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으로 읽는 종교 이야기 -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불교 힌두교 탄생의 역사
홍익희 지음 / 행성B(행성비)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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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사병이 유행하던 중세 시대, 흑사병의 공포에서 벗어나고자 교회에 모여 기도하던 이들이 흑사병에 집단 감염되어 사망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교회에서 하는 기도가 흑사병으로 부터 중세인들을 구원하지 못한다는 평범한 사실을 그들은 몰랐다. 그로부터 천여년이 지난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기도원발, 교회발 집단 감염이 폭발하고 있다. k-방역 이라는 말을 내세우며 방역 선진국으로서의 위상을 다져가던 대한민국이 일부 종교시설에서 일어나는 집단 감염으로 코로나 19 위기에 빠져들고 있다. 한국의 코로나 19의 확산에는 특정 종교 활동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신천지발 1차 대유행에 이어서, 종교 시설에서 이뤄지는 지금의 집단 감염을 바라보며, 종교가 무엇이기에 코로나 19 감염의 위험 속에서도 그들은 종교에 집착하는지를 알고 싶었다. 서가에서 여러 책들을 살펴보았다. 세계 종교의 역사를 한권으로 집대성한 책을 찾았다. 특정 종교에 관한 서적은 쉽게 찾아볼 수 있었으나, 세계 종교를 아우르면서도 쉽게 풀어쓴 책은 찾기 힘들었다. 그러던차에 홍익희의 "문명으로 읽는 종교 이야기"라는 책이 나의 눈길을 끌었다. 쉬운 문장으로 쓰여진 홍익희 저자의 책을 펼쳐 들었다.

 

1. 하늘 아래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신이 천지를 창조하고 인간을 만들었다'라는 종교인들의 설명을 들을 때마다 '신이 천지를 창조하고 인간을 만들'때, 이를 지켜본 사람이 있는가? 라는 의문이든다. 마치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천지창조와 인간 창조라는 일련의 과정을 마치 지켜본듯이 말하는 종교인들을 바라보며 그들이 하는 말에 신뢰성을 느끼지 못했다. 마치 시간을 초월해서 특정 종교 홀로 존재하하는 듯한 설교를 할때는 불쾌함마져 들었다.

  홍익희 저자의 "문명으로 읽는 종교이야기"를 읽으며 '하늘 아래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라는 진리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크리스트교는 세계적으로 강한 영향력을 가진 종교이다. 자신이 유대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인류의 조상을 아담과 이브에게서 찾기도 한다. 심지어 출에굽기 이후 이스라엘 민족과 하느님이 맺은 시나이산 언약을 지구상의 모든 인류가 하느님고 맺은 계약인 것 처럼 말하는 유명인도 있다. 그런데,출애굽기 19장 이하에 기록된 하느님과 이스라엘 민족 사이에 맺은 시나이산 언약의 형식이 히타이트제국과 약소국 사이에 맺은 '종주권 계약'고 흡사하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은 모른다. 크리스트교는 홀로 존재한 종교가 아니었다. 수 많은 문명과 교류하면서 그들의 장점을 흡수하면서 오늘날 까지 발전할 수 있었다.

  조로아스터교가 유대교와 크리스트교, 이슬람교에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너무도 유명하다. 조로아스터교에 유일신사상, 구세주의 등장, 최우의 심판 등의 사상이 셈계통의 종교에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조로아스터교의 경전인 아베스타와 인도의 산스크리트 경전이 유사하다는 점이다. 문화적으로, 거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서아시아와 인도에서 발생한 두 종교가 유사하다니 믿기지 않는 사실이다. 사실 인도와 페르시아는 같은 아리안인을 조상으로 두고 있다. 서로 다른 것처럼 보이는 두 지역은 사실은 한뿌리에서 자라난 문명이었다.

  심지어, 인도에서 탄생한 불교가 아소카왕의 포교활동으로 크리스트교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불교의 수많은 설화가 크리스트교에 영향을 미쳐 비슷한 이야기 구조를 갖는 것도 이때문이다. 그래서 문명 사학자 토인비는 "20세기 가장 의미 있는 일은 불교와 기독교가 만난 사실"이라 했으며, 라이프치대학 루돌프 자이델 교수는 "불교와 기독교의 내용을 비교해보니, 최소한 50개의 스토리가 일치한다."고 말했다.

  서로 엄청난 거리를 두고 있는 종교 사이에 끊임 없는 교류와 융화 작용이 이뤄졌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해야한다. 하늘아래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이 사실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종교를 절대시하기 보다는 타종교에 대해서 열린 마음을 가져야한다.

  

2, 개방과 융화가 답이다.

  세계 종교가 성립할때부터 종교는 한 문명의 기초위에 토대를 다졌다. 종교가 성장하면서 타종교의 영향을 받아 이를 융화시키면서 종교는 더욱 성장하였다.

  셈계통 종교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종교는 조로아스터교이다. 조로아스터교의 성립에 아리안의 문화와 서아시아 문명이 기대한 영향을 미쳤음은 분명하다. 조로아스터교가 성립하자, 조로아스터교는 서아시아 문명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아케메네스왕조 페르시아의 키루스왕(성경에는 고레스왕으로 나온다.)은 관용정책을 펼쳐 제국을 더욱 확장시켰다. 키루스왕의 관용정책의 사상적 기반에는 조로아스터교가 있었다. 조로아스터교의 유일신 사상은 서아시아 각지에 있는 모든 신을 유일신 '아후라 마즈다'가 관장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키루스왕은 아후라 마즈다의 뜻에 따라 선한 영의 전사로서 의로움과 자비로움으로 이 세상에 '정의와 평등'을 구현하기 위해 앞장섰다. 기원전 538년 유대인의 귀향을 허락한 것도 키루스왕이 아후라 마즈다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서 선택한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키루스왕을 메시아로 추앙했으며, 키루스왕이 믿는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받아 유대교를 재정립했다.

  개방적인 사고와 타문화를 자신의 문화에 융합시키는 탁월함은 문명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모든 종교가 개방적인 사고와 타문화를 자신의 문화에 융합시키는 탁월함을 가지지는 못했다. 일단 세계 정교로 발전하고 나서는 교조화되어 폐쇄성을 띄는 경우가 많다.

  중세시대, 발도파의 활약으로 크리스트교는 민중속으로 스며든다. 성경을 번역하고 쉬운 말로 민중에게 설교한다. 그자 평신도가 사제와 종교 논쟁을 하는 일이 벌어진다. 크리스트교를 더욱 발전시킬 수 있는 기회가 열린 것이다. 그러나 크리스트교 사제들은 이를 위기로 인식했다. 1229년 그레고리오 9세는 툴루즈공의회를 열어 평신도들이 성경을 읽거나 번역, 소지하는 행위를 금지했다. 복음을 전파해야하는 사재들이 복음이 담겨있는 성경을 읽지도, 번역하지도 심지어 소지하지도 못하게 하는 웃지 못할 일을 저질렀다. 지식을 독점하고, 민중을 우민화시켜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어리석은 모습은 조선시대 훈민정음을 반대했던 최만리를 비롯한 양반 사대부의 모습과 흡사하다. 결국, 개방성과 유연성을 상실한 크리스트교는 썩을 데로 썩어서 종교개혁을 맞이한다.

  무신론자와 종교를 가지지 않는 자가 늘어나고 있다. 저출산고 고령화의 영향으로 신자들이 늙어가고 있고, 이는 종교인들의 수입 감소로 이어진다. 뿐만 아니라, 현대 종교는 과학으로부터도 위협을 받고 있다. 대표적인 논쟁이 창조론과 진화론의 대립이다. 크리스찬들이 나에게 선교를 할때, 그들에게 하는 단골 반론도 진화론이었다. 그들이 아무리 종교적 믿음으로 선교한다할지라도 교육수준이 높은 젊은이들의 과학적 사고와 조화를 이룰 수 없다면, 선교의 결과는 미미할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보다 개방적이고 타종교의 장점을 자신의 종교에 융합시키라 조언하고 싶다.

  유대교의 티쿤올람 사상에 진화론을 융합시킬 수 있는 힌트가 있다. 티쿤(고친다)과 올람(세상)이 합쳐진 말로 '세상을 개선하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했으나, 그 창조는 완벽한 창조가 아니었다. 세상은 미완성의 상태로 창조했으며, 하느님의 창조 작업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삶을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하느님의 창조 작업에 큰 도움을 줄 수도 있다. 이러한 티쿤 올람 사상은 진화론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준다. 보다 합리적 창조론을 만들 수 있는 힌트가 유대교의 '티쿤올람'사상에 있는 것이다.

  자신의 종교만을 지고지순한 절대적 가치로 여기는 종교인들에게 당신의 종교가 앞으로도 계속 발전하기 위해서는 '개방과 융화'의 과정을 받아들이라 조언하고 싶다.

 

 

저자 홍익희는 불교와 힌두교, 브라만 교는 심하게 반목을 하지 않고, 종교의 큰 흐름과 가치를 공유하고 있는 반면에, 셈족의 종교인 유대교와 크리스트교, 이슬람교는 한뿌리에서 나왔음에도 다름을 인정하기 보다는 반목과 갈등을 일으키고 있다고 지적한다. 나와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고, 나와 다름을 없애야할 절대악으로 여기는 지금의 교조주의에 빠져든 종교인들은 신의 이름으로 분쟁을 일으키고 있다. 같은 하느님을 믿지만, 유대교라는 외투, 크리스트교라는 외투, 이슬람교라는 외퇴를 입었다고 서로에게 총뿌리를 겨누기도했다. 그들이 입고 있는 외투는 다르지만, 그 안에 계신 신은 같은 하느님임을 그들은 모르고 있다. 하늘아래 홀로 존재하는 것이 없기에, 개방적이어야하며 타문명의 장점을 나의 것으로 융화시키는 현명함이 필요함을 "문명으로 읽는 종교 이야기"에서 말하고 있다. 이제, 종교인들이 응답할 때이다. 당신이 믿는 신은 나와 다른 존재를 존중하라고 말하고 있는가? 없애야할 절대 악이라 말하고 있는가?

 

 

ps. 이 책에 오류도 꾀 있다.이를 간단히 언급하겠다.

127쪽: "요즘 관광객들이 보는 이집트 신전건축물의 대부분은 이때 유대인 건설노예에 의해 지어졌다."

=> 영화 '엑소더스'에 이집트 건축물을 유대 노예가 건설한 것처럼 묘사하여 고고학자들에게 지탄을 받았던 적이 있다. 이집트의 건축물들은 대부분 급료를 받은 평민에 의해서 건설되었다.

 

148쪽 "한손에는 꾸란을 다른 손에는 칼을 들고 이슬람교를 포교했다."

=> 서구가 이슬람에 대한 편견에 가득차서 만든 말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이슬람이 강제 개종을 시키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도 '칼을 들고 이슬람교를 포교'했다는 표현을 사용한 점은 이해하기 힘들다.

 

383쪽 콘스탄티누스가 태양위에 빛나는 십자가를 보고 싸웠다는 설화를 사실인 것처럼 소개한점.

=> 역사를 배운 사람이라면 이것은 거짓임을 알 것이다. 후대에 만들어진 설화를 역사인 것처럼 서술하는 어이없는 일은 없을 것이다. 로마 여행시기 가이드조차도 콘스탄티누스가 태양위의 십자가를 보고 싸웠다는 묘사는 거짓임을 지적했는데, 홍익희는 이를 모르고 있다니, 못내 실망스럽다.

 

494쪽 투루 푸아티에 전투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카룰루스 대제때의 일이다."라고 서술한점.

=> 앞부분에서 마르텔이 승리를 이끌었다고 서술하고는 뒷문장에 칼롤루스 대제 때 일이라는 어이없는 서술을 했다. 시간개념이 파악안된 상태에서 서술한 것으로 보인다. 카롤루스 마르텔 이후의 인물이 칼롤루스 대제이다. 세계사 교과서를 가지고 확인해 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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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온 2020-12-19 05: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교회 오랫동안 몰입해서 다녔지만 종교는 이제 지쳤고 싫고 미워요
 
30개 도시로 읽는 세계사 - 세계 문명을 단숨에 독파하는 역사 이야기 30개 도시로 읽는 시리즈
조 지무쇼 엮음, 최미숙 옮김, 진노 마사후미 감수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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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공부하다보면 수많은 도시의 이름을 접하게된다. 단순히 스쳐 지나가기에는 도시에 담긴 역사와 문화가 너무도 깊다. 각 도시에 대한 깊이 있는 지식을 얻고 싶었던 차에 조 지무쇼의 '30개 도시로 읽는 세계사'가 나의 눈에 들어왔다. 30개 씩이나 되는 도시를 한권에 담는것 자체가 무리일 텐데..... 과연 조 지무쇼는 나의 기대에 부응하고 나의 걱정을 기우로 만들수 있을까?


1. 일본중심의 세계사

  역사서는 저자의 역사관이 담겨있을 수밖에 없다. 이책 또한 일본인 저자의 일본중심의 세계사라는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 

  첫째, 30개 도시의 선정기준에 의문을 품고 싶다. 세계 도시 30개 중에서 한국의 도시는 단 하나도 없다. 그에 반해서 일본의 도시는 '천년의 수도'라는 수식어를 붙여 교토를 장황하게 서술했다. 그밖의 많은 도시들을 30개 도시에 선정하면서도 선정이유를 밝히지 않았다. 극히 주관적인 선정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둘째, 일본중심의 서술이 보인다. 상하이의 조계시대를 끝낸 것이 일본이라는 서술부터 시작해서, 오스트레일리아가 완전한 독립을 결심하게 하는 계기가 일본과의 싸움 때문이라는 서술은 떨떠름한 느낌을 주었다. 만약 조 지무쇼가 일본의 침략전쟁에 대한 반성의 글을 한줄이라도 남겨 놓았다면 떨떠름함은 적었을 것이다. 

   일본인이 썼기에 일본중심의 서술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이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떨떠름함이 한국인이기에 갖을 수 있는 기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책에서 개운치 못함을 느끼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나는 한국인이기 때문에......


2. 두껍지만 얇은 책

  이책은 두껍지만 얇은 책이다. 왜? 두껍지만 얇은 책일까?

  첫째, 책은 300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책이다. 그러나 300페이지 넘는 책에 30개의 도시를 담다보니, 한 주제에 10페이지 안밖의 서술이 이뤄질 수밖에 없다. 여기에 이해를 돕기 위한 사진과 지도를 포함한다면 각도시에 대해서 얻을 수 있는 지식은 너무도 적다. 깊이 있는 정보를 얻기를 기대한 독자라면 못내 아쉬움을 감추지 못할 것이다.

  둘째, 쉽게 읽을 수 있다. 300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책이지만, 사진과 지도를 빼면 책의 분량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책의 깊이도 깊지 않기에 마음잡고 읽으면 단숨에 읽을 수 있는 가벼운 책이다. 무거운 책을 읽고 머리식히기를 위해서 읽을 수 있는 책이다.

  두껍지만 얇은 책이기에 책의 두께에 겁먹지 말고 가볍게 읽으라고 조언하고 싶다.


  하루에도 수많은 책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중에서 묵직한 깨달음을 주는 책을 얻기는 힘들다. 가볍게 세계여행하듯이 즐기길 워한다면 이책을 선택해도 괜찬을듯 싶다. 깨달음의 무개를 느끼고 싶다면 다른 책을 선택하길 조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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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다르크 2020-12-07 10: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저 또한 일본 작가들의 세계사 작품에 실망을 하고 있던 터라
구매를 망서리던 참이였지요.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제가 책을 읽으며 얻은 실망감이 무척 오래가더라고요. 감사합니다.

강나루 2020-12-07 18:58   좋아요 0 | URL
도움이 되어 기쁩니다
 
다산처럼 읽고 연암처럼 써라
간호윤 지음 / 한국경제신문i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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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책을 선택할때는 수많은 비법을 기대하며 책을 고른다. 글을 잘쓰고 싶은 욕망이 글쓰기 책으로 나를 인도한다. 다산과 연암은 조선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들이 쓴 책과 그들이 읽은 책들은 우리에게 큰 문화적 자산이다. 그들의 글솜씨의 일부나마 배우고 싶어 책을 펼쳤다.


1. 책읽기

"진신서불여무서(盡信書則不如無書)"라는 '맹자'의 글이 있다. 아이러니컬 하게도 '다산처럼 읽고 연암처럼 써라'라는 책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글귀는 '맹자'의 말이다. 책속의 글을 모두 믿는다면 글 없음만 못하다라는 이글귀는 나의 뇌리에 꽃혀 깊은 감동을 주었다. 비판적 글읽기를 할 수 없다면, 나의 눈으로 책을 바라볼 수 없다면, 나는 책의 노예가 될뿐이다. '창조적 오독'을 하며 나의 눈으로 책을 바라보고, 이를 바탕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한다. 하늘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고 하더니, 이미 2천년 전에 맹자가 비판적 글읽기의 중요성을 말했다. 책에 지배당하지 말고, 책을 부릴 수 있는 지혜를 갖자!


2. 글쓰기

'다산처럼 읽고 연암처럼 써라'라는 책을 쓴 간호윤은 글을 잘썼는가? 간호윤의 글을 많이 읽어보지 못했기에 그의 글을 평할 수 없다. 그러나, 이책만을 놓고 평하자면, 좋은 평을 할 수없다.

첫째,  책을 '논'과  '해'로 나눠서 집필했다. 이로인해서 책읽기가 힘들었다. '논'은 어려운 내용으로 점철되어 있고, '해'는 평이한 내용으로 꾸며져있다. '논'과 '해'를 하나로 녹여 서술했다면, 독자들이 책을 읽기 쉬웠을 것이다. '논'과 '해'가 분리되어 있기에 '논'과 '해'가 따로 논다. 논문을 읽듯이 본문과 주석을 읽어야하는 번거로움은 책의 이해를 어럽게했다.

둘째, 간호윤의 글은 고서를 읽는 듯한 느낌을 준다. 잘쓰지 않는 글들을 가져다 표현한 점은 우리글을 살리고, 간호윤의 어휘력을 한껏 발휘할 수 있다는 점에서 돋보인다. 그러나 그러한 표현에 익숙하지 않은 나로서는 특히 '논'을 읽고 이해하는데 힘이들었다. 

간호윤의 글은 적어도 나에게는 잘읽히는 글은 아니었다.


글쓰기 책들을 읽기 전에는 책속에 엄청난 글쓰기 비법이 숨어 있을 것만 같은 착각을 갖는다. 책을 다읽고 나서는 고등학교 국어 수업 시간에 배운 내용에서 크게 벗어나는 내용이 없음을 깨닫고 실망한다. 부지런히 책읽고, 부지런히 글을 쓰고, 반드시 퇴고해라! 당연한 글쓰기 비법을 알기 위해서 수많은 글쓰기 책을 읽은 내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래, 글쓰기에 어찌 특별한 비법이 있을 수 있겠는가! 부지런히 책일고, 부지런히 글쓰고, 부지런히 퇴고하자! 이것이 글쓰기의 비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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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선비와 일본 사무라이 표정있는 역사 7
호사카 유지 지음 / 김영사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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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깝지만 너무도 먼 이웃 일본! 조선을 움직인 선비와 막부를 움직인 사무라이! 그들이 만든 선비문화와 사무라이 문화는 너무도 다른 한국과 일본을 만들었다? 한국과 일본의 참모습을 알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과 일본에 대해사 잘 아는 저자가 집필한 책이 필요했다. 일본출신으로 한국에 귀화한 호사카 유지의 책이 제격이었다. 호사카 휴지의 책속으로 들어가 보자!

1. 칼의 문화와 붓의 문화
선비가 만들어낸 붓의 문화와 사무라이가 만든 칼의 문화는 너무도 다른다. 한국에서 여성은 어머니로 기억 되지만 일본에서는 부인으로 기억 된다. 한국에서 무식하다는 말은 엄청난 모욕감을 주지만 일본에서는 그런 욕이 없다.
한일간에는 엄청난 문화적 차이가 존재한다. 붓으로 싸우는 조선의 선비와 칼로 싸우는 일본의 사무라이는 너무도 다른 문화를 만들었다. 이것이 순종적이면서도 잔인한 일본을 만들었고, 깨어 있는 시민들이 움직이는 대한민국을 만들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일본의 거친 사무라이를 길들인 것은 조선의 선비문화였다.

2. 조선 선비, 일본을 가르치다.
니토베 이나조의 ˝무사도˝라는 책은 미국의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이 읽었을 정도로 서양인들에게 일본의 사무라이 정신을 소개한 대표적인 책이다. 호사카 유지교수는 무사도를 분석하면 놀라운 사실을 밝혀낸다. 무사도에 소개된 사무라이의 규범 대부분이 조선 선비의 모습이라는 사실이다. 사무라이와 선비는 너무도 다른데, 그 규범은 왜이리도 비슷할까?
임진왜란을 우리는 일본에 철저히 유린당한 사건이라 기억한다. 그런데 군사적으로 일본이 조선을 유린했지만 조선 선비의 문화는 일본 사무라이의 정신을 장악한다. 일본군에게 잡혀 아들과 딸을 잃어버리고 포로로 끌려간 강항은 후지와라 세이카에게 조선 성리학을 가르처 준다. 후지와라 세이카는 제자를 길러 일본에 성리학이 뿌리 내리게한다. 호사카 유지교수는 조선 성리학이 에도막부가 200여년 동안 평화를 누린 비결 중에 하나라고 지적한다.
한국과 일본의 문화가 다르면서도 비슷한점이 있는 이유는 임진왜란 시기 일본에 전해진 조선 성리학이 사무라이의 야생의 기질을 길들였기 때문이다.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고 했던가! 조선 성리학이 대한해협을 건너니 사사도가 되었다. 사무라이를 길들였으나 그 야만적인 본성을 없애지는 못했다. 사무라이의 침략 본성이 동아시아를 피로 물들게 했다. 호사카 유지 교수는 일본이 조선 성리학을 받아들이면서도 조선 성리학의 중심이 된 심성론을 깊이 있게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일본 사무라이가 조성 성리학의 심성론의 중요성을 깨달아 동아시아의 평화에 기여할 수 있을까? 지금의 일본 정치인과 순종적인 일본시민을 보면 깊은 한숨이 나올 뿐이다. 일본 시민이 깨어 있는, 옳은 일을 행동하는 시민으로 거듭나는 그날이 오기를 고대해본다.

p.s. 재미있는 사료가 있어 적어둔다
아시카가 요시미쓰에 이르러서는 명나라에 무릎을 꿇고 신이라 칭했다. 외부에도 신을 칭함은 인신의 도리가 아니다. (중략) 몸은 천하의 실권을 쥐면서 신임을 이방에 칭하여, 이방으로 하여급 천조를 번신처럼 보게 만들었다. 그리고 고쿠다이(국처) 를 손상시켰다. -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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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미국의 패권과 지정학
피터 자이한 지음, 홍지수.정훈 옮김 / 김앤김북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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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없는 세계를 상상해 보았는가? 피터 자이한은 미국이 세계 패권을 포기하고 고립주의로 돌아간 이후의 세계를 상상하며 미국없는 세계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 미국과 친해지라 말한다. 미국 우월주의에 사로잡힌 오만한 주장이라 생각되지만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뽑은 미국이라면 브레튼우즈체제 성립 이전의 고립주의로 회귀하지 못하리라는 법도 없는듯하다. 우리가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우리의 오만한 편견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하며 피터 자이한의 「21세기 미국의 패권과 지정학」을 펼쳤다. 내 생에는 일어나리라 상상하지 않았던 코로나19 펜데믹이 발생하고 선진국이라 생각했던 나라들의 민낯을 보며 그 어떤 가능성도 현실에서 발생할 수 있다는 생각을하며 책을 읽어나갔다.

1. 지금의 세계질서는 기이한 현상인가?
영국, 프랑스를 비롯한 제국주의 국가들은 자국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수많은 아시아 아프리카 국가들을 식민지로 삼았다. 결국 그 탐욕의 끝은 전쟁이었다.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은 유럽을 전쟁터로 만들었다. 그리고 새로운 초강대국 미국을 탄생 시켰다. 미국도 세계를 식민지로 지배할 수있었겠지만 미국은 다른길을 선택한다. 자국의 시장을 개방하고 항해의 안전을 제공한다. 기존 패권국이 해오던 수탈 방식과는 너무도 다른 방식이었다.
세계는 미국이 만든 브레튼우즈체제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미국이 만든 세계질서 속에서 한국과 같은 나라는 번창하였다. 미국이 깡패국가로 지목한 나라는 경제적 파국으로 내몰렸다.
그런데 미국이 변하기 시작했다. 트럼프 당선 이후 미국은 미국이 당연히 해오던 일들에 의문을 제기한다. 미국이 타국에서 피를 흘리며 돈을 쓸 필요가 있가? 한국과 같은 부자나라에 미국이 군사력을 제공할 필요가 있는가? 피터 자이한은 트럼프가 당선되기 이전에 이책을 통해서 미국이 고립주의로 회기할 미래를 제시했다. 미국이 자국의 시장을 개방하고 항해의 안전을 제공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라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미국없는 세계는 무질서한 아비규환 지옥이다. 유일한 초강대국은 미국이 더 이상 세계 경찰로 남아있지 않는다. 이때 미국의 무력으로 보호받으며 발전했던 한국은 이제 일장춘몽에서 깨어나야만할까?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보호 받는 천혜의 지정학적 조건을 가진 미국이 셰일혁명으로 날개를 달았다. 더이상 석유를 구하기 위해서 중동까지 갈 필요가 없어졌다. 자원과 인구학을 이용해서 미국의 미래를 살펴봐도 세계에서 미국의 미래는 밝다. 반면 러시아를 비롯한 대부분의 나라가 저출산과 고령화의 덧에 빠져있다. 게다가 지정학적으로 불안하며 자원도 안전적으로 조달하기 힘들다. 그뿐만이 아니다. 기후변화로 해수면이 상승하면 그 피해를 톡톡히 보는 나라도 많다.
피터 자이한은 미국없는 세계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 미국과 친해지라 말한다. 수많은 데이터를 근거로 미국없는 미래를 예측한 피터 자이한의 주장은 과연 타당할까?

2. 피터 자이한의 주장이 가진 함정
세계적 석학들은 미래를 단정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수많은 변수가 있으며 우리는 그것을 모두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피터 자이한은 자신의 주장이 틀렸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피터 자이한은 2040년 구미당기는 술 한 병을 사들고 찾아오라는 여유를 부린다.
피터 자이한의 예측이 들어 맞기 위해서는 몇가지 전제 조건이 충족 되어야한다.
첫째, 트럼프세력이 군산세력을 이겨야한다. 고립주의로 회귀하려는 트럼프와 분쟁을 유발해서라도 세계 각지에 미군을 보내려는 군산세력의 대결에서 트럼프를 중심으로한 세력이 승리해야한다. 트럼프가 노련하게 군산세력과 맞서고 있지만 군산세력의 반격도 만만치않다.
둘째, 탁월한 리더쉽이 필요하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타국에 많은 것을 요구하면서도 타국에 반감을 얻어서는 안된다. 왕은 여우의 머리와 사자의 심장을 가져야한다. 트럼프식 일방주의는 수많은 적을 만들어 미국을 고립시킨다. 난공불락의 견고한 성도 지키는자가 어리석다면 쉽게 무너진다는 사실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알고 있다.
셋째, 미국의 지정적 잇점을 위협하는 요인이 발생해서는 안된다. ICBM은 미국 본토를 위협할 수있다. 발전은 미국의 지정학적 잇점을 무력화 시킬수 있을 정도로 발전할 수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코로나19 펜데믹을 보듯이 예측할수 없는 신종전염병은 미국을 위기로 몰아 넣을 수 있다. 기후변화도 미국을 위협할 수있다. 피터 자이한은 미국은 해수면 상승의 영향을 미미하게 받을 것이라 예측했으나 기후변화의 피해는 지정학자인 피터 자이한의 예측을 뛰어넘을 수 있다.
이밖에도 내가 예측하지 못한 수많은 변수들이 미래에 펼쳐질 수있다. 우리는 오만해지기 보다는 겸손해질 필요가 있다.


피터 자이한은 ˝간단히 말해서 세계는 그야말로 지옥을 향해가는데 미국은 여기서 쏙 빠지게 된다.˝라고 확신을 가지고 말한다. 지옥에서 벗어 나고 싶다면 미국의 친구가 되라! 그의 확신에찬 몇몇 주장은 빗나가기도 했다. 중국은 미국에 위협이되지 않기에 미국은 중국에 신경쓰지 않는다는 예측은 미중무역전쟁을 보면 빗나간예측이었다. 또한 미국은 베네수엘라에게 관심이 없다고 했으나 트럼프 행정부는 베네수엘라 정권을 교체하기 위해서 온갖 수단을 통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면 역시 빗나간예측이었다. 마지막으로 미국이 패권을 포기한다는 예측도 빗나갈 것으로 보인다. 권력을 쥔자가 스스로 권력을 내려 놓지는 않는다. 하물며 세계 패권인들 말해서 무엇하랴!
미국 우월주의에 빠진 피터 자이한의 예측이 빗나가기를 바라며 글을 마무리한다. 지정학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지정학을 이용하는 인간의 리더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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