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유 작가의 <폭력과 존엄 사이 - 간첩 조작 사건 피해자를 만나다>의 '들어가는 말'에서 "잠깐 내린 눈"이라는 말이 나온다. 간첩의 누명을 쓰고 복역했던 국가 폭력의 피해자들 7명을 인터뷰 했다. 그 중 고 심진구와 부인인 이정미 두 사람은 노동 운동을 하다가 만났고 결혼한 지 한 달 만에 심진구가 집 앞에서 검은 승용차에 태워져 사라졌다. 왜, 어디로 끌려갔는지 몰라 가슴을 졸이다가 열흘 만에 안기부에서 연락을 받고 잠깐 남편을 만나러 갔는데 차를 빼러 간 안기부 직원을 피해 1~2분이나 될까 말까 한 순간 남편 심진구가 말하길 "나를 간첩으로 몰고 있다. 사람들에게 알려라." 라고 말했다. 간첩이라니... 그 순간 첫눈 같은 게 내렸고 그 기억이 콕 박혔다고 이정미는 반복적으로 진술했다. 


  "잠깐 내린 눈. 간첩이라는 번갯불 같은 말이 내리치는 순간 하얀 눈이 내렸다는 것. 어쩐지 몽환적인 그 상황을 나도 가만히 그려 보았다. 잠깐 내린 눈. 받아들이기 벅찬 현실을 위로하기 위해 하늘이 뿌린 선물이었을까. 가장 절망적인 순간을 가장 아름답게 기억하도록 하는 자연의 신비인가... ...  잠깐 내린 눈. 아무도 보지 못한 사이에 발생한 일, 손등에 눈을 맞은 사람만 아는 일, 그렇지 않은 사람은 믿어주지 않는 일. 그 어떤 삶의 지독한 장난도 돌이켜보면 또 잠깐 내린 눈 같은 순간의 일. 무죄 판결의 기쁨도 오래 머물지 않고 금세 시든다는 점에서 잠깐 내린 눈 같은 것. 잡힐 듯이 잡히지 않는 환영."(14~15쪽) 



간첩조작 사건 피해자란 낯선 존재. 그간 살면서 직간접적으로 접점이 없었기에 아무런 상이 잡히지 않는다. 은유 작가도 그렇지만 이 책을 읽는 지금의 나도 마찬가지이다. 티비 뉴스에서나 들을 법한 너무나 멀고 피상적인 존재들. 

그러나 은유 작가는 다시 말한다. "폭력과 존엄 사이를 눈물, 연민, 인식, 성찰, 화해, 신의로 채운 묵직한 생애 서사는 물론이고 소소한 에피소드도 뭉클하고 재미나"지만 감옥에서의 삶을 말하는 또 다른 피해자 박순애는 '감옥 이야기'를 말할 때 가장 많이 고개를 뒤로 젖히고 웃었다. 김평강은 감옥에서 대접받고 잘 지냈다며 출소할 때 통통하게 살이 올랐다는 이야기. 이것은 감옥도 사람 사는 곳이니 살만하다는 말이 아니라, 사람을 살게 하는 것은 장소의 여건보다 '관계의 질'이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자신의 결백을 알아주는 주위 동료들이 있고 말이 통하는 벗, 책이 있어 나의 고통을 나눌 수 있고 의지가 될 때 비로소 감옥도 살만하다고 느꼈던 거 아닐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 국가 폭력의 피해자로 억울한 옥살이를 5년(김순자), 7년(김평강), 12년(박순애), 15년(김흥수), 17년(이성희), 납북 어부였다가 1 년 만에 무사귀환, 다시 간첩으로 몰려 13년의 옥살이(김용태). 어떻게 살아낼 수 있었을까. 이 책에 나오는 어르신들을 보면서 그 역경들을 대하는 태도와 망가진 일상을  복구하는 데 있어 타인과의 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을, 좋은 직업을 택하고 좋은 배우자를 만나고 좋은 집에 살고 좋은 책을 만나는 것이 반드시 좋은 삶의 태도는 아니라는 것을, 인위적인 폭력 앞에 침몰하지 않고 그 사건을 계기로 다른 세상으로 이동했다는 것을, 그래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변신했다는 것을, 진실한 사랑을 실천하는 큰 사람으로 존재했다는 것을. 기억하자!  



이번주는 지난 번 내린 비에 건조했던 대기의 먼지도 쓸려 가 공기의 질도 최상이고 서늘한데 햇살은 찬란해서 장마가 오기 전 최상의 날씨를 선사해 주고 있다. 실제 인터뷰이들의 삶이 어떠했을지 세세한 부분들을 읽다 보니 나도 모르게 가슴에 울분이 차오르면서 화가 나지만...  그저 흥분하지 않고 담담하게 읽어보겠다. 들을 수 있는 귀를 열어 놓겠다. "잠깐 내린 눈"처럼 작은 위안이 되어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은유 작가의 인용구를 남겨 놓아야겠다. 



















우리가 보는 것은 피와 살로 고동치는 삶의 어느 한 부분이다.     -로자 룩셈부르크



우리가 타인과 공유하는 이 세상에 인간의 사악함이 빚어낸 고통이 얼마나 많은지를 인정하고, 그런 자각을 넓혀가는 것도 아직까지는 그 자체로 훌륭한 일인 듯하다. 이 세상에 온갖 악행이 존재하고 있다는 데 매번 놀라는 사람, 인간이 얼마나 섬뜩한 방식으로 타인에게 잔인한 해코지를 손수 저지를 수 있는지 보여주는 증거를 볼 때마다 끊임없이 환멸을 느끼는 사람은 도덕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아직 성숙하지 못한 인물이다. 나이가 얼마나 됐든지 간에, 무릇 사람이라면 이럴 정도로 무지할 뿐만 아니라 세상만사를 망각할 만큼 순수하고 천박해질 수 있을 권리가 전혀 없다. - 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 167쪽



사람은 삶의 주기성을 제대로 까닫지 못하거나 늦게, 너무 늦게 깨닫는다. 왜냐하면 경험이 쌓여야 알 수 있는 문제인데 누적된 증거가 없는 탓이다. 삶의 후반기에 이르러서야 주기성의 법칙을 확실히 깨닫게 되고 어떤 것이 지속되리라는 희망이나 두려움이 없어진다. 젊은이의 슬픔이 너무도 절망에 가까운 것은 젊음의 무지 때문이다. 젊은 시절 위대한 성취를 꿈꾸는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삶은 너무나 길어 보이고, 너무도 많은 것을 담을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삶에 필요한, 삶이 가져야만 하는 그 모든 간격 - 열망과 열망, 행동과 행동 사이의 간격, 잠을 위해 멈추는 시간들처럼 피할 수 없는 멈춤들 - 을 모르기 때문이다. 또한 숨 돌릴 휴지기가 어김없이 찾아온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불행한 젊은이에게 삶이란 불가능해 보인다. 사람의 일에는 밀물과 썰물이 있다는 셰익스피어의 구절에 더 미묘한 뜻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마음의 평화가 있으리라. 

                                             - 엘리스 메이넬 <삶의 리듬>, 《천천히 스미는》, 84쪽



어둠 속에서 나는 삶을 향해 미소를 지어. 마치 악하고 슬픈 모든 것은 거짓임을 확인하고 그 모든 걸 순전한 빛과 행복으로 바꾸어내는 어떤 마법 같은 비결을 알아내기라도 한 사람처럼 말이야. 그리고 줄곧 내 자신 안에서 이런 기쁨의 이유를 찾아보려 하지만 아무것도 찾지 못한 채 그저 다시 스스로에게 미소를 짓는 수밖에. 스스로를 비웃기도 하고. 비결은 결국 삶 그 자체인 것 같아.        - 케이트 에번스, 《레드 로자》, 1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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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림의 야수
헨리 제임스 지음, 조애리 옮김 / 민음사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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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들 내면의 독백과 심리 묘사가 정말 탁월하다. 인간세상, 혹은 황폐한 자아의 밀림에서 야수가 무엇일지 생각해 보게 만드는 멋진 단편. 최고는 ‘밀림의 야수. ‘인생의 의미를 너무 늦게 알아버린 주인공의 서사와 마지막에서야 깨닫게 되는 삶의 진실에 비로소 아!... 하는 탄식만이 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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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4-06-26 17: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기 탄식 챙겨가세요~~

은하수 2024-06-26 19:02   좋아요 0 | URL
세상에 이런 탄식을 유발하는 작가들이 왜 이리 많을까요???
저 어제 늦은 밤? 새벽? 에 단편 ‘밝은모퉁이 집‘ 읽다 진심 기절할 뻔요...
너무 무섭더라고요...
 

잠깐 내린 눈

우리가 보는 것은 피와 살로 고동치는삶의 어느 한 부분이다.- 로자 룩셈부르크

간첩 조작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자백>을 보던 날, 영화를 보는 내내 울던 친구는 극장을 나서며 한숨 쉬듯 말을 뱉었다. "저 억울함을 안고 어떻게 살았을까." 사소한 억울함도 참지 못하는 게 사람인데 저토록 큰 사건에 휘말려 육신을 몰수하는 고문을 겪고 간첩의 멍에를 지고 사는 삶이라니. 감히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다. - P7

이 책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억울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죄 없는 사람을 죄인으로 만드는 불공정한 일은 어째서 발생하는가. 국가라는 추상적 실체가 폭군처럼 들이닥칠때 일상은 어떻게 파괴되는가. 그 폐허 위에서 또 다가오는 하루를 누구와 어떻게 살아가는가, 망가진 일상을 복구하는 힘은
무엇인가. ‘왜 하필 나일까‘라는 물음의 도돌이표를
어떻게 안고 사는가, 그런 이야기를 담아냈다. - P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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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초인종 소리를 듣고 나간 문지기의 아내가 
"신사 한 분이 숙녀분과 함께 오셨습니다. 선생님." 
하고 알렸다. 나는 그즈음 늘 그랬듯이 - 소원이 생각을 낳는 법이므로 바로 초상화를 그려 달라고 부탁할 남녀를 떠올렸다. 실제로 그들은 초상화를 부탁하러 온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원하던 부탁은 아니었다. 첫눈에 두 사람은 어느 모로 보나 초상화를 부탁할듯 보였다. 
신사는 50세 정도였는데, 키가 훌쩍 크고 자세가 아주 꼿꼿한 데다, 약간 백발이 섞인 턱수염을
 기른 모습이 지금 입고 있는 진회색 코트와 썩 잘 어울렸다. 코트나 턱수염을 보면, 직업적 관점에서 내가 이발사나 재단사라는 뜻은 아니다. 유명 인사처럼 보이기도 했다. 흔히 유명 인사가 저토록 인상적일 수 있다면 말이다. 하지만 내가 살면서 알게 된 진실은, 잘생긴 사람치고 유명 인사는 거의 없다는 점이다.  - P7

밀림의 야수

그를 깜짝 놀라게 한 그 이야기가 왜 나왔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아마 그녀와 재회한 뒤, 그 저택을 천천히 거닐다가 무심코 내뱉은 말 때문이었으리라. 그는 한두 시간 전에 다른 집을 방문했다가, 친구들과 함께 그 당시 그녀가 머물던 저택으로 온 참이었다. 그는 언제나처럼 사람들 속에 묻혀 있었다. 그런데 먼저 방문했던 집의 손님이 모두 초대받은 바람에 그는 덩달아 따라왔고, 이 저택에서 점심 식사를 하게 되었다. - P47

진정으로 그녀를 사랑했다면 운명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 인생다운 인생을 살 수 있었다. 그를 위해 살았고 그를 사랑했던 그녀의 인생이야말로 삶다운 삶이었다. 그녀가 어떠한 열정을 품고 살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반면 그는 소름 끼칠 정도로 이기심에 사로잡힌 채 자신의 필요에 따라서만 그녀를 판단했다. (그 사실이 그를 숨 막히게 했다.)  - P112

돌연 그녀의 말이 다시 떠오르면서 온갖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가 늘 기다려 온 야수는 정말로 숨어 있다가 운명의 순간에 튀어나온 것이었다. 바로 그 쌀쌀한 4월, 해질녘에. 그때 그녀는 병을 앓았고 창백하게 여위었지만 매우 아름다웠다. 그때라도 그가 알았더라면 그녀의 아름다움을 회복해 주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아픈 몸을 의자에서 일으켜세운 뒤 그의 앞에 서서 그가 상상하고 추측할 수 있게 해 주었다. - P112

 하지만 그 상황에서조차 그는 전혀 헤아리지 못했고, 결국 야수는 튀어나오고 말았다. 그녀가 절망하며 돌아선 그 순간 야수는 뛰쳐나왔고, 그가 그녀의 집을 나서려 할 때 운명의 징표 역시 떨어질 장소에 떨어져 버렸다. 그는 자신의 두려움을 정당화해 왔다. 그것이 바로 그의 운명이었다. 그는 운명이 정한 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확실하게 실패했다. 그가 몰랐으면 좋겠다는 그녀의 말이 떠오르자, 이제야 신음이 새어나왔다. 이런 끔찍한 깨달음, 이것이야말로 앎이었다.  - P112

그 사실을 알고 나니 눈물마저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그 앎을 붙들려고 했다. 아니, 그것을 눈앞에 똑바로 세워 놓고 자기 안으로 받아들이고자 했다. 이미 너무 때늦고 처참했지만, 적어도 스스로가 살아 있음을 생생하게 느꼈다. 그러나 그 고통 때문에 구역질이
났다. 진실에 의해 적나라하게 드러난 자신의 모습에서 예정대로 실현된 운명의 끔찍한 형상을
본 느낌이었다. - P113

그는 자신의 삶이라는 밀림을 보았고, 거기에 숨어 있던 야수도 보았다. 그리고 그 끔찍하고 거대한 야수가 그를 덮치려고 공중으로 뛰어오르는 모습을 보았다. 눈앞이 깜깜해졌다. 그 야수가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본능적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환상 속의 야수를 피하기 위해 그는 본능적으로 무덤 위에 몸을 던졌다. - P113

밝은 모퉁이 집

"사람들은 내 ‘생각‘이 뭔지 일일이 묻죠." 스펜서 브라이든이 스테이버튼 양에게 말했다. "성의껏 대답하는 편이에요. 때론 되묻기도 하고 회피하기도 하고 얼렁뚱땅 미루기도 하면서 말입니다." 그는 계속 말했다. "사실 묻는 사람에게 내 대답은 별 의미가 없어요. 묻는다고 속내를 다 털어놓을 수는 없잖아요. 그러나 굳이 내 ‘의견‘을 밝히자면, 뭐 나 자신에 대한생각만으로도 벅찹니다." - P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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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메시스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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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을 때리는 가장 치명적인 말이 바로 ‘네메시스,징벌‘, 과도한 책임감으로 자신의 잘못이 아닌 것에 책임을 지려하는,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체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엄격한 선을 천성적으로 짊어지고 있고 그 한계를 인정하면 반드시 그것이 죄책감으로 이어진다니.. 아 미치겠다.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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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06-24 20: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락방이 이 구매자평을 좋아합니다 ㅋㅋㅋㅋㅋ

다락방 2024-06-24 20: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정말 미치겠죠. 저는 아 너무해, 아 너무해 했습니다.

은하수 2024-06-24 21:04   좋아요 0 | URL
저도 그랬어요. 전 읽다가 절정 무렵이면 차마 뒤를 잘 못읽거든요. 이 책은 얇은데도 그 병이 도져서 한동안 못읽었잖아요. 너무 가슴 아플거 같아서요 ㅠ.ㅠ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 도저히 리뷰를 쓸 수 없단 것이... 좀 아쉽긴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