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이 쓰고 만화가 정훈이가 그린 책 『표현의 기술』을 읽었다. 스스로 '정치적 글쓰기'를 하고 있다는 유시민은 '왜 쓰는가'라는 원론적인 질문부터 시작해서 발췌와 요약의 중요성, 악성댓글 대처법, 표절에 대한 의견과 비평에 대한 생각을 피력하고, 자소서, 보고서, 회의록 쓰는 법,어린 학생들의 글쓰기에 대한 조언까지 이어나간다. 워낙 글을 명료하게 잘 쓰는 '유시민'이므로 쉽게 잘 읽힌다. '쉽게 잘 읽힌다'는 건 분명 장점이지만 유시민의 다른 저작들에 비해 날카롭게 '벼리는 맛'이 덜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친절하지만 느슨하고 이것저것 상냥하게 설명해주고 조언해주지만 뭔가 덜 채워진 것 같은 허전함이 있다. 유시민의 글은 '글쓰기'를 위한 글보다는 사회의 여론형성을 위한 글이 훨씬 더 매력적인 것 같다. 그게 왜 쓰는가라는물음에 대한 그의 답이기도 했으니까.
우리는 '내가 누구인지' 스스로 대답할 수 없는 걸까요? 아닙니다. 대답할 수 있습니다. 글 쓰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대답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다운 글을 쓸 수 있으니까요.
유시민은 '내가 누구인지'를 묻는 것은 '나'라는 철학적 자아의 특성에 대한 물음이며, 우리는 인간 일반의 본성 위에 그 어떤 '자기만의 것'을 세웠는지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런 거창한 이야기가 결국 '자기소개서' 쓰기로 이어진다. 유시민의 말마따나 '자기소개서'를 폄훼하려는 건 아니다. 하지만 뒤이어 설명하는 자기소개서 쓰는 법은 결국 그것을 읽는 사람, 혹은 기업이 요구하는 바에 맞춰 써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자기소개서는 자기 자신보다는 그것을 읽을 사람이 의미 있고 중요하다고 여길 만한 사실을 중심으로 정해진 분량만큼만 써야 합니다'라고. 틀린 말은 아니다. 아주 실용적이고 유용한 조언이다. 하지만 '철학적 자아의 특성에 대한 물음'으로 시작한 글이 이렇게 끝나는 것은 뭐랄까, 좀 서늘한 기분이 들었다.
논문 쓰는 절차에 대한 설명에서도 그랬다. 유시민은 논문 쓰는 절차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1) 주제를 명확한 형태의 질문으로 만든다.
2)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논문 주제와 관련한 기존의 연구 결과를 살펴보고 그 현황과 성과와 한계를 요약 정리한다.
3) 기존 연구 결과를 반박, 보완, 수정, 극복하는 데 필요한 사실, 가설, 이론, 해석을 제시하고 서술한다.
4) 논문에 담은 연구 결과의 학술적 의미와 가치를 정리한다.
그리고 그 밑에 이렇게 썼다.
간단하지요? 어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글쎄..... 이게 나만 복잡하고 어렵게 느껴지는 걸까. 논문작성을 앞둔 예비 학사, 석사, 박사들한테 이게 식은 죽 먹기인가. 내가 논문때문에 고민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이걸 '간단하다'고 말하는 저 문장 앞에서 더 큰 절망을 느낄 것 같은데... 유시민에게는 저게 간단하고 쉬운가 보다.
콘텍스트의 중요성에 대한 이야기, '느끼는 책읽기'의 권유, '마음이 먼저'라는 글쓰기 철학(?) 등에는 충분히 공감했고, 새겨들을만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너무 많은 것을 너무 얕게 다루었다는 아쉬움이 크다.
정훈이가 그린 만화가 글 중간 중간에 삽입되었고, 마지막 11장에는 만화가 정훈이의 <나는 어쩌다가 만화가가 되었나>란 제목의 만화가 실려있다. 글 중간에 들어간 만화들은 챕터가 다 끝난 마지막에 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읽다가 중간에 만화가 나오니까 순간 당황스러웠다. 만화를 읽고 지나가자니 글의 맥이 끊기고, 그냥 안 읽고 넘어가자니 읽다가 만화를 보기 위해 다시 돌아가야 하고... 독자를 배려하지 않은 편집인 것 같다. '표현'이라 함은 꼭 '글쓰기'에 한정된 얘기는 아닙니다, 라는 의미로 만화가 정훈이의 이야기가 들어간 것 같다. 정훈이의 만화로 온전히 채워진 11장에서 정훈이는 말한다.
가장 좋은
표현의 기술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근데, 사람의 마음은 '기술'로 움직여지지 않는다.
정훈이가 순수고졸의 학력으로 대학 강단에 설 수 있었던 것도, <씨네 21>에 만화를 연재할 수 있었던 것도, 그건 모두 '표현의 기술' 때문이 아니라 '진심과 최선'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이 책은 제목부터 잘못된 게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