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력서를 나는 아직도 쓰지 못했다.
나의 과거에 대해 거짓 없이 있는 그대로 쓴다는 것은 좀 껄끄러운 일이다. 크라우스는날이 갈수록 점점 더 못마땅한 시선으로 나를 본다. 그것은 내가 원하던 바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의 성난 모습을 보는 것이 즐겁다. 내가 아끼는 사람들에게 나의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것보다 더 기분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그건 옳지 못한 일이기는 하겠지만 대담한 일이다. 그래서 내게 어울린다. 

나는 다소 병적인 것 같기도 하다. 예컨대 세상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을 화나게 하고, 나에 대한 좋지 않은 견해들을 잔뜩 갖게했다는 것을 끔찍하게 의식하며 죽음을 맞는 일이 이루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게여겨진다. 이것은 어느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반항 속에서 아름다움의 전율을느낄 수 있는 자라면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겁 없이 저지르는 행동, 어리석은 짓거리 때문에 비참하게 죽는 것. 

이것이 추구할 가치가 있는 것일까? 아니다, 분명코 아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결국 천박하기 그지없는 어리석은 짓거리에 불과하지 않은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트리에스테의 언덕길

21시 50분, 밀라노의 리나테 공항 출발. 현지 사정을 잘 모르는 트리에스테로 혼자 떠나는 여행치고는 비상식적일 만큼 늦은 시간의 비행 편이었다. 하지만 그 도시에서의 하루를 온전히 확보하기 위해서는 그 방법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시간에도 공항 로비는 이탈리아를 비롯하여 유럽 각지로 떠나는 여행객으로 북적여서 눈 깜짝할 사이에 나는 그들의 열기에 휩쓸려 마음이 들떴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의 일이었다. 체크인을 마치고, 공항까지와서 전송해준 친구들과 헤어져 탑승 대기실로 가보니 트리에스테행 승객은 그저 몇 사람밖에 없었다. - P7

문화적인 면에서도 트리에스테는 특이한 도시라고 할수 있다. 독일어 문화권과의 정신적인 연결을 완전히 단절하지 못한 채, 트리에스테 사람은 존경과 동경과 증오가 뒤얽힌 감정으로, 이미 과거의 것이 된 빈의 문화와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다. 자신들에게는 북쪽 나라들과의 연계가 정신적 사활의 문제인데도 언어적·인종적으로는 끊임없이 이탈리아를 동경하는 이중성이 트리에스테 사람의 정체성을 비할 바 없이 복잡하게 만든다. 처음에는 독일어로 다음에는 이탈리아어로 교육을 받기 때문에 하인리히 하이네의 서정시와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의 형식사이에서 동요하고, 그 복잡함은 프로이트에게 경도된 사바의 시에도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 P19

증권거래소에서 움베르토 사바 서점이 있는 산 니콜로거리까지는 백 미터도 안 될 터였다. 하지만 곧장 목적지로 직행하는 것이 아쉬웠다. 언젠가 자기 것이 되리라는것을 알고 있는 보물에 일부러 서둘러 뛰어갈 필요는 없다. 그런 기분도 있었으나 한편으로는 오랫동안 몹시 그리워해 온 대상을 실제로 손에 넣는 게 어쩐지 두려웠다.
서로 맞서는 마음의 골짜기에 추락한 채 나는 산 니콜로거리와 교차하는 몇몇 좁은 길 여기저기를 향해 걸었다.
시대에 뒤떨어진, 색도 모양도 기묘한 마네킹이 세워져있거나 그저 상품 상자만 쌓여 있을 뿐인 쇼윈도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며. - P21

움베르토 사바 서점은 좁은 길이 끝나는 부근 왼쪽에있었다. 어찌 된 영문인 걸까. 예전에 남편이 이야기해주었을 때부터 내내 나는 이 가게가 경사 급한 언덕 위, 길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모퉁이에 있는 것으로 마음속에 담고 있었다. 일에 지쳐 가게 앞으로 나온 사바가 허리에댄 두 손으로 등을 지탱하듯 서서 바다를 바라본다. 입에는 파이프 담배를 물고 파란 눈에는 하늘의 파랑이 비치고 있다. - P23

하지만 현실의 서점은 좁고 낡아 보이는 부티크 거리의 막다른 길에 있었고, ‘두 세계의 서점‘이라는 원래 이름은 약간 속된 느낌의 ‘움베르토 사바 서점‘으로 바뀌어 있었다. 용기를 그러모아 나는 문손잡이를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 P2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커51. 몽블랑 149가 명작인 이유

만년필 역시 마찬가지다. 고장이 덜 나고 수리가 편한 게 명작이다. 튼튼하기로는 파커51이 1등이다. 파커51은 내장부품의 균형이 좋다. 사람으로 치면 오장육부가 튼튼해서 장수하는 셈이다. - P222

파커51이 처음부터 내부가 균형이 잡혔던 것은 아니었다. 초기에 장착된 잉크 저장 장치는 구입한 지 몇 년이 지나면 고장이 나곤 했다. ‘버큐메틱vacumatic‘이라 불린 이 장치는 복잡했고,
수리도 쉽지 않았다. 당시 파커의 CEO는 케네스 파커였다. 그는 지금으로 치면 만년필계의 스티브 잡스 같은 인물이었다.  - P222

그는 이 복잡하기 그지없는 버큐메틱을 하루라도 빨리 치우고 싶었나 보다. 기능을 유지한 채 복잡한 물건을 단순하게 만드는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파커는 몇 년간 치열하게 연구했고, 결국 1940년대 말에 30년을 사용해도 문제없다는 에어로매트릭 Aerometric 잉크 충전 장치를 내놓았다.
- P224

새로운 장치는 별다른 설명이 없어도 쉽게 잉크를 넣을 수 있을 만큼 단순하게 제작됐고 고장이 나지 않았다. 로마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은 것처럼 파커51이라는 명작 역시 계속된실패와 부단한 노력이 더해진 끝에 완성된 작품이다. - P224

파커51에 필적하는 몽블랑149도 이와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 이야기는 엉뚱하게도 만년필 회사 중 하나였던 펠리칸에서시작한다. 펠리칸은 새로운 잉크 저장 장치인 ‘피스톤 필러‘의 가능성 하나만을 믿고 과감히 만년필 세계에 뛰어든 회사로서,
1929년에 처음으로 만년필을 시장에 내놓은 회사다. - P224

이때만 해도 몽블랑은 펠리칸의 성공을 점치지 못했던 것 같다. 당시 펠리칸이 만년필을 만들 수 있도록 펜촉을 공급한 회사가 몽블랑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몽블랑은 1924년에 이미펠리칸의 ‘피스톤 필러‘와 유사한 잉크 저장 장치에 관한 특허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사업성이 있다고 판단했다면 펠리칸보다 5년은 앞서 피스톤필러가 장착된 만년필을 양산했을 것이다. - P22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5
이누마 3단이 다섯 명을 이기면서 첫 시합은 끝났다.
다섯 번째 시합이 끝나자 백군의 승리를 선언
하고 이누마에게는 개인 우승의 은배가 수여됐다. 이것을 받으려 앞으로 나간 그의 얼굴에서는 이미 땀이 닦여 나갔지만 홍조를 띤 뺨에는 승리자의 상쾌한 겸허의 냄새가 풍기는 듯해, 혼다는 이렇게 젊은이다운 젊은이를 오랫동안 가까이서 본 적이 없었다. - P47

속옷 한 장 차림으로 폭포를 맞고 있는 세 젊은이가 모여있고, 그 어깨와 머리 위로 물이 부딪혀 사방으로 튀었다. 젊고 탄력 있는 피부를 때리는 물의 채찍 소리가 폭포 소리에 섞여 들고, 가까이 가면 붉게 달아오른 어깨 피부가 물보라 아래로 매끄럽게 비친다.
혼다의 얼굴을 보자 한 사람이 친구를 쿡쿡 찌르고는 폭포에서 떨어져 공손하게 머리를 숙여 인사했다. 폭포를 양보하려고 한 것이다. - P54

혼다는 그 무리에서 이누마 선수의 얼굴을 바로 알아보았다. 사양하지 않고 폭포로 향했다. 그 순간 곤봉으로 때리는 듯한 물의 힘을 어깨부터 가슴까지 느끼고는 곧장 물러나 버렸다. - P54

이누마는 쾌활하게 웃으며 돌아왔다. 폭포 맞는 법을 알려주려는 듯, 혼다를 옆에 두고 양손을 높이 올려 폭포 아래로 뛰어들더니, 일시적으로 흐트러진 물이 무거운 꽃바구니인 것처럼 손가락을 활짝 펴서 받들며 혼다를 보고 웃었다. - P54

그대로 따라 하며 폭포에 다가간 혼다는 문득 소년의 왼쪽옆구리를 보았다. 그리고 왼쪽 유두보다 바깥쪽, 보통 때는 팔 위쪽에 가려지는 부분에 작은 점 세 개가 모여 있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 - P55

혼다는 전율하여 물속에서 웃고 있는 소년의 늠름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물 때문에 찡그린 눈썹 아래 연신 깜박이는 눈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혼다는 기요아키의 작별인사를 떠올렸던 것이다.
"또 만날 거야. 분명히 만나게 돼. 폭포 밑에서 " - P5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런데 이 힘들고 어려운 필사가 취미가 되면 마술에 빠진 것처럼 재미있어진다. 이런 마술을 부리는 건 만년필이다. 부장님 취미에 끌려 나가 산에 오르는 게 아니라 벼르고 별러 산 새 등산화를 신고 등산을 할 때처럼 말이다. 순백의 종이에 파란 잉크가 뾰족한 펜 끝으로 샘솟듯 흘러나와 힘들이지 않고 방향만 바꾸어 주면, 종이에 스며들어 사각사각 써지는 글씨가 한 줄, 두 줄 차곡차곡 쌓여 한 페이지가 되면, 한 폭의 그림 같다. - P156

"허허허 그걸 누가 모르냐고. 그 비싼 만년필이 없단 말이지."

이런 말씀을 하신다면 그건 옛말이라고 전해 드리고 싶다. 시내의 큰 문구점에 가면 커피 한 잔 값에 잘 써지는 만년필을 구할 수 있고, ‘치맥‘을 한 번만 참으면 평생 함께할 수 있는 만년필도 살 수 있다. 잉크는 집구석 어딘가를 잘 찾아보면 한두 병쯤 있을 것이고, 없다고 해도 잉크가 그리 비싼 물건이 아니니 금세 구매할 수 있다. 노트는 180도로 잘 펴지고 뒷면 비침이 없는 것을 고르면 된다. 사실 필사의 즐거움을 위해 굳이 비싼 만년필을 구할 필요는 없다. 어떤 만년필이든 1883년에 만들어진 워터맨의 방식을 따르고 있고, 쓰면 쓸수록 점점 좋아지기 때문이다. 결국은 오래 써서 자기 손에 길이 난 만년필이 가장 좋다는 이야기다. - P158

나는 주로 파커45를 사용했는데, 파커45는 가볍고 펜 끝은딱딱한 편이었다. 너무 저렴한 만년필 중에 뚜껑이 깨지거나 밀폐도가 떨어지는 것, 클럽이 끊어지거나 탄력이 떨어지는 제품들이 있는데, 요즘 문구점에서 이런 물건을 취급하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 고를 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단지 필사를
할 때누 가늘게 써지는 게 좋다는 말을 해 주고 싶다. - P159

만년필 펜촉 굵기는 EF, F, M, B, BB 등으로 
구분하는데 필사를 한다면 가장 가는 EF 펜촉을 사면 된다. 펜촉의 굵기를 구분하는 알파벳은 그리 어려운 의미가 아니다. F는 ‘fine‘으로 가늘다는 의미다. M은 ‘medium‘으로 중간, B는 ‘broad‘로 넓다는 의미다. EF는 ‘extra fine‘으로 ‘아주 가늘다‘라는 말이다. BB는 넓은 것이 두 개이니 ‘매우 넓다‘는 뜻이다. 그런데 ‘fine‘은매우 적절하게 선택된 단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에게는 ‘좋다‘는 의미가 더 익숙할 텐데, 필기구는 종이라는 한정된 공간안에 많은 글을 정확하게 써야 하기 때문에 가늘고 뾰족한 것이 좋은 대접을 받았다. 그런 면에서 ‘가늘고, 좋다‘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는 ‘fine‘은 필기구로서 만년필의 본질을 보여주는 절묘한 단어가 아닐까 싶다. - P15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