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내린 눈

우리가 보는 것은 피와 살로 고동치는삶의 어느 한 부분이다.- 로자 룩셈부르크

간첩 조작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자백>을 보던 날, 영화를 보는 내내 울던 친구는 극장을 나서며 한숨 쉬듯 말을 뱉었다. "저 억울함을 안고 어떻게 살았을까." 사소한 억울함도 참지 못하는 게 사람인데 저토록 큰 사건에 휘말려 육신을 몰수하는 고문을 겪고 간첩의 멍에를 지고 사는 삶이라니. 감히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다. - P7

이 책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억울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죄 없는 사람을 죄인으로 만드는 불공정한 일은 어째서 발생하는가. 국가라는 추상적 실체가 폭군처럼 들이닥칠때 일상은 어떻게 파괴되는가. 그 폐허 위에서 또 다가오는 하루를 누구와 어떻게 살아가는가, 망가진 일상을 복구하는 힘은
무엇인가. ‘왜 하필 나일까‘라는 물음의 도돌이표를
어떻게 안고 사는가, 그런 이야기를 담아냈다. - P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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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초인종 소리를 듣고 나간 문지기의 아내가 
"신사 한 분이 숙녀분과 함께 오셨습니다. 선생님." 
하고 알렸다. 나는 그즈음 늘 그랬듯이 - 소원이 생각을 낳는 법이므로 바로 초상화를 그려 달라고 부탁할 남녀를 떠올렸다. 실제로 그들은 초상화를 부탁하러 온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원하던 부탁은 아니었다. 첫눈에 두 사람은 어느 모로 보나 초상화를 부탁할듯 보였다. 
신사는 50세 정도였는데, 키가 훌쩍 크고 자세가 아주 꼿꼿한 데다, 약간 백발이 섞인 턱수염을
 기른 모습이 지금 입고 있는 진회색 코트와 썩 잘 어울렸다. 코트나 턱수염을 보면, 직업적 관점에서 내가 이발사나 재단사라는 뜻은 아니다. 유명 인사처럼 보이기도 했다. 흔히 유명 인사가 저토록 인상적일 수 있다면 말이다. 하지만 내가 살면서 알게 된 진실은, 잘생긴 사람치고 유명 인사는 거의 없다는 점이다.  - P7

밀림의 야수

그를 깜짝 놀라게 한 그 이야기가 왜 나왔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아마 그녀와 재회한 뒤, 그 저택을 천천히 거닐다가 무심코 내뱉은 말 때문이었으리라. 그는 한두 시간 전에 다른 집을 방문했다가, 친구들과 함께 그 당시 그녀가 머물던 저택으로 온 참이었다. 그는 언제나처럼 사람들 속에 묻혀 있었다. 그런데 먼저 방문했던 집의 손님이 모두 초대받은 바람에 그는 덩달아 따라왔고, 이 저택에서 점심 식사를 하게 되었다. - P47

진정으로 그녀를 사랑했다면 운명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 인생다운 인생을 살 수 있었다. 그를 위해 살았고 그를 사랑했던 그녀의 인생이야말로 삶다운 삶이었다. 그녀가 어떠한 열정을 품고 살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반면 그는 소름 끼칠 정도로 이기심에 사로잡힌 채 자신의 필요에 따라서만 그녀를 판단했다. (그 사실이 그를 숨 막히게 했다.)  - P112

돌연 그녀의 말이 다시 떠오르면서 온갖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가 늘 기다려 온 야수는 정말로 숨어 있다가 운명의 순간에 튀어나온 것이었다. 바로 그 쌀쌀한 4월, 해질녘에. 그때 그녀는 병을 앓았고 창백하게 여위었지만 매우 아름다웠다. 그때라도 그가 알았더라면 그녀의 아름다움을 회복해 주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아픈 몸을 의자에서 일으켜세운 뒤 그의 앞에 서서 그가 상상하고 추측할 수 있게 해 주었다. - P112

 하지만 그 상황에서조차 그는 전혀 헤아리지 못했고, 결국 야수는 튀어나오고 말았다. 그녀가 절망하며 돌아선 그 순간 야수는 뛰쳐나왔고, 그가 그녀의 집을 나서려 할 때 운명의 징표 역시 떨어질 장소에 떨어져 버렸다. 그는 자신의 두려움을 정당화해 왔다. 그것이 바로 그의 운명이었다. 그는 운명이 정한 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확실하게 실패했다. 그가 몰랐으면 좋겠다는 그녀의 말이 떠오르자, 이제야 신음이 새어나왔다. 이런 끔찍한 깨달음, 이것이야말로 앎이었다.  - P112

그 사실을 알고 나니 눈물마저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그 앎을 붙들려고 했다. 아니, 그것을 눈앞에 똑바로 세워 놓고 자기 안으로 받아들이고자 했다. 이미 너무 때늦고 처참했지만, 적어도 스스로가 살아 있음을 생생하게 느꼈다. 그러나 그 고통 때문에 구역질이
났다. 진실에 의해 적나라하게 드러난 자신의 모습에서 예정대로 실현된 운명의 끔찍한 형상을
본 느낌이었다. - P113

그는 자신의 삶이라는 밀림을 보았고, 거기에 숨어 있던 야수도 보았다. 그리고 그 끔찍하고 거대한 야수가 그를 덮치려고 공중으로 뛰어오르는 모습을 보았다. 눈앞이 깜깜해졌다. 그 야수가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본능적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환상 속의 야수를 피하기 위해 그는 본능적으로 무덤 위에 몸을 던졌다. - P113

밝은 모퉁이 집

"사람들은 내 ‘생각‘이 뭔지 일일이 묻죠." 스펜서 브라이든이 스테이버튼 양에게 말했다. "성의껏 대답하는 편이에요. 때론 되묻기도 하고 회피하기도 하고 얼렁뚱땅 미루기도 하면서 말입니다." 그는 계속 말했다. "사실 묻는 사람에게 내 대답은 별 의미가 없어요. 묻는다고 속내를 다 털어놓을 수는 없잖아요. 그러나 굳이 내 ‘의견‘을 밝히자면, 뭐 나 자신에 대한생각만으로도 벅찹니다." - P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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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다지도 잔인한건지... 아.. 버키..!
대체 이 젊은이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이 글의 화자는 버키 캔터가 감독으로 있었던 챈슬러 놀이터에서 놀던 아널드 메스니코프이다. 그 자신도 버키 선생님과 같은 해에 폴리오를 앓았고, 다행스럽게도 두다리에 보조기를 대고 목발과 지팡이를 이용해 움직일 수 있게 되었는데, 버키와는 다른 인생을 살고 있다. ‘3. 재회‘에서 화자와 버키 선생님이 1971년 어느 봄날 정오에 우연히 재회하게 되었고, 그 감격스런 만남 이후 일주일에 한번씩 근처 식당에서 함께 점심을 먹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회한과 후회, 죄책감으로 가득찬 그의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이다.

마지막 장에서 버키 선생님이 놀이터 운동장에서 아이들의 신망과 사랑과 경탄을 받던 시절, 아이들에게 ‘창 던지기‘ 시범을 보여주는 회상 장면이 나오는데 압권이다. 그 아름다운 문장에서 보여주는 그 날의 분위기, 버키 선생님을 향한 아이들의 무한한 신뢰와 사랑, 경탄의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뿐만 아니라 아이들을 보호하고자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는 죄책감에서 평생 헤어나오지 못하고 아직 괴로움에 찬 나날을 보내는 버키 선생님의 전성기의 찬란한 한때가 그림처럼 그려져서 가슴이 뭉클했다.








눈을 감은 채 차 뒷좌석에 누워 이제는 숨을 쉬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도널드를 보자 버키는 아이가 첫날보다 두번째 날 밤에 호수에서 훨씬 자신 있게, 훨씬 균형이 잡힌 동작으로 부드럽게 다이빙을 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아이가 아주 튼튼했다는 것, 도널드가 할 줄 아는 다이빙을 다 한 다음 제비식 다이빙을 삼십 분 더 가르쳐주었던 것을 기억했다. 또 도널드가 각각의 다이빙을 반복하면 할수록 점점 더 잘하던 것을 기억했다. - P225

버키가 창을 두드리자 도널드가 눈을 떴다. "너는 괜찮을 거야." 버키가 아이한테 말했고, 블롬백 씨는 차를 몰고 떠났다. 버키가 차를 따라 달려가며 도널드에게 소리쳤다. "며칠만 있으면 다시 같이 다이빙을 할 수 있을 거야." 그러나 아이의 상태가 악화되었다는 것은 한눈에 알 수 있었고 눈에 담긴 표정은 섬뜩했다- 열에 들뜬 두 눈은 버키의 얼굴을 훑으며 누구도 줄 수 없는 만병통치약을 미친듯이 갈구하고 있었다. - P225

다행히도 캠프 아이들은 아직 아침식사중이었으며, 버키는 캐빈 층계를 달려올라가 도널드의 몸을 싸느라 담요가 사라진 침대를 최대한 단정하게 정돈했다. 그런 다음 포치로 나가 이제 곧 그의 밑에서 일하는 실무진이 모여들 호수를 내려다보며 스스로에게 피할 수 없는 질문을 던졌다. 내가 아니면 누가 이곳에 폴리오를 가져왔겠는가? - P225

폴리오 때문에 신체적으로 불구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끈질긴 수치심 때문에 사기도 푹 떨어져 있던 그 긴 세월 동안 가슴에 묻어두었던 그 모든 것을 이야기할 때, 그에게서는 전반적으로 뿌리 깊은 좌절의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는 미국에서 폴리오 피해자의 가장 위대한 모범인 FDR와는 정반대로
병에 걸리면서 승리가 아니라 패배에 이르렀다. 
마비와 그뒤에 온 모든 것으로인해 그는 사나이라는 자신감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고 삶의 그쪽 면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대체로 버키는 자신이 성 역할에서 무능하다고 생각했는데, 이것은 남자라면 용감하게 가정과 나라를 지켜야 하는 국가적 고난과 투쟁의 시대에 성년에 이른 소년에게는 부끄러운 자기 평가였다. - P246

할머니는 이제 세상을 떠난 지 오래였지만, 그는 어쩌다가1967년 뉴어크 폭동의 중심지에 있게 되기까지 폭동 기간에 거리에서 집 한 채가 불에 타고 근처 지붕에서 총알이 날아왔다ㅡ에이번 근처 바클레이의 엘리베이터도 없는 그들의 작은공동주택 집에서 살았다. 외부의 계단을 올라가야 했지만 ㅡ한때는 한 번에 세 단씩 즐겁게 뛰어올라가곤 하던 계단이었다ㅡ할머니의 사랑이 가없이 펼쳐졌던 곳, 한 번도 차가워지지 않았던 보살핌의 목소리를 가장 잘 기억할 수 있는 곳에 계속 머물기위해 어떤 계절이든, 얼음이 깔려 있든 미끄럽든 그 계단을 힘겹게 올라갔다. - P247

그는 비극을 죄로 바꾸어야만 했다. 벌어진 일에서 필연성을 찾아야만 했다.
유행병이 생겼고 그에게는 그것을 설명할 이유가 필요하다. 그는 왜냐고 물어야만 한다. 왜? 왜? 그것이 의미 없고, 우연이고,터무니없고, 비극적이라는 말로는 만족하지 못한다. 그것이 급격히 증식하는 바이러스라는 말로는 만족하지 못한다. 대신 그는, 이 순교자는, 왜에 미친 이 사람은 필사적으로 더 깊은 원인을 찾으며, 그 왜를 하느님이나 그 자신 안에서 발견하거나, 아니면 신비하게도, 불가사의하게도, 그 둘이 무시무시하게 합쳐져 생겨난 단일한 파괴자에게서 찾는다. 그가 그의 삶을 시들게 해버린 고통들을 쌓아가는 것에 내가 아무리 공감한다 해도, 그것은 어리석은 오만, 의지나 욕망의 오만이 아니라 환상적이고 유치하고 종교적인 해석의 오만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전에도 들어보았고 이제 버키 캔터처럼 대단히
품위 있는 사람으로부터도 들을 만큼 들었다.
- P266

"나는 애들을 돕고 싶었고 애들이 강해지게 하고 싶었어." 그가 마침내 말했다. "하지만 그러기는커녕 돌이킬 수 없는 해만 입히고 말았지." 그 생각 때문에 그는, 그 자신은 해를 입을 만한 짓을 한 적이 없는 사람임에도, 수십 년 동안 말없이 고통을 겪어왔다. 그는 이 땅에서 수치스럽게 
칠천 년을 살아온 사람처럼 그 순간을 돌아보았다.  - P272

그러나 세상에서 망가진 착한 소년만큼 구원하기 힘든 사람은 없는 법이다. 그는 너무 오랫동안 혼자 자신만의 상황 감각을 키워왔기 때문에 또 간절하게 갖고 싶어했던 모든 것을 갖지 못하고 살아왔기 때문에 내 힘으로는 그가 자기 삶의 끔찍한 사건을 해석하는 방식을 몰아낼 수도 없고 그와 그 사건의 관계를 바꾸어 놓을 수도 없었다. - P274

.... 챈슬러 놀이터와 인디언 힐 양쪽에 초래된 대재난은 그의눈에 자연의 악의에 찬 부조리가 아니라 그 자신이 저지른 큰 범죄로 보였고, 이런 생각 때문에 그는 자신이 한때 소유했던 모든것을 내놓고 인생을 망쳤다. 버키 같은 사람의 죄책감은 남이 보기에는 터무니없지만, 사실 불가피한 것이다. 그런 사람은 구제할 수 없다. 그가 하는 어떤 일도 그가 안에 품은 이상에는 이를수 없다. 그는 자신의 책임이 어디에서 끝나는지 절대 모른다.
그는 절대 자신의 한계를 믿지 않는데,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체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엄격한 선을 천성적으로 짊어지고있어, 자신에게 어떤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 반드시 죄책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 불구인 남편을 얻는 것을 막는 데서 가장 큰 승리감을 맛보며, 그녀를 포기함으로써 자신의 가장 깊은 욕망을 부인
하는 것은 영웅적 행동이 된다. - P274

평소와 마찬가지로 그는 모든 조심성을 발휘하여 안전을 위해어느 시점에는 누구도 운동장으로 뛰쳐나오면 안 된다고 말했다. 우리는 선 자리에서 모든 것을 지켜봐야 했다. 그는 이 점을 두 번이나 강조했다. 그는 그렇게 진지할 수가 없었으며, 그 진지함은 이 일에 대한 그의 헌신의 표현이었다. - P279

이윽고 그는 창을 던졌다. 그가 공중에서 창을 놓을 때 우리는그의 모든 근육이 불거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는 힘을 쓰느라 목이 졸리는 듯한 신음을 토했다(그뒤로 며칠 동안 우리 모두그 소리를 흉내내며 돌아다녔다). 그것은 그의 본질을 표현하는 소리였다-최고를 향해 노력하는 적나라한 함성. 창이 그의 손에서 날아오르는 순간 그는 균형을 잡으려고, 자신이 스파이크로 흙에 새겨놓은 파울라인을 넘지 않으려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창이 운동장 위에서 높이 큰 호의 궤적을 그리는것을 계속 지켜보았다. 우리 누구도 바로 우리 눈앞에서 운동선수의 움직임이 그렇게 아름답게 펼쳐지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 P279

창은 50야드 선을 넘어 계속, 계속 날아가 상대편의 30야드 라인을 한참 지나갔으며, 이윽고 아래로 내려가다 땅에 부딪히자 뾰족한 금속 끝이 날아오던 힘에 밀려 예각으로 땅을 파고들며 자루가 부르르 떨렸다. - P279

우리는 큰 소리로 환호하며 앞으로 뛰쳐나갔다. 창이 그리는 모든 궤도는 캔터 선생님의 유연한 근육에서 나왔다. 그의 몸 - 발, 다리, 엉덩이, 몸통, 팔, 어깨, 심지어 굵은 그루터기 같은 짧고 단단한 목까지-이 조화롭게 움직여 창을 날리는 동력이 된것이다. 우리 놀이터 감독이 양식을 찾아다니던 평원에서 잡아먹기 위해 사냥을 하고 손아귀의 힘으로 야생을 길들이는 원시인이 된 것 같았다. 우리는 어떤 사람에게 그렇게 경외심을 느낀적이 없었다. 그를 통해 우리 소년들은 동네의 작은 이야기를 떠나 우리 옛 남성의 역사적 서사시에 진입했다. - P280

그는 그날 오후 여러 번 창을 던졌는데, 모든 
던지기가 매끄럽고 강력했으며, 그때마다 외침과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크게 울려퍼졌고, 매번 던질 때마다 창은 그전보다 몇 야드 더 먼 곳에 떨어져 우리를 기쁘게 했다. 창을 높이 들고 달리다 창을 든 팔을 몸 뒤쪽으로 쭉 당기고, 이어 그 팔을 앞으로 쑥 내밀며 어깨위 높은 곳에서 창을 놓을 때ㅡ 뭔가 폭발하는 것처럼 창을 놓을때 ㅡ그는 우리에게 무적으로 보였다. - P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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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키가 자리에 누워 자신은 배제된 전쟁에 나가 프랑스에서싸우고 있는 데이브와 제이크를 생각하며 잠을 이루지 못하는동안 비가 캐빈 지붕을 두드려대기 시작했다. 그는 어젯밤 바로 이 침대에서 잔 뒤 징집병으로 전쟁에 나간 어브 슐랭어를 생각했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지만 자신을 제외한 모두가 전쟁에 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싸움에 끼지 않아 목숨을 보전하게 된것, 유혈을 피한 것-다른 사람 같으면 혜택이라고 생각할지도모르는 것들을 그는 고통으로 여겼다. 할아버지는 그를 두려움을 모르는 전사로 키웠고, 언제나 튼튼한 몸으로 자신이 옳은 것을 방어하는 책임감이 아주 강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도록 훈련시켰다. 하지만 그는 지금 세기의 투쟁, 선과 악 사이의 세계적 갈등과 마주하여 아주 작은 역할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 P176

그러나 그에게는 싸워야 할 전쟁, 놀이터라는 전장에서 벌어지는 전쟁이 주어졌고, 그는 그 전쟁에서 부대를 버리고 마샤에게로, 인디언 힐의 안전으로 탈영했다. 유럽이나 태평양에서 싸우지 못한다 해도 뉴어크에 남아 위험에 처한 아이들과 더불어그들의 폴리오 공포와 싸울 수는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위험이 없는 이 피난처에 와 있었다. 뉴어크를 떠나 좁은 비포장도로의 머나먼 끝에 있어 세상으로부터 감춰져 있고, 숲으로 위장되어 공중에서도 보이지 않는, 외딴 산꼭대기의 여름 캠프로 왔다ㅡ그래서 여기서 무엇을 하는가? 아이들과 논다. 그것도 행복하게! 하지만 행복을 느낄수록 수치심도 강해졌다. - P176

 이곳에서 그는 하루가 끝나면 높은 다이빙대에 올라가 평화롭고 고요하게 다이빙을 할 수 있었다. 이곳은 그가 집 근처 동네에서 날뛰는 살인마를 피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피난처였다. 이곳에는 데이브와 제이크가 가지지 못한, 챈슬러 놀이터의  아이들이 가지지 못한, 뉴어크의 모든 사람이
가지지 못한 모든 것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에게는 그를 살아가게 해줄 양심이 없었다. - P177

하지만 섬에서 보낸 저녁이 행복하지 않게 끝난 터이니 마샤는 그가 뉴어크로 돌아가는 것을 공격으로, 어떤 식으로든 그녀에게 ‘징벌‘을 내리는 것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을까? 그가 내일 짐을 싸서 떠난다면 그것은 그들의 계획에 어떤 영향을 줄까?  - P178

 나는 여기 있어, 그는 생각했다. 나는 행복해-그는 너무 행복한 나머지 그의 발에 푹신푹신하게 밟히는 흠뻑 젖은 풀이 짓이겨지며 내는 절벅절벅 소리에도 기운이 솟아올랐다. 다 여기 있어! 평화! 사랑! 건강! 아름다움! 아이들! 일! 여기 그대로 남는 것 외에 달리 어쩐단 말인가? - P181

"할머니, 유진이에요. 무슨 일이에요? 괜찮아요?"
"나는 괜찮아. 몇 가지 소식이 있어. 그래서 
캠프로 전화를 한거야. 놀라게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네가 바로 알고 싶어할 것같아서 좋은 소식은 아니야, 유진. 그렇지 않으면 장거리전화를 하지도 않았겠지. 비극이 또 생겼어. 개런직 부인이 몇 분 전에 엘리자베스에서 전화를 했더구나. 너하고 얘기를 하려고."
"제이크로군요." 버키가 말했다.
"그래." 그녀가 말했다. "제이크가 죽었어."
"어떻게요? 어떻게?"
"프랑스에서 전투중에." - P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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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오르베르쉬르우아즈에서 세트까지
ㅡ정오의 태양 아래 깃드는 고독 中.
‘휘몰아치는 외로움과 광휘의 여정ㅡ반 고흐를 따라
암스테르담에서 아를,파리,오베르쉬르우아즈까지‘

긴 겨울 여행의 끝을 암스테르담으로 결정한 것은
반 고흐를 비롯해 몇몇 그곳 출신 화가들의 족적을
 밟아보기 위해서였다. 20대의 끝을 향해가던 어느 여름밤 나는 파리에서 반고흐 Vincent Willem van Gogh,1853~1890의 <해바라기>(1889)를 보기 위해 야간열차를 탔었다. 파리-암스테르담 간 열차의 밝아오는 여명 속에서 나는 무엇이 나를 이토록 밤이 다하도록 열렬하게 달려가도록 만드는 것인지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었다. 달려가고자 결심하는 순간마다 ‘바로 그것!‘이었던, 그러나 정작 달려가면서, 또 달려가 마주서서는 ‘진정 그것!‘인가를 회의하던 청춘 시절의 일이었다.  - P264

그날 <해바라기>는 나에게 무엇이었던가. 단지 나는 반 고흐의 <해바라기>를 보았다는 것일 뿐, 그것 말고는 어떤 것도 의미가 없었다. 단지 그것을 위해서 거금을 들여서 야간열차를 타고 하루 이틀을 바친단 말인가. 때로 떠났던 곳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타인들에게서 간혹 거북하게 느꼈던 지적인 허영이나 무모함이 오히려 나 자신에게서 더 크게 발휘된 결과는 아니었는지 씁쓸하게 반추하곤 했다. - P264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 한때의 지적인 허영과무모함 또한 내 지난 삶의 소중한 자산이어서, 치열하고도 숭고한 순간으로 되살아나는 것이었다. 반 고흐는 <해바라기>를 지속적으로 그렸고, 암스테르담 이후 나는 파리, 런던, 뉴욕, 뮌헨 등 발길 닿는 데마다 그의 <해바라기>를 찾았다. 무수히 떠나기를 꿈꾸면서 겪었던 마음의 황홀한 떨림,
<해바라기>를 향해 달려가던 그 뜨거웠던 여름 이후, 나는 시간만 나면, 아니 어떻게 해서라도  시간을 내어 전 세계를 떠도는 이방인이 되었다. - P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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