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동해 쯤으로 가족여행을 다녀왔다. 3박4일 동안 처음 이틀은 태풍 할롱의 영향으로 하늘이 흐리고 간혹 비가 내려서 양떼목장과 동굴을 보러가고 레일바이크를 타며 시간을 보냈고, 나머지 이틀은 해가 맑았지만 바다에 너울성 파도가 높았다.
그래도 바다를 찾아가서 파도가 으르릉대며 밀려들었다가 힘이 빠져 물러나는 그 쯤에서 파도의 끄트머리를 밟으며 아이들은 신나게 놀았다. 나는 거기서 조금 떨어진 곳에 파라솔을 치고 편안하게 의자에 앉아 수평선 가까이서부터 일렁거리며 화를 이기지 못하고 일어서 거칠게 몸을 부풀리다가 제풀에 꺾이어 휘말리는 파도를 감상했다. 책을 읽다 보면 가끔 '바다가 일어섰다'거나 '바다가 끓는다'거나 '바다가 흰 이빨을 드러내고 달려왔다'거나 하는 표현들을 만나곤 하는데 이번 여행에서 아, 그게 이런 바다를 보고 하는 표현이었디는 걸 알았다.
마치 바다는 야수 떼 같았다. 정말 하얀 이빨을 드러내고 먹잇감을 노리듯 으르렁 거리며 몰려왔다가 아직 때가 아니라는 걸 깨닫고 힘을 빼고 물러났다. 물러나면서도 바닷가에 있는 우리를 삼키지 못한 게 아쉬운 듯 노려보는 듯 했다. 파도는 장관이었다. 이틀을 바닷가에 있으면서 파도만 보고 있어도 지루하지 않았다. 무섭고 두려우면서도 매력적이고 아름다웠다. 파도 구경하느라 챙겨갔던 <혼불>은 파라솔 아래 테이블 위에서 이틀 내내 홀대를 받았다.
가끔 해경이 와서 호루라기를 불며 바다에 들어가는 사람들을 나오라고 하는 것은 물론이고, 파도 끄트머리에 발을 담그는 사람들조차 뒤로 물러나라고 엄격하게 제지했다. 누군가가 그럴거면 차라리 해변을 패쇄할 것이지 왜 사람들을 바닷가에 세워두고 아무것도 못하게 하느냐고 항의를 했다. 그래서 '발을 담그는 정도'는 허용하는 걸로 합의를 봐서 저녁 때까지 아이들은 파도와 놀 수 있었다. 저녁에는 바닷가에서 바베큐 그릴에 고기를 구워 먹었고, 밤바다 위에 뜬 둥근 달을 보았다.
우리에게 바다가 아픈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피서를 한답시고 바닷가를 찾은 것도 미안했다. 3박4일동안 동해, 삼척, 묵호, 강릉 등등을 돌아다니며 바다를 보았다. 그저 무심한 듯 묵묵한 먹빛 바다도 보았고, 흐린 하늘 아래 비를 맞고 누운 바다도 보았다. 바다가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정작 숨긴 말을 꺼내야 할 입은 따로 있을 것이다.
여행에서 돌아와 막내는 병이 났다. 기침을 하고 열이 오르고 토했다. (그것도 오전에 일이 있어 지인들을 만나러 카페에 갔는데 문 연지 얼마 되지도 않은 카페 출입문 앞에다가 토해서 난감하고 민망하고, 카페 주인장에게 미안하고...) 병원에 데려갔더니 감기 기운도 있는 데다가 너무 피곤하고 지쳐서 기운이 없고, 기운이 없으니 소화기능도 떨어져서 그런 거란다. 오늘로 닷새째 집에서 요양 중이시다. 큰딸과 아들은 활동봉사자로, 막내는 참가자로 가기로 했던 2박3일 도서관 캠프는 막내를 빼고 큰애들 둘만 갔다. 세 아이를 다 캠프에 보내고 10년만의 여유, 혹은 자유, 또는 반란을 꿈꾸었던 나의 희망은 좌절됐다. 하긴 '뛰어봤자 벼룩'이라고, 그저 영화를 보러 가거나 카페에 앉아 시간을 보내거나 늦은 밤 지인들과 족발집이나 치킨집에서 모여 소소한 이야기들을 나누며 시간을 보냈을 게 뻔하다. 다행히 열도 떨어지고, 기침도 한결 가라앉았고, 배 아프다는 말도 하지 않으니 그걸로 만족. 자유와 반란은 좀 더 치밀한 계획을 세우며 후일을 기약하는 걸로.
아참, 평창에서 맛있는 탕수육 집을 찾아갔다. 남편이 데리고 간 집인데 외관이 허름해서 잘 눈에 띄지도 않을 중국집이다. 그래도 아는 사람은 다 찾아 오는지 1시간 쯤 기다려서 겨우 테이블을 차지할 수 있었다. 중국집의 대표 메뉴라 할 수 있는 짜장, 짬뽕, 탕수육을 시켜 먹었는데 먹어 본 짜장, 짬뽕, 탕수육 중 가장 맛이 깔끔했다. 막내는 이번 여름에 먹은 음식 중 가장 맛있었던 음식으로 이 집 탕수육을 꼽을 정도. 큰딸 말로는 '꿔바로우'와 맛과 느낌이 비슷하긴 한데 야채가 올라가 있고 맛도 더 좋은 것 같다고. 휴가동안 체중이 늘어나서 돌아왔다. 날씬해지는 건 꿈도 안 꾸고, 적어도 적정 표준체중은 되야하지 않나 해서 다이어트를 해볼까 했는데 매번 먹는 것 앞에서 이성을 잃고 무너진다.
나는 구순기를 잘못 보낸 게 틀림없다. 프로이트 이론에 따르면 구순기를 잘못 보낸 사람은 식탐이 있고 스트레스를 먹는 걸로 푼다고 했던가. 잘못 보낸 구순기를 이제와 어쩔 수도 없고, 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