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초인종 소리를 듣고 나간 문지기의 아내가 
"신사 한 분이 숙녀분과 함께 오셨습니다. 선생님." 
하고 알렸다. 나는 그즈음 늘 그랬듯이 - 소원이 생각을 낳는 법이므로 바로 초상화를 그려 달라고 부탁할 남녀를 떠올렸다. 실제로 그들은 초상화를 부탁하러 온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원하던 부탁은 아니었다. 첫눈에 두 사람은 어느 모로 보나 초상화를 부탁할듯 보였다. 
신사는 50세 정도였는데, 키가 훌쩍 크고 자세가 아주 꼿꼿한 데다, 약간 백발이 섞인 턱수염을
 기른 모습이 지금 입고 있는 진회색 코트와 썩 잘 어울렸다. 코트나 턱수염을 보면, 직업적 관점에서 내가 이발사나 재단사라는 뜻은 아니다. 유명 인사처럼 보이기도 했다. 흔히 유명 인사가 저토록 인상적일 수 있다면 말이다. 하지만 내가 살면서 알게 된 진실은, 잘생긴 사람치고 유명 인사는 거의 없다는 점이다.  - P7

밀림의 야수

그를 깜짝 놀라게 한 그 이야기가 왜 나왔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아마 그녀와 재회한 뒤, 그 저택을 천천히 거닐다가 무심코 내뱉은 말 때문이었으리라. 그는 한두 시간 전에 다른 집을 방문했다가, 친구들과 함께 그 당시 그녀가 머물던 저택으로 온 참이었다. 그는 언제나처럼 사람들 속에 묻혀 있었다. 그런데 먼저 방문했던 집의 손님이 모두 초대받은 바람에 그는 덩달아 따라왔고, 이 저택에서 점심 식사를 하게 되었다. - P47

진정으로 그녀를 사랑했다면 운명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 인생다운 인생을 살 수 있었다. 그를 위해 살았고 그를 사랑했던 그녀의 인생이야말로 삶다운 삶이었다. 그녀가 어떠한 열정을 품고 살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반면 그는 소름 끼칠 정도로 이기심에 사로잡힌 채 자신의 필요에 따라서만 그녀를 판단했다. (그 사실이 그를 숨 막히게 했다.)  - P112

돌연 그녀의 말이 다시 떠오르면서 온갖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가 늘 기다려 온 야수는 정말로 숨어 있다가 운명의 순간에 튀어나온 것이었다. 바로 그 쌀쌀한 4월, 해질녘에. 그때 그녀는 병을 앓았고 창백하게 여위었지만 매우 아름다웠다. 그때라도 그가 알았더라면 그녀의 아름다움을 회복해 주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아픈 몸을 의자에서 일으켜세운 뒤 그의 앞에 서서 그가 상상하고 추측할 수 있게 해 주었다. - P112

 하지만 그 상황에서조차 그는 전혀 헤아리지 못했고, 결국 야수는 튀어나오고 말았다. 그녀가 절망하며 돌아선 그 순간 야수는 뛰쳐나왔고, 그가 그녀의 집을 나서려 할 때 운명의 징표 역시 떨어질 장소에 떨어져 버렸다. 그는 자신의 두려움을 정당화해 왔다. 그것이 바로 그의 운명이었다. 그는 운명이 정한 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확실하게 실패했다. 그가 몰랐으면 좋겠다는 그녀의 말이 떠오르자, 이제야 신음이 새어나왔다. 이런 끔찍한 깨달음, 이것이야말로 앎이었다.  - P112

그 사실을 알고 나니 눈물마저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그 앎을 붙들려고 했다. 아니, 그것을 눈앞에 똑바로 세워 놓고 자기 안으로 받아들이고자 했다. 이미 너무 때늦고 처참했지만, 적어도 스스로가 살아 있음을 생생하게 느꼈다. 그러나 그 고통 때문에 구역질이
났다. 진실에 의해 적나라하게 드러난 자신의 모습에서 예정대로 실현된 운명의 끔찍한 형상을
본 느낌이었다. - P113

그는 자신의 삶이라는 밀림을 보았고, 거기에 숨어 있던 야수도 보았다. 그리고 그 끔찍하고 거대한 야수가 그를 덮치려고 공중으로 뛰어오르는 모습을 보았다. 눈앞이 깜깜해졌다. 그 야수가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본능적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환상 속의 야수를 피하기 위해 그는 본능적으로 무덤 위에 몸을 던졌다. - P113

밝은 모퉁이 집

"사람들은 내 ‘생각‘이 뭔지 일일이 묻죠." 스펜서 브라이든이 스테이버튼 양에게 말했다. "성의껏 대답하는 편이에요. 때론 되묻기도 하고 회피하기도 하고 얼렁뚱땅 미루기도 하면서 말입니다." 그는 계속 말했다. "사실 묻는 사람에게 내 대답은 별 의미가 없어요. 묻는다고 속내를 다 털어놓을 수는 없잖아요. 그러나 굳이 내 ‘의견‘을 밝히자면, 뭐 나 자신에 대한생각만으로도 벅찹니다." - P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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