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위 궤도를 도는 우주선, 그 안에서 여러 임무를 수행중인 6 명의 우주 비행사...
로만, 숀, 치에, 안톤, 피에트로, 넬.
2명의 여성과 4명의 남성, 2명의 러시아인과 미국, 영국, 일본, 이탈리아인 각 1명의 구성.
이제 그들 아래에는 칠흑 같은 밤의 남태평양이 지나간다. 끝없는 암흑 구덩이. 행성은 없고 그저 대기권의 부드러운 녹색 선과 무수히 많은 별뿐이다. 놀라운 고독. 모든 게 너무나 가깝고 무한하다.(P50)

우주비행사가 되고 싶은 열망으로 이어져 지금 이곳에이렇게 갇혀 있다는 게. 물건들을 쌌다가 풀었다가 하면서, 실험실에서 완두콩싹과 목화 뿌리를 만지작거리면서, 어디로도 가지 않지만 돌고 또 돌면서 나날을 보낸다. 변함없이 오래된 생각도 곁을 맴돈다. 불평하는 건 아니다. 세상에, 아니고말고, 불평하는게 아니다. - P35
침범하지 말 것. 이들끼리의 암묵적인 규칙이다. 비좁은 공간에 사생활이랄 것도 거의 없이 딱 붙어 지내고,저마다 과사용하는 공기를 나눠 쉬며 그렇게 몇 달을 지내야 한다. 그러니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어 서로의내밀한 생활까지 들춰 보진 말자는 거다. - P35
부유하는 가족이라고 하지만, 정확히 말해 가족이라고는 할 수 없다. 가족보다 더한 동시에 덜한 사이다. 이 짧은 시기 동안 이들은 서로에게 전부나 다름없다. 존재하는 게 자신들뿐이기 때문이다. 서로가 서로의 친구이자 동료이고, 스승이고, 의사이고, 치과의사이자 미용사다. 우주유영을 하고, 우주로 발사되고 지구로 재진입할 때, 비상 상황에서도 서로가 서로의 구명 밧줄이다. 각자가 서로에게 인류 대표가 되어 수십억 명몫을 감당해야 한다. 가족, 동물, 날씨, 섹스, 물, 나무까지, 지상의 모든 것 없이 지낼 줄 알아야 한다. 산책도 포기해야 한다. 가끔은 그냥 걷거나 눕고 싶은 날이 있다. 사람들과 사물들이 그리워지고, 지구가 아득하다 느껴져 며칠을 우울함에 허우적대고, 심지어 북극에서 저무는 석양을 봐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을 때는 선내의 사람들 얼굴을 보며 계속 살아가게 할 무언가를 발견해야만 한다. 일종의 위안을. 하지만 매번 그럴 수 있는 건 아니다. - P36
이들은 자신들이 자주 느끼는 감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말하자면 그건 융합의 감정이다. 자신들이 서로와, 또 우주선과 아주 구분되어 있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이곳에 오기 전 어떤 사람이었으며, 훈련 환경이나 배경이 얼마나 달랐고, 동기와 성격이 어떻든, 어느나라 출신이며, 자신들의 국가가 충돌하고 있든 말든, 이곳에서 이들은 우주선의 정교한 힘으로 동등해진다. 행성을 따라 완벽히 계획대로 이동하는 선체의 움직임과 기능을 수행하는 단일한 존재다. - P37
말수가 적고 건조한 유머를 구사하며 감상적이기도 해서 영화나 창밖 풍경에 대놓고 눈물을 흘리는 안톤은 우주선의 심장이다. 피에트로는 머리다. (이번 체류 기간의 선장으로, 능숙하고 유능해 뭐든 뚝딱 고치고 밀리미터 수준의 정밀함으로 로봇팔을 제어할 줄 알며 극도로 복잡한 회로기판도 배선하는) 로만은 손이다. (모두에게 영혼이 있노라고 주장하는) 숀은 영혼이다. 꼼꼼하고 공정하고 현명한, 쉽게 정의 내리거나 납작하게단정 짓기 힘든 치에는 양심이고 (8리터의 폐활량을 자랑하는) 넬은 숨통이다. - P38
이내 이들은 이런 메타포가 어이없다고 생각한다. 헛소리. 하지만 외면할 수도 없다. 살아나 자신들의 일부가 되어 뻗어 나가는 우주선을 타고, 단일한 존재가되어 지구 저궤도를 따라 돌진하다 보면 이런 생각에기운다. 이들은 이런 삶이 위태롭다고 생각했다. 복잡한 생명 유지 장치에 의존해 살아가며, 장치의 한 부분이 고장 나기라도 하거나 화재, 암모니아 누출, 방사능, 운석 충돌, 무엇에 의해서든 모든 게 순식간에 끝날지도 모르는 이런 삶이 말이다. 가끔은 정말 위태롭기도하지만 대체로는 아니다. 어쨌거나 모든 존재는 몸이라는 생명 유지 장치 속에서 살아가며 그 역시 언젠가 필연적으로 고장 나게 되어 있다. 이들을 태운 장치는 물론 위태롭다고 하겠지만 궤도의 리듬을 벗어나지 않는다. - P38
궤도 위에서 뜻밖의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예측 못 할 일도 모조리 예측된다. 매일 스물네 시간 내내 감시되고, 유심히 관찰되고, 강박적이다시피 보수된다. 빠짐없이 경보 장치가 달렸고, 꼼꼼히 패드를 댔고, 날카로운 물체가 극히 적고, 걸려 넘어지거나 떨어질 물건도 없다. 이와 다르게 감시당하지 않으며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돌아다니는 지상의 자유에는 여러위험이 따른다. 이를테면 바위 턱과 높은 곳, 도로와 총, 모기와 전염병, 빙하의 크레바스, 기구하게 얽힌 800만종이 생존을 위해 다투는 일 따위 말이다. - P39
가끔은 놀라운 생각을 한다. 자신들이 진공 심연을홀로 지나는 잠수함을 타고 있다는 생각 밖으로 나가면 안전할 것 같지 않다. 지구 표면에 다시 떨어졌을 때 이들은 생경한 존재들이리라. 미쳐 버린 낯선 세상을배우러 온 외계인들. -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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