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운명 1》
세계 제2차 대전의 전환점이 된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종군기자로 참전한 경험이 이 책 전반에
녹아있음을 알 수 있다. 직접 보고 경험하지 않았다면 결코 알 수 없었을 전쟁의 실상이 문장마다 가득하다.
전쟁조차도 아름답고 웅장하게 만들어버린 바실리 그로스만의 역작을 읽는 기쁨을 맘껏 누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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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와 화염으로 다른 사람들에게서 유리되고 굉음으로 귀가 먹먹해진 병사의 직관이 참모부가 지도 앞에서 도출한 전투의 전체적 결말에 대한 판단보다 더 진실에 가까운 경우가 종종 있다. - P59

놀라운 변화와 함께 전투는 전환의 순간을 맞는다. 공격하던 병사가 마침내 목표 지점에 다다라 멍한 상태에서 주위를 돌아보다가, 자신과 함께 목표를 향해 나아오던 이들이 더이상 보이지 않음을, 그동안 내내 혼자이고 나약하고 바보 같아 보이기만 했던 적병이 이제는 다수이며 따라서 자신이 대항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 P60

그 상황 속에 있는 이에게는 너무도 분명한 이 전환의 순간, 멀리서 이를 보고 예견하고 이해하려 애쓰는 사람으로서는 결코 알 수도,설명할 수도 없는 이 순간에 지각에 깊은 변화가 일어난다. 
용감하고 현명한 ‘우리‘는 소심하고 허약한 ‘나‘로 바뀌고, 운 나쁜 사냥감으로만 여겨지던 적은 끔찍하고 위협적인, 뭉쳐진 ‘그들‘로 변모하는 것이다. - P60

성공적으로 저항을 제압하며 나아온 이 병사에게 그때껏 전투의 모든 사건은 각각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들이었다. 포탄의 폭발도, 기관총 연발사격도 그랬다. 이제 저자가 엄폐물 뒤에서 총을 쏘네, 지금 달아나는구나, 달아나지 않을 수 없지. 그는 혼자이고,기관총과 단절되어 있고,
 그의 옆에서 역시나 단절된 채 총을 쏘는 병사와도 단절되어 있으니까.  - P60

하지만 나, 나는 우리지, 나는 거대한 공격으로 나아가는 보병대 전체야, 나는 나를 지지하는 포병부대야, 나, 나는 나를 지지하는 전차들이야, 나는 우리 공동의 전투를 비춰주는 조명탄이야. 그랬는데 이제 갑작스러운 공격으로 나는 혼자가 되고, 서로 분리되어 나약하기만 했던 모든 것들이 적의 소총과 기관총과 대포의 화염이라는 무시무시한 단합체로 바뀐 것이다. 이렇게 하나가 된 적은 이미 무적이다. 살아남을 길은 달아나는 것, 머리를 감추고 어깨와 이마와 턱을 가린 채 내달리는 것밖에 없다. - P60

한편 밤의 어둠 속에서 기습을 당해 무력감과
 고립감만을 느끼던 이들은 이제 자신들을 파괴한 적의 단합체를 분쇄하고 자신들만의 단합체를, 승리의 힘을 품은 자신들 고유의 단합체를 느끼기시작한다.
종종 전쟁을 예술이라 부를 권리를 부여하는 근거는 바로 이러한 변환을 이해하는 데 있다.
이 고립과 단합의 감각 속에, 고립의 의식으로부터 단합의 의식으로 향하는 이 변환 속에 중대들과 대대들이 감행하는 야간 돌격만이 아니라 전쟁을 치르는 군 전체와 국민 모두의 승패 여부가 달려 있는 것이다. - P61

전투의 참가자들에게 거의 완전히 잊히는 하나의 감각이 있다면 그것은 시간 감각이다. 새해맞이 무도회에서 아침까지 춤을 춘 소녀는 그 시간이 빨리 갔는지 아니면 천천히 흘렀는지 묻는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내놓지 못한다. 또 실리셀부르그 정치범 감옥에 스물다섯해 동안 감금되었던 사람의 소회는 어떤가. "감옥에서영원을 보낸 것 같네. 하지만 동시에 몇주 잠깐 살았던 것도 같아."
-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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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지 위에 안개가 자욱했다. 포장도로를 따라 늘어선 고압전선들은 자동차 헤드라이트의 불빛을 받아 반짝였다.
비가 내린 것은 아니었지만 땅은 새벽녘의 습기로 축축했고, 붉은 신호등이 켜질 때마다 젖은 아스팔트 위에 불그레한 얼룩이 흐릿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수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자리한 수용소의 숨결이 느껴졌다. 수용소를 향해 뻗어 있는 전깃줄과 도로, 철로의 선들이 점점 더 촘촘해지고 있었다. 이곳은 직선들로 가득한 공간, 대지와 가을 하늘과 안개를 자르는 직사각형과 평행사변형의 공간이었다.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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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패트릭 멜로즈 소설 5부작
에드워드 세인트 오빈 지음, 공진호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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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었구나! 라는 것을 알고 나니 문체가 어째서 이다지도 가시가 돋친 듯 강했는지 이해 완료. 읽으면서 내내 기원했던 아버지의 죽음을 다음 편에서 바로 볼 수 있다니 좀 더 계속 읽어봐도 좋겠단 생각이 든다. 다 읽었는데도 뭐가 ˝괜찮아˝인지는 아직 모르겠어서 답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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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트릭의 아버지 에드워드가 개새끼였네..... 아내인 엘리너에게 하는 행동을 봤을 때도 이미 어렴풋이 짐작이 갔지만 아들 패트릭에게 한 행동은 정말 인간이하다. 넌덜머리나는 새끼다.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새끼 대체 언제 죽지? 앞으로의 내용은 모르지만 비명횡사하거나 돈 없이 그지꼴로 죽거나 모두에게 버림받는 인생이 남아있다면 더없이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영국상류층의 위선과 폭력, 학대, 냉소, 신랄한 풍자 등등의 수식어들로 이 책을 말한다. 하지만 난 이 패트릭 멜로즈 5부작을 좋아하지는 못할 거 같다.

대화도 한결같이 쓰레기 같다. 인간들이 쓰레기라 그런건가? 작가 자신도 어릴 때 이런 쓰레기 같은 일들은 겪었을 거 같은 생각이 문든 든다.








"거기 그대로 있어." 데이비드가 일어나 노란색과 흰색의 파자마 매무새를 만지며 말했다.
패트릭은 달리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처음엔 흐릿하게, 그리고 곧 좀 더 분명하게 자기가 처한 위치의 굴욕을 인지했다.
침대에 얼굴을 파묻은 상태에서 바지는 무릎에 뭉쳐 있고, 이상하게 등뼈 꽁무니가 젖어 우려되었다. 패트릭은 피가 나는가보다 했다. 아무래도 아버지가 칼로 등을 찔렀나 보다 했다.
아버지가 화장실에 가서 휴지 한 움큼을 가지고 돌아와, 패트릭의 궁둥이 사이로 조금씩 흐르기 시작해서 점점 차가워지는점액을 닦아냈다.
"이제 일어나도 돼." - P113

"중산층 사람들이 니컬러스 당신이 말하듯이 중산
층에서 멀어질 수 있어요?
"그럼요. 빅터가 아주 두드러진 사례죠." 니컬러스는 너그러움을 보였다.
빅터는 대화를 즐기고 있다는 듯이 웃었다.
"물론 여자들은 그러기가 더 쉽죠." 니컬러스는 말을 계속했다. "결혼은 여자를 처량한 환경에서 넓은 세상으로 들어 올려주는 축복이에요." 그리고 브리짓을 흘긋 보았다. "대타가 필요할지 모를 사람들에게 그림엽서나 보내며 시간을 보내는 그런 부류의 호모가 아니라면, 실제로 남자가 할 수 있는 건 윗사람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뿐이죠. 아주 매력적이고 박식해야 하기도 하고." 
니컬러스는 빅터를 안심시키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 P180

"니컬러스는 물론 전문가지, 몸소 여러 여자를 밑바닥에서 건져 냈으니까." 데이비드가 끼어들었다.
"상당한 비용이 들었죠." 니컬러스가 동의했다.
"밑바닥에 끌려 들어가서 치른 희생은 훨씬 더 컸지 않은가,니컬러스?" 데이비드는 니컬러스에게 정치적 굴욕을 상기시켰다. "어쨌거나 자네는 밑바닥이 마음이 편한가 보네."
"기가 막히네요, 선생님. 나처럼 그렇게 시궁창에 내려갔다 와 보면 밑바닥은 장밋빛 인생 같아 보인답니다요." 니컬러스가 런던 토박이 사투리를 웃기게 흉내 냈다.
- P181

엘리너는 최고라는 영국인의 예의에 그토록 높은 비율의 노골적 무례함과 검투사의 경기 같은 측면이 있다는 게 여전히 납득되지 않았다. - P181

 남편이 그 자유를 남용한다는 걸 아는 한편 그
몰인정한 언행에 자기가 간섭하는 게 또한 얼마나 ‘따분한‘ 일인지도 알고 있었다. 데이비드가 사람들에게 그들의 약점이나 실패를 상기시켜 줄 때면 엘리너는 희생자들의 기분을 자기 것으로 삼아 그들을 구해 주고 싶은 욕구와 남편에게 유희를 망쳤다는 비난을 듣고 싶지 않은, 똑같이 강한 욕구 사이에서 갈등했다. 그 갈등에 몰입하면 할수록 더 곤궁한 처지에 몰렸다. 무슨 말을 하더라도 틀릴 것이기 때문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전혀 알 수 없었다. - P182

브리짓은 무화과를 조금 입에 물고 깨지락거렸다. 앤은 브리짓을 지켜보면서 여자라면 누구든 언제고 자문할 때가 있기 마련인, 내가 눈감고 참아야 하나? 라는 해묵은 물음을 머리에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눈감고 참아야 하나? 앤은 브리짓을 어느 동양폭한의 발치에 축 늘어져 있는, 목걸이를 단 노예로 생각해야 할지, 점심에 먹지 않고 남기려는 애플파이를 먹도록 강요당하는 반항적인 여학생으로 생각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 P193

앤은 니컬러스가 그전보다 더 한심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니컬러스는 기껏 젠체하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늘 어리석은 말을 하고, 어리석어 보이지 않으려고 늘 젠체하는 말을 하는 그런 부류의 영국인이었다. 그들은 먼저 자기 자신을 획득하는 수고를 하지 않고 자기 풍자의 대상이 되었다. 스스로 ‘검은 늪지대의 생명체‘*라고 생각하는 데이비드는 바로 그 퇴행한 실패자들 가운데서 고등한 종種일 뿐이었다.

*영화 <해양괴물Creature from the Black Lagoon>에 나오는 선사시대 괴물 - P193

엘리너의 짓밟힌 표정에도 더 이상 마음이 아프지 않았다. 다만 계단에서 기다리고 있을 패트릭 생각이 나자, 앤의 냉담한마음이 흔들렸다. 하지만 그 생각은 결국 똑같은 결론을 내리게하는 자극제가 될 뿐이었다. 앤은 이 사람들과 더 이상 어떤 관계도 갖고 싶지 않다는 것, 빅터는 일찍 가는 것을 당황스러워하겠지만, 떠나야 할 때가 되었다. 

앤은 빅터를 쳐다보고, 눈썹을 추켜올리고 문 쪽을 향하는 눈짓을 했다. 인상을 찌푸릴 줄알았던 빅터는 웬일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마치 후추를 갈아넣을까요, 라는 말에 그러라는 듯이. 앤은 잠깐 뜸을 들인 다음 엘리너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는, "안됐지만 우리는 이만 가 봐야겠어. 긴 하루였어. 자기도 분명 피곤할 거야" 하고 말했다.
"네, 나는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 일에 진도 좀 나가야 해서요." 빅터가 단호히 말하고, 의자에서 무거운 듯 몸을 일으켰다. - P194

빅터는 잠든 보초를 깨우고 싶지 않은 사람처럼 식당 문을 살살 닫았다. 빅터가 앤을 보고 웃자 앤도 마주 웃었다. 그들은 멜로즈 부부 집을 떠나는 게 얼마나 마음이 후련한지 불현듯 깨달았다. - P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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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아들(패트릭)에게 이런 기분이 들게 만드는 아버진 대체 어떤 사람이지? 엄지와 검지로 양쪽 귀를 잡고 아이를 들어올리고 아이가 아파하거나 말거나 그걸 교육이라고 생각하다니 대체 어떤 정신머리를 가진 인간이면 이렇게 되는 건지 진지하게 묻고 싶다!

여기 있으면 아무도 나를 찾지 못해, 패트릭은 생각했다. 발작처럼 복받치는 가슴을 가다듬지 못해 숨을 들이쉴 때 목이 메었다. 그것은 마치 스웨터를 뒤집어쓰고 머리를 목둘레로 뺀다는 걸 잘못해서 소매에 쑤셔 넣다가 온통 꼬이게 되었을 때, 머리를 빼지 못하고 숨을 잘 쉴 수 없었던 때와도 같았다. - P45

아버지는 왜 그랬을까?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 그러면 안 될텐데, 패트릭은 생각했다.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 그러면 안 될텐데. - P45

겨울철에는 물웅덩이가 얼어 표면 아래 기포들이 갇힌 것을볼 수 있었다. 공기가 얼음에 잠겨 나오지 못하고 밑에 붙들려있는 것이다. 패트릭은 그게 싫었다. 그건 너무 불공평했다. 그래서 항상 얼음을 깨뜨려 기포를 자유롭게 해 주었다. - P45

여기 있으면 아무도 나를 찾지 못해, 패트릭은 생각했다. 그러자 다른 생각이 뒤따랐다. 내가 여기에 있는 걸 아무도 찾지못하면 어떻게 될까? -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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