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짜기의 백합>
30 여년만에 다시 읽는 발자크의 <골짜기의 백합>
펠릭스가 모르소프 백작부인을 ‘골짜기의 백합‘이라 명명한 그 문장들을 다시 읽으니 왠지 감회가 새롭다.




이 광경을 보고 지루한 황야와 고단한 행로로 지쳤던 나는 환희에 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모든 여성 중의 꽃인 그 여인이 세상 어디선가 살고 있다면 바로 이곳일 테지!‘ 라고 생각하며 호두나무에 기댔다. 그날 이후 사랑하는 골짜기에 돌아올 때마다 나는 그 호두나무 밑에서 쉬어 갔다. 그 나무에게 속내를 털어놓고, 매번 그 밑에서 내가 마지막으로 그곳을 떠난 후로 겪은 변화들에 대해 성찰하곤 한다.  - P34

그녀는 그곳에 있었다. 내 가슴은나를 속이는 법이 없었으니까. 광야의 경사면에서 내가 본 첫 번째 성이 그녀의 거처였다. 호두나무 밑에서 보니 슬레이트 기와와 유리창은 정오의 태양에 반짝거렸다. 그녀의 면 드레스가 포도밭의 살구나무 밑에 흰 점을 찍었다. 아직은 아무것도 모르는 당신도 이미 짐작했겠지만, 그녀는 이 ‘골짜기의 백합‘이었다. 
그녀는 하늘의 은총을 받고 피어나고 있었으며, 그 고결한 향기는 골짜기를 채웠다.  - 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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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타자의 목소리, 나의 목소리
-기차 밖의 타자는 희망인가? : 설국열차, 부산행,
스테이션 에이전트

이제까지 예술작품의 감상은 작가의 의도대로 혹은 감독의 의도대로 받아들인 편이었는데, 그럴 필요가 없는 거였구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의도대로 그냥 받아들인 것 같은 생각이 강하게 든다.
작가님 글 읽으며 다시 한번 생각을 가다듬는다.
내 안의 타자성을 존중해야 하다고, 그리고 그들이 나의 타자성을 규정해선 안된다는 것을 깨닫기를...
그러니 작가님은 오래오래 부끄럼없이 글 써주시기를...
응원하는 독자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를...

감독들은 왜 다들, 그토록 주체인가
근대성이라는 기차는 처음부터 불균등 발전을 의미했다. 이제 불균등 발전은 극단의 양극화를 넘어 지구 자체를 망하게 하고 있다.
기존의 사고방식을 고수하면 모두가 망한다는 진실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 ‘쓰레기 식민주의‘,  가만히 앉아서 물과 식량을 잃는 사람들, 
매일매일의 내전, 피 묻은 다이아몬드,
녹아버리는 거대한 빙하, 죽은 고래 몸속에든 8킬로그램의 비닐, 바다 위에서 사라지지 않는 스티로폼 부표, 고용 없는 성장... .... 
이제 기차는 계속 달릴 수 없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예술가들은 이제까지 근대의 주체가 아니었던 여자, 아이, 장애인, 자연
을 기차 밖에 살게 하거나 생존자로 만든다. 
그렇다면 이 타자들은 진정 인류를 구원할 수 
있을까? 여성과 아이, 동물은 오염되지 않았는가. 그렇지 않다. 이들도 순수하지 않다. 이들이 순수하기를 바라는 누군가의 희망 사항일 뿐이다.

내게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감독 자신이,
예술가 자신이 스스로 타자가 될 생각은 왜하지 않는가. 그들은 왜 항상 주체이고, 주체를 구원할 수 있는 대상조차 지정할 수 있는조물주인가. 
여성이고 아이들이라고 해서 ‘착하다‘고 
생각하지 말기를.

새로운 주체는 기차 밖에 있다고 해서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기존의 주체는 스스로 ‘꺼지면‘ 안 되는가. 
자리에서 내려오라. 
인류와 지구를 해방하려 하지 말고 그냥 하방하라. 

팬데믹 시대의 구원은 우리 모두 ‘섬싱(something)‘이 되고자 했던 의지를 버리고,자연의 일부인
 ‘낫싱(nothing)‘임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갈팡질팡하는 삶의 한가운데서, 글쓰기를 포기하지
못하는 나의 의지가 부끄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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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섬에서 가장 먼저 사라진 것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가끔 생각한다.
"네가 태어나기 한참 전에, 이곳에는 훨씬 많은 것들이 있었단다. 투명한 것, 향기로운 것, 하늘하늘한 것, 반들반들한 것・・・・・・전부 네가 상상도 못할 만큼 멋진 것들이었지."
어릴 적에 어머니는 자주 그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 P5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섬 사람들은 그렇게 멋진 것들을 영원히 마음속에 간직할 수 없어. 섬에 사는 한 마음속에 있는 것들을 순서대로 하나씩 잃어버릴 수밖에 없지. 조금 있으면 너도 처음으로 뭔가를 잃을 때가 올 거야."
"그거 무서운 일이야?"
걱정이 된 나는 어머니에게 물어보았다. - P5

"아니, 괜찮아. 아프지도 괴롭지도 않으니까. 아침에 침대에서 눈을 뜨면 어느새 다 끝나 있거든. 가만히 눈을 감고 귀기울여 아침 공기의 흐름을 느껴보렴. 어딘가가 어제와 다를 거야. 그러면 자기가 뭘 잃었는지, 섬에서 뭐가 사라졌는지 알 수 있단다." - P6

"소멸이 일어나면 한동안 섬이 어수선해져. 다들 길거리 여기저기 모여서 사라진 것에 대한 추억을 이야기해. 그리워하고, 서글퍼하고, 위로를 나누지. 만약 그것이 형체를 지닌 물건이라면 모두 들고 나와서 불태우거나 땅에 묻거나 강에 흘려보낸단다. 하지만 그런 동요도 이삼일이면 가라앉지. 사람들은 금방 원래의 일상을 되찾아. 무엇을 잃었는지조차 떠올리지 못하게 되는 거야." - P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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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또 하나의 ‘이름 없는 문제‘ 중에서...

오늘날에는 어느 집을 봐도 일과 가정, 직업 세계와 가정 생활사이에 균형을 잡느라 부부들이 이만저만 고전 중이 아니다. 이전 어느 때보다 더 그렇다. 우리 사회는 돌봄영역caregiving이 현 세대와 미래 세대에게 갖는 중요성과 가치를 정신이 번쩍 들게 깨닫고 있다.
또한 우리 사회는 돌봄의 부담이 개개인에게 일으키는 전체 비용도더 온전히 깨닫기 시작했다. 돌봄의 책임은 한부모 가정의 엄마나 아빠에게 특히 막대한 부담이 될 뿐 아니라, 다른 가정에도 소득의 상실, 커리어의 정체, 공평한 부부 관계를 희생해야만 하는 선택(이성커플, 동성 커플 모두 마찬가지이다)과 같은 형태로 비용을 일으킨다. 코로나 전에도 몰랐던 건 아니지만, 코로나 상황에서 너무나 극명하게체감되면서 이 문제는 이제 우리 사회의 긴요한 관심사가 되었다. - P9

1963년에 베티 프리단Betty Friedan 은 대학 나온 여성들이 ‘전업맘‘이 되어 느끼는 좌절을 묘사하면서 이들이 ‘이름 없는 문제‘를 겪고 있다고 언급했다. 60년 가까이 지난 오늘날에는 대학 나온 여성 대부분이 직장에 다니지만, 똑같이 대학 나온 남자들에 비해 한참 못 미치는 소득과 승진을 보면서 여전히 옆으로 밀쳐지고 있다고 느낀다. 이 여성들도 이름 없는 문제를 겪고 있다. - P10

우리는 남녀의 경제적 평등이 전례 없이 달성된 시대를 살고 있지만 어느 면에서 우리 시대는 여전히 암흑시대다. 오늘날 노동과 돌봄의 구조는 남성만 커리어와 가정을 둘 다 가질 수 있었던 과거의유물이다. 우리의 경제 전체가 낡은 작동 양식 때문에 덫에 묶여 있고 의무를 분담하는 고릿적의 방식 때문에 훼손되고 있다. - 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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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성과 지성: 아이엠 낫 유어 니그로 중에서 ...

아이엠 낫 유어 니그로 ˝나는 흑인일 뿐이다.˝
미국 문학, 민권운동의 한 축으로 평가받는 흑인 작가 제임스 볼드윈을 기억하자.
˝마주한 모든 것을 바꿀 순 없지만, 마주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바꿀 수 없다.˝
<아이 엠 낫 유어 니그로> 각본집도 읽어봐야겠다!




‘아이 엠 낫 유어 니그로‘라는 제목은 맞는 주장이지만 코언의 노래와 달리 불편한 언설이다. 다소 자기 비하의 느낌도 있다. 한국의 매체들은 이 문장을 "나는 당신들의 검둥이가 아니다. 나는 인간이다"로 소개했는데(물론 이 대사가 나오기는 한다), 이 작품의 의미를 최악으로 전달했다고 생각한다. 

코언의 노래(I‘m your man)와 이 작품에 공통적으로 들어간 2인칭 소유격 대명사 ‘your‘는 의미심장하다.‘아이 엠 낫 유어 니그로‘에서 ‘your‘는 
나(흑인)는 당신(백인)이라는 주체(one)가 규정한타자(the others)가 아니라는 뜻이다. 

흑인은 흑인이지 백인과의 관계에 의해 정의될수 없다는 주장이다. 그러므로 "나는 무엇이 아니다"가 아니라 "나는 흑인일 뿐이다"라고 말해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백인 사회의 신문(訊問)에 대한 대답이 아니라, 누가 인간이고 그것은 누가 결정하는가를 되묻는 일이다.

인간(백인, 남성, 이성애자, 비장애인.....…)의 기준을 바꾸지 않은 상태에서 "나도 인간이다"라는 주장은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 누가 그 사회의 성원권을 갖춘 인간인가. 기준은사회마다 다르고, 매일매일 다르다. "태아는 인간이다/아니다" "짐승도 그런 짓은 안 할 것" "어떻게 인간이 그럴 수가 있냐"... ... 이처럼 인간의 개념은 보편적이지 않을뿐더러, 더 중요한 문제는 인간의 범주를 누가 정하는가라는 정치적 질문이다. 그것은 투쟁으로 정해지는 대단히 유동적인 개념이다.

인간과 인권의 개념은 선재하거나 당위적인 것이 아니라 맥락적이다.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사유를 요구하는 개념이다. ‘인권‘은 만사형통의 언어가 아니라 그 반대다. 상황이 발생한 맥락을 논의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다.

"백인도 인간, 흑인도 인간"은 규범이지 현실이 아니다. 〈아이 엠 낫 유어 니그로〉는 흑인의 인간 선언이 아니다. 흑인의 삶을 문제화(‘차별 고발‘)하는 텍스트가 아니라 백인의 시각을 근본적으로 질문하는 텍스트로 읽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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