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차 면접에서 돌발 행동을 보인 MAN에 관하여 욜로욜로 시리즈
박지리 지음 / 사계절 / 2017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박지리 작가의 신간을 읽었다. 제목이 좀 길다. <3차 면접에서 돌발 행동을 보인 MAN에 관하여> 극본의 형식을 차용해서 - 전적으로 극본은 아니다 - 쓰여진 이 소설은 M이 마흔여덟 번째 면접을 보기 위해 7월의 뜨거운 골목길로 나서는 것으로 첫 장면을 시작한다. 세상에, 마흔여덟 번째 면접이라니.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서류심사에서의 탈락이 있었을 테니, M이 감당했을 좌절의 깊이가 아득하다.

 

나만 빼고 지들끼리 잘 돌아가는 것 같은 세상은 너무 잔혹하다. 어떻게 해야 나도 그들과 같은 편이 설 수 있는지, 그 세계가 아무리 비정하고 냉혹하고 내 정신과 육체를 갉아먹는다 해도 아예 선택받지 못한 외부자보다는 피폐한 영혼의 내부관계자가 되고 싶은 욕망이 들끓는다. 그 욕망을 실현하기까지 한 개인이 느끼는 피 말리는 강박과 조바심은 취업을 원하는 이 시대 구직 청년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이렇게 사는 게 제대로 사는 건가를 고민하는 모든 이들이 느끼는 공통된 감정일 것이다. 뜨겁고 불안한 욕망의 실현을 위해서, 거기 그들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우리는 사회(여기선 회사)가 원하는 사람이 되고자(혹은 그렇게 보이고자) 가면을 쓰고 연기를 한다. 이 소설이 '극본'의 형식을 차용한 이유가 바로 이게 아닐까.


M    면접이에요?

사장  아, 이 친구 참, 그게 뭐 그리 중요해?

M    확실히 알고 가야 합니다. 면접인지 아닌지.

사장  왜?

M    면접이라면...... 완전히 다르게 행동해야 하니까요.

사장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과자 회사의 연수 합숙 종료 이틀 전에 도망친 후 '복잡한 계약에 따른 고용관계'를 피해 면접 절차가 필요치 않은 단기직, 전단지 배포일을 하던 M이 자판기 관리 일을 소개해주는 야식집 사장과 나눈 대화다. 마음이 서늘해졌다. 사회가 원하는 사람으로 보이려면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는 어느 정도 자아분리를 할 줄 알아야 한다. 연극무대에 선 배우가 보여주는 모습이 실제 현실의 모습과 다른 것처럼.  과자보다 질소를 빵빵하게 채운 화려한 빛깔의 과자봉지처럼,

 

세상을 잘 살아가려면 실제의 나(포장에 비해 보잘 것 없는 과자)와 상대의 마음에 들기 위해 부풀린 포장 사이에 존재하는 그 허무한 부피에 괴로워하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 그 길이 내 길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길을 잃지 않을 수 있다. 적어도, 길을 잃지 않았다고 착각하며 살 수 있다. 빵빵하게 부푼 화려한 과자봉지 안의 공허한 부피까지 모두 ''라고 세뇌하고 그 포장의 기술까지 나의 능력이라고 믿어야 한다. 그러면 언젠가 날카로운 무언가에 찢겨 질소가 빠져버리기 전까지는 어떻게든 견뎌낼 수 있을 것이다.

 

숨 막히게 촘촘하고 단단하고 폐쇄적인 사회라는 그물조직에 바람이 통하는 작은 구멍을 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쉽게 뚫릴 리 없겠지만 숨 좀 쉬며 살고 싶다. 숨 좀 쉬며 살게 해주고 싶다. 우리집 큰애들 나이가 취업과 무관하지 않아서 더 그런지도 모르겠다. 큰딸과 친한 친구 6명 중 딱 절반인 3명이 취업에 성공했는데, 그 중 2명은 벌써 직장 스트레스로 괴로워 한다. (한 명은 간호사고, 또 한 명은 어린이집 교사다.) 다른 3명은 기약없는 취준 공부 중이다. 공무원 시험공부를 하거나 토익을 공부한다고 한다. 취업준비를 하면서 아이들 자존감은 바닥을 치고 있다. 그 아이들에게 현실 세계는 방향도 방위도 알 수 없는 일그러진 시공간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나는 어디에 있는 거죠? 나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요? 너무 어두워서 나는 아무것도 볼 수가 없어요. 여기가 어딘지도 알 수 없어요. 그러니 그렇게 보고 있지만 말고 제발 알려줘요.

 

우리가, 저 질문에 대한 대답을 마련할 수 있을까? 묵묵부답할 수밖에 없는 현실은 모두를 불편하고 힘들게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양춘단 대학 탐방기
박지리 지음 / 사계절 / 2014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은 지금까지 읽은 박지리의 책들 중 좀 특별하다. <합체>, <맨홀>, <다윈 영의 악의 기원>은 그 내용이 밝든 어둡든 주로 십대 소년들이 주인공이지만 이 책의 주인공은 양춘단이라는 65세의 시골 할머니다. 순박하고 어리숙하지만 당차고 정도 많고 호기심도 많은 푸근한 할머니. 석공 양호익의 범상치 않은 태몽을 받고 태어난 양춘단은 꼭 있어야 할 것이 보이지 않는 가시내라는 것과 가난한 살림살이 때문에 못 배운 한을 가슴에 품고 살아왔다. 서울 아들네에 갔다가 받은 건강검진에서 남편 영일이 양성종양진단을 받는 바람에 정든 송정리를 떠나 서울 아들네로 오게 된다. 영일을 병간호 하던 중에 만나게 된 양정례의 소개로 천지대학교 청소 일을 하게 된 춘단은 대학을 다니게 되었다는 게 그렇게 신 나고 좋을 수가 없다. 명문 천지대학교를 다니게 된 양춘단은 하숙생 서성환(장대열), 시간강사 한도진, 동료 미화원들과 소장을 만나고 겪으면서 세상의 모순과 가식, 부조리와 맞닥뜨린다. 마치 만담처럼 경쾌하게 이야기를 끌어가고 있지만 그렇다고 내용이 가벼운 건 아니다. 이야기의 전개방식도 과거와 현재를 건너다니고, 과거의 사건이 현재의 사건과 맞물리고, 현실의 아픔이 춘단의 부모 앙호익과 정순규를 향한 한탄으로 이어지기도 해서 처음엔 다소 산만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차근차근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아, 하고 감탄하게 되는 지점들을 만나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며 관계와 오염에 대해 생각했다. 이 사회가, 춘단이 일하는 천지대학교 교수와 학생들, 소장, 남평구 교회의 목사 등이 맺고 있는 관계의 방식과 관점은 양춘단과 미화원들이 타인을 대하는 방식과 사뭇 다르다. 미화원들은 임금삭감과 소장의 무례한 언동에 대해 대학 측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대학은 본 대학은 미화 용역업체인 더클린과 미화원들의 계약 관계에 하등의 관련이 없음을 표명하며 미화원들을 더 궁지로 몰아넣는다. 이에 미화원들은 분개한다.


우리랑 아무 상관이 없다고? 우리가 누구를 위해 일하는데? 우리가 뭐 소장을 위해 일하나. 우리가 걸레질해주는 복도로 걸어다니고, 비질해주는 강의실에서 공부하고, 우리가 쓰레기 버리고 변기통까지 닦아주는 화장실에서 오줌똥 누면서, ? 이제 와서 우리랑 자기네가 아무 상관이 없어?”


관계에 대한 서로 다른 두 관점이 극명하게 비교되는 부분이다. 책임의 소재와 권력의 방향과 힘의 역학, 이해득실과 유불리를 판단하는 것이 현대 도시 사회의 복잡한 관계 맺기의 방식이라면, 양춘단과 미화원들은 인정과 애련함으로 관계를 파악한다. 어느 틈엔가 우리는 ’, 고용인과 피고용인, 업무적 관계를 인간관계로 인지하게 되었다. 너와 나 사이에 분명한 계약이 없다면, 혹은 함께 나눌 업무적 책임감이 없다면 난 너에 대해 기대할 것이 없는 관계다. 언제부터인지 나도 사람을 때문에 만나는 경우가 많아졌다. 물론 함께 일을 하면서 끈끈한 동지애가 생기기도 한다. 하지만 동지애라는 것이 함께 일을 한다는 조건이 충족되었을 경우에만 가능한 것이라 일이 끝나 마무리가 되면 그 동지애라는 것도 흐리고 옅어지고, 어쩌다 만나더라도 형식적인 안부나 주고받는 데면데면한 사이가 되고 만다. ‘이 없이는 전화 한 통 하는 것도 쉽지 않다. 그들이 내 삶 속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나 또한 그들의 삶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그것이 현대 도시인들의 인맥이다. 인맥을 통해 우리가 얻고자 하는 건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는 것, 사회적 지위와 영역을 확보하는 데 유리한 것, 혹은 성취감 같은 것들이다. 참 메마른 관계다. 메마르고 병든 관계는 상대적 약자의 위치에 선 사람을 벼랑 끝에 세운다. 시간강사 한도진이 그랬고, 양춘단의 첫째아들 종철이가 그랬고, 춘단의 손주 삼수생 준영이가 그랬다. 시급 오백원 삭감에 생사의 위협을 느끼고 팻말을 들고 시위를 벌였던 미화원들은 툭, 툭 밥줄 끊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일자리에서 쫓겨났다. 힘이 없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고 여기는 세상은 잔혹하다.


얼마 전 김사인 시인의 <봄밤>이라는 시에 가슴이 녹아내리며 울컥했던 것도 그 시 속에서 나의 결핍을 발견했기 때문일 것이다. 술이 거나하게 취해서 불콰한 낯빛을 하고 돈 따위 없어도 서로의 마음을 따뜻하게 부비는 모습에 나도 그 싱싱하고 풍요로운 관계의 망 속으로 뛰어들어 함께 울고 웃고 싶은 마음이 치솟아서.


책의 결말에서 양춘단은 천지대학교의 상징인 코끼리 위에 몰래 올라가 겨우내 망치질을 한다. 남평구에서 양춘단의 아버지 석공 양호익은 온세상 근심을 홀로 떠안은 고통의 모습으로 서 있는 거대한 예수상을 무너뜨렸다. 자신이 만든 것이었고, 그 지역의 명물로 인정받는 예수상이었다.


추수감사절 날, 마을 신도들은 가져온 오곡백과를 예수상 앞에 쌓아놓고 하루 종일 통성기도를 올렸다. 날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농사꾼의 삶에서부터 기대한 만큼은 영특하지 못한 자식들, 병원에서도 답을 내주지 않는 병, 두 개로 갈린 나라까지, 온갖 고통을 토로하며 울부짖던 사람들의 기도가 극에 달하자 그곳은 억장이 무너지는 비명과 혼절도 보기 좋은 예절로 통용되는 상갓집으로 바뀌었다. 자신이 만든 상 앞에서 벌어지는 가을 잔치를 구경하기 위해 교회에 간 양호익은 술을 좋아하고 노래를 즐겨 부르던 남평구 사람들의 얼굴이 사는 기쁨은 하나도 없이 고통으로만 일그러져 있는 것을 목격했다.’(345)


그것은 양호익이 보기에 오염이었을 것이다. 자연스럽고 건강하고 순박한 정으로 살아가던 오랜 이웃들이 자신이 만든 고통의 예수상 앞에서 고통으로 오염되어 있었던 거다. 그래서 양호익은 예수상을 무너뜨린다.


얼마 뒤, 새벽 기도를 다녀오던 길에 문득 예수상이 사라진 자리 뒤에서 오만 가지 색으로 빛나는 위대한 자연과 그 속에서 영원히 이어질 삶의 회귀성, 이번 생에서 자신이 무심코 저지른 업을 발견한 어떤 이는 잠시나마 속세에 흔들렸던 방종을 뉘우치며 개종을 철회하고 본래의 믿음으로 돌아갔다. 이불을 둘러쓰고 돌아가며 옛날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추위를 나는 남평구 사람들은 겨우내 예수상에 대한 갖가지 소설을 만들어냈지만 어느덧 더 아래쪽에서 불어온 바람이 눈을 녹이고 씨를 뿌릴 계절이 왔음을 알리자 몸이 시키는 대로 냄새나는 이불을 걷어차고 기지개를 켜며 밭으로 나갔다.’ (346)


그때 춘단은 보았다. 가을밤 내내 아버지 양호익이 사다리와 망치를 들고 몰래 오솔길로 걸어가는 것을. 그래서일 거다. 춘단은 한도진의 자살을 계기로 그 잘났다는 천지대학교가, 이 사회가 허위와 위선, 부조리와 부패, 비겁함으로 오염돼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버지 양호익이 예수상을 부수어 오염을 몰아내고 마을에 건강함을 불러왔듯이 춘단도 거대한 코끼리 상을 무너뜨림으로 모든 것을 바로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 책은 가슴 아프고 그러면서 따뜻하다. 영일과 수탉 닭터의 이야기, 영일과 춘단이 서울에 올라와 터미널에서 본, 구경나온 사람이 백인데 아무도 그 원인을 알지 못하는 인질극에 대한 뉴스 이야기도 따지고 보면 생명력 가득한 자연과 누구도 알 수 없는 요지경 세상에 대한 비유일 것이다. 이미 세상을 떠난 작가의 재능이 너무 아깝다. 오래도록 우리 곁에 머물며 재미있고 따뜻하고 그러면서 가슴 아프고 생각할 것들을 뒤에 많이 남기는 이야기들을 더 써주었더라면 참 좋았을 텐데 말이다. 나를 오염시키고 있는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나의 쓸모와 건재함을 과시하고 싶은 욕심에 흔들리던 때였다. 진짜 나를 가리고 있는 내 안에 있는 거대한 코끼리 상을 무너뜨려도 좋은 나이가 되었다는 것을 이 책 덕분에 알게 되었다. 하늘에 있는 작가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 그란디 엄메여, 만약에 그 교수 선생 말이 옳다고 치면, 엄메도 큰오빠랑 작은오빠랑 나랑 춘애랑 준수한테 착취당한 거요? 엄메도 엄메가 모르는 사이에 우리한테 옷이랑 신발이랑 다 빼앗기고 벌거숭이가 된 거요? 그라믄 나도 도둑이고 강도인 거요? 아이고, 나는 모르것네.참말로 복잡하구만.
.....근디 엄메요, 그냥 나는 미안허네. 착취고 뭐고를 떠나서 엄메한테 그냥 미안허네.
오늘은 말이 길어졌지라. 그냥 하는 말이오. 120~121쪽

소장의 무례한 언동이 거슬리기는 했지만 다른데서 청소일하는 사람 이야기를 들으니 아예 이름 대신 개, 소, 돼지, 말이라고 부르며 때리는 소장도 있다고 했다. 그에 비하면 이 사람은 아직까지 욕은 하 하지 않는가. 때리지만 않는다면 욕을 듣는대도 한 귀로 넘기면 될 일이지. 험한 말 좀 듣는다고 뭐가 닳는 것도 아닌데..... 갑작스럽게 궁지에 내몰라 자신의 처지에 어떻게든 위로하기 위해 11퍼센트가 삭감된 임금을 이해해보고, 버릇없는 소장을 이해해보고, 자신이 개 소 돼지라고 욕을 듣는 상황까지 이해해보려던 미화원들은 어느덧 얼마 남지 않은 인격까지 다 버리고 진창인 밑바닥을 향해 스스로 몸을 던지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208쪽

학교에서 미화원들이란 보이지 않을수록 좋은 존재였다. 무난한 소장, 까다로운 소장, 김종래 같은 소장, 어떤 소장이 오든 미화원들이 지켜야 할 기본강령은 깨끗한 시설 유지와 최대한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일하는 것이었다. 236쪽

춘단은 물어보고 싶었다. 어제까지 저 그림자 속에 놓여 있던 그 많은 팻말은 어디로 갔는지, 천명의 서명을 받는다던 공책은 누가 가져갔는지, 이곳을 떠나선 갈 데가 없다고 외치던 사람들은 어디로 떠났는지, 그러나 대답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270쪽

사람의 운명이란 건,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일까. 하룻밤만의 생각으로 내리는 결정일까. 아니면 먼훗날, 소중한 무언가를 지킬 수 없는 순간에 맞닥뜨리게 되면, 부모도 모르게, 형제도 모르게, 친구도 모르게 자신의 발목을 자르고 스스로 뛰어내리겠다고 신에게만 조용히 고백하면서 살아온 사람들의 오래된 결심일까. 만약 그런 것이라면 삶에 미련을 가지도록 달콤한 말들로 꾀어보는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얼굴이 상해 보인다, 무슨 고민이 있느냐, 다 괜찮아질 것이다, 정도의 서툰 걱정이 무슨 위안이 될 수 있을까. 그 깊고 차가운 물 앞에 섰을 때는 이미 이 밤이 나의 마지막 밤이라고 결정지어놓은 것일 텐데. 284~285쪽

그러나 소장은 진실을 알면서도 그것과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진실을 눈앞에 펼쳐놓고 보여줘도 똑바로 볼 의지가 없는 사람이라면 그 고집 센 무지 앞에서는 황금 들녘이 황무지로 둔갑하고 찢어진 모자를 쓴 허수아비가 경찰관 노릇을 하는 것 아닌가. 314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 / 2009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던 1990년대 초반에 동네의 작은 책방에서 <상실의 시대>를 만났었다. 갑자기 낯선 일본 작가(그때만 해도 하루키는 낯선 작가였다)의 소설책을 골랐던 이유는 기억나지 않는다. 제목에 끌렸던 게 아닐까 추측할 뿐이다. 개인적으로 여러 가지로 힘들고 불안했던 시기였으니까 상실이라는 말이 품고 있는 놓쳐버린 것에 대한 그리움과 시대라는 말이 불러일으키는 다시 돌이킬 수 없다는 체념 같은 것들을 제목에서 느꼈던 것 같다. (<상실의 시대>의 원제목은 <노르웨이의 숲>이지만 다 읽고 나서는 제목이 무엇이든 상관 없을 만큼 인상깊었다.)


그 때 읽었던 <상실의 시대>는 말할 수 없이 좋았지만 그 이후로 하루키의 작품을 찾아 읽지는 않았다. 내가 읽은 것이라곤 <스푸트니크의 연인>, <1Q84>,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크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정도다. 누군가는 <먼 북소리>가 좋다고 했고, 누군가는 하루키 하면 <해변의 카프카>라고 했고, 다른 누군가는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를 꼭 읽어 봐야한다고도 했지만, 내가 특별히 하루키를 피하는 것도 아닌데 읽어볼까 하면서도 자꾸 다른 책들한테 밀려나곤 했다.


그런 내가 어제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읽었다. 하루키의 에세이는 처음이었다. 2013년에 <1Q84>를 읽고 리뷰에 아주 아주 단단한 밀도와 강도를 가진, 모서리가 날카롭게 빛나는 삼각뿔을 만지고 있는 느낌이었다라고 적었는데, 이 책을 읽고는 음,,,, 사람이 그런 사람이구나, 그래서 그런 글들을 쓸 수 있는 거구나 하고 수긍하고 인정하게 되었다.


아테네에서 마라톤까지를 이글이글한 상상초월의 더위를 견디며 달리고, 100km의 울트라 마라톤과 25번의 풀마라톤을 완주하고, 사이클과 수영과 달리기를 해야 하는 트라이애슬론에 도전하고, 그러기 위해서 매일매일 성실하게 달리고, 매일매일 더 열심히 글을 쓰는 하루키는 주어진 개개인의 한계 속에서 조금이라도 효과적으로 자기를 연소시켜 가는 일, 그것이 달리기의 본질이며. 그것은 또 사는 것의(그리고 나에게 있어서는 글 쓰는 것의) 메타포라고 말하고 있다. 근성 있고, 열심히 사는 사람이다. 그의 문학적 성과를 떠나서 그의 근성과 삶에 열심인 모습만으로도 본받을 만한 사람이다.


어떤 분이 하루키는 소설보다 에세이가 더 좋다고 했는데, 이 책을 읽고 나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하루키의 소설을-겨우 몇 권 읽었을 뿐이지만- 읽을 땐 힘이 잔뜩 들어가지만 에세이는 좀 편안히 읽힌다. 하루키의 생각과 느낌과 삶을 대하는 태도 같은 것들을 정직(?)하게 읽어나갈 수 있다.


하루키의 대부분의 작품을 거의 다 읽은 남편의 얘기로는 하루키는 재즈나 위스키에 대해서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 사람이라고 했다. 이미 재즈나 위스키를 가지고 쓴 글들이 책으로도 나와 있다고 했다. 언젠가 지인들을 집에 초대해서 술자리를 가졌을 때 가까운 지인들과 함께인 데다 술기운까지 올라와서 한껏 기분이 좋아진 남편이 하루키 때문에 내가 싱글몰트 위스키를 마시게 됐지하며 창고에서 꺼내온 위스키 뚜껑을 따고 술잔들을 채우던 게 생각난다. (우리남편은 하루키의 달리기보다는 싱글몰트 위스키가 더 인상적이었나 보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고 그 이야기를 글로 잘 쓸 수 있는 사람이라는 면에서 하루키는 참 부러운 사람이다. ‘고통스럽기 때문에 그 고통을 통과해가는 것을 기꺼이 감수하는 것에서 자신이 살고 있다는 확실한 실감을, 적어도 그 한쪽 끝을, 우리는 그 과정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256)라고 생각하면서 점점 더 자신을 강하게 단련시키는 모습이 아름답다.


트라이애슬러를 준비하기 위해 사이클 훈련을 하는 하루키가 페달을 밟으며 똑같은 일의 끝없는 되풀이라고 말하는 부분이 나온다. 세상의 거의 모든 일들이 그 지겨운 똑같은 일의 끝없는 되풀이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걸 어른이 되어서야 알았다. 이 책이 나온 게 2007년이다. 그로부터 10년의 시간이 흘렀다. 1949년생인 하루키는 어느새 일흔의 나이가 되었을 텐데, 아직도 매일매일 달리고 있을까?  아마 하루키는 여전하게 세상에 있는 어느 길을 꾹꾹 열심히 밟으며 달리고 있을 것이다. ‘똑같은 일의 끝없는 되풀이를 오늘도 묵묵하고 성실하게 수행하고 있을 것이다

계속하는 것 – 리듬을 단절하지 않는 것, 장기적인 작업을 하는 데에는 그것이 중요하다. 일단 리듬이 설정되어지기만 하면, 그 뒤는 어떻게든 풀려 나간다. 그러나 탄력을 받은 바퀴가 일정한 속도로 확실하게 돌아가기 시작할 때까지는 계속 가속하는 힘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아무리 주의를 기울인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19쪽

내가 다른 누구도 아닌 ‘나’라는 것은, 나에게 있어 하나의 소중한 자산인 것이다. 마음이 받게 되는 아픈 상처는 그와 같은 인간의 자립성이 세계에 대해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될 당연한 대가인 것이다. 40쪽

건전한 자신감과 불건전한 교만을 가르는 벽은 아주 얇다. 87쪽

만약 바쁘다는 이유만으로 달리는 연습을 중지한다면 틀림없이 평생 동안 달릴 수 없게 되어버릴 것이다 계속 달려야 하는 이유는 아주 조금밖에 없지만 달리는 것을 그만둘 이유라면 대형 트럭 가득히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가능한 것은 그 ‘아주 적은 이유’를 하나하나 소중하게 단련하는 일뿐이다. 시간이 날 때마다 부지런히 빈틈없이 단련하는 것. 116~117쪽

개개의 기록도, 순위도, 겉모습도, 다른 사람이 어떻게 평가하는가도, 모두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나와 같은 러너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하나의 결승점을 내 다리로 확실하게 완주해가는 것이다. 혼신의 힘을 다했다, 참을 수 있는 한 참았다고 나 나름대로 납득하는 것에 있다. 거기에 있는 실패나 기쁨에서, 구체적인-어떠한 사소한 것이라도 좋으니, 되도록 구체적으로-교훈을 배워 나가는 것에 있다. 그리고 시작과 세월을 들여, 그와 같은 레이스를 하나씩 하나씩 쌓아가서 최종적으로 자신 나름의 충분히 납득하는 그 어딘가의 장소에 도달하는 것이다. 혹은 가령 조금이라도 그것들과 비슷한 장소에 근접하는 것이다. 258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단순한 열정 (무선) -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아니 에르노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불륜의 사랑


이 소설은 올여름 나는 처음으로 텔레비전에서 포르노 영화를 보았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처음부터 너무 지나치게 자극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작가는 정사 장면을 요즈음엔 거리에서 악수를 나누는 장면만큼이나 쉽게 볼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하면서 아마도 이번 글쓰기는 이런 정사 장면이 불러일으키는 어떤 인상, 또는 고통, 당혹스러움, 그리고 도덕적 판단이 유보된 상태에 줄곧 매달리게 될 것 같다고 설명한다.


이 책은 연하의 유부남 A와 열정적인 사랑을 나눈 작가의 실제 경험을 적은 67쪽 정도(첫 문장을 9쪽부터 시작하고 있으니까 실제로는 60쪽도 되지 않는다)의 짧은 소설이다. 작품해설과 옮긴이의 말, 작가 연보까지 다 합쳐도 100쪽을 넘지 않는다. 52쪽에 언제인지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지만 A가 떠난 지 두 달쯤 지난 후부터 작년 9월 이후로 나는 한 남자를 기다리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나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라는 글이 나오는 걸 보면 앞의 포르노 정사 장면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덧붙여진 게 틀림없다. 불륜의 사랑에 대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포르노의 정사 장면을 마주하는 것만큼 당혹스럽고 부도덕하다는 느낌을 받는다는 걸 염두에 둔 것일까. 도덕적 검열, 가치판단의 잣대를 유보한 채로 작가는 쓰고, 독자는 읽을 수 있기를 바랐을 것이다.


언젠가 <새벽 세 시, 바람이 부나요?>라는 책으로 주부들이 모여 독서모임을 한 적이 있었다. 주부들 대부분이 남녀주인공의 심리나 갈등, 작가의 의도나 문체, 이야기의 전개방식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고, 마치 그 소설이 실제 일어난 일인 것처럼 한 가정의 아내이자 엄마인 여자 주인공의 무분별함과 무책임함을 꾸짖었다. 심지어 그 여주인공은 육체적 불륜은 저지르지 않았는데도 마치 자신들의 완전무결한 도덕성을 과시하려는 듯 맹렬히 비난했다.


<세벽 세 시~>와 마찬가지로 이 책도 독자의 도덕성이 얼마나 확고한지를 검증하기 위한 소설이 아니다. 나이든 한 여자가 연하의 유부남과 사랑을 나누며 느끼는 열정과 불안과 질투와 방황, 그것을 모두 포함한 자신의 삶과 시간들에 대해 적은 것이다. 도덕성은 각자의 삶을 통해 증명하도록 하고, 이 소설 속에서는 여자(작가)의 마음에 집중하는 편이 좋다. 이 소설을 읽는 동안은 불륜의 현장을 목격한 아내 혹은 남편의 마음은 잠시 접어두자. 그런다고 해서 당신의 도덕성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나이든 여자의 사랑


어렸을 때 내게 사치라는 것은 모피 코트나 긴 드레스, 혹은 바닷가에 있는 저택 따위를 의미했다. 조금 자라서는 지성적인 삶을 사는 게 사치라고 믿었다.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한 남자, 혹은 한 여자에게 사랑의 열정을 느끼며 사는 것이 바로 사치가 아닐까.’ 67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다. 사랑의 열정이 사치가 되는 나이, 혹은 그 사치조차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나이를 자각하는 마지막 문장이 쓸쓸하다.

작가는 A가 떠난 후의 공허감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날이 밝아도 일어나고 싶지가 않았다. 아무런 계획이 없는 무의미한 하루가 내 앞에 버티고 있었다. 시간은 더 이상 나를 의미 있는 곳으로 이끌어주지 못했다. 단지 나를 늙게 할 뿐이었다.’

사랑의 마법이 풀리고 열정이 사라진 뒤 늙어버리고 마는 여자. 그녀 앞에 놓인 시간들은 빛깔도 향기도 없이 칙칙하고, 의미 없이 공허할 뿐이다. 나는 이 문장을 앞에 두고 한참을 책 앞에 머물러야 했다. 단지 늙어갈 뿐인 내가 그 문장 안에 웅크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이는 나를 통과한 시간을 세는 단위다. 어느 광고에서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할 뿐이라고 했지만 사람들이 나이값을 매기는 요구와 조건은 까다롭고 엄정하다. 어떻게 행동하고 말하는 것이 나의 나이값을 적절히 지불하는 것인지 혼란스러울 때가 많다. 게다가 내 앞에는 점점 나빠질 게 분명한 신체기능과 질병의 위험, 노인빈곤층으로 몰락할지도 모른다는 불안 같은 것들이 배치되어 있다. ‘나이는 숫자 이상의 것을 말한다. 아니 에르노가 A와 사랑하면서 느끼는 고통과 불안 중에는 분명 그녀의 나이에 기인한 것도 있을 것이다. 때문에 나이든 여자의 사랑은 그 자체만으로도 분수에 맞지 않는 사치가 되어버리고 만다. 분수에 맞지 않는 사랑이라서 언젠가 그가 떠날 것을 안다. 슬프다.

 

이야기하는 법, 기억하는 법. 존재하는 법


그녀가 사랑 이야기를 서술하는 방식은 새로웠다.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열정적 사랑이야기라기 보다 그를 사랑한 나에 대한 이야기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 같다. 관찰자의 집요한 시선으로 사랑에 빠진 의 내면을 직시하고, 성실하고 섬세하게 적어나간다. 사랑에 빠져 이성을 잃고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만큼 허우적거리는 여자와 관찰자로서 기록하는 여자가 동일인물이라는 게 신기하다. 사랑하는 연인 사이의 대화라든가 폭발적인 감정선 같은 것이 별로 없어서 생생한 러브스토리를 기대하는 독자라면 실망할 수도 있겠지만 사랑에 빠져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다.


지나간 사랑이 남겨둔 흔적과 의미들, 여전히 해석이 불가능한 기호들과 시간들을 글로 붙잡아두지 않으면 현재의 라는 존재가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작가는 A와의 사랑을 복기한다. 자기 내면에 대한 글들이 명료하다. 작품해설 글을 읽어보니 이 작가의 작품들이 모두 그녀의 삶을 쓴 것들인가 보다. 아버지와 어머니, 자기가 태어나기도 전에 죽은 언니와 연인들이 그녀의 작품이 되었다고 한다. 과거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작가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는 작가가 자기 존재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방식인 것 같다.


작가의 작품 중에 <삶을 쓰다>라는 책이 있다. 작가의 열두 편의 자전 소설과 사진, 미발표 일기들을 담은 선집이라는데, 생존하는 작가로는 최초로 갈리마르 콰도르 총서에 수록되었다고 한다. <삶을 쓰다>라니... 작가의 작품들이 모두 그녀의 이었고 그녀의 존재방식이었나 보다. 한 번 읽어보고 싶지만 아직 국내에 번역 출판이 되지 않은 것 같다

나는 그가 도착하기 직전에 시계를 풀어놓고 그 사람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차지 않았다. 반면에 그는 언제나 시계를 차고 있었다. 그리고 난 머지않아 그 사람이 조심스레 시계를 훔쳐볼 시간이 다가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
그러다가 문득 "도대체 현재란 어디에 있는 걸까?"하고 나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16쪽

우리가 지금까지 몇 번이나 사랑을 나누었는지 헤아려보았다. 사랑을 할 때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이 우리 관계에 보태어진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동시에 쾌락의 행위와 몸짓이 더해지는 만큼 확실히 우리는 서로 조금씩 멀어져가고 있었다. 우리는 욕망이라는 자산을 서서히 탕진하고 있었다. 육체적인 강렬함 속에서 얻은 것은 시간의 질서 속에 사라져갔다. 17쪽

날이 밝아도 일어나고 싶지가 않았다. 아무런 계획이 없는 무의미한 하루가 내 앞에 버티고 있었다. 시간은 더이상 나를 의미 있는 곳으로 이끌어주지 못했다. 단지 나를 늙게 할 뿐이었다. 47쪽

그 사람이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리고 지금은 그 모든 일들이 다른 여자가 겪은 일인 것처럼 생소하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사람 덕분에 나는 남들과 나를 구분시켜주는 어떤 한계 가까이에, 어쩌면 그 한계를 뛰어넘는 곳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
나는 내 온몸으로 남들과는 다르게 시간을 헤아리며 살았다.
나는 한 사람이 어떤 일에 대해 얼마만큼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지도 알게 되었다. 숭고하고 치명적이기까지 한 욕망, 위엄 따위는 없는 부재, 다른 사람들이 그랬다면 무분별하다고 생각했을 신념과 행동, 나는 이 모든 것들을 스스럼없이 행했다. 그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세상과 더욱 굳게 맺어주었다. 65쪽

어렸을 때 내게 사치라는 것은 모피 코트나 긴 드레스, 혹은 바닷가에 있는 저택 따위를 의미했다. 조금 자라서는 지성적인 삶을 사는 게 사치라고 믿었다.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한 남자, 혹은 한 여자에게 사랑의 열정을 느끼며 사는 것이 바로 사치가 아닐까. 67쪽


댓글(2)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18-03-14 09: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이 소설 엄청 좋아하는데요, 이 리뷰를 읽으니 이 소설을 다시 읽고 싶어지네요. 이미 두 번이나 읽었는데도 이 리뷰의 인용문을 보니 다 새롭고 또 명문이란 생각이 들어요. 말씀하신 것처럼 이 소설은 그 남자와 나의 사랑이야기 라기 보다는, 그를 사랑한 ‘나‘의 이야기지요. 정확한 표현이라 생각됩니다. 특히나 47쪽의 인용문 좋네요.


날이 밝아도 일어나고 싶지가 않았다. 아무런 계획이 없는 무의미한 하루가 내 앞에 버티고 있었다. 시간은 더이상 나를 의미 있는 곳으로 이끌어주지 못했다. 단지 나를 늙게 할 뿐이었다.

섬사이 2018-03-14 22:42   좋아요 0 | URL
반가워요, 다락방님, 정말 오랜만이에요. 잘 지냈어요?
알라딘 서재를 2년이나 떠나 있다가 돌아왔는데, 다락방님의 댓글이라니! 감격스럽네요.

이 책, 정말 매력적이었어요. 여자의 마음이 너무 잘 묘사되어 있어서 불륜이고 뭐고간에 한 여자의 사랑이라는 것에 공감하며 읽었던 것 같아요. 그 47쪽의 문장은 저를 멍하게 만들었어요. 갑자기 슬퍼지고 쓸쓸해져서 책을 읽고 있지 않은 동안에도 자꾸 생각났어요.

다락방님과 책에 대해 댓글을 나눌 수 있어 기뻐요!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8
라우라 에스키벨 지음, 권미선 옮김 / 민음사 / 200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요즘은 연이어 소설을 읽었다. 소설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만, 소설만 연이어 읽어댄 데에는 현실도피라는 불순한 의도가 있었던 것 같다. 일에도 지치고 사람에게도 지치고 사람들 사이에서 오가는 말에도 지쳐 있었다. 한동안 잠수를 타거나 아니면 모든 걸 두고 어딘가로 훌쩍 여행이라도 떠나거나.. 했으면 좋겠지만 그럴만한 여건이 안될 때,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소설 속에 푹 빠져 버리는 거다.

의기소침 무기력해져 있는 내게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이라는 제목은 떨어진 당을 보충해 주고 '원기회복! 활력충전!'을 보장하는 한 병의 드링크제처럼 느껴졌다. 정말로 이 책은 태양이 시뻘겋게 작렬하는 바다에서 갓 건져올린, 은빛 비늘을 눈부시게 반짝이며 펄떡펄떡 튀어오르는 크고 힘센 물고기 같았다.

 

'백리향 냄새와 월계수 잎사귀 향, 고수 향, 끓는 우유 향, 마늘 향과 함께 파스타를 넣은 수프 냄새가 진동을 하는 가운데 부엌 식탁 위'에서 태어난 티타는 그녀의 탄생이 예고했던대로 요리에 마술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신비한 재주와 능력을 타고 났다. 책을 읽어가면서 티타는 우리가 억눌러온 아름다운 본성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인간의 식욕과 성욕. 식사 예절이라든가 체면이라든가 하는 것들 때문에 우리가 가진 탐욕스러운 식욕을 우아하게 포장하고, 성욕 또한 사회적 제도와 도덕적 규범의 틀 안에서 감춰거나 어두운 음지로 숨는다.  티타도 요리는 '요리법'이라는 틀에, 성욕은 '막내딸은 결혼하지 않고 어머니를 모셔야 한다'는 관습에 갇혀 있다.

 

 한편 티타도 페드로에게 기다리라고, 자신을 멀리 데려가 달라고 소리 지르고 싶었다.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곳으로, 따라야만 하는 관습이 없는 곳으로, 어머니가 없는 곳으로 데려가 달라고 소리 지르고 싶었지만 목구멍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말은 목구멍에서 뒤엉켜서 밖으로 나오기도 전에 사그라졌다. (65쪽) 

 

티타는 이런 기분을 잘 알았다. 요리법에 나온 대로 따르지 않고 요리할 때 느끼는 두려움과 비슷한 기분이었다. 그럴 때마다 티타는 마마 엘레나가 기필코 틀린 부분을 찾아내서 자기가 만든 음식을 칭찬하기는커녕 조리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고 호통을 칠 거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어머니가 부엌과.... 그리고 인생에서 무조건적으로 강요하는 법칙들을 깨고 싶은 유혹도 뿌리칠 수 없었다.

(208~209쪽)

 

티타의 어머니 마마 엘레나는 티타를 억누르는 감시자이자 억압자이다. 크고 강하다. 그런 어머니에게 억눌려진 티타는 마법적인 요리를 통해 해방을 꿈꾼다. 사람들은 티타가 만든 음식을 먹고 타오르는 성적 욕구를 억누르지 못하기도 하고, 사랑하는 페드로가 로사우라와 결혼할 때에는 티타가 만든 음식이 신랑신부를 포함 하객들 전체의 구토를 유발하기도 했다.

싱싱한 성욕과 식욕은 아름답게 묘사되고 있다. 언니 헤르트루디스는, 티타가 페드로에게 받은 장미꽃으로 요리한 음식을 먹고 온몸에서 장미향을 풍기며 알몸으로 벌판으로 달려나간다. 열에 들떠 장미향을 풍기며 달려오는 헤르트루디스를 혁명군 장교가 말에 태워 떠난다. 황당하다고 할 수 있는 이 장면을 책에서 얼마나 꿈같이 아름답게 그려놓았는지.

하지만 그 후에 창녀촌에서 살게 된 헤르트루디스를 타락한 비운의 주인공으로 그리지 않았다는 것이 나는 더 마음에 들었다. 헤르트루디스는 책의 말미에서는 혁명군의 여대장으로 등장하여, 페드로와 존브라운 박사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티타에게 훌륭한 조언을 해주는 씩씩하고 밝고 건강한 인물로 다시 등장하는 것이다.

 

페드로와 티타의 관능적이고 열렬한 사랑도 인상적이었지만 난 존 브라운 박사의 따뜻하고 편안한 사랑도 좋았다. 이건 분명 내가 나이 들고 늙었다는 증거라고 볼 수 있을 텐데, 아무튼 브라운 박사는 지적이고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마마 엘레나가 규범과 관습의 폭력적인 잣대를 들이대는 것과는 엄연히 다른, 이해와 관용의 따뜻함이다.  책을 읽으면서 마마엘레나와 존 브라운 박사를 비교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생각해보니 나는 자주 이성을 '사회적 규범을 따른다'는 것과 혼동했던 것 같다. 마마 엘레나와 존 브라운 박사가 천지차이의 인물인 것처럼 '지적이고 이성적'이라는 것과 '사회적 규범과 관습'은 서로 다른 것일 수 있다는 게 당연한데 말이다.

 

브라운 박사는 말을 하고 있다고 해서 성냥을 만드는 과정을 소홀히 하지는 않았다. 그는 정신 활동과 육체적 활동을 아무 문제 없이 별개로 분리할 수 있었다. 손놀림을 멈추거나 실수하지 않으면서도 삶의 가장 심오한 철학적 문제까지도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티타에게 계속 얘기를 하면서도 성냥 만드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123쪽)

 

어쩌면 그는 성냥 만드는 일을 멈추고 티타를 애무했어야 했는지도 모르겠다. '삶의 가장 심오한 철학적 문제'같은 건 집어치우고 열렬한 사랑의 말을 쏟아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야 티타의 마음을 사로잡고 사랑을 이룰 확률이 더 높아졌을 것이다. 그가 티타의 사랑을 얻어내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나는 브라운 박사가 좋았다. 티타와 결혼할 수 없다고 티타의 언니 로사우라와 결혼해서 이것도 저것도 아닌, 찌질하다면 찌질하다고 할 수 있는 페드로 보다는. 하지만 티타는 젊고 관능적이고 아름답기 때문에 페드로를 선택한다.

 

이 책에서 다루는 두 가지 욕구, 식욕과 성욕은 억누름을 강요받는 동시에 생명을 이루는 기본적인 욕구들이다. 조카에게 젖을 물리자 처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젖이 쏟아져 나온다거나, 또는 마마 엘레나의 망령을 물리치자 다시 생리가 시작되는 것 같은 장면들을 통해서 티타는 생명과 풍요의 여신 같은 모습도 보여준다. (어려서부터 음식에 대해 까다롭고 잘 먹지도 않았던 로사우라가 뚱뚱하고 입냄새가 심한 인물로 묘사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티타는 밀이나 콩, 자주개자리의 씨앗은 자기 모습이 완전히 일그러지고 바뀌는 것도 아랑곳 않고 계속 싹을 틔운다고 생각했다. 이제 티타는 씨앗이나 곡물들이 새 삶을 주기 위해 자기 몸을 터트려 가며 껍질을 벌여 물을 깊이 빨아들이는 게 놀랍고 존경스러웠다. 씨앗이나 곡물들은 자기 몸속에서 첫 번째 뿌리 끝이 삐죽 튀어나오는 것을 너무나도 자랑스러워하며, 자신의 원래 모습이 망가져도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새싹을 당당하게 세상에 보여주었다. 티타는 자신도 그런 단순한 씨앗이었더라면 하고 바랐다. 그러면 자기 몸속에서 뭐가 자라고 있는지 아무에게도 얘기할 필요가 없고, 사회적 비난을 감수한 채 부른 배를 안고 다니지 않아도 되었다. 씨앗에게는 이런 고민이 없었다. 특히 무서워해야 할 어머니도 없었고, 도덕적으로 비난할 사람들도 없었다. 물론 물리적으로는 티타에게도 어머니가 없었다. 그렇지만 마마 엘레나가 내린 저주가 언제 어느 때 저승에서 떨어질지 불안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208쪽)

 

따지고 보면 섹스를 하고 음식을 먹는 행위 자체야 무슨 잘못이 있으랴.  우리가 씨앗이 아닌 게 문제일 뿐.

 


댓글(4)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레이야 2014-12-01 1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섬사이님, 올해 마지막 달의 첫날에 이 리뷰를 보게 되네요.
우리가 씨앗이 아닌 게 문제일 뿐... ^^
좋은 날 보내세요^^

섬사이 2014-12-03 15:55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반가워요~!!!
12월 첫날 프레이야님이 제 서재에 찾아와 주시다니
요즘 뭔가 추욱 처져있었는데, 기운이 나네요. ^^
프레이야님도 좋은 날 보내세요.

알맹이 2014-12-01 1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어보고 싶어져요.^^

섬사이 2014-12-03 15:57   좋아요 0 | URL
네, 재미있고, 신비롭고.. 읽기 좋은 책이에요.
날이 춥지만 책과 함께 따뜻한 시간을 보내기엔 더 좋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