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다지도 잔인한건지... 아.. 버키..!
대체 이 젊은이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이 글의 화자는 버키 캔터가 감독으로 있었던 챈슬러 놀이터에서 놀던 아널드 메스니코프이다. 그 자신도 버키 선생님과 같은 해에 폴리오를 앓았고, 다행스럽게도 두다리에 보조기를 대고 목발과 지팡이를 이용해 움직일 수 있게 되었는데, 버키와는 다른 인생을 살고 있다. ‘3. 재회‘에서 화자와 버키 선생님이 1971년 어느 봄날 정오에 우연히 재회하게 되었고, 그 감격스런 만남 이후 일주일에 한번씩 근처 식당에서 함께 점심을 먹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회한과 후회, 죄책감으로 가득찬 그의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이다.

마지막 장에서 버키 선생님이 놀이터 운동장에서 아이들의 신망과 사랑과 경탄을 받던 시절, 아이들에게 ‘창 던지기‘ 시범을 보여주는 회상 장면이 나오는데 압권이다. 그 아름다운 문장에서 보여주는 그 날의 분위기, 버키 선생님을 향한 아이들의 무한한 신뢰와 사랑, 경탄의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뿐만 아니라 아이들을 보호하고자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는 죄책감에서 평생 헤어나오지 못하고 아직 괴로움에 찬 나날을 보내는 버키 선생님의 전성기의 찬란한 한때가 그림처럼 그려져서 가슴이 뭉클했다.








눈을 감은 채 차 뒷좌석에 누워 이제는 숨을 쉬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도널드를 보자 버키는 아이가 첫날보다 두번째 날 밤에 호수에서 훨씬 자신 있게, 훨씬 균형이 잡힌 동작으로 부드럽게 다이빙을 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아이가 아주 튼튼했다는 것, 도널드가 할 줄 아는 다이빙을 다 한 다음 제비식 다이빙을 삼십 분 더 가르쳐주었던 것을 기억했다. 또 도널드가 각각의 다이빙을 반복하면 할수록 점점 더 잘하던 것을 기억했다. - P225

버키가 창을 두드리자 도널드가 눈을 떴다. "너는 괜찮을 거야." 버키가 아이한테 말했고, 블롬백 씨는 차를 몰고 떠났다. 버키가 차를 따라 달려가며 도널드에게 소리쳤다. "며칠만 있으면 다시 같이 다이빙을 할 수 있을 거야." 그러나 아이의 상태가 악화되었다는 것은 한눈에 알 수 있었고 눈에 담긴 표정은 섬뜩했다- 열에 들뜬 두 눈은 버키의 얼굴을 훑으며 누구도 줄 수 없는 만병통치약을 미친듯이 갈구하고 있었다. - P225

다행히도 캠프 아이들은 아직 아침식사중이었으며, 버키는 캐빈 층계를 달려올라가 도널드의 몸을 싸느라 담요가 사라진 침대를 최대한 단정하게 정돈했다. 그런 다음 포치로 나가 이제 곧 그의 밑에서 일하는 실무진이 모여들 호수를 내려다보며 스스로에게 피할 수 없는 질문을 던졌다. 내가 아니면 누가 이곳에 폴리오를 가져왔겠는가? - P225

폴리오 때문에 신체적으로 불구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끈질긴 수치심 때문에 사기도 푹 떨어져 있던 그 긴 세월 동안 가슴에 묻어두었던 그 모든 것을 이야기할 때, 그에게서는 전반적으로 뿌리 깊은 좌절의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는 미국에서 폴리오 피해자의 가장 위대한 모범인 FDR와는 정반대로
병에 걸리면서 승리가 아니라 패배에 이르렀다. 
마비와 그뒤에 온 모든 것으로인해 그는 사나이라는 자신감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고 삶의 그쪽 면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대체로 버키는 자신이 성 역할에서 무능하다고 생각했는데, 이것은 남자라면 용감하게 가정과 나라를 지켜야 하는 국가적 고난과 투쟁의 시대에 성년에 이른 소년에게는 부끄러운 자기 평가였다. - P246

할머니는 이제 세상을 떠난 지 오래였지만, 그는 어쩌다가1967년 뉴어크 폭동의 중심지에 있게 되기까지 폭동 기간에 거리에서 집 한 채가 불에 타고 근처 지붕에서 총알이 날아왔다ㅡ에이번 근처 바클레이의 엘리베이터도 없는 그들의 작은공동주택 집에서 살았다. 외부의 계단을 올라가야 했지만 ㅡ한때는 한 번에 세 단씩 즐겁게 뛰어올라가곤 하던 계단이었다ㅡ할머니의 사랑이 가없이 펼쳐졌던 곳, 한 번도 차가워지지 않았던 보살핌의 목소리를 가장 잘 기억할 수 있는 곳에 계속 머물기위해 어떤 계절이든, 얼음이 깔려 있든 미끄럽든 그 계단을 힘겹게 올라갔다. - P247

그는 비극을 죄로 바꾸어야만 했다. 벌어진 일에서 필연성을 찾아야만 했다.
유행병이 생겼고 그에게는 그것을 설명할 이유가 필요하다. 그는 왜냐고 물어야만 한다. 왜? 왜? 그것이 의미 없고, 우연이고,터무니없고, 비극적이라는 말로는 만족하지 못한다. 그것이 급격히 증식하는 바이러스라는 말로는 만족하지 못한다. 대신 그는, 이 순교자는, 왜에 미친 이 사람은 필사적으로 더 깊은 원인을 찾으며, 그 왜를 하느님이나 그 자신 안에서 발견하거나, 아니면 신비하게도, 불가사의하게도, 그 둘이 무시무시하게 합쳐져 생겨난 단일한 파괴자에게서 찾는다. 그가 그의 삶을 시들게 해버린 고통들을 쌓아가는 것에 내가 아무리 공감한다 해도, 그것은 어리석은 오만, 의지나 욕망의 오만이 아니라 환상적이고 유치하고 종교적인 해석의 오만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전에도 들어보았고 이제 버키 캔터처럼 대단히
품위 있는 사람으로부터도 들을 만큼 들었다.
- P266

"나는 애들을 돕고 싶었고 애들이 강해지게 하고 싶었어." 그가 마침내 말했다. "하지만 그러기는커녕 돌이킬 수 없는 해만 입히고 말았지." 그 생각 때문에 그는, 그 자신은 해를 입을 만한 짓을 한 적이 없는 사람임에도, 수십 년 동안 말없이 고통을 겪어왔다. 그는 이 땅에서 수치스럽게 
칠천 년을 살아온 사람처럼 그 순간을 돌아보았다.  - P272

그러나 세상에서 망가진 착한 소년만큼 구원하기 힘든 사람은 없는 법이다. 그는 너무 오랫동안 혼자 자신만의 상황 감각을 키워왔기 때문에 또 간절하게 갖고 싶어했던 모든 것을 갖지 못하고 살아왔기 때문에 내 힘으로는 그가 자기 삶의 끔찍한 사건을 해석하는 방식을 몰아낼 수도 없고 그와 그 사건의 관계를 바꾸어 놓을 수도 없었다. - P274

.... 챈슬러 놀이터와 인디언 힐 양쪽에 초래된 대재난은 그의눈에 자연의 악의에 찬 부조리가 아니라 그 자신이 저지른 큰 범죄로 보였고, 이런 생각 때문에 그는 자신이 한때 소유했던 모든것을 내놓고 인생을 망쳤다. 버키 같은 사람의 죄책감은 남이 보기에는 터무니없지만, 사실 불가피한 것이다. 그런 사람은 구제할 수 없다. 그가 하는 어떤 일도 그가 안에 품은 이상에는 이를수 없다. 그는 자신의 책임이 어디에서 끝나는지 절대 모른다.
그는 절대 자신의 한계를 믿지 않는데,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체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엄격한 선을 천성적으로 짊어지고있어, 자신에게 어떤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 반드시 죄책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 불구인 남편을 얻는 것을 막는 데서 가장 큰 승리감을 맛보며, 그녀를 포기함으로써 자신의 가장 깊은 욕망을 부인
하는 것은 영웅적 행동이 된다. - P274

평소와 마찬가지로 그는 모든 조심성을 발휘하여 안전을 위해어느 시점에는 누구도 운동장으로 뛰쳐나오면 안 된다고 말했다. 우리는 선 자리에서 모든 것을 지켜봐야 했다. 그는 이 점을 두 번이나 강조했다. 그는 그렇게 진지할 수가 없었으며, 그 진지함은 이 일에 대한 그의 헌신의 표현이었다. - P279

이윽고 그는 창을 던졌다. 그가 공중에서 창을 놓을 때 우리는그의 모든 근육이 불거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는 힘을 쓰느라 목이 졸리는 듯한 신음을 토했다(그뒤로 며칠 동안 우리 모두그 소리를 흉내내며 돌아다녔다). 그것은 그의 본질을 표현하는 소리였다-최고를 향해 노력하는 적나라한 함성. 창이 그의 손에서 날아오르는 순간 그는 균형을 잡으려고, 자신이 스파이크로 흙에 새겨놓은 파울라인을 넘지 않으려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창이 운동장 위에서 높이 큰 호의 궤적을 그리는것을 계속 지켜보았다. 우리 누구도 바로 우리 눈앞에서 운동선수의 움직임이 그렇게 아름답게 펼쳐지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 P279

창은 50야드 선을 넘어 계속, 계속 날아가 상대편의 30야드 라인을 한참 지나갔으며, 이윽고 아래로 내려가다 땅에 부딪히자 뾰족한 금속 끝이 날아오던 힘에 밀려 예각으로 땅을 파고들며 자루가 부르르 떨렸다. - P279

우리는 큰 소리로 환호하며 앞으로 뛰쳐나갔다. 창이 그리는 모든 궤도는 캔터 선생님의 유연한 근육에서 나왔다. 그의 몸 - 발, 다리, 엉덩이, 몸통, 팔, 어깨, 심지어 굵은 그루터기 같은 짧고 단단한 목까지-이 조화롭게 움직여 창을 날리는 동력이 된것이다. 우리 놀이터 감독이 양식을 찾아다니던 평원에서 잡아먹기 위해 사냥을 하고 손아귀의 힘으로 야생을 길들이는 원시인이 된 것 같았다. 우리는 어떤 사람에게 그렇게 경외심을 느낀적이 없었다. 그를 통해 우리 소년들은 동네의 작은 이야기를 떠나 우리 옛 남성의 역사적 서사시에 진입했다. - P280

그는 그날 오후 여러 번 창을 던졌는데, 모든 
던지기가 매끄럽고 강력했으며, 그때마다 외침과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크게 울려퍼졌고, 매번 던질 때마다 창은 그전보다 몇 야드 더 먼 곳에 떨어져 우리를 기쁘게 했다. 창을 높이 들고 달리다 창을 든 팔을 몸 뒤쪽으로 쭉 당기고, 이어 그 팔을 앞으로 쑥 내밀며 어깨위 높은 곳에서 창을 놓을 때ㅡ 뭔가 폭발하는 것처럼 창을 놓을때 ㅡ그는 우리에게 무적으로 보였다. - P28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모든 것이 거기 있었다 - 함정임의 유럽 묘지 기행
함정임 지음 / 현암사 / 202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바람이 분다. 살려고 해야 한다!

  거대한 바람이 내 책을 펼쳤다가 덮고

  부서지는 물결은 바위에서 용솟음친다.

    ... ...

  날아가라, 온통 눈부신 책장들아!

  부숴라, 파도야.

  부숴라, 내 환희의 물결로

  돛배들 쪼아대던 이 고요한 지붕을.

    ... ...

  아름다운 하늘, 진정한 하늘이여, 변해가는 나를 보라!

  (중략)

  나는 이 눈부신 공간에 나를 맡기니

  죽은 자들의 집 위로 내 그림자가 지나간다.


            ㅡ 폴 발레리, 「해변의 묘지」



함정임 작가의 《모든 것이 거기 있었다》의 부제가 '함정임의 유럽 묘지 기행'이다. 폴 발레리의 장시長詩 「해변의 묘지」를  읽고 이 시 한편에 홀려- 자그마치 8 년을 기다려 - 남프랑스 지중해 연안의 언덕에 펼쳐진 시인의 묘지를 찾아간다. 결과적으로 소설이 본업인 작가에게 또 하나의 길을 열어준 셈이 되었다. 대학 강의실에서 처음 접한 원서에 찍힌 '해변의 묘지'는 흑백으로 찍혀 있었는데 흑백에다 질이 좋지 않은 종이였음에도 작가에게는 그 바다가 폴 발레리의 시구처럼 언제나 다시 시작하는 바다, 죽음 너머 생명이 잉태되는 바다가 선명한 색깔로 각인되었다. 그렇게 각인된 바다, 남프랑스 지중해 연안의 작은 도시 세트 항과 

생피에르 언덕의 해변 묘지는 무한하게 열린 푸른 하늘과 바다를 향해 열려있었다. "눈부시게 퍼져나가는 햇살에 사로잡혀 바다는 푸르름을 해저 깊숙이 가라앉히고 있었다."(352쪽) 묘지는 약도에도 없었고 숨바꼭질 하듯 헤매는 사람들에게 단지 사이프러스 나무를 찾아가라는 현지 여인의 말을 따라 다시 힘을 내본다. 과연 폴 발레리의 묘는 사이프러스 나무를 배경으로, 그 너머로 푸른 하늘과 바다를 배경으로, 이단 묘석의 위쪽 묘석 테두리에 '폴 발레리'라는 이름을 이고 있었다. 머나먼 동양의 한 여자를 프랑스 남서부 끝 지중해안 언덕까지 이끈 폴 발레리라는 이름 하나... 그 이름을 마주하는 짧은 몇 분의 시간이 영원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고. 그리고 환청인듯 사이프러스 울울히 서 있는 등 뒤에서 한 영혼이 빈약한 어깨를 어루만지듯 말을 걸어오는 것처럼 느껴졌다니...




  "오, 사색 뒤에 오는 보상. 신들의 고요에 던져진 그토록 오랜 시선." 

화답으로 폴 발레리의 시구를 음송하며 작별을 고한 시간, 그 순간들을 가만히 생각해본다. 작가는 어쩌다가 이토록 묘지 기행에 빠져 버렸을까. 도저히 헤어나올 수 없는 신비한 마력에 빠져 버렸으니 말이다. 30 여 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쉬지 않고 일을 하고 글을 쓰고 가정을 꾸리면서 작가들의 묘지를 찾아 다녔다. 폴 발레리의 묘지를 시작으로 파리의 몽파르나스 묘지, 팡테옹, 몽마르트르 묘지, 페르 라세즈 묘지, 그리고 반 고흐를 찾아 암스테르담과 아를,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만나기 위해 찾아 간 빈치 마을과 앙부아즈 성 예배당에도 갔다. 알베르 카뮈의 영면처 루르마랭, 아일랜드의 예이츠와 이니스프리 호수, 셰익스피어의 고향과 이탈리아 베로나의 줄리엣 묘, 러시아 작가들의 묘지와 토마스 만의 베네치아,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 크레타 섬을 돌고 다시 돌고 돌아 프라하와 드레스덴, 음악가들의 고향 빈 중앙 묘지에도 갔다. 사진으로 만나는 작가들의 묘지는 아름답다. 삭막하고 복잡한 납골당에 안치된 우리의 묘지 문화와는 너무 다르다. 묘지이면서 쉼의 공간이고 시민들의 휴식처이자 울창한 숲을 자랑하는 거대한 공간들이기도 하다. 삶과 죽음이 이렇게 맞닿아 있다는 것이, 그리고 죽음이라는 것이 이토록 친근한 공간으로의 이동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죽음이 결코 두려운 일만은 아닌 것 아닐까, 혹은 영원한 휴식에 드는 이 묘지라는 공간이 주는 안정감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희석해주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된다. 




누구든... 파리의 몽파르나스 묘지를 들어서면 제일 먼저 만나는 장 폴 사르트르와 시몬 드 보부아르를 만난다. 그들의 묘지가 정문 초입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란다. 처음엔 사르트르(1905~1980) 혼자였지만 6년 후 보부아르(1908~1986)가  영면에 들면서 합장이 되었다. 계약 결혼 관계였지만 살아 생전 한 공간에 살지 않았던 사람들이고 여행을 가거나 호텔에 방을 얻더라도 나란히 각자의 방을 얻고, 같은 구역의 각자의 아파트에서 생활하고 각자의 연인들을 거느리기도 하면서 51 년 간 독특하고 자유로운 동거를 이어간 사람들인데 죽어서는 이제 하나의 묘석 아래 "꼼짝없이" , '영원히' 묶이게 된 것이다. 사후에 그들의 묘를 합장한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그러한 의문을 가지고 보는 그들의 합장묘여서 묘한 감정이 들었다. 단순하지만 아름답게 장식된 베이지 톤의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비석에 그들의 이름이 새겨졌고, 관람객들이 가져다 놓은 듯한 묘석 위에 장식된 꽃화분이 끊이지 않는, 죽어서도 사랑받는 두 사람... 죽어서도 살아서도 변함없이 영원히 함께 하길... 그 외에도 마르셀 프루스트의 묘가 있는 페르 라셰즈와 일리에콩브레의 프루스트 박물관과 그의 작품에서 발베크로 호명되는 카부르의 그랑 오텔, 프루스트 사후 100주년을 기념하여 개관한 박물관(일명 벨 에포크 박물관), 파리의 프루스트가 태어난 집 등도 기억에 남는다. 프루스트 투어로도 프랑스 여행은 오래오래 기억에 남는 여행이 될 것이다. 사실 함정임 작가가 30 여 년 간 열정적으로 다녀왔던 작가들의 묘지와 생가와 작품과 인생의 이야기들이 너무 방대해서 누구 한 작가를 기억해야지 하는 생각을 하기가 힘들다. 함정임 작가가 직접 찍어서 수록된 사진들을 보는 재미도 결코 적지 않다. 여행을 한다면 여행 안내서로도 부족함이 없다. 한 장, 한 장 넘기며 읽어 나가다보면 500 페이지가 넘는 이 책이 결코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 많은 작가와 작품과 인생과 묘지들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묘지를 콕 찍어 말할 수 있을까??? 당연히 있다! 가서 만나고 싶은 작가의 묘지가 너무 많아서 못 고를 거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파리의 페르 라셰즈에서 몽파르나스, 팡테옹, 그리고 그나마 내가 다녀온 몇 안되는 곳이어서 더 기억에 남았던 토마스 만의 작품의 배경이었던 이탈리아의 베네치아, 반 고흐의 네덜란드와 예이츠의 아일랜드까지, 또 더 멀리 베토벤과 슈베르트, 쇤베르크의 오스트리아와 독일과 체코의 프라하와  또 내가 좋아하는 작품인 『그리스인 조르바 』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크레타 섬에서 만나는, 제대로 된 십자가도 없이 엉성한 나무 십자가와 바람에 바랜듯한 검은 대리석 - 묘지와 러시아의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만나는 안톤 체호프와 니콜라이 고골의 묘지 등등. 참 많이도 있었지만... 




  "누군가의 마음 상태를 알려면 그 사람의 방에 가보라. 누군가의 생애, 그 사람의 기질을 알려면 그 사람의 묘지, 영면처에 가보라. 그 동안 수차례 찾아간 프루스트, 베케트, 카뮈, 사르트르와 시몬 드 보부아르, 뒤라스, 보들레르, 랭보 등의 묘지 앞에서 터득한 내 나름의 진실이다."(410쪽) 이 말에 격하게 동의~~~! 사랑하는 작가의 묘지를 찾아 멀리 러시아까지 날아간 함 작가는 이렇게 글을 시작했다.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하늘 아래 새소리뿐! ...... 내가 서 있는 곳은 러시아의 작은 마을에 있는 톨스토이의 영지領地의 숲길. 6월 28일 아침 9시, 모스크바에서 남쪽으로 180킬로미터 떨어진 툴라라는 도시로 떠났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툴라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톨스토이가 태어나고 묻힌 야스나야 폴랴나 마을로 향했다. ..."(417쪽) 톨스토이의 고향이자 영지가 있는 야스나야 폴랴나 마을이라는 지명은 톨스토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익히 알고 있는 워낙 유명한 마을이지만 막상 영지로 들어가는 길 옆의 자작나무 오솔길과 오솔길 끝 톨스토이의 하얀 집을 보는 순간 함 작가의 저 문장들이 가슴에 콕 박히면서 뭔지 모를 감동이 밀려 오고 있었다. 역시 이 작가는 죽음에 있어서도 내가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에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졌다. 소설가에서 사상가로 나아가는 과정에 무소유를 실천하였고 "슬퍼하지도 생각하지도 말고, 아무것도 세우지 말고 그저 소박하게 묻어달라던 톨스토이, 하늘을 사랑하여 하늘을 잘 보이게만 해달라고 당부했다던 톨스토이" 유언에 따라 정말 그의 묘에는 묘비명도 상석도 하나 없고 그저 하늘과 새소리, 그리고 초록의 자연뿐. 내가 느끼기에도 그랬지만 함 작가도 "지금까지 우여곡절을 겪으며 찾아갔던 세상의 수많은 예술가들의 무덤 중 가장 자연스럽고 숭고했다"고 적고 있다.




수많은 작가들의 묘지를 찾아다니다 보면 묘비에 새겨넣은 아름다운 문장들을 만나기도 한다. 작품들만큼이나 무덤의 형식이나 묘비명들이 개성적이었는데 그 중 함 작가는 가장 좋아하는 묘비명으로 많고 많은 묘비명 중에서 단 두 작가를 꼽았다. 한 사람은 아일랜드의 민족시인인 예이츠이다. 예이츠의 묘지는 더블린의 북서쪽 끝 슬라이고 항 근처의 벤벌빈이라는 기이한 형태의 산 아래 드럼클리프 마을의 세인트 콜롬바즈 패리시 교회 뒤뜰에 있다. 한반도에서 아일랜드를 가기 위해서는 지구를 반 바퀴나 돌아야 하는데 다시 예이츠의 묘지를 찾아가는 길을 설명하는 것도 이리 어렵다. 하지만 예상보다 평범했던 이니스프리 호수와 두고두고 기억할 아름다운 묘비명을 남겼으니 뜻깊은 여행이 아니었을까!  "Cast a cold Eye On Life, on Death. Horseman, pass by!"(삶에도 죽음에도 차가운 눈길을 던져라. 말 탄 자여 지나가거라!)  또 한 명의 작가는 그리스 에게해 크레타 섬에 있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이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문장을 읽는 즉시 『그리스인 조르바 』가 떠오르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진정한 자유인 조르바의 살아 있는 심장을 품은 채 대성곽의 기단 위에 잠들어 있었다. 『최후의 유혹 』으로 그리스 정교회로부터 파문당한 탓에, 그의 묘석에는 석비 대신 가로세로 길주름한 나무 십자가가 엉성하게 세워져 있었다."(462쪽) 그 모습이 마치 '키가 크고 몸이 마른' 조르바가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춤을 추고 있는 형상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의 작품과 그의 생애와 너무도 꼭 맞춘 듯한 묘지이자 묘비명이다.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벗 삼아(근데 어마무시 사진까지 수록되어 있어 이 책 진짜 무겁다 ㅠㅠ) 이 아름다운 작가들의 묘지를 찾아가는 날이 나에게도 오지 않을까... 함 작가처럼 간절히 바란다면 이루어지는 날이 올 것이다. 나도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지에 가고 싶다. 간절히. 가서 내 눈으로 그의 묘비명을 보고 싶다. 읽을 수는 없겠지만... 무슨 내용인지는 내가 다 아니까 아무 문제 없다. 윽... 생각만 해도 전율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버키가 자리에 누워 자신은 배제된 전쟁에 나가 프랑스에서싸우고 있는 데이브와 제이크를 생각하며 잠을 이루지 못하는동안 비가 캐빈 지붕을 두드려대기 시작했다. 그는 어젯밤 바로 이 침대에서 잔 뒤 징집병으로 전쟁에 나간 어브 슐랭어를 생각했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지만 자신을 제외한 모두가 전쟁에 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싸움에 끼지 않아 목숨을 보전하게 된것, 유혈을 피한 것-다른 사람 같으면 혜택이라고 생각할지도모르는 것들을 그는 고통으로 여겼다. 할아버지는 그를 두려움을 모르는 전사로 키웠고, 언제나 튼튼한 몸으로 자신이 옳은 것을 방어하는 책임감이 아주 강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도록 훈련시켰다. 하지만 그는 지금 세기의 투쟁, 선과 악 사이의 세계적 갈등과 마주하여 아주 작은 역할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 P176

그러나 그에게는 싸워야 할 전쟁, 놀이터라는 전장에서 벌어지는 전쟁이 주어졌고, 그는 그 전쟁에서 부대를 버리고 마샤에게로, 인디언 힐의 안전으로 탈영했다. 유럽이나 태평양에서 싸우지 못한다 해도 뉴어크에 남아 위험에 처한 아이들과 더불어그들의 폴리오 공포와 싸울 수는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위험이 없는 이 피난처에 와 있었다. 뉴어크를 떠나 좁은 비포장도로의 머나먼 끝에 있어 세상으로부터 감춰져 있고, 숲으로 위장되어 공중에서도 보이지 않는, 외딴 산꼭대기의 여름 캠프로 왔다ㅡ그래서 여기서 무엇을 하는가? 아이들과 논다. 그것도 행복하게! 하지만 행복을 느낄수록 수치심도 강해졌다. - P176

 이곳에서 그는 하루가 끝나면 높은 다이빙대에 올라가 평화롭고 고요하게 다이빙을 할 수 있었다. 이곳은 그가 집 근처 동네에서 날뛰는 살인마를 피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피난처였다. 이곳에는 데이브와 제이크가 가지지 못한, 챈슬러 놀이터의  아이들이 가지지 못한, 뉴어크의 모든 사람이
가지지 못한 모든 것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에게는 그를 살아가게 해줄 양심이 없었다. - P177

하지만 섬에서 보낸 저녁이 행복하지 않게 끝난 터이니 마샤는 그가 뉴어크로 돌아가는 것을 공격으로, 어떤 식으로든 그녀에게 ‘징벌‘을 내리는 것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을까? 그가 내일 짐을 싸서 떠난다면 그것은 그들의 계획에 어떤 영향을 줄까?  - P178

 나는 여기 있어, 그는 생각했다. 나는 행복해-그는 너무 행복한 나머지 그의 발에 푹신푹신하게 밟히는 흠뻑 젖은 풀이 짓이겨지며 내는 절벅절벅 소리에도 기운이 솟아올랐다. 다 여기 있어! 평화! 사랑! 건강! 아름다움! 아이들! 일! 여기 그대로 남는 것 외에 달리 어쩐단 말인가? - P181

"할머니, 유진이에요. 무슨 일이에요? 괜찮아요?"
"나는 괜찮아. 몇 가지 소식이 있어. 그래서 
캠프로 전화를 한거야. 놀라게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네가 바로 알고 싶어할 것같아서 좋은 소식은 아니야, 유진. 그렇지 않으면 장거리전화를 하지도 않았겠지. 비극이 또 생겼어. 개런직 부인이 몇 분 전에 엘리자베스에서 전화를 했더구나. 너하고 얘기를 하려고."
"제이크로군요." 버키가 말했다.
"그래." 그녀가 말했다. "제이크가 죽었어."
"어떻게요? 어떻게?"
"프랑스에서 전투중에." - P20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5. 오르베르쉬르우아즈에서 세트까지
ㅡ정오의 태양 아래 깃드는 고독 中.
‘휘몰아치는 외로움과 광휘의 여정ㅡ반 고흐를 따라
암스테르담에서 아를,파리,오베르쉬르우아즈까지‘

긴 겨울 여행의 끝을 암스테르담으로 결정한 것은
반 고흐를 비롯해 몇몇 그곳 출신 화가들의 족적을
 밟아보기 위해서였다. 20대의 끝을 향해가던 어느 여름밤 나는 파리에서 반고흐 Vincent Willem van Gogh,1853~1890의 <해바라기>(1889)를 보기 위해 야간열차를 탔었다. 파리-암스테르담 간 열차의 밝아오는 여명 속에서 나는 무엇이 나를 이토록 밤이 다하도록 열렬하게 달려가도록 만드는 것인지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었다. 달려가고자 결심하는 순간마다 ‘바로 그것!‘이었던, 그러나 정작 달려가면서, 또 달려가 마주서서는 ‘진정 그것!‘인가를 회의하던 청춘 시절의 일이었다.  - P264

그날 <해바라기>는 나에게 무엇이었던가. 단지 나는 반 고흐의 <해바라기>를 보았다는 것일 뿐, 그것 말고는 어떤 것도 의미가 없었다. 단지 그것을 위해서 거금을 들여서 야간열차를 타고 하루 이틀을 바친단 말인가. 때로 떠났던 곳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타인들에게서 간혹 거북하게 느꼈던 지적인 허영이나 무모함이 오히려 나 자신에게서 더 크게 발휘된 결과는 아니었는지 씁쓸하게 반추하곤 했다. - P264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 한때의 지적인 허영과무모함 또한 내 지난 삶의 소중한 자산이어서, 치열하고도 숭고한 순간으로 되살아나는 것이었다. 반 고흐는 <해바라기>를 지속적으로 그렸고, 암스테르담 이후 나는 파리, 런던, 뉴욕, 뮌헨 등 발길 닿는 데마다 그의 <해바라기>를 찾았다. 무수히 떠나기를 꿈꾸면서 겪었던 마음의 황홀한 떨림,
<해바라기>를 향해 달려가던 그 뜨거웠던 여름 이후, 나는 시간만 나면, 아니 어떻게 해서라도  시간을 내어 전 세계를 떠도는 이방인이 되었다. - P26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4. 돌에 새긴 이름, 영원의 노래-페르 라셰즈 묘지
中 ‘공간기록자의 벽에 깃든 생生ㅡ조르주 페렉‘을 읽는다. ‘공간기록자‘ 라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작가이긴 하지... 페렉의 작품을 읽고 나면 ˝그들과 함께 파리에 오래 산 것처럼 거리와 골목, 계단과 문, 벽과 창문, 창문과 창문 밖 풍경까지 세밀하게 알고 있는 듯한 친밀감을 느끼게 된다˝고 생각한다.
이 많은 작가들의 작품을 두루 섭렵하고 그들의 묘를 찾아 기록한 함정임 작가도 공간 기록자이며, 한편으론 그 열정이 참 대단하단 생각이 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