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거기 있었다
함정임 지음 / 현암사 / 202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바람이 분다. 살려고 해야 한다!

  거대한 바람이 내 책을 펼쳤다가 덮고

  부서지는 물결은 바위에서 용솟음친다.

    ... ...

  날아가라, 온통 눈부신 책장들아!

  부숴라, 파도야.

  부숴라, 내 환희의 물결로

  돛배들 쪼아대던 이 고요한 지붕을.

    ... ...

  아름다운 하늘, 진정한 하늘이여, 변해가는 나를 보라!

  (중략)

  나는 이 눈부신 공간에 나를 맡기니

  죽은 자들의 집 위로 내 그림자가 지나간다.


            ㅡ 폴 발레리, 「해변의 묘지」



함정임 작가의 《모든 것이 거기 있었다》의 부제가 '함정임의 유럽 묘지 기행'이다. 폴 발레리의 장시長詩 「해변의 묘지」를  읽고 이 시 한편에 홀려- 자그마치 8 년을 기다려 - 남프랑스 지중해 연안의 언덕에 펼쳐진 시인의 묘지를 찾아간다. 결과적으로 소설이 본업인 작가에게 또 하나의 길을 열어준 셈이 되었다. 대학 강의실에서 처음 접한 원서에 찍힌 '해변의 묘지'는 흑백으로 찍혀 있었는데 흑백에다 질이 좋지 않은 종이였음에도 작가에게는 그 바다가 폴 발레리의 시구처럼 언제나 다시 시작하는 바다, 죽음 너머 생명이 잉태되는 바다가 선명한 색깔로 각인되었다. 그렇게 각인된 바다, 남프랑스 지중해 연안의 작은 도시 세트 항과 

생피에르 언덕의 해변 묘지는 무한하게 열린 푸른 하늘과 바다를 향해 열려있었다. "눈부시게 퍼져나가는 햇살에 사로잡혀 바다는 푸르름을 해저 깊숙이 가라앉히고 있었다."(352쪽) 묘지는 약도에도 없었고 숨바꼭질 하듯 헤매는 사람들에게 단지 사이프러스 나무를 찾아가라는 현지 여인의 말을 따라 다시 힘을 내본다. 과연 폴 발레리의 묘는 사이프러스 나무를 배경으로, 그 너머로 푸른 하늘과 바다를 배경으로, 이단 묘석의 위쪽 묘석 테두리에 '폴 발레리'라는 이름을 이고 있었다. 머나먼 동양의 한 여자를 프랑스 남서부 끝 지중해안 언덕까지 이끈 폴 발레리라는 이름 하나... 그 이름을 마주하는 짧은 몇 분의 시간이 영원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고. 그리고 환청인듯 사이프러스 울울히 서 있는 등 뒤에서 한 영혼이 빈약한 어깨를 어루만지듯 말을 걸어오는 것처럼 느껴졌다니...




  "오, 사색 뒤에 오는 보상. 신들의 고요에 던져진 그토록 오랜 시선." 

화답으로 폴 발레리의 시구를 음송하며 작별을 고한 시간, 그 순간들을 가만히 생각해본다. 작가는 어쩌다가 이토록 묘지 기행에 빠져 버렸을까. 도저히 헤어나올 수 없는 신비한 마력에 빠져 버렸으니 말이다. 30 여 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쉬지 않고 일을 하고 글을 쓰고 가정을 꾸리면서 작가들의 묘지를 찾아 다녔다. 폴 발레리의 묘지를 시작으로 파리의 몽파르나스 묘지, 팡테옹, 몽마르트르 묘지, 페르 라세즈 묘지, 그리고 반 고흐를 찾아 암스테르담과 아를,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만나기 위해 찾아 간 빈치 마을과 앙부아즈 성 예배당에도 갔다. 알베르 카뮈의 영면처 루르마랭, 아일랜드의 예이츠와 이니스프리 호수, 셰익스피어의 고향과 이탈리아 베로나의 줄리엣 묘, 러시아 작가들의 묘지와 토마스 만의 베네치아,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 크레타 섬을 돌고 다시 돌고 돌아 프라하와 드레스덴, 음악가들의 고향 빈 중앙 묘지에도 갔다. 사진으로 만나는 작가들의 묘지는 아름답다. 삭막하고 복잡한 납골당에 안치된 우리의 묘지 문화와는 너무 다르다. 묘지이면서 쉼의 공간이고 시민들의 휴식처이자 울창한 숲을 자랑하는 거대한 공간들이기도 하다. 삶과 죽음이 이렇게 맞닿아 있다는 것이, 그리고 죽음이라는 것이 이토록 친근한 공간으로의 이동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죽음이 결코 두려운 일만은 아닌 것 아닐까, 혹은 영원한 휴식에 드는 이 묘지라는 공간이 주는 안정감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희석해주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된다. 




누구든... 파리의 몽파르나스 묘지를 들어서면 제일 먼저 만나는 장 폴 사르트르와 시몬 드 보부아르를 만난다. 그들의 묘지가 정문 초입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란다. 처음엔 사르트르(1905~1980) 혼자였지만 6년 후 보부아르(1908~1986)가  영면에 들면서 합장이 되었다. 계약 결혼 관계였지만 살아 생전 한 공간에 살지 않았던 사람들이고 여행을 가거나 호텔에 방을 얻더라도 나란히 각자의 방을 얻고, 같은 구역의 각자의 아파트에서 생활하고 각자의 연인들을 거느리기도 하면서 51 년 간 독특하고 자유로운 동거를 이어간 사람들인데 죽어서는 이제 하나의 묘석 아래 "꼼짝없이" , '영원히' 묶이게 된 것이다. 사후에 그들의 묘를 합장한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그러한 의문을 가지고 보는 그들의 합장묘여서 묘한 감정이 들었다. 단순하지만 아름답게 장식된 베이지 톤의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비석에 그들의 이름이 새겨졌고, 관람객들이 가져다 놓은 듯한 묘석 위에 장식된 꽃화분이 끊이지 않는, 죽어서도 사랑받는 두 사람... 죽어서도 살아서도 변함없이 영원히 함께 하길... 그 외에도 마르셀 프루스트의 묘가 있는 페르 라셰즈와 일리에콩브레의 프루스트 박물관과 그의 작품에서 발베크로 호명되는 카부르의 그랑 오텔, 프루스트 사후 100주년을 기념하여 개관한 박물관(일명 벨 에포크 박물관), 파리의 프루스트가 태어난 집 등도 기억에 남는다. 프루스트 투어로도 프랑스 여행은 오래오래 기억에 남는 여행이 될 것이다. 사실 함정임 작가가 30 여 년 간 열정적으로 다녀왔던 작가들의 묘지와 생가와 작품과 인생의 이야기들이 너무 방대해서 누구 한 작가를 기억해야지 하는 생각을 하기가 힘들다. 함정임 작가가 직접 찍어서 수록된 사진들을 보는 재미도 결코 적지 않다. 여행을 한다면 여행 안내서로도 부족함이 없다. 한 장, 한 장 넘기며 읽어 나가다보면 500 페이지가 넘는 이 책이 결코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 많은 작가와 작품과 인생과 묘지들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묘지를 콕 찍어 말할 수 있을까??? 당연히 있다! 가서 만나고 싶은 작가의 묘지가 너무 많아서 못 고를 거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파리의 페르 라셰즈에서 몽파르나스, 팡테옹, 그리고 그나마 내가 다녀온 몇 안되는 곳이어서 더 기억에 남았던 토마스 만의 작품의 배경이었던 이탈리아의 베네치아, 반 고흐의 네덜란드와 예이츠의 아일랜드까지, 또 더 멀리 베토벤과 슈베르트, 쇤베르크의 오스트리아와 독일과 체코의 프라하와  또 내가 좋아하는 작품인 『그리스인 조르바 』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크레타 섬에서 만나는, 제대로 된 십자가도 없이 엉성한 나무 십자가와 바람에 바랜듯한 검은 대리석 - 묘지와 러시아의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만나는 안톤 체호프와 니콜라이 고골의 묘지 등등. 참 많이도 있었지만... 




  "누군가의 마음 상태를 알려면 그 사람의 방에 가보라. 누군가의 생애, 그 사람의 기질을 알려면 그 사람의 묘지, 영면처에 가보라. 그 동안 수차례 찾아간 프루스트, 베케트, 카뮈, 사르트르와 시몬 드 보부아르, 뒤라스, 보들레르, 랭보 등의 묘지 앞에서 터득한 내 나름의 진실이다."(410쪽) 이 말에 격하게 동의~~~! 사랑하는 작가의 묘지를 찾아 멀리 러시아까지 날아간 함 작가는 이렇게 글을 시작했다.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하늘 아래 새소리뿐! ...... 내가 서 있는 곳은 러시아의 작은 마을에 있는 톨스토이의 영지領地의 숲길. 6월 28일 아침 9시, 모스크바에서 남쪽으로 180킬로미터 떨어진 툴라라는 도시로 떠났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툴라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톨스토이가 태어나고 묻힌 야스나야 폴랴나 마을로 향했다. ..."(417쪽) 톨스토이의 고향이자 영지가 있는 야스나야 폴랴나 마을이라는 지명은 톨스토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익히 알고 있는 워낙 유명한 마을이지만 막상 영지로 들어가는 길 옆의 자작나무 오솔길과 오솔길 끝 톨스토이의 하얀 집을 보는 순간 함 작가의 저 문장들이 가슴에 콕 박히면서 뭔지 모를 감동이 밀려 오고 있었다. 역시 이 작가는 죽음에 있어서도 내가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에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졌다. 소설가에서 사상가로 나아가는 과정에 무소유를 실천하였고 "슬퍼하지도 생각하지도 말고, 아무것도 세우지 말고 그저 소박하게 묻어달라던 톨스토이, 하늘을 사랑하여 하늘을 잘 보이게만 해달라고 당부했다던 톨스토이" 유언에 따라 정말 그의 묘에는 묘비명도 상석도 하나 없고 그저 하늘과 새소리, 그리고 초록의 자연뿐. 내가 느끼기에도 그랬지만 함 작가도 "지금까지 우여곡절을 겪으며 찾아갔던 세상의 수많은 예술가들의 무덤 중 가장 자연스럽고 숭고했다"고 적고 있다.




수많은 작가들의 묘지를 찾아다니다 보면 묘비에 새겨넣은 아름다운 문장들을 만나기도 한다. 작품들만큼이나 무덤의 형식이나 묘비명들이 개성적이었는데 그 중 함 작가는 가장 좋아하는 묘비명으로 많고 많은 묘비명 중에서 단 두 작가를 꼽았다. 한 사람은 아일랜드의 민족시인인 예이츠이다. 예이츠의 묘지는 더블린의 북서쪽 끝 슬라이고 항 근처의 벤벌빈이라는 기이한 형태의 산 아래 드럼클리프 마을의 세인트 콜롬바즈 패리시 교회 뒤뜰에 있다. 한반도에서 아일랜드를 가기 위해서는 지구를 반 바퀴나 돌아야 하는데 다시 예이츠의 묘지를 찾아가는 길을 설명하는 것도 이리 어렵다. 하지만 예상보다 평범했던 이니스프리 호수와 두고두고 기억할 아름다운 묘비명을 남겼으니 뜻깊은 여행이 아니었을까!  "Cast a cold Eye On Life, on Death. Horseman, pass by!"(삶에도 죽음에도 차가운 눈길을 던져라. 말 탄 자여 지나가거라!)  또 한 명의 작가는 그리스 에게해 크레타 섬에 있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이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문장을 읽는 즉시 『그리스인 조르바 』가 떠오르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진정한 자유인 조르바의 살아 있는 심장을 품은 채 대성곽의 기단 위에 잠들어 있었다. 『최후의 유혹 』으로 그리스 정교회로부터 파문당한 탓에, 그의 묘석에는 석비 대신 가로세로 길주름한 나무 십자가가 엉성하게 세워져 있었다."(462쪽) 그 모습이 마치 '키가 크고 몸이 마른' 조르바가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춤을 추고 있는 형상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의 작품과 그의 생애와 너무도 꼭 맞춘 듯한 묘지이자 묘비명이다.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벗 삼아(근데 어마무시 사진까지 수록되어 있어 이 책 진짜 무겁다 ㅠㅠ) 이 아름다운 작가들의 묘지를 찾아가는 날이 나에게도 오지 않을까... 함 작가처럼 간절히 바란다면 이루어지는 날이 올 것이다. 나도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지에 가고 싶다. 간절히. 가서 내 눈으로 그의 묘비명을 보고 싶다. 읽을 수는 없겠지만... 무슨 내용인지는 내가 다 아니까 아무 문제 없다. 윽... 생각만 해도 전율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값비싼 독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35
메리 웨브 지음, 정소영 옮김 / 휴머니스트 / 202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휴머니스트 세계문학(일명 '흄세'라고..) 시리즈가 벌써 시즌 7, 주제는 날씨와 생활이다. 꾸준히 챙겨보고 있는 중이다. 이번 시리즈는 특히 여러 작품이 눈에 들어와서 5 편 중 3 편을 구비해 놓았다. 흄세 시리즈는 책꽂이에 꽂아두면 푸른색 책등이 돋보이지만 책 제목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치명적인 단점에도 불구하고 모으고 있는 중이다. 구매해서 읽은 책도 빌려 읽은 책도 거의 모두 만족스러웠다. 책꽂이를 푸른색으로 채우고 싶지만 현실적으로 공간의 한계 때문에 최대한 구입은 신중히...! 이 책도 역시 책꽂이에 꽂았을 때 제목은 보이지 않는다. 멀리서 보면 그저 한 덩이 푸른색으로만 보인다.^^ 아쉽다 정말! 어떻게 했어야 제목이 잘 보일까 하면서 고민도 좀 해봤는데 난 디자이너가 아니니 알 리가 없다. 묘안을 좀 내어주면 좋겠단 생각이 든다.




<값비싼 독>은 메리 웨브 작가의 대표작으로서 1924년 초판이 출간된 지 올해로 꼭 100년이 되는 해인데 작가도 작품도 생소했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궁금증이 일었다. 요즘 같으면 주인공 프루 사른이 가지고 있는 '언청이'라는 장애는 장애라고 할 수도 없지만 작품의 시대적 배경은 작가가 작품을 발표한 20 세기 초도 아니고  그보다 백 여 년 전, 전통을 지키고 미신을 숭상하는 관습을 여전히 지키며 살아가던 19세기 초의 농촌사회였던만큼 그것이 결코 작은 장애는 아니었다. 장애를 가진 여성이면서 글을 읽고 쓸 수 있다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이면서 독특한 인물 설정은 프루의 삶을 고립시키고 편견에 찬 시선을 보내고 무시하고 핍박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주인공 프루는 그러한 장애에도 불구하고 한없이 다정하고 누구보다 인간적이며 부지런하면서 독립적인 사고를 가진 진취적인 여성이다. 사랑하는 가족과 주위의 친구들에게, 그리고 마을 사람들에게 다정하고 공정하게 대하는 성품이다. 또한 불의 앞에서는 용기를 내서 대항한다. 첫 눈에 반해 사랑하게 된 케스터 우즈이브스의 목숨을 구해주기도 하였고 그 과정에서 자신보다 월등한 힘을 가진 남자들에 맞서는 용기를 낸다. 그 당시의 여성상으로서는 매우 드문 성향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장애와 편견을 극복하고 사랑을 이뤄내는 과정은 일반적인 러브 스토리를 표방하기도 하고, 거의 결말에서 케스터의 등장은 마치 백마 탄 왕자의 등장을 방불케 할 만큼 극적이었는데 사실 이 부분이 거슬리는 것은 어쩔 수 없이 현재의 가치관으로 작품을 평가하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한 것임을 감안해서 읽는다면 충분히 멋진 작품이며 당시의 사회상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인 프루는 충분히 멋진 여성상을 구현하고 있다. 이런 멋짐은 대체 어디서 왔을까? 물론 순전히 내 생각이지만 강압적이고 평생을 무서워한 남편 밑에서 고생만 했지만 딸에게는 인내를 가지고 기다려주고 용기를 내도록 북돋아준 어머니가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다. 기디언의 결혼 때 쓸 직물을 짤 길쌈꾼인 케스터를 집으로 불렀을 때 어머니는 이미 알고 계셨다. 프루가 그를 사랑한다는 것을. 케스터에게 자신이 언청이라는 말을 하셨는지 묻는 프루에게 어머니는 말한다. 그 사람이 널 만난다면, 그리고 내가 생각한 그런 사람이라면 분명 널 좋아할 거라고, 그리고 그 사람이 다리나 팔이 하나뿐이거나 천연두로 얼굴이 다 얽었다면 그게 싫겠냐고. 프루는 당연히 아니라고 대답한다. 오히려 더 사랑할 거라고! 그럴 줄 알았다면서 어머니는 아주 흡족해 하신다. "그 사람을 사랑하는 줄 알았어. 참 기쁘구나. 그에게서 숨지 마, 프루. 코스틀리 컬러 놀이를 했을 때처럼 용기를 내서 모든 걸 다 걸어." 이런 말로 딸에게 용기를 줄 수 있는 어머니가 그 시대에 과연 얼마나 될까? "... ... 용기를 내서 모든 걸 다 걸어" 어머니도 분명 용기 있는 여성이다. 




'값비싼 독'은 존 밀턴의 《실낙원》에 나오는 것으로, 값비싼 재물을 탐하면 그것이 독이 되어 지옥에 떨어지는 값비싼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의미라고 한다. 이 작품에서 '프루'의 스토리와 대척점에 선 사람이 '프루'의 오빠인 '기디언'인데, 오로지 큰 돈을 벌기 위해 모든 것 - 어머니, 아버지, 여동생 프루, 약혼녀 잰시스, 결혼, 여가 시간, 행복한 현재 등등 - 을 희생하는 그는 앞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동생 프루를 다그쳐 농사일에 매진한다. 그에게 있어 '값비싼 독'이었던 땅과 농작물, 큰 돈을 벌려는 욕망은 결국 그를 파멸로 이끌고 주위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간다. 그러나 삶의 자세에 있어서도, 자연을 대하는 태도, 그리고 땅을 대하는 자세가 기디언과는 전혀 다른 프루에게 모든 여성들이 목숨을 걸고라도 쟁취하고 싶어하는 남자 '케스터'는 그녀 역시 모든 것을 걸고라도 함께 하고 싶은 '값비싼 독'일수 있었다. 하지만 장애가 그녀의 진가를 가리지 못하는 것을 알아본 그 남자 '케스터' 역시 '프루'와 같은 진실한 삶의 자세를 가진, 서로가 동류임을 알아본 서로로 인하여 결국 해피엔딩을 맞이하게 된다. 다만 프루가 용기를 내 모든 것을 걸었던 남자 케스터가 끝까지 그럴 만한 남자이기를 ... 근데, 작품 밖의 일을 뭐 하러 걱정하나!




아름다운 사랑의 결말이 더없이 멋졌지만 이 작품의 또 하나의 미덕이라면 역시 작가의 고향인 영국 중부  슈롭셔 지방의 자연을 아름답게 묘사한 문장들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사른'이라는 마을과 그것이 이름이 되는 '사른' 집안 사람들의 집은 대대로 아름다운 호수를 지척에 두고 너른 땅과 숲을 마주하고 있고 토양은 워낙 축축하고 척박해서 풀이 무성하지만 사른의 초원에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난 모습은 정말 장관을 이루고 호수를 끼고 피어나는 안개는 몽환적이면서도 사건을 일으키는 촉매로 작용하기도 한다. 프루는 이런 자연을 정말 사랑하고 마을 사람들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땅을 대하는 자세에 있어서도 진실하다. 그녀의 이런 성품을 나타내는 문장을 읽노라면 그녀 '프루 사른'을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들게 된다. 이 부분을 읽을 때 잔잔한 감동이 일어서 여러 번 천천히 읽어보았다. 버리고 싶은 문장이 하나도 없고 어쩜 이런 생각을 할 수가 있을까 싶은 그 문장에 감동...


"마치 온 세상을 먹이듯 팔을 힘차게 휘두르며 씨를 뿌리던 그 몸짓을 난 얼마나 사랑했던지. 수확하는 일은 농장의 모든 일이 그렇듯 보기는 좋을지 몰라도 씨뿌리기에 비하면 별로 내키지 않는 것이었다. 수확은 바깥쪽으로 팔을 뻗었다가 내 쪽으로 홱 당기며 아깝다는 듯 가슴으로 끌어와야 한다. 낫으로 수확하는 일은 내 눈에 탐욕스러워 보였다. 그에 비해 자루가 긴 낫은 신의 심판처럼 사랑이나 증오가 없는 거대한 파괴의 움직임이다. 도리깨질 역시 소유하려는 의지나 바람없이 분노로 가득 차 있다. 수확이 오로지 탐욕이라면 씨뿌리기는 오로지 베푸는 일이다. 아주 세심하게 모아서 쭉정이를 까불러 내버리고 소중하게 모셔두었던 것을 들고 너른 들을 누빈다. 가진 것이라고는 그것뿐이지만 개의치 않고, 쟁여둘 생각이라곤 없이 양손에 가득 담아 모두 뿌려버린다. 앞으로 나아가며 이리저리 뿌리는데, 손이 크면 더 기분이 좋다. 이 지역의 방식을 잘 모르는 사람은 아마 미쳤다고 생각할 것이다. 사실 동네 새들을 전부 먹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먹여야 돈도 되지 않을 떼까마귀와 찌르레기와 다른 많은 작은 새가 고랑에서 뒤를 따라오기 때문이다. (332~333쪽)  


이 문장들은 프루의 삶의 자세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그래서 오래 기억하고 싶은 멋진 문장이다. 수확의 기쁨보다 큰 것이 씨뿌리기라니, 이 얼마나 멋진 삶의 자세인가 말이다! 하지만 순수한 황금빛으로 빛나던 보리밭, 수확의 기쁨을 누리며 마을 사람들과 음식을 나누고 맥주를 마시며 즐거워 하던 그 밤과 새벽, 그 새벽이 지나기도 전에 황금색으로 빛나던 수확물은 누군가의 저주라 불리는 황금의 저주, 뜨거운 바람에 실려 넘실대는 불길이 어머어마하게 쌓아놓은 밀과 보리를 덮치고 프루가 가장 좋아하는, 그 섬세사하고 아름다운 귀리를 덮치는 광경과 이후의 사른 집안 사람들의 파탄을 알리는 문장들은 너무 처절하고 생생해서 결코 잊히지 않을 거 같다. 결국 돈만을 쫓던 기디언의 '값비싼 독'은 부메랑처럼 그와 그의 가족들을 덮친다.  




메리 웨브가 보여주는 슈롭셔 주의 자연은 너무도 아름답고 섬세해서 마치 내가 그 장소에 가 있는 듯 그려진다. 작품의 전체에서 보여주는 이러한 아름다운 자연의 묘사는 마을 사람들의 척박한 삶과 미신적인 믿음, 허무맹랑한 소문으로 프루를 힘들게 하는 겉모습과는 대조된다. 이러한 인식의 저변에는 관습이 기인하는 바 크다. 이 작품의 독특함은 이 글 전반에 걸쳐 영국 슈롭셔 주의 전통적인 생활상을 자주 엿볼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의 품앗이나 두레를 연상시키는 풍습들이 등장하기도 하고 농번기와 농한기에 농민들이 모여 행하던 여러가지 놀이 문화들과 유사한 형태의 전통들이 친근하면서도 그동안 다른 영미 문학 작품에서 흔히 접하지 못했던 부분들이어서 흥미로웠다. 비록 번역본으로 읽는 작품이지만 그럼에도 어떤 부분에서는 슈롭셔 지역 방언을 보는 듯, 듣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프루의 남자 케스터의 직업이 이 집 저 집 다니며 베틀로 천을 짜주는 '길쌈꾼'이라는 것도 신기했고, 결혼을 앞둔 집안에서 사람들을 모아 파티를 열면서 놀이를 하고 함께 혼수품을 준비하는 모습, 또 농촌사회에서 가을걷이를 할 때 온 동네 사람들이 소달구지를 몰고 와서 추수를 돕고 추수를 돕는 마을 사람들을 위해 술을 빚고 음식을 장만해 즐기는 풍경, 각자의 집에서 준비한 물건들을 팔기 위해 장날에 모여드는 사람들의 모습은 꽤 여러번 묘사되는데 이런 글을 읽으면서 사람 사는 세상은 어디나 비슷하구나 생각하게 되고 한편으론 친근감을 일으키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이 작품이 '흄세' 시리즈 7인 '날씨와 생활'에 포함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게도 됐고...^^  아, 그러고 보니 작품의 표지가 주인공 '프루'의 언청이 얼굴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거 같기도... 입술을 비스듬히 질러 내려가는 계곡물이라니... 그럼에도 이 작품의 주인공인 '프루 사른'의 용기와 아름다운 자연, 그리고 행복한 결말은 전혀 손상을 입지 않았다. 





... 숲이 시작되는 사른 방향과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움찔하며 깊게 뻗어가는 회색 물을 빼면 어디를 보나 황금색이었다. 새로 잎이 돋고 자작나무 끝에 옥수수색의 새순이 달리는 그 화창한 봄날에는 숲도 물도 어둑해 보이지 않았다. 다만 우리 떡갈나무 숲은 새로 돋는 잎도 칙칙한 갈색이라 늘 연말의 표정이 어른거렸다. 그래서 5월에도 늘 10월의 숨결이 있었다. 하지만 목초지에 앉아 저 멀리 언덕을 바라보는 일은 즐거웠다. 첨탑처럼 뾰족한 낙엽송은 어느새 푸르러졌고 소똥꽃의 황금색이 가슴속으로 파고드는 듯해서 사른 호수조차 노란 안개 같은 자작나무에 둘러싸인 푸른 안개에 불과했다. 게다가 얼마나 꿈속 같은지 땅벌은 말할 것도 없고 야생벌만 다가와도 고함을 들은 듯 깜짝 놀랐다. (15쪽)

...길가에 늘어선 버드나무에 노란 꽃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그 너머로는 새 예루살렘처럼 사파이어를 깎아 둥글린 듯한 언덕이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아래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비가일디 생각으로 어두워진 얼굴에 인상을 쓴 기디언 옆에서 말을 타고 가는 중에 내 눈에 들어온 풍경은 그 내용을 모두 읽을 수 있도록 근사한 책장을 펼쳐놓은 책과도 같았다. 다만 안전하다고 여겨 잠가두는 법이 없는 비가일디의 책처럼 비밀 글자로 적혀 있을 뿐. ... 책 같다고 내가 기디언에게 말했다.
"책? 내 눈에는 책은 안 보여. 곡물을 기를 수 있는 좋은 땅을 다 놀리고 있는 것만 보이네."
그렇게 우리는 신이 적은 글에서 각자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이다.(200~201쪽)

호수는 그 계절에 최고였다. 고요하고 뜨거운 정오에 잔잔한 연푸른색 호수 물이 얼마나 다정해 보이는지 누구든 그 속에 빠져 죽을 수 있다고 상상할 수 없었다. 한여름 두꺼운 초록 잎을 가득 달고 호수를 빙 둘러선 키 큰 나무들이 주문에 걸린 듯 꼼짝도 않고, 초록 그림자는 호수에 드리워지고 나무 위쪽은 호수 중간에서 서로 닿을 듯했다. 나뭇가지마다 아직 노래를 멈추지 않은 작은 새들의 지저귐이 퍼져 나와 물 위로 뻗어갔는데, 고작해야 솔새나 울새의 가느다란 노랫소리였지만 사위가 얼마나 고요한지 호수 건너편에서도 들을 수 있었다. 내가 인동덩굴을 뜯던 그 뜨거운 날에도 호수에서는 짜릿하면서 생기 가득한, 시원하고 향긋한 바람이 불어왔다. 살기에 안 좋고 겨울에는 몹시 울적해지는 사른이지만 이 계절에는 슬픔을 던져버리고 여느 숲이나 물처럼 멋진 모습을 드러냈다. (284~285쪽)

"어서 가자, 얘야!" 케스터가 말에게 말했고, 우리는 푸른색과 자주색으로 물든 산을 향해 타닥타닥 나아갔다.
"아니에요!" 내가 말했다. "거기서 멀어지는 게 맞아요. 케스터. 당신은 백합 같은 여자와 결혼해야 해요. 봐요, 난 언청이라고요!" 하지만 그는 들은 척도 안 했다. 따지지도 않았다. 한참 뒤에 내가 다시 사정했을 때에야 말을 세우고 내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슬픈 얘기는 이제 그만! 난 나만의 천국을 골랐을 뿐이에요. 그건 당신 가슴속이고요!" 그는 그 말과 함께 잘 생긴 머리를 숙여 내 입에 입을 맞췄다.
프루던스 사른의 이야기는 이렇게 끝났다. (428~429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우슈비츠의 자매 - 나치에 맞서 삶을 구한 두 자매의 실화
록산 판이페런 지음, 배경린 옮김 / arte(아르테) / 202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치가 점령한 네덜란드에서 목숨을 걸고 유대인들의 도피와 생존을 돕고자 애썼던 린테와 야니 두 자매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에세이며 기록문학이다. 특히, 절망 속에서 그리고 하루하루 피를 말리는 듯한 긴장감 속에서 유대인들의 도피를 돕기 위해 신분증을 위조하고 전달하고 다시 배급권을 받기 위해 동분서주 하고 안전한 피난처를 찾아 백방으로 수소문하고 헤매고 다니는 야니의 활약상을 읽어 나가다보면 너무 가슴이 조마조마해서 역시 아무리 뛰어난 소설일지라도 이 실화를 이길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짦은 프롤로그를 빼고 책은 총 3개의 장으로 구성이 되어 있는데 'I. 전쟁'과 'II. 하이네스트'에서는 독일이 네덜란드를 점령하고 유대인 말살 정책을 펴 나가는 동안 유대인들의 도피와 생존을 위하여 안전한 도피처를 제공하고 위조 신분증을 구하기 위해 각계각층의 조력자들과 협력하는 일, 그 과정에서 동지들이 잡혀 들어가고 배신을 하는 사람이 생기고 피난처가 다시 위험에 처하는 등의 우여곡절을 겪는데, 그 위기의 순간들에 대응하는 야니와 린테 자매의 용감무쌍한 일화들이 마치 소설인듯 펼쳐진다. 특히 동생인 '야니'는 수 많은 어려움과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한 번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던 불굴의 투사이다. 'III. 생존'에서 결국 도피처였던 '하이네스트'가 발각이 되고 언니 린테, 야니, 부모님, 남동생 야피, 그리고 '하이네스트'에 피신해있던 유대인들이 모두 잡혀 아우슈비츠로 이송된다. 



그 동안 아유슈비츠를 비롯한 유대인 수용소의 실상이야 여러 책이나 영상을 보면서 익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고 익히 들어왔고 보아왔던 사실들이 이 책에서도 변함없이 일어나지만 소설이 아닌 실화로서 소상히 알게 된 것은 처음이어서 책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너무 실감나게 다가왔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인간으로서 인간이 아닌 상황에 직면한 그 사람들의 실상을 마주하고 있자니 뭐라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할 슬픔이 밀려와서 ... 정말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렀다. 린테와 야니, 그리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안네 프랑크 자매는 아유슈비츠에서도 살아남았고 1944년 10월 30일, 아우슈비츠 ㅡ 비르케나우의 최후의 선별 작업을 거쳐 독일의 베르겐 ㅡ 벨젠 수용소로 이송된다. 그곳은 다른 폴란드 내의 수용소와 달리 절멸 수용소가 아니었음에도 패망이 얼마 남지 않은 독일의 무관심과 잔혹 무도한, 비인간적인 관리로 인하여 수많은 유대인들이 죽어나갔다. 린테와 야니 자매도 전염병에 걸려 죽음 직전의 상황까지 갔었고 살아남았지만, 마르고트(안네 프랑크의 언니)가 죽자 안네도 살 희망을 잃고 곧 죽음에 이르고 만다. 



1945년 4월 15일, 영국군이 베르겐ㅡ벨젠을 해방시켰을 때 6만 여명의 수감자가 자유를 찾았는데 수용소 부지 곳곳에 쌓인 시체만 해도 1만 3,000 여 구에 달했고, 6만 명 중의 4분의 1이 해방 이후 몇 주 동안 세상을 떠났다. 린테와 야니 자매는 구출 당시 몸무게가 불과 25 킬로그램 정도에 불과해서 살아있는 것이 기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베르겐ㅡ벨젠의 열악한 상황을 단적으로 증명한다고 생각한다. 자매가 귀환 중에 만난 친절한 치과의사 선생님의 도움으로 암스테르담까지 무사히 귀환 하였고 린테, 야니 자매의 가족이 상봉하는 장면에서는 그냥 나도 모르게 눈물이 줄줄 줄줄 계속 흘렀다. 이건 실화니까 난 마음껏 울어도 되잖아 그렇게 합리화하면서 계속 눈물을 흘렸다. 마지막에 '하이네스트, 그 이후'를 읽으면서도 계속 눈물을 흘렸다. 왜냐하면 야니, 린테 자메와 같이 유대인들을 살리기 위해 활동하다가 죽거나 살해당한 협력자들과 활동가들의 이름, 활약상, 생몰연도 등이 나열되어 있었는데 같이 활동했던, 나에게도 이제 익숙한 이름들을 보고야 말았기 때문이다. 산 사람, 살아 돌아온 사람이 너무 적었기 때문이다. 



린테와 야니 자매의 가정은 가난했지만 부모님 두 분이 서로 사랑하셨고 또 화목해서 가족이 모여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는 서로 하고 싶은 말들, 나누고 싶은 이야깃거리가 한 가득이었다. 각자의 꿈과 계획에 관해 상의를 하기도 하고 사업이나 가족, 돈에 대해 스스럼없이 대화를 하는 분위기였다. 야니는 전쟁 전에도 파시스트가 판을 치는 마당에 어떻게 가만히 앉아 있겠느냐며, 세상이 불구덩이에 빠졌는데 어떻게 그런 끔찍한 인간을 지도자로 뽑은 독일인들과 아무렇지도 않게 일을 할 수 있느냐며 아빠를 나무라기도 했던 딸이었다. 아삐와 딸이 이런 언성을 높이는 대화를 하는 일이 잦아서 가족들은 그럴 때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곤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린테가 자기는 대스타가 될 거라고 하면서 노래를 부르면 가족들은 다시 웃음을 터뜨리고 식탁 주위에 차올랐던 긴장감이 사라질 즈음 창 밖 거리에서 아이스크림 장수가 <그 무젤만을 아시나요?> 노래에 맞춰 종을 울리며 지나간다. 장난스런 표정으로 엄마의 눈치를 살피던 남동생과 자매는 못이기는 척 허락하시는 엄마의 미소에 꼬마들처럼 문밖으로 우르르 달려나갔다. 이런 따뜻한 기억을 간직한 두 자매는 아우슈비츠ㅡ비르케나우 수용소에서도 함께 힘을 돋우며 서로가 서로를 격려했다. 



발가 벗겨진 채... 혹은 비를 쫄딱 맞으며... "몇 시간이고 점호가 이어졌다. 중간에 숫자를 틀리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수백 명이 거대한 체스판 위의 폰처럼 늘어섰다. 도중에 누군가 풀썩 쓰러지면서 대열에 구멍이 생기기도 했다. 야니는 제 앞에 선 여자의 등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카포나 나치 여성 교도관들에게 저항하고 싶은 마음을 눌렀다. 빗줄기도, 허기도, 벌벌 떨리는 몸을 타고 흐르는 고통도 애써 무시했다. 사람들은 그야말로 양파가 손질되듯, 본질만 남을 때가지 한 꺼풀 한 꺼풀 발가벗겨졌다. 시작은 직장이었다. 뒤이어 학교에서, 집에서, 고향에서 쫓겨났다. 이웃을 잃고 친구를 잃었다. 가족을 빼앗기고 자유를 빼앗겼다. 종래에는 옷도, 머리칼도, 그림자까지도 모두 빼앗기고 말았다. 하지만 중요한 건 본질이었다. 내가 지켜야 할 것, 나의 본질, 나 자신. 그것만은 뺏기지 말자." (353쪽) 스스로의 모습을 확인할 수 없었지만 자신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바로 유령처럼 수용소를 배회하는 산송장을 보는 것, 바로 '무젤만'이라 불리는 존재들을 말한다. 무젤만이란 그런 존재들을 말한다. "나치가 본격적으로 손을 쓰기도 전에 스스로를 놓아 버린 자들", "혼수상태나 다름없는 무젤만의 몰골", 파시스트들에게는 그것이 화장장의 굴뚝에서 끊임없이 피어오르는 연기보다 더 큰 승리의 기쁨을 안겨주는 존재들이고 '선별 과정'에서 가장 먼저 선별 됐다. '무젤만'은 마음 속에서 자신을 이미 가스실에 가두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야니는 스스로를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다른 이들은 가지지 못한 것을 생각했다. 바로 의지할 사람이었다. 자매는 자아를 잃지 않도록 서로를 도왔다. 서로의 존재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끊임없이 일깨워 줬다. 나는, 우리는, 암스테르담에서 온 자매라는 사실을." (354쪽)



"무젤만(Muselmann)은 원래는 '이슬람교도'를 뜻하는 단어이지만 나치수용소에서 '산송장' 혹은 '더 이상 인간이라 보기 힘든, 좀비 같은 상태의 사람'을 칭하는 은어로 사용됐다(옮긴이 주)." 무젤만이라는 용어는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에서도 설명을 찾을 수 있다. 구입 해 놓고 앞 쪽만 겨우 읽고 말았지만 궁금해서 그의 책에서 '무젤만'에 대한 설명을 찾아 읽어 보았다. 

"... ...가스실로 가는 무슬림들은 모두 똑같은 사연을 갖고 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아무런 사연도 갖고 있지 않다. 그들은 무능력 때문에, 혹은 불운해서, 아니면 어떤 평범한 사고에 의해 수용소로 들어와 적응을 하기도 전에 학살당했다. 그들은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독일어를 배우기도 전에, 규율과 금지가 지옥처럼 뒤얽힌 혼돈 속에서 뭔가를 구별해내기도 전에 그들의 육체는 가루가 되었다. 선발에서, 혹은 극도의 피로로 인한 죽음에서 그들을 구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들의 삶은 짧지만 그들의 번호는 영원하다. 그들이 바로 '무젤매너'Muselmammer(무슬림), 익사자, 수용소의 척추다. 그들은 끊임없이 교체되면서도 늘 똑같은, 침묵 속에 행진하고 힘들게 노동하는 익명의 군중,비인간들이다. 신성한 불꽃은 이미 그들의 내부에서 꺼져버렸고 안이 텅 비어서 진실로 고통스러워할 수도 없다. 그들을 살아 있다고 부르기가 망설여진다. 죽음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지쳐 있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들 앞에서, 그들의 죽음을 죽음이라고 부르기조차 망설여진다."(136쪽)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는 프리모 레비 자신이 직접 경험한 사실만을 기술한 기록문학이다. 반면 <아우슈비츠의 자매>는 록산 판이페런 작가가 린테, 야니 자매가 유대인들의 은거지로 오랜 시간 사용했던 "하이네스트"에 살기 위해 이사를 하였고  오래된 저택을 복구하면서 바닥의 카펫을 뜯어냈을 때 거의 모든 방바닥에 지하실 문이 설치돼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낡은 나무 바닥 아래로 거대한 은신처를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곳에는 타고 남은 양초, 악보, 오래된 저항단체 신문이 가득했고 그것이 하이네스트 역사 복구의 시작점이 된 것이다. 이후 6년이라는 시간 동안 조사를 계속하였고 인근의 사람들, 이전 소유주, 지역 토박이들을 인터뷰 하면서 이 저택이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네덜란드의 중요한 한 시기, 집단 수용소로 향하는 기차가 매번 발 디딜 틈 없이 굴러 가던 그 시절, 하이네스트는 유대인 자매가 운영하는 거대한 유대인 은신처이자 저항활동의 중심지였음을 알게 된다.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와 <아우슈비츠의 자매>는 그래서 아우슈비츠의 생존기록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음에도 서로 다른 결을 가진 기록문학일 수 밖에 없다. 함께 활동하고 목숨을 거는 위험을 감수하였고 수용소 생활도 함께 하면서 두 자매는 서로를 의지하였다. 가족은 언제나 함께 하는 것이라는 아버지의 말씀을 끝까지 지키려고 최선을 다했다. 두 자매는 서로에게 승리를 안겨주는 존재로서, 결국은 서로의 생명을 구하는 존재가 되었다. 

프리모 레비의 책도 얼른 읽어봐야겠다. 



마지막으로 프리모 레비의 책에서 '작가의 말' 다음 페이지에 실린 시詩를 남겨 놓는다. 린테와 야니를 생각하면서... 


따스한 집에서

안락한 삶을 누리는 당신,

집으로 돌아오면

따뜻한 음식과 다정한 얼굴을 만나는 당신,

        생각해보라 이것이 인간인지.

        진흙탕 속에서 고되게 노동하며

        평화를 알지 못하고

        빵 반쪽을 위해 싸우고

        예, 아니오라는 말 한마디 때문에 죽어가는 이가.

        생각해보라 이것이 여자인지.

        머리카락 한 올 없이, 이름도 없이,     

        기억할 힘도 없이

        두 눈은 텅 비고 한겨울 개구리처럼

        자궁이 차디찬 이가.

        이런 일이 있었음을 생각하라.

당신에게 이 말들을 전하니

가슴에 새겨두라.

집에 있을 때나, 길을 걸을 때나

잠자리에 들 때나, 깨어날 때나.

당신의 아이들에게 거듭 들려주라.

        그러지 않으면 당신 집이 무너져 내리고

        온갖 병이 당신을 괴롭히며

        당신의 아이들이 당신을 외면하리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eBook] 플래너리 오코너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12
플래너리 오코너 지음, 고정아 옮김 / 현대문학 / 201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늘 낮에(그게 벌써 며칠 전이다. 임시저장 한 상태로 진행을 못하고 계속 대기...) 플래너리 오코너의 단편집을 다 읽고 미뤄두었던 집안을 청소하고 썬룸에서 다 마른 빨래를 개어 차곡차곡 주인별로 쌓아 놓고 날이 좀 선선해졌길래 마당에 나가서 잡초를 좀 뽑았다. 잡초를 뽑을 생각은 아니었고 정말 정말 오래 읽고 있었던 현대문학의 <플래너리 오코너> 단편집을 끝내고 나니 기분이 너무 상쾌하고 뿌듯해지기도 했고, 뭔가 나를 힘들게 하던 숙제 하나를 마친 듯 개운해져서 집안일 대충 정리해놓고 마당에 어슬렁어슬렁 나가본 거였다. 마침 커피도 한 잔 내린 데다가 썬룸에서 내다보니 마당에 보라색 붓꽃이 제대로 난리가 났다. 그래서 커피 들고 어슬렁어슬렁 나가 붓꽃 앞에 쪼그리고 앉아 쳐다보다 그 옆에 무리지어 피어있는, 막 꽃을 피우고 있는 플록스도 보고 이름은 별로지만 유럽이 원산지라는, 꽃분홍색으로 무리지어 피는 끈끈이대나물도 이쁘다 이쁘다 하며 바라보다 쪼그려 앉은 김에 잡초를 뽑게 되었다. 이 잡초 뽑기라는 것이 쭈그려 앉기라는 불편한 자세에도 불구하고 한 번 시작하면 1 시간 지나는 건 후딱이다. 하다보면 묘하게 투지를 불사르게 만드는 특장점이 있는 일이라 내 오늘은 기어코 너희들을 다 뽑아버리고 말리라는 하등 쓸모없는 노력을 경주하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잡초는 이길 수가 없다!!! 잡초와의 싸움은 언제나 백전백패... 만고의 진리다~~~^^ 그나마 지금이니까 이런 생각을 하지 비가 잦은 6월이 오면 날도 뜨거운데다 아무리 준비를 철저히, 빈틈없이 싸매고 임해도 등짝이 너무나 뜨겁고 얼굴엔 땀이 비 오듯 쏟아진다. 그야말로 미친 짓이 된다. 비 한 번 오고 돌아서면 감당 못할 정도로 퍼져서 나중엔 그냥 잔디 깎는 기계로 같이 밀어버리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이 맥락없이 아무때고 시작하게 되는 잡초뽑기 루틴은 당분간 지속이 될 것이다. 별다른 '충동적인 발상'으로 다른 일을 만들지 않는다면 말이다. 오늘 이리 나의 일상을 장황하게 묘사하는 건 물론 <플래너리 오코너>의, 건조하고 내내 긴장감을 유발하며 섬뜩함이 오히려 빛을 발하는 단편집을 읽었기 때문이다. 평온한 일상의 달콤함이라니... 얼마나 좋은지 ... 그러나 이 단편집 속에 일상을 찢어버리는 섬뜩함이 가득하다.  





현대문학에서 출간하고 있는 세계문학단편선을 많이 읽지는 않았는데 참 좋다는 생각을 한다. 작가의 이름이 곧 책의 제목이 된다는 점도 신선하다. 물론 별로인 작가도 있지만 그럼에도 이 시리즈를 많이 읽고 싶다는 욕구는 늘상 가지고 있다. <대프니 듀 모리에>의 단편집을 읽고 좋아서 다시 이 책을 선택을 하게 된 것인지 아님 이 책을 먼저 다운 받아 놓고 읽다 질려서 <대프니 듀 모리에>의 책을 구입한 건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 책을 구매한 게 자그마치 2015년 4월이었다고 구매 내역에 있으니 구입한 지 9년이 지난 시점에서 다시 읽게 된 것이다. 그 동안 내내 방치해 놓았다가 요 근래 현대 문학 세계문학 단편선이 자꾸 여기저기서 눈에 들어 오길래 갑자기 발동이 걸려 읽어보자 싶었는데 기억도 나지 않지만 그때의 알 수 없는 끌림에 이 책을 선택한 나를 아주 칭찬하고 싶어진다. 플래너리 오코너는 25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루푸스(홍반성 낭창)가 발병하고 오랜 투병 기간을 거쳐 39 세에 생을 마감했다. 장편 소설 2권과 단편 소설 32 편, 그리고 여러 권의 평론집과 에세이를 남겼다(네이버 지식백과 참조).  플래너리 오코너의 단편 작품들은 특히 높은 평가를 받아서 사후 출간된 그녀의 단편집은 2009년에 전미 도서상을 수상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 상의 60주년(2010년)을 앞두고 그동안의 소설 부문 수상작 중에서 최고의 작품이 무엇인지에 대해 인터넷 설문 조사를 실시했을 때 단편소설집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최고 중의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31 편의 단편을 읽고 나면 그녀의 단편 작품들이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시대를 막론하고 읽히고 있다는 것에 금세 수긍하게 된다. 이 작품들을 쓸 당시 작가의 나이를 생각하면 더 놀랍지 않을 수 없다. 





31 편의 단편들 중 몇 몇 작품(제라늄, 심판의 날...등은 뉴욕이다)을 제외하고 작품의 배경은 미국 남부 지방이다. 이 남부는 노예제는 폐지되었지만 아직 흑백의 분리가 남아있고 북부에 비해 낙후한 지역이다. 산업의 기반은 농장을 경영하는, 당연히 백인이다. 그리고 흑인들은 여전히 노예와 같은 처지이며 가난한 이방인들과 젊은이들이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궁핍한 생활에 처해있는 현실을 포착해 내어 보여준다(작물, 추방자, 파커의 등 등등 ). 종교적으로도 독실해서 주로 프로테스탄트 신앙이 삶 전반을 지배하고 있는 곳이며 기반을 잡지 못한 젊은이들은 종교적으로 빠져들고 곳곳에서 설교자들이 등장하여 사람들을 모으는 모습이다(감자 깎는 칼, 강, 죽은 사람보다 불쌍한 사람은 없다 등). 이렇게 혼란스러운 남부 지역으로서의 작품의 배경은 작가 자신이 남부 출신이고 외가와 친가 모두 독실한 카톨릭 신앙을 가졌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백인과 흑인은 여전히 남부의 농장에서 지주와 노예로 나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도시 지역에서는 흑인들의 지위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혼란스러워 한다(제라늄, 계시, 오르는 것은 모두 한데 모인다, 심판의 날 등). 또한 작가가 북부에서의 생활을 하던 5 년여의 시기는 대학 생활, 여러 작가들과의 교류를 하며 작가로서의 첫발을 내딛던 시기였는데 고작 25 살이라는 나이에 루푸스의 발병으로 고향으로 돌아와 어머니와 함께 농장에서 지내며 작품 활동을 이어나간다. 젊은 여성으로서 발전한 북부에서의 생활의 경험은 작품에서 결코 긍정적으로 반영되지는 않는다. 젊은 사람들은 교육을 받으러 북부로 떠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공적인 삶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깊은 오한, 계시, 파트리지 축제). 남부 지방이 북부보다 낙후되어 있고 전반적으로 궁핍한 삶의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지만 남부와 북부의 상황이 대비된다기 보다는 미국이라는 사회의 혼란상이 통합되어 나타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작가가 추구하는 저런 문제 의식이나 주제들은 오늘날의 상황과는 다소 간의 차이와 거리가 분명 존재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작품에 드러나는 배경적 지식이나 주제의식보다는 다른 어떤 요소를 더 눈여겨보게 되고 끌리는 건 나에게 있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자연적으로 그런 생각을 하게 되니 말이다. 그런 생각이란 바로 인물들이 자주 보여주는 어떤 말, 행동, 판단, 호기심, 선입견 같은 것들. 바로 한 순간의 충동적인 행동, 섣부른 판단, 혹은 과도한 호기심과 선입견 등등이 어떤 불행한 결과를 몰고 올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았다면 과연 어땠을지, 그럼에도 그 순간의 선택과 충동적인 결정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지 궁금해지는 것이다. 다시 돌아간대도 같은 결정을 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면 말이다. 여기의 인물들은 아마도 분명 다시 그런 결정을 하지 않을 거라고, 그러한 생각을 하지 않을 거라고 말할 것이다. 그건 너무 자명해서 이론의 여지가 없지만 그래서 자꾸 눈에 들어오고 거슬리고 그래서 긴장하게 되고 불행하거나 예기치 못한 결말에 이르러서는 그 가차없음에 가슴이 섬뜩해짐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플래너리 오코너의 완벽함을 여기에서 다시 실감하게 된다! 




 

'좋은 사람은 드물다', '당신이 지키는 것은 어쩌면 당신의 생명', '가정의 안락', '오르는 것은 한데 모인다' 등의 작품은 그 결말이 한편 섬뜩하고 무서워서 정말 인간의 본성에 대해 진지하게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좋은 사람은 드물다'의 초반은 캘리포니아로 여행을 떠나는 여느 가족과 별반 다르지 않게 소란스럽고 어수선하다. 이 정신없는 가족은 할머니와 아들 부부, 그리고 어린 세 명의 자녀들과 고양이다. 아들이 운전하는 차에 타고 고속도로를 달리던 중  할머니는 "충동적으로", 그냥 말하면 안들어줄거 같아 "약간의 거짓말을 섞어" 자신이 젊은 시절 방문한 적이 있는 대농장을 가고 싶다고 말한다. 아이들도 보채고 난리라 마음이 약해진 아들은 차를 돌려 샛길로 빠져 어머니가 말한 대농장의 저택을 찾아가는데, 어느 순간 할머니는 그 대농장이 사실은 조지아 주가 아니라 테네시 주에 있다는 생각이 퍼뜩 떠올랐고, 놀라서 발로 여행 가방을 걷어차는 바람에 놀란 고양이가 운전하는 아들의 목으로 튀어오르고 차는 낮은 협곡 아래로 굴러 내리는 사고를 당한다. 가족들은 차 밖으로 튕겨져 나가버리지만 다행히 큰 부상을 당한 사람은 없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아님 차라리 다쳐서 일어나기 힘든 상황이었으면 나았다고 해야 할지... 뒤에 일어난 일을 생각하면 차라리 그 편이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때마침 지나가던 차를 보고 세웠는데... 아뿔싸! 차에서 내리는 세 남자가 모두 총을 들고 다가온다. 이때부터 긴장감이 극에 달한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 운전석에서 내린 남자는 신문에 난 "탈옥한 죄수 부적응자"가 아닌가. 극도로 위험한 인물임에 틀림없는데 하필... 뭐 그 뒤는 대충 말하지 않아도 알만하다. 총을 세 자루나 들고 내렸는데 그걸로 뭘 했겠는가!

그러니 차라리 사고가 났을 때 곧장 일어날 정도가 되지 않게 좀 더 다쳐서, 좀 더 누워있었다면 흉악한 놈들을 만나지는 않았을지도 모르는거 아니겠는가 말이다. 그럼 최소한 몰살은 면했을 지도 모르겠다. 정말 세상이 왜 이리 점점 더 험악해지는지... 외출하면서 빗장도 걸지 않던 시절도 있었는데... 그런 시절이 대체 언제였던 건지... 정말로 "좋은 사람은 참 드물다"는 말에... "왜 아니겠어요!" 하고 대답해 주고 싶다. 




'당신이 지키는 것은 어쩌면 당신의 생명'에는 귀머거리 딸과 외롭고 황량한 마을에서 살고 있는 노부인이 등장한다(두 모녀의 이름도 똑같다. 루시넬 크레이터. 그러니 두 모녀는 사실 한 몸과 같다). 툇마루에 딸과 앉아 있을 때 딱 봐도 그냥 떠돌이이고 앙상한 몸에 왼팔이 절반뿐인 남자가 지나가다 노부인의 집 마당으로 들어온다. 남자는 좋은 사람일까. 아니다. 교활하고 속내를 알 수 없는 사람이다. 되지도 않을 말장난과 논리로 노부인의 관심을 끌고 필요와 욕구를 충족하려 한다. 그의 관심은 노부인의 집 헛간에 있는 녹슨 자동차에 있다. 노부인의 필요를 간파한 그는 얼렁뚱땅 들어앉아 남자 없는 집의 살림살이를 고쳐주고 지붕도 얹어주고 뭐도 고쳐주고... 하면서 눌러앉는 듯 보인다. 일단 노부인의 관심을 계속 붙들고 있어야 한다. 아직 자동차는 고치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노부인의 관심은 그가 귀머거리 딸의 남편으로 그들의 집에 눌러살 수 있는 것인가에 있다. 이게 정말 가당치도 않은 일이란 걸 읽다 보면 다 알겠는데 노부인과 귀머거리 딸만 모른다. 노부인은 딸의 앞날을 생각하여 이 집에 눌러앉아 살아줄 남자가 절실하다. 그런데 선택의 여지 없이 그들에게 떨어진 사람이 이 떠돌이 청년이다. 그래서 이미 파국이 예정되어 있다. 드디어 자동차를 고쳐 초라한 외팔이 청년에서 남자로서의 권위를 회복하고 의기양양해진 떠돌이 청년은 결혼을 받아들이고 어찌저찌 돈을 받아내어 귀머거리 아내를 태우고 신혼여행이란 것을 떠난다. 청년의 속내는 알지도 못하면서 어찌 귀하디 귀한 딸을 이리 쉽게 내어준단 말인가...!

"나는 자네가 아니라면 누구에게도 딸을 주지 않았을 거야. 하지만 나는 자네 행동거지가 제대로 된 것을 보았어." 이게 신혼여행을 떠나는 청년에게 노부인이 한 말이다. 딸과는 영원히 안녕이겠지. 왜냐하면 자기 이름도 사는 곳도 말할 줄 모르는 노부인의 소중한 딸 루시넬 크레이터는 집으로부터 160 킬로미터 정도를 떨어진 소도시의 식당에 버려지기 때문이다. 그의 목적은 모빌로 가기 위한 자동차를 얻는 것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참으로 끔찍한 결말이다.




할머니의 사소한 거짓말, 순간적인 충동이 일어나는 것은 여행 중에 있었으니 크게 잘못이랄 것도 없다. 평소라면 그랬다. 또 노부인의 선택은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굳이 따져보자면 애초에 집안에 들이지 말았어야 했겠지만... 길 가는 불쌍한 젊은이에게 약간의 은혜를 베푸는 것이 뭐 그리 큰 잘못일까. 그 젊은이가 선량한 사람이었다면 아무 문제가 없었겠지만.. 그러나 소설 속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사소한 거짓말, 순간적인 충동의 결과가 너무도 참혹한 현실로 이어진다. 정말 그 가차없이 행해지는 악인들의 행동은 충동적이면서 계획적이고 일상적이어서 더 무섭다. 피할 방법이 없다. 그러니 그 순간 악인이 되지 못한 우리는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그저 평범한 일상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그저 악인을 만나지 않기를, 의도적으로 더해진 악담에 분노하지 않기를, 순간적인 분노를 잘 다스리기를, 끝까지 선행을 베풀 수 있는 힘을 주시기를, ... 이렇게 기도해야 하는 것일까. 플래너리 오코너는 이에 대해서 답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적나라하게 파헤쳐 최악을 보여줄 뿐.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뿐. 그래서 더 간절히 바라게 될 뿐이다. 지금 이 순간을 소중히 여기기를. 평온한 일상에 감사하기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음에 실망하지 않기를, 그래서 지금 더 행복해지기를.... 더 감사하게 되는 오늘이다. 이것이 작가가 나에게 주는 메세지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루☆ 2024-05-22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청난 에너지로 서평 오려주셔서 감사히 읽었습니다. 너무 공감가는 ‘잡초와의 싸움‘, 산 지 9년만에 꺼내 읽은 책의 39살에 죽은 작가 이야기, 섣부른 판단과 충동, 호기심으로 불행한 결말에 이르는 인물들에 대한 단상 그리고 이어지는 작품 설명 모두 즐겁게 읽었습니다. ~^^

은하수 2024-05-22 14:07   좋아요 1 | URL
즐겁게 읽으셨다니 저도 기쁩니다~~^^
이런 단편집 리뷰가 사실 제일 어렵더라구요. 하하..
오늘 하루도 무사함에 감사하는 맘입니다.
마루☆님께서도 평온한 하루이셨길 바랍니다^^
 

『나의 천사가 쓰여진 시대와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짧은 글
-<앙쥬> 밀레니엄 특집호, 「천사가 있는 21세기에서

생각해 보자. 궤도 계산에 실패한 외계인이 뉴욕이나 샌프란시스코, 파리나 도쿄가 아닌 서울에 착륙하는 모습을. 잠에서 덜 깬 어 . 몰려든 사람들의 머리 사이로 최신 원형 우주선과 눈부신 방송국의 조명과 손가락이 긴 외계인이 보인다. 그들이 레드카펫 위에서 미국 대통령이 콩고드기를 타고 오길 기다리는 동안 앵커는샤넬 트위드 자켓을 입고 지구에 대해 설명할 것이다. - P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