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생이 읽은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이라고는 <모방범> 밖에 없다. 부끄럽다. ‘미야베 월드 2막’이라는 에도시대 미스터리 시리즈는 당연 처음이다. ‘영험한 오하쓰의 사건기록부’라는 부제가 붙은 <흔들리는 바위>를 다 읽고 난 지금 소생의 돌머리가 갑자기 흔들흔들 흔들리면서 환청같은 것이 들려온다. “웰컴 투 미야베 월드”
소설의 처음에 등장하는 시비토스키(사람의 시체의 나쁜 영이 깃드는 것) 소동과 두 번째 장에 나오는 어린 소녀와 소년의 죽음, 그리고 밤마다 흔들리며 우는 바위의 등장. 이것들이 호상간에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나 했는데 마지막에 가서는 백여년의 시간을 건너뛰어 그 유명한 아코사건을 배경으로 서로서로 연결되어 있음이 밝혀진다. 원인없는 결과는 없고 모든 물은 결국 바다로 흘러들기 마련이다.
그 유명한 아코사건이란 바로 <주신구라>를 이야기하는데, 아코사건이란 역사적 사실이고 <주신구라>는 그 사실을 바탕으로 한 일본의 고전문학이다. 아코사건의 알려진 전말은 대충 이러하다. 1701년 에도 막부는 조정에서 파견된 칙사의 접대를 아코번의 젊은 영주 아사노에게 맡기고 그 의례 지도는 또다른 영주인 기라에게 맡긴다. 칙사를 대접하러 가던 아사노가 돌연 기라에게 칼을 휘둘러 부상을 입힌다. 원인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아사노가 기라에게 어떤 원한이 있었다는 정도다. 어쨋거나 쇼군이 계시는 에도성에서 어떠한 이유로든 칼을 뽑았다는 것은 엄청난 일임에 틀림없다.
막부는 아사노에게는 할복을 명하고 아사노의 성과 영지를 몰수하였지만 기라에게는 어떠한 처분도 내리지 않았다. 그 다음해에 이제는 멸문되어 떠돌이 낭인이 된 아코번의 무사 47인이 기라저택을 습격하여 기라를 베어 죽이고 주군의 원수를 갚는다. 그후 47인은 순순히 막부에 체포되어 할복의 명을 받고 모두 배를 째고 죽는다. 이 아코사건은 그후 각색되어 <가네다혼 주신구라>라는 일본의 국민문학이 되는데 연극으로 영화로 드라마로 엄청나게 많이 상영되었다.
미미여사는 이 주신구라에 대하여 새로운 해석을 내놓는다. 사실 아사노는 신경증이 있어 아무 이유없이 기라에게 칼질을 했는데 막부가 아사노의 신경증을 인정하지 않고 원한이 있어 칼질을 했다고 판결하여 할복을 명하고 영지를 몰수했다는 것이다. 사실대로 밝혀 칙사의 접대역이 정신병자라고 해서는 막부의 쇼군이 천황에게 면목이 없게 된다. 일이 이렇게 돌아가자 아코의 무사들은 사무라이로서 당연히 원한을 품고 할복한 주군의 복수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아코의 무사들이나 기라저택의 사람들이나 결국은 모두 시대의 부조리한 권력에 희생된 사람들이라는 논리다. 아코의 무사들이 그런 부조리를 알면서도 피를 흘리고 희생을 치르며 할복을 함으로써 부조리한 권력에 저항을 했다는 것이 미유키여사의 새로운 해석이다.
쓸데없는 이야기만 잔뜩 했는데 요지는 이 소설 재미있다는 것이다. 일단 미야베 월드에 한발 성큼 들어선 이상 다시 뒤돌아서서 꽁무니를 뺄 수는 없을 듯하다. 다음에는 또 무엇을 읽어야 할까 즐거운 고민을 해본다.
이건 사족인데, 에도막부의 성립과 일본 무사도와 관련해서 궁금하신 분들에게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전32권)>의 일독을 권한다. 정말 눈물나게 재미있는 소설이다. 읽어보고 재미없으면 환불해 줍니다. 이건 농담입니다. 옛날에 책 좀 있다는 집구석에는 <대망(大望)>이란 제목의 (아 깨알같은 글씨의 2단 세로쓰기) 양장본 1질이 구비되어 있었다. 이게 바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다. 그 옆이나 아래에 20권짜리 <왕비열전> 양장본 1질까지 구비되어 있으면 금상첨화다. 사실 요 상황은 옛날 우리집 모습이다.
각설하고, 소생이 감히 만방에 고하고자 하는 바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삼국지>나 <동주 열국지>와 같은 반열에 놓기를 추호도 망설이지 않겠다는 것이올습니다. 2차대전에 패망하고 실의와 절망에 빠져있는 일본 국민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기 위해 집필했다는 야마오카 소하치의 집필 의도를 굳이 감안하지 않더라도 등장인물과 일본 문화에 대하여 많이 미화된 느낌이 없지 않다. 그러나 어쨌든 간에 그 흥미진진함은 손에 땀을 쥐게한다. 소생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두 번 읽었다.
이건 사족에 더하여 추신인데, <도쿠가와 이에야스> 같은 것을 읽다가 보면 ‘할복’이 무수하게 등장하는데, 그야말로 유혈이 낭자한데, 소생 생각에 이 할복은 정말로 특이하고 놀라운 문화인 것 같다. 할복은 무사에게만 허용된 일종의 명예로운 죽음이다. 상것들은 할복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 할복이라는 것이 그냥 무대가리로 배때기를 푹 찌른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얼마의 깊이로 어디를 찌르고 어느 방향으로 가른다는 식의 법도가 있다. <흔들리는 바위> 에도 제후를 다다미방이 아닌 정원에서 할복하게 해서는 예의가 아니라는 말이 나온다.
배를 째는 고통을 덜기 위해 당사자의 부탁으로 옆에서 목을 쳐주는 것을 가이샤쿠라고 한다. 가이샤쿠도 그냥 아무렇게나 내리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목뼈와 목뼈 사이의 연골 부분을 내려쳐야 하고 목이 몸통으로부터 완전 분리되어 땅바닥에 떨어져 뒹굴지 않고 목과 몸통이 종이 한 장 정도의 여유를 남기는 것을 최고의 기술로 친다고 한다. 무슨 말인지...아시다 시피 미시마 유키오가 할복할 때 가이샤쿠를 실행한 사람의 검술이 미숙하여 미시마의 목은 세 차례의 칼질 끝에 겨우 떨어졌다고 하니 으으으 생각만 해도 괴롭다.
더하여 또 하나, 할복하기 전에는 지세이라는 것을 남겨야 했다. 이건 하이쿠 비슷한 것으로 일종의 유언인데 자신이 살아온 삶을 한 두줄의 간단한 문장으로 집약해야 하는 것이니 죽기도 바쁜 사람이 이런 시까지 지어야 한다니 할복이란 정말 아무나 할 일이 아니다. 소생 같은 불초한 것들은 할복도 어렵지만 지세이 짓는 것도 만만치 않을 것 같다. 참고로 히데요시는 죽을 때 “오사카의 영광이여 꿈속의 꿈이로다” 라는 유명한 지세이를 남겼다. 물론 히데요시가 할복한 것은 아니다. 일세를 풍미한 영웅은 또 행운아이기도 해서 종신와석했다. 연이나 병아리같이 어리고 약한 새끼를 늙고 음흉한 너구리 옆에 두고 떠날 때는 두 눈이 쉬이 감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할복관련해서는 아사다 지로의 <칼에 지다>에 자세하게 나와있다. 이것 또 무지하게 재미있는 소설이다. 언젠가 리뷰 비슷한 걸 쓰기도 했던 것 같은데 찾아보니 온데 간데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