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생이 읽은 셰익스피어 선생의 책이라고는 4대 비극 정도. 불쌍한 인간들의 이야기. 불쌍한 햄릿, 역시 불쌍한 오셀로, 역시 불쌍한 리어왕, 역시 불쌍한 멕베스 정도 읽은 것 같다. 44편에 달하는 선생의 작품 중에 읽은 것이 4편에 불과하다고 소생이 셰익스피어 선생의 책을 전부 소장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더더군다나 불초 소생은 모범장서가가 아니던가 이 말씀이올습니다. 네....

 

참고로 여기서 부끄러운 고백을 하나 하자면, (전에도 한번 부끄러운 고백을 했던 기억이 나는데, 부끄러운 고백을 즐겨하는 것이 소생은 필시 근본이 후안무치한 종자임에 틀림없다.) 소생은 영어에는 까막눈이어서 영문판 셰익스피어는 아마 평생토록 볼 일이 없을 것이지만, 역시 장서가로서의 사명감과 소명의식으로 장렬하게 불타올라 선뜻 구입하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네...

 

 

 

 

 

 

 

 

 

 

금빛 찬란한 영문판 셰익스피어 전집 책등에 어리는 돼지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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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02-06 17: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진들이 다 너무 근사해요!

붉은돼지 2020-02-06 18:00   좋아요 0 | URL
어머! 고명하신 다락방님의 안목은 역시 드높으십니다. 호호호
소생이 밤을 새워 찍은 수천 장의 사진 중에 엄선한 것들입니다. ㅎㅎㅎ

nama 2020-02-06 18: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름답습니다.
저는 10편 정도 읽었는데 달랑 햄릿 한 권 가지고 있지요.
영문판은 전공한 사람도 어려워서 번역본 비교하면서 읽어요.

붉은돼지 2020-02-06 19:5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나마님~
저야 뭐 영문판은 읽을 일이 없지만 ㅋㅋ 번역본은 좀 더 읽어봐야 겠습니다.

oren 2020-02-07 09: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금빛 찬란한 영문판 셰익스피어 전집 책등에 어리는 ‘돼지의 그림자‘가 예술이네요!!

저는 민음사에서 운문 번역으로 출간중인 책들을 중심으로 6할 정도(24편/37편) 읽었는데, 전 10권으로 출간 예정인 그 <셰익스피어 전집>이 딱 절반까지만 출간되고 나서 여태까지 감감무소식이라 너무 답답하답니다.(1,4,5,7,10권이 마지막으로 출간된 지가 2016년 4월이었는데, 정말로 나머지 5권이 완간되어 나올런지도 걱정입니다.)

암튼 셰익스피어의 전 작품을 단 한 권의 책으로 온전히 소유하는 기쁨이 어떤 느낌일지, 거기다가 영문판까지 구색에 딱 맞게 갖춰 놓은 기쁨이 어떨런지는 책등에 어리는 돼지 아저씨의 도도한 포즈만 봐도 넉넉히 짐작이 갑니다.^^

붉은돼지 2020-02-06 22:00   좋아요 1 | URL
제가 허영와 물욕으로 출렁이는 돼지여서 그런지 서양 책의 그 가죽장정과 금박입힌 책등 같은 것들은 정말 군침이 줄줄 흐르면서 탐이 납니다. .ㅎㅎㅎㅎ

저도 민음사의 셰익스피어 전집을 눈여겨 보고 있었습니다. 제가 또 시리즈이나 전집에 사족을 못쓰는 성향이어서 이제나 저제나 어쩌나 하고 있었습니다. 절판되기 전에 장서가의 사명감으로 질러야할까 봅니다.

장서가의 한 철이 지나가면 다시 독서가의 계절이 오리라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셰익스피어도 찬찬히 읽어볼 생각입니다.

slobe00 2020-02-06 22: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파란 책은 나도 있는데~ 하며 들어와보니
찬란한 영문판 금박위로 비치는 영롱한 그림자에 홀리게 되네요
멋집니다~~~~~~♡

붉은돼지 2020-02-06 22:54   좋아요 0 | URL
오호호~ 파란 책을 가지고 계시다면 그럼 빨간 책도.....는 아니고.....
저 영롱한 금빛 책도 서둘러 마련하심이 ㅎㅎㅎㅎㅎㅎ

mini74 2020-02-06 23: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책은 원래 예뻐서 사는 것이지요 ㅎㅎ 넘 부럽습니다 ~

붉은돼지 2020-02-06 23:52   좋아요 1 | URL
그럼요 그렇죠 ㅎㅎ
뭐 읽어도 좋지만 예쁘면 일단 ok ㅋㅋ

moonnight 2020-02-07 08: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앜! 봐버렸네!ㅠㅠ 부럽습니다ㅠㅠ 파란책도 영문판도 너무나 아름답군요@_@;;; 금빛 찬란한 책등에 어리는 돼지의 그림자에서 빵 터집니다ㅎㅎㅎㅎ 역시 도도한 포즈 이유 있군요. 최고^^

붉은돼지 2020-02-07 11:17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달빛님 ㅋ
앞으로 더욱 장서에 매진토록하겠습니다 ㅎㅎ
 

 

소생이 소싯적에는 책 읽기를 몹시 즐겨 하루라도 부독서면 입안에 생형극이라. 글을 읽느라 끼니 거르기가 다반사요, 날밤 까기가 부지기수라. 문중의 일각에서는 큰 선비가 났다고 수군거리기도 하였으나 무심한 세월이 물같이 바람같이 무심하게 흐르는 동안에 촉망받던 어린 독서가는 문득 늙어빠진 장서가가 되어버리고 말았으니 오오 슬프구나. 어떤 눈 밝은 이가 앞날을 예측하고 어떤 어진 이가 인생을 장담한단 말이런가.

 

연이나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지난날 독서에 용진할 때에는 비록 읽은 책으로 인하여 작은 흉중에 감상의 파도가 주책없이 밀려왔다가 밀려가고는 하였으나 그것을 어떻게 붙잡아 두지를 못했음인데, 이제 장서가가 되고 보니 나날이 늘어나는 것이 서책이라, 누울 곳이 없어도 마음 편한 잠을 잘 수 있고, 비록 가정 경제가 풍비박산이 나도 내 손으로 어루만지고, 눈으로 보고, 혀로 핥고 빨고(이건 아니고), 물고 뜯고 씹고(이것도 아니고...) 하여 그 즐거움을 한없이 간직하게 되었음이니 장서가의 보람이라 할 것이오다.

 

하여 사단법인 대한출판문화협회가 선정한 2017년도 모범 장서가 5인방 중의 일인인 소생이 지난날 한때 독서가로서 열심 매진했듯이 오늘날 장서가로서도 역시 눈물나는 정진을 하고 있다는 것을 강호 독자 제현께 감히 아뢰옵고, 소생의 소장 목록 중에서도 특히 중지애지하는 바 사전류의 사진을 그 눈물 정진의 증좌로 여기에 올려 바치는 바이올습니다. 혹여나 행여나 뻔뻔한 축생의 자랑질에 심기가 상하신 독자 제현이 계시다면 주저말고 질정하여 주시길 바라나이다. 그것이 아니랍시면 따땃하고 자애로우신 말씀을 내려 주시와 소생이 돼지 털 한 터럭의 후회도 없는 그런 당당한 장서가의 길을 내달릴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을 주시길 앙망하나이다.

 

 

우리말 큰사전과 친일인명사전, 보고만 있어도 흐뭇하다.

 

 

 

소생 필생의 목표인 한한대사전 16권 모으기. 현재 스코어는 1,2,3권과 색인까지다.

 

 

DK 백과사전이 빠질 수 없다. 이것들도 열심히 사 모아야 한다.

 

 

 실크로드 사전과 그리스 로마 신화 사전. 실크로드 사전을 보면 돈황학 대사전 생각이 자꾸 난다.

언젠가는 구입할 것이다. 절판되지 말아야 할 텐데... 걱정이 많다.  

 

 

우리나라의 전통 무늬 시리즈도 일종의 사전이라고 하겠다. 이 책도 멋지다.  총8권인가 그런데 이제 3권 모았다. 절판 된 것도 있다. 걱정이 많다. 도서관 인식표가 붙어 있는 책은 중고품으로 구입한 것이다. 오해없으시길.    

 

 

1001 시리즈도 일종의 사전이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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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20-02-05 19: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머! 주먹대장이 보이네요~^^

붉은돼지 2020-02-05 19:19   좋아요 0 | URL
어멋! 역시 눈 밝으신 나인님 ~
한국만화걸작선 시리즈인데 저기에도 살 것들이 수두룩 합니다 ㅜㅜ

slobe00 2020-02-05 19: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어기 보이는 리더스다이제스트 20세기 대사건들은 시댁에서 가져와 저희집에도 있어요.. ㅋㅋ
모으시는 시리즈들 완성을 이루시길 기원합니다~

붉은돼지 2020-02-05 19:49   좋아요 1 | URL
저 책은 정말 오래된 책이죠. 거의 20~30년 전에 구입했던 것 같습니다. 따뜻한 격려의 말씀 너무 감사해요. 앞으로 더욱 열심히 사모으도록 하겠습니다 ㅋㅋ

프레이야 2020-02-05 20: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별별 백과사전 다 있네요. 무지 탐이 납니다요 ㅎㅎ 보기만 해도 배부른 모범장서가이십니다

붉은돼지 2020-02-05 20:12   좋아요 0 | URL
어머! 프레이야 님 감사합니다. 더욱 모범적으로 장서에 매진하겠습닌다.
아마 찾아보면 별에 대한 백과사전도 있을 겁니다. 호호호

nama 2020-02-05 20: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 <죽기 전에 꼭 봐야 할....MOVIES>는 없군요. 너무 낡아 너덜너덜해져서 학교 도서관에서 폐기처분하게 된 책을 모셔왔거든요. 이게 시리즈였군요. 역시 모범 장서가이십니다.

붉은돼지 2020-02-05 20:4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나마님 ~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서 죽지도 못할 것 같아요 ㅋㅋ

moonnight 2020-02-07 14: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리스로마 신화사전은 저도 갖고 있어요. 괜히 반갑네요. 호호^^

붉은돼지 2020-02-07 15:18   좋아요 0 | URL
저 사전들 중에 그래도 제일 활용도가 높은 게 바로 신화사전입니다.

김 석 2020-02-09 05: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거창에 四樂亭이 있는데 사의재란 서재의 이름이 참 좋습니다. 샬롬

붉은돼지 2020-02-09 21:09   좋아요 0 | URL
제가 가보지는 못했지만 사의재는 다산이 강진 유배시에 한때 기거했던 곳이라고 합니다. 거창에 있는 사락정에도 한번 가보고 싶군요~

랭구리 2020-03-10 1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사사...랑합니다!

붉은돼지 2020-05-27 09:47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ㅎㅎ

박선규 2020-05-25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대단하십니다. 몇 권이나 갖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붉은돼지 2020-05-27 09:48   좋아요 0 | URL
삼천 권은 넘고 사천 권은 안되는 것 같아요...
 

 

약속과 달리 무아위야는 아들 야지드에게 칼리프의 지위를 세습하려고 애썼다. 오랜 싸움을 통해 제국의 기반을 구축한 자신의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쩌면 공화국 로마가 제국이 되면서 더 큰 번영과 발전을 이루었듯이 이제 이슬람 공동체도 비잔틴이나 페르시아처럼 세습 군주제로 가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형식적으로는 일종의 부족 대표자 회의인 슈라를 통해서 야지드를 칼리프로 선출했다. 반발하는 사람들에게는 협박과 회유, 그리고 폭력이 가해졌다. 하지만 무아위야는 권력을 세습하지 않고 원로회의를 통해 지도자를 선출하던 정통 칼리프 시대의 전통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

    

무아위야에게 끝까지 저항한 귀족들이 있었는데, 4대 칼리프 알리의 둘째 아들 후세인, 초대 칼리프 아부 바크르의 아들 압달 라흐만과 외손자 압달라, 2대 칼리프 우마르의 아들 압달라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이들의 속마음을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전통에 따라 자신들에게도 칼리프의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무아위야의 아들 야지드가 칼리프로 즉위했을 당시 후세인은 50대의 나이로 야지드에 대한 충성 맹세를 거부하고 메카에서 피신 중이었다. 이때 쿠파의 주민들이 후세인에게 자신들의 지도자가 되어달라는 편지를 보내왔다. 쿠파는 과거 아버지 알리의 근거지로 무아위야 시절에 많은 박해와 홀대를 받았기 때문에 쿠파인들은 야지드의 세습을 반대했던 것이다.

   

680912일 후세인은 72명의 군사를 이끌고 쿠파를 향하여 메카를 출발했다. 72명이라고 하니 무슨 결사대나 최정예 특수부대를 상상하기 쉽지만 그의 무리는 군대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그야말로 오합지졸이었다. 72명 중에는 후세인의 아내와 아이들, 허리 꼬부라진 노년의 친척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일행 중 겨우 몇 명만이 무기를 들고 싸울 수 있는 연령대의 남자였다.

 

후세인 일행은 메카를 떠난 지 20일 만인 102, 바그다드 남쪽 80킬로미터 지점, 쿠파로부터 이틀 거리의 북쪽에 있는, 유프라테스 강에서 그리 멀지 않은 운명의 카르발라에 도착했다. 예언자의 둘째 손자가 거병했다는 소식을 접한 칼리프 야지드는 서둘러 군대를 출동시켰다. 야지드의 명령을 받은 라이(테헤란) 총독의 군대는 후세인이 도착한 다음날에 카르발라에 도착했다. 총독의 군대는 후세인의 오합지졸에 비해서는 압도적인 숫자였는데, 전해지기로 사백 명에서 무려 사만 명까지 이른다. 천 명이라고도 하고 삼만 명이라고도 한다. 물론 이 병력에는 부녀자나 허리 꼬부라진 노인은 없었다.

    

6801010일 마침내 전투가 벌어졌다. 후세인은 32명의 기병과 40명의 보병으로 군대를 배치하고 총독에게 일대일 대결을 요구했다. 한 사람, 한 사람 후세인의 전사들이 돌격해나가서 야지드의 군대와 싸웠다. 한 명씩, 한 명씩, 그들은 쓰러졌다. 후세인의 동지들이 모두 죽고 나자 후세인의 친척들이 후세인에게 싸우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후세인의 둘째 아들이 먼저 나가서 장렬하게 처형당했다. 이어서 후세인의 늙은 친족들이, 마지막으로 후세인도 같은 방법으로 죽음을 맞이하였다.

   

이렇게 해서 예언자의 손자와 증손자, 그리고 친척들이 모두 전사했다. 그것은 전투가 아니라 학살이었고 무엇보다도 순교였다. 시아 무슬림들은 후세인을 순교자들 중의 순교자로 부르고 있다. 이로써 참극의 현장이자 운명의 장소인 카르발라는 시아파의 성지로 거듭나게 된다. 모든 시아 무슬림들은 이날(1010)을 기념하는 아슈라라는 축제를 매년 열어 채찍으로 자신의 등을 후려치거나 칼로 자신의 머리를 쳐 피를 흘리면서 후세인의 죽음을 애도하고 또 그 통한의 날을 잊지않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 이상으로 이스탄불의 성 소피아 박물관 내부에 걸려있는 거대한 원판에 쓰여진 이슬람 캘리그래피 이름 8명에 대한 이야기를 마칩니다.

 

 

시아파 무슬림 순례자들이 무함마드의 손자 이맘 후세인의 순교를 되새기는 40일간의 추모 행사인 아르바엔을

기념하기 위해 이라크 카르발라의 알 아바스 사당 내부에 위치한 이맘 후세인의 무덤을 만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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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아파는 알리의 큰 아들 하산을 두 번째 이맘으로 보고 있다. 첫 번째 이맘은 당연히 알리이다. 알리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장남 하산은 자객을 처형했다. 알리의 유지를 받들지 않았다고 어떻게 하산을 책망할 수 있겠는가. 그가 자객을 용서하려고 해도 알리의 지지자들이 그를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다. 알리가 살해되고 장남인 하산이 잠시 그 뒤를 이었지만 그가 통치할 수 있는 영토는 쿠파 밖에 없었다. 하산이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지만 무아위야에게 참패를 당했다. 무아위야는 하산에게 거액을 주면서 안전을 보장할 테니 칼리프직을 포기하라고 했다.

 

하산은 무아위야와 조약을 체결했는데, 그 내용은 하산이 칼리프의 권리를 포기하는 대신에 무아위야는 하산과 그 추종자들의 안전을 보장하며 칼리프 직을 세습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하산도 권력을 세습하지 않겠다는 그 말을 믿지 않았을지 모른다. 무아위야는 알리가 수도로 삼았던 구파에 입성하여 주민들의 충성 서약을 받았다. 이제는 무아위야가 이슬람 전체의 통치자였다. 최초의 이슬람 세습 칼리프조 우마이야 왕조가 개창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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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리프 우스만을 살해한 폭도들은 메디나를 휘젓고 다니며 소동을 일으켰다. 이러한 혼돈과 무질서의 위태로운 상황을 수습할 수 있는 인물은 알리 외에는 없었다. 원로 무슬림들은 알리에게 칼리프직을 맡아달라고 간청했다. 예언자가 죽은 후, 세 차례나 그가 칼리프가 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던 움마가 이제 자신들이 세운 칼리프가 무슬림들에게 맞아 죽는 상황에 이르자 알리에게 통사정을 한 것이었다. 그는 지난 세 번의 칼리프 선출 과정에서도 그 결과를 받아들였듯이 이번에도 움마의 요구를 수락했다. 하지만 상황은 그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나빴다.

 

예언자가 세상을 떠나고 원로회의가 아부 바크르를 초대 칼리프로 추대하려고 할 때 그 자리에 알리는 없었다. 그때 알리는 죽은 예언자의 몸을 씻기고 있었다. 비통에 잠긴 채 장례 준비를 하고 있던 알리는 그런 회의가 열리고 있는 줄도 몰랐다. 그에게도 충분히 후계자의 자격이 있었고 또 그를 따르는 이들도 많았지만, 그는 원로회의의 결과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가 나서면 공동체는 분열될 터였다.

 

무함마드에게 알리는 특별했다. 알리의 아버지 아부 탈리브가 무함마드를 입양해 아들처럼 키웠으니 무함마드와 알리는 형제나 다름없었다. 더구나 알리는 예언자의 아내인 카디자 다음으로 이슬람을 받아들였으므로 남자로서는 최초의 무슬림이었다. 무함마드를 살해하려고 암살자들이 들이닥쳤을 때, 예언자를 대신해 그의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서 죽을 위험을 무릅쓴 사람도 알리였다.

 

또한 여러 차례의 전투에서 그는 마치 이슬람의 아킬레우스와도 같은 용맹스러운 전사임을 증명해 보였다. 양군의 대표 장수끼리 맞붙는 일대일 결투에 무함마드는 항상 무슬림 최고의 전사로 알리를 뽑아 내보냈다. 그리고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것, 무함마드에게는 아들이 없었고 딸은 몇 명 있었지만,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은 아들을 가진 예언자의 딸은 바로 알리와 결혼한 파티마 단 한 명뿐이었다. 알리의 아들들은 곧 무함마드의 손자였으며 예언자의 유일한 혈육이었다.

 

하지만 움마라는 종교 공동체가 반드시 왕조식 혈통 계승을 고집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게다가 당시 알리는 겨우 서른 살 정도였고 아부 바크르는 예순에 가까웠다. 당시의 아라비아 풍습으로 볼 때 서른 살의 남자가 예순의 남자를 대신해 지도자로 선출되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알리가 무함마드를 대신해 죽을 위험을 무릅쓴 것은 맞지만, 무함마드가 메카에서 메디나로 야반도주를 하면서 추적자들을 피해 동굴에 숨어있을 때 그의 곁을 지킨 사람은 아부 바크르였다.

 

아부 바크르와 알리 지지자들 사이의 이견에서 결국 이슬람의 분파, 즉 수니파와 시아파가 생겨났다. 일단의 젊은 무슬림들은 알리에게서 예언자와 비슷한 무언가 특별한 영적인 권위 같은 것을 느꼈다. 알리의 지지자들은 아랍어에서 단순히 일당을 의미하는 이름인 시아파로 발전했다. 이들은 오늘날까지도 알리가 예언자 무함마드의 유일하고 적법한 계승자였다고 확신한다.

 

거의 강압에 의해 칼리프에 오른 알리는 난국을 수습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알리는 일단 우스만이 임명한 부패한 총독들과 우마이야 일족의 사람들을 해직하고 봉토를 몰수하려고 했다. 하지만 다마스쿠스의 무아위야는 총독의 자리를 내놓기는커녕 오히려 칼리프를 살해한 자들의 처벌을 요구하며 새 칼리프에 반대하는 중심 세력이 되었다. 그는 다마스쿠스 거리에서 우스만이 살해당할 때 입고 있었다는 피 묻은 옷을 흔들어 보이며 군중들을 자극했다. 마치 금삼(錦衫)의 피를 연상시키는 이런 교묘한 연출은 군중들을 선동하는 데 아주 효과적이었다.

 

알리가 매우 종교적이고 도덕적이며 정의로운 사람이었다면, 무아위야는 매우 정치적이고 야심만만하며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두 사람의 성향이 이렇다면 결과는 이미 나와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현실 세계에서는 도덕주의자가 현실주의자를 당해낼 수가 없는 법이다. 다만 도덕주의자들의 위안은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나 있을 역사의 평가를 기대해 보는 것 밖에 없었다.

 

 

한편, 예언자의 부인이었던 미망인 아이샤가 무아위야 쪽에 가담했다. 아이샤는 세력을 모아 이라크 남부의 거점도시 바스라에 진을 쳤다. 예언자의 가장 사랑하는 부인과 예언자가 가장 아꼈던 사촌동생이자 사위 사이에 전쟁은 불가피했다. 아이샤가 낙타를 타고 군대를 지휘했기 때문에 낙타 전투로 불리는 전투가 벌어졌고 결과는 알리의 승리였다. 알리와 아이샤는 화해했다. 하지만 무슬림 간의 내전은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다마스쿠스에서 꾸준히 세력을 키워온 무아위야가 최후의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알리는 낙타 전투 후에 메디나로 돌아가지 않고 이라크의 쿠파에 자리를 잡았다. 657년에 시리아와 이라크의 경계이자 유프라테스 강 서안의 시핀에서 드디어 양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양측에서 수많은 사상자가 났지만 승패는 쉽게 결정되지 않았다. 전세가 불리했던 무아위야는 중재를 요청했고 더 이상 무슬림들의 피를 원치 않았던 알리는 협상에 동의했다.

 

알리의 이러한 결정은 알리 진영 내 강경파의 반발을 가져왔다. 알리 일파 중에서 더 젊고 더 급직적이었던 그들은 지도자의 나약한 모습에 실망하여 알리의 진영을 이탈했다. 혈통과 계보를 거부하고 반 알리, 반 무아위야를 표방한 이들은 떠난 자들이라는 뜻의 하리지파로 불렸다. 협상은 결론 없이 유야무야 끝났다. 무아위야의 입지는 강화되었고 반면에 칼리프인 알리의 권위는 실추되었다.

 

알리는 안으로는 하리지파, 밖으로는 무아위야의 이중의 적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결국 6611월 쿠파의 성소에서 예배를 드리던 알리는 하리지파가 보낸 자객에게 피습을 당했다. 자객은 독이 묻은 칼로 알리를 찔렀다. 죽어가면서도 알리는 복수를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알리는 661131일에 사망했다. 이로써 정통 칼리프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스탄불의 터키 이슬람  예술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책자. 코란인 듯 하다.  

제4대 칼리프 알리의 캘리그래피, 그의 풀네임은 알리 빈 아비 탈리브 빈 압둘 무탈리브 빈 하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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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0-02-01 15: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붉은돼지님 오랜만이네요~ 좋은 주말 되세요~

붉은돼지 2020-02-01 16:03   좋아요 0 | URL
초딩님 오랜만입니다. 감기 조심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