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타자의 목소리, 나의 목소리
-기차 밖의 타자는 희망인가? : 설국열차, 부산행,
스테이션 에이전트
이제까지 예술작품의 감상은 작가의 의도대로 혹은 감독의 의도대로 받아들인 편이었는데, 그럴 필요가 없는 거였구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의도대로 그냥 받아들인 것 같은 생각이 강하게 든다.
작가님 글 읽으며 다시 한번 생각을 가다듬는다.
내 안의 타자성을 존중해야 하다고, 그리고 그들이 나의 타자성을 규정해선 안된다는 것을 깨닫기를...
그러니 작가님은 오래오래 부끄럼없이 글 써주시기를...
응원하는 독자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를...

감독들은 왜 다들, 그토록 주체인가 근대성이라는 기차는 처음부터 불균등 발전을 의미했다. 이제 불균등 발전은 극단의 양극화를 넘어 지구 자체를 망하게 하고 있다. 기존의 사고방식을 고수하면 모두가 망한다는 진실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 ‘쓰레기 식민주의‘, 가만히 앉아서 물과 식량을 잃는 사람들, 매일매일의 내전, 피 묻은 다이아몬드, 녹아버리는 거대한 빙하, 죽은 고래 몸속에든 8킬로그램의 비닐, 바다 위에서 사라지지 않는 스티로폼 부표, 고용 없는 성장... .... 이제 기차는 계속 달릴 수 없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예술가들은 이제까지 근대의 주체가 아니었던 여자, 아이, 장애인, 자연 을 기차 밖에 살게 하거나 생존자로 만든다. 그렇다면 이 타자들은 진정 인류를 구원할 수 있을까? 여성과 아이, 동물은 오염되지 않았는가. 그렇지 않다. 이들도 순수하지 않다. 이들이 순수하기를 바라는 누군가의 희망 사항일 뿐이다.
내게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감독 자신이, 예술가 자신이 스스로 타자가 될 생각은 왜하지 않는가. 그들은 왜 항상 주체이고, 주체를 구원할 수 있는 대상조차 지정할 수 있는조물주인가. 여성이고 아이들이라고 해서 ‘착하다‘고 생각하지 말기를.
새로운 주체는 기차 밖에 있다고 해서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기존의 주체는 스스로 ‘꺼지면‘ 안 되는가. 자리에서 내려오라. 인류와 지구를 해방하려 하지 말고 그냥 하방하라.
팬데믹 시대의 구원은 우리 모두 ‘섬싱(something)‘이 되고자 했던 의지를 버리고,자연의 일부인 ‘낫싱(nothing)‘임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갈팡질팡하는 삶의 한가운데서, 글쓰기를 포기하지 못하는 나의 의지가 부끄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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