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오파트라의 바늘 - 세계 문화유산 약탈사
김경임 지음 / 홍익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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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문화재 환수 프로젝트'는 반크(VANK) 동아리 학생들이 많이 선택하는 활동주제이다. 빼앗긴 우리 문화재를 소개한 플래카드를 제작하여 시민들에게 홍보하는 활동을 하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대견하지만, 한편으로는 논리의 빈약함에 안타까움을 많이 느꼈다. , 우리 문화재를 환수해야한다는 당위성만을 강조할 뿐, 문화재 환수의 국제법적 당위성에 대한 논리적 증명은 부족했다. 사실 문화재 환수에 대한 지식을 전문적이면서도 재미있게 설명해줄 수 있는 책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이 우리 현실이다. 그러던 차에 외교관으로 활동하면서 실무 경험을 쌓은 김경임 저자의 클레오파트라의 바늘이라는 책을 만났다. 재미있으면서도 전문적인 지식을 소개하는 그의 필치가 나를 책속으로 빨려들게 했다.

 

1. 문화재를 예술품으로 만들기.

학교에 세워져있던 단군상을 일부 종교인들이 우상이라며 단군상의 목을 베고, 거대한 바미안 불상을 파괴하는 탈레반에 관한 뉴스를 보면서 '? 예술품으로 보지 않고, 우상숭배라며 배격할까?'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문화재를 예술품으로만 보려는 시각에는 제국주의자들의 사악한 의도가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이 책은 지적하고 있다.

<밀로의 비너스>는 너무도 유명해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밀로의 비너스>는 팔이 없다. 나의 중학생 시절, 미술선생님께서는 이에 대해서 재미있는 설명을 하셨다. ‘<밀로의 비너스>의 팔을 컴퓨터 그래픽으로 그려보았는데, 팔이 있는 것 자체가 무척 어색하여 아마도 처음부터 팔이 없었을 것이라고 학자들이 생각한다.'라는 미술 선생님의 설명이 그럴듯하여 <밀로의 비너스>는 원래 팔을 제작하지 않은 것으로 기억했다.

그러나, <밀로의 비너스>는 왼팔과 사과를 쥐고 있는 왼손, 조각상의 받침대 파편이 있었다. 서구 제국주의자들은 소중한 이들 문화재의 일부분을 없애 버렸다. 그뿐만이 아니다. 미적 효과를 위해서 반쯤 매달린 왼팔을 떼어내는 야만적인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서구인들은 그들의 뿌리라고 하는 헬레니즘 시대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파괴하고 훼손하는 일을 서슴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에게 <밀로의 비너스>는 예술품이지 문화재가 아니다. 아니, 문화재가 아니어야만했다. <밀로의 비너스>상에 대한 설명이 적혀있는 받침대를 파손시켜야 <밀로의 비너스>는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상실하게 된다. 그래야만, <밀로의 비너스>는 예술품으로만 남는다. 출처를 알 수 없는 문화재는 학술적 가치가 없어진다. 그래야만, 제국주의 국가는 식민지의 예술품을 소유하는 것이 편해진다. 그래서 패티 거스튼블리스는 그의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문화재를 예술품으로 보는 것은 문화재를 그 역사적 맥락에서 분리시키는 방법이며, 제국주의 유럽 문화가 비유럽 문화재를 소유하는 방법이기도 하다."-패티 거스튼블리스<예술과 문화유산>, <클레오파트라의 바늘>68쪽 재인용

 

역사적 맥락을 제거하고 미적 가치만 남겨놓아야 <밀로의 비너스>는 그리스의 밀로스 섬에서 뿌리 뽑혀 제국주의자의 품에 앉길 수 있는 것이다.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은 인류의 예술품을 소장하며 인류에게 기여한다.’고 말하지만, 진실은 인류의 문화재를 파괴하여 문화재를 단순한 예술품으로 전락시키는 죄악을 저지른 박물관이었다.

서구 제국주의자들은 역사적 맥락을 제거하고 문화재를 예술품으로 보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인간의 사체를 모으는 야만적인 모습까지 보였다. 뉴질랜드의 토이모코(죽은 자의 머리), 호주 태즈메이니아 인골, 남아프리카의 호텐토트 비너스를 전시하고 수집한 사례는 제국주의자들이 인간이기를 포기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사람의 사체는 수집과 매매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이는 인간이 고귀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기초적인 전제이다. 죽은 자의 시신은 그들의 고향으로 돌려보내져야한다. 그들의 역사적 맥락에서, 그들의 역사 속에서 탄생하고 성장하고, 죽어간 그들의 사체를 더 이상 제국주의자의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소장품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학교에서 있는 단군상이든, 세종대왕 동상이든 모든 인간의 창조품들은 역사적 문화적 맥락이 있다. 그 맥락을 떠나서 문화재를 논할 수 없다. 문화재를 역사적 맥락 속에서 파악하며 서로의 문화를 존중하는 보편 윤리가 자리 잡아야만 다시는 야만적인 제국주의 시대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2. 문화재 가치 깍아 내리기

인류 최초의 인권 문서 '키루스 칙령'의 복제품이 유엔본부 2층의 안전보장이사회와 경제사회이사회 중간의 복도에 전시되어 있다. 세계가 인정한 인권 문서가 '키루스 칙령'이다. 그런데, '키루스 칙령'도 제국주의 국가들의 검은 손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금의 이란인의 조상이 건국한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가 서아시아를 통일했다. 대제국을 건설한 키루스 대왕은 피정복민을 관용과 포용으로 다스리겠다는 포부를 '키루스 칙령'에 담아 반포하였다. 그리고 이 '키루스 칙령'이 다시 세상에 빛을 보게 된다. 발견 국가는 영국이고, 발견 장소는 이라크이다. 발견당시 오스만 제국이 이라크를 다스리고 있었다. 이란은 '키루스 칙령'의 반환을 요구하고 있지만, 대영제국 박물관은 반환을 거부하고 있다.

발견 장소를 기준으로 본다면, '키루스 칙령'은 이라크에 돌려주어야하고, 발견 당시 지배국을 기준으로 본다면, 지금의 '터키'에 돌려주어야한다. 그러나, 키루스 대왕을 계승한 국가는 이란이기에 대영박물관은 '키루스 칙령'을 이란에 돌려주어야한다. 그런데, 반환을 반대하는 학자들이 '키루스 칙령'을 돌려주지 않으려고 내놓은 논리가 참으로 치졸하다. 그들은 '키루스 칙령'의 가치를 깍아 내리는 방법을 사용했다.

 

"정권이 바뀌면 지도자들이 개혁을 공약하기 마련이다. 키루스 대왕의 관용 정책은 광대한 제국의 다수 이민족을 다스리기 위해 펼친 현실적인 대안으로 실용주의의 산물일 뿐이다.

이는 피정복민을 다스리는 키루스 대옹의 채찍과 당근 정책으로, 정복자가 민심을 얻을 목적으로 발표한 프로파간다에 불과하다. 이것을 인권선언이라고 믿는다면, 프로파간다의 희생자는 오늘날의 우리가 될 것이다."-30

 

현란한 문체로 '키루스 칙령'을 깍아 내리고 있는 학자에게 영국이 자랑하는 '대헌장'의 가치를 묻고 싶다. 영국 민주주의 역사에 '대헌장'의 가치는 참으로 대단하다. 그런데, '대헌장'은 귀족들이 왕을 굴복시키고 자신들의 특권을 보장받기 위해서 만든 문서이다. 이 문서를 가지고 민주주의를 논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며 프로파간다이다. 그러나, '대헌장'의 가치는 이후 민주주의 역사에서 확대 해석되었다. 그에 따라 귀족들의 특권을 인정하는 문서에서 민주주의를 이루는데 기여한 문서로 가치가 상승했다. '키루스 칙령'도 마찬가지이다. 키루스 대왕이 정치적 목적에서 '키루스 칙령'을 발표했다하더라도, 오늘날의 인권발전에 기여를 하고 있다면, '최초의 인권선언문'이라 평가해도 손색이 없다. 문화재는 그 문화재가 어떠한 역사적 맥락에서 해석되느냐가 중요하다. 이러한 맥락을 무시하고 '키루스 칙령'의 가치를 폄하하는 것은 문화재를 이란에 되돌려 주지 않으려는 꼼수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키루스 칙령'의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그들이 '키루스 칙령'을 가지고 있는 것 자체가 '키루스 칙령'에 대한 모욕일 것이다.

 

3. 문화유산의 관련성 부정하기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은 서아시아에서 수많은 문화재를 약탈했다.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나폴레옹의 군대가 발견한 로제타석이다. 2005, 하와스 박사가 이집트가 반드시 돌려받아야할 문화재 다섯 점 중에서 가장 첫번째로 꼽은 것이 대영 박물관에 있는 로제타석이다. 샹폴리옹에 의해서 로제타석에 기록되어 있는 상형문자가 해독되면서 비로소 이집트의 문자를 해독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 인해서 이집트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렇게 귀중한 문화재를 대영 박물관은 이집트에 돌려주지 않고 있다. 여기에 제국주의시기에 반출된 수많은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는 세계의 박물관들이 이에 호응하고 있다. 시카고 박물관장 제임스 쿠노는 이렇게 말한다.

 

"현대 이집트와 파라오 시대 이집트오의 관련은 무엇인가? 고대 유물은 이슬람 국가들이 생겨나기 훨씬 이전에 제작된 것들이다. 고대 유물을 문화재로 규정하는 국내법이나 국제법은 150년 전에 태어난 것이다. 이들 국가들은 영토 내에서 발견된, 또는 발견되었다고 믿는 고대 유물을 민족의 정체성과 자부심으로 파악한다. 민족의 유산만 중요하고 세계 문명에 대한 중요성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다."-132

 

문화재는 그 문화재를 창조한 국가가 소유하거나, 문화재가 최초로 발견된 영토의 소속국가에서 소유해야한다. 이러한 점에서 로제타석은 이집트가 소유하는 것은 당연하다. 과거의 이집트와 현대의 이집트가 관련성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영국의 아더왕 전설은 현대 영국과는 아무런 관련성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역사와 문화는 유형무형으로 해당지역의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고 배웠던 슐리만이 아마추어 고고학자가 되어 트로이를 발굴한 예를 보듯이, 수천년 전의 역사와 전설은 그 후손들에 의해서 기억될 때 유형 무형의 강력한 영향력을 미친다. 이집트인들은 이집트의 역사 현장에서 태어나고 살면서 이집트의 역사와 문화를 몸으로 채득했다. 그들이 파라오시대의 이집트와 관련이 없다는 주장은 제국주의의 유산인 약탈문화재를 지키기 위한 얕은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시카고 박물관장 제임스 쿠노는 "민족의 유산만 중요하고 세계 문명에 대한 중요성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지적했다. 이것은 무슨 뜻일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대영박물관이 내놓은 반응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이집트의 문화재를 소장한 게 아니다. 세계 문명의 일부로서 이집트의 유물을 갖고 있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유물의 보존이다."

 

우리나라의 '외규장각도서'를 프랑스가 반환하지 않을 때도 이러한 논리를 내세웠다. 제국주의 시절 탈취한 문화재를 소장한 세계 유수의 박물관이 이러한 논리에 동조하고 있다. 그들의 논리를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바로 '인류 보편의 박물관 선언'을 분석해보자.

 

4. '인류 보편의 박물관 선언'의 함정.

문명국이라 자처했던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은 자신들이 야만인이라 취급했던 아시아 아프리카 국가의 문화재를 약탈해서 고가에 거래했다. 나이지리아의 베닌 브론즈를 소장한 대영박물관은 "응징 전쟁"이라는 논리를 내세워 반환을 거부하고 있다. 마치 병인양요 시기, 우리가 프랑스 신부를 처형했기에 외규장각도서를 약탈한 것은 정당하다는 논리이다. 그들에게는 작물을 거래하는 것은 불법이라는 정의는 통용되지 않는다.

제국주의라는 야만의 시대에서 벗어나, 정의와 인도라는 인류 보편의 가치가 세계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는 요즘, 약탈문화재를 반환해야한다는 공감대가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공유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보편 윤리가 제국주의 시기의 영광을 기억하는 박물관에서는 통용되지 않는다. 200210, 독일 민휀에서 대영 박물관, 루브르 박물관을 비롯한 세계 40개의 박물관 미술관 관장들이 '인류 보편 박물관의 중요성과 가치'라는 제목의 선언문을 발표했다. '비조 클럽'이라 불리는 이들 박물관은 21세기 문명 세계의 가치를 무너뜨리는 선언을 당당하게 발표했다.(물론 얕쌉한 대영 박물관은 엘긴 마블에 시선이 집중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서명하지 않았다.)

 

"과거 취득한 문화재는 구입, 기증, 또는 파르타지를 통해서 이들을 관리해 온 박물관의 일부가 되었고, 이들을 소장한 국가의 유산의 일부가 되었다."-404

 

작물을 취득한 제국주의 박물관의 일부가 되어버린 문화재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참으로 놀라운 주장이다. 개인의 소유권을 엄청난 가치로 여기는 서구인이 약소국의 소유권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 마치 거울뉴런이 사라져버린 사이코패스 처럼 자신의 이익만을 중요시할 뿐, 문화재를 약탈당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약소국의 아픔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인류 보편 박물관의 중요성과 가치'라는 문서는 더욱 황당한 논리로 끝을 맺는다.

 

"박물관은 끊임없는 재해석 과정에 의해 지식을 촉진시키는 임무를 행함으로써 문화 발전의 담당자를 자임한다. 각각의 문화재는 이러한 과정에 공헌하고 있다. 따라서 다양하고 다면적인 문화재를 소장한 박물관의 차원을 제한하는 것은 모든 관람자의 이익에 반하는 것이다."-405

 

제국주의 박물관만이 문화재를 '끊임없는 재해석 과정'을 수행할 수 있다는 오만한 주장을 하고 있다. 해당 문화재의 가치를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국가는 해당 문화재의 소유국이다. 우리나라의 '외규장각도서'가 프랑스에서 중국문서로 분류되어 훼손된 채 서고에 잠들어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제국주의 박물관에서 썩어서 사라지는 수많은 문화재에 대해서 그들은 침묵하고 있다.

제국주의 박물관은 약소국에서 약탈한 '다면적인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다. 세계의 수많은 약소국이 자국의 문화재를 보기 위해서 제국주의 박물관을 방문해야한다. 제국주의 국가들은 관광수입을 얻으며 이를 '모든 관람자의 이익'으로 포장하고 있다. 그들에게는 제국주의 박물관의 이익만이 중요할 뿐, 문화재 원소유국의 이익에는 관심이 없다.

일찍이, 나폴레옹전쟁을 정리하기 위해서 빈회의가 열렸다. 이때, 국제적 차원에서 최초로 전시 약탈 문화재 반환이 결정되었고, 향후 국제 관습법으로 약탈문화재 반환이 정립되었다. 1970년 유네스코 협약, 1995년 유니드로아 협약이 체결되면서 불법 문화재의 반환에 관한 규정이 마련되었다. 국제 관습법과 국제법이 이들 제국주의 박물관에는 적용되지 않는 것이 안타깝다. 아니, 인류 보편의 가치를 부정하고 있는 제국주의 박물관이 세계적 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는 사실 자체가 인류의 비극이다.

 

힘이 정의라고 떼를 쓰는 일 처럼 우리를 분개하게 하는 일은 없고, 정의가 힘의 뒷받침을 받지 못해 정의로 의연히 서지 못하고 불의로 몰리는 일처럼 안타까운 일은 없다.”라는 파스칼의 말처럼, 아직 국제사회는 힘의 논리가 지배하고 있다. 힘 있는 제국주의 박물관이 자신을 정의라 외치고 있다. 약소국은 힘이 없어 정의로 의연히 서지 못하고 있다. 정의가 바로서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우리 학생들은 '반크' 동아리를 만들었다. 우리 문화재에 대한 사랑과 우리 역사에 대한 애정에서 출발한 동아리 활동은 열정적이고 대견해보인다. 그러나, 반크 동아리 활동을 지켜보면서 항상 2%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했다. 학생들의 열정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탄탄한 논리가 필요했다. 학생들의 열정에 역사적, 국적법적 지식과 논리가 뒷받침되어야 보편 정의에 힘이 실린다. 이러한 의미에서 '클레오파트라의 바늘'은 재미와 의미라는 두마리 토끼를 잡는 책이라 평가할 수 있다. 저자 김경임이 이 책에서 약속한 대로 약탈문화재 반환 운동에 동참하는 의미에서 관련 서적을 더 많이 저술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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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제국사 - 적응과 변화의 긴 여정, 1700~1922 서울대학교 중앙유라시아연구소 교양 총서 1
도널드 쿼터트 지음, 이은정 옮김 / 사계절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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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제의 나라 터키, 터키인들의 역사 '오스만 제국'에 대해서 알고 싶었다. 때 마침 '오스만 제국사'라는 책이 눈에 띄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장대한 스케일의 콘스탄티노 폴리스 공방전과 전쟁터를 누비는 예니체리의 모습을 상상하며 책을 펼쳤다. 그러나, 서문에서부터 나의 기대는 산산조가났다. 저자의 의도는 오스만 제국 입문서로 이책을 저술했다. 장대한 스케일의 오스만 제국사를 알고 싶었던 나로서의 적잔히 실망했다. 그러나, 단행권으로된 오스만 제국에 대한 역사서가 거의 유일하기에 이 책을 계속 읽을 수 밖에 없었다.

 

  나의 기대와는 다른 오스만 제국 입문서이지만, 새로운 사실을 알아가는 재미는 쏠쏠했다. 오스만 제국하면 예니체리가 생각난다. 예니체리는 데브시르메라고 불리는 어린이 공납제도에 의해서 충원되었다. 기독교 지역에서 어린이를 충당하여 교육시키고 관료와 예니체리로 선발하였다. 그런데, 세계사 교과서의 서술만 본다면 데브시르메가 오스만 제국 시기 내내 잘 운용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적어도 그런 착각을 갖게한다. 그러나, 제국의 정복전쟁이 멈추면서 데브시르메 제도는 사라지게 된다. 세습의 방식으로 예니체리는 충원되었다. 수박 겉핥기식 역사교육으로 빚어진 오해를 이책이 말끔히 해결해주었다.

  오스만 제국이 유럽에 끼친 영향도 새롭게 알게되었다.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11번 A장조 3악장 KV331 '터키행진곡'을 들으면서도 왜? 이슬람에 대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는 유럽에서 이러한 음악이 작곡되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오스만 제국하면 콘스탄티노 폴리스 공방전에서 사용된 청동대포를 기억하는 나는 오스만의 음악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오스만 제국은 군사력으로만으로 유럽을 위협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스만의 음악은 유럽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고적대 여성 리더가 공중에 던지는 지휘봉을 비롯하여, 러시아와 영국 합스브르크의 군악대도 오스만의 영향을 받았다. 오스만제국은 '유럽의 병자'가 아니라, 문화 대국이었다.

   그런데, 군사적으로, 문화적으로 화려했던 오스만 제국을 '유럽의 병자', '압제자'로 기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도널드 쿼터트는 이를 민족주의 논리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흔히 민족이 만들어지고 국가가 만들어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도널드 쿼터트는 국가가 먼저 만들어지고 민족 정체성이 만들어진다고 규정한다. 1차 세계 대전 후, 서아시아를 영국과 프랑스가 분할한다. 그후, 분리 독립한 국가들은 국가 정체성 확보가 당면과제였다. 그들은 튀르크인의 악행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정체성을 형성하기 위해서 민족주의를 강조했으며, 아르메니아 학살을 강조했다. 청년 튀르크당이 튀르크 민족주의를 강조했다고 주장한 것도 이러한 의도에서 일어났다. 홉스봄의 '만들어진 역사'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이 책의 저자 도널드 쿼터트는 비교적 객관적인 입장에서 '오스만 제국사'를 서술했다. 보통의 서양 학자들이 서구의 시작에서 제국주의적 편견에 휩싸여 제3세계 국가의 역사를 바라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도널드 쿼터트는 그러하지 않았다. 한예로 1915~1916년에 벌어진 아르메니아 학살을 서술하면서 그리스인이 저지른 1821년 오스만 무슬림 학살, 1876년 불가리아 기독교인들이 1000명의 무슬림을 학살한 사례를 지적했다. 학살은 비인간적인 행동이지만, 이것이 오스만 제국에서만 있었던 일은 아니다. 즉, 무슬림인 오스만은 악마, 기독교인은 피해자라는 도식에서 벗어난 서술이 돋보인다.

  600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존속했으며, 유럽을 공포로 몰아 넣었고, 커피와 음악을 비롯한 다양한 문화를 유럽에 전해준 오스만 제국에 대한 평가가 대체로 부정적이라는 현실이 안타깝다. 오스만 제국에 대한 보다 많은 책이 번역되거나 쓰여진다면 오스만 제국에 대한 편견이 사라질 것이다. 그날을 그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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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혁명의 아버지, 호메이니 - 호메이니의 삶을 통해 본 이란 현대사
유달승 지음 / 한겨레출판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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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에 대항한 국가는 비극을 면치 못한다. 세계 초강대국 앞에서 무력하기만한 약소국들을 바라보며 냉혹한 국제질서의 무자비함에 직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대국 미국에 대항하고 있는 나라들이 있다. 미국 대통령 아들 부시가 '악의 축(Axis of evil)'의 나라들이 대표적이다. 이중 이라크는 미국의 공격으로 친미 국가가 세워졌다. 북한은 미국과 종전 선언을하고 평화협정을 맺고 싶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마지막 이란은 극심한 경제난 속에서도 자존심하나를 내세우며 미국과 날선 대립을 하고 있다. 세계사 교과서에도 이란의 역사는 너무도 소략하게 기술되어 있고, 시험에도 잘 출제되지 않는다. 세계사 교과서만으로는 이란이라는 나라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또한 제대로 가르칠 수도 없다. 이란의 역사를 제대로 알고 싶어졌다. 현대 이란을 만든 호메이니를 통해서 이란 현대사를 살펴보는 '이슬람 혁명의 아머지 호메이니'라는 책은 그래서 나의 관심을 끌었다. 호메이니를 통해서 이란의 역사를 살펴보자.


1. 서울에 테해란로가 있는 이유는?

  서울과 테해란은 자매도시이다. 이란에는 '서울로'와 '서울 공원'이 있고, 수도 서울에는 '테해란'로가 있다. 멀고 먼 나라 나라로 기억하고 있지만, 사실은 너무도 가까웠던 나라가 이란과 한국이었다. 그렇다면, 서울에 테해란로가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메디나-아케메네스 페르시아-파르티아-사산왕조 페르시아사파비왕조는 이란인들이 자랑스러워하는 이란인의 조상이 세운 왕조이다.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이 서아시아를 식민지로 삼을 때, 이란을 통치하고 있었던 카자르왕조는 너무도 부패했고 무능했다. 1891년 담배 이권을 영국에 넘긴 것에 분노한 이란인들은 담배 불매운동을 전개한다. 담배 불매 운동이 성공하는데 성직자의 역할이 컸다. 1979년 이슬람 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던 바탕이 이미 이때부터 마련되고 있었다. 

  1921년 레자 칸은 쿠데타를 일으키고 1925년 팔레비왕조를 창건한다. 팔레비 왕조는 근대화에 박차를 가한다. 그러나 근대화의 방식은 너무도 폭력적이었고 급진적이었다. 종교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교육을 국가가 책임지는 근대교육제도를 실시했고, 여성의 베일 착용을 금지시켰다. 이는 종교인들의 반발을 가져왔다. 이어 모사데크 수상은 미국의 이익에 반하는 석유국유화 조치를 이행한다. 결국 파레비왕조가 무너질 위기에 처해진다. 이때 미국이 팔레비왕조를 도와 쿠데타를 일으킨다. 이어 일명 '백색혁명'으로 불리는 친미 노선을 견지하자, 자주의식이 강한 이란인들의 강한 저항을 얻게된다. 미군의 치외 법권과 미군주둔, 서구화정책은 수많은 시위를 불러 일으켰고 이에 팔레비 왕조는 유혈진압을 했다. 인권 외교를 펼쳤던 카터 행정부는 인권탄압을 하고 있는 팔레비왕조를 열열히 지지했다. 이란은 '중동의 헌병'이라 불리며 충실한 친미국가로 거듭났다. 

  서아시아에 이란이 있다면, 동아시아에는 한국이 있지않은가! 모함마드 레자 샤가 폭력을 사용하여 반정부 시위를 짓밟았다면, 박정희 정권도 자신의 반대파를 잔인한 고문으로 짓밟았다. 이 두 정권이 친해진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서울에 '테해란로'가 생긴것도, 테해란에 '서울로'와 '서울 공원'이 있는 것도 이러한 국제정세의 산물이었다. 

  이란과 한국과의 좋은 관계는 오래가지 않았다. 팔레비왕조의 폭압 통치에 반대하는 민중시위가 계속된다. 민중시위의 핵인 호메이니를 터키로, 이라크로 보냈다. 호메이니는 이라크에 있는 동안 이슬람 공화국에 대한 정치 이론을 완성했다. 호메이니의 사상은 이란으로 흘러들어왔다. 무함마드 레자 샤는 그를 멀리 프랑스로 보냈다. 호메이니의 영향력은 파리에서 세계 언론을 통해서 더욱 커졌다. 결국, 무함마드 레자 샤는 망명길에 올랐고 이란 혁명은 성공하였다. 이란은 호메이니가 제시한 이슬람 공화국으로 다시 태어났다. 

  팔레비왕조가 친미정권이었기에 호메이니는 미국을 좋아할리 없다. 1979년 11월 4일에 발생한 미대사관 인질 사태는 이란과 미국의 관계를 악화시켰다. 이란은 반미노선을 더욱 분명히 하였다. 1989년 하메이니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했으며, '조선-이란 친선주간'이 설정되기도 했다. 이란에 친미 정권이 들어서면서 이란과 남한이 친선관계를 맺었다면, 이란에 반미정권이 들어서면서 북한과 이란의 관계가 좋아졌다. 

  요동치는 국제 정세에 따라서 이란과 대한민국과의 관계는 좋아지기도 했고 나빠지기도 했다. 남한은 박정희 군사정권이 몰락하고 민주화정권이 들어섰지만, 이란은 아직까지 호메이니를 이맘으로 여기는 이슬람 공화국이 미국과 대립하고 있다. 이란은 얼마전 우리의 배를 환경오염을 시켰다는 이유로 나포했다. 이란의 속마음은 미국의 제재로 한국에 동결된 원화자금을 사용하지 못한것에 대한 항의적 성격이 농후하다. 과연 이란과 한국과의 관계는 어떻게 전개될까?


2. 미국과 이란과의 관계는 나쁘기만할까?

  호메이니는 미국을 너무도 싫어한다. 자신을 핍박했던 팔래비왕조를 지지했고, 이란을 떠난 무함마드 레자 샤의 입국을 미국이 허락하자, 미국에 대한 적개심은 하늘을 찔렀고, 젊은이들은 분노하여 이란에 있는 미국 대사관을 점령하고 인질극을 벌였다. 그런데, 미국과 이란과의 관계가 마냥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미국과 이란과의 관계가 가장 좋았을 시기는 친미정권 팔레비왕조시기였다. `1978년 이드 알 피트르의 시위에서 잘레 광장의 출굴르 막고 탱크와 헬기 사격으로 2000명을 사망시킨 무자비한 사건이 발생했다. 무함마드 레자 샤의 어리석은 광기가 빛을 발한 이 사건을 인권 외교를 내세운 미국의 카터 행정부는 비난했을까? 카터 대통령의 인권외교에 기대를 걸었다면, 우리는 너무도 순진하거나 어리석은 것이다. 미국을 방문한 레자 샤의 환영회 만찬 자리에서 지미 카터 대통령은 이란을 "국민들이 샤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안정의 섬"이라고 불렀다. 자국의 이익에 인권은 없었다. 오직 실리만이 있을 뿐이다. 

  미국의 레이건 행정부에서 '이란 콘트라 사건'이 발생했다. NSC에서 이라크를 상태로 전쟁하던 이란에 무기를 판매하고 그 대금 일부를 니카라과의 콘트라 반군에 제공했다. 이란과 미국의 중간 무역을 이스라엘이 담당했다. 이란과 미국, 이란과 이스라엘은 견원지간이다. 철천지 원수들 사이에 이러한 밀거래가 행해졌다. 

  이란 콘트라 사건이 벌어지던 시기 이란은 이라크를 상대로 전재을 하고 있었다. 미국은 이란의 적국인 이라크를 지지했다. 미국은 팔래비왕조가 이란을 지배했을 시기에는 이라크를 테러지원국가로 규정했다. 그러나 미대사관 인질 사건 이후, 이라크가 이란을 침공하자, 미국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모든 조치를 반대했다. 이어서 이라크를 테러지원국가에서 삭제했으며, 미국의 무기를 이라크에 보내주었다. 

  자신의 적의 적을 친구로 삼는 것은 냉혹한 국제 사회의 현실이다. 그런데, 자신이 지원하고 있는 이라크의 적국에게 다시 무기를 판매하는 행위를 우리는 어떻게 평가해야할까? 이라크와 이란이 전쟁을 하는 사이에 양쪽에 무기를 팔아서 미국이 엄청난 이익을 얻는 모습은 세계 대전 시기 미국이 연합군과 추축국에게 했었던 모습과 너무도 흡사하다. 미국의 선택적 정의에 실망하고, 국제 사회에는 영원한 우방도, 영원한 적도 없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오직 영원한 실리만이 있을 뿐이다. 


 '이슬람 혁명의 아버지 호메이니'라는 책은 이란 현대사와 냉혹한 국제질서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려주었다. 그러면서 본질적인 질문을 하게 된다. 과연 호메이니를 어떻게 평가해야할까? 팔레비왕조의 폭압정치를 종식시키고 새로운 이슬람 공화국이라는 정치 형태를 탄생시킨 혁명가이자 정치가로 그를 평가해야할까? 아니면, 카자르왕조와 팔래비 왕조에서 부족하지만 진행되었던 근대화를 '문화혁명'을 통해서 무효로 만들고, 아직도 차도르와 터번을 두루고 다니는 중세시기로 시간을 되돌린 인물로 평가해야할까? 

  나는 호메이니를 나쁘게만 평가할 수 없다. 이책의 들어가는 글에 저자 유달승은 이란사회의 모습에 깜짝 놀란다. 도서관에서 낮잠을 자고 있는 저자에게 몸이 불편하면 사원에 가서 자라고 친구가 제안한다. 사원에 가서 잠을자라? 신성한 사원에서 잠을 자다니, 정말 믿기지 않는다. "사원은 힘들때 쉬는 곳"이기에 사원에서 낮잠을 자기도하고 아이들이 놀기도 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학과장에게 청소원이 당당히 자신의 보조를 채용해 달라고 요구하고 이를 관철한다. 학과장도 청소원에게 예의를 표하고 정당한 요구를 받아준다. 신 아래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명제를 생활속에서 실천하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호메이니에 대한 평가는 좀더 시간을 두고 내려야겠다. 호메이니가 제시하고 성립시킨 '이슬람 공화국' 이란의 실험이 어떠한 결과를 만드는가에 따라서 호메이니는 탁월한 성직자이자 정치가, 혁명가로 평가될 수도 있으며, 헛된 실험으로 많은 사람을 희생시킨 사람으로 평가될 수도 있다. 호메이니에 대한 평가는 전적으로 이란인들이 어떠한 역사를 만들어가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부디, 호메이니가 탁월한 정치가이나 성직자미염 혁명가로 평가할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란다. 


ps. 사산왕조 페르시아의 '사산'이 무슨 뜻인지 아는가? '사산'은 조로아스터교의 사제였던 '사산'을 뜻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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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2-13 00: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에서는 호메이니가 무슨 악마처럼 묘사되지만 이란인들의 입장에서는 분명 영웅적인 인물이겠죠? 하지만 인권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또 이슬람 근본주의를 내세우면서 종교적 지배의 과거로 회귀시킨 인물이기도 하고 참.... 선악의 개념으로 인물이나 역사를 볼 수 없다는게 항상 조심스럽습니다. 강나루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강나루 2021-02-13 07:18   좋아요 0 | URL
한인물을 무자르듯이 말할 수 없네요 바람돌이님 말처럼 선악의 개념으로 호메이니를 평가하기 힘드네요
 
아시아 역사 - 세계의 문명 이야기
아서 코터렐 지음, 김수림 옮김 / 지와사랑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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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아시아에 살지만, 아시아의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 한국사로 제대로 알지 못하는데, 아시아를 어떻게 아느냐는 반문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라도 아시아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 사람에 의해서 씌여진, 아시아 역사 책이 없는 상황에서 영국 출신 역사학자 아서 코터렐이 쓴 '아시아 역사'를 집어들었다. 아시아의 역사를 제대로 알고 싶었지만, 잔인한 제국주의 국가 영국 출신의 백인 학자가 바라본 아시아는 어떤 모습인지 궁금했다. 아서 코터렐은 아시아를 균형감 있게 조감하고 있을까?


  아서 코터렐은 탁월한 시야를 가지고 아시아를 지역별로 나눠서 고대부터 현대까지 서술하였다. 그의 폭넓은 연구는 박수를 보낼만하다. 방대한 역사서술이기에 그도 인정했듯이 개략적인 내용을 서술할 수밖에 없었지만, 유려한 필치로 가독성 높은 글을 써서 우리를 기쁘게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제국주의 국가 영국 출신의 백인이 바라본 아시아 역사의 한계가 보이기 시작했다. 

  첫째, 영국이 저지른 죄악에 대해서 변호하는 듯한 서술이 눈에 띈다. "셰익스피어를 인도와 바꾸자고해도 바꿀 수 없다."라는 말이 있다. 이 표현은 셰익스피어를 높이는 표현이자, 인도를 멸시하는 표현이다. 인도를 200년 동안 식민지배하면서 고혈을 빨아먹으며 해가지지 않는 제국으로 우뚝선 영국이 자신의 죄악에 대해서는 사회를 해야한다. 영국인이 역사를 서술한다면 이에 대한 반성의 표현은 반드시 해야한다. 그러나, 아서 코터렐의 책에는 깊은 사과의 표현보다는 영국을 변호하고 지지하는 글들이 많다. 

  대표적인 표현이 세포이 항쟁을 '반란'으로 서술한 것이다. 그리고 세포이항쟁의 근본원인을 인도인의 문화를 이해하지 못한 영국 동인도회사의 무지한 정책에서 찾지 않고 "(세포이 항쟁은) 사실 탄약통에 발라진 윤활유가 무엇이냐하는 문제와는 상관 없는 것이었다."라는 무지한 표현을 서슴없이 서술하였다. 아서 코터렐이 세포이 항쟁의 원인으로 제시한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간의 격차"로 사건의 원인을 단순화하기 보다는 동인도 회사의 인도식민지배라는 모순 자체를 비판했어야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아서 코터렐이 "1786년 영국 장교의 혼혈 자녀들이 부친이 사망했을 경우 영국에 갈 수 없도록 하는 법안"을 제정한 것을 "인종차별이나 적대감 때문은 아니었다."고 변명한 것이다. 지극이 영국중심의 인종차별적 정책을 인종차별이나 적대감 때문이 아니라는 주장에 분노가 끌어오른다. 아서 코터렐은 이 법을 제정한 이유를 혼혈 사회가 수익성 좋은 고용에 접근하는 것을 방지하고, 인도 공무에 발언권을 가진 현지 이익 단체의 출현을 우려했기 때문이라 변명한다. 그러나, 혼현인을 영국인으로 보았다면 이러한 법안 자체를 만들 수 없었다. 바로 이것이 아서 코터렐의 아시아 인식의 큰 문제이다. 

  인도가 분리 독립하는 과정에 대한 서술을 하면서도, 인도가 분리 독립할 수 밖에 없는 근본적인 이유를 제대로 제시하지 못했다. 700,000명의 사상자와 1000만명이 종교에 다라 국경을 넘어야하는 근본 원인이 바로 영국에게 있다는 사실을 그는 직시하지 못했다. 영국의 벵골분할령을 비롯한 영국의 분할 통치 정책이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사이의 갈등을 격과시켰고, 결국 파키스탄과 인도로 분리독립하는 결과를 가져왔음을 영국은 인정해야한다. 

  영국은 중국을 상대로 '아편 전쟁'이라는 야만적인 전쟁을 했다. 그 무엇으로도 정당화 될 수 없는 전쟁을 '신사의 나라'라고 주장하는 영국이 중국을 상대로 일으켰다. 중국은 임칙서를 광둥에 파견하여 아편을 단속했다. 이를 두고 아서 코터렐은 "아편제고를 어떤 보상 없이 폐기"했다고 서술했다. 분명 임칙서는 그들에게 보상을 해주었는데도 이를 제대로 서술하고 있지 않으며, 영국의 입장을 변호하기에 급급한 서술을 하고 있다. 

  둘째, 아시아에 대한 편견이 느껴지는 서술이 있다. 서구 백인들은 이슬람 포비아를 가지고 있다. 이 책에서도 이슬람에 대한 편견이 드러난다. "유일신 문제에서 만큼은 유독 빡빡하게 구는 이슬람교도"라는 서술이나, "벽창호 같은 칼리프에게"라는 표현은 객관적인 역사서술을 해야하는 학자라면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교리상 이슬람이 우상숭배에 대해서 크리스트교보다 명확한 입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비판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베트남이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는 과정을 서술하면서 "이베트남 통치가에게서 프랑스의 침략에 항거할 의지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라는 감정적 표현을 아서 코터렐인 사용하고 있다. 지극히 서구 백인 우월주의가 느껴지는 표현이다. '너희들은 미개해, 그래서 식민지배를 받아야해'라는 인상을 주는 표현이다. 서양인이 쓴 역사책에 서양인의 편견이 너무도 심하게 묻어 있다. 


  학부시절 교수님이 "영국에서는 아시아인에게 학위는 주어도 아시아인이 영국의 역사를 영국인에게 가르치게 하지는 않는다."라는 말씀하신적이 있다. 왜? 그들은 그들의 역사를 아시아인이 가르치지 못하게 할까? 아시아의 관점에서 영국을 바라본다면, 영국의 역사는 도덕적으로 떳떳한 역사로 그려질 수 없다. 그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반면, 우리는 한국사를 우리가 연구해서 우리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지만, 세계사 만큼은 외국의 번역서적에 의존해서 가르치는 경우가 많다. 세계사에 대한 우리의 학문수준이 깊지 않은 것이 근본 원인이겠지만, 그로 인한 부작용은 제법 크다고 할 수 있다. 우리의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지 못하고, 우리의 눈으로 아시아를 바라보지 못하고 서구 백인의 입장에서 세계를 바라보고 아시아를 바라보고 있다. 이제는 세계사를 우리의 눈으로 바라볼 시기가 되지 않았을까? 창밖으로 지나가는 자동차를 바라보며 상념에 잠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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줌 수업에 날개를 달아 줌 - 줌 기초부터 학생 중심 온라인 수업까지 - 온라인 수업 사례 90
김란 외 지음 / 테크빌교육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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줌 연수도 받아보고, 관련 서적을 찾던 중 이책을 보았다. 초등학교 수준의 수업사례라 중고등학교 수업을 준비해야하는 나에게는 큰 도움은 되지 못했다. 그러나, 줌 수업을 이렇게 활용할 수 있구나! 하는 힌트를 얻은 것은 큰 수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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