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를 엮다 오늘의 일본문학 11
미우라 시온 지음, 권남희 옮김 / 은행나무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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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먼저 봤다. 좋아하는 배우들이 많이 나와  더욱 좋았다. 일본은 이런 영화를 왜 이리 잘 만들까 감탄하면서도 부러워서 괜히 씩씩거렸다. 책이 오히려 영화보다 재미가 덜하다. 그래도 원작이 좋아야 좋은 영화도 나오는 거니까. 작가가 나랑 몇 살 차이 안 난다. 그런 것도 질투가 난다. 질투쟁이인 나는 질투가 나의 힘이 되지 못하고 강새암만 심하게 부리고 만다. 그래서인지 마지메를 질투하고 스스로를 한심하게 여기는 니시오카에게 감정이입한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연애 빼고는 무엇하나 오랫동안 계속, 지속해 온 것이 없다. 정규직에서 한번 놓여난 뒤로 쭈욱 비정규직의 길-이런 황폐한 (제)길(?)-을 걷고 있는데. 그렇구나 비정규직을 지속하고 있네. 이 소설은 지속, 계속하는 것의 위대함(?)을 얘기한다. 국어사전 찾기가 취미이면서도 막상 사전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해서는 관심 가져본 적 없는데 우와 신기하네, 재밌겠다. 이런 생각이 들면서도 막상 15년이란 긴 세월을 꾸준히, 묵묵히 한 가지 일에 매진해야 가능한 일이라니 혀를 내두르고 손을 휘휘 젓고 사양하고 싶어진다. 이름 자체가 성실인 마지메에 비하면 '사전을 좋아하네', '사전 좀 봤거든' 따위의 말을 차마 못 하겠다.

 

사전 종이 느낌이 참 좋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사전 종이는 어떤 질감이고 어떤 기능을 갖추어야 하는가와 사전을 만드는데만 5000여 명의 인원이 투입된다는 얘기에 놀라면서도 그 많은 말들을 싣는 공간이니 그럴 수밖에 없다 수긍하게 된다.

 

몇 번이나 추진하는 일이 중단될 위기에 처하면서도 말그대로 좌.절.하지 않고 그 일을 계속해나가는 것에는 굉장한 용기가 필요하겠구나. 지치지 않는 에너자이저들 같으니라구. 결과물도 소중하겠지만 길 위에 있는 것만으로 의미있는 일임을 실천해나가는 인물들이 참으로 매력적이다. 예전에 독일어 교양수업에서 배운 글귀가 이 비슷한 거였는데 십 여 년이 넘으니 기억이 안 난다.

 

채드 하바크,『수비의 기술』을 읽을 때 '별로 가치있어 뵈지 않는 일이어도 자기만의 의미를 부여해 꾸준히 해나가면 결국 [되는]구나.' 느꼈는데 여태 내 갈 길을 찾지 못 하고 이렇게 방황하고... 방랑하고 있다. 끝없이 솟는 욕심과 질투가 한 길에 집중하지 못 하게 하고 여러 길에 이것저것 살짝살짝 발만 담갔다가 빼고 만다는 핑계 참 허술하네.

 

우리나라 사전처럼 단순히 새국어사전, 헌(?)국어사전 같은 이름이 아니라 말의 바다를 건넌다. 라는 뜻을 붙인 사전이 멋드러진다. 표지디자인마저 우리처럼 원색의 비닐가죽(?)장정이 아니라 이름처럼 그림을 넣은 사전이라니 소설이어서 그렇다해도 낭만적이기도 하지. 이젠 종이사전이 의미가 거의 없어졌지만 그 정성을 떠올리면 종이를 부드럽게 쓰다듬고 싶어진다. 고등학교 때처럼 폭신한 사전을 베고 침 흘리며 잠들고 싶다. 허무하게 끝나고 말더라도 지속의 힘을 찾아떠나는 우람한 뒷모습을 가진 사전을, 그것을 만든 이들을 닮고 싶어라. 올 해는 나아가자고. 한 십 년 너머를 바라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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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거서 2016-01-29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로 만들어진 줄 몰르고 있었어요. 덕분에 영화도 보고 싶어지네요 ^^

samadhi(眞我) 2016-01-29 15:07   좋아요 0 | URL
영화 강추입니다. 마지메역의 배우 아빠가 조선인이고 엄마도 배우 동생도 배우입니다.
 

 

아파트 복도에서 바라 본 풍경이다. 눈이 내려 하늘이 뿌옇다.

광역시(?)에 살고 있는데도 워낙 변두리여서 시골같은 느낌이 짙어 밤이면 개짖는 소리가 요란하고 어르신들이 많이 계셔서 인지 인간미가 있다.

남편이 붙여준 '오지랖을 뛰어넘는 광지랖'이라 찬바람이 불면(추운 날에 그분들이 더욱 생각이 나서) 동네여자경로당에 장구를 들고가 할머니들 앞에서 모자라는 실력으로(동아리에서 선배들이랑 술먹고 불렀던) 민요를 부르며 재롱(?)을 떤다. 길을 가다보면 어르신들이 먼저 알아보고 웃으신다.

 

 

베란다 문을 열면 바로 앞에 철길, 그 앞에 도로, 길 건너엔 공항이 있다.

배만 빼고 다 지나간다는 동네에 뭣 모르고 들어와 살게 되어 엄청난 소음에 노출되었다. 이곳 지리를 모르고 밤에 집 보러 왔다가(집은 낮에 보고 계약해야 한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덜컥 계약하고 만 것이 가슴을 치는 일이 됐는데 에어컨 없이 사는 여름에 문을 열어두지 못했다. 비행기(민항기, 전투기 가릴 것 없이) 날아다니고 기차 다니고 큰 도로 차들은 쌩쌩 다니고 으악...그런데 이런 날 눈 앞에 펼쳐진 세계가 지독한 여름의 한숨을 날려주는 구나.

 

 

아주 어릴 때를 빼고는 눈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추위도 많이 타서 눈 오면 춥고 길 지저분해 지고(처음 내릴 때 새하얀 모습은 간데 없고 세상 때가 섞여들어 금세 더러워 지니까.)...

비만 오면 광년이 모드로 들어가 혼자 감상에 빠지고 중얼거리며 알지도 못 하는 시를 읊어대고 비 맞는 걸 즐기고(나이 들면서는 자제했지만)...

그런데 나이를 먹는지 요며칠 눈보라가 치고 눈이 쉬지도 않고 내려대는데 왜 이리 가슴이 미친년처럼 뛰는지. 방금도 참지 못하고 담배 피우러 나간 남편과 엘리베이터에서 딱 마주쳐 잠깐 걷자고 했다. 남쪽나라에서 오래도록 따뜻이 살아 온 사람들은 춥다고 하는데 윗녘에서 맹추위를 겪어 본 나는 그다지 추운 줄 모르겠다. 몸에 지방이 쌓여 그런 건지도 모르지만.

고요히 눈내리는 풍경이 따뜻하구나. 눈이 오면 포근하다는 말, 와닿는다. 월요일 출근길 걱정하는 남편을 두고도 가슴에서 흥흥 콧노래가 나온다. 어릴 때처럼 강아지와 함께 폴짝 뛰어다니고 싶은 충동이 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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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01-23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 올때는 눈내리는 소리에 세상 모든 소리가 덮혀 버리는 듯하더군요..어쩜 그리 고요하던지....군대 있을때 밤새도록 내리던 눈에 청력을 잃어 버릴 뻔했었지요.ㄷㄷㄷ

samadhi(眞我) 2016-01-23 23:50   좋아요 1 | URL
우왓, 그토록 빠져(?) 있었나요? 아님 감각이 무척 발달하셨거나. 유레카님은 힘드셨다고 한건데 눈오는 소리를 깊이 느끼셨다니 낭만적으로 느껴져요. 근데 그 마음 알 듯도 해요. 가슴이 울렁대고 눈을 감고 그 풍경을 그리게 되네요.

지금행복하자 2016-01-24 0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오는 날은 눈이 소리를 먹어 고요해서 좋아요... 아무도 밟지 않은 눈밭을 뽀드득 뽀드득 한 걸음 옮길때 마다 들리는 그 소리도 너무 좋구요~~

samadhi(眞我) 2016-01-24 00:28   좋아요 0 | URL
부드러운 존재가 그토록 힘이 세다는 것을 늦게에야 알게 됩니다.
 
인생이 허기질 때 바다로 가라 - 내 밥상 위의 자산어보
한창훈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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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기다 : 입맛이 돋우어지다.

 

어미는 (물)고기장시였다. 동트기 전 캄캄한 새벽녘에 일어나 5일장을 돌며 하루종일 "사씨요, 사씨요!"하며 생선을 팔았다. 철 모르는 막둥이는 학교가 파하면 시장으로 가, 제 어미가 있을 법한 곳을 귀신(?)같이 찾아내 시간이 흐를수록 신선도가 떨어지는 생선을 팔지 못해 속타는 제 어미 마음도 모르고 군것질 할 돈을 달라고 졸라댄다. 어린 것 등쌀에 양쪽에 주머니가 달린 앞치마에 구깃구깃 아무렇게나 접어넣어진 지폐더미들 속에서 비늘이 곳곳에 붙어있는 천원짜리 한 장을 꺼내어 철 없는 손에 쥐어준다. 남편에게 이 얘기를 했더니, 빙그레 웃으며 " 으이구, 왜 그렇게 살았어? 안 창피해?" 그런다. "부끄럽지. 참 못 할 짓 많이 하고 살았지." 하는 내 핸드폰 바탕화면 글귀가 "사씨요, 사씨요"다.

 

어릴 때부터 정육점 아들, 통닭집 아들에게 시집가라는 소리를 듣고 자랄 만큼 육식을 좋아한 반면 생선 비린내를 유난히 싫어했던  난 엄마가 하필 생선을 파는 게 못마땅했다. 무엇보다 괴로웠던 것이 엄마옷과 함께 빨래를 돌리면 온통 비린내가 배어서 교복에서도 비린내가 가시질 않는 것이었다. 게을러터진 성격에 그렇다고 따로 손빨래할 성미는 못 되어서 투덜거리며 비린 옷을 입고 살았다.

 

중학교 다니던 어느날 친구와 시장 근처를 지나다가 다라이를 이고 오시는 엄마와 딱 마주쳐서 엄마와 몇마디(무슨 얘기를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말을 주고 받았고 헤어져 돌아오는 길에 그 친구가 동경하는 눈빛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너 정말 대단하다. 엄마를 창피해하지 않는구나." "우리엄만데 뭐" 하고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지만 비린내 난다고 엄마를 만날 타박하는 자신이 부끄러워 그다지 떳떳한 기분은 아니었다. 지금도 냄새가 많이 날 것 같은 직업군 사람들을 보면 그 식구들 마음(?)을 조금 알 것 같다. 청소차 아저씨들을 지나치다 보면 빨아도 가시지 않을 그분들 세탁물을 생각하게 된다.

 

섬사람인 작가가 풀어놓는 물고기 얘기를 읽다보니 엄마 생각이 난다. 한창훈은 소설 『홍합』을 읽고 반해버린 작가다. 거문도 출신인 작가가 전문가(?)다운 식견을 펼쳐보이는 물고기 소개글이 알차고 재미나다. 함께 삽입된 사진들을 보며 그 생선이 이렇게 생겼구나 알게 되고 낚시와 회뜨기(?) 선수인 작가를 따라다니며 귀한 생선 맛 좀 보고 싶다.

 

먹을 수 없는(?) 한 종을 빼놓고 총 30종의 물고기와 갯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어떻게 잡는지 언제가 제철인지 어떻게 생겼고 어떻게 해 먹는 게 맛있는지. 작가가 겪은 녹록지 않은 경험이 묻어나 어느새 홀린 듯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작가에게 마구 떼써서 끝도 없이 바다얘기를 듣고 싶다. 이 책에서 얘기한 것들 말고도 셀 수 없이 많은 다른 어종들 얘기도 계속 해주면 좋겠다. 어릴 때와 달리 커서는 없어서 못 먹을 만큼 회를 좋아하게 됐는데(회 먹으면 술도 안 췐-취한-다는 소리 따윌 하면서) 그 귀한 자연산회 좀 얻어 먹으러 거문도에 찾아가 작가를 졸졸 따라다니고 싶은 충동이 인다. 그 섬에 머물며 사시사철 제철인 해물을 찾아 헤매는 즐거움을 생각하며 꿀꺽 침을 삼킨다.

 

각 장마다 인용된 정약전, 『자산어보』 내용도 새롭고 흥미롭다. 옛사람들 기록을 볼 때마다 놀라울 뿐이다. 어떻게 알았지? 새삼 재삼 감탄하고 마는 것이다. 관찰력과 솔직한 표현력이 뛰어난 조상들 후예인데 내 어휘는 왜 이렇게 빈약한지. 거칠게 자라난 섬놈(?)답지 않게 부드러운 표현력을 지닌 작가 글솜씨에 녹아난다.

 

흔하게 먹던 알밥에 흩뿌려진 날치알을 낳은 날치가 정말로 날아다니는 생선이어서 그렇게 불린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됐다. 꿈처럼 생시처럼 이야기가 환상과 현실을 왔다갔다 한다. 그래서 더 좋다. 바다는 그렇게 꿈과 현실을 섞어놓은 공간인가보다. 하긴 바다는 생각만 하여도 미지(未知)인 세상이기도 하다. 신영복 선생 말씀으로는 모든 것을 "받아"서 바다가 됐다는 바다는 그 넓디너른 품에 세상 온갖 더러움을 품고 다 안아주는 공간이 아닌가. 몇 년 전 그 말씀을 듣고 바다가 되어야지 다짐하였지만 그 차디찬 맹서는 어디가고 그냥 속세에서 때 칠갑을 하고 그 속에 묻혀 산다.

 

이 책을 읽다보면 식욕이 돋아난다. 해물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이도 갑자기 비린 것을 찾게 되지 않을까. 오늘 저녁은 생선구이니라. 일본산 생선이 국내산 또는 다른나라산으로 둔갑을 한다고 해 생선 먹기가 너무 두렵지만 어쩌랴 비린 것이 당기는 걸. 이런, 자꾸만 침이 고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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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6-01-19 1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그렇군요. 제 옛 여자친구 부모님도 시장에서 생선 가게를 하셨습니다.
이 책 읽어봐야겠네요... 좋긴 좋은가 봅니다. 여기저기서 한창훈 한찬훈 하는 걸 보면 말이죠....


책이 도착했습니다. 잘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꾸벅 ~

samadhi(眞我) 2016-01-19 13:35   좋아요 0 | URL
특히 홍합은 읽어줘야 합니다.
이 책, 생선 좀 파신다는 곰발님이 좋아할 만 한 책입니다

지나 2016-07-05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다시 평을 읽어봐도 역시 글 잘쓰는군~*이란 생각이 드누만^^*
생선못먹는 나도 먹어보고싶고 읽어보고싶게 만드네^^
자산어보의 글귀가 나온다니 더 궁금하네~*
함 읽어볼께 친구^^*

samadhi(眞我) 2016-07-05 10:20   좋아요 0 | URL
여긴 익명성의 공간이라 친구 티내면 곤란해^^; 특히, 친구 같은 말은 좀 빼주면 고맙겠얼 ㅋㅋ 가능하면 반말 아닌 걸로 해주면 좋겠고 ㅋㄷ
잘 놀다왔냐? 이튿날 비가 와서 걱정되던데 어쩌면 비가 와서 더 신나게 놀 수도 있겠다 싶기도 했고. 해물파전 만드는데 달걀 다 떨어져서 이마트에 급하게 주문해놓고 달걀없이 반죽해서 냉장고에 넣어놨다.
 
그 노래는 어디서 왔을까
공선옥 지음 / 창비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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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들이 아프다. 비참하기 이를 데 없는 이 사람들을 어떻게, 무엇으로 구할 수가 있을 지 암담하고 가슴이 쓰려서 외면하고 싶어진다. 그 우울의 원인이 사회의 구조적모순 때문이며 그들(?)이 저지른 짓거리 때문인데 그냥 보통 사람들은 그저 자기들 잘못으로 여기며 아파하고 방황한다. 자신들에게 몹쓸 짓을 한 사람들에게 대항하지 못 하고 계속 당하고 산다. 읽다보면 속이 터질 것 같다. 내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고 삿대질을 하고 싶어 손이 근질거리고 싸움신이 내려서 한 판 붙고 싶다. 이 ... 할 것들 다 나와, 다 덤벼. 불합리한 세상과 맞짱 뜨고 싶다. 한 방 맞고 바로 떨어져 가버리겠지만. 큰소리 정도는 칠 수 있다구. 너무 우울하고 처절해서 두 번 읽고 싶지 않은 소설이다.

 

약자에게 약하고 눈물 많은 내가 먼저 지치면 안 되는데, 이 비겁한 마음은 어디에서 오는가. 너무 거대한 슬픔과 고통 앞에서 손 놓고 쪼그라들어서 망연자실한 심정이다. 악의로 가득한 웃음을 웃는 사람들과 싸우는 방법을 잘 모르겠다. 어떻게 웃을 수가 있지? 어떻게 저렇게 뻔뻔한 말들을 뱉을 수가 있는거지? 반성없는 사람들과 대화하는 법, 싸우는 법을 누군가 차근차근 알려주면 좋겠다. 격동의 세월 속에서 걸어나온 사람들이 어떻게 이겨내고 버텨냈는지 난 늘 궁금했다. 무엇보다 어떻게 잊을 수 있는지. 그걸 알고 싶다. 특히, 그곳에 있었던 이들은 5월 그날을 어떻게 잊을 수가 있을까.

 

초등학교 때 대학다니던 언니가 불렀던 민중가요의 끔찍한 노랫말을 잊지 못한다. 80년 광주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들을 노래로 만든 것. 가사만 떠올려도 소름이 돋는다. 백주대낮에 무장강도가 무고한 사람들에게 칼부림을 하는 것과 다름없으니. 그러고도 가해자들은 버젓이 몇 대에 걸쳐 호화롭게 사는 놀라운 나라. 나와 같은 사람들이 잔인하게 죽임 당하고 시신조차 거두지 못하고 어딘가로 끌려가고 가족과 생이별하고 넋을 놓고 미친년, 미친놈으로 짐승보다 못한 삶을 사는 대단한(?) 나라. 아직 달걸이도 안 한 조그만 여자애들을 끌고 가 짓밟고 짓이기고 죽이고 그러고도 그게 뭐 별 거냐고 지나간 일 가지고 쪼잔하게 군다고 힘 센(?) 이웃나라의 말 같지도 않은 말에 손바닥 비비며 지당한 말씀인뎁쇼 하는 가짜 왕이 군림(?)하는 나라.

 

이 세상에 정의 라는 것이 아직 남아있는가. 살아있지만 산 것이 아닌 그 사람들과 죽어버린 이들을 어떻게, 무엇으로 달랠 수 있을까. 그래서 작가는 말이 아닌 이상한 주문같은 말들로 노래하는 가보다. 말문이 막혀버려서. 현실을 잊고 싶어서. 어쩌면 제발, 날 좀 구해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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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체재활용 - 당신이 몰랐던 사체 실험 리포트, <스티프> 개정판
메리 로취 지음, 권 루시안 옮김 / 세계사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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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위(脾胃)가 약하다면 이 책을 읽기가 꽤 힘들 수도 있을 것 같다. 시체의 머리를 잘라서 뇌를 꺼내고 피부를 벗겨내고... 등등 피라든가 내장기관 같은 것들을 치어다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견디기 힘들 것이라 생각한다.

 

어차피 썩어 문드러질 몸 어떻게 쓰인 들 어떠하랴. 라는 주의를 가지고 살기에 내 죽은 몸을 가지고 뭔 짓(?)을 하든 말든 상관 없다고 생각한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진 막연히 죽고 나면 이 몸을 화장해서 어디 강 들 산 바다... 아무데나 뿌려버리겠다. 생각했는데 화장의 과정 자체가 환경오염을 일으키고 그 재 또한 거름으로도 효용이 없다고 한다. 자동차 사고 실험용으로 쓰여 산산조각이 나든, 수술연습용으로 쓰여서 만신창이가 되든 어찌하든 좋다. 환경오염 쓰레기보다는 어딘가에 재활용으로 쓰일 수 있다면 그것이 더 뜻깊은 일일테니.

 

제사, 3년상 등 뿌리깊은 신체발부 수지부모 운운하는 유교문화가 여전히 남아있는 우리나라 못지 않게 서구인들도 아이 시체만큼은 기증하지 못하는 가보다. 아무래도 그 조그만 몸을 기증한다는 것 자체가 부모로서 쉬운 일이 아니겠다. 남편에게 그런 얘기를 했더니, 남편은 기꺼이 기증하겠다고 한다. 이미 죽어버린 몸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니. 사랑의 주체가 그런 겉모습, 껍데기는 아니므로 의미없다 여기는 성품이라 그런가 망설임 없이 아이의 몸을 얼마든지 무슨 험한(?) 실험체로 쓰더라도 상관없단다. 그래도 나는 좀 망설여지는데. 아직 아이가 없지만 내 아이가 있다면 그 아이가 죽었다 해도 그 여린 몸을 찢어대고 부서뜨린다는 생각만으로도 벌써 내 몸 어딘가 아픈 느낌이 드는데... 쓸모없는 늙은(?) 내 몸도 기증하겠다하면 우리 엄마도 아파하실려나. 그래, 집착, 어리석기 그지 없는 집착이지. 혼이 떠나버린 육신 따위가 무어라고.

 

그동안 미뤄둔 장기기증 서약이나 해야겠다. 인터넷으로 신청해도 되는 듯하다. 시신기증에 대해서는 생각도 못 했는데 이 책을 읽고서 오호, 했다. 내 장기가 그다지 말짱하지 않아 내 장기보다는 시신이 더 쓸모 있겠다. 한창 광우병 문제가 불거질 때 남편에게 그랬다. 우리 둘 중 하나가 바보 되면 암스텔담 가서 안락사 하는 거다. 둘 다 바보 되면 어쩌지. 하면서. 그럴 땐 친구에게 맡기자고. 안락사 한 몸뚱이여도 시신은 어딘가에 쓸 수 있겠지.

 

재미난 보고서를 읽는 듯 인류학 책을 읽는 듯 즐겁다. 새롭게 알게 된 지식들이 많다. 작가가 열린 마음으로 삶을 바라보는 사람 특유의 넉넉함과 느긋함이 엿보인다. 그래서인지 유머가 넘쳐난다. 글을 읽다가 문득 하하하... 깔깔깔... 웃는다. 그 편견없는 시선이 유쾌하다. 이 작가의 관심분야 또한 다양해서 저자의 다른 책도 읽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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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14 16: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samadhi(眞我) 2016-01-14 16:55   좋아요 0 | URL
네. 인도쪽 아무튼 그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장례문화들이죠. 이 책에 세계 여러 곳의 장례문화에 대한 얘기도 나와 있지요. 꽤 재미있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6-01-14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리 로취는 과학 전문 에세이스트인데 유머 감각이 탁월해서 낄낄거리며 읽게 됩니다.
재미있는 작가예요. 전 나름 로치 팬입니다.

영화판은 캔 로치, 독서판은 메리 로치 ~ 가 진리죠..

samadhi(眞我) 2016-01-14 16:56   좋아요 0 | URL
진짜 마음에 쏙들더라구요. 어쩜 글을 이렇게 재미나게 쓸까 부럽기도 하고. 생각도 독특하고. 발상이 기발하더라구요.

곰곰생각하는발 2016-01-14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나저나 저 간판에 걸린 사진 속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고 있습니꽈?

samadhi(眞我) 2016-01-14 16:57   좋아요 0 | URL
그럼요. 아주 많이 컸답니다. 남자아이들만 아직 중고등학생이고 여자아이들은 꽃스물입니다. ㅋㅋㅋ 제가 키우다시피한 애들이 가끔 보고싶어 미칠 것 같아요. ㅋㅋ 어릴 때 모습이 더 그립지만요.

곰곰생각하는발 2016-01-14 17:01   좋아요 0 | URL
??! 그니깐 저 사진은 옛날 사진이군요 ! 아이쿠야.... 전 초등학생리라녀 했습니다.
저 윗 자세오 똑같은 걸로 모여서 다시 사진 찍으셔서 올리셔야 합니다. 초상권 침해려나요.. ㅎㅎㅎㅎ 내 얼굴이 아니니 상관업슴.. ㅎㅎ

samadhi(眞我) 2016-01-14 17:03   좋아요 0 | URL
큰 애들 사진은 차마 못 올리고 꼬맹이들 사진은 해소할 수 없는 제 못난(?) 그리움의 표현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