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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수의 탄생 ㅣ 일공일삼 91
유은실 지음, 서현 그림 / 비룡소 / 2013년 11월
평점 :
유은실의 새 책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망설임없이 읽기 시작한 책. 이야기의 첫 머리에는 일수의 엄마 아빠의 만남과 결혼, 결혼을 한 후 대부분의 연인들이 그러하듯이 서로에게 심드렁해지기까지의 과정이 나오는데 그걸 읽으면서부터 나는 즐거웠다. 여자의 잘록한 허리와 수줍은 웃음이 마음에 들어서 '이 사람과 결혼해서 날마다 저 모습을 봐야겠다.'고 다짐하고 결혼했지만 아내의 수줍음은 사라지고 결혼한 지 오 년 만에 잘록한 허리가 완벽한 항아리 형으로 변신해서 바라보면 한숨이 나오더라는 이야기, 남자에게서 풍겨오는 기분좋은 비누 냄새와 유머감각이 마음에 들어서 '이 사람과 결혼해서 날마다 재밌는 얘기를 들어야겠다.'고 다짐하고 결혼했지만 남자가 남편이 되고부터는 점점 게을러지고 지저분해져서 코를 쥐고 괴로워했다는 이야기. 그래도 그냥 그럭저럭, 사이가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부부로 살았다는 이야기는 첫 두 페이지 정도의 분량에 걸쳐서 짤막하게 쓰여있었지만 팔딱팔딱 살아있는 생생한 문장들로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 부부의 결혼 이야기는 세상만사 뜻대로 되는 일이 없더라, 라는 켸켸묵은 진리를 꺼내들고 앞으로 태어날 일수의 인생을 암시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물론 이런 생각을 처음부터 했던 건 아니고, 책을 다 읽고 나서 곰곰 생각했더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말이다. 전체적인 줄거리를 생각해볼 때 사실 일수 엄마, 아빠의 결혼 스토리는 없어도 무방하니까, 굳이 이 이야기가 책의 앞부분을 장식하고 있는 건 앞으로 일수의 앞날이 생각대로 쉽게 풀리지는 않을 거라는 복선일 수도 있다는 거다.
일수는 이 부부가 결혼한지 15년만에 얻은 귀한 아들이다. 게다가 행운의 숫자 7이 겹친 7월 7일에 태어났고, 로또 당첨의 길몽이라는 황금똥의 태몽을 꾸고 잉태된 아이다. 그러니 부모, 특히나 엄마의 극진한 사랑과 관심과 기대가 지나치다 싶을 만큼 철철 넘쳐난다. 엄마는 일수가 출세하고 성공해서 자신을 돈방석에 앉혀줄 거라는 부푼 기대와 희망을 안고 살아간다. 하지만 세상만사는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법. 일수가 무럭무럭 자라서 초등학교에 입학하고부터 문제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1학년 담임선생님은, 일 년 내내 상장 한 번 못 탄 일수를 위해 잠시 고민했어요. 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일수에겐 착한 구석이 없었어요. 말썽을 피우지 않는다고 착한 건 아니니까요. 일수는 그냥 있는 듯 없는 듯, 칭찬할 것도 야단칠 것도 없는 아이였죠. 2학년, 3학년 선생님도 마찬가지였어요. 일수는 특별히 잘하는 것도 눈에 띄게 못하는 거도 없는 아이였죠. 선생님들은 가끔 일수가 자기 반 아이라는 걸 잊어버렸어요. (29쪽)
그러니까 일수의 문제는 '문제가 없다'는 게 문제라고도 볼 수 있는데, 나는 일수의 이야기를 읽어갈수록 '아, 어쩌면 일수가 방어기제를 작동시키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수가 '생일잔치를 회갑처럼 하는 것 말고 특별할 게 없는 백일수 어린이'(31쪽)가 되어버린 것도, 말끝에 늘 '같아요'를 붙여서 애매모호하게 얼버무리며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숨기는 것도 모두 자신의 탄생에 수많은 의미를 부여하며 커다란 걸 기대하고 있는 엄마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는, 혹은 정말 자신이 없다는 아주 극소심한 의지표명일 수도 있지 않을까. 아니면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엄마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고 부응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는 일수의 고민이 드러난 것일 수도. 일수의 아빠는 그런 일수를 측은히 여기며 아내에게 한 마디 한다.
"일수한테 너무 기대하지 마. 대단해지지 않았을 때, 엄마에게 죄지은 느낌으로 계속 살게 될지도 몰라." (51쪽)
물론 아들에 대한 기대로 눈이 먼 엄마에게 남편의 충고는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헛소리 취급을 받지만.
어떤 일에서도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던 일수가 4학년이 되어 서예반에 들어가면서 약간의 반전을 맞는다. 일수의 '하면 된다' 서예작품이 '새마을초등학교 개교 30주년 기념 전시회'에 서예부 대표로 전시된 것이다. 이 일로 일수가 한석봉 뺨치는 유명한 서예가로 성장할 것이라는 꿈을 꾸게 된 일수 엄마는 일수의 손목을 잡아끌고 급기야 동네 최고의 명필을 찾아가 제대로 서예를 배우게 한다. 한석봉의 꿈을 꾸는 엄마와 달리 겹받침을 틀리지 않고 잘 쓰고 싶다는 소박한 목표를 가졌던 일수가 6학년이 되어 겹받침이 헛갈리지 않게 되자 명필은 일수의 어머니를 불러앉히고 이렇게 이야기한다.
"일수는 자기 글씨체가 없습니다. 그날 그날 교본에 있는 걸 따라할 뿐이에요. 당연하죠.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고, 자기 감정이 뭔지도 모르는 녀석인데."
명필은 조금도 떨지 않고 대답했어요.
"뭐라고? 우리 일수가 뭘 모른다고?"
어머니 목소리가 커졌어요.
"당신 아들은 자기 감정을 몰라. 자기 마음을 담는 게 서옌데, 그걸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해. 더 이상 하면 독이 될 뿐이야!"
명필의 목소리도 커졌어요. 어머니보다 더 크게, 더 세게 반말을 했죠. (65쪽)
일수는 서예학원에서 잘렸다. 언젠가 명필은 일수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물었었다. "일수야, 너는 누구니?", "그런 거 말고, 너는 누구니?"라고. 그렇게 물어봐주는 사람은 명필, 딱 한 사람이었는데, 야속하게도 그 명필이 일수를 잘라버렸다. 이렇게 난데없이 불쌍할 수가. 명필만은 주눅들고 위축된 일수에게 언젠가 벼락같은 깨달음을 내려주어 일수가 자기 스스로 우뚝 설 수 있게 만들어주기를 바랐는데 말이다.
하기는 그게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일 거다. 120쪽 정도의 이 얇은 책 속에 주인공의 30 여년의 세월을 조금도 허술하지 않게 짜임 좋게 담아놓은 것 말이다. 일수가 서른이 넘는 어른이 될 때까지의 삶을 보여주면서 작가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살면서 깨달음은 그렇게 쉽게 오지도 않고, 꼬인 인생은 좀처럼 쉽게 풀리지 않고, 일수 아빠의 말처럼 인생은 별 것 아닐 수 있다라고. 하지만 스펙터클하지도 버라이어티하지도 않고, 력셔리나 판타스틱 같은 단어와는 아무 상관없이 살아가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의 손아귀에 잡혀 되는대로 끌려다니며 살아서는 안된다고.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작가는 일수의 탄생부터 서른을 넘긴 나이까지, 그 별 볼일 없는 삶의 여정을 모두 이야기해야 했던 건가 보다. 대부분의 어린이책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드문 경우다.
일수 씨는 천천히 가훈을 읽기 시작했죠. 짧아서 쓰기 좋은 가훈과 길어서 쓰기 힘든 가훈, 웃기지 않는 가훈과 웃긴 가훈, 많이 써 본 가훈과 처음 써 보는 가훈, 아이가 썼다고 치거나 부모나 조부모가 썼다고 치는 가훈의 구별은 사라졌어요. 오직 하나 '나의 가훈'으로 삼고 싶은 것과 '나의 가훈으로 삼고 싶지 않은 것'만이 있었죠. 그리고 동네 최고의 명필이 했던 질문이, 질문하던 눈빛이 떠올랐어요. 일수 씨는 거울 앞에 섰어요. 그리고 오래전 받았던 질문을 따라했어요.
"일수야, 넌 누구니?"
"그런 거 말고, 넌 누구니?"
"네 쓸모는 누가 정하지?"
다리가 저릴 때까지, 일수 씨는 거울에 비친 자신을 들여다 보았어요. 국민, 시민, 예비군, 어머니의 하나뿐인 아들, 가훈업자, 일석 반점 단골, 문구점 아저씨인 일수 씨는 분명했어요. 하지만 그것이 아닌 일수 씨는 어디에도 없는 것 같았죠.
(117쪽)
작가는 스스로가 명필이 되어 독자에게 묻고 있는 거다. 그리고 일어나 거울 앞에 서서 스스로를 들여다 보라고 하고 있는 거다.
책을 덮으면서 가슴이 찌리릿했다. 이 험하디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들려줘야 할 이야기는 성공한 위인의 이야기나 일류대 입학을 위한 학습전략 따위가 아니라 이런 이야기가 아닌가 싶어서. 아이들이 우리들의 말에 귀를 닫는 것은 우리가 아이들에게 들려줘야 할 진짜 이야기를 들려주지 못하고 있어서인지도 모르겠다. 기껏해야 일수의 엄마처럼 아이들의 출세와 성공과 돈방석을 바라면서 마치 인생의 대단한 비법이라도 알고 있는 것처럼 거만을 떨고 있는 건 아닌지.
그냥 그저 물끄러미 아이의 눈을 바라보며 "넌 누구니?", "그런 거 말고, 넌 누구니?", "너의 쓸모는 누가 정하지?"하고 물어보는 걸로 충분할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생생한 볼륨과 질감을 가진 책 속 인물들과의 만남이 무척 신 나고 즐겁다. 역시, 유은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