보고 주어야한다. 그들의 능력이 뛰어나지 않는데도 분에 넘치는 봉읍을 준다면, 후손은 죄업에서 벗어날 수 없다. 심지어는 멸문지화를 겪게 된다. 그래서 여러 제후국의 군주로 그들을 대를 이어 책봉한다면 그들은 선조가 이룩한 고난을 망각하고 저절로 고귀함을 얻어 이를 가볍게 취급하여 대대손손 교만함과 사치함을 자행할 것이라 경계해야함을 강조한다. 자수성가한 창업주가 자신의 부와  지위를 자녀에게 세습하면서 벌어지는 폐단을 '정관정요'는 1000년 전에 예견하고 있었다.

  정관정요에는 '존엄한 신분을 굽히고 아랫사람과 교유하는 대의를 밝'힐 것을 강조한다. '깊은 궁궐에서 태어난 여인의 손에서 자란다면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알지 못학 또 풍아를 깨치지도 못할것'이라고 경계의 말을 한다. 재벌이 자신의 자녀에게 돈을 물려주기 보다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일굴수 있는 황무지를 물려주었다면, 그들은 이렇게 지탄을 받지 않았을 것다. 거져 주어진 옥토는 그들에게는 더이상 옥토가 아니라 당연한 결과일 뿐이며, 자신이 고용한 사원은 자신의 노예로 여겨질 뿐이다. 정관정요는 1000년이라는 시간을 뛰어 넘어, 지금의 금수저, 00항공사의 재벌2세, 3세들에게 경종의 말을 하고 있다. '봉작을 세습케하지 않으면 현인을 등용하는 길이 넓어질 것이다.'라는 정관정요의 말은 오늘날 재벌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한다. 혈통에 의한 세습이 아닌, 전문경영인 체제를 도입해 부의 되물림을 없애라! 정관정요는 오늘날 한국사회의 재벌문제의 근본적 해결책을 제시한다.


5. '정관정요'가 던져 주는 교훈

  예절은 엄격해야할까? 간소화해야할까? 당 태종은 제왕이라도 살아서는 피휘하지 않도록 했다.과거시험을 볼 때도, 문서를 작성할 때도 역대 황제의 이름을 알아서 그 글자를 피해서 문서를 작성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그런데 당 태종 이세민은 자시의 이름 '세'와 '민' 두 글자가 연이어 나오지 않으면 피휘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부드럽게 연결해줄 수 있는 것이 예절이다. 그 예절이 사람의 삶을 피곤하게 만든다면 그 예절은 간소화되고 생략해야한다. 이세민은 이것을 알았던 것이다. 

  당신은 맹목적 사랑을 받으면 행복할 것 같은가? 당 태종이 위 의공이 북방 이 민족에게 죽어 간밖에 남지 않자, 신하 홍연이 자신의 간을 꺼낸 뒤에 의홍의 간을 자기 배속에 집어 넣었다는 이야기를 말한다. 그러자, 위징은 예양이 지백을 위해서 조양자를 칼로 찔러 죽이려한 고사를 예로 들어, '임금이 사람을 예로 대우하는 것에 달려 있다. 어찌 사람이 없다하십니까?'라며 당태종에게 일침을 가한다. 여자는 자신을 지켜줄 사람을 위해서 미모를 가꾸고, 남자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다는 고사가 여기에서 나왔다. 사실 부모 자식간에도 일방적인 사랑은 없다. 자녀가 재롱을 부리리고 부모에게 사랑을 받으려 노력하기에 자녀가 더욱 예뻐보이기 시작하여 사랑을 주는 것이다. 일방적이고 맹목적인 사랑은 참사랑이 아니라, 집착이며 정신병이다. 일방적인 충성을 신하에게 요구하는 당태종에게, 위징은 그러한 일방적 사랑은 없다며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는 사랑만이 있을 뿐이라고 일침을 가한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진정한 사랑은 무엇이지를 생각하게하는 일화이다. 

  '정관정요'하면 가장 유명한 구절이 '창업과 수성 중에 어느 것이 어려운가?'라는 당 태종의 질문에 위징이 창업은 때를 만나 쉽게 이룰 수 있는 것이지만, 수성은 천하를 얻은 뒤로 본래의 뜻이 교만해져서 백성은 피로해지고 나라는 쇠퇴하기에 수성이 어렵다고 대답한 고사이다. 위징의 지적은 참으로 탁월한 지적이다. 고려가 동북 9성을 개척하고도 쉽게 포기한점이나, 공민왕 시기 이성계가 요동성을 점령하고도 이를 지키지 못한 것을 보더라도 '창업'보다 '수성'이 참으로 힘들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결혼을 하는 것보다, 행복한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스승의 날을 당신은 없애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존치 시켜야한다고 생각하는가? 스승의 날 의미가 잊혀져가는 요즘, 당 태종의 이야기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당 태종은 황태자에게 조칙을 내려 스승을 이끌어 궁전 위로 모시게하고 직접 배례를 올리며 존중의 마음을 크게 보이라했다. 스승에 대한 존중과 감사가 있어야 참다운교육이 가능하다. 스승을 존중하지 않는 학부모와 학생이 늘어나는 요즘! 스승의 날을 교사가 더 부담스러워하는 현실! 속에서 당 태종의 일화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물론, 적폐교사는 마땅히 속아내야 한다. 그들까지 옹호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우리 주변의 이름없는 참교사에 대한 존중은 반드시 이뤄져야한다. 

  여섯가지 사악한 신하, 즉 '육사' 중에서 구신은 농봉만 탐하고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부침하며 눈치를 보는 신하들이다.이들은 지금 우리 주변에서 많이 보이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특히 변화를 싫어한다. 이들보다 더 나쁜 신하들이 '적신'과 '망국지신'이다. 파당을 짓고 현명한 사람을 모함하고 임금의 악행이 나라안에 두루 알려지게하고 사방의 이웃나라까지 그 소문이 들리게하는 자들이다. 나라를 좀먹고 급기야는 망하게하는 신하들! 요즘도 많이 보이지 않는가? 한국의 정치인인지, 일본의 자민당 2중대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자들이 '적신'이요, '망국지신'이다. 

  


  제왕학의 교과서를 말하라면, 단연 '한비자'와 '정관정요'를 꼽을 수 있다. 두 책 모두 제왕이 읽어야할 필독서이지만, 성격을 상당히 다르다. 한비자가 제왕의 관점에서 신하를 부리는 방법을 서술했다면, 정관정요는 신하의 관점에서 정치의 요체를 논한다. 신하의 말을 잘 들었던 당 태종처럼 제왕이 어진 신하의 말을 잘들어 '정관의 치세'를 다시 만들자는 관점에서 씌여진 책이 '정관정요'이다. 상당히 직설적이라서 후대의 황제들이 '정관정요'를 싫어했다. 그러나 입에 쓴 약이 몸에는 좋은 법! 제왕이라면 독선과 독단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정관정요'를 읽어야한다. 

  물론, 한국의 독자는 중국 중심으로 서술되었다는 사실에 유의해야한다. 가령, 당 태종이 '고구려를 격파'했다고 표현한 부분은 지나친 자국중심 주의의 극치이다. 안시성을 함락하지 못하고, 쫒기듯이 도망쳐야했으며, 황제가 친히 곤룡포를 벗어던지고 말채직으로 갈대를 묶는 일을 도와야했다. 음란한 음악을 경계하라는 지적도, 생산력이 낮은 전통시대의 '농본주이ㅡ' 사회의 시대상을 반영한 지적으로 자본주의 시대에는 맞지 않는 말이다. 이러한 점을 유의해서 읽는다면 '정관정요'는 우리에게 많은 생각할 꺼리를 던져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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