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가 나는 날 내 친구는 그림책
미로코 마치코 글.그림, 유문조 옮김 / 한림출판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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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가 나는 날>.

이 책의 제목을 듣는 순간, '늑대가 난다구?'하는 호기심부터 툭 솟아났다. 갈필의 느낌이 그대로 전해지는 제목의 글씨를 보면서, 표지의 거친 터치로 그려진 동물들의 그림을 보면서, 어렴풋이 바람과 관계되는 내용일 거라고 예상을 했던 것 같다.

 

 

 

표지를 들추자 노란 바탕에 날아가는 하얀 새떼들이 면지를 가득 채우고 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늑대도 날고 새들도 떼를 지어 날아다니는 버라이어티한 일이 벌어질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이 책은 늑대가 나는 사건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이 책의 첫 문장은,

 

오늘은 바람이 세다.

휘잉 휘잉 세차게 분다.

 

이고, 펼친 양면에 가득히 사선으로 거칠게 그어진 붓자국들이 내 머리 속에 윙윙 바람을 일으킨다. 오른쪽 아래 머리카락을 온통 흩날리며 걷는 아이가 작게 그려져 있다. 이 책 속에서 내가 따라가야 할 아이다.

 

제목이 왜 <늑대가 나는 날>인지는 다음 면에서 알 수 있다. 아이는 바람이 세차게 부는 이유를 이렇게 이야기한다.

 

하늘에서 늑대가 뛰어다니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 느낌을 알 수 있었다.  올 여름 어느 밤에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바람이 세차게 분다고 해서 겁을 내지 않을 만큼 충분히 나이를 먹었기 때문에 난 좀처럼 듣기 어려운 커다란 바람 소리를 즐겼다.  밖에서는 바람이 미친 듯이 불고 있었는데 희한하게도 집안으로는 바람이 들어오지 않았다. 바람의 결이 베란다 샷시 창을 요란하게 쓸고 지나갈 뿐 집안의 공기는 얌전했다. 그 때 나도, 어디선가 맹수들이 몰려와 날뛰고 있는 것 같다고 느꼈던 것이다. 이 아이는 그런 시간을 보내고 있는 듯하다.

 

아이는 내내 혼자다. 엄마나 다른 가족들은 어디에 있을까. 이렇게 바람이 심하게 불고 천둥이 우는 저녁에. 난 오래된 엄마의 습성으로 책 속 아이를 걱정하지만 아이는 걱정도 불안도 두려움도 내색하지 않는다. 아이는 상상으로 그 모든 불안과 두려움을 메우고 견디는 것 같다.

 

아마도 아이는 불안과 두려움을 이기려고 책을 찾고, 노래를 부르고, 피아노를 쳤을 것이다. 찾는 책은 박쥐가 가져가고, 노래를 부르자 새들이 한꺼번에 날고, 피아노를 치는 동안 다람쥐들이 시계바늘을 몰래 돌려놓았다. 빗방울과 함께  검은 방울무늬의 치타들이 모여들고, 거대한 고래가 커다란 밤을 끌고 왔다. 아이는 이불 속에 누워 거북이들이 시간을 되돌려 놓아 천천히 지나가는 고요한 시간을 느낀다.  그리고 드디어,

 

비가 그쳤다.

바람이 약해졌다.

천둥도 멈췄다.

 

비가 그치고, 바람이 약해지고, 천둥이 멈춘 건, 비가 다 쏟아지고, 바람이 잠들고, 비구름이 흩어졌기 때문이 아니다.  눈을 감고 이불을 덮은 아이의 그림 위에 비가 그치고, 바람이 약해지고, 천둥이 멈춘 진짜 이유가 적혀 있었다.

 

내가 잠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날, 맹수들이 날뛰는 것처럼 바람이 불던 밤에도 우리집 막내는 그 요란함 속에서도 곤한 잠에 빠져 있었다. 바람은 나에게만 불었던 것이다. 아이에게 그 밤은 여느 밤과 똑같이 고요하고 평화로운 밤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 책은 비도 바람도 천둥도 거센 소란스러운 밤의 정경을 담았으면서도, 절대로 시끄럽지 않다. 마치 밖에서는 맹수처럼 울어대는 바람이 몰아치는데도 집안의 공기는 얌전했던 그날 밤처럼, 밖이 요란해서 오히려 안의 고요와 평화가 더 잘 느껴지던 그 시간처럼, 이 책은 나를 비바람과 천둥이 치는 밖으로 내몰지 않고, 혼자 있는 아이의 마음 속에 집중하게 만들었다. 비바람 요란한 밤의 정경을 혼자 있는 아이의 상상과 은유로 묘사해가는 작가의 능력도 능력이지만, 그 소란한 밤을 소란하게 보여주지 않고, 오히려 그 소란함의 반대편에서 혼자 있는 아이의 움추러진 감정과 정적인 분위기를 살린 점이 더욱 인상적이었다.

 

보고 있으면 가슴이 시원하게 뚫리는 것 같은 작가의 자유로운 화풍의 그림도 마음에 든다. 작년에 없는 재주를 짜내어 그림을 그려야 하는 일이 있었는데, 그 때 아이의 그림 같은 이런 대담한 선의 그림을 그리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았다.

작가의 홈페이지  http://www.mirocomachiko.com 에 가면 작가의 다른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는데, 이 작가의 다른 그림들도 무척 마음에 든다. (일본어를 잘 모르지만 두 마리 고양이와 함께 살면서 동물 그림을 많이 그리는 것 같다) 살짝 다시마 세이조나 초 신타의 그림이 떠오르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작가의 그림이 더 시원시원하고 자유로우면서 뭔가 신비감이 느껴진다.  

 

그러니까 결론은, 난 이 작가가 참 마음에 들고, 앞으로 이 작가의 책을 더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는 것. 부러우면 지는 거라지만, 한편으로는 일본 그림책에 대해 쬐끔 질투를 느낀다는 것? (정말 쬐끔일까...?)

 

아파트 가로등이 너무 밝은 탓일까. 한밤중에 매미가 운다. 매미소리만 아니면 늑대도 치타도 없는 고요한 밤이었을 거다. 잠든 아이에게는 자기 꿈 속이 가장 소란할 시간이다. 아이를 깨워 이 책을 읽어주고 매미 울음소리에 귀기울이게 하고 싶어지지만 음. 난 이성적인 엄마니까, 그 충동을 가만히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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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자전거를 탈 수 있어 그림책은 내 친구 38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글, 햇살과나무꾼 옮김, 일론 비클란드 그림 / 논장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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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보고는 먼저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3년 전쯤 <로타는 기분이 좋아요>라는 그림책으로 '로타'를 만난 적이 있어서 오랜만에 재회하는 기분이랄까.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이야  워낙 아이들의 세계를 잘 그려내는 작가라고 인정받는 대가니까 내가 뭐라고 중언부언 설명을 보탤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린드그렌의 책을 읽다보면 나도 모르게 나태주의 <풀꽃>이나 이창희 시, 백창우 곡의 <꽃은 참 예쁘다> 같은 시와 노래가 떠오른다. 그러니까, '예쁘지 않은 꽃은 없'는데 우리는 그것을 자세히 보거나 오래보지 않아서 예쁘고 사랑스러운 줄을 모른 채 무심히 살고 있고, 린드그렌은 꽃 하나하나의 빛깔과 모양과 향기를 오래오래 보고 자세히 또 보고 마음에 담아서, 그 예쁘고 사랑스러운 모습을 우리 앞에 이렇게 글로 펼쳐놓는 것이다. 그럼 우리는 린드그렌의 글을 읽고 그제서야 "아! 그래! 어릴 때 우리도 이랬고, 우리 아이들도 이렇지!"하고 그 사랑스러운 유년의 시기를 돌아보며 감탄을 하게 되는 거다. 그리고 린드그렌의 책을 읽으면 언제나 아이들을 향한 린드그렌의 따스한 눈빛을 느끼게 된다. 이 책도 딱 그렇다.  

 

'뭐든지 다 오빠 언니랑 똑같아지고 싶었'던 5살 로타는 요나스 오빠와 미아 마리아 언니처럼 '진짜 자전거'를 타고 쌩쌩 바람을 가르며 언덕을 내려오고 싶다. 생일 선물로 '진짜 자전거'를 못 받자 이웃에 사는 베리 아줌마의 창고에서 '진짜 자전거'를 훔치기로 결심한다. 우리집 10살짜리 딸아이는, 비밀 운운하며 자신이 할 수 없음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이 자존심 강한 로타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는 듯 웃음짓다가 자전거를 훔치려고 마음 먹는 부분에서는 긴장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만큼 린드그렌의 글은 어른들에게 유년의 기억을 떠올리게 할 뿐 아니라 아이들의 마음을 잘 파고드는 것 같다.

 

이 책의 줄거리를 요약한다는 것도 불필요한 일인 것 같다. '뭐든지 다 오빠 언니랑 똑같아지고 싶은' 로타의 도전과 모험과 역경과 극복의 이야기라고만 설명해도 충분하지 않을까?  린드그렌의 글맛을 느끼지 못한 채 책의 줄거리만 자세히 안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 책은 굳이 그림책으로 나오지 않아도 괜찮았을 거다.  그림작가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림 없이 글만 읽어도 이야기는 생생하게 전달되니까. 그러나 그림이 있으면 아이들의 책에 대한 호감은 높아진다는 점을 고려해볼 때 개인적으로 린드그렌의 책이 그림책으로 나오는 것에 대해 굳이 반대하고 싶지는 않다. 단, 원작에 충실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림 부분에서 내가 재미있게 느꼈던 건 같은 또다른 로타 이야기인 <로타는 기분이 좋아요>라는 그림책을 펼쳐놓고 이 책과 비교해 보았을 때였다. <난 자전거를 탈 수 있어>나 <로타는 기분이 좋아요>나 모두 한 작가가 그림을 그렸다. '일론 비클란드'라는 작가인데 린드그렌 책 대부분에 그림을 그린 것 같다.  (삐삐 시리즈는 일론 비클란드가 아니라 롤프 레티히가 그림을 그렸다) 그런데 두 그림책이 모두 로타를 주인공으로 삼고 있고, 그림작가가 같은데도 불구하고 그림의 느낌이 참 다르다.<로타는 기분이 좋아요>는 부활절 시기에 일어난 일을 담고 있는데 그림의 분위기가 좀 을씨년스럽다. 모르겠다. 스웨덴은 부활절 즈음까지도 이렇게 겨울같은 풍경이 계속되는지는..  그에 반해 <난 자전거를 탈 수 있어>는 꽃이 만발하고 초록 이파리들이 싱그러운 봄의 기운이 가득 차있다.  로타의 집이 있는 거리 풍경을 예로 들면 이렇다.

 

 

 

 

 

 

위의 그림이 <난 자전거를 탈 수 있어>에 나오는 로타네 동네 풍경이고, 아래 그림이 <로타는 기분이 좋아요>에 나오는 그림이다. 두 그림에 나오는 집들이 비슷해서 어느 집이 로타네 집인지 금세 찾을 수 있다. 하지만 <로타는 기분이 좋아요>의 그림이 더 어둡고 칙칙하다.

 

이웃집 아줌마도 양쪽 책에 다 등장하는데, 그 이웃집 아줌마네 방 풍경도 아주 흡사하다. <난 자전거를 탈 수 있어>에는 베리 아줌마네로 나오고, <로타는 기분이 좋아요>에는  베르크 아줌마로 등장한다.

 

 

 

 

 

 

 

탁자 위에 놓인 전등과 의자, 소파, 소파 위의 쿠션, 바닥에 깔린 카펫, 벽지와 화장대, 화장대 위에 놓인 액자..

모두 똑같다. 텔레비젼과 청소기, 강아지가 있고 없고의 차이는 있지만 말이다.

 

 

 

 

 

 

 

 

식탁에 로타네 가족이 모두 모여 식사를 하는 장면이다. 식탁에 테이블보가 있고 없고의 차이는 있지만 가족들이 앉은 위치가 똑같다. 

 

그림의 느낌이 사뭇 다르지만 같은 작가의 그림인 것 맞는 것 같다. 작가의 그림풍이 왜 이렇게 다르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비교해 보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나쁘지 않았다. 그림의 톤이 밝고 색도 더 선명하고, 그림이 좀 더 귀여운 느낌이 들어서,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아이들이 <난 자전거를 탈 수 있어>의 그림을 더 선호하지 않을까 싶다. 예쁜 그림이 모두 훌륭한 그림이 아니라는 거, 안다. 하지만 밝고 사랑스러운 로타 이야기와 <로타는 기분이 좋아요> 풍의 그림은 뭔가 잘 안맞는 느낌이 든다.

 

얼마 전에 린드그렌의 평전을 읽었다. 고통스러운 십대시절을 보내며 상대적으로 린드그렌은 자신의 유년시절을 더욱 빛나는 보석으로 간직했을 것 같다. 글을 쓴다는 것이 린드그렌에게는 행복했던 유년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암튼,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린드그렌에 대해 다시 감탄하며 린드그렌의 책들을 기웃거리고 있다.

사랑스럽고 깜찍한 로타를 <나 이사 갈거야> (논장)과 <말썽꾸러기 로타>(다락방), <난 뭐든지 할 수 있어>(논장)에서 더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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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을 지키는 사람들 사람이 보이는 사회 그림책 1
신순재 글, 한지선 그림 / 창비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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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표지부터 뭔가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분명 그림책이 틀림없는데, 어째서 만화의 느낌이 나는 건지.. 혹시나 해서 휘리릭 속을 훑어보니까 어, 정말 만화같은 부분이 있었다. 그렇다면, 내가 표지만 보고 만화같다는 느낌을 받았다면, 그림책의 그림과 만화책의 그림은 어떻게 다른 걸까? 말풍선이나 몇개의 컷으로 화면을 분할한다거나 하는 눈에 띄는 특징 말고 그림 자체에서 풍겨나오는 만화적 느낌, 그걸 어떻게 알 수 있는 걸까? 그 고민을 붙잡고 어영부영 며칠이 휙 지나가 버렸다. 어떤 과장된 표현이 들어있나 했지만  <마법사 똥맨>이라든가 <선생님 과자>같은 책에 그림을 그린 김유대의 그림에 비하면 특별히 과장된 그림이라고 보기도 어려운데 말이다.  스스슥 선의 느낌을 살려 그린 듯한 그림 때문인 것 같기도 하지만 뭐라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답답함이 있다.  어쨌든 무겁고 진지하다는 느낌이 덜하니까 아이들은 더 쉽게 책에 다가갈 수 있을 것 같다.

 

아이들에게 '직업'에 대해 말하는 책들이, 예전에 비하면 참 많이 소박해지고 다양해진 것 같다. 뭔가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가까운' 직업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고 있달까. 이 책은 그 중에서도 모두가 잠들어 있는 시간에 깨어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몇 차례 읽고 난 느낌을 미리 말하자면 '일'보다는 '사람' 또는 '삶'의 소박하면서도 강인하고 따뜻한 모습이 더 마음에 남았다. 사계절 출판사의 '일과 사람'시리즈에서도 그런 느낌을 받는데, 이번에 창비에서 나온 '사람이 보이는 사회 그림책' 시리즈도 '사람이 하는 일'보다는 '일 하는 사람'에 이야기의 초점을 맞춘 것 같다.

 

이 시리즈의 다른 책들을 더 읽어보지 않아서 섣불리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사계절 출판사의 '일과 사람 시리즈'가 한 권의 책에 하나의 직업을 담고 있다면 창비의 이 '사람이 보이는 사회 그림책 시리즈'는 어떤 공통점으로 묶일 수 있는 하나의 직업군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 다른 것 같다. 이를테면 이 책은 제목대로 밤에 일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경찰관, 구급대원, 새벽 수산물시장의 사람들, 환경미화원, 도로정비원, 천문학자, 그리고 택시운전기사. 마지막으로 조카 영두와 함께 밤에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와서 밤을 지새우며 만화를 그리는 영두의 고모까지.

 

사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내 친정오빠는 디자인 일을 한다. 20대 대학시절부터 밤새기를 밥먹듯 하는 올빼미다. 친정엄마는 항상 그런 오빠를 탐탁치 않아 하신다. 환갑이 다 되어가는 오빠와 아직도 그 문제로 티격태격하시는데, 간혹 나한테 오빠에 대한 못마땅함을 드러내실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지금은 농경사회가 아니다, 농사짓고 살던 때나 해뜨면 일찍 일어나 일하러 나가는 거였지, 요즘은 일하는데 밤낮이 따로 없다고 말씀드리지만 말씀드릴 때뿐이다. 오빠의 건강을 염려하며 오늘도 내일도 여전히 오빠의 밤샘을 걱정스런 눈으로 지켜보신다. 그래서일까. 나는 이 책을 우리 친정엄마에게 읽어드리고 싶었다. 여든을 바라보시는 우리엄마의 노심초사를 이 책으로 덜어드리고 싶었다.

 

버스커버스커의 '서울사람들'이란 노래를 듣는다. '아가씨 어디가 클럽가요, 아니요 오늘도 야근해요~'하는 가사가 흐른다. 낮에 일하든 밤에 일하든, 무슨 일을 하든 고단함을 덕지덕지 어깨에 짊어지며 살아가는 거라고 하지만,  내가 하는 일이, 또는 그 일을 하며 살아가는 내가 고맙고 소중하고 대견하다고 여겨주는 사람들이 많다면 힘들어도 견디며 살만하지 않을까. 이 책을 참 좋은 책이라고 한다면,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일 거다. 우리 아이들에게 '일'의 소중함과 함께 그 일을 하는 '사람'에 대해 고마움을 갖게 한다는 것. 시리즈 제목대로 사람의 직업적 기능이 아니라 '사람'이 보인다는 것.

 

아이들의 공부가 중요해질수록 지식정보그림책이 더 많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것 같다. 지식정보그림책들에 묻혀 수준높은 순수문학적(이런 게 있었나? 싶지만 아무튼 용어선택에 대한 문제점은 그냥 넘어가주기를..) 그림책이 점점 사라져갈까봐 두렵다. 지식정보그림책은 아이들에 대한 어른의 욕구가 반영된 거라고도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때로는 아이들이 이런 것 까지 알아야하나? 싶을 정도의 내용을 담은 책들을 보기도 한다. 지식정보그림책의 증가가 어쩔 수 없는 사회적 요구라 한다면 조금은 아이들 입장을 헤아린 책들로 만들어지길 바란다. 단순한 지식전달이 아니라 '사람'을 보여주는 이 책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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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꼬 2014-04-15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회 교과를 일찍 배우면서 어린이책 출판 판도도 많이 바뀐 것 같아요. 이 책, 그림과 설명은 그림책 읽는 아이들 연령에 맞는 것 같아서 반갑더라고요. 그런데 밤에 일하는 사람을 '투명인간'이라고 한 대목이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_- 재밌게 쓰려고, 또는 안 보여도 실제로 활동하는 사람들이다, 라는 뜻으로 썼겠지만 '안 보인다'를 기정사실화 하는 것 같아서 말예요. (안 보이는 것도 아닌데.) 영화 "빵과 장미"에서 사무실 청소일을 하는 사람이 유니폼을 가리키면서 '이 옷이 우리를 안 보이게 해준다'고 했던 것도 생각나고요. =_=

섬사이 2014-06-20 13:10   좋아요 0 | URL
이렇게나 늦은 댓글이라니! ㅠ.ㅠ
잘 지내시죠?
얼마 전에 도서관에 원종찬 선생님이 오셔서 우리의 근대아동문학에 대한 강의를 해주셨어요.
그것도 세 번이나!!!
네꼬님 생각이 나던걸요. ^^
 
소풍
존 버닝햄 글.그림, 이상희 옮김 / 토토북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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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그림책의 모든 것>(마틴 솔즈베리, 모렉 스타일스 지음/시공아트)을 읽다가 존 버닝햄에 대한 이런 글을 만났다.

 

버닝햄은 런던의 센트럴 미술학교에서 공부했는데, 와일드스미스와 키핑과는 달리 데생에 전혀 재능이 없었다. 그의 드로잉은 서툴렀을 뿐 아니라, 솜씨는커녕 매너리즘조차 없다는 말을 들었을 정도다. 학창시절에 동료들은 실사 작업실에서 쩔쩔매는 그를 보고 비웃었다. 그러나 졸업 후 그는 바로 그래픽 아트 분야에서 성공적인 경력을 쌓아갔다. 버닝햄의 그림책들은, 데보라 오르가 이야기했듯이 "......시장의 상품이라기보다는 무엇보다도 한 예술가가 자신만의 창조에 대한 열망을 구체화하여 표현한 독창적인 공예품임이 분명하다."

버닝햄은 특별히 어린이 책에만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솔직하게 고백한다. 그러나 어린이 책이라는 매체를 통해 결코 잘난 체 하지 않았으며 시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고, 매우 현명하게 소통한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 문장들을 읽었었다. 존 버닝햄의 그림은 솔직히 다른 그림책 작가들에 비해 좀 어설퍼 보이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의 그림책을 읽으면 뭔가 가슴을 찡하고 울리는 게 있다. 그게 그의 '시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고, 매우 현명하게 소통'하는 탁월한 능력 때문인 것 같다. 그러니까 그가 그림책 작가로서 이만큼의 명망을 쌓고 인정을 받는 것은 그림실력 때문이 아니라 탁월한 소통능력 때문이라는 이야기다.

 

이 책은 3살~5살 정도의 유아들이 즐겨 읽을 수 있는 책이다. 버닝햄은 언덕 꼭대기 집에 사는 남자 아이와 여자 아이가 도시락을 싸서 집을 나서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검피 아저씨>나 <야, 우리 기차에서 내려!>처럼 소풍을 가기 위해 길을 가다가 동행이 생긴다. 양과 돼지와 오리. 아이들은 이들의 동참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소풍 도시락도 함께 먹자고 한다. 그런데 난데없는 황소의 등장.....이라지만 그림은 이렇다.

 

 

이건, 황소가 아니라 젖소...아닌가?  가끔 유아들 책, 그 중에서도 번역책에서 이런 오류들이 발견되곤 한다. 어른들은 이 장면에서 "어? 황소가 아니라 젖소같은데? 번역을 잘못했구나!"하고 넘어갈 수 있지만 유아들은 이걸 그냥 받아들인다. 저렇게 생긴 소도 황소라고 하는구나, 하고. 책을 읽어주는 사람이 "이런 소는 젖소라고 하는데 황소라고 잘못 나왔네"라고 정정을 해주면 되겠지만,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아이는 책이라는 매체에 대한 신뢰를 잃기 때문이다. 결국 모든 지식을 네이버에 물어보는 사람으로 자라면 어쩌란 말인가. 적어도, 책이 네이버보다는 편리하고 재미있지는 않을지언정 보다 깊이있고 신뢰할만 하다는 믿음을 심어줘야 한다. (모든 지식은 의심해보아야 한다지만 젖소와 황소의 정의를 의심해 보자는 게 이 책의 의도는 아닐 거라고 본다, 나는.)

 

쫓아오는 젖소 같은 황소를 피해 오리, 돼지, 양, 남자 아이, 여자 아이는 숲으로 도망을 간다. 그리고 '찾기 놀이'가 시작된다.

 

 

 

 

 

 

 

 

 

 

 

 

 

 

 

 

 

 

 

 

 

 

 

 

 

 

 젖소 같은 황소를 피해 달아나 숨은 아이들 찾기다. 너무 쉽다. 너무 쉬워서 사실 6,7세 정도만 되어도 시시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젖소 같은 황소가 가 버린 다음, 아이들은 도시락 먹을 곳을 찾아 나서는데 갑자기 바람이 불어서 양의 모자가 날아가고, 돼지가 공을 떨어뜨리고, 오리가 목도리를 잃어버리는 사건이 차례로 일어난다. 물론 다같이 잃어버린 물건을 찾는데 이 또한 독자도 참여해서 숨은 그림 찾기를 하듯,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야 한다.

 

 

 

 

 

 

사진을 붙이다 보니 두 장면이 펼친 양쪽 면에 있는 것처럼 되어버렸지만, 사실은 양의 모자 한참 뒤에 오리의 목도리 찾기가 나온다. 뭐, 어쨌든 위의 그림에서도 알겠지만 찾기 놀이는 어렵지 않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이 5살 이하의 유아에게 적당하겠다고 생각했다. 오늘로 십대의 문턱에 서게 된 우리 막내만 하더라도 서너살 무렵엔 이런 책 들을 얼마나 좋아하며 즐겼던가. 너무나 쉬운 찾기 놀이 책을 즐기며 한없이 뿌듯해하고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겼었다. 이런 책들을 읽으며 아이들의 자존감은 하늘을 찌른다. 옆에서 읽어주던 엄마가 못 찾는 척하면 더 기뻐하며 거만한 표정을 짓기도 한다. 우리 막내는 시시하다고 투덜댔지만 이 책은 엄연히 십대의 문턱에 아슬아슬 서있는 딸을 위한 책이 아니었으니까.

이 책에서는 찾기 놀이가  버닝햄이 선택한 '현명하게 소통하는 방법'이고, 착하고 순박한 동물들과의 소풍과 도시락은 아이들에게 '시적으로 이야기하는' 장치인 것 같다.

 

 

 

 

 

 

 

 

 

 

 

 

 

 

 

 

 

 

 

 

 

 

 

 

 

 

 

 

동물들은 환한 풀밭에서 소풍 도시락을 함께 먹고 신 나게 놀고 '모두 잔뜩 지쳐서' 언덕 위의 집으로 돌아간다.  아이들은 동물들에게 "우리 집에서 자도 돼."라고 이야기하고 기꺼이 침대를 내어준다. 친구들과 소풍 가서 먹을 것도 같이 먹고 지치도록 신 나게 놀고, 그 다음에 뿔뿔이 헤어질 걱정없이 친구랑 같이 잠을 잔다는 건,,, 내가 애 셋을 키워봐서 아는데 이건 아이들을 정말 미치도록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일 중에 하나다. 엄마로서는 정말 쉽지 않은 희생이 따르는 일이고.  이 그림책에 엄마가 등장하지 않은 것은 아마도 엄마의 그런 피곤한 면모를 숨길 수 없어서인지도.

 

맨 마지막 장면.

 

 

 

 

 

 

 

 

 

 

 

 

 

 

 

 

 

 

 

 

 

 

 

 

 

 

 

나는 이 마지막 장에서 고개를 갸웃거려야 했다. 바로 저 문장 때문이었다.

"오늘 밤 내가 어디서 자는지 알아맞혀 볼까요?"

이게 무슨 뜻일까... 틀림없이 어려운 낱말은 없는데 뭔가 문장이 꼬여있는 것 같았다.

이 문장에서 '내가 어디서 자는지'를 나더러 맞혀보라는 건지, 아니면 '누군가가 어디서 자고 있는 걸' 내가 알아맞혀 보겠다는 건지...  저 문장에서 '내'에 상응하는 술어는 '자는지'일까, '알아맞혀 볼까요?'일까. 저 '볼까요?'가 '볼래요?'였다면 더 좋았겠지만, 그렇다면 작중화자였던 '나'는 누구인 걸까?  저 달이었을까? 아니면 집인가?

 

이 그림책의 원서를 확인해보고 싶었지만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존 버닝햄의 책들 중에 이 책이 최고라고 할 수는 없지만 젖소 같은 황소와 저 마지막 문장을 좀 다듬는다면 유아들에게 추천할만한 책이 될 것 같다. 아쉬움이 남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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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4-01-01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ull (원문을 찾아봤어요)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해석했네요. 보통 bull을 황소로 해석하긴 하는데 그림이 있으니 좀 센스 있는 번역자라면 생각을 하고 단어를 썼을텐데, 아쉽네요.
이 책 리뷰가 많이 올라와서 저도 관심이 갑니다.

섬사이 2014-01-02 00:40   좋아요 0 | URL
반가워요, hnine님.
제 서재에 새해 첫 발자국을 찍어 주셨네요. ^^
원문에 'bull' 이라고 되어 있군요. 하긴 저 소를 젖소라고 하는 게 정확한 건지도 좀 애매했어요.
'젖소'라면 마땅히 있어야할 그게 보이지 않아서요.
그럼 이 소에 대한 문제는 존 버닝햄의 애매한 실수라고 해야 옳은 걸까요?
그럼 맨 마지막 문장은 어떻게 된 걸까요?
구립도서관 영어책 코너에 가서 한번 찾아볼까 하고 있어요.
이 책이 있을지 모르겠지만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모나리자 도난사건]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모나리자 도난사건 키다리 그림책 24
존 패트릭 루이스 글, 개리 켈리 그림, 천미나 옮김, 노성두 감수 / 키다리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어제 큰딸과 간송미술관에 다녀왔다.  큰딸이 자기가 죽기 전에 꼭 보고 싶다고 하는 그림이 있다.  단원의 '마상청앵도'인데 이번 간송미술관 전시에 혜원의 미인도와 함께 전시된다는 걸 알고는 딸이 꼭 가봐야겠단다.  미인도는 이번에 두 번째 보는 것이다.  누가 뭐라든 이번엔 꼭 미인도 앞에 사람들에게 떠밀려나는 일 없이 꼼짝도 하지 않고 버티고 감상하리라, 마음 먹었는데 다행히 한창 '바람의 화원'이 히트를 쳤을 때 열렸던 전시회에 비해서는 버틸만 했다.   

내가 미인도와 간송미술과 전시 이야기를 주절주절 늘어놓는 것은 '모나리자 도난사건'이라는 이 책이 문화애국주의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자주 모나리자 보다는 미인도 속 여인이 훨씬 더 신비스럽고 아름답다고 떠벌이곤 한다.  그리고 간송미술관에 갈 때마다 간송 전형필 선생님께 고개 숙여 감사드리고 싶어진다.  이 그림책을 읽으면서 나는 모나리자 대신 미인도를 대입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미인도가 일본이나 중국의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면 얼마나 안타까울까 싶은 것이다.  물론 굳이 미인도를 대입하지 않더라도 약탈당한 수많은 문화재와 미술품들을 생각하면 억울하고 분한 감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고 빨리 되찾아 오지 못하는 처지를 생각하면 한숨이 나오기도 한다.  

모나리자가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데에는 100년 전에 벌어진 이 도난사건이 큰 역할을 했다는 주장도 있는 것으로 안다.  루브르에 있는 다른 미술품들에 비해 모나리자가(크기도 77*53의 아담사이즈면서!!) 특수유리 속에 고이 모셔지는 특별대우를 받고 있는 것도 아마 빈첸초 페루자가 벌인 도난사건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트라우마 때문일 거라는 생각도 든다.  암튼 이 책은 100년 전에 벌어졌던 모나리자 도난사건을 이야기하면서 묻는다.  이탈리아의 천재화가 레오나르도의 모나리자를 훔친 빈첸초 페루자의 행동이 올바른 것인가 잘못인가, 하고.  모나리자는 약탈당한 것이 아니라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금화 사천 개를 받고 프랑수아 1세에게 팔았다고 하니 뭐, 할 말이 없다.  그야말로 이탈리아 국민들은 모나리자를 향하여 '지못미'라도 외쳐야 할 판. (새삼 미인도를 향해 '지못미~'를 외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행복하다) 

하지만 한 가지 의문이 솟는다.  만약 모나리자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의해 프랑스에 팔린 작품이 아니라 약탈당한 작품이었다면, 빈첸초 페루자의 행동은 올바른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루브르 박물관이나 대영박물관에 있는 수많은 약탈문화재에 대한 반환 문제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제국주의시대의 아련한 향수를 포기하고 하고 싶지 않다는 듯 문화재 반환을 거부하고 있는 그들에 대한 문제 또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의 약탈에 비하면 빈첸초 페루자가 벌인 모나리자 도난사건은 애교에 불과할 듯.  물론 그릇된 일에 크고작음을 따질 수 없다는 걸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말하자면 그렇다는 거다.  

우리도 약탈당한 입장이라서일까.  빈첸초 페루자에게 동정심이 든다. 이 책을 내 아이에게 읽어주게 된다면 책 뒷표지에 서양미술사학자 노성두 씨가 쓴 "예술 작품에는 반드시 주인과 국적이 있어야 한다고 믿었던 잘못된 문화 애국주의에 사로잡힌 황당하고 어설픈 그림도둑 이야기"라는 글과 함께 문화재 약탈에 대한 이야기도 꼭 해줘야 할 것 같다.  예술작품에 반드시 주인과 국적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우리 나라 안에 있으면 더 자주 볼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루브르 안에 있는 아프리카 문화재와 미술품들은 어찌되었든 자국민들로부터 너무 소외되었다는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그것을 마땅히 누려야 할 이들에게는 너무나 멀어진 슬픈 느낌이랄까.  

간송미술관에 입장하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면서 마상청앵도를 볼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린다던 큰딸의 얼굴이 스쳐지나간다.  전시를 다 둘러보고 나왔을 때 큰길까지 길게 늘어섰던 사람들의 긴 줄도...  루브르 박물관 앞에는 어떤 사람들이 입장료를 내고 그 안의 미술품과 문화재들을 누리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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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1-10-26 0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9기 서평단 마지막 미션인가요?
오랜만에 브리핑에 떠서 반가움에 달려왔어요.
빈첸초 페루자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은 마음이 들지요~ ^^

섬사이 2011-10-26 11:38   좋아요 0 | URL
예, 마지막 미션이었어요.
순오기 님은 10기 서평단에서 활동하시나요?
반가워해주셔서 고마워요. 히힛~^^
뭐가 그리 정신이 없는지 정신이 자꾸 우주로 날아가버리곤 해요.
핑계지만 집중해서 뭔가를 할 만한 상황이 안되더라구요.
빈첸초 페루자는... 저도 마음놓고 잘못했다 비난할 수가 없었어요.
오히려 좀 불쌍하게 느껴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