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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가 X에게 - 편지로 씌어진 소설
존 버거 지음, 김현우 옮김 / 열화당 / 2009년 8월
평점 :
아껴두었던 책을 이제야 꺼내 읽는다. 뚜렷한 이유도 없이 그냥 읽어 치우면 안 될 것 같아 읽기를 미루다가 면 재질로 된 옷처럼 편안한 느낌이 드는 책 표지를 쓰다듬어가며 읽는다. 표지 그림이 파이윰 초상인데 그 오래 전 얼굴이 현대인과 다름없다는 것에, 2세기 작품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표현이 섬세해 놀란다. 아이다와 사비에르를 보고 그린 듯한 착각이 들 만큼 그림이 편지 주인공과 잘 어울린다.
편지글 이어서 자꾸 딴생각-회상-에 빠졌다, 다시 읽다 가만히 등을 기대고 시간을 거슬러 가본다. 책 곳곳에 내가 모르는 단어들, 시대 상황, 사정 등등이 나와 그 뜻을 찾아가며 읽는 맛도 재미지다.('재미있다' 를 전라도 식으로 표현하는 말. 재미지다는 말이 재미있다 보다 더 재미난 느낌이다.)
남편이 막 병장을 달 무렵에 보낸 메일을 받고 그 답메일로 군대 주소를 묻고는 처음 편지를 보냈다. 그때만 해도 어린 시절 "국군아저씨께" 라는 문구로 시작하는 위문편지를 보낼 생각이었다. 다섯 달 동안 편지 50여 통을 보냈으니 군대에 소문이 짜했다 -'짜하다'가 표준어일 줄이야. '퍼진 소문이 왁자하다' 라는 뜻이다.- 고 한다. 남편이 말년휴가 나온 뒤 서로 얼굴을 처음 봤는데 남편이 복귀한 뒤에도 편지가 날아드니까 같이 있던 소대원들이, '아니 그 사람 왜 그러느냐고. 병장님 얼굴을 보고도 어떻게 연을 안 끊을 수가 있냐' 고 했단다. 내가 꽃미남 밝힘증이 있긴 하지만 현실에서는 감당이 안 돼 잘생긴 사람이 불편하다. 그렇다고 우리 남편이 못 생겼다는 소리를 듣지는 않는다. 인상 좋다는 소리를 듣지^^.
편지는 서로가 멀리 떨어져 있을 때 빛이 난다. 어쩌면 감옥과 비슷한 군대에서 편지를 기다리는 것이 기쁨이었을 거다. 일상이 아닌 비일상에서 편지라는 매개가 얼마나 사람을 설레게 하고 기다리는 가슴을 쥐락펴락하게 하는지. 읽다가 갑자기 코끝이 찡해지는 순간이 온다. 가슴이 뛰어 편지를 품에 안고 소리를 지르기도 한다. 그리움 가득 담은 한 글자, 느낌표 하나, 그저 내 이름을 불러주었을 뿐인데 황홀해지는 기억. 우리가 나눈 편지는 수줍고도 과감하며 넋이 나갈 듯한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며칠 전 열흘 만에 서울에서 돌아와 뭘 물어보려고 전화걸었더니 "마침 네가 와서 기분 좋다는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 하는 말에 딴청을 피웠지만 그 순간 찌르르한 느낌이 온 몸으로 퍼진다. 여전히 마냥 좋은 우리는 따라쟁이가 되어 서로를 흉내내며 내가 너인지 네가 나인지 헷갈리는 말들을 하며 배시시 웃는다.
남자가 쓰는 여자 시점 편지가 참으로 로맨틱하다. 박주연 같은 여성 작사가가 쓴 남자 시점 노랫말도 그렇고 이성을 주인공으로 글을 실감나게 쓰는 것을 보면 작가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하게 된다. 여성성을 마음껏(마치 내가 쓴 편지라도 읽은 것처럼 얼굴이 붉어진다. 편지를 쓸 때마다 첫 글귀에 상대방 이름을 다르게 부르는 것마저) 뿜어내는 글을 보면서 작가가 여자 속에 들어와 본 적이 있는 건 아닐까? 한다.
세계에서 벌어지는 획일화(?)를 연인끼리 사랑을 주고 받는 연애편지로 빗대어 그리다니 상상도 못 할 일이다. 작가는 작가구나. 가끔 요즘 사람들이 하나같이 비슷한 태도를 취하며 산다는 생각이 든다. 비슷한 음식을 먹고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며 비슷한 옷차림과 비슷한 꿈을 꾸고. 점점 물질 만을 바라며 기준이 한 가지가 되어 풍족하게 살며 고생하기 싫어하고 어딘가 뒤처지는 것 같으면 같이 안 놀고(?) 싶어하고 자기 부류가 아니길 바라기까지 하는 듯하다.
내 친족이지만 갑자기 잘나가게(?) 된 사람이 벤츠를 몰면서 하는 말이, "야, 비켜~! 잘 안 나가면 좀 빠지라고." 농담이라 얼버무렸지만 농담이 아니었다. 조수석에 앉은 나는 농담으로 라도 그런 소리 말라고 했지만 내가 선비질(?)하는 걸로 보였을 거고 지가 못 나가니 저런다 생각했을 것이다. 상도 따위 없는 자기 남편이 얼마나 여러 사람에게 못할 짓 해가며 돈을 버는지 알면 충격을 받으려나. 아니면 '그게 뭐 어때서? 그럴 수 있지' 하고 오히려 두둔할 지 모른다. 자본주의 끝에 가 있는 지금 이 세계는 부(富)가 곧 선(善)이므로.
아이다는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과 만나는 모든 사람을 관찰하고는 짧은 편지 안에 자신이 보고 느낀 이야기를 들려준다. 예언자 같은 말투였다가, 상상을 자극하기도 하고 곁에 있는 듯 속삭이기도 하면서 마음을 사로잡는다. 오매불망 아이다 편지를 기다렸을 사비에르 심정이 되어 아이다를 한시바삐 만나 보고 싶어진다. 편지 곳곳에 쏙쏙 박혀있는 글에 잠시 머물러 본다. 아이다가 건네는 말이 시처럼 고요해 그 문장을 소리 내 읽어보며 음미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