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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어 수업 - 지적이고 아름다운 삶을 위한
한동일 지음 / 흐름출판 / 201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라틴어 수업'!!이라는 제목을 보고서, 무척이나 어려운 책이라는 선입관이 생겼다. 라틴어에 관심이 없는 나로서는 읽을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팟캐스트 '최영아의 책하고 놀자'를 통해서 저자 한동일의 '라틴어 수업'에 대해서 새롭게 알았다. '라틴어 수업'을 단순히 라틴어 문법과 단어를 배우는 수업이 아니라, 유럽의 문화와 역사를 배우는 인문교양수업으로 꾸며갔으며, 인생의 깊이를 더해주는 수업으로 20명으로 시작한 수업이 200명의 수강생과 수 많은 청강생들로 채워졌다. 감동이 있는 수업을 꿈꾸는 나에게, 한동일의 '라틴어 수업'은 그 열쇄를 줄 것만 같은 기대감을 주었다. 어느덧, 그의 책을 형광펜을 들고 밑줄 그으며 읽기 시작했다.
1. Non scholae, sed vitae discimus.(논 스콜래, 세드 비때 디쉬무스, 우리는 학교를 위해서가 아니라, 인생을 위해서 공부한다.)
내가 00고등학교에 재직하고 있던 그해에, MB 정권에서는 일제고사를 밀어붙였다. 보수적인 학교분위기와 시대분위기 속에서 공부잘하는 학생들을 주말에도 나와서 공부하도록 했다. 명분은 "학교의 명예를 위해서..."였다. 일제고사에서 학교의 성적이 낮게 나오면 안된다는 것이다. 중간고사 시기가 눈앞에 다가오자, 한학생이 "중간고사 준비를 위해서 학교에 나와 공부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지금은 정년퇴임한 학년부장님과 그 학생의 담임교사는 "학교의 명예보다는 개인의 이익을 우선시한다."며 나무랐다. 과연 그 학생의 선택은 잘못된 것일까? 학교의 명예와 개인의 이익이 충돌할때, 학교의 명예를 우선시해야할까?
Non scholae, sed vitae discimus.(우리는 학교를 위해서가 아니라, 인생을 위해서 공부한다.)라는 라틴어 경구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공부는 학교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의 인생을 위해서 해야한다. 그리고 우리는 시험을 위해서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꿈을 위해서 공부한다.!! 나는 이 아름다운 말을 학급 게시판에 붙여 놓았다. 그리고 종례시간에 이 명문을 읽어주며, 진정한 공부 이유를 생각해보도록 했다. 철저히 국가와 가문, 학교를 위해서 공부하도록 강요받았던 지난날의 학생들이 이제는 자신의 꿈을 위해서, 자신의 인생을 위해서 공부해야하지 않을까?
2. Postquam nave flumen transiit, navis relinquenda est in flumine.(포스트쾀 나베 플루멘 트란시이트, 나비스 렐린쿠엔다 에스트 인 플루미네. 강을 건너고 나면 배는 강에 두고 가야한다.)
고 신영복 교수의 '강의'라는 책에, 득어망전(得魚忘筌, 得鱼忘筌)이라는 말이 있다. 물고기를 얻었으면 통발은 잊어버리라는 말이다. 그런데, 고 신영복 교수는 고기는 잃어버려도 통발은 버려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통발이 있으면 얼마든지 고기를 잡을 수 있으니, 물고기 보다는 통발이 중요하는 주장이다. 고 신영복 교수의 주장이 일면 타당하기도 했지만, 그의 주장에 100% 공감할 수 없었다. 이러한 나의 생각을 한동일은 라틴어 경구로 설명해주었다. 강을 건너고 나면 배는 강에 두고 가야한다. 아주 좋은 배라서 그 배를 짊어지고 길을 떠난다면, 그 배는 인생을 도와주는 도구가 아니라, 인생을 방해하는 짊덩어리일 뿐이다. 물고기를 잡으면 물고기를 맛있게 요리해서 먹을 준비를 해야한다. 그런데, 통발에 집착한 나머지 물고기를 내팽겨친다면 그사람은 물고기의 참맛을 볼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통발'과 '배'에 집착한다. 수업에 쓰이는 '협동학습 모형', '토론학습 모형' 등등의 모형들은 수업을 위한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다. 수업을 얻으려면, 과감해 그 모형들을 버려야한다. 모형에 집착해서 수업을 망칠수는 없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다. 각종 모형들의 무게이 짖눌려 수업을 망치는 선생님들이 얼마나 많은가?
결혼하기 전에, 활발한 성격과 친화적인 모습은 그사람의 장점일 수 있다. 그러나 결혼하면 대외적인 활동을 많이하느라, 가정에 소홀히 한다면, 그의 활발하면서도 친화적인 모습은 버려야할 '통발'이요. '배'이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는 말이 한때 유행이었을 때가 있다. 그러나 사랑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사랑은 끊임없이 변해야한다. 애인 사이의 불꽃 튀는 사랑에서, 부부사이의 애틋한 사랑으로 사랑은 변해야한다. 과거의 '통발'에 갖혀서 새롭게 변하지 않는다면, 그 사랑은 영원할 수 없다. 동서양의 지혜가 이렇게 만날 수 있다니, 참으로 놀랍다.
3. Do ut des.(도 우트 데스. 네가 주기 때문에 나도 준다.)
Give and take라는 말을 알고 있는가? 많은 사람들이 믿음과 신뢰를 쌓기 위해서 아낌없이 이웃들에게 나눠주어야 한다는 착한사람 컴플랙스를 가지고 있다. 그러서인지, Give and take를 좋지 않은 뜻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나도 그랬다. 그러나, "Do ut des."라는 경구를 설명하면서, 로마가 주변 도시국가 주민들에게 로마 시민과 동등한 여러 권리를 주었기 때문에 그 국가들이 로마의 정치적 동맹국이 되었다는 한동일의 역사 설명이 뒤따르자, Give and take에 대한 나의 기존관념은 새롭게 업그래이드 되었다. '상호주의'!! 공짜를 바라지 말고 서로의 약속을! 계약을 주고 받으며 정당한 댓가를 서로에게 지불하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깊은 성찰의 시간이 나에게 다가왔다. 과연, 나는 타인의 유형 혹은 무형의 노력의 산물에 대해서 정당한 댓가를 지불하며 살아왔는가? 그들의 유형, 무형의 산물들을 친하다는 이유 하나로, 공짜로 얻으려하지 않았는가? 부모 자식 사이에라도, 정당한 댓가를 지불하지 않았다면, 받지 말아야하고, 혹여 받았더라도 반드시 다른 어떠한 형태로라도 정당한 댓가를 지불해야한다. 아침 산책을 하면서 'Do ut des.'를 되뇌이며, 나 자신을 반성해 보았다.
한편으로는, '네가 주기 때문에 나도 준다.'라는 말이 '네가 안주기에 나도 안준다.'라는 삭막함으로 이어지지는 않을까? 라는 걱정도 들었다. 그리고 '내가 줄테니, 당신도 달라'는 폭력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생각까지 머릿속에 떠올랐다. 같은 명언이라도,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 지혜로운 해석을 해야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4. Dilige et fac quod vis.(딜리제 에트 팍 쿼드 비스. 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하라.)
'문제아는 없다! 단지 문제 부모가 있을 뿐이다.!! '라는 명언이 있다. 문제아의 부모를 만나보면, 문제학생이 이해가 될 때가 있다. 때로는 이러한 부모 밑에서 살아가는 학생이 대견해 보일때도 있다. 자식을 망치는 부모들 중에서 가장 많이 보아온 종류의 부모는 자신의 자녀를 아바타로 생각하는 부류이다.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자녀가 대신 이뤄주기를 바라며, 자신의 뜻대로 자라지 않는 자녀를 윽박지른다. 자신의 꿈이 아니기에, 이에 저항하며 학교에서 퇴학당하기 위해서 갖가지 문제를 일으키는 학생들을 보면서,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하라.'라는 명언울 문제 부모를 둔, 학생들에게 들려주고 싶다. 학생 인생의 주인은 부모가 아니라, 학생이다. 자녀는 부모의 아바타가 아니다! 하나의 인격체일 뿐이다. 실업계를 가고 싶어하는 학생에게 강제로 인문계로 진학하도록 하고, 법대에 진학해서 자신이 못이룬 법관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못난 부모가 결국은 자녀가 고등학교를 마치지 못하고 퇴학당하게 만들었다. 그 학생의 인생은 누구에게 보상받아야할까? 상담이 필요하고, 정신과 진료가 필요한 것은, 문제아가 아니라, 그 문제아의 부모였다.
Dilige et fac quod vis!! 삶은 유한하다. 사랑하며,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어 하는 것을 하자! 그것이 내 자신이 인생의 주인으로 살기 위한 조건이니까....
5. Dum vita est, spes est.(둠 비타 에슽, 스페스 에스트. 삶이 있는 한, 희망은 있다.)
희망이 있기에 삶이 있고, 살아 있기에 그래도 희망은 있다. 이명박근혜 정권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면서,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희망을 보라고 말했다. 헬조선을 말하며 한국을 떠나고 싶다는 사람들에게 '두려워서 도망친 곳에 천국이란 없다.'며, 천국을 찾아 떠나지 말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을 천국으로 만들자고 말했다. 현실이 아무리 절망적이라도 우리는 희망을 보아야한다. 칠흑같은 어둠속에서 보이는 한줄기 빛이 바로 희망이다. 희망은 현실이 절망적이기에 더욱 빛을 발한다. 그 희망을 잃지 않았기에 우리는 '촛불 혁명'을 이뤄냈다. 삶이 있는 한, 희망이 있기에 오늘도 우리는 살아간다.
절망을 노래하는 삶이, 희망을 노래하는 삶으로 바뀌었을때, 우리는 삶을 어떻게 살아야할까? 한동일은 '인간은 죽어서 그 육신으로 향기를 내지 못하는 대신 타인에 간직된 기억으로 향기를 낸다.'라는 말을 한다. 나는 남에게 얼마나 향기로운 기억을 남기며 살고 있는가? 가장 가까운 부모에게 얼마나 아름다운 향기를 남기려 노력했는가? 그래! 살아가며 희망을 노래하고, 나의 주변에 가까운 사람들부터 향기로운 기억을 선사하자! 그것이 인생인 것을....
6. 옥의 티
'라틴어 수업'에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한동일은 이슬람교에 대해서 부정적인 서술이 눈에 거슬리는 면도 있다. 그래, 한동일이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을 말하고 있다. 이슬람교 국가들이 자국민에게 이슬람교를 강요하는 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타국에서도 강도는 약하지만 있는 일이다. 미국 대통령이 성경에 손을 대고 맹세한다. 이는 묵시적으로 그리스크교를 국민들에게 인정하기를 강요하는 미쟝센이다. 호주에서는 가벼운 범죄를 저지른 사람은 교회에가서 목사님의 변호서를 받아오라고 한다. 이 또한 크리스트교를 믿으라는 압력이 아닐까? 이슬람교 국가보다 약하긴하더라도 묵시적으로 존재하는 압력을 행사하는 나라들이 있는데, 유독 이슬람교 국가만 더 비판할 필요가 있을까?
한 쳅터당 하나의 라틴어 명언이 제시되어 있다. 이 책의 장점을 더 살리려면, 그 라틴어 명언을 한 사람을 적어두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Tantum videms quantum scimus.(탄툼 비데무스 콴툼 쉬무스. 우리가 아는 만큼, 그만큼 본다.) 즉, 아는 만큼 보인다. 라는 이 문장은 유홍준 교수가 그의 책에서 한말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혹시 유홍준 교수는 라틴어 명언을 옮긴 것이 아닐까?라는 의문이 든다. 그러나, 이를 확인할 길이 없다. 한동일이 각각의 라틴어 명언에 대한 출처를 제시했다면, 나의 지적 호기심을 더 많이 충족해 주었을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신영복 교수의 '강의'가 떠올랐다. 감옥이라는 작은 세상을 통해서 인생의 진리를 깨닫고 이를 '강의'를 통해서 우리를 깨우쳐 주신, 시대의 스승 신영복! 쉽지만은 않은 '강의'라는 책을 읽고 받았던 감동을 이책에서 다시 느꼈다. 저자 한동일은 자신의 삶 속에서 우러나온 인생의 지혜를 라틴어를 통해서 표현하고 우리의 가슴에 감동의 울림을 주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강의를 듣고 삶의 자세를 배웠다는 감사함을 전하는 학생있고, 그를 존경한다는 제자들고 많다. 그는 단순히 라틴어 문법을 가르치지 않고, 삶을 가르치려했다. 삶을! 사랑을! 가르치며, 자신의 인생 내공으로 학생들의 마음을 우렸다. '라틴어 수업'이 단순히 라틴어를 가르치는데 머무르지 않고 유럽문화! 더 나아가서 인생을 곱씹을 수 있는 화두를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오늘도 삶을 살아가야하는 이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