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가 가고 다시 또 한 해를 맞이한다.

오늘 하루와 어제가 별 다를 게 없지만 내가 뭘하고 살았나, 앞으로는 어떻게 살까를 생각하게 한다.

한 살 한 살, 나이를 더할수록 새해 다짐은 점점 소박해지지만.

 

알라딘 서재를 오래 비워서일까. 비워두었던 시간을 한 번 정리하고 다시 시작해야 할 것만 같았다. 꽤 오래 무심하게 비워둔 것 같지만 작년 한 해를 정리하는 것으로 공백으로 쌓인 먼지들을 말끔히 털어보기로 한다. 

 

1. 서울 그림책 <산>, <강>, <궁>, <길>

 

 도서관에서 '서울, 그림책이 되다'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서울시 지원을 받은 프로젝트였는데 <산>은 도서관에서 오랫동안 책고르미 활동을 같이 해왔던 엄마들과 한 명의 아빠, 그리고 우리집 큰딸이 함께 참여했다. 미술을 전공한 사람, 미술을 전공하지는 않았지만 그림을 공부하고 그리는 사람, 정식으로 그림을 공부한 적은 없지만 꾸준히 밥먹듯 그림을 끄적여온 사람, 그림을 별로 그리며 살진 않았지만 그림에 탁월한 재능이 있는 사람, 그리고 나처럼 뜬금없는 서툰 그림을 그냥 열심히 그림 사람이 함께 뭉쳐서 작업을 했다. 작년에 일어난 일 중에 내 개인적으로는 가장  큰 일이었던 것 같다.  그림을 그리며 밤을 새우는 황홀한 경험도 맛보았다. 얼마 전에 그 결과물로 더미북을 서울 북페스티벌에 전시하고 서울시에 제출했다.

<강>은 4,5년 동안 도서관에서 '색깔아이'라는 미술품앗이 활동을 해왔던 초등 저학년 아이들이 모여서 작업했다. 우리 막내가 참여한 그림책이다. 한강을 주제로 매주 모여 작업하고, 숙제를 받아서 집에서 그림을 그려가기도 했다. <강>도 마찬가지로 북페스티벌에 전시되고 더미북은 서울시에 제출했다.

<궁>은 초등 고학년 아이들이, <길>은 작가팀이 맡았다.

 

 

 

 

2. 요리사가 되고 싶다던 울아들

 

울아들은 작년에 고3이었다. 고1때부터 요리대회에 한 번 나가보고싶다고 했었는데 고3인 지난해에 대회에 출전했다. 울아들은 공부에는 워낙 관심도 흥미도 없는 스타일이라 일찌감치 대학 욕심은 저도 나도 버리고 있었더래서 마음 편히 나가보라고 했다. 물론 대회 참가 비용은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어떤 사람은 나와 아들을 무척 희한하게 보기도 했지만, 난 그다지 마음을 쓰지 않았다. 공부는 재능이다. 미술이나 음악이나 체육이 어느 정도 재능을 타고나야 하는 것처럼 공부에도 재능 있는 사람이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내 자식이 공부에 재능이 없음은 좀 안타까운 일이지만, 재능이 없음을 일찌감치 알고 마음을 비운 덕분에 나와 아들 사이는 꽤 친밀한 편이다.

어쨌든 대회에 출전해서 3일 낮밤을 제대로 잠도 못 자고 열심히 한 덕분에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대회수상경력이 대학 가는데 그다지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았지만 아들에게는 큰 경험이 된 것 같다. 대학은... 수도권 지방대 호텔외식조리학과에 진학한 것으로 만족....은 아니지만 순응하고 있다.

12월 중순부터는 맥노날드 주방에서 알바를 하고 있다.  일주일에 4번. 내가 "뭘 배우든지, 아니면 봉사활동을 하든지, 그것도 아니면 알바라도 해! 난 놀고 먹는 꼴은 못본다"고 했기 때문이다. 좀더 그럴듯한 음식점으로 알바를 다녔으면 좋으련만 아직 나이에 걸린다. 자식을 알바현장에 내놓고 나니 마음이 짠하다. 아들이 알바하러 가 있는 동안에는 나도 집에서 편히 쉬고 있기가 미안하다. 자식을 일터에 내보낸 엄마의 심정을 생전처음 맛보았다.

 

 

 

 

 

3. 상하이에서 살다 온 큰딸

 

재작년,, 벌써 재작년이 됐구나,, 에는 여름방학 때 상하이에 가서 5주 정도 있었는데 작년에는 2학기를 통째로 상하이에서 살다가 왔다. 간지 두 달쯤 되니까 중국 음식에도 적응을 하고 살만하다면서 씩씩한 모습을 보여줘서 마음을 놓았다. 상하이에 있는 재경대에 교환학생으로 갔던 건데, 딸아이가 들어간 반은 정원 20명에 13개국의 아이들이 모여 있어서 무척 새롭고 재미난 경험을 하고 온 것 같다. 라오스, 인도네시아, 태국, 러시아, 미국, 스페인, 이탈리아, 베트남, 일본... 등등의 여러 나라 아이들이 모두 중국어로 대화하는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재미있었다. 돌아온 딸은... 뭐랄까.. 좀 더 자신감있어진 것 같기도 하고, 들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돌아와서도 하루하루를 즐기며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친구들을 만나고, 이런 저런 일들에 참여해서 계획하고 실천해가고 있다. 3학년이 된 딸을 바라보는 내 마음은 마냥 좋지만은 않은데..

 

 

 

아, 울딸이 말하기를 중국 남자들이 꽤 가정적이고 자상한 편인데 그 중에서도 상하이 남자가 유명하단다. 아쉽게도 울딸은 상하이 남자 친구를 한 명도 사귀지 못하고 돌아왔다.  이런 좋은 기회를 그냥 날려버리다니!!!

 

 

4. 막내 딸..

 

우리 가족 중에 가장 바쁜 사람이다. 작년에는 성곽길을 완주했고, 농촌을 체험한다고 봄, 여름, 가을에 한 번씩 '신론리'라는 마을로 놀러 갔다. 도서관 옥상 텃밭을 가꾸었고, 그림책 작업을 했고, 스케이트를 배웠고, 이제 1학년 때부터 조르던 우쿨렐레를 배우는 중이다. 많이 자랐다는 게 보이는데,  나는 막내딸의 성장이 그렇게 기쁘지만은 않다. 이다음에 막내가 다 크고 나면 나는 심각한 '빈둥지 증후군'을 앓게 될지도 모른다.

 

 

 

 

5. 나는..

위의 모든 걸 함께 했다. 그리고 동국대에서 육아코치실무과정을 교육받았다. 왜? 그러게... 왜 했을까? 왜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별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내가 원했던 것과는 다른 방향의 교육이었지만 중간에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끝까지 했다. 앞으로의 내 삶에 그다지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는 도서관에서 유아이야기방을 맡는 계기가 되었다. 실습이라는 명목이었지만 내가 선택한 것이기도 했다. '겨울동안'이라고 말하고 시작한 일이지만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무엇이든 알고 시작한 일은 없었던 것 같다. 늘 하다 보니 이렇게 되어버린 일이 더 많았다. 그래서 해가 갈수록 새해 다짐은 더 소심해지나보다.  새해 작심을 선포하는 것도 민망할만큼.  그저 조용히 책 읽고 나 자신에게 집중하며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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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4-01-02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드님이 만든 저 요리는 무엇인가요, 섬사이님?

연말에 섬사이님의 글이 보여 좋았습니다. 2014년에는 좀 더 자주 뵙고 싶어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섬사이 2014-01-02 23:20   좋아요 0 | URL
저건 에피타이저와 메인요리인데요,

에피타이저는 '가리비 바닷가재롤과 성게알 드레싱'이구요,
메인요리는 '대파와 그뤼에르 치즈향의 안심 스테이크와
고르곤졸라 치즈 소스를 곁들인 제주산 갈치 살팀보카'랍니다. (에휴.. 어렵다...)
디저트 요리가 하나 더 있는데 그건 페이퍼에서 패쓰했습니다.

네, 2014년에는 자주 뵐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노력할게요.
언제 와도 늘 그 자리에 다락방님이 있어서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무스탕 2014-01-02 2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하는일의 특성성 전 일찌감치 전문가의 길로 들어서는 '애들'을 많이 봐요.
초등학생이 개인적으로 기술을 배우고 고2의 나이에 이미 갈 길을 정해서 3학년은 직업교육에 투자하고..
그런 애들을 보면 안스럽기도하고 기특하기도하고 부럽기도하고 그런 감정이에요.
아드님의 20대는 두루두루 만족으로 가득 찰 겁니다 ^^

섬사이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D

섬사이 2014-01-02 23:26   좋아요 0 | URL
고마워요. 무스탕님.
무스탕님한테 이렇게 좋은 덕담을 들으니 새해가 즐거울 것 같아요.

가끔,
세상엔 대학을 목표로 공부하는 아이들만 있는 건 아닌데,
세상은 그런 아이들만 있는 것처럼 돌아가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게 참 불공평하다고 느꼈었죠.
앞으로 많이 바뀌고 변해야 할 부분이겠지요.

무스탕님도 새해엔 더욱 행복하시고 건강하세요.

세실 2014-01-12 14: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가 직업을 선택할때 인기보다는 즐겁게 일할 수 있는 직업을 선택하는 것이 최고인듯요.
울 아이들 다른 재주가 없어서 공부 하지만 공부로 성공하긴 점점 힘들어요. ㅜ
미리 적성을 개발하는 것이 중요해요.
그런 의미에서 섬사이님도 자제분들도 멋져요~~~~

섬사이 2014-01-15 10:08   좋아요 0 | URL
그래도 이 사회는 공부 잘 하는 능력에 큰 의미를 두고 있잖아요.
그래서 아들녀석이 하겠다는 걸 지지하면서도 마음 한 켠은 늘 불안해요.
제가 멋져서 그런게 아니라 어쩔 수 없었던 부분이 더 커요.
 

지난 토요일, 8월에 교환학생으로 상하이에 갔던 큰딸이 돌아왔다. 4개월을 떨어져 지냈는데도 오늘 아침 나갔다가 들어온 딸을 맞이하는 것같은 이 기분은 뭘까. 큰딸은 귀국하기 며칠 전부터 집에 돌아갈 생각을 하니 마음이 설렌다며 좋아했는데 엄마인 나는 그냥 무덤덤했다.

남편은 한술 더 떴다. 인천공항에 딸을 마중가는데 좀 일찍 도착할 것 같다며 남편은 근처 을왕리 바닷가에 들러 일몰을 보자고 했다. 공항 주차비도 만만치 않을 거라는 생각에 그러자고 했는데 그날따라 바다 너머로 지는 해가 유난히 빛이 고왔다. 남편과 막내딸은 분위기를 만끽하며 해가 바다 밑으로 잠길 때까지 있자고 했다. 나는 좀 불안했다. 큰딸은 상하이에서 유심칩을 잃어버려서 휴대폰을 정지시켜놓은 상태라 공항에 도착하면 문자도 전화도 안되는 상황, 그래서 일찌감치 가서 엄마가 기다리고 있겠다고 약속을 했는데 남편은 바닷가를 떠날 생각을 안했다.

이제 그만 가자고 성화를 부려서 겨우 을왕리를 떠났다. 공항으로 가는 내내 남편은 아직 시간도 넉넉하고 석양빛도 좋은데 빨리 가자고 졸랐다고 타박이다. 하지만 웬걸, 공항주차장은 차들이 밀려서 주차할 곳을 못찾고 뱅뱅 돌아야 했는데 그 와중에 모르는 번호로 내 핸드폰이 울렸다. 불길한 마음에 받으니 아니나 다를까. 큰딸의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남편은 차에서 내리지도 못하고 계속 뱅뱅 돌고, 나는 내려서 딸이 있다는 게이트까지 달렸다. 그렇게 우리는 만났고, 우리집은 다시 5인가족이 복닥거리며 살아가는 집이 되었다.

 

도서관에서 월요일마다 열리는 유아이야기방을 겨울동안 맡아서 진행하기로 했다. 요즘 유아들은, 특히 어린이집에 다니는 유아들은 귀가시간이 4~5시 즈음.  그래서 유아이야기방은 5시부터 시작한다. 요즘 5시면 춥고 어둑어둑한 시간이다. 게다가 무료 오픈된 프로그램이다 보니 출석에 대한 부담이 가볍다. 당연히 이야기방에 오는 아이들이 많지가 않다.  그 당연함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서인지 오지 않은 아이들에 대한 서운함보다 온 아이들의 성의가 반갑고 고맙다. 책놀이활동 준비는 혹시나 모르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10명 정도의 분량을 준비하는데 어제는 딱 2명이 왔다.

독서지도니 독후활동이니.. 그런 거 딱 질색이었는데 하다보니 재미있다. 막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학년이 올라가면서 그림책과 조금씩 멀어졌는데, 유아이야기방을 준비하면서 다시 그림책과 가까워지는 것 같아 흐뭇하다. 그림책을 읽어줄 때 아이들의 반짝이는 눈동자를 보는 것도 즐겁고, 재미있는 장면에서는 어김없이 터지는 아이들의 웃음도 행복하다.

오늘은 한 아이가 나를 '착하고 예쁜 선생님'이라고 불러줬다. 겨울동안만 맡아 진행하기로 했는데 정들까 걱정이다.

 

일주일에 두 번정도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려 온다. 늘 내가 읽을 수 있는 양보다 훨씬 더 많은 책을 빌려오고, 다 읽지 못하고 반납을 하곤 한다. 지난 금요일에는 이정록 시인의 시집 2권과 동시집 4권을 빌리고, 유은실 작가의 새 책 <일수의 탄생>과 이현 작가의 <오, 나의 남자들!>, 보림에서 나온 '중국아동문학 100년 대표선' 시리즈 중 하나인 장자화의 <바다 마법서>를 빌렸다.

 

 

 

 

 

 

 

 

 

 

 

 

 

 

 

 

 

 

 

 

 

 

 

 

 

 

 

 

 

 

 

 

 

 

 

 

 

 

요즘 책 읽는 시간이 많이 줄었는데, 책 욕심만은 여전한 것 같다. 그래도 예전만큼 사놓고 쌓아두지 않으니 그게 다행이라면 다행. (그래도 여전히 조금씩 쌓아지고 있다. 다만 쌓아지는 속도와 양이 예전보다 줄었을 뿐..)

 

오래 전에 사놓고 아직 읽지 못한 책들이 많다. 살 때는 꼭 읽어야 할 것 같아서, 읽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샀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다른 책에 밀려서 혹은 다른 일들에 밀려서 존재감을 상실한 책들. 그런 책들을 보고 있으면 어쩐지 양심이 아프다. 나의 추한 물욕이 책으로 발현한다고 해서 아름다워지는 것은 아니니까. 이건 뭐, 지적 호기심이나 지적 욕구라고 예쁘게 포장해줄 수 있는 단계를 넘었다. 그저 나의 소비욕망이라고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그래서 내린 나름의 처방이 도서관이다.

도서관에서 낡은 책을 만나면 나말고 다른 누군가가 이 책을 많이 찾아서 읽었구나, 이 책을 읽으며 뭔가를 느끼고 배운 사람들이 있겠구나, 싶어서 더 반갑다. 읽고 싶은 신간을 희망도서로 신청하고 연락오기를 기다렸다가 그 책을 첫번째로 대출받아 읽는 것도 뿌듯하다.

 

크리스마스 이브가 다가온다. 오늘 막내딸은 자치센타에서 하는 영어강좌와 피아노 학원에서 여는 크리스마스 다과파티에 참석하신다. 그리고 저녁에는 2년동안 함께 해온 품앗이 모임 '피노키오' 아이들과 엄마들이 모여 도서관에서 조촐한 파티를 열 계획이다. 오늘 하루만큼은 막내딸이 거물급 인사다. 참석해야할 파티가 세 개나 된다. 크리스마스가 놀고 먹자는 분위기로 흐르는 것 같아 찜찜한 면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즐겨야 할 순간에 즐기지 못하는 것도 문제니까. 찜찜함은 다른 방법으로 해결하기로 하고 일단 크리스마스 파티를 즐기기로 한다.

싼타할아버지는 이제 막 우쿨렐레를 배우기로 한 막내딸에게 입문자용 우쿨렐레를 선물해주시기로 했다.  막내딸이 싼타 할아버지에게 선물받는 우쿨렐레로 나도 우쿨렐레를 배워볼까, 말까, 궁리 중이다.

 

모두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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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아이들은 두 손을 꼭 잡고 놓지 않았다. 해는 기울어 이미 어두워진 시간이었고, 낮동안 같이 실컷 놀았는데도, 나도 K의 엄마도 이제 집에 가야 한다고, 니들 왜 이러냐고 다그쳐도, 무슨 생각인지 아이 둘은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여덟 살 두 아이의 마음이 어이없기도 하고 예쁘기도 했다. 결국 나는

"K야, 그럼 우리집에서 저녁 같이 먹고 조금 더 놀래?"하고 K를 초대했다.

 

두 아이는 신이 나서 우리집으로 뛰어 들어갔고, 나는 서둘러 저녁을 준비했다. 뭐가 저리 재미있을까, 뭐가 저 아이들을 저렇게 다정하게 만들까. 저녁을 먹고 나서도 둘은 지칠 줄을 모르고 놀았다. 저 또래에 들어서면 이성친구끼리는 서로 노는 스타일이 달라지는데도 둘은 참 잘 어울려 놀았다. 9시쯤 K의 엄마가 K를 데리러 왔다. K는 작은 방으로 들어가 숨었다. 아직도 더 놀고 싶고, 같이 있고 싶다는 굳은 의지의 표명이었다.  두 손을 꼭 잡고 헤어지지 않겠다고 더 같이 있고 싶다고 몸으로 표현했던 두 아이는 그 날 밤, 우리집에서 함께 잤다.

 

4학년 때였나? 나도 그런 적이 있다. 좋아하는 친구의 집이 우리집과 정반대 방향이었는데 학교가 끝나고 헤어지기가 싫어서 나는 그 아이의 집까지 같이 걸어갔다. 그러면 그 아이는 다시 우리집까지 바래다 주고,  그렇게 그 아이와 우리집을 여러번 왔다갔다를 하다가 하늘에 노을이 번질 무렵에서야 학교 앞에서 손을 흔들며 헤어졌었다.

 

아직 어리고 순수해서 친구를 그렇게 좋아할 수 있는 것 같다. 그렇게 좋아한다고 몸으로 행동으로 완고하게 표현할 수도 있는 것 같다. 시간이 흐르고 성장하는 동안 사람에게 상처받고 실망하면서 사람에 대해 방어적으로 변해서 좋아해도 맘놓고 좋아한다 표현하지 못하고, 고도의 계산이 필요한 밀당의 기술을 적용하려고 들지만 아이들은 아직 순수함 그 자체로 친구를 좋아하는 거다.

 

아직도 두 아이는 함께 어울려 자주 논다. 어디 갈 일이 생기면 내 아이는 K도 함께 가는지 묻고, K는 또 우리 아이가 함께 가는지를 자기 엄마에게 묻는다. 어디 가는지, 뭘 하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함께 가는지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이럴 때 나는 아이들이 부럽다. 이렇게 쓸데없이 나이를 먹은 게 지겨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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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그 바다 앞에 섰을 때, 눈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당황하지 않았다. 퍼붓는 눈송이쯤, 뭔가 달콤한 추억거리를 만들기 좋은 근사한 배경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눈이 쌓이기 시작했고, 차가운 바람이 한적한 길을 나란히 걸어가는 우리의 어깨와 등에 눈송이를 실어날랐다. 어두운 겨울 저녁 흩날리는 눈송이들이 나트륨 가로등의 노란빛 속에서 꿈처럼 떠다니고 있었다.

 

우리는 뭔가 두서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끔씩 이야기가 끊어지고 잠깐의 침묵이 흐를 때도 있었다. 우리 사이에 이야기가 있든 침묵이 있든 그건 별로 상관이 없었다. 우리는 마지막이, 이별이 멀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 다시는, 우리를 우리라고 부르지 못하도록 영원히 갈라놓을 무언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걸 확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날 춤추듯 내리던 그 많은 눈송이들은 마지막 축제 같은 것이었다.

 

버스가 멈추고 문이 열렸다. 어둡고 한적하고 폭설이 내리는 길을 눈사람이 되어 걸어가는 우리를 안쓰럽게 여기고 버스기사가 정류장도 아닌 곳에서 버스를 세운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 버스를 타지 말고 더 걸으며 눈을 맞았어야 했다. 버스기사의 호의와 버스에 타고 있던 사람들의 시선을 무시했어야 했는데, 그러기엔 우리가 너무 어렸다. 어리석게도 버스에 올랐고 우리는 마지막을, 우리가 우리일 수 있는 시간을 더 단축시켜버린 것이다.

 

버스 안에서 우리는 더 이상 어떤 이야기도 할 수 없었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할 지도 알 수 없었다. 굳어버린 얼굴로, 그저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우리는 우리일 수 없었다. 그 길에서 버스에 올라타던 그 순간, 우리는 더이상 같은 길에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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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3-11-29 0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도 읽고 오늘도 한번 더 읽고 갑니다.
아름답고 또 안타까운 느낌이 들어서요. 안타까워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걸까요?

섬사이 2013-11-29 22:26   좋아요 0 | URL
아주 오래된 제 기억 속 한 장면이에요.
안타깝고 아름답지만
삶은 또 어쩔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니까요.
지금은 이렇게 무덤덤하게 꺼내놓을 수 있어요.
 

물고기 5마리에게 먹이를 주고 베란다 창을 열어 환기를 시킨다. 차가운 바람이 기다렸다는 듯이 집안으로 몰아친다. 으스스 추워 얼른 가디건을 찾아 입는다. 초겨울 햇빛은 너무 약하다. 1층인 우리집은 불을 켜지 않으면 하루종일 잿빛 유리를 통해 보는 것처럼 사물들이 또렷한 자기 빛을 잃는다. 이럴수록 나라도 또렷하게 정신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다. 뜨끈한 커피 한 잔으로 머리속을 맑게 해야지.

 

어제 읽은 어린이책 두 권과 미야자키 하야오가 쓴 『책으로 가는 문』이라는 책을 들고 책상 앞에 앉는다. 이 책들 속에 들어있는 문장들이 좀처럼 정리되지를 않는다. 일목요연하게 문장들의 맥을 짚어가야 하는데 요란하게 덜그럭거리며 차분히 가라앉지를 않는다. 애꿎은 커피만 홀짝거리고 있다.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아 스트레스를 받으면 난 먹을 것을 찾는다. 프로이트의 이론에 따르면 난 구강기에 욕구가 제대로 해결되지 않은 채로 이 나이까지 버텨온 건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어제 읽은 세 권의 책에 대한 나름의 결론을 내리자면 한 잔의 커피로는 턱없이 모자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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