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9일 비 내리던 봄밤에 김사인 시집 『가만히 좋아하는』을 꺼내 읽고 주책맞게 찔끔거리고 난 후에 시집을 다시 책꽂이에 꽂아두지 못하고 거실 테이블에 놓아 두었다. 가끔씩 펼쳐지는 대로 시를 읽다가 지난 토요일부터는 작은 노트 하나를 꺼내 꾹꾹 옮겨적기 시작했다. 맨 앞에서부터 차례로 하루에 두 개, 혹은 세 개씩. 처음 옮겨 적을 땐 속으로 '내가 이걸 왜 옮겨 적고 있는 건가' 생각했다. 종이 낭비는 아닐까. 나무한테 미안한 짓을 하고 있구나. 시를 다 옮겨 적더라도 그 노트를 펼쳐 읽지는 않을 텐데. 시를 읽고 싶으면 시집을 펴지 볼펜으로 삐뚤하게 적어놓은 걸 읽겠어? 시간 낭비야. 차라리 옮겨 쓸 시간에 시를 하나라도 더 읽지 그래? 그런 말들이 계속 머리 속을 떠다녔다.
그런데 시의 한 줄 한 줄을 옮겨 적고 있으려니까 그 시간이 그렇게 조용하고 차분할 수가 없었다. 시를 옮겨 적을 때마다 시가 파르르 떨면서 노트로 건너 오는 것 같기도 하고, 간질간질 간지럽다며 날보고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성당이며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사람들은 뜨거운 신앙을 증명하려는 듯 두껍고 글자도 많은 성경책을 필사하는 걸 본 적이 있다. 나는 시를 옮겨 적으며 증명할만한 시에 대한 뜨거운 애정 같은 걸 갖고 있지 않다. 남들보다 시를 더 많이 읽고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다만 그 봄밤 이후 시하고 잘 지내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긴 것 같다. 내가 생각하기에 시는 다른 글들보다 좀 더 오래 꼭꼮 씹어 읽어야 할 것 같아서, 그래야 좀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런 욕심에 옮겨 적겠다는 생각이 떠오른 것 같다. 난 지금 시를 꼬시고 있는 중이다. 혹시 모르지. 시가 "나를 이런 식으로 대한 건 네가 처음이야!"(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만. 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하면서..... 흠. 그만 하자.
오늘은 <전주>라는 시를 옮겨 적었다.
전주
자전거를 끌고
여름 저녁 천변 길을 슬슬 걷는 것은
다소 상쾌한 일
둑방 끝 화순집 앞에 닿으면
찌부둥한 생각들 다 내려놓고
오모가리탕에 소주 한 홉쯤은 해야 하리
그러나 슬쩍 피해가고 싶다 오늘은
물가에 내려가 버들치나 찾아보다가
취한 척 부러 비틀거리며 돌아간다
썩 좋다
저녁빛에 자글거리는 버드나무 잎새들
풀어헤친 앞자락으로 다가드는 매끄러운 바람
(이런 호사를!)
발바닥은 땅에 차악 붙는다
어깨도 허리도 기분이 좋은지 건들거린다
배도 든든하고 편하다
뒷골목 그늘 너머로 오종종한 나날들이 어찌 없겠는가 그러나
그러나 여기는 전주천변
늦여름, 바람도 물도 말갛고
길은 자전거를 끌고 가는 버드나무 길
이런 저녁
북극성에 사는 친구 하나쯤
배가 딴딴한 당나귀를 눌러타고 놀러 오지 않을라
그러면 나는 국일집 지나 황금슈퍼 앞쯤에서 그이를 마중하는 거지
그는 나귀를 타고 나는 바퀴가 자글자글 소리내며 구르는 자전거를 끌고
껄껄껄껄껄껄 웃으며 교동 언덕 대청 넓은 내 집으로 함께 오르는 거지
바람 좋은 저녁
이 시를 옮겨 적으면서 저기 저, 당나귀를 탄 북극성 친구와 자전거를 끌고 가는 시인이 함께 가는 버드나무 길의 정경을 떠올리다가 그림 하나가 생각났다. 단원 김홍도의 마상청앵도.
저 그림 속 말(당나귀였으면 더 좋았겠지만)을 타고 가는 선비 옆에 자전거 끌고 가는 시인을 그려주면 딱 좋겠다. 그림 그리는 재주만 있었다면 어떻게 좀 그려볼 텐데. 시인의 천진한 웃음까지 멋지게 그리고나서 나도 같이 흐뭇하게 웃을 텐데.
올해는 꽃들이 늦다. 이제서야 매화가 느릿느릿 꽃잎을 펼치고 있다. 예전 같으면 이미 피고 졌을 시기다. 앞산에 개나리도 노란 점을 몇 개 찍어 나가기 시작했다. 산수유만 화창하다. 올해 첫 민들레는 아직 만나지 못했다. 그래서 봄을 부르는 것 같은 저 그림이 더 생각났나 보다. 오늘 밤엔 미세먼지고 뭐고 따지지 말고 베란다 창문을 활짝 열고 북극성에 살고 있는 시인의 친구를 향해 건배하고 싶다. 늦은 만큼 더 서둘러 성큼 오고 있는 봄에게도. (술을 마실 줄 몰라도 건배는 할 수 있잖아. 아니면 술 대신에 같이 커피라도 한 잔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