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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가는 문 - 이와나미 소년문고를 말하다
미야자키 하야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갈색 마룻바닥 위에 책들을 가지런히 주욱 펼쳐놓고 앞치마를 두루고 앉아있는, 저 머리카락도 하얗고 수염도 하얀 할아버지가 미야자키 하야오다. 여백이 많은, 군더더기 없는 공간 속에서 무릎까지 꿇고 바닥에 펼쳐놓은 소년문고 책들을 조용히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듯한 이 사진이 참 마음에 들었다. 난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전부를 다 본 것도 아니고, 본 것들을 다 좋아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이라고 하면 막연히 무조건 '보고 싶다'고 느끼는 편이다.
TV로 봤던 <빨강 머리 앤>이나 <하이디>, <미래소년 코난>, <플란더스의 개> 같은 작품들과 영화로 봤던 <이웃집의 도토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하울의 움직이는 성> 같은 것은 잊지 못할 작품으로 남았다. <마루 밑 아리에티>, <천공의 성 라퓨타>, <원령공주>, <마녀 배달부 키키> 등은 늘 마음에 두고 있으면서도 챙겨 보지 못한 아쉬움으로 남아있고. <벼랑 위의 포뇨>나 <붉은 돼지>는 기대했던 것만큼 그리 좋지는 않았다. 그래도 나는 '미야자키 하야오'라면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애니메이션 분야의 '대가'라고 인정하고 있다. 사실 미야자키 하야오야 나같은 사람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다고 여기겠지만.
이 책은 내가 그렇게 인정하고 있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어린이책에 대해서 쓴 책이다. 정말 멋지다. 앞부분에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고른 50권의 책들이 짤막한 추천의 글과 함께 소개되고 있고, 뒷부분에는 어린이책에 대한 미야자키 하야오의 생각들이 편안하고 솔직하게 적혀있다. 그 솔직하고 편안한 글이 참 반갑고 신선했다. 어린이 독서지도에 대한 책들을 읽다보면 '부모가 책을 읽는 모습을 많이 보여주면 아이가 책을 좋아하는 아이로 자란다'거나 '책을 많이 읽으면 아이에게 이러저러한 능력이 향상되어 학업성적이 좋아진다'는 투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데 난 그런 글들을 읽을 때마다 정말 그럴까는 의문이 있었다. 물론 어느 정도 상관관계가 있을 수는 있지만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았다. 우리 막내만 하더라도, 우리나라 성인 평균 독서량을 훨씬 웃돌게 책을 읽는 엄마가 있지만 책읽기보다 밖에 나가 뛰어놀기를 훨씬 더 많이 좋아하고, 책은 잠자리에서 내가 읽어주는 정도로만 만족하고 있다. 책을 많이 읽은 아이가 성적이 높다는 것도 아이마다 다른 것 같다. 책을 많이 읽은 아이는 세상과 자기 자신에 대한 생각이 깊고도 많아서 오히려 학교 공부에 대해 회의를 느끼고 시시하게 여기는 경우도 있으니까. 그런데도 가끔 책읽기가 아이에게 장차 성공과 눈부신 영광을 가져다 줄 것처럼 써놓은 책들을 만날 때면 씁쓸해지곤 했다. 하지만 이 책에서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렇게 말한다.
책에는 효과 같은 게 없습니다. ‘이제야 되돌아보니 효과가 있었구나’하고 알 뿐입니다. 그때 그 책이 자신에게 이러저러한 의미가 있었음을 수십 년이 지나고 나서야 깨닫는 것입니다.
효과를 보려고 책을 건넨다는 발상은 그만두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읽히려고 해도 아이들은 읽지 않습니다. 부모가 열심히 읽으면 아이가 읽지 않는다거나 오빠가 열심히 읽으면 여동생이 읽지 않거나 합니다. 책을 읽는다고 다 좋은 것도 아닙니다. 책만 읽는 아이는 일종의 외로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밖에서 놀면 바빠서 그럴 겨를이 없으니까요.
책을 읽어야 생각이 깊어진다는 말은 생각하지 말기로 합시다. 책을 읽는다고 훌륭해지는 것도 아니니까요. 독서라는 것은 어떤 효과가 있다든가 하는 문제가 아니니까요. 그보다는 어렸을 때 “역시 이것”이라 할 만큼 자신에게 아주 중요한 한 권을 만나는 일이 더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141쪽)
이 문장을 읽었을 때, 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어른들이, 특히나 부모나 선생님들이 아이들의 책읽기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과 기대치가 너무 무겁고 아득해 보이곤 했다. 학문을 중요시했던 전통 때문인지 우리는 책읽기를 자꾸 뭔가를 배우고 익히는 활동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고, 그런 점이 오히려 책을 읽고 즐거워할 기회를 아이들 뿐아니라 우리 스스로에게서도 빼앗고 있는 것 같다.
놀랍게도 미야자키 하야오는 대학시절 어린이문학연구회에 발을 담그고 있었고, 처음 애니메이션 회사에 들어간 신입 시절에는 회사 책장에 있는 어린이책(소년문고)들을 마구마구 읽었었다고 한다. 그것이 그 후 애니메이션을 만들어가는 데 큰 도움이 된 것은 너무 뻔한 일이다. 어린이책을 읽은 것이 어마어마한 효과를 발휘한 것이지만 그가 그런 효과가 나타나길 기대하면서 작정하고 소년문고 책들을 읽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효과를 기대했더라도 재미있고 즐겁지 않았다면 그렇게 읽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사람은 유익함을 위해서는 조금 움직이지만 재미와 즐거움을 위해서는 많이 움직이는 법이니까. (나만 그런건가?)
예를 들어 가도노 에이코의 『마녀 배달부』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들 때, ‘주인공 여자아이를 어떤 식으로 그릴까? 아하, 이거라면 교과서가 잔뜩 있지’하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어린이책을 많이 읽었기 때문이지요. 어떤 책이 모델인지 알 수 없고 제목을 콕 집어 말할 수도 없지만, 어린이책에 많이 등장하는 시절의 아이가 저절로 떠오르는 겁니다.
뭐랄까 내 안에 서랍 같은 게 있는 듯했습니다. 언제 읽었는지 기억하진 못하지만 무언가 가득 담겨 있었지요.
(105쪽)
책을 읽는다는 건 그의 말대로 내 안에 서랍 같은 것을 만드는 일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말끔하고 반듯반듯하게 각을 맞춰 정리가 되어 있는 서랍이 아니다. 뒤죽박죽 흐트러지고 어질러져 있어서 뭐가 어디에 들어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엉망진창의 여러 칸의 서랍. 하지만 뭔가 반짝 떠오르면 마법처럼 서랍 하나가 스르륵 열리고 반짝 떠오른 생각과 상상들을 좀 더 자세히, 길게 이어가도록 신비한 힘을 보태어 주는 거다.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이런 서랍을 만들어 준다 생각하고 책을 읽어준다면 고르는 책부터 좀 달라지지 않을까? 쏟아져 나오는 어린이책들을 보면 지식정보책의 출판 비중이 참 많이 증가한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건 어른들이 아이에게 문학보다는 지식과 정보 전달의 도구로 책을 이용하고 있다는 반증이 아닐까.
내가 읽고 뜨끔했던 문장도 있다.
홋타 요시에가 젊어서 특별고등경찰을 피해 친구의 산속 오두막집에 숨어 지낼 때의 이야기를 읽어도, 하루 세 끼 밥을 직접 지었더니 그것만으로 하루가 끝나버려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며 산을 내려옵니다. 그럴 때 밥 짓는 일에 열중할 수 있는 사람과 밥이나 짓고 있으면 뭔가를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이 있는 겁니다. ‘그렇구나, 홋타 요시에는 뭔가를 생각하기 위해 살았구나’하면서 저는 몰라도 당연하다고 생각해 버렸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어 뭔가를 생각해주니까 됐어’하고 마는 거죠.
홋타 요시에가 누군지, 뭐하던 사람인지는 잘 모르지만 '하루 세 끼 밥을 직접 지었더니 그것만으로도 하루가 끝나버려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게 되었다며' 산을 내려왔다는 이야기에 난 '나도 그런데!;하고 생각했다 . 아마도 하루 세 끼 밥을 직접 지어야 하는 전업주부들은 거의 다 그의 생각과 비슷할 것 같다. 나도 집중해서 책을 읽고, 읽은 책을 음미하면서 몇 자 끄적일 수 있는 시간이 일주일에 하루만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가 많다. 책을 읽고 있으면 5분마다 "엄마"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리고, 책을 읽다가 아이를 데리러 갈 시간이 되지는 않았나, 저녁 식사를 준비할 시간이 된 건 아닌가 불안해서 자꾸 시계를 봐야 하는 이 어수선한 일상은, 읽고 있는 책이 얼마나 재미있는가와 비례해서 짜증스럽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위의 저 문장들을 만나고나니까 내가 '밥 짓는 일에 열중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 갑자기 부끄러웠다. '밥이나 짓고 있으면 뭔가를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창피했다. 하지만 나는 홋타 요시에라는 사람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밥 짓는 일뿐 아니라 아이들을 챙기고 빨래를 하고 집안을 정리하다 보면 나 자신이 끝도 없이 소비되고, 그렇게 야금야금 조금씩 조금씩 닳아서 없어져버릴 것민 같은 불안감이 밀려들곤 하는데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것을 헤아리고 이해하기란 무리였는지도 모른다. 앞으로는 밥을 짓고, 국과 찌개를 끓이고, 파를 다듬고, 두부를 썰고, 콩나물을 무치고, 생선을 굽고,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널고, 청소기를 돌리고 걸레질을 하는 일에 열중도 하고 생각도 끊어지지 않게 이어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가끔은 나도 산을 내려가서 밥 짓는 일을 그만하고 싶어질 때도 있는 것이다.
이 책의 백미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어린이책에 대한 생각이다.
어린이문학은 “다시 해볼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로버트 웨스톨(Robert Westall) 같은 작가는 다시 해볼 수 없는 이야기를 썼지요. 하지만 작품 속 아버지, 즉 아버지 역할을 하는 사람을 높이 평가한 것을 보면 그이도 이 세상은 끔찍하지만 그래도 살 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83쪽)
어린이문학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 이것이 인간이라는 존재다”하고 인간 존재에 대해 엄격하고 비판적인 문학과는 달리 “태어나길 정말 잘했다“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살아 있어 다행이다. 살아도 된다“라는 응원을 아이들에게 보내려는 마음이 어린이문학이 생겨난 출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155쪽)
그래, 이게 바로 어린이문학의 가치이고, 우리가 어린이문학을 소중히 여겨야 하는 이유이고, 아이들에게 어린이문학을 읽어줘야 하는 까닭이다. 앞으로 아이가 승승장구해서 일류대에 가고 출세하고 성공하고 잘 먹고 잘 살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이가 살아가다가 어떤 어려움을 만나더라도 그것을 넘어설 수 있도록 지금부터 좋은 어린이책을 골라 정성껏 읽어주며 미리미리 응원하고 격려해주는 것이다.
그가 세상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그만큼 미야자키 하야오는 아이들에게 좋은 어린이책을 더 읽을 수 있도록 해주고 싶었을 것 같다. 그는 이 시대를 '바람이 부는 시대'라고 말한다.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최근 20년 동안, 일본에서는 경제 이야기만 해왔습니다. 마치 터질 만큼 물이 가득 찬 풍선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습니다. 언제 터질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영상과 게임과 소비에 빠져들면서, 개를 키우고 건강과 연금 걱정을 하고 조바심을 내면서, 결국 경제 이야기만 해왔습니다. 불안만큼은 착착 부풀어 올라 스무 살 젊은이와 예순 살 늙은이가 다르지 않게 되었습니다. …돌연 역사의 수레바퀴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살아가기 어려운 시대의 막이 오른 것입니다. 일본만이 아닙니다. 파국은 세계적 규모입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제정신을 잃지 않고 살아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145쪽)
아마도 우리 아이들은 나보다 더 불안한 시대를 살아가야 할 운명을 타고난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미야자키 하야오는 아이들에게 '책으로 가는 문'을 열어주고 싶은 마음으로 이 책을 내게 된 것 아닐까. 거기서 힘을 얻고 용기를 얻어서 앞으로의 인생을 무사히 잘 살아달라고, 할 수만 있다면 역사의 수레바퀴가 좀 더 좋은 방향으로 굴러갈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앞에서도 말했듯이 난 이 책을 읽기 전부터 미야자키 하야오에게 막연한 신뢰를 보내던 사람이었지만 이 책을 읽고부터는 왜 이 사람이 믿을만한지 이유가 분명해졌다. 어린이책을 좋아하고 어린이책에 대한 가치를 이만큼 분명하고 올바르게 이해하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신뢰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의 바람대로 '책으로 가는 문'을 향해서 모든 아이들이 달려와준다면 얼마나 기쁘고 다행스러운 일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