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울 때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 슈테판 츠바이크의 마지막 수업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배명자 옮김 / 다산초당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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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어두운 시절에 츠바이크의 이 문장들이라니... 자유와 평화에 대한 갈망과 작가로서 의무감, 그럼에도 ˝독일어야말로 세계를 파괴하고 인간 존엄을 시궁창에 던져버리는 범죄적 망상에 맞서 싸우는 데 쓸 수 있는˝ 유일한 무기임을 역설하는데 어찌 수긍하지 않으리. 역시 츠바이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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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 위의 봄날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26
오 헨리 지음, 송은주 옮김 / 휴머니스트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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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 마음이 풀어지지 않을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체질상 음식을 많이 먹지는 못하지만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것도 좋아하고 관심도 많아서 여기저기 채널을 찾아 다니면서 이것저것 해보기도 하고 색다른 음식을 만들어서 자주 먹어본다. 색다르면서 맛있어 보이는 음식들도 식구들이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 한 두 번 해보다 그만두는 경우도 다반사이지만 그럼에도 평소 우리 집에서 해 먹던 스타일대로가 아닌 새로운 방법을 살짝 가미해서 변형한 음식들의 반응이 좋을 때는 더없이 기분이 좋고 뿌듯해서 그 레시피대로 정착하게 되는 경우도 많다. 그러니 책으로 읽게 되는 음식이야기들이야 말할 것도 없이 넘넘 궁금하고 그 맛이 어떨지 상상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솔직히 우리나라 음식이나 먹어본 음식이 아닌 경우에는 그 맛을 상상할래야 상상이 되지 않고, 그 음식이 이야기의 전개상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을 때는 특히 그 맛이 더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아마도 이런 궁금증은 외국소설을 읽어나가다 보면 누구나 겪는 현상일 것이다. 

음식 이야기를 하다 보니 또 하나 더 얘기하고 싶은 게 있다. 외국 음식의 메뉴판을 보면 정말 친절하게도 그 음식에 들어간 재료가 무엇인지 구구절절 친절하게 나열이 되어 있는 경우가 많고 소설 속에서도 뭐가 들어가고 그 재료는 어디에서 온 것이고 어떻게 조리가 되고 어떤 방식으로 숙성이 되고 등등 굳이 이런 거까지 다 써놔야 하나 싶은 것들까지 자세히 설명이 되어 있는 부분들이 있다. 어이쿠야! 내가 그걸 읽는다고 해서 맛을 상상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아는 재료라면야 음... 그럼 이런 맛이겠군 싶다가도 결정적으로 모르는 양념이나 향신료가 나왔다간 다시 그 맛은 미궁으로 빠지기 일쑤이고 거기에 조리법마저 구구절절 세세히 설명하는 단계라면... 다시 머리를 부여잡고 "아유 머리 아파 이게 대체 뭐람!"을 외치며 관심도는 나락으로 쳐박히기도 한다.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이러한 설명을 곁들였을 때 내가 아는 요리라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도 있다. 너무 간단하지만 맛있게 굽기가 의외로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는 스테이크. 지난주 코스** 갔을 때 스테이크용 고기가 넘 좋아보여서 대량 구매하게 되었다. 고기 상태가 너무 좋아서 소분하여 냉동시키기가 너무 아까운 거다. 그래서 주말에 식구들이 모두 모였을 때 구워 먹었다. 날이 좋을 때는 밖에서 숯불을 피워 구워 먹으면 다른 양념이나 가니쉬가 거의 필요가 없고 기름장만으로도 그야말로 금상첨화지만 지금은 추워서 불 피우기 엄두가 안나 따뜻한 실내에서 구워 먹기로 했다. 별거 아니지만 그날의 레시피를 적어보자.


   "먹기 한 시간 전에 스테이크용 소고기(미국산)를 꺼내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유와 블랙페퍼를 뿌려 시즈닝해두었다가 팬을 센불로 달군 후 스테이크를 앞뒤로 돌려가며 구워준다. 이때 염도가 낮아 스테이크용 소금으로 좋다는 잘츠부르크 소금을 뿌려준다. 스테이크에서 나온 기름을 이용하여 가니쉬를 구워준다. 가니쉬용으로는 아스파라거스, 마늘, 양파, 브라운송이 등을 준비했다. 중불에서 구워 접시에 세팅하고 파슬리 가루를 뿌려준다. 소금장을 내도 좋고 쥬세페 주스티 모데나 5 메달 20 년 산 발사믹을 종지에 담아내도 좋다." 


그야말로 식구들이 순식간에 흡입을 했다는 건 말하나 마나!

여기서 잠깐... 내가 만약 이 잘츠부르크 소금과 주세페 주스티 모데나 5 메달 20 년 산 발사막의 맛을 모른다면.... 그러면 어땠을까. 난 어떤 생각을 할까. 소금이 다 그렇지... 혹은 발사믹이 거기서 거기 아닌가 하면서 상상이 안되니 답답하지만 두루뭉실 그냥 넘어가겠지. 사실 잘추부르크 소금은 내가 생각하기에 염도만 살짝 다를 뿐 일반 소금과 별 차이를 모르겠고 발사믹은 분명 맛이 천차만별이란 것을 알기 때문에 이런 레시피를 읽었다면 그 맛이 더 와닿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말입니다! 난 이렇게 자세하고 친절하게 설명이 된 음식 이야기를 문장으로 읽을 때면 내가 그 맛을 모르고 상상할 수 없어 답답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그 순간 더없이 마음이 따스해지면서 깊이 빠져드는 나 자신을 느낀다는 것이다. 이상하게도 이렇게 자세히 설명된 레시피나 메뉴판을 대할 때면 그 음식에서 정성과 사랑, 따뜻함, 배려가 느껴진다. 나만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그렇다. 스테이크야 어떻게 구워도 맛있는 거 아냐 하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안다. 요리를 해 본 사람이라면. 그래서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면 그 음식을 조리한 사람의 정성과 사랑, 배려, 따뜻함을 함께 먹는 거란 생각이 들어서 더없이 그 순간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오 헨리의 단편집 『식탁 위의 봄날』에는 음식과 관련한 18 편의 단편이 실려있다. 익히 알고 있는 「마녀의 빵」,「크리스마스 선물」,「마지막 잎새」,「경찰과 찬송가」 등은 우리에게 이미 친숙하다. 이 단편집은 오 헨리의 수많은 단편들 중에서 음식과 관련한 단편들을 가려내어 묶었다는데 특별함이 있다. 그의 단편의 주인공들은 대도시의 냉혹하고 무정한 뒷골목에서 가혹한 하층민으로서의 삶을 견디며 살아가지만 작가의 눈에는 따뜻함이 머물러 있다. 가난하지만 평범한 일상 속에 머무는 기적과도 같은 한 순간을 그들에게 선물함으로써 사람들은 온기와 희망을 얻는다. 그래서 이 단편집을 읽으면서 잠시 마음이 쉬어가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애정을 담아 집필했기에 더 음식이 소중했는지도 모른다. 정성을 다한 음식을 소중한 사람들과 나누면서 친밀감을 느끼고 온기를 나누는 것이야말로 더없이 소중한 일상의 풍경이 아니겠는가! 


「하그레이브스의 연기」에서 미국 남부 스타일의 줄렙(위스키에 설탕, 박하 등을 넣은 청량음료)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정성을 다해 만들어 대접하는 모습, 「녹색의 문」에서 며칠 간 굶어 쓰러지기까지 한 처음 만난 아가씨를 위해 한달음에 달려나가 두 팔 가득 음식을 구해 온 젊은이, 추수감사절을 맞아 굶주리고 있는 신사를 위해 식당에 자리를 마련하고 배불리 먹이려는 마음을 담은 「추수 감사절의 두 신사 」, 임신한 아내가 먹고 싶다는 복숭아를 구하기 위해 봄날의 늦은 밤거리를 헤매는 권투선수의 이야기를 담은 「힘들게 얻은 과일의 작은 흠집」등을 읽노라면 재치있는 그 입담과 따스한 배려의 마음이 저절로 전해져 옴을 느끼게 된다. 

이 단편집에서 가장 길다고 할 수 있는 「식탁 위의 큐피드」는 그야말로 음식 자체가 작품의 제목이 되기도 한다. 식탁에서 먹고 또 먹고 끊임없이 먹어대는 남성들의 모습을 "두 발 달린 되새김동물에 지나지 않는"다며 두 청년의 구애를 거절하던 메임 양이 어느 날 언니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제프의 마차를 얻어타고 같이 길을 가게 되었는데 길을 잃은데다 갑작스런 폭우에 외딴 오두막에 피신을 하게 되고 물이 빠지지 않아 며칠 간 음식을 먹을 수 없게 되고 말았다. 배가 너무 고파진 그녀와 제프는 맛있는 음식을 상상하며 줄줄이 음식들을 나열하는데 그 두 사람의 모습이 너무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거 아닌가. 두껍게 썬 고기는 레어로, 프렌치프라이랑 계란 여섯 개를 부드럽게 휘저은 스크램블드 에그를 토스트 위에 얹고, 생맥주 한 잔,미디엄으로 구운 스테이크와 줄리엔(잘게 썬 야채를 넣은 묽은 수프) 세 개, 팬케이크는 노릇하게, 쌀을 곁들인 작은 카레 양념 닭구이, 아이스크림이랑 커스터드 한 컵, 닭간 파이랑 토스트에 바른 콩팥 소테, 양 구이, 박하 소스랑 칠면조 샐러드, 속을 채운 올리브, 산딸기 타르트랑 옥수수 빵, 하드 소스 뿌린 사과 파이에 듀베리 파이... 이 얼마나 즐거운 대화인지... 그들이 먹고 싶은 음식 이야기는 끝없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그녀는 남자들에 대한 편견을 떨쳐버린다. 

익히 아는 단편이지만 「크리스마스 선물」의 두 연인은 사랑하는 남편과 아내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마련하기 위해 자신들의 대단히 자랑스러운 재산을 기꺼이 팔아버린다. 아내 '델라'는 무릎까지 내려오는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잘라 팔아 남편이 할아버지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금시계의 줄을 장만한다. 남편 '짐'은 금시계를 팔아 아내의 아름다운 머리를 더욱 윤기나게 빗어내릴 수 있는 빗 세트를 선물한다. 서로의 선물을 바라보는 두 사람의 심정을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그저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사랑을 이렇게 표현한다.

   " .... 당신에 대한 내 사랑은 아무도 셀 수 없을 거예요. 고기 넣을까요. 짐?" 

   "델라, 우리 크리스마스 선물은 잠시 치워두도록 합시다. 지금 당장 쓰기에는 너무 좋은 것들이라서요. 당신 빗을 살 돈을 마련하느라 시계를 팔았어요. 이제 고기를 넣어도 되겠군요."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오 헨리는 대중적인 인기에 비해 평단의 평가는 그다지 좋지 못했다고 한다. 그의 단편들의 전개가 지나치게 우연이 남발되고 있고 비극보다는 행복한 결말에 이르는 작품들이 주를 이루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식탁 위의 봄날」,「아르카디아의 단기 투숙객들」,「물레방아가 있는 교회」등은 모두 주인공들의 만남이 예기치 못한 우연에 의한 경우가 중요한 요소로 작용을 하고 있고 이러한 플롯은 '오 헨리 트위스트'라는 용어를 만들어 냈다고  할 정도로 억지스러운 요소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조차도 오 헨리의 작품을 읽는 재미를 떨어뜨리지는 못하는 거 같다. 사실 정말 짧은 단편인데도 그 속에서 주인공들의 삶을 응원하고 있고 제발 원하는 그 사람을 빨리 만나게 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내 마음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렴 어때! 세라가 그토록 기다리는 월터를 어떻게든 만나기를 바라게 되고(식탁 위의 봄날), 도시에서의 외롭고 힘든 삶에 지쳐 브로드웨이의 여름 휴양지에 있는 아르카디아로 찾아온 두 젊은이 메이미와 지미 맥매너스가 꼭 이루어지길 바라게 되고(아르카디아의 단기 투숙객들), 결정적으로 어린 딸 '애글레이아'를 잃어버리고 회한에 젖어 있던 방앗간 주인 에이브럼 신부가 체스터 양을 만났을 때 제발 그 체스터 양이 '애글레이아 양'이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되는 것은 정말 나도 어쩌지 못한다(물레방아가 있는 교회). 마음이 저절로 그렇게 흘러가게 된다. 그래서 두 부녀의 극적인 재회가 정말 억지스럽고 신파도 이런 신파가 없다 싶지만 그럼에도 감격스러운 것은 어쩔 수가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음식 이야기이건 아니건 오 헨리의 단편들에는 역시 따뜻함이 느껴지고 뭔가 앞으로는 잘 될거라는 낙관적인 믿음을 갖게 되고 결국 사랑스러운 주인공들에 감동하게 된다. 가끔은 이렇게 무조건적으로 행복한 결말이나 신파조의 이야기를 읽는 것도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된달까... 마음이 우울할 땐 오 헨리의 단편을 읽으라는 말이 괜히 생긴 게 아니다.




오 헨리의 단편들처럼 우리 현실도 이렇게 따뜻하고 낙관적인 믿음으로 가득하면 얼마나 좋을까.

오늘 탄핵안이 가결되었다.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하지만 앞으로 정국이 어떻게 전개되어 나갈지, 우리들의 삶은 어떻게 좀 나아지려는지 도통 낙관할 수가 없으니 가슴이 답답하다. 현실은 동화가 아니다. ㅈㅁ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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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24-12-14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따뜻하게 읽었어요. 그런데 말입니다. 저는 그저 편견을 벗어나게 하고, 식당 메뉴판이 연인을 연결해 주고, 자존심을 다치지 않게 하면서 과거의 주인을 돕는 뭐 그런 이야기라고 생각했지 말입니다. 맛을 상상하지는 못했어요. 그저 스프는 따뜻하다, 고기는 단백질이고, 질기면 소화가 힘들텐데 뭐 이런 생각을 했어요. 저도 음식 맛을 상상하면서 다시 읽어봐야겠습니다. 현실도 동화처럼 따뜻하면 좋겠습니다^^

은하수 2024-12-14 23:25   좋아요 1 | URL
어... 저도 요정님과 같은 생각 했는걸요. 메뉴판이 연인을 연결해주고 과거의 주인을 돕는 일도 있을 수 있지... 그게 연기일지라도 멋진 일인걸... 하구요^^
근데 저 스테이크 이야기는... 제게 좀 특별한 날이어서 ... 그날 딸램 결혼할 남친이 처음 인사 온 날이라 특히 기억에 남아 있어서 더 이 단편들과 연결이 되었던 거 같아요... 물론 어릴 때부터 음식과 관련한 소설들을 좋아하긴 했지만요... 그 맛을 알 수 없어 늘 답답해하긴 했죠. 어른이 되어 여러 향신료의 냄새와 맛을 알게 되어 좋았던 기억은 잊지 못하죠~~
 
홀로 중국을 걷다 - 이욱연의 중국 도시 산책
이욱연 지음 / 창비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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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발적 중국 여행은 하고 싶지 않지만 책은 읽을 수 있잖아 하는 맘으로 읽었다가 무색해짐. 역사, 문학, 문화, 정치적 사건들과 어우러진 중국인들의 평범한 일상과 거리와 맛있는 음식과 술 이야기에 마음을 빼앗겼다. 중국의 도시를 사랑했던 우리의 작가들과 안중근 의사는 잊지 말아야 할 숙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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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하지 않는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장편소설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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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12월 10일 밤 12시부터 오늘 새벽 사이에 방송된 노벨상 시상식 현장의 라이브 방송을 시청하면서 온전히 한강 작가의 작품과 언어에 빠져 있었다.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으며 시상식을 맞고 싶었기 때문에 마음의 준비를 하며 미리 책을 구입해 놓고 기다리다가 엊그제부터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없이 예전에 <소년이 온다>를 읽었다가 심하게 트라우마를 겪은 경험이 있었고, 현기영 작가의 <순이 삼촌>을 읽으며 제주 4.3의 진상을 익히 알고 있었던 터라 나름의 준비를 하고 싶었던 거였다. 천만 다행스럽게도 <소년이 온다>나 <순이 삼촌>을 읽을 때와는 다르게 큰 동요 없이 언어의 아름다움에 집중해서 작가가 이끄는 대로 보여주려는 그 세계로 바로 진입하여 모든 준비를 다 마친 사람처럼 의연하게 읽어나갈 수 있었다. <순이 삼촌>은 제주 4.3 그날의 진실을 적나라하게 파헤쳐 잔인할 정도로 세밀하게 보여주어 충격을 던져 주었고, 반면에 한강 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는 살아남은 사람들이 그 날의 진실을 하나하나 파헤쳐 나가면서 실종된 가족의 유해를 수습하고자 기울이는 노력의 과정을 보여주는 설정이어서 서로 상보적으로 읽히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한 강 작가의 작품에 나타난 제주 4.3의 참혹함이 반감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학습의 결과로 인해 개인적으로 그리 느낀 거라고 생각한다.



새벽 시간에 방송된 시상식 현장의 라이브 방송에서 한 강 작가의 심사평을 작성하여 읽는 스웨덴 아카데미 위원이자 노벨문학상 위원회 위원인 작가 엘렌 마트손의 심사평은 한강의 작품에 대한 찬사를 이어간 우아하고 아름다운 서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절묘하게도 <작별하지 않는다>를 중심으로 쓰인 심사평이어서 더 유심히 듣게 되었고 그 하나하나의 문장들을 받아 적어 남겨놓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보다 더 좋은 리뷰를 쓸 수 있을까? 없다. 펜을 열심히 놀려 적어놓은 심사평을 여기에 남겨본다.



*한강 작가 심사평 : 엘렌 마트손(스웨덴 아카데미 위원, 노벨 문학상 위원회 위원, 작가)


한강의 작품에서 두 가지 색, 흰 색과 붉은 색이 만납니다. 흰색은 눈을 나타내며 작가의 여러 작품에 눈이 내려서 화자와 세상 사이의 보호막을 드리워 줍니다. 하지만 흰색은 동시에 슬픔과 죽음의 색이기도 합니다. 붉은 색은 생명을 상징하지만 고통, 피, 그리고 칼로 깊게 베인 상처이기도 합니다.

작가의 목소리는 매혹적일만큼 부드럽지만 차마 형용할 수 없고 회복할 수 없는 상실을 말합니다. 학살로 쌓인 시체 더미에서 피가 흐르고 짙어지다가 이내 호소가 되며 또 그리 답할 수도 없고 외면할 수도 없는 질문으로 변합니다.

어떻게 우리는 죽은 자들, 납치된 자들, 그리고 실종된 자들과 관계를 맺어야 할까요? 이들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이들에게 어떤 빚을 지고 있을까요?

붉은 색과 흰색은 작가가 소설을 통해서 반복적으로 다루는 역사적 경험을 상징합니다.

2021 년 작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눈은 산 자와 죽은 자들이 만날 공간을 생산합니다. 중간에 떠다니는 자들은 어디에 속하는지 아직 결정하지 않은 자들입니다. 이 소설은 내내 눈보라 속에서 전개됩니다. 소설 속의 화자는 기억의 조각들을 맞추면서 시간의 층을 미끄러지듯이 통과하고 죽은 자들의 그림자와 소통하고 이들의 지식을 배웁니다. 왜냐하면, 결국 모든 것은 지식과 진실을 추구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설령 그 과정이 견디기 어렵다고 해도 말입니다. 

절묘하게 구현된 한 환상에서 소설 속 친구는 육체가 머나먼 병상에 갇혀있음에도 불구하고 책장에서 자료집이 담긴 상자를 꺼내 역사의 모자이크 한 조각을 더해줄 수 있는 문서를 찾아냅니다. 꿈은 현실로 넘쳐흐르고 과거는 현재로 이어집니다. 경계가 녹아 사라지는 이러한 변화는 한 강 작품에서 나타나는 특징입니다. 사람들은 이리저리 움직이며 더듬이를 뻗어 양 방향을 가리키며 신호를 포착하고 또 해석하려 합니다. 인물들은 때때로 본인이 보고 목격하는 것으로 인해 좌절하기도 하며 그럴 때는 매번 마음의 평화가 무너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필요한 힘을 가지고 계속 나아갑니다. 결코 잊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나를 죽였지? 살해 당한 소년의 혼이 묻습니다. 소년의 이목구비가 문드러지고 윤곽선이 무너집니다. 살아남은 자에게는 다른 질문이 남습니다. 오로지 고통만 남겨준 이 몸뚱이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고문으로 으스러져 피 흘리는 이 몸을 어떻게 되찾을 수 있을까? 

하지만 몸이 포기하려 하면 영혼이 말을 이어갑니다. 혼이 피폐해지면 육체가 걸음을 이어나갑니다. 깊은 내면에는 고집스러운 저항, 말보다 강한 고요한 주장 또한 있음을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잊으려고 하는 것은 목표가 아니며 가능하지도 않습니다.

한강의 작품 세계에서 사람들은 상처 입고 취약하고 어떤 면에서는 약하지만 그래도 충분한 힘을 가졌습니다. 또한 꼭 필요한 힘을 가졌기 때문에 한걸음 더 나아가고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자료를 하나 더 요청하고 살아남은 목격자를 한 명 더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빛이 희미해지며 죽은 자들의 그림자는 벽 위를 계속 맴돕니다.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으며 그 무엇도 끝나지 않습니다.


친애하는 한 강 작가 님, 한림원을 대표하여 2024년도 노벨상 수상에 진심으로 따뜻한 축하를 전하게 되어 영광입니다.(출처: SBS TV)




시상식이 끝나고 이어진 축하연에서 한 강 작가가 수상 소감을 영어로 낭독하였는데 한 편의 단편소설 같았던 이 글도 남겨둔다. 1,300 여 명만 초대 받은 연회장에 한강 작가를 소개하는 한국어가 울려 퍼졌다. 

"올해 노벨 문학상 수상자를 소개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약간 어색하지만 또렷한 발음으로 소개하는 음성이 귀에 쏘옥 하고 들어와 박혔다. 올 블랙의 수수한 롱 드레스를 착용한 한강 작가의 나즈막한 목소리가 약 4 분간 연회장에 울려 퍼진다. 


제가 여덟 살이던 날을 기억합니다. 

오후 주산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데 갑자기 하늘이 열리더니 폭우가 쏟아졌습니다. 

비가 너무 세차게 내리자 20 여 명의 아이들이 건물 처마 밑에 웅크리고 있었습니다. 

길 건너편에도 비슷한 건물이 있었는데, 

마치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처마 밑에 또 다른 작은 군중이 보였습니다. 

쏟아지는 빗줄기, 제 팔과 종아리를 적시는 물기를 보면서 문득 깨달았습니다.

저와 어깨를 맞대고 서 있는 이 모든 사람들, 

그리고 건너편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의 '나'로 살아가고 있었다는 것을요.

저와 마찬가지로 그들 모두 이 비를 보고 있었습니다. 제 얼굴에 촉촉이 젖은 비를 그들도 느끼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일인칭 시점을 경험하는 경이로운 순간이었습니다. 


글을 읽고 쓰면서 보낸 시간을 되돌아보니 이 경이로운 순간이 몇 번이고 되살아났습니다.

언어의 실을 따라 또 다른 마음 속 깊이로 들어가 또 다른 내면과의 만남, 

가장 중요하고 긴급한 질문을 실에 매달아 다른 자아에게 보내는 것. 

그 실을 믿고 다른 자아에게 보내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저는 알고 싶었습니다.

우리가 태어난 이유, 고통과 사랑이 존재하는 이유, 

이러한 질문은 수천 년 동안 문학이 던져온 질문이며,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잠시 머무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무슨 일이 있어도 인간으로 남는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요?

가장 어두운 밤, 우리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묻는 언어, 

이 지구에 사는 사람들과 생명체의 일인칭 시점으로 상상하는 언어,

우리를 서로 연결해주는 언어가 있습니다.

이러한 언어를 다루는 문학은 필연적으로 일종의 체온을 지니고 있습니다.

필연적으로 문학을 읽고 쓰는 작업은 생명을 파괴하는 모든 행위에 반대하는 위치에 서 있습니다.


문학을 위한 이 상이 주는 의미를 폭력에 맞서는 분들과

이 자리에 서 있는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출처: SBS TV)




아침 나절에 미용실에 가서 머리 염색을 하고 왔다. 외출할 일이 별로 없어 흰머리가 몇 센티미터나 올라오고 있는 것도 상관없이 지냈는데 갑자기 부부 동반 모임이 있어서 외출할 일이 생겼다. 한강 작가는 화장 안한 수수한 얼굴로 노벨상 시상식에 참석했던데 ... 그래서 더 멋지지 않으냔 말이다. 근데... 난 그게 안된다. 돌아와서 오후에 마리아 미즈의 <마을과 세계>를 펼쳤는데 서문에 이런 문장이 첫 문장으로 나온다. 


     우리 마을의 규범을 따르지 않던 타보 디디(Tabo Didi)는 언젠가 "인간이 되는 것은 쉽지 않아요!" 라고 말했다. 나는 이 철학적인 말을 잊지 않았다.(9쪽)


한강 작가의 소감문을 읽으면서도 자연스레 든 거지만 이 문장 "무슨 일이 있어도 인간으로 남는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요?"를 보고 드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지금의 우리 나라의 상황과 연결이 되었다. 물론 작가의 작품 제주 4.3 사건 당시의 대한민국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 힘없는 국민들은 국가 권력의 총칼 앞에, 장갑차 앞에 맨몸으로 맞선다. 생각만으로도 몸서리가 쳐지는 일인데 다시 또 계엄이라니... 머리가 쭈뼛 서서 잠을 이룰 수 없었던 12월 3 일의 그 밤을 잊지 못한다. 살아서 계엄을 또 겪게 될 거라곤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한강 작가와 마리아 미즈는 잊지 않기 위해서, "망각에 저항해" 쓰고 또 쓰면서 과거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는 거다. 문학의 힘을 믿는 한강 작가의 소감문이 주는 감동으로 오늘 하루도 이겨내고 다시 힘을 내본다. 

기어코 ... 이루어내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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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라디오 2024-12-12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은하수님! 좋은 글 감사합니다. 한강 작가 심사평, 한강 작가 수상 소감 둘 다 너무 좋네요^^b

은하수 2024-12-12 11:10   좋아요 1 | URL
그쵸~~~~?^^
저 새벽에 이 문장들 들으면서 가슴이 너무 벅차오르더라구요!
조곤조곤 읽어나가는 두 작가의 목소리에 위안 받았답니다.~~
넘 멋진 여성들이지 않습니까!^^

고양이라디오 2024-12-13 22:10   좋아요 1 | URL
목소리 직접 들으면 더 좋을 거 같네요!!!

한강작가님 낭독도 너무 좋아요ㅜ
 
로버트 카파 - 전쟁 속 인간의 얼굴을 기록한 남자 클래식 클라우드 34
김경훈 지음 / arte(아르테)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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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사랑했던 세계 최고의 전쟁 사진가인 로버트 카파. 그는 자신의 발로 전쟁터로 직접 나아갔고 모든 것을 목격하였고 자신만의 언어로 기록하여 우리에게 전달해 주었다. 작열하는 포탄과 자욱한 연기, 쏟아지는 총탄에 쓰러져 가는, 고통받는 평범한 사람들을 사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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