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여인의 키스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지음, 승주연 옮김 / 녹색광선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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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톤 체호프의 이 단편집을 계기로 체호프의 단편을 얼마나 읽었나 궁금증이 일었다. 올해 들어 러시아 작가들의 작품을 열심히 읽고는 있지만 그동안 러시아 작가들의 작품을 멀리 한 시간이 너무 오래기도 했고 체호프의 작품을 굳이 찾아 읽지도 않아서인지 정말 읽은 책이 거의 없다. 정말정말 오래 전에 여기저기의 단편집에서 읽긴 했겠지만 상대적으로 장편 위주의 읽기였기 때문에 체호프 뿐만 아니라 푸시킨이나 고골 등의 단편 작품들은 거의 기억나지 않았다. 체호프의 단편집으론 두 권인데 열린책들에서 2009년 출간했던 『벚꽃동산』과 올 2월에 출간된『아내.세자매』 두 권은 확실히 기억한다. 두 권은 간략하게나마 리뷰를 남겨놓았기 때문이다. 이번이 세번째 단편집이니까 모두 합쳐도 20편이 채 되지 않는다. 세 권의 단편집이 거의 겹치는 작품이 없어 그나마 다행이랄까.  

그래도 올해 들어 러시아 작가들의 작품을 꽤 읽고 있다. 북플로 검색해보니 8권을 읽었다. 알라딘 넘어오기 전에 교*에서 읽었던 책들은 리뷰는 커녕 독서목록도 남겨두지 않아서 그저 가물가물하고 열심히 읽었던 장편과 대작들은 북플에 올리지도 못하겠다. 이사오면서 대부분 정리한 책들도 아깝고... 함부로 서재 정리하면 낭패 본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는 중! 낭패라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다 정말로. 절대 함부로 서재 정리하지 마세요. ㅠㅠㅠㅠ 북플에 러시아 소설이 고작 9권이 등록이 되어 있는 걸 보니 속이 상한다. 고작 9권이라니. 올해의 소소한 러시아 소설 목록 중에 바실리 그로스만의 『삶과 운명』은 자그마치 1,400여 페이지에 달하는 그야말로 대하소설이었다. 오랜만에 이런 장편을 읽어내다니.... 넘 뿌듯하니 뭔가 기분이 마구마구 업업 되는지라 바로 잠자냥님께 땡투해서 체호프를 읽기 시작했다. 검은 표지가 생소해서 녹색광선의 책 아닌 줄 알았다. 큰일 날 뻔! 녹색광선의 소설은 내가 모으는 몇 안되는 출판사 중 한 곳이다.





「벚꽃 동산」은 예전에 뮤지컬로도 공연이 되고 연극 무대에도 자주 올랐는데 평소 희곡 작품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책으로는 읽지 않았다. 그러다 중앙대 연극영화과 학생들이 「벚꽃 동산」을 공연한단 포스터를 보고 혼자 가서 내용도 모르고 의미도 모르는 공연을 보고 왔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기껏 가서 보고 왔는데 대체 무슨 뜻인지 도통 알지도 못하겠고 설명해 주는 사람도 물어볼 곳도 없으니 책을 보고 나면 좀 나으려나 싶어 읽기 시작한 것이. 물론 읽고 나서도 모르긴 매한가지였지만. 읽었다는 만족감만 남긴 채 다시 그의 작품을 읽어볼 기회는 내게서 저 멀리로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그 당시에 간단하게 몇 자 적어놓은 걸 읽어보니 당시에도 이해불가였었나 보다. 도대체 무얼 말하려는 것인지 알 수 없기는 단편소설의 결말을 보아도 그렇지만 희곡은 더 그렇다고 생각했다. 특히 「갈매기」의 이해불가함이야 말로 해서 뭐하리... 이것도 연극을 볼 기회가 있었는데 역시 그때도 고개 절레절레... 그래서 아마도 내 기억 속엔 안톤 체호프는 어렵다는 생각이 깊이 박혔었나 보다.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귀여운 여인』등의 단편집이 꽤 자주 보였는데 그 후로 10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외면했으니 말이다.





이번 녹색광선의 『낯선 여인의 키스』에 실린 단편들은 그동안의 편견 아닌 편견을 불식시킬만큼 재미있었다. 표제작을 비롯해서 총 8편의 단편이 실려있는데 「귀여운 여인」은 올해 읽은 러시아 문학 단편집 중 단연 백미라 할 수 있는, 『아름답고 광포한 이 세상에서』(러시아대표단편문학선, 쎄네스트, 2013/ 이 아름다운 단편집도 역시 잠자냥 님 글에서... 너무 좋아 도서관에서 빌려보고 다시 알라딘에서 주문해 소장 중. 가끔 그냥 펼쳐본다! 많은 사람이 읽으면 참 좋겠단 생각이 든다. 강추!)에 실려 있어 읽었다. 나머지 7편은 첫 만남인 셈이다. 

정말 어처구니 없는 농담이라 치부하기엔 미심쩍고 거기다 사랑한다는 말을 농담으로, 그것도 세번이나 한 남자의 진심이 무엇인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첫 단편 「농담」, 결혼을 앞둔 신부가 무위도식하며 아무런 목적도 없이 살아가서는 안된다고, 여기 이 시골을 떠나 너의 삶을 살아가라는 충고를 듣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길을 떠나는 나쟈(첫 단편에서 어이없는 사랑고백을 받는 여주인공도 '나쟈', 마지막 단편의 주인공도 '나쟈'였어!)가 등장하는 마지막 단편인 「신부」까지 각각의 개성을 가진 단편들 모두가 다시 읽게 된다면 문득 떠오를테지만 그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을 작품을 꼽으라면 「6호실」을 말할 것이다. 「6호실」의 이반 드미트리치와 안드레이 예피미치의 대화를 읽으면서 슈테판 츠바이크의 「우체국 아가씨의 "페르디난트가 절절하게 토해내는 항변들"이 떠올라 그때와 같은 답답함을 경험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체국 아가씨 리뷰는 → https://blog.aladin.co.kr/734483154/14613804)




'6호실'은 병원 마당에 따로 떨어져 있는 별채의 병동을 말하는데 이곳은 마음의 병이 있는 사람들이 수용되어 있다. 짐승의 우리라 해도 이곳보다는 나을 듯한 곳에 5명의 환자가 수용되어 있고 쓰레기로 가득한 대기실엔 "순박하고 긍정적이며, 성실하고 멍청하지만, 무엇보다도 질서를 가장 사랑해서 환자란 자고로 때려야 한다고 확신하는 사람 중 한 명"인 퇴역군인 출신 수위 니키타가 항시 대기중이다. 질서 유지를 위한 구타는 무시로 일어난다. 뚱뚱하고 맹한 표정, 동작이 굼뜨고 식탐이 많으며 잘 씻지도 않아서 심한 악취를 풍기는 환자의 배설물을 처리하는 니키타는 주먹으로 있는 힘껏 그를 때린다. 하지만 환자는 이미 너무 익숙해져 있고 문제는 맞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소리도 지르지 못하며 심지어는 눈동자에도 변화가 없이 그 큰 몸이 흔들릴 뿐이라는 것이다. 이쯤 되면 이곳은 정신 병동이 아니라 집단 수용소다. 그러나 이 병원의 의사들은 환자들을 전혀 돌아보지 않는다.


  "이곳 별채처럼 단조로운 삶은 세상 어디에서도 보기 힘들 것이다. 사지에 마비가 온 사람과 뚱뚱한 사내만 빼고 아침이 되면 모든 환자들이 현관 앞 창고에서 양쪽에 손잡이가 달린 물통에 물을 채워서 세수를 하고 가운의 끝자락으로 얼굴을 닦는다. 그런 후에는 니키타가 본관에서 가져오는 차를 주석 컵에 따라서 마신다. 차는 한 잔씩 마실 수 있다. 정오에는 삭힌 양배추를 넣어서 만든 '시'라는 수프와 죽이 나오고 저녁에는 점심때 남은 죽을 먹는다. 끼니 사이에 환자들은 누워 있거나 잠을 자거나 창밖을 보고 병실 안을 왔다 갔다 한다. 매일 이런 식의 일과가 반복되는 것이다." (213~214쪽)

 




이 환자들 중에 귀족 출신의 젊은이인 이반 드미트리치 그로모프는 피해망상으로 괴로워한다. 그는 늘 흥분상태이고 몸을 동그랗게 만 채 늘 누워있거나 병실을 이 구석 저 구석 돌아다니며 한 자리에 앉아있는 경우가 드물고 주위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엄청난 불안 상태에 빠져있다. 이러한 그이지만 그는 손에 잡히는 것은 무엇이든지 탐욕스럽게 읽는 사람이고 독서는 그의 병적인 습관 가운데 하나이다. 모든 것이 제한된 '6호실'에서의 삶은 그에게는 더욱 불안을 유발하는 장소였을 것이다.

안드레이 예피미치 라긴이 이반을 만나기 위해 '6호실'을 방문하기 시작했다는 소문이 퍼진다. 어릴 때부터 유복한 가정에서 훌륭한 교육을 받고 지식인으로서, 외과의사로서 안락한 삶을 살아온 안드레이 예피미치가 이 병원의 의사다. 그는 부도덕이 만연한 병원의 상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고 선량하고 어진 마음의 소유자이지만 주변의 삶이 변화하도록 하기엔 자신이 의지도 약하고 자기에게 그럴 자격이 있는지 의심하면서 주위를 보살피려 하지 않고 방관한다. 소심한 성격 탓에 주위의 사람들이 불의한 일을 저질러도 눈을 감고 묵인하기에 이른다. 지식인으로서 나름의 의식이 있는 그였기에 이런 의사 생활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게 되고 물론 '6호실' 환자들의 상태조차 돌아보려 하지 않는다. 병원에도 가끔 출근하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홀로 책을 읽으며 소일한다. 참 좋겠군! 그러던 그가 '6호실'을 진료도 아니고 방문한다니. 왜? 바로 이반을 만나기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 안드레이는 환자들 중에서 드디어, 유일하게, 그토록 애타게 찾아 헤매던, 대화가 통하는 상대인 이반을 만나 유익한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면서 매일이 즐겁고 행복하다. 그와의 대화는 '삶의 낙'을 찾아주었다. 참.... 정말... 이렇게 현실 감각이 떨어진 지식인이라니...!


 이반: "이곳에 반드시 있어야 할 사람이란 없어요." 

 안드레이: "감옥이나 정신병원이 존재한다면 누군가는 그곳에 수감되거나 입원해야 해요. 당신이 아니면 내가, 내가 아니라면 또 다른 누군가가 들어가야겠죠. 먼 미래에 감옥이나 정신병원이 존재하지 않게 되면 철창도 병원 가운도 없을 테니 그때까지만 기다려요. 그런 날은 언젠간 반드시 올 겁니다."  

 

정신병원에 수용되어 있지만 정신병자는 아닌 사람들, 비정상이지만 정신병원에 수용되어야 할 이유가 없는 사람들, 과연 정상인과 비정상인의 경계는 무엇일까? 이러한 질문들을 고민하게 하는 대화들을 나누지만 의사 안드레이는 자신도 정신병원에 수감될 수 있다고 말을 하지만 결코 그런 시설에 수용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자부한다. 그저 쓸모없는 대화를 위한 말일 뿐. 





  "나는 삶을 단순히 사랑하는 정도에 그치지 않고 열정적으로 사랑해요! 나는 피해망상이 있어서 늘 고통스러운 공포에 시달리지만 살고 싶은 강렬한 욕구가 생기는 순간에는 미칠까 두려워요. 살고 싶어서 미치겠단 말입니다!" 

이렇게 절규하는 이반의 외침이 너무 절절해서 가슴이 답답할 지경인데 조언이랍시고 하는 것이 너무 피상적이어서 고통으로 점철된 삶을 힘겹게 헤쳐온 이반에게는 결코 와닿지 않는다. 결국 이반은 안드레이를 향해 일침을 날리고 그를 경멸하기에 이르지만 이마저도 안드레이는 알아채지 못한다. 


  " ... 젊은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 지 조언을 얻으려고 한다 칩시다. 다른 사람이라면 대답하기 전에 생각을 좀 할 텐데 선생님은 '삶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라거나 진정한 행복을 찾으라'는 식의 준비된 대답을 해준단 말입니다. 그런데 이 환상적인 '진정한 행복'이라는 것이 무엇이냔 말입니다. 물론 해답은 없습니다. 우리는 이곳 철창에 갇혀서 고통당하는데 이 상황은 아주 좋은 데다 합리적입니다. 그 이유는 이 병실과 따뜻하고 쾌적한 선생님의 서제 사이에 그 어떤 차이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달리 하는 일도 없고, 양심에 거리낌도 없으며, 자신을 현자라고 느낄 수도 있는 이 얼마나 편리한 철학이란 말입니까... 아니요, 선생님, 이것은 철학도 사유도, 폭넓은 사고도 아니며 게으름이고 고행 수도이며, 불분명한 의식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란 말입니다... (250쪽)





정신병동인 '6호실' 수용자와의 대화를 위해 병원의 환자들도 팽개친 그의 실상이 주위 사람들에게 점점 이상하게 보이기 시작하고 결국 그는 병원에서 퇴직을 권고 받는다. 이제 무엇에도 관심을 두지 않고 정상적인 교류를 하지 않으려는 그를 향해 사람들은 그도 정신에 이상이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 자신이 결코 들어오게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6호실'에 환자로 수용된 그는 수용 생활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반항하다 니키타에게 구타를 당하는 신세가 되었고, 고통에 몸부림치며, 또 맞을까봐 두려움에 떨며, 숨죽이며 누워있다. 


 ... 혼란 속에서 그의 머릿속에 갑자기 무섭고 괴로운 생각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지금 달빛을 받아서 검은 그림자 같은 형상을 한 이 사람들은 이 같은 통증을 수년째 매일 겪어야 했다는 것이었다. 어째서 그는 20년이 넘도록 이러한 사실을 몰랐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을까? 그는 고통을 몰랐고, 통증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으니 그의 잘못은 없다. 하지만 니키타처럼 거칠고 완고한 그의 양심은 가책을 느끼며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오한을 느꼈다.





중편 정도의 분량이라 길지 않은 작품이지만 거기에 담긴 내용은 현실의 문제를 반영하는 요소가 많은 만큼 우리에게 여러가지 고민거리도 안겨준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정상인과 비정상인의 경계를 고민하고 그들의 고통을 헤아리는 인식의 전환이야 당연히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인간으로서 우리가 직접 경험해보지 않았다고 해서 소외받는 사람들의 고통을 모른다고, 몰랐기 때문에 잘못이 없는 거라고 간단히 치부해도 되는 것일까. 그러면 안되는 거 아닐까! 우리 많이 배우고 많이 가진 자들은 사회에 일정 부분 빚이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 고통을 분담하고 경감시켜주려 애쓰는 마음을 갖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일까. 아닐 것이다. 꼭 찍어먹어봐야만 똥인지 된장인지 안다고 말하는 그런 배움에 대체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런지...? 그렇기 때문에 안드레이의 저 말..."그는 고통을 몰랐고, 통증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으니 그의 잘못은 없다."는 저 말의 판단을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넘긴 체호프의 문장에 더 힘이 실리는 거 아닐까! 한 문장 한 문장 읽을 때마다 자꾸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만드니 이래서 명작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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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의 루시 - 루시 바턴 시리즈 루시 바턴 시리즈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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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아침에 <바닷가의 루시>를 다 읽고 나니 이제는 '루시 바턴'의 이야기는 끝이 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도 루시의 이야기를 쓸 것이 남아 있을까? 오랜 친구를 떠나 보내는 것 같은 허전함이 이제서야 뒤따르는 그런 기분이었지만 루시 바턴 시리즈의 여러 작품들에서 드러나는 루시의 선택이 늘상 이해가 되었던 것은 아니다. 물론 난 루시와 같은 결혼 생활의 위기와 이혼, 사별을 경험해보지도 않았고 극심한 가난으로 온 동네의 무시와 냉대를 받는 어린 시절에 대한 트라우마를 경험한 것도 아니니까 그녀가 하는 선택들이 내가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어도 루시 바턴의 선택을 언제나 존중한다고 생각했다. 그녀라면 그럴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렇더라도 사실 좀 의아한 부분은 <오, 윌리엄!>,<무언이든 가능하다>를 읽을 때였다. 윌리엄이 루시의 대학시절 절친 조앤과 바람을 피워 이혼을 하는 과정도 너무 마음이 아팠는데 두 사람이 이혼하고 윌리엄은 조앤과 결혼을 하고 7 년간 부부로 살기까지 했다. 그런 과정을 겪는 동안 루시가 얼마나 힘들어 했는지, 그것이 얼마나 큰 상처가 되어 루시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지 하는 이런 과정들을 읽어 나가며 나는 윌리엄을 정말로 미워했다. 그 냉정함이 너무 싫었다. 그런데 또 다시 이혼을 하고 젊은 배우인 에스텔과 결혼을 해서 늦은 나이에 딸 브리짓을 낳았다. 지금은 에스텔이 브리짓을 데리고 집을 나갔고 둘은 이혼 상태이지만 사이가 나쁜 것은 아니다. 브리짓이 있으니 그렇기도 하고 에스텔은 참 쿨하고 시원시원한 성격이라 그런가 이혼을 하고도 친구처럼 잘 지낸다. 베스트셀러 작가임에도 자신의 어린 시절의 가난을 팔아 작가로 살아간다고 생각하는, 자존감이 바닥을 치는 루시와는 상당히 다른 성격이라 다행인건지 아무튼 그렇다. 결론은 윌리엄은 지금 몹시 외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단 건데 ㅡ그러고 보니 윌리엄 주위엔 온통 여자들 뿐이지 뭔가. 루시, 조앤, 에스텔, 어린 딸 브리짓, 그리고 루시와의 딸들인 크리시와 베카, 결정적으로 이부 누이인 로이스 부바까지ㅡ 이래저래 나이도 들고 몸도 예전 같지 않아(나중에 알고 보니 윌리엄이 전립선암 수술을 했고 수술이 잘못되어 자꾸 실례를 하는 바람에 청바지를 이틀 단위로 갈아입고 열심히 빨았다는 거다. 이 부분에서 또 깜놀 함) 우울하던 윌리엄이 어느 날 가족의 족보 찾기 프로그램을 통하여 자신에게 이부 누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도 아무런 말을 해주시지 않아 전혀 모르고 있다 느닷없이 누이가 튀어나왔으니 놀랄만도 하지만 하필 그 누이를 찾으러 가는데 왜 뜬금없이 루시에게 전화를 하는가 말이다. 물론 바람 필 때부터 윌리엄은 내 눈 밖에 났지만(하하) 이 장면에선 솔직히 이해가 안 가긴 했다. 헤어진 첫 엑스와이프에게 전화를 하다니 같이 갈 사람이 그렇게 없나? 아직 루시를 믿고 의자한다니 그게 너무 의아하지 않나? 이런 생각을 했었다. 아니 그런데는 혼자서 가야하는 게 맞지 현 와이프도 아니고 전전부인이라니.... 참 어이가 없는 것도 정도껏이어야지 싶었는데 그걸 또 흔쾌히 따라가 주는 루시도 이해 안 가긴 마찬가지. 로이스 부바를 만나고 대화를 한 것은 윌리엄이 아니라 정작 같이 따라나섰던 루시였다는 것이 또 의외의 상황이었지. 그래서 윌리엄을 미워하는 나는 지난 번 <무엇이든 가능하다>를 읽고 나서 루시 시리즈가 또 나오리라곤 생각을 못한 상태라 <바닷가의 루시>가 출간되었고 책 소개를 보고선 또 윌리엄이 등장한대서 읽지 말아야하나를 심각하게 고민을 한 거다. 하지만 루시는 궁금하니까... 결과적으론 읽기를 잘했단 생각이지만... 아무튼 이 책을 읽고 드는 생각도 많았고 리뷰를 쓴다고 하면 여러 방향으로 다양하게 할 말이 너무 많은 작품이란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내 나이가 루시보단 약간 적지만 어쩌면 남자와 여자, 아니면 그저 부부로서의 삶, 그리고 부모로서의 삶에 있어 곧 루시와 비슷한 경험과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어서 솔직히 이 작품이 전혀 남일 같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루시와 윌리엄의 결정이 이해도 안되고 윌리엄이란 남자를 용서하기가 힘든 마음이었지만 - 아유, 정말. 내 남편도 아닌데 내가 용서를 말하는 것도 좀 어불성설이긴 하지만 미워하는 것도 내 자유지 뭐! - 이번 생은 루시와 윌리엄이 남은 생을 함께 하기로 했다니 이제는 그만 미워하고 윌리엄 씨와 그냥 화해를 해볼까 한다.^^




윌리엄 씨와 그만 화해를 해볼까 하는 생각의 이면엔 역시 루시의 선택이 윌리엄이란 게 가장 큰 이유이다. 역시 난 루시의 선택을 존중한다!  거기다 결과적으로 윌리엄은 코비드로부터 루시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지켜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루시에게 다정하고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는 그런 마음 씀씀이가 어디 느닷없이 생겼을까만은. 좀 더 다정하게 대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내 마음과 루시의 마음이 통한 걸까. 루시가 윌리엄에게 왜 더 다정할 수 없었던 것인지 물었을 때 윌리엄은 이렇게 말한다. "루시, 내가 구하고 싶은 건 당신의 삶이야." , "요즘은 내 삶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어. 딸들이 여전히 나에게 의지한다는 사실만 빼면. 특히 브리짓은, 그애는 아직 어리니까. 하지만 루시, 당신이 그것 때문에 죽는다면, 그건 ㅡ", "나는 당신의 목숨을 구하고 싶었어. ..."(78~79쪽) 이 이상 다른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그냥 이 말들을 읽는데 이것은 단순히 '사랑'이라는 단 한 마디로는 도저히 표현이 불가능한, 긴 시간을 함께한 사람들에게서 나올 수 있는 진한 마음이 담겨 있어서 이후로 나는 윌리엄을 더 이상 미워할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거다. 음... 그를 미워할 동력을 상실한 셈이 된 거니까 이제 윌리엄 씨와 화해를 해야지! 어쩌겠는가. 더 이상 만날 수 없을 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마지막에 윌리엄은 이런 말도 한다! "사랑해, 루시 바턴. 어떤 일이 있어도." 지구별 마지막 인류이기라도 한 것처럼 꼭 껴안는 두 사람... (이거 스포일까요?^^)




오늘 친구네 집 놀러갔다 오면서 차 안에서 생각나는 문장이 있었다. 이 말에 깊이 공감하고 있어서 일 것이다. "이 삶에서 앞으로 우리를 기다리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은 선물이다." (290쪽) 암, 선물이지. 젊은 시절 앞으로의 내 삶이 어떤 식으로 펼쳐질지 알았다면? 글쎄, ... 더 많은 것을 쟁취하기 위해 더 용기를 내거나 혹은 더 노력을 했을까? 자신할 수 없지만 아마 아닐 것이다. 어떤 부분에선 바뀌려고 노력도 했겠지만 결국은 이런 식으로 흘러오도록 예정되어 있지 않았을까? 아니면 지금보다 더 나쁜 상황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모르기 때문에 나에게 주어진 시간들을 좀 더 알차게, 좀 더 의미있게, 좀 더 행복해지려고 노력했다고 생각한다. 지금보다는 나은 내일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희망을 품어보기도 했다. 몰랐기 때문에. 알았다면... 지금의 남편과는 진즉에 헤어지고 다른 남자를 만났을지도 모르고 혼자 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남편에겐 안 된 말이지만.(안된 말일까? 남편도 좋아할 수도 있다 ㅎㅎ) 나는 내 앞날에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몰랐기 때문에 희망을 버리지 않았고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 살아내려 노력했다. 그 시간만은 후회하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그 시간을 다시 살아내라고 한다면 아마 그러지 못할 것 같단 생각이 든다. 지금 이 순간이 나에게 주어진 가장 큰 선물이 될 수 있는 건 내가 이 순간의 소중함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윌리엄과 루시가 지금과 같은 결과를 알았다면 ... 결코 하지 않았을 행돌들일까? 바람을 피우고 가정을 파탄내고 아이들과 루시를 절망에 빠뜨리는, 뭐 그런 일들 말이다. 아마도 윌리엄은 똑같이 행동하고 같은 결론에 도달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든다. 회생을 다룬 드라마에서도 결국은 같은 결말에 이르지 않던가 말이다. 너무 루시의 입장에서만 말하는 것 같지만 사실 난 윌리엄의 입장이 되어 생각이 되어지지가 않는다. 대체 뭘 생각할 수가 있을까? 돌고 돌아 루시라니... 윌리엄이라니...




낮에 친구네 집에 놀러갔다 '졸혼'이라는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었다. 친구는 남편과 살던 집에서 나와 따로 집을 구해 살고 있는데 이번에 투룸으로 이사를 했다. 오늘은 집들이 인 셈이다. 사실 말이 좋아 졸혼이지 친구네는 엄격한 의미로는 '별거'라고 하는 것이 맞다. 남편의 술 주사 문제로 신혼 초부터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엄청나게 많은 다툼과 경제적 손실과 폭력과 분리 같은 문제들이 반복되고 있었기 때문에 친구는 정말 심각하게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는 수준에까지 이른 것이다. 비단 이 친구만이 아니라 주위 지인들을 보면 정말 다양한 이유로 별거를 하고 한 집에 살지만 부부라고 보기 어려운 관계를 유지하고 졸혼을 하고 별거를 하며 혹은 이혼 후에 다른 인연을 만나 가정을 이루고 살고 있지만, 홀로 사는 그 친구들이 나에게 말하길 자신들은 가능하기만 하다면 혼자보단 '같이' 하는 삶을 선택하겠다고 말한다(이 부분도 정말 이해 안되는 부분 중 하나일 수 있지만, 우리 세대 여성들이 겪는 경제적 불안 요인이 크게 작용하는 것이란 걸 짐작할 수 있다. 나도 마찬가지고). 심각하게 '혼자'의 삶을 고민하던 나에게 친구들이 한 말이다. 내가 진정 바라는 삶은 어떤 삶일까. 혼자 하는 삶을 진정 바라는 걸까??? 난 남편을 버리고? 혼자의 삶을 택할 용기가 있을까? 아마도... 아닐걸?! 




어제 유튜브에서 본 영상이 하나 있다. 한석규와 김서형 배우가 주연한 드라마였다. 제목이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였는데 대장암 말기 시한부 선고를 받은 아내(김서형)를 위해 요리하는 남편 한석규 모습 너무 멋졌다. 그런데 이 부부의 이런 다정하고 배려하는 모습 이전에 서로 의견의 대립을 좁히지 못하고 다투고 불화하는 모습이었고 이혼 서류까지 모두 작성해 놓은 상태였다. 자세한 내용은 모르지만 별거에 들어간 부부가 아내의 건강검진 결과를 듣는 자리에 함께 갔었고 거기서 담당 의사 선생님은 아내에게 돌봐줄 사람이 있는지를 묻는다. 돌봐줄 사람이 꼭 팔요하다면서... 두 부부 중 한 명이 이런 상황을 맞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른 선택지는 무엇이 있을지 나도 정말 고민이 되었다. 아내(김서형)는 병원 로비에서 남편(한석규)에게 부탁한다. "자기가 날 돌봐줬으면 좋겠어. 언젠간 간병 시설로 들어가야겠지만  그 전까진 환자처럼 안 살고 싶어. ... 그렇게 오래는 아닐 거야. 자기가 싫음 말고." 아무리 그래도 말도 참 밉게도 한다. 라면 밖에 끓일 줄 모르던 남편은 아내를 위해 요리를 시작하고 무염으로 요리된 음식이 무슨 맛이 있을까 싶었는데 먹지도 못하고 뱉어내던 아내가 어느 날 쥐똥고추를 넣은 매운 잡채를 맛있게 먹는다. 그러면서 묻는다. "내가 자기한테 케어를 부탁했을 때 왜 오케이를 했어? 우리가 너무 사랑하는 사이 그런 거 아니잖아." 남편의 대답은 "내가 만약 아팠다면 너도 나한테 똑같이 하지 않았을까?"(아내도 고개 끄덕끄덕...). 세상에 정말 알 수가 없는 것이 부부의 세계구나 싶어 루시와 윌리엄의 관계도 그냥 이해가 되었고 졸혼을 살짝 꿈꾸었던 내 마음도 어느 정도 내려놓고 싶어졌다. 혼자의 삶이란 것이 일견 편하고 홀가분할 거 같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란 것을 실감할 때가 많다. 외로움이 덤처럼 늘상 얹혀 있을지도 모르고. 지금은 늙어가는 남편을 보면서 '측은지심'이 들고 저 사람이 늙어서 나 아니면 돌봐줄 사람이 누가 있을까 생각을 하다가 내가 더 먼저 병이 나 아플 수도 있는데 나를 돌봐달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도 결국 남편 밖에 없다는 생각에 이른다. 그럼에도 나는 윌리엄처럼 "사랑해 루시 바턴, 어떤 일이 있어도" 이런 말은 못할 거 같다.(으으윽... 살짝 소름...)^^




아차차.... 그리고 이 작품을 읽으면서 만난 반가운 인물 올리브 키터리지 씨~~~ 윌리엄과 루시가 코비드를 피해 이주한 곳이 메인주 크로스비인데 이 곳은 스트라우트의 또 다른 작품인 <올리브 키터리지>의 삶의 배경이 되는 곳이며 나는 읽지는 않았지만(곧 읽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 이름을 들으니 짐작이 가는 <버지스 형제>의 주인공인 동생 밥 버지스가 뉴욕에서의 변호사 활동을 접고 이주해 살고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올리브는 여전히 살아있다.^^ 루시의 친구 샬린 비버의 말에 따르면 그녀를 두고 먼저 떠나버린 첫 남편과 두번째 남편을 원망하며 살고 있다나...ㅎㅎ. 버지스는 루시와 윌리엄을 도와주는 든든하고 멋진 친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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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08-14 08: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 아직 안읽고 있는데 이 리뷰만으로도 참 너무나 좋네요. 특히 코비드에서 루시를 지켜내는 윌리엄이라니. 아오 책 만나기 전부터 너무 좋습니다. 그런 내용이 나올 줄은 전혀 모르고 있었어요.

은하수 2024-08-14 10:27   좋아요 1 | URL
저두요... 내용은 전혀 검색도 안해보고 그저 루시여서 읽었던 건데 너무 좋았어요
이 작품은 한편으론 루시의 트라우마와 상처가 치유되는 과정을 보여주기 위한, 작가가 우리에게 주는 위안의 책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어루만져 주는 느낌이랄까... 힘든 시간을 잘 견뎌내었구나 수고했다...
뭐 이런 느낌이요^^
이래저래 할말이 참 많은 좋은 책입니다!

단발머리 2024-08-14 20: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아... 은하수님 이 글 너무 좋네요~~~ 저는 조금 일찍 이 책 읽고 그리고 너무 좋아서 오디오북 사서 한 번 듣고요. 나중에도 또 나중에도 또 읽고 싶은 책이에요. <오, 윌리엄!> 읽으면서 화나고 윌리엄 미워했던 저도, 이 책을 읽고 윌리엄과 화해했습니다. 이런 식의 화해와 용서를 저는 싫어하지만ㅠㅠㅠㅠ

은하수님은 이 책 읽으셨으니깐 이야기 할 수 있어서 좋아요. 두번째 남편 데이빗은 잘해주잖아요. 사랑한다는 말도 자주 하고, 또... 어떻게 내가 당신을 만났을까, 그런 말들에서 루시를 너무 사랑하는게 느껴져요. 반면에 윌리엄은 루시 예쁘다는 말을 안 하잖아요. 근데 루시에게 필요한 것을 기억해서 딱딱 그 앞에 내어놓을 때, 뭐랄까. 저는 데이빗 같은 남자가 좋다고 느끼지만, 윌리엄 같은 남자를 사랑하지 않을 수도 없는 거에요. 아, 저도 마음이 몽글몽글 ㅋㅋㅋㅋㅋㅋㅋㅋ

참, 은하수님~ 이 다음이야기 <Tell me everything>이 9월에 나온다는 소식을 전해드립니다. 스트라우트 130세까지 사셔야 합니다!!

은하수 2024-08-14 22:56   좋아요 1 | URL
단발머리님께서도 저와 공감하는 부분이 많으셨다니 저도 너무 반갑네요. 이 책은 정말 이야깃거리가 너무 많아서 이 리뷰처럼 한 부분만 쓰기에는 너무 아까운 책이잖아요? 전 그랬거든요. 저도 읽고 나서 여기저기 또 넘기면서 읽어도 정말 이번 책은 진짜 최고구나 이런 말이 나오게 좋은 문장들이 너무 많았어요. 기억하고 싶어지는 문장들이 많은데 기억력은 한계가 있어 아쉽구요 ㅠ.ㅠ

윌리엄에게 화해를 청했지만.... 저도 루시도 여자니까 도저히 이해안되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들이 있더라구요. 그건 어쩔 수없이 벽이 가로 막힌 것처럼 이렇게도 저렇게도 안되는 것이구나 생각하면 그냥 포기해야 되나보다 싶어요. 현실에서 사실 남편과도 그러니까요. 아무리 내 마음을 설명해도 알겠다고는 하는데 모르겠는 얼굴 표정할 때 있지 않나요? 그게 보이죠. 그렇게 서로 이해가 안되면서도 그 모든 걸 덮기 위해 ‘사랑하는‘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모면하려는 거 같은 기분이 들게 하죠. 그럼에도 루시가 윌리엄을 이제 그저 받아들였듯이 저도 그냥 넘어가야겠죠. 어쩔 수 없이요. 후훗 데이빗이 너무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이라 그리 일찍...흑... 역시 사랑 총량의 법칙이란게 있나봐요~~^^

ㅎㅎㅎㅎ 아직 못다한 이야기가 남아 있네요. everything..이라니 역시 기대가 됩니다.
우리 건강하게 스트라우트 여사님보다 더 오래 살아보아요^^
 
[세트] 삶과 운명 1~3 세트 - 전3권 창비세계문학
바실리 그로스만 지음, 최선 옮김 / 창비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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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없이 바쁜 7월을 보내고 나니 훌쩍 8월이 되어버렸다. 거의 책을 읽지 못했다고 하기도 애매하다. 지난 달엔 8 권 정도의 책을 읽었을 뿐이다. 평소보다 적게 읽은 건 사실이지만 나름 꾸준히 읽었다고 생각을 했는데 막상 독서목록을 대하고 보니 7월은 정말 너무했구나 하는 생각에 많이 아쉬웠다. 속상하긴 하지만 뭐 어쩔 수 없다. 나름 알차고 보람찬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라 위안 삼아 본다. 외국 사는 하나 뿐인 동생이 조카 둘을 데리고 한국 오는 바람에 몹시 바빴다. 단지 며칠일 뿐이고 대부분 엄마 집에서 보내긴 했지만 그 사이사이 우리 집과 에어비앤비를 오가는 생활을 하는 바람에 나도 덩달아 바빴기 때문이다. 올해도 동생의 방문은 강력한 임팩트를 남기며 마무리가 되었다. 월요일 새벽 비행기를 탔으니 잘 도착했겠지! 




올 때마다 운전이 안돼 기동성이 떨어지는 동생을 데리고 쇼핑을 다니느라 바쁜 나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여기저기 쇼핑몰로 아울렛으로 쇼핑을 다녀야 했고 쉴 틈 없이 먹어대는 10대 사춘기 소년들(동생이 나와는 한 살 차이지만 늦은 나이에 기적적으로, 그것도 연 년생으로 두 녀석이 찾아와 주어 이제 겨우 중,고생이다)의 식사를 챙기느라 정말 눈 코 뜰 새 없이 바쁘기만 했다. 아.. 이 짓도 젊어서 하는 거지 정말 나이 들어 뭔 일인가 싶고 이러니 80 살이 넘으신 엄마는 얼마나 더 힘드실까 싶다가도 그 힘듦을 동생 가족에게 풀어내고 허구헌 날 싸우고 다투고 악감정 소비하느라 즐거운 시간 한 번 못 보내고 더운 여름을 나는 우리 가족은 대체 왜 이러나 싶기도 했다. 그래도 자식인데 몇 년에 한 번 오는 딸과 어찌 그리도 못지내시는지 원망하기도 하고 그 중간에 낀 나는 동생과 조카들을 데리러 갔다 다시 데려다 주는 중노동을 해야만 하니 울화가 안 치밀래야 안 치밀 수가 없었다. 아무리 가족이지만 이제는 이런 불통의 시간은 그만 끝내고 싶다!!! 진짜 너무 힘들어 ㅠㅠ




이렇게 가장 가까운 가족으로 인하여 힘들고 감정 소비 많은 6월과 7월을 보냈지만 바실리 그로스만의 소설 <삶과 운명 1~3> 3권의 작품을 읽고 나면 이러한 감정의 소비조차도 지나고 보면 얼마나 사치스러운 감정인지, 또 이런 소소한 일상들이 얼마나 더 간절하게 느껴질지 실감하게 된다는 것이다. 개인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전쟁이라는 극한의 상황을 맞닥뜨리게 된다면 이러한 감정들이 더 절실해지고 가족이라는 존재들이 내 옆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럽게 느껴질지 새삼 깨닫게 된다. 기온은 급상승하고 습도도 너무 높아서 짜증이 나고 거기다 너무 바쁘고 정신없어서 어느 순간 다 놓아버리고 싶어질 때도 있을 것이고 아, 내가 왜 이렇게 가족 때문에 고통의 시간을 견뎌야 하는 것일까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이런 감정이 무색해지도록 전쟁은 모든 것을 파괴하고야 만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목숨을 잃고 죽어나가고 쓰러져 간다. 그러한 죽음을 읽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허탈해지고 무기력이라는 감정이 나에게 찾아오게 된다. 제발 이 사람만은 살아서 돌아오기를 바라는 간절한 바람들이 맥 없이 무너지고 또 무너진다.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주요한 배경이니 이는 어쩌면 너무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작품의 주요 배경이 되는 장소인 소련의 스탈린그라드는 볼가 강변에 위치한 도시로서 탱크와 전차,비행기 등의 군수물자를 생산하는 대규모의 공장들이 위치해 있어 그야말로 러시아 군수 산업의 요충지였다. 점령지의 물자와 인력을 원천으로 전쟁을 이어가던 독일에게 있어 소련의 석유와 군수 물자는 중요한 자원이었고 스탈린그라드는 공격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문제는 그곳이 인구밀집 지역이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소련의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사상자는 군인과 민간을 합쳐 백만 명이 넘는다고 하니 그 피해 정도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이다. 인구밀집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라 전쟁 초기에 폭격으로 인한 사상자가 엄청나게 많았고 무너진 건물 잔해 속에서 벌어진 시가전은 일명 '생쥐 전쟁'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건물들마다 전쟁터였는데 각개격파를 방불케하는 전투의 양상은 독일군과 소련군의 참호의 거리가 불과 몇 미터의 짧은 거리여서 그 피해가 시간이 갈 수록 늘어났다. 결국 스탈린그라드에서 제대로 남은 건물이 없을 정도로 도시는 완전히 무너진 후에야 끝을 볼 수 있었다. 이러한 전쟁의 참상이 작품 속에서도 명백히 드러나는데 단순한 사실의 나열 수준이 아니었고 문장들은 상상 이상으로, 그리고 굉장히 실재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는 전쟁에 종군 기자로 1천 일 이상 참전한 경험을 작품화한 작가의 체험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기도 하고  전쟁에 실제 참여했던 독일과 소련의 지휘관들의 실명과 장소, 전쟁의 전개 양상이 그대로 사용된 점들도 실재성을 배가시켜주는데 이러한 점이 작품을 읽는 재미를 한껏 끌어올리고 있다. 




2차 대전 당시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스탈린 그라드 전투의 승리로 연합군은 열세였던 전쟁의 승기를 잡은 셈이 되었고 스탈린그라드에서 항복한 독일은 그 후 동부 유럽의 점령지들을 소련에 내어주게 되는데 작가 바실리 그로스만은 붉은 군대와 함께 탈환되는 도시들로 들어가 독일의 나치가 저지른 만행들을 목격하게 된다. 1944년에는 폴란드에 위치한 트레블린카 절멸 수용소에 도달해 답사하면서 그곳 가스실에서 노역했던 사람들, 무장봉기를 일으켰다가 성공해 살아남은 사람들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트레블린카 절멸 수용소는 오로지 유대인 절멸을 위해 지어진 곳으로 아우슈비츠의 악명에 가려 그 실상이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단 15 개월간 운영되면서 약 80만~92만의 유대인을 학살한 곳이다. 이 작품에도 이러한 실상들이 고스란히 생생하게 남아 있다. 특히 2권의 중반부에 등장하는 절멸 수용소의 가스실 건설 장면과 이름도 잊히지 않는 '로제'라는 가스실 노역자의 미소는 아마도 꽤 오래 남아 있을 거 같다. 지루한 처음 부분을 넘기지 못하고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아 고민하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등장하는 절멸 수용소의 가스실 건설 과정은 정신을 번쩍 뜨이게 할 만큼 충격으로 다가왔다. 거기다 벌거벗은 유대인들을 가스실로 몰아넣고 마치 난 그저 나에게 주어진 나의 일을 할 뿐이라는 듯 무심하게 미소짓는 '로제'라는 이름을 가진 악마의 모습도 역시 충격 그 자체였다. 




작품의 배경은 스탈린그라드 시가전을 보여주기도 하고 수용소에 갇혀 봉기를 일으키려 모의하는 러시아 포로들의 실상을 보여주기도 한다. 유대인들을 태우고 달리는 기차와 마침내 도착한 수용소에서 마치 컨베이어벨트에 실려 도살장으로 향하는 가축처럼 가스실로 향하는 사람들의 처참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스탈린그라드에서 피난지로 옮겨간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다 전쟁의 와중에도 변함없이 연구를 하고 아이를 낳고 사랑을 나누고 가족의 생사를 걱정하는 사람들의 일상을 보여주기도 한다. 전쟁 중에 부상을 당한 아들을 보기 위해 길을 떠나는 어머니의 모습이었다가 전쟁 속에서도 피어나는 애절한 사랑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장소적 배경도 전 유럽을 망라하고 있고 등장인물은 스탈린이기도 했다가 히틀러이기도 했고 결국 스탈린그라드 지하 방공호에서 나와 항복을 선언하는 독일의 파울러 장군의 모습을 묘사하기도 하면서 전쟁이라는 상황에 처한 인간들의 삶과 운명을 입체적으로 조명한다. 작가가 이 작품에서 말하고 싶었던 주제는 단순하지 않다. 1400 여 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대하소설이니 그럴 만도 하다. 소설에 언급되거나 다루어진 사건들은 20 세기 이후 역사 기록물들의 공개와 연구가 이루어지면서 새롭게 알려진 내용들을 다루고 있었고, 소련 치하에서 금기시되었던 정치적인 내용들이었기 때문에 출판되는데 있어서도 지난한 과정을 겪었다. 




주요 인물인 끄리모프(소련 공산당의 사상을 강의, 교화하는 직책인 사단의 '꼬미사르'이다.  사단 내에서 일어나는 일을 전반적으로 보고하는 임무를 띄고 있어서 이 직책을 가진 사람 앞에서는 정말 말 한마디도 조심해서 해야한다!)가 스탈린이 지배하는 국가가 혁명의 이상을 배반했다고 생각하는 과정과 스탈린의 지배체제가 나치주의와 다름 없이 전체주의 국가로서의 부조리함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을 설파한 점, 소련의 노동교화소의 실상과 유대인 박해도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점, 소련에 존재하지 않는 듯 지워져버린 다방면의 유명 인사들을 작품 전반 곳곳에서 주인공들의 입을 통하여 세세하게 언급한 점, 그리고 유대인을 박해하면서도 주요 인물 중 하나인 빅또르가 기초 물리학자로서의 성과를 내기 시작하자 그의 위상이 달라진 점, 파시스트와 다른 정권을 표방하면서 사람들의 삶을 옥죄고 감시하였으며 그들이 내뱉는 모든 말과 행동, 정신까지도 지배하려 획책하는 소련 정부 관료들의 숨막히는 행태는 결국 소련 정권의 위선과 술책을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불합리하고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비인간적인 관료주의 하에서도 사람들은 친구, 연인, 가족과의 사랑과 행복을 꿈꾸었을 뿐인데 여기에서 대체 무슨 잘못을 찾아내려 애를 쓴단 말인가!. 그것이 진정 제대로 된 국가이기는 한 것일까!  결국 그로스만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인간의 승리는 거대한 것, 추상적인 것을 이기는 구체적인 것, 개인적인 것에 있으며, 집단주의 및 획일화, 편견, 오만, 악의, 폭력, 전쟁의 대척점에 개인주의 및 다양성, 공감, 배려, 선의, 비폭력, 평화가 자리하고, 절망, 체념, 증오, 죽음, 부자유의 반대편에 희망, 저항, 사랑, 삶, 자유가 자리한다는 것을 성공적으로 설득해냈다"(416쪽, 작품해설 중에서)고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내가 보고 싶은 건 전쟁에 처한 사람들과 그로 인하여 가족을 잃고 슬픔에 빠지고 먹을 것과 살 곳을 찾아 여기저기 방황하는 일련의 과정들을 보면서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가족'의 소중함과 소소한 일상의 소중함, 그 속에서 피어나는 인간을 향한 사랑과 자유에의 의지의 표현들이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우크라이나의 유대인 지식인 가정에서 태어났고 러시아의 모스크바 대학교에서 화학공학을 전공한 작가 바실리 그로스만의 러시아 정부의 통제로 순탄치 못했다. 계속되는 검열과 압제에 시달리며 작품을 발표하였고 2차대전 중 유대인 학살로 어머니를 잃기도 했다. 종군기자로서 전장을 누비며 그 경험을 작품으로 남기기도 했다.  파리 올림픽에 나선 여자 높이뛰기 금메달리스트 우크라이나의 '야로슬로바 마후치크' 선수는 전쟁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금메달을 꼭 따야 할 이유가 생겼다고 말했고 우크라이나 선수 모두는 전쟁을 반대하기 위해 뛴다고 말했다. 파리 올림픽 출전을 위해 러시아 공습을 피해 다른 이웃 국가에서 연습을 해왔는데 다음 올림픽에서는 우크라이나에서 훈련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꿈을 말한다. 전쟁은 지금 이 순간도 우크라니아와 러시아 사람들의 삶과 운명을 쥐고 흔든다.

아니다. 전쟁은 전 지구적으로 연결된다. 사회, 경제, 정치적으로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 전쟁으로 이익을 얻는 나라는 과연 어디일까?




3권의 책을 다 읽는 데는 한 달이 넘는 시간이 필요했다. 첨엔 대체 어떤 전개를 보여주려고 이리 등장인물이 많은지, 이름들은 또 왜 왜 왜 스탈린, 빅토르가 아니고 스딸린, 빅또르인건지, 전쟁의 양상과 참전한 러시아 병사들과 지휘관들의 이름과 전황과 장소들을 머릿 속으로 기억하면서 읽어 나갔지만 집중적으로 읽지를 못하니 다시 책을 읽으려 할 때면 기억이 가물거려서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결국 커다란 공책에 주요 인물들의 이름과 간단한 줄거리를 적어 놓았는데 2권 초반까지 3 페이지에 걸쳐 작성을 해놓고 나니 그제야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적으면서 나름의 정리도 되고 저장도 되면서 줄거리 파악이 쉬워진 것이다. 수많은 등장인물들이 있지만 중심을 이루는 인물은 '샤뽀시니꼬프' 집안 사람들과 그 주변 인물들이다. 줄거리를 모두 쓸 수 없는데다 이제 이들과도 이별을 해야하니 마지막으로 공책에 적어 놓은 주요 인물들의 이름을 한 번 불러보자. 순전히 나의 편의를 위해서다. 예브게니야 니꼴라예브나(제냐)와 니꼴라이 그리고리예비치 끄리모프, 베라와 스쩨빤 표도로비치 스삐리도노프, 류드밀라와 빅또르 빠블로비치(시뜨룸), 세료자, 똘랴와 아바르추끄, 그리고 수용소에서 생을 마감한 미하일 시도로비치 모스똡스꼬이와 제냐의 친구인 소피야 오시뽀브나 레빈똔 .... 그리고 수많은 참전 군인들과 지휘관들의 이름을 모두 기억하면 좋겠지만??? 그게 가당키나 할까...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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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4-08-08 19: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 읽으면서 아하, 은하수 님은 벌써 읽으셨구나, 뭐 이런 생각도 했습니다. ㅋㅋㅋ
리뷰도 잘 읽었습니다. 제 독후감은 9월 3일에 올리는 걸로.... ^^;;

은하수 2024-08-08 22:03   좋아요 1 | URL
다 읽으신거죠?
전 집중해서 읽었으면 좋았을걸 하는 아쉬움이 남아요^^ 반납하고 나니 허전하기도 하구요.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나봐요~~
저도 리뷰 기다리겠습니다^^
 
가든 파티
캐서린 맨스필드 지음, 홍한별 옮김 / 강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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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서린 맨스필드의 소설이 '별로'라는 그런 리뷰를 어딘가의 글에서 먼저 보아버린 나...

하필 왜 그런 리뷰를 먼저 읽어버린 거였을까? 그랬다면 편견 따위 가지지 않았을 텐데. 그래서 오랜 시간 동안 가까이 하지 않았던 작가였다. 세상엔 읽을 책이 무궁무진한데 굳이 별로라는데 읽으려 애쓸 게 뭐람 하면서 작가에 대해 어떤 평가가 내려져 있든, 영미 문학에서 어떤 위상을 가지고 있든 관심이 없었다. 평소의 나의 습관대로 작가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는 거다. 





이 단편집의 초,중반 몇 몇 단편을 읽을 때까지도 "단편 소설의 정수"라고? 정말? 그 정도까지는 아닌 거 같은데? 이렇게 의심하면서 내 맘대로 되지도 않을 평가를 내려버리는 우愚를 범하고야 말았다. 결과적으로는 뒤로 가면서 한 편, 한 편이 점점 재미있어졌다. 그리고 마지막 작품을 읽고 나서는 다른 작품을 찾아 읽어보고 싶을 만큼 좋아졌다! 세상에는 내가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뛰어난 작가가 어딘가에 숨어있다 뿅 하고 나타나 나를 뒤흔들고 어지럽게 빙빙 돌리면서 가지고 놀다가 너 어디 맛 좀 봐라 에잇! 하면서 좁아터진 나의 세계관을 주욱 찢어발기고 어때? 하고 놀리기도 하고 옛다! 하면서 작가만의 고유한 무언갈 던져주고 가기도 한다. 그러니까 난 정신을 차려야 하는 거다. 내가 경험해보지도 않았으면서, 잘 모르면서 왜 잘난 척을 해서 이런 낭패스러운 기분을 갖고 마는 것인지 내 스스로도 왜 학습이 안되고 이런 사태를 자꾸 반복하는 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지 뭔가! 하지만 작품이 좋았고 쓰고 싶다는 마음이 불같이 일어난다고 해서 다 된 게 아니다. 단편집의 리뷰를 쓰는 일은 정말 또 별개의 일이라 난 단편집 리뷰 쓰는 것이 세상 제일 난감하더라는...ㅠㅠ  





이 단편집에는 총 13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우연한 계기로 지금쯤은 - 설사 별로라고 알고 있었어도 여기저기서 자꾸 나타나는 '캐서린 맨스필드'라는 이 작가의 작품을 - 읽어봐도 크게 손해날 건 없겠지 싶기도 해서 가벼운 마음으로 캐서린 맨스필드의 《가든파티》를 도서관에서 찾아보았는데 그때 든 생각으로는 이왕 읽을 거라면 이 한 권으로 끝날지도 모르니 수록 작품이 많을수록 좋겠다는 판단이 섰고 그래서 이 책을 대출 받아 온 거였다. 1922년 발표된 《가든파티》는 맨스필드의 최고의 작품집으로 평가받고 있는데, 발표 당시 수록된 작품은 <대령의 딸들>,

<미스 브릴>, <마 파커의 인생>,<신식 결혼생활>, <가든 파티>,<만에서>의 6개 단편이었다. 나머지 단편 7편 중 <레만 식당>은 초기 작품집인 《독일 하숙에서》, <심리>, <영화>, <딜 피클>, <어린 가정교사>는 《환희》에 실렸었고, 남편이 편집자로 있었던 아방 가르드 잡지 『리듬』에 발표했던 <가겟집 여자>, 생전에 발표되지 않았던 <인형의 집>이 있다. <인형의 집>과 마지막 단편인 <만에서At the Bay>는 연작 단편이다. 그래서 짦은 중편 정도의 분량이라 난 더 재미있었다. 





대부분의 단편에서 여성 화자의 감정의 변화에 주목하여 전개가 되고 있고, 주제도 다양해서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부각한다든가 , 가부장제의 속박에서 자유롭지 못한 여성들, 계급의식, 그리고 부르주아의 위선과 허위 의식 등을 짦은 단편 속에 여지없이 드러내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당대에는 여성작가로서 폄하되고  동 시대 남성 작가들에  비해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한 점은 캐서린 맨스필드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여성의 심리와 감정의 섬세한 변화를 잘 표현해낸 단편 <딜 피클>이나 <심리>와 같은 작품을 남성들이 과연 잘 이해할 수 있었을까?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남성 작가들을 비롯해서 일반 남성 독자들에 이르기까지 작가가 표현하고자 했던 여성의 "미묘한" 심리의 변화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평가절하하는 것은 과연 옳은 일이었을까. 또한 가부장제의 속박 속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의 모습을 다룬 <대령의 딸들>과 <만에서> 등의 작품에 나타난 남성, 아버지, 남편의 모습은 권위주의적이고 여성들을 옭아매듯 자신의 손아귀에 쥐고 흔들려고만 하는 "야만성"을 보여준다. 하지만 여기의 여성들은 그냥 참고만 있지 않는다. 그래서 너무 맘에 들어~~! <대령의 딸들>에서는 권위주의의 화신이자 억압적인 아버지였던 대령의 장례를 치르고 난 후 결혼도 하지 못하고 살아가던 두 딸들이 이제는 아버지라는 유령의 그늘에서 벗어나고자 용기를 내었고, 역시 <만에서>의 여성들은 남편의 권위주의적이고 이기적인 행동과 말을 은근히 무시하고 따돌리고 있으며 남편이자 형부, 사위인 남성이 흥분해서 체신 머리 없이 하는 행동에 훨씬 품위 있고 당당하며 차분하게 대처한다. 완전히 대비되는 남성과 여성의 행동에 웃음이 나고 재밌다는 것이 이 작품의 매력~~~^^





단편 집을 구성하는 작품 중의 한 편으로서가 아니라 그저 훌륭한 하나의 작품으로서 기능할 때 모든 단편들이 각각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아름답다.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는 젊은 여성들이어서 내 가슴을 아프게 만들었던 미스 브릴과 미스 모스(단편 <영화>)에게도 희망의 소식이 들려오기를. 또 <마 파커의 인생>에서는 세상에 하나뿐인 예쁘고 소중한 손자를 잃고 마지막 희망마저 놓아버린 마 파커 할머니와 이에 대비되는 마 파커 할머니가 일을 해주는 집 주인 소설가 양반의 무감각한 가슴이 부디 좀 말랑말랑해지기를 얼마나 바랐던가. 인간적인 위로까지는 아녀도 공감은 해 줄 수 있을텐데. 돈 많은 양반이면 뭐하고 소설가인데 돈만 많으면 뭐하나 싶었고 그 계급 의식은 대체 뭐에다 쓰는 건가요.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말도 싫어하지만 최소한 이 소설가 양반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도 좀 실천해줬으면 오죽 좋았을까 싶었다. 정말 무심하기가 이를 데 없어 내가 신이라면 머리통을 한 대 날려버렸을 거다! 

 




표제작인 <가든파티>의 주제를 굳이 논하자면 부르주아 계급의 위선, 허위 의식 등을 고발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마 파커의 인생>에서의 소설가 선생보다 더한 무신경하고 예의없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가든'에서 파티를 열 정도이니 돈도 많고 집도 으리으리 멋진 건 말할 것도 없다. 거기다 날씨까지 도와주니 금상첨화 아닐런지... 오죽하면 첫 문장이 "날씨는 기가 막히게 좋았다. 가든 파티에 적당한 날씨를 미리 주문한다고 하더라도 이보다 더 완벽한 날씨를 구하진 못했을 거다."(p231) 이 문장에 대해서라면 '로쟈'님의 탐구 정신이 빛나는, 《가든파티》의 리뷰 글이 있더라구요!)."라고 했을까! 정원사가 새벽부터 일어나 잔디를 깎고 비질을 해서 정원은 반짝반짝 빛이 나고, 정원의 장미는 하룻밤 사이에 수백 송이가 피어나 아름다움을 뽐낸다. 아침부터 인부들이 차양을 치러 오고 엄마와 딸들은 파티를 위해 치장을 하느라 바쁘다. 

다른 꽃들은 하나도 없고 "큼직한 분홍색 꽃들이 활짝 피어 핏빛 줄기 위에서 무서울 정도로 싱싱하게 빛나는" 칸나 화분이 배달되어 오고 여러 가지 맛난 파티 음식을 준비하는 과정도 즐겁고 행복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런데 여기에 예기치 못한 사건이 발생한다. 바로 길 하나 건너 대문 맞은 편 가난한 오두막집이 모여 있는 동네에서 발생한 죽음. 배달꾼의 말을 빌자면  "거기 스코트라고 짐마차 모는 젊은 사람이 살거든요. 오늘 아침 호크 거리 길모퉁이에서 말이 견인기관차를 피하려고 휙 도는 바람에 머리부터 길바닥으로 떨어졌어요. 그러곤 죽었죠."(p247) 아내하고 아이 다섯이 있다는데... 


이 집에서 유일하게 막내딸 '로라'만이 파티를 취소하라고 말한다. "당연히 파티는 못하는 거죠? 그렇죠? 악단도 오고 사람들이 몰려올 텐데. 소리가 다 들릴 거예요. 이웃이나 다름없잖아요."(p249)  하지만 모든 가족들은 그것이 우연히 일어난 사고라고 말하고 파티는 계속 된다. 정말 "몰인정"한 사람들이다. 거기다 더 가관인 건 파티가 끝나고 남은 음식이 아까워 그것을 바구니에 챙겨 파티복을 갈아입히지도 않고 최소한의 예의도 차리지 않은 채 막내딸인 로라에게 들려 죽은 짐마차꾼의 집으로 조문을 보낸다는 거다. 하... 정말...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예의라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에게만 지키라고 있는 건 아닐 텐데 해도 해도 너무했다. 로라가 파티복을 입은 채 음식이 든 바구니를 들고 사람들이 늘어서 있는 좁은 골목을 지나 짐마차꾼의 집으로 걸어가는 그 때, 로라는 문득 깨닫는다. 

"...코트라도 입고 왔으면. 드레스가 번쩍거리는 것 같아! 벨벳 리본이 늘어진 커다란 모자까지...... 모자라도 다른 것을 쓰고 올걸! 사람들이 나를 보고 있을까? 그렇겠지. 오지 말았어야 했는데. 처음부터 잘못이란 걸 알았다. 지금이라도 돌아갈까?(p256)


깨달음의 순간, 그리고 지금까지 평온하던 삶의 균형이 깨지는 파열의 순간! 이 깨달음이 로라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알 수 없지만 부르주아 계급에 속한 자신의 위치에 대해서 그리고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깊이 성찰하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맨스필드가 로라를 통하여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모습은 그녀가 비록 어린 여성이지만 성숙한 인간으로서의 자아를 충실히 쌓아가는 인물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고자 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러한 여성들의 자각을 보여주는 주인공이 사실은 이 단편집에 여럿 등장한다. 호색한으로 무뢰한으로 폭군으로 권위적으로 무개념적인 남성상들에 대비되면서 근대적인 시각을 가진 여성 인물들이 여럿 등장하는데 이런 여성들을 만나는 재미가 남달랐던 단편집이었다. 강추합니다.





혼자 있을 때 삶을 생각하면 언제나 슬프기 마련이다. 흥분감 같은 것은 사라져버리고, 고요함 속에서 누군가가 나의 이름을 부르고, 처음으로 내 이름을 들은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이다. <만에서> 중에서,
p347

작은 구름이 달을 가로질러 고요하게 흘러갔다. 그 암흑의 순간, 바다는 괴로운 듯 깊은 신음 소리를 냈다. 구름이 흘러가고, 막 음산한 꿈에서 깨어난 듯 희미하게 살랑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온 세상이 고요했다. <만에서>의 마지막 문장, p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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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거기 있었다 - 함정임의 유럽 묘지 기행
함정임 지음 / 현암사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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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이 분다. 살려고 해야 한다!

  거대한 바람이 내 책을 펼쳤다가 덮고

  부서지는 물결은 바위에서 용솟음친다.

    ... ...

  날아가라, 온통 눈부신 책장들아!

  부숴라, 파도야.

  부숴라, 내 환희의 물결로

  돛배들 쪼아대던 이 고요한 지붕을.

    ... ...

  아름다운 하늘, 진정한 하늘이여, 변해가는 나를 보라!

  (중략)

  나는 이 눈부신 공간에 나를 맡기니

  죽은 자들의 집 위로 내 그림자가 지나간다.


            ㅡ 폴 발레리, 「해변의 묘지」



함정임 작가의 《모든 것이 거기 있었다》의 부제가 '함정임의 유럽 묘지 기행'이다. 폴 발레리의 장시長詩 「해변의 묘지」를  읽고 이 시 한편에 홀려- 자그마치 8 년을 기다려 - 남프랑스 지중해 연안의 언덕에 펼쳐진 시인의 묘지를 찾아간다. 결과적으로 소설이 본업인 작가에게 또 하나의 길을 열어준 셈이 되었다. 대학 강의실에서 처음 접한 원서에 찍힌 '해변의 묘지'는 흑백으로 찍혀 있었는데 흑백에다 질이 좋지 않은 종이였음에도 작가에게는 그 바다가 폴 발레리의 시구처럼 언제나 다시 시작하는 바다, 죽음 너머 생명이 잉태되는 바다가 선명한 색깔로 각인되었다. 그렇게 각인된 바다, 남프랑스 지중해 연안의 작은 도시 세트 항과 

생피에르 언덕의 해변 묘지는 무한하게 열린 푸른 하늘과 바다를 향해 열려있었다. "눈부시게 퍼져나가는 햇살에 사로잡혀 바다는 푸르름을 해저 깊숙이 가라앉히고 있었다."(352쪽) 묘지는 약도에도 없었고 숨바꼭질 하듯 헤매는 사람들에게 단지 사이프러스 나무를 찾아가라는 현지 여인의 말을 따라 다시 힘을 내본다. 과연 폴 발레리의 묘는 사이프러스 나무를 배경으로, 그 너머로 푸른 하늘과 바다를 배경으로, 이단 묘석의 위쪽 묘석 테두리에 '폴 발레리'라는 이름을 이고 있었다. 머나먼 동양의 한 여자를 프랑스 남서부 끝 지중해안 언덕까지 이끈 폴 발레리라는 이름 하나... 그 이름을 마주하는 짧은 몇 분의 시간이 영원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고. 그리고 환청인듯 사이프러스 울울히 서 있는 등 뒤에서 한 영혼이 빈약한 어깨를 어루만지듯 말을 걸어오는 것처럼 느껴졌다니...




  "오, 사색 뒤에 오는 보상. 신들의 고요에 던져진 그토록 오랜 시선." 

화답으로 폴 발레리의 시구를 음송하며 작별을 고한 시간, 그 순간들을 가만히 생각해본다. 작가는 어쩌다가 이토록 묘지 기행에 빠져 버렸을까. 도저히 헤어나올 수 없는 신비한 마력에 빠져 버렸으니 말이다. 30 여 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쉬지 않고 일을 하고 글을 쓰고 가정을 꾸리면서 작가들의 묘지를 찾아 다녔다. 폴 발레리의 묘지를 시작으로 파리의 몽파르나스 묘지, 팡테옹, 몽마르트르 묘지, 페르 라세즈 묘지, 그리고 반 고흐를 찾아 암스테르담과 아를,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만나기 위해 찾아 간 빈치 마을과 앙부아즈 성 예배당에도 갔다. 알베르 카뮈의 영면처 루르마랭, 아일랜드의 예이츠와 이니스프리 호수, 셰익스피어의 고향과 이탈리아 베로나의 줄리엣 묘, 러시아 작가들의 묘지와 토마스 만의 베네치아,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 크레타 섬을 돌고 다시 돌고 돌아 프라하와 드레스덴, 음악가들의 고향 빈 중앙 묘지에도 갔다. 사진으로 만나는 작가들의 묘지는 아름답다. 삭막하고 복잡한 납골당에 안치된 우리의 묘지 문화와는 너무 다르다. 묘지이면서 쉼의 공간이고 시민들의 휴식처이자 울창한 숲을 자랑하는 거대한 공간들이기도 하다. 삶과 죽음이 이렇게 맞닿아 있다는 것이, 그리고 죽음이라는 것이 이토록 친근한 공간으로의 이동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죽음이 결코 두려운 일만은 아닌 것 아닐까, 혹은 영원한 휴식에 드는 이 묘지라는 공간이 주는 안정감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희석해주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된다. 




누구든... 파리의 몽파르나스 묘지를 들어서면 제일 먼저 만나는 장 폴 사르트르와 시몬 드 보부아르를 만난다. 그들의 묘지가 정문 초입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란다. 처음엔 사르트르(1905~1980) 혼자였지만 6년 후 보부아르(1908~1986)가  영면에 들면서 합장이 되었다. 계약 결혼 관계였지만 살아 생전 한 공간에 살지 않았던 사람들이고 여행을 가거나 호텔에 방을 얻더라도 나란히 각자의 방을 얻고, 같은 구역의 각자의 아파트에서 생활하고 각자의 연인들을 거느리기도 하면서 51 년 간 독특하고 자유로운 동거를 이어간 사람들인데 죽어서는 이제 하나의 묘석 아래 "꼼짝없이" , '영원히' 묶이게 된 것이다. 사후에 그들의 묘를 합장한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그러한 의문을 가지고 보는 그들의 합장묘여서 묘한 감정이 들었다. 단순하지만 아름답게 장식된 베이지 톤의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비석에 그들의 이름이 새겨졌고, 관람객들이 가져다 놓은 듯한 묘석 위에 장식된 꽃화분이 끊이지 않는, 죽어서도 사랑받는 두 사람... 죽어서도 살아서도 변함없이 영원히 함께 하길... 그 외에도 마르셀 프루스트의 묘가 있는 페르 라셰즈와 일리에콩브레의 프루스트 박물관과 그의 작품에서 발베크로 호명되는 카부르의 그랑 오텔, 프루스트 사후 100주년을 기념하여 개관한 박물관(일명 벨 에포크 박물관), 파리의 프루스트가 태어난 집 등도 기억에 남는다. 프루스트 투어로도 프랑스 여행은 오래오래 기억에 남는 여행이 될 것이다. 사실 함정임 작가가 30 여 년 간 열정적으로 다녀왔던 작가들의 묘지와 생가와 작품과 인생의 이야기들이 너무 방대해서 누구 한 작가를 기억해야지 하는 생각을 하기가 힘들다. 함정임 작가가 직접 찍어서 수록된 사진들을 보는 재미도 결코 적지 않다. 여행을 한다면 여행 안내서로도 부족함이 없다. 한 장, 한 장 넘기며 읽어 나가다보면 500 페이지가 넘는 이 책이 결코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 많은 작가와 작품과 인생과 묘지들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묘지를 콕 찍어 말할 수 있을까??? 당연히 있다! 가서 만나고 싶은 작가의 묘지가 너무 많아서 못 고를 거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파리의 페르 라셰즈에서 몽파르나스, 팡테옹, 그리고 그나마 내가 다녀온 몇 안되는 곳이어서 더 기억에 남았던 토마스 만의 작품의 배경이었던 이탈리아의 베네치아, 반 고흐의 네덜란드와 예이츠의 아일랜드까지, 또 더 멀리 베토벤과 슈베르트, 쇤베르크의 오스트리아와 독일과 체코의 프라하와  또 내가 좋아하는 작품인 『그리스인 조르바 』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크레타 섬에서 만나는, 제대로 된 십자가도 없이 엉성한 나무 십자가와 바람에 바랜듯한 검은 대리석 - 묘지와 러시아의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만나는 안톤 체호프와 니콜라이 고골의 묘지 등등. 참 많이도 있었지만... 




  "누군가의 마음 상태를 알려면 그 사람의 방에 가보라. 누군가의 생애, 그 사람의 기질을 알려면 그 사람의 묘지, 영면처에 가보라. 그 동안 수차례 찾아간 프루스트, 베케트, 카뮈, 사르트르와 시몬 드 보부아르, 뒤라스, 보들레르, 랭보 등의 묘지 앞에서 터득한 내 나름의 진실이다."(410쪽) 이 말에 격하게 동의~~~! 사랑하는 작가의 묘지를 찾아 멀리 러시아까지 날아간 함 작가는 이렇게 글을 시작했다.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하늘 아래 새소리뿐! ...... 내가 서 있는 곳은 러시아의 작은 마을에 있는 톨스토이의 영지領地의 숲길. 6월 28일 아침 9시, 모스크바에서 남쪽으로 180킬로미터 떨어진 툴라라는 도시로 떠났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툴라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톨스토이가 태어나고 묻힌 야스나야 폴랴나 마을로 향했다. ..."(417쪽) 톨스토이의 고향이자 영지가 있는 야스나야 폴랴나 마을이라는 지명은 톨스토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익히 알고 있는 워낙 유명한 마을이지만 막상 영지로 들어가는 길 옆의 자작나무 오솔길과 오솔길 끝 톨스토이의 하얀 집을 보는 순간 함 작가의 저 문장들이 가슴에 콕 박히면서 뭔지 모를 감동이 밀려 오고 있었다. 역시 이 작가는 죽음에 있어서도 내가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에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졌다. 소설가에서 사상가로 나아가는 과정에 무소유를 실천하였고 "슬퍼하지도 생각하지도 말고, 아무것도 세우지 말고 그저 소박하게 묻어달라던 톨스토이, 하늘을 사랑하여 하늘을 잘 보이게만 해달라고 당부했다던 톨스토이" 유언에 따라 정말 그의 묘에는 묘비명도 상석도 하나 없고 그저 하늘과 새소리, 그리고 초록의 자연뿐. 내가 느끼기에도 그랬지만 함 작가도 "지금까지 우여곡절을 겪으며 찾아갔던 세상의 수많은 예술가들의 무덤 중 가장 자연스럽고 숭고했다"고 적고 있다.




수많은 작가들의 묘지를 찾아다니다 보면 묘비에 새겨넣은 아름다운 문장들을 만나기도 한다. 작품들만큼이나 무덤의 형식이나 묘비명들이 개성적이었는데 그 중 함 작가는 가장 좋아하는 묘비명으로 많고 많은 묘비명 중에서 단 두 작가를 꼽았다. 한 사람은 아일랜드의 민족시인인 예이츠이다. 예이츠의 묘지는 더블린의 북서쪽 끝 슬라이고 항 근처의 벤벌빈이라는 기이한 형태의 산 아래 드럼클리프 마을의 세인트 콜롬바즈 패리시 교회 뒤뜰에 있다. 한반도에서 아일랜드를 가기 위해서는 지구를 반 바퀴나 돌아야 하는데 다시 예이츠의 묘지를 찾아가는 길을 설명하는 것도 이리 어렵다. 하지만 예상보다 평범했던 이니스프리 호수와 두고두고 기억할 아름다운 묘비명을 남겼으니 뜻깊은 여행이 아니었을까!  "Cast a cold Eye On Life, on Death. Horseman, pass by!"(삶에도 죽음에도 차가운 눈길을 던져라. 말 탄 자여 지나가거라!)  또 한 명의 작가는 그리스 에게해 크레타 섬에 있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이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문장을 읽는 즉시 『그리스인 조르바 』가 떠오르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진정한 자유인 조르바의 살아 있는 심장을 품은 채 대성곽의 기단 위에 잠들어 있었다. 『최후의 유혹 』으로 그리스 정교회로부터 파문당한 탓에, 그의 묘석에는 석비 대신 가로세로 길주름한 나무 십자가가 엉성하게 세워져 있었다."(462쪽) 그 모습이 마치 '키가 크고 몸이 마른' 조르바가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춤을 추고 있는 형상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의 작품과 그의 생애와 너무도 꼭 맞춘 듯한 묘지이자 묘비명이다.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벗 삼아(근데 어마무시 사진까지 수록되어 있어 이 책 진짜 무겁다 ㅠㅠ) 이 아름다운 작가들의 묘지를 찾아가는 날이 나에게도 오지 않을까... 함 작가처럼 간절히 바란다면 이루어지는 날이 올 것이다. 나도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지에 가고 싶다. 간절히. 가서 내 눈으로 그의 묘비명을 보고 싶다. 읽을 수는 없겠지만... 무슨 내용인지는 내가 다 아니까 아무 문제 없다. 윽... 생각만 해도 전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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