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도회 이렌 네미롭스키 선집 1
이렌 네미롭스키 지음, 이상해 옮김 / 레모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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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의 묘미를 마음껏 만끽할 수 있다. <무도회>, <다른 젊은 여자>,<로즈 씨 이야기>, <그날 밤> 네 단편의 마지막 장면과 대화는 인생의 한 단면을 보여주면서도 한편으론 ‘그것이 인생!‘이라는 기나긴 삶의 진실을 여과없이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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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 씨 이야기>
 그런데 그가 갑자기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벌떡 몸을일으켰다. 누가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누가 그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로즈 씨! 로즈 씨세요?"
그는 한 자동차 창문에서 눈에 익은 얼굴을 보았다. 이름이 떠오르지는 않았다. 그 얼굴은 마치 다른 세계에서 솟아난 것처럼 보였다. 친구, 먼 친척, 관계가 있는 사람, 척진 사람, 아무렴 어떤가? 중요한 건 그 사람에게 차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다른 차들과 마찬가지로 보따리, 여자, 아이들로 가득했지만, 어쨌거나 그건 자동차였다. - P115

"내가 탈 만한 자리가 있나요?" 그가 소리쳤다. "내 자동차는 도둑맞았어요. 루앙에서부터 걸어왔는데 더는 한 발짝도 못 걷겠어요. 날 태워줘요, 제발!"
차 안에서 사람들이 의논했다. 한 여자가 소리쳤다.
"말도 안 돼!"
다른 여자가 말했다.
"곧 루아르강의 다리들을 폭파할 거야. 그러면 저 사람들은 못 건너가."
그러고는 창밖으로 몸을 내밀어 로즈 씨를 향해 소리쳤다.
"타세요. 탈 자리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디 보자...어쨌거나 재주껏 타세요." - P115

로즈 씨가 몸을 움직여 일어서다가 마르크를 떠올렸다.
"이 청년한테도 한 자리..."
"그건 불가능하네, 가엾은 친구"
"난 그를 두고는 가지 않을 거야." 로즈 씨가 
말했다.
너무나 피곤해서 그의 귀에는 자기 목소리가 
낯선 이의 목소리처럼 희미하고 아득하게 들렸다.
"친척인가?"
"아니, 아무 관계도 아니야. 하지만 부상을 당했어. 난 그를 두고 갈 수 없어."
"자리가 없네."
바로 그 순간, 누군가 소리를 질렀다.
"다리들! 다리들이 곧 폭파될 거야!"
자동차가 서둘러 출발했다. 로즈 씨는 눈을 질끈 감았다.
모든 게 끝이었다. 그는 이제 죽은 목숨이었다. 무엇 때문에? 그에게 아무것도 아닌 이 아이 때문에? 그는 옆에서 소리를 지르는 여자 목소리를 들었다. - P116

"사람들이 다리 위에 있어요! 사람들, 차들이 있다고요!"
그 혼란 속에서, 그 끔찍한 무질서 속에서, 다리가 너무 일찍 폭파되는 바람에 피난민의 차들이, 로즈 씨가 타기를거부했던 차까지도, 강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로즈 씨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덜덜 떨며 마르크 곁에 털썩 주저앉았다. 차에 타지 않은 덕분에 목숨을 부지했다는 사실을 희미하게 깨달으면서.
(1940) - P116

<그날 밤>
이상한 일이었다. 엄마의 말들은 빈약하고 서툴렀으며, 목소리도 고르고 단조로워서 정열적이지 않았다. 그랬다, 엄마에게는 열정의 흔적이 더는 남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엄마는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경험자의 권위를 갖고 있었다. 그녀는 음악가, 예술가, 천재적인 창조자가 망설이며,
틀려가며, 고쳐가며 <월광 소나타>를 연주하는 소녀들에게 말하듯 그 노처녀들에게 말하고 있었다. 어쩌다 내 아버지의 이름을 입에 올릴 때면, 엄마의 입술은 물어뜯는 것도 입을 맞추는 것도 아닌 묘한 움직임을 보였다. - P138

나는 엄마가 살아오면서 처음으로 자신의 사랑을 ‘말했다‘고 생각한다. 엄마는 강력한 경쟁자로 보이는 모든 여자에게 혐오감을 느꼈다. 그래서 엄마에게는 친구가 없었다.
하지만 함께 자란 그 세 사람은 안전했다. 그들이 엄마의 소중한 남자를 앗아갈 리는 없었으니까. 엄마는 그들에게 자신의 진심을 털어놓았다. 처음에는 망설이며 이야기를 시착했지만, 나중에는 기억의 물결에 휩쓸려갔다. 분명, 엄마가 말을 하면 할수록, 사랑은 떠나갔다. 마개를 열어놓은 향수병에서 향기가 날아가듯, 사랑은 그녀의 가슴에서 달아났다. 분명히 말하는데, 프랑스에서 첫 밤을 보낸 순간부터 엄마는 아버지를  잊기 시작했다. - P139

"하지만 언니가 아까는, 아까는..." 알베르트 이모가 외쳤다.
"아까는 내가 불행했다고 했지." 엄마가 끼어들었다. "사실이야. 난 네가 부러워. 너희의 평화로운 생활이 부러워. 하지만... 난 풍요로웠고, 가득 채워졌었어. 그런데 너희는 아무것도  누리지 못했지?"
그러자 나의 이모 알베르트가 뜨개질감을 떨어뜨리고는두 손으로 눈을 가리더니,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 P140

깜짝 놀란 엄마가 애석해하면서 천천히 몸을
일으켜 그녀를 달래러 갔다. 하지만 이모는 엄마를 뿌리쳤다.
"왜 그러니, 알베르트? 나도 알아, 이해해, 내가 가여워서우는구나..."
"언니가 가엽다고? 오! 천만에! 가여운 건 언니가 아니야."
그러고는 고통과 앙심이 묻어나는 말투로 덧붙였다.
"언니는 이 모든 걸 우리한테는 절대 얘기하지  말았어야 했어!"
(1942) - P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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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과 존엄 사이 - 간첩 조작 사건 피해자를 만나다 대한민국을 생각한다 29
은유 지음, 지금여기에 기획 / 오월의봄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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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적 폭력 앞에 한 개인은 얼마나 무기력한가. ˝그래도 되는˝사람은 하나도 없어야 한다. 그래도 진실은 언젠가는 밝혀진다. ‘간첩 조작 사건 무죄 목록‘이 너무 길어서 깜짝 놀랐다. 고문하던 그 사람들은 어디 숨어서 잘 살고 있을까? 결코 그래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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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도회>
I
캉프 부인이 공부방에 들어서면서 문을 하도 세게 닫는 바람에 샹들리에 유리 장식들이 일제히 흔들리며 맑고 가벼운 방울 소리를 냈다. 하지만 앙투아네트는 책상에 머리카락이 닿을 정도로 고개를 처박은 채 책 읽기를 멈추지 않았다. 캉프 부인은 아무 말없이 잠시 딸을 노려보았다. 그러고는 팔짱을 낀 채 앙투아네트 앞에 버티고 서서 소리쳤다.
"넌 엄마가 왔는데 고개도 안 드니? 계속 그렇게 엉덩이 붙이고 앉아 있을 거야? 참 대단도 하지. 미스 베티는 어디있니?" - P9

이제 앙투아네트는 일어서서 짝다리를 짚은 채 건들건들몸을 흔들고 있었다. 키가 크고 비쩍 마른 열네 살 여자아이, 젖살이 빠져서 어른들 눈에는 이목구비가 또렷이 구별되지 않아 둥글고 밝은 얼룩처럼 보이는 그 나이 특유의 창백한 얼굴, 그늘진 두 눈 위로 내리깐 눈꺼풀, 꽉 다문 작은 입을... 그리고 꽉 끼는 교복 아래로 봉긋 솟아올라, 가냘픈 아이의 몸을 부끄럽고 불편하게 하는 가슴, 커다란 두 발, 붉은 손과 잉크가 묻은 손가락들, 언젠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팔이 될지 모를(누가 알겠는가?), 긴 작대기 같은 양팔, 가느다란 목, 특색 없이 푸석하고 가벼운 단발. 그랬다. 앙투아네트는 사춘기였다. - P10

..... 가끔씩 죽이고 싶을 정도로, 칼로 얼굴을 그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혹은 발을 구르며 ‘아유, 정말 짜증 나!‘라고 소리치고 싶을 정도로 앙투아네트는 어른들이 미웠다. 하지만 그녀는 아주 어려서부터 부모를 무서워했다. 앙투아네트가 더 어렸을 때는,
엄마가 그녀를 무릎에 앉히고 꼭 껴안으며 쓰다듬어준 적도 꽤 있었다. 하지만 앙투아네트는 그때 일을 까맣게 잊었다. 대신 그녀는 머리 위로 날아드는 화난 목소리의 파편들을 내면 가장 깊은 곳에 간직하고 있었다.  - P11

<로즈 씨 이야기>
로즈 씨는 고양이처럼 신중하고 차분했다. 그는 순탄한삶을 살았고, 독신에다 부자이기도 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깔보는 것 같은 거만한 표정을 지어 사람들에게 거리감을 느끼게 했다.  - P89

 그는 세상이 멍청이들로 가득하다고 믿는것 같았다. 아니, 실제로 그렇게 믿었다. 어쩔 도리가 없다싶을 정도로. 나이가 쉰이 넘었지만 그의 아름다운 뺨에는기름기가 흘렀고, 목소리는 날카롭고 권위적이었다. 그는매사에 몸을 사리고 앞뒤를 쟀다. 그의 지하창고는 산해진미로 가득했다. 그는 몇 안 되는 친구들에게 아주 훌륭한 저녁 식사를 대접했다. 한 남자를 알려면, 그가 식탁에서, 또는 마음에 드는 여자 앞에서 어떻게 구는지 봐야 한다. 로즈씨는 과일을 깎을 때나 여자의 손을 어루만질 때나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부드러움과 신중함을 보였고, 섬세하지만 오래가진 못하는 욕망을 드러냈다. - 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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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에 나는 보안관찰을 받던 놈인데 내가 사라지니까 비상이 걸렸어. 삼척 집에 가서 김용태 어디 있는가 내놔라 하니까 우리 형님이 주소를 가르쳐준 거지. 나를 보더니만 ‘마산 동부경찰서까지 갑시다!‘ 하는 거야. ‘뭐 땜에 그래요?‘ 하니까 예비군 훈련을 안 받은 게 있어서 그것 때문에 나왔대. 나중에 보충교육 받으면 되는 거 아닙니까, 했더니 일단 가자네. 그럼 갑시다. 문 앞에 딱 나오는데 앞에 한 놈이 있고 뒤에 한 놈이 딱 있는데, 뒤에 한 놈이 내 옆구리에다 뭘 갖다가 퍽 들이대. 허튼짓하면 바로 쏴버린다 그래. 권총이야. 난 뭐 그래 예비군 교육 한번 안 받았다고 권총을 들이대나 황당하더라고. - P207

날 밀어넣더니 지들끼리 떠들어. ‘이 새끼 순순히 따라와?‘ ‘지가 안 따라오면 어쩔 건데.‘ ‘밥 챙겼어?‘ ‘안 먹였어요.‘
그러더니만 라면을 끓여서 왔는데 국물이 하나도 없어. 아마 내 생각엔 수프를 다 넣고 거기다 소금을 또 한주먹 넣었지 싶더라고, 라면을 먹어보니까 이게 짠 정도가 아니고 써서 못 먹겠어.
한 젓가락을 뜨고 딱 놓으니까 바로 날아와. ‘이 새끼야. 여기가 니 맘대로 처먹고 안 처먹고 하는 덴 줄 알아? 어서 처먹어!‘ - P207

그랬더니 백상지 갖다 주고 니가 태어나서 여기에 오기까지 있었던 일을 적어라 그래요. 진짜 아침에 무슨 밥을 먹고 점심에무슨 밥을 먹었는가 그것까지 다 쓰라는 거야. 3일 동안 잠도 안재우고 손가락이 아파서 못 쓸 정도로 반복시키더라고. 라면 그짠 걸 먹어가지고 갈증은 나지, 물 좀 달라니까 ‘야, 이 새끼야.
빨갱이 새끼한테 줄 물이 어디 있어‘ 또 두드려 패고. 내가 맞아서 정신 잃으면 머리에다가 물을 갖다가 부어버려. 깨워서 쓰고또 쓰고 딱 글을 쓰니까는 세 번째에 딱 그래. 이 새끼가 머리가보통 놈이 아니라면서 내용이 똑같다고 나보고 철저히 교육받아서 답변을 준비했다는 거라. 내가 이북에서 교육받은 내용을썼더니 교육받은 내용이 지령이라는 거라. 이북에서 교육을 받고 실행하려고 나와서 활동하는 거 아니냐고 하는데, 내가 ‘난수표가 뭡니까?‘ 했다니까. 난수표가 뭔지도 모르다가 고문받으면서 알았어요." - P208

김용태는 고문을 24일까지 버텼다. 바깥 세계와 단절된음습한 시멘트 바닥에서 일제강점기부터 전해오는 고문이란 고문은 다 당했다. 고춧가루 고문, 물고문, 전기고문. 그의 몸이기억하는 가장 힘든 고문은 손톱 밑에 이불 꿰매는 큰 바늘을찔러 넣는 것. 열 손톱이 부옇게 뜨면서 몸의 가장 끄트머리부터 심장까지 조여 오며 온몸으로 전기가 지지력 흘렀다. 24일동안 24시간 내내 그는 생과 사를 수도 없이 오갔다. - P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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