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하늘이 으르렁거리는 소리에 잠을 설쳤다. 일어나 창밖을 보니 하얀 가로등 불빛으로 빗줄기가 그리는 촘촘한 금들이 보였다. 비는 단단히 화가 난듯 사납고, 참 지랄맞게도 내렸다. 그날 이후로 혼자 있을 땐 자꾸 아버지 생각이 난다. 그 날도 아버지에게 달려가는 차 밖으로 빗줄기가 촘촘했다.
난 아버지때문에 태어났다. 아버지의 끈덕진 딸타령이 없었다면 엄마는 날 낳을 생각조차도 하지 않았을 거라고 했다. 아들만 둘이었던 우리집에 늦둥이딸로 나는 태어났다. 아버지는 예쁜 딸을 낳으라며 달력에서 예쁜 일본여자 사진을 오려서 엄마가 누워서 볼 수 있게 천정에 붙여놓았다고 했다. 당시에는 달력에 일본여자 사진이 많이 실렸었다고 한다. 딸이 태어나면 책가방도 들리지 않고 곱게 키울 거라고 큰소리를 치셨다는데 난 씩씩하게 책가방 매고 학교에 잘 다녔다.
어릴 때 우리집은 식당을 했다. 2층 건물에 넓은 홀을 가진 제법 큰 식당이었고 손님도 늘 많았다. 아버지는 가끔 가게에 앉아있곤 하셨는데 난 그 때마다 골목에서 친구들과 놀다가도 쪼르르 달려가 아버지 목에 매달려 10원만 달라고 조르던 기억이 난다. 그러면 아버지는 늘 뽀뽀를 해야 준다고 하셨고, 난 아버지의 뺨이나 입에 뽀뽀를 하고는 10원을 손에 쥐고 과자를 사먹으러 구멍가게로 달려갔다. 그래, 그런 때가 있었다.
아버지가 밥을 드실 때 김치를 입에 넣으시면 얼른 아버지 등에 붙어서 아버지 관자놀이 근처에 귀를 대고 서걱서걱 김치 씹는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가 참 듣기 좋았다. 귀찮으셨을 텐데 어린 딸이 등에 붙어 있게 가만 두셨다. 내가 '김치, 김치.'하고 조르면 아버지는 커다란 김치조각으로 골라서 입에 넣고 더 세게 씹으셨다.
아버지는 자기표현에 서툴고 무뚝뚝한 분이었다. 그런 아버지가 딸타령을 하셨다는 게 이제 생각하니 신기하기만 하다. 난 그런 딸인 것이다. 말없는 아버지가 그토록 원했던 딸. 하지만 나는 정말 아버지가 그토록 원했던 그런 딸이었을까?
그날 밤 전화는 불길하게 울렸다. 가슴이 철렁했다. 잘못 걸려온 전화이기를 바랐다. 언젠가 새벽 3시에 잘못 울렸던 초인종처럼. 전날 회식이 있었던 남편은 만취해서 들어와 자고 있었다.
누워있는 아버진 마치 산신령이나 도사님 같았다. 익숙하지 않은 옷을 걸치셨는데도 참 잘 어울렸다. 아버지와 뺨을 맞댔다. 너무 차갑다. 싸늘한 냉기가 느껴지던 중환자실에서 만졌던 아버지의 발보다 더. 중환자실에서 얇은 홑이불 아래로 비죽 나와있던 아버지의 발을 난 무심한듯 주물렀었다. 아버지에게 온기가 사라지고 있는 것 같아 두려워서 온기를 나눠드려야 할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견디실 거라 생각했다. 8년 전 더 큰 심장수술을 받았을 때에도 아버지는 회복이 빠른 편이었다. 그러니까 이까짓 시술따위, 연세가 많아 좀 더딜지는 몰라도 회복하실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 때 숨결이 사라진 채 누워있는 아버지의 뺨은 내가 가진 체온이 결코 스며들 수 없는, 견고한 차가움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기다리셨어야 했다. 적어도 떠나시는 동안 손이라도 잡고 있을 수 있게 우리에게 시간을 주셔야 했다. 이미 시퍼렇게 변한 아버지의 귀에 대고 사랑한다는 말도 차마 하지 못하게, 미안하다는 말만 토해놓게 하시면 안되는 거였다. 자꾸 싸늘한 중환자실에서 호흡기를 꽂고 혼미하게 누워 계시던 모습만 떠오르게 하면 안되는 거였다.
난 아버지가 그토록 갖기를 바랐던 그런 딸이 되어드리지 못한 채로 아버지와 이별했다.
언제나 주인을 잃은 방의 풍경은 눈물겹다. 아버지가 주무시던 침대, 외출하실 때마다 쓰시던 모자들, 집에 돌아오시면 갈아입던 편한 반바지.. 엄마가 주인 잃은 빈 방을 보며 쓸쓸해 하실까봐 서둘러 유품정리를 했다. 가구도 옮기고 박스에다 아버지의 옷가지며 모자, 장갑, 넥타이, 시계 등을 담았다. 삶은 참 모질고 야박하다. 아버지라고 해도 남은 삶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을위해 그 자리가 말끔히 치워진다.
아버지가 중환자실에 계실 때 병원 계단에서 엄마는 넘어지셨다. 그다지 금슬좋은 부부가 아니었는데도 엄마는 슬프고 황망해하셨다. 넘어지면서 다친 왼쪽 발이 부어올랐다. 유품을 정리하고나서 엄마를 모시고 친정 집 앞 병원에 갔다. 엑스레이를 찍고 진찰을 받는데 엄마가 정형외과 의사를 물끄러미 바라보셨다. 그러더니 불쑥 "의사 양반이 참 젊네. 인물도 좋고."하신다. "엄마는 왜 갑자기 의사선생님 인물평을 하고 그래."하면서 웃었더니 의사와 간호사도 웃는다. 다행히 뼈에는 이상이 없다고 해서 일어나 진료실을 나오는데 또 멈칫하시더니 "나 요 앞 아파트에 살아요."하신다. "엄마, 의사 선생님한테 집까지 가르쳐주시고, 엄마 이상하다."했더니 뭐가 이상하냐고 핀잔을 주신다.
안다. 의사가 너무 젊어보여 연륜이 없는 것 같아 미덥지 않고, 병원 바로 앞 아파트에 살고 있으니 잘 치료해주면 소문도 내주고 일이 있을 때 자주 이용하겠다는 의미라는 거. 하지만 난 엄마 앞에서 너스레를 떤다. "엄마, 아버지 돌아가신지 며칠이나 지났다고 벌써 젊은 남자한테 한눈 팔고 집까지 가르쳐주고.. 엄마 안되겠네. 그렇게 안 봤는데 우리 엄마 선수네, 선수." 엄마가 쿡쿡대며 웃는다. 내가 엄마를 웃게 했다. 아버지도 웃고 계실까?
우린 아직 아버지와의 이별이 실감이 나지 않는다. 이제 겨우 열흘을 좀 넘겼을 뿐이니까. 그래서 버스를 타고 가다가 창밖으로 아버지와 뒷모습이 많이 닮은 분을 볼 때, 누군가 날 위로한다며 안아줄 때, TV에서 아버지와 연배가 비슷하신 분들이 나올 때, 아버지가 좋아하시던 간장게장을 볼 때... 그럴 때만 마음이 덜컹한다. 그런데도 좀처럼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았다. 한동안은 계속 자고 먹고 자고 먹고 졸고 먹고 졸고 먹고..만 했다.
아버지 이야기를 여기에 쓰는 건, 이렇게라도 해야 밀린 일들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다. 아버지를 추억하는 일이 아버지 없이 가능할 것 같지도 않다. 아버지에게 물어봤어야 할 것들이 많다는 걸 이제야 깨닫는다. 왜 그토록 딸을 갖고 싶으셨는지, 태어난 딸이 마음에 드셨는지, 왜 이른 아침 어린 딸을 데리고 송지다방에 가서 계란과 우유를 먹이셨는지, 어느 날 나를 며느리라고 부르며 귤을 한 봉지 가득 사오셨던 아버지의 친구는 누구였는지, 어릴 적 내가 신던 빨간 피겨스케이트는 누가 골라줬던 건지, 왜 나는 한 번도 낚시에 데려가지 않으셨는지, 어느날 갑자기 아버지에게 뽀뽀하기를 거부하는 딸이 밉지는 않았는지, 내 손을 잡고 결혼식장에 들어갈 때 기분은 어떠셨는지, 왜 그렇게 무뚝뚝하게 지내셨는지, 아버지의 어린 시절은 어땠는지, 딸이 제일 예뻐보였을 때가 언제였는지, 한국전쟁 때 무섭지는 않았는지, 사는 게 제일 힘들 때가 언제였는지, 힘들 때엔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 딸 낳길 참 잘했다고 생각하신 적은 있는지, 나 때문에 제일 속상하고 서운하셨던 적은 언제였는지...
창고에서 오래된 앨범을 꺼내서 아버지와 찍은 사진 하나를 꺼냈다. 생각했던 것보다 아버지와 찍은 사진이 별로 없었다. 사진 속 풍경을 보니 외할머니댁 마당이다. 지금은 시청이 들어서고 아파트 숲으로 변해버린 곳이지만 내가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까지는 유일하게 찾아갈 수 있는 시골이었다. 같은 날 찍은 사진들이 몇 장 더 있다. 엄마와도 따로 찍은 사진이 있고, 이모와 찍은 사진도 있고, 이모, 외삼촌, 엄마, 아버지와 다 함께 찍은 사진도 있다. 나랑 엄마가 한복을 입고있고 아버지가 양복을 입고 계신 걸 보니 무슨 날이었던 모양이다. 외할머니 생신이었을까? 모르겠다. 사진 속의 나는 지금의 내 막내딸보다도 어릴 때였던 것 같다. 사진 속 아버지는 젊다. 아마 지금의 나보다도 젊으셨을 때인 것 같다. 이런 때가 있었다. 하지만 시간은 늘 이별을 예정하며 흘렀고, 아버지는 내 곁을 떠났다. 손 한 번 잡아드릴 겨를도 없이, 인사 한 마디 나눌 시간도 없이. 가끔씩 사진만 속절없이 들여다보고 있다.
이별을 하고서야 소중했던 걸 안다. 오늘 밤에도 비가 내리는데, 아버지는 편안하실까. 내 앞에는 몇 개의 이별이 더 남아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