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리프 우스만을 살해한 폭도들은 메디나를 휘젓고 다니며 소동을 일으켰다. 이러한 혼돈과 무질서의 위태로운 상황을 수습할 수 있는 인물은 알리 외에는 없었다. 원로 무슬림들은 알리에게 칼리프직을 맡아달라고 간청했다. 예언자가 죽은 후, 세 차례나 그가 칼리프가 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던 움마가 이제 자신들이 세운 칼리프가 무슬림들에게 맞아 죽는 상황에 이르자 알리에게 통사정을 한 것이었다. 그는 지난 세 번의 칼리프 선출 과정에서도 그 결과를 받아들였듯이 이번에도 움마의 요구를 수락했다. 하지만 상황은 그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나빴다.
예언자가 세상을 떠나고 원로회의가 아부 바크르를 초대 칼리프로 추대하려고 할 때 그 자리에 알리는 없었다. 그때 알리는 죽은 예언자의 몸을 씻기고 있었다. 비통에 잠긴 채 장례 준비를 하고 있던 알리는 그런 회의가 열리고 있는 줄도 몰랐다. 그에게도 충분히 후계자의 자격이 있었고 또 그를 따르는 이들도 많았지만, 그는 원로회의의 결과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가 나서면 공동체는 분열될 터였다.
무함마드에게 알리는 특별했다. 알리의 아버지 아부 탈리브가 무함마드를 입양해 아들처럼 키웠으니 무함마드와 알리는 형제나 다름없었다. 더구나 알리는 예언자의 아내인 카디자 다음으로 이슬람을 받아들였으므로 남자로서는 최초의 무슬림이었다. 무함마드를 살해하려고 암살자들이 들이닥쳤을 때, 예언자를 대신해 그의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서 죽을 위험을 무릅쓴 사람도 알리였다.
또한 여러 차례의 전투에서 그는 마치 이슬람의 아킬레우스와도 같은 용맹스러운 전사임을 증명해 보였다. 양군의 대표 장수끼리 맞붙는 일대일 결투에 무함마드는 항상 무슬림 최고의 전사로 알리를 뽑아 내보냈다. 그리고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것, 무함마드에게는 아들이 없었고 딸은 몇 명 있었지만,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은 아들을 가진 예언자의 딸은 바로 알리와 결혼한 파티마 단 한 명뿐이었다. 알리의 아들들은 곧 무함마드의 손자였으며 예언자의 유일한 혈육이었다.
하지만 움마라는 종교 공동체가 반드시 왕조식 혈통 계승을 고집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게다가 당시 알리는 겨우 서른 살 정도였고 아부 바크르는 예순에 가까웠다. 당시의 아라비아 풍습으로 볼 때 서른 살의 남자가 예순의 남자를 대신해 지도자로 선출되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알리가 무함마드를 대신해 죽을 위험을 무릅쓴 것은 맞지만, 무함마드가 메카에서 메디나로 야반도주를 하면서 추적자들을 피해 동굴에 숨어있을 때 그의 곁을 지킨 사람은 아부 바크르였다.
아부 바크르와 알리 지지자들 사이의 이견에서 결국 이슬람의 분파, 즉 수니파와 시아파가 생겨났다. 일단의 젊은 무슬림들은 알리에게서 예언자와 비슷한 무언가 특별한 영적인 권위 같은 것을 느꼈다. 알리의 지지자들은 아랍어에서 단순히 ‘일당’을 의미하는 이름인 시아파로 발전했다. 이들은 오늘날까지도 알리가 예언자 무함마드의 유일하고 적법한 계승자였다고 확신한다.
거의 강압에 의해 칼리프에 오른 알리는 난국을 수습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알리는 일단 우스만이 임명한 부패한 총독들과 우마이야 일족의 사람들을 해직하고 봉토를 몰수하려고 했다. 하지만 다마스쿠스의 무아위야는 총독의 자리를 내놓기는커녕 오히려 칼리프를 살해한 자들의 처벌을 요구하며 새 칼리프에 반대하는 중심 세력이 되었다. 그는 다마스쿠스 거리에서 우스만이 살해당할 때 입고 있었다는 피 묻은 옷을 흔들어 보이며 군중들을 자극했다. 마치 ‘금삼(錦衫)의 피’를 연상시키는 이런 교묘한 연출은 군중들을 선동하는 데 아주 효과적이었다.
알리가 매우 종교적이고 도덕적이며 정의로운 사람이었다면, 무아위야는 매우 정치적이고 야심만만하며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두 사람의 성향이 이렇다면 결과는 이미 나와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현실 세계에서는 도덕주의자가 현실주의자를 당해낼 수가 없는 법이다. 다만 도덕주의자들의 위안은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나 있을 역사의 평가를 기대해 보는 것 밖에 없었다.
한편, 예언자의 부인이었던 미망인 아이샤가 무아위야 쪽에 가담했다. 아이샤는 세력을 모아 이라크 남부의 거점도시 바스라에 진을 쳤다. 예언자의 가장 사랑하는 부인과 예언자가 가장 아꼈던 사촌동생이자 사위 사이에 전쟁은 불가피했다. 아이샤가 낙타를 타고 군대를 지휘했기 때문에 ‘낙타 전투’로 불리는 전투가 벌어졌고 결과는 알리의 승리였다. 알리와 아이샤는 화해했다. 하지만 무슬림 간의 내전은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다마스쿠스에서 꾸준히 세력을 키워온 무아위야가 최후의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알리는 낙타 전투 후에 메디나로 돌아가지 않고 이라크의 쿠파에 자리를 잡았다. 657년에 시리아와 이라크의 경계이자 유프라테스 강 서안의 시핀에서 드디어 양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양측에서 수많은 사상자가 났지만 승패는 쉽게 결정되지 않았다. 전세가 불리했던 무아위야는 중재를 요청했고 더 이상 무슬림들의 피를 원치 않았던 알리는 협상에 동의했다.
알리의 이러한 결정은 알리 진영 내 강경파의 반발을 가져왔다. 알리 일파 중에서 더 젊고 더 급직적이었던 그들은 지도자의 나약한 모습에 실망하여 알리의 진영을 이탈했다. 혈통과 계보를 거부하고 반 알리, 반 무아위야를 표방한 이들은 ‘떠난 자들’이라는 뜻의 하리지파로 불렸다. 협상은 결론 없이 유야무야 끝났다. 무아위야의 입지는 강화되었고 반면에 칼리프인 알리의 권위는 실추되었다.
알리는 안으로는 하리지파, 밖으로는 무아위야의 이중의 적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결국 661년 1월 쿠파의 성소에서 예배를 드리던 알리는 하리지파가 보낸 자객에게 피습을 당했다. 자객은 독이 묻은 칼로 알리를 찔렀다. 죽어가면서도 알리는 복수를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알리는 661년 1월 31일에 사망했다. 이로써 정통 칼리프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스탄불의 터키 이슬람 예술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책자. 코란인 듯 하다.
제4대 칼리프 알리의 캘리그래피, 그의 풀네임은 알리 빈 아비 탈리브 빈 압둘 무탈리브 빈 하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