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 화단에 귀여운 박새가 놀러왔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먹으러 왔다.

우리 막내랑 새모이 비스켓 세 개를 만들어서 아파트 단지 내 놀이터 나무에 하나, 운동시설이 있는 작은 공터 나무에 하나,  그리고 우리집 화단 키작은 관목에 하나 달아주었다.

정말 와서 먹으려나...?

베란다 창문만 내다보면 빤히 보이는 곳에 걸어둔 새모이 비스켓을 보다말다보다말다 했었는데, 드디어 오늘, 나한테 딱 걸렸다. 아침에 청소를 하려고 베란다 문을 열려고 하는데, 새모이 비스켓 위에 앉아서 열심히 모이를 쪼고 있는 박새를 발견한 거다. 참새들은 그 아래서 떨어진 모이를 먹으려는 건지 열 마리도 넘게 모여 종종 거리고 있고..

재빨리 폰카를 찾아 들고 거추장스러운 방충망을 스윽.. 여는 순간 박새는 포르르 날아가 버렸다. 그렇다고 포기할 내가 아니지. 무지무지 추운 베란다에서 덜덜덜 떨어가며, 시린 발꼬락 꼬뮬거리며 참고 기다렸다가 기어코 폰카에 박새의 모습을 담았다.

 

 

어쩌면 저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박새는 지저귀는 소리도 예쁘고, 색이 화려하지는 않지만 다소곳한 인상에 참새만한 작은 크기, 흑백회색을 적절히 활용해 깔맞춤한 센스까지 겸비해서 외모로 따지면 어디 가서 꿀릴 외모도 아니다. 좀 바라보려고 하면 어찌나 날래고 잽싸게 날아가 버리는지 그게 좀 아쉽긴 하다.

박새를 찍고 나서 좀 있으니까 직박구리도 날아와 몇 번 쪼다가 인기척을 느꼈는지 곁에 있던 산수유 나무 위로 달아나 버렸다. 직박구리는 우는 소리가 "빽~!!"하고 악쓰는 것 같아서 '직박구리'라는 이름을 몰랐을 때는 그냥 내맘대로 '빽새'라고 불렀었다. 몸집은 박새보다 훨씬 크고 생김새도 박새처럼 다소곳 얌전한 인상은 아니다. 오히려 텁수룩, 언쩐지 험하게 살 것 같은 분위기다.

 

어제는 옆지기가 슈톨렌을 사왔다. 슈톨렌은 독일 빵인데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면서 한 조각, 한 조각씩 잘라 먹는 빵이라고 한다. 예전에 강릉 테라로사에서. 생각해보니 그 때도 겨울이었구나.. 암튼 거기서 사먹은 적이 있었는데, 지난 번에 테라로사에 가서 배불러서 빵은 안 먹고 왔던 게 마음에 걸렸었나 보다.

우리는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며 한 조각씩 먹는 빵을 '우왕, 맛있다'면서 와구와구 먹어버렸다. 이러니 살이 찌지..

 

 

지금 우리 막내는 학교 친구들을 불러와서, 오빠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사준 플스4 게임 JUST DANCE를 하고 있다.

아들녀석이 그러는데 하루에 저 게임으로 춤을 5곡씩만 추면 살이 쫙 빠질 거란다.

내가 보기엔 살 빠지기 전에 병날 것 같다.

막내는 하루에 20곡도 넘게 추고 있다.

어제는 배 나오고 뚱뚱한 우리 옆지기가 막내딸과 같이 춤을 췄다. 

중년의 남편이 그렇게 귀여워 보인 게 얼마만인지.

난 주방 식탁에서 사과를 깎으며 웃고 또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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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4-12-18 0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오늘 섬사이님 글은 넘 재밌네요~~~. 박새는 이름도 정겨워요,,,토종스러우면서 달리 생각하면 세련된 듯한???
섬사이님의 행복한 일상이 그려집니다,,,저야 말로 플스4게임인지 뭔지를 사서 춤을 춰야 할 듯요~~~~.ㅋ
암튼 이런 글 참 좋아요~~~. 더구나 귀한 사진까지!! 특별한 섬사이님표 글!!^^

섬사이 2014-12-18 10:58   좋아요 0 | URL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고마워요.
아... 저 JUST DANCE라는 게임은.. 정말 힘들어요...
그리고 나름 열심히, 제대로, 잘 따라한다고 했는데,
끝나고 제가 춤추는 걸 찍은 짧은 영상을 보여주는데, 그걸 확인하는 순간 좌절하게 돼요.
으아아아아아, 역시 나는 몸치였어.. 저걸 춤이라고, 흉해서 못봐주겠네..하는
자괴감이 쓰나미처럼 몰려오죠.. ㅠ.ㅠ
 

2014 서울사진축제 <서울 視 . 공간의 탄생> 전은 옆지기가 관련한 전시인데도 불구하고, 전시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가보기는 했지만 지인들과 함께 가서 정작 전시 작품에 집중하기가 어려웠고, 전시장지킴이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딸래미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데 시간을 써버리기도 했다.  

집에 돌아와 작품도록을 펼쳐보는데 사진 하나가 내 눈길을 끌었다.

 

 

 

 

이 사진 아래 적혀있는 작품에 대한 정보를 그대로 옮기면 '전몽각, 고속도로 건설현장(영천공구), 1968~1969'라고 되어 있다. 고속도로 건설현장에 구경나온 네 분의 어르신들. 두루마기에 갓까지 갖춰 쓰시고, 논밭을 깔아뭉개서 큰길을 내는 현장에 나와 나란히 앉아 바라보면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셨을까. 어쩐지 근대와 현대가 교차하는 순간의 장면 같기도 하고, 개발이니 발전이니 하는 걸 핑계삼아 무참히 휘두르는 씁쓸한 폭력의 현장 같기도 하고... 저 어르신들 네 분의 뒷모습이 어쩐지 짠하고 측은해 보였다.

 

 

 

 

 

이 사진은 1905년 광화문 거리다. 넓고 한적한 길, 오른쪽 아래 부지런히 걸어가고 있는 한 아이에게 자꾸 눈이 간다. 1905년이면 필름이 보급되기도 전, 유리건판으로 찍은 사진일 것 같은데, 아이는 사진 앞부분에 선명하게 찍혀있어서 저 걸음으로 사진 밖으로까지 걸어나올 것만 같다. 이 사진 아래에는1930년에 저 광화문 자리에 들어선 조선총독부 건물을 찍은 사진이 있다. 우리들의 슬픈 시대의 모습이 사진에 담겨 있다.

 

 

 

 

이승만 대통령의 제83회 생신 축하 기념 매스 게임 사진(1958년)이다. 어린 학생들을 동원해서 생일잔치를 벌이다니, 지금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어이없는 발상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수도 서울을 버리고 급하게 달아난 이승만은 세월호 선장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진 않은데, 그런 대통령의 생신을 축하한다고 동원되어 열심히 매스게임 연습을 했을 저 학생들은 또 왜 이렇게 불쌍해 보이는 건지.

 

지금 내가 사는 동네의 옛날 모습 사진도 있는데, 도무지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없다. 대학로에 대학천이라는 실개천 같은 게 있었다는 것도 그 물가에서 빨래하는 아낙들을 찍은 사진들을 보고 처음 알았다.

 

그날 전시를 마감하고 아들만 뺀 네 식구는 근처 더덕요리 전문 음식점에서 푸짐한 저녁을 먹었다. 큰딸이 더덕이 들어간 삼겹보쌈을 먹고 싶다고 하고 막내는 간장게장이 먹고 싶다고 하는 바람에 내가 먹고 싶었던 더덕구이를 못 먹은 게 조금 아쉽지만 배불리 잘 먹었다.  더덕구이를 먹지 못한 아쉬움을 커피로 달래려고 옆지기에게 커피까지 사달라고 졸랐다. 큰딸은 스벅을 가자고 했지만, 이번만큼은 물러서지 않고 어디에나 있는 스벅커피 말고 광화문에서가 아니면 맛볼 수 없는 커피를 사달라고 했더니 테라로사로 데려가 줬다. 몇 년 전 강릉에 있는 허난설헌 생가를 찾아갔을 때 테라로사 본점에 간 적이 있었다. 빵도 맛있고, 분위기도 좋고, 커피맛도 좋았다. 그 때 이미 서울에 분점을 낼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었는데 음, 광화문에 생겼었구나. 몰랐다.  지난 여름 다시 강릉 테라로사 본점에 갔을 때에는 이미 유명해질대로 유명해져서 주차하기도 어려워 포기하고 돌아왔었다.

 

 

옆지기와 나는 카푸치노를, 막내는 코코아를, 큰딸은 과일쥬스를 주문했다.  카푸치노는 넘 맛있었다. 진하고 향기롭고 부드럽고... 자고로 카푸치노는 이래야 하는 거야,를 보여준다고 할까. 강릉 테라로사 본점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지만 광화문점의 분위기도 나쁘지 않았다. 아주 기다란 나무 탁자가 탐났고, 늦은 시간인데도 사람들이 많아서 또 놀랐다. 옆지기 말로는 평일에도 항상 사람이 무지 많다고...

 

 

 우리가 갔을 때, 크리스마스 분위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아롬님 서재에 요즘 크리스마스 장식품에 대한 사진과 글이 올라오고 있는데, 아직까지 여기는 크리스마스의 흥겨운 분위기는 좀 찾아보기 어려운 것 같다.

 

오늘은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커피빈에 들러서 모카라떼를 마셨다. 모카라떼를 주문한 건 세실님 서재 글에서 논어는 카페모카 같다고 한 글을 읽어버렸기 때문이다. 커피빈 모카라떼는 내 입맛에는 그냥 코코아 같은 맛. 커피 맛이 너무 약하고 너무 달다.... 논어를 제대로 읽어보지 않아서 그런건지, 커피빈 모카라떼에 문제가 있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암튼, 카페모카에서 논어를 연상할 수 없었다는 게 아쉽다.

 

 

커피빈에서 찾아볼 수 있는 크리스마스 장식이라고는 달랑 이거 하나..

아롬님 서재에 있는 멋진 크리스마스 분위기의 스벅과 달라도 너무 다르구나..

 

 

---- 쓰고 보니 뭐 이렇게 잡다한 페이퍼가..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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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4-12-09 0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적어주시는 대로 제 눈도 따라가더군요!! 더구나 광화문 사진은 제 어릴 적 동네가 기억나는 듯해요. 저 어릴 적 광화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살았거든요~~~~. 1905년보다는 좀 더 번화했겠지만 뭐 그닥 차이가 없어 보여요;;; 제 기억을 믿을 순 없지만요~~~ㅋㅋ
1968년 이정도면 제가 이미 이 세상에서 숨을 쉬기 시작한 때인데,,,, 할아버님 모습이 정말 짠 하네요~~~ㅠㅠ 섬사이님 해설도 짠하고....ㅠㅠ
테라로사는 가본 적 없지만 한국 가면 꼬옥 찾아가겠습니다. ㅎㅎㅎ카푸치노 넘 탐나네요!! 스벅이 뭐가 좋아요?? 흔해 빠진 곳~~~그죠??? 여긴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으니~~~ㅠㅠ(오늘 섬사이님 북플에 와서 계속 눈물 짓고 있;;;;ㅎㅎㅎ)
제 기억에 카페베네는 일찍 크리스마스 노래 하루 종일 틀어주고 장식도 했던듯 싶어요~~~. 못 믿을 기억이지만;;;;;ㅎ

세실 2014-12-09 0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승만 생일잔치도 했군요. 황당하여라...
강릉 테라로사 가보지 못했네요.
휴점일도 많더라구요.
광화문 테라로사 가기 더 쉬울듯요^^
카페모카는 초코가 들어가니 달달하죠. 그만큼 쉽게 접근할 수 있고 읽기 부담없는 책!
알찬 시간 보내셨네요~~

섬사이 2014-12-09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롬님. 사진을 보며 추억에 빠져드는 분들이 많나 봐요. 전시장 지킴이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딸은 연세 지긋하신 어르신들의 추억담을 들어드려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하더라구요. 커피빈은 크리스마스 분위기는 전혀 없던데, 함 카페베네를 가봐야겠군요. ^^

섬사이 2014-12-09 1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실님. 도로에 세우는 아치에 이승만 대통령 각하 만수무강 운운 하는 글귀가 써있는 사진도 있어서 피식 웃음이 나오기도 했어요. 논어를 카페모카에 비유한 건 그런 의미였군요. 세실님 덕분에 논어와 공자에 대한 관심이 모락모락 거리고 있어요. ^^

순오기 2014-12-11 0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사진전도 좋지만 님 가족나들이가 더 좋은데요. 아들이 빠져서 아쉽지만...^^
우린 다섯 식구가 뿔뿔이 흩어져 살아 꿈꿀 수 없는 풍경이라 더 그런가 봐요.ㅋㅋ

섬사이 2014-12-15 01:25   좋아요 0 | URL
아이들이 커갈수록 가족이 다 모이기는 점점 어려워지네요.
저희는 그나마 늦둥이 막내 덕분에 한번씩 모이게 되는 것 같아요.
늦둥이가 사춘기에 접어들면 그나마도 힘들겠죠?
 

11월 들어 더 추워진 것 같아 밤에만 보일러를 틀기 시작했다.

자려고 이불 속에 들어가면 시린 발의 냉기가 잠을 쫓아낸다.

베란다에 있는 화분 몇 개가 걱정돼서 오늘은 유빈이가 쓰던 낡은 플라스틱 앉은뱅이 책상에

천을 깔고 화분들을 들여놓았다.

화초 가꾸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볼품없고 초라하지만

나로서는 애네들을 죽이지 않고 몇 년간 함께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적같은 일이다.

특히 백죽이가 올여름 기대이상으로 잘 자라줘서 이쁘다.

 

얼마 전에 선물받은 아라비카 커피나무, 요녀석이 요즘 나의 관심을 제일 많이 받고 있다.

언젠가 빨간 커피열매가 달리는 모습을 보고 싶다.

겨울동안 잘 보살펴 키우고 내년 봄에는 분갈이를 해줘야겠다.

 

 

 

화분들 사이에 자리잡은 작은 어항 속에 살고 있는 건 구피 6마리.

이웃 엄마가 잘 보이지도 않을만큼 작은 치어일 때 준 건데

어느새 저렇게 자랐다.

수질개선제도 히터도 여과기도 공기방울장치도 하나 없이 무식하게 키웠는데...

 

가끔 수컷들이 암놈들 앞에서 구애행동을 하는 걸 보는데

덜컥 겁이 났다.

알을 낳지 않고 뱃속에서 알을 부화시켜 새끼를 낳는 난태성 물고기라는데

따로 부화통에 넣어주지 않으면 낳은 새끼들을 잡아먹는단다.

그러니 암놈 중에 새끼를 낳을 것 같은 녀석이 생기면

얼른 어항을 좀 더 큰 것으로 마련하고 부화통에 격리시켜야 한다.

문제는 내가 초보라서 암놈들의 임신(?)여부를 잘 모르겠다는 거다.

 

 

 

그러고보니 유빈이가 7살 때부터 키웠던 햄스터 개념이가 제 수명을 다하고

여름에 저세상으로 갔다.

개념이보다 1년 뒤에 우리집에 온 우동이도 점점 늙어가서 몸집이 많이 작아졌다.

 

밥을 준지 만 2년이 넘은 것 같은 길냥이 까칠대마왕은

몇 차례 여자친구를 바꿔가며 같이 밥먹으러 오더니,

며칠 전에는 새로운 여자친구에다 새끼 고양이까지 보여줬다.

처자식까지 끌고와 밥 얻어먹으면서도 까칠대마왕의 성질은 여전하다.

그저 건재함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하고,

보태어 점점 추워지는 날씨에 까칠대마왕 가족 모두 건강하기를.

올겨울을 무사히 견뎌내기를 바랄밖에.

 

신고늄, 사랑초, 백죽, 나한솔, 커피나무, 햄스터 우동이와 구피들, 까칠대마왕과 그 가족들,

그리고 우리 모두,

성큼성큼 위풍당당하게 다가오는 겨울에 다같이 행복하고 따뜻하기를.

부디 올겨울이 아름답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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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동해 쯤으로 가족여행을 다녀왔다. 3박4일 동안 처음 이틀은 태풍 할롱의 영향으로 하늘이 흐리고 간혹 비가 내려서 양떼목장과 동굴을 보러가고 레일바이크를 타며 시간을 보냈고, 나머지 이틀은 해가 맑았지만 바다에 너울성 파도가 높았다.

 

그래도 바다를 찾아가서 파도가 으르릉대며 밀려들었다가 힘이 빠져 물러나는 그 쯤에서 파도의 끄트머리를 밟으며 아이들은 신나게 놀았다. 나는 거기서 조금 떨어진 곳에 파라솔을 치고 편안하게 의자에 앉아 수평선 가까이서부터 일렁거리며 화를 이기지 못하고 일어서 거칠게 몸을 부풀리다가 제풀에 꺾이어 휘말리는 파도를 감상했다. 책을 읽다 보면 가끔 '바다가 일어섰다'거나 '바다가 끓는다'거나 '바다가 흰 이빨을 드러내고 달려왔다'거나 하는 표현들을 만나곤 하는데 이번 여행에서 아, 그게 이런 바다를 보고 하는 표현이었디는 걸 알았다.

 

마치 바다는 야수 떼 같았다. 정말 하얀 이빨을 드러내고 먹잇감을 노리듯 으르렁 거리며 몰려왔다가 아직 때가 아니라는 걸 깨닫고 힘을 빼고 물러났다. 물러나면서도 바닷가에 있는 우리를 삼키지 못한 게 아쉬운 듯 노려보는 듯 했다. 파도는 장관이었다. 이틀을 바닷가에 있으면서 파도만 보고 있어도 지루하지 않았다. 무섭고 두려우면서도 매력적이고 아름다웠다. 파도 구경하느라 챙겨갔던 <혼불>은 파라솔 아래 테이블 위에서 이틀 내내 홀대를 받았다.

 

가끔 해경이 와서 호루라기를 불며 바다에 들어가는 사람들을 나오라고 하는 것은 물론이고, 파도 끄트머리에 발을 담그는 사람들조차 뒤로 물러나라고 엄격하게 제지했다. 누군가가 그럴거면 차라리 해변을 패쇄할 것이지 왜 사람들을 바닷가에 세워두고 아무것도 못하게 하느냐고 항의를 했다. 그래서 '발을 담그는 정도'는 허용하는 걸로 합의를 봐서 저녁 때까지 아이들은 파도와 놀 수 있었다. 저녁에는 바닷가에서 바베큐 그릴에 고기를 구워 먹었고, 밤바다 위에 뜬 둥근 달을 보았다.

 

 

 

우리에게 바다가 아픈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피서를 한답시고 바닷가를 찾은 것도 미안했다. 3박4일동안 동해, 삼척, 묵호, 강릉 등등을 돌아다니며 바다를 보았다. 그저 무심한 듯 묵묵한 먹빛 바다도 보았고, 흐린 하늘 아래 비를 맞고 누운 바다도 보았다. 바다가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정작 숨긴 말을 꺼내야 할 입은 따로 있을 것이다.

 

 

 

 

여행에서 돌아와 막내는 병이 났다. 기침을 하고 열이 오르고 토했다. (그것도 오전에 일이 있어 지인들을 만나러 카페에 갔는데 문 연지 얼마 되지도 않은 카페 출입문 앞에다가 토해서 난감하고 민망하고, 카페 주인장에게 미안하고...)  병원에 데려갔더니 감기 기운도 있는 데다가  너무 피곤하고 지쳐서 기운이 없고, 기운이 없으니 소화기능도 떨어져서 그런 거란다. 오늘로 닷새째 집에서 요양 중이시다. 큰딸과 아들은 활동봉사자로, 막내는 참가자로 가기로 했던 2박3일 도서관 캠프는 막내를 빼고 큰애들 둘만 갔다. 세 아이를 다 캠프에 보내고 10년만의 여유, 혹은 자유, 또는 반란을 꿈꾸었던 나의 희망은 좌절됐다. 하긴 '뛰어봤자 벼룩'이라고, 그저 영화를 보러 가거나 카페에 앉아 시간을 보내거나 늦은 밤 지인들과 족발집이나 치킨집에서 모여 소소한 이야기들을 나누며 시간을 보냈을 게 뻔하다. 다행히 열도 떨어지고, 기침도 한결 가라앉았고, 배 아프다는 말도 하지 않으니 그걸로 만족. 자유와 반란은 좀 더 치밀한 계획을 세우며 후일을 기약하는 걸로.

 

아참, 평창에서 맛있는 탕수육 집을 찾아갔다. 남편이 데리고 간 집인데 외관이 허름해서 잘 눈에 띄지도 않을 중국집이다. 그래도 아는 사람은 다 찾아 오는지 1시간 쯤 기다려서 겨우 테이블을 차지할 수 있었다. 중국집의 대표 메뉴라 할 수 있는 짜장, 짬뽕, 탕수육을 시켜 먹었는데 먹어 본 짜장, 짬뽕, 탕수육 중 가장 맛이 깔끔했다. 막내는 이번 여름에 먹은 음식 중 가장 맛있었던 음식으로 이 집 탕수육을 꼽을 정도. 큰딸 말로는 '꿔바로우'와 맛과 느낌이 비슷하긴 한데 야채가 올라가 있고 맛도 더 좋은 것 같다고. 휴가동안 체중이 늘어나서 돌아왔다. 날씬해지는 건 꿈도 안 꾸고, 적어도 적정 표준체중은 되야하지 않나 해서 다이어트를 해볼까 했는데 매번 먹는 것 앞에서 이성을 잃고 무너진다.

나는 구순기를 잘못 보낸 게 틀림없다. 프로이트 이론에 따르면 구순기를 잘못 보낸 사람은 식탐이 있고 스트레스를 먹는 걸로 푼다고 했던가. 잘못 보낸 구순기를 이제와 어쩔 수도 없고,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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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4-08-17 1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월호 사건 있기 전에도 저는 가끔 바다에 가서 갑자기 커지는 파도를 보면 무서운 생각이 들곤 했었어요. 잔잔할때와 너무 다른 모습으로 돌변할 수 있다는걸, 잔잔할때는 짐작 못하고 있었던거죠.
막내가 아팠었군요, 에구... 휴가 가면 집떠나 먹는 여러가지 먹거리가 안맞는 사람이 꼭 생기더라고요. 평소와 다른 일정에 몸이 좀 더 피곤한 상태였을지 모르고요. 어서 나았으면 좋겠어요.
오, 탕수육의 비주얼이 돋보이네요. 보통 고기를 눈에 잘 보이게 위로 올려담는데 이곳은 그 반대여요.

섬사이 2014-08-17 23:38   좋아요 0 | URL
저는 여지껏 잔잔한 바다만 봤나 봐요. 이번 휴가에서 본 바다를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어요.
오늘 저녁에 자기가 개발한 '국수탕'이란 걸 만들겠다고 설치는 막내를 보니 이제 거의 다 나았구나 했어요. 기어코 만들어 자기가 먹었지요. ^^

다락방 2014-08-17 1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섬사이님. 저 역시 모든게 구순기 탓이었군요!! Orz
탕수육은 제가 좋아하는 먹거리는 아닌데, 저 비쥬얼은 그야말로 훌륭하네요!
막내는 닷새째 요양의 덕을 보아 건강해져있기를 바랄게요, 섬사이님.

섬사이 2014-08-17 23:41   좋아요 0 | URL
네, 구순기 탓이에요. 항문기 때 욕구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사람은 스트레스를 받으면 청소를 한대요.
아, 차라리 항문기에 욕구불만이 있는 게 훨씬 나은 것 같아요.

프레이야 2014-08-17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섬사이님 오래만에 소식 반가워요. 막둥이가 휴가치레 호되게 하는군요. 낫고 나면 또 훌쩍 커보이지 않던가요. 아이들 보면‥ 세번째 문단이 참 좋아요. 저는 삼척 바다를 하루 보고 왔어요. 파도가 그렇게 어르렁대고 해무가 짙었지요. 저와 비슷한 생각과 느낌을 조금 다른 장소에서 나눈 것 같아 더 반가워요. 탕수육 ㅎㅎ제가 좋아하는 음식인데 저도 구순기 애착장애가 있었나 봅니다.

섬사이 2014-08-17 23:44   좋아요 0 | URL
아, 프레이야님. 정말 반가워요. 잘 지내고 계시죠?
네, 막내는 커가는 게 너무 서운하고 아쉬울 만큼 쑥쑥 자라고 있어요.
프레이야님은 구순기 애착장애와는 거리가 먼 것 같은데요. 예전에 본 프레이야님의 사진을, 저는 기억하고 있거든요. ^^

세실 2014-08-17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 저도 구순기 탓인거예요? ㅜㅜㅜ
탕수육 좋아해요. 평창에 탕수육.....먹으러 가고 싶네요.
막내 좀 괜찮아 졌나요? 아이 어릴땐 그저 건강한것만으로 효도하는거죠^^

섬사이 2014-08-17 23:49   좋아요 0 | URL
맞아요, 아프지 않고 크는 게 가장 큰 효도지요.
막내는 이제 거의 다 나아서 눈을 굴리며 놀거리를 찾아 다니고 있어요.
얼마전 세실님 서재에서 반말을 찍찍 해대는 도서관 이용자 이야기를 읽었는데,
그 분은 교양을 잘 쌓고 있는지 궁금해요.
저도 도서관에 자주 다니는 편이지만 정말 책 읽는 아이를 찾기는 어렵지 않은데
책 읽는 엄마들은 좀처럼 만나기 어려워요. ㅠㅠ

라로 2014-08-19 0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당연히 구순기 탓이네요~.ㅠㅠ
섬사이님께 제대로 인사를 드린 적이 있다고 믿으며 이런 댓글을,,,님의 글 언제나 좋아요.^^
그리고 도서관 일이 그래도 잘 풀려서 다행이구요. 저도 좀 걱정 했었거든요;;;;;

섬사이 2014-08-20 01:15   좋아요 0 | URL
반가워요, 아롬님!
(저도 아롬님께 제대로 인사드린 적이 있다고 믿으렵니닷!!)
도서관 일 걱정해주셨다니, 정말 고맙습니다.
번창발전해서 옮겨가는 건 아니지만,
나름 이번 기회를 통해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모두 기운을 내고 있어요.
알라딘에 글 잘 쓰시는 분들이 너무 많으셔서,
뭐라도 쓰려면 주눅이 들고 위축되는 편인데
"언제나 좋다"고 해주시니 위로가 되네요. ^^
 

요즘 도서관은 아이들 캠프 준비가 한창이다.

해마다 초등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40명을 신청받아 2박3일의 캠프를 꾸리는데,매해 캠프의 주제가 다르다.

올해는 그림책 속에 등장하는 집들을 골판지로 만들어보는 활동을 한다.

재작년에 톱질하고 못질을 해서 허술하긴 하지만 집을 짓기도 했던 아이들이니까 잘 해내리라고 믿는다.

 

도서관 건물의 경매 문제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여러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고, 여기 저기 알아보고,

도움을 구한 결과 다행스럽게도 이사할 공간이 마련되었다.

구에서 예전에 경로당으로 쓰였지만 주변이 재개발이 되면서 쓸모없게 되어버린 2층건물을

우리 도서관이 쓸 수 있도록 도움을 준 것이다.

지금의 도서관 건물보다 공간이 작아서 좀 걱정스럽고,

아직도 앞으로 해결해 나가야 할 일들이 쌓여있지만.

이리저리 손보고 궁리를 하면 예쁜 도서관으로 꾸며서

올 12월 쯤에는 아이들과 엄마아빠들의 의미있는 공간으로 자리잡을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비가 주룩주룩 오던 날,

관장님이랑 선생님들이랑 같이 이사할 건물을 보러 갔었는데

주변이 근린공원이라 아이들이 책을 읽다가 나가 놀기도 좋을 것 같다.

음... 솔직히 아이들이 책은 내팽개쳐놓고 밖에서 놀기만 할까봐 염려스럽기도 하다.

 

얼마 전에 하도 답답하고 걱정이 돼서 도서관 건물 경매 이야기를 페이퍼에 올렸더니

많은 분들이 함께 걱정하고 염려를 해주셨다.

정말 감사하고 든든했다.

그 분들께 도서관이 이사할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는 희소식을 

알려드릴 수 있게 돼서 정말 기쁘다.

다시 한 번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다.

 

7월 19일에 1박2일로 충주에 가서 정승각 선생님을 뵙고 왔다.

마을 어르신들이 마을 회관을 숙소로 내어주시고,

감자며 옥수수며 블루베리며 아욱이며.. 여러가지를 살뜰히 챙겨주셔서

편안하고 기분좋게 잘 다녀왔다.

아이들에게 신나게 놀 시간도 넉넉히 줄 수 있었고,

정승각 선생님과의 활동도 긴 시간을 두고 진행할 수 있었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함께 좋은 일을 한다는 건

참 행복한 일이다.

 

요즘은 문득문득 내가 지금 있는 이 자리에 대해 감사할 때가 있다.

남보다 잘나거나 부유하지는 않지만

주위에 나를 줗은 방향으로 흘러가게 하는 좋은 사람들이 있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알라딘도 그렇다.

이곳엔 날 주눅들게 만드는,

생각도 깊고 글도 잘 쓰는 사람들이 너무 많지만

그래도 그런 분들의 생활과 생각들을 읽으면서 자극받고

나를 다잡기도 한다.

 

이제 8월.

이 더위도 한 3주만 버티면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 거다.

그 때는 어느새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다며 깜짝 놀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이 여름 무더위가 철없는 아이의 투정같이 느껴져서

'저러다 지치면 말겠지..'하는 심정으로 그럭저럭 견뎌줄만 하다.

 

더우면 습관적으로 선풍기 버튼부터 눌렀었는데

요즘 부채에 맛들이고 있다.

생각보다 부채바람이 시원하고 상쾌하다.

틈틈이 더위를 식히기엔 아주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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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4-08-20 0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님께 많이 자극받아요 언제나 멋지셔요 제가 늘 응원합니다

섬사이 2014-08-20 10:40   좋아요 0 | URL
우와, 멋지다는 말을 들으니, 마음이 밝아져요.
응원해주셔서 고마워요.
응원해주시는 만큼, 정말로 멋지게 살 수 있으면 좋겠어요. 에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