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보내지 마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2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는 도대체 뭔 소린가 했다. 애들이 보육원에서 자랐나 했는데 알면 알수록 잔인하기 이를 데 없다. 그렇게 된 체계를 구체화해서 설명하지는 않고 그렇게 된 거다 라고 뭉뚱그려 독자 상상에 맡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돌이켜보게 된다. 오래 산다고 깨닫게 되는 것도 아니고 짧게 살다 간다고 해서 모르는 것도 아니겠지. 이래도 저래도 아무 의미가 없는 건 아닌지. 다른 인간에게 먹히기(?) 위해 살아가는 삶은 과연 무엇일까. 그래서 철저히 비밀에 부쳐온 거겠지. 내 존재가 무얼 위해 쓰이는지 알게 됐다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기증자가 되지 않을 길을 찾아내려 했을 것이다. 몸에 나쁜 것은 무엇이든 해서 기증당하지(?) 않으려고 몸부림쳤을 것 같은데 등장인물들 모두가 뼛속 깊이 순응교육을 받아서인지 다들 저항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도시전설(?) 같은 기증 유예 소문을 희망고문 삼아 달콤한 착각(?)으로 라도 인간으로서 존엄을 찾고자 한 것일 텐데. 


어느 집단에나 존재할 법한 루스같은 애가 썅년(?)이라는 생각이 지배했다가 후반에 헤일셤 학교 교장과 마담 얘기를 듣고는 정작 절대악은 따로 있다는 사실에 몸서리친다. 그 애들을 차라리 놔두지. 대단한 선행을 베푼 양 당당하기까지 한 그네들이 가증스럽다. 장기복제, 장기매매가 알게 모르게 벌어지고 있는 세계를 우리는 살아간다. 지나치게 부를 독점하고 있는 저 높으신 냥반들에게는 아랫것들이 따지는 도덕의식 따위 아랑곳하지 않겠지. 어차피 하찮은 인생들이 아웅다웅 하든 말든 손가락 끝으로 살짝 누르면 시들 개미 목숨들일 뿐. 기증 받는 자들은 등장하지 않고 오직 그 개미들 이야기만 나온다. 


사랑 참 좋지. 하지만 무슨 짓을 해도 이 소설에서는 무력하기만 하다. 그렇게 돼 있는 걸. 그러니까 책을 다 읽고 나면 허망하고 씁쓸하고 쓸쓸하다. 내일을 걱정하고 생로병사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인 우리는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는가. 그걸 찾는 것이 인간으로 태어나 고해에서 살며 해야 할 일이고 모든 순간 번민하는 까닭이지만. 


번역에 대한 추기;

대체로 번역이 매끄럽다. 이 역자가 번역한 책을 꽤 여러 권 읽었다. 그래도 걸리는 것들을 적어둔다.


'...일종의 표지인 셈이다.'

'a sort of' 를 번역한 듯한데 굳이 '일종의' 라는 뜻으로 그대로 번역할 필요가 있을까.

'어떤 표지인 셈이다.' 나 그냥 '표지인 셈이다.' 로만 써도 "셈"이라는 단어가 'a sort of' 를 충분히 설명하고 있는데. 아니면 '표지이기도 하다.' 나 '표지같은 것' 등 우리식으로 자연스럽게 풀어 쓰면 좋겠다. 영문 번역서를 보면서 자주 발견하게 되는 '일종의' 라는 말을 역자들이 한 번쯤 고민해봤으면 좋겠다. 그걸 볼 때마다 교정하고 있는 내가 더 답답하긴 하지만. 


또다른 표현

'toward'를 번역한 듯 보이는 '~쪽을 향해' 라는 말에서 '향하다' 라고 쓰지 말고 '~쪽으로' 라고 해도 충분하다. 사족으로 여겨진다. 이 문장도 자주 나온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가 알던 교장선생과 매우 달라서 부럽기까지 하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보통은)훈시가 짧다니. 영화 [클래식]에서 운동장 조회 때 학생이 일사병으로 쓰러지는 장면이 나올 정도인데. ˝차가고(착하고) 바른 생활~˝ 에서부터 줄줄이 이어지는, 도무지 무슨 얘기였는지는 모르고 길었다는 기억만 남아있는 지긋지긋, 지루지루한 교장선생 훈시가 짧다는게 인상깊다.








헤일셤의 하루는 언제나 조회로 시작되었는데, 대개의 경우 상당히 짧았다. 한두 개의 공지 사항이 발표되고 학생이 시 한 편을 낭독하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대개의 경우 에밀리 선생님은 훈시를 길게 하지 않았다. 몸을 꼿꼿이 세운 채 교단에 앉아 이야기하는 사람이 누구든 간에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우리 가운데에서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 오면 소리 나는 쪽을 향해 엄한 눈길을 보낼 뿐이다. - P8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슈거 블루스 - 설탕,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독, 개정판 마이너스 건강 3
윌리엄 더프티 지음, 이지연.최광민 옮김 / 북라인 / 200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딜가나 살빼는 얘기가 화두다. 오랜만에 만난 동아리 사람들도, 친구들도, 친인척도. 그런 얘기들을 나누면서 확실히 뭔가 잘못돼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살이 안 쪄서 엄마 애를 태웠던 애들끼리 모여 지금은 피둥피둥 살이 쪄서 도대체 살은 어떻게 빠지는 거냐고 하소연한다. 운동도 해야 하지만 운동만으로는 안 되고 적게 먹는 수밖에 없다. 여태 억울하게 지방이 누명을 써왔지만 순수한 척 새하얗게 치장한 설탕이 우리를 살찌게 하는 주범이라는 것을 이제야 사람들이 인식한다는 얘기를 하고 있다. 


사탕수수와 사탕무를 정제해 영양소는 다 빠지고 오직 칼로리만 남아 탄수화물이라 부를 수 없는 흰 가루를 탄수화물로 분류해 표기해 온 일, 가성비 높은 에너지원이라 광고하며 설탕 소비를 부추기던 돈과 이권에 얽혀있는 사람들- 과학자, 영양학자, 의사... - 영양소에 대한 오해, 비만, 특정식품 소비 등등 이런 것은 언제나 거대 기업들 손에서 이뤄져왔다. 그러니까 내가 뚱뚱한 건 순전히 내 탓만은 아니라는 말이다. 얼마나 다행인지? 그래도 분별없이 먹고 안 움직인 니 탓도 커. 눈이 돌아가게 화려한 광고를 보고 광고에 나온 기름진 음식을 먹고 다이어트 소다를 마셨으니 그 보상으로 설탕이 잔뜩 든 음식을 먹어대고 살은 더 찌고 그러면서 왜 살은 안 빠지냐고... 


이 책이 출간된 지 거의 50년이 되어간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게 구닥다리 얘기가 아니라 새롭게 알게 되는 설탕 역사가 흥미진진하다. 저자가 인권에 대한 기사를 써 온 기자 출신이어서 그런가. 제국주의 시절부터 시작된 사탕수수 전쟁(?)과 설탕을 둘러싼 기업, 정부와 그 기업들 후원을 받아온 가짜(?)과학자들, 설탕이 독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폭로해온 진짜(?) 과학자들 얘기를 생생하게 전한다. 이권을 둘러싼 싸움,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보이는 양심없는 행태와 그 틈바구니에서 희생된 무고한 사람들 이야기가 지금 벌어지는 일들과 다를 바 없다는 게 씁쓸하다. 


내가 좋아하는 빌리 할러데이에 대한 언급부터 마음에 들었다. 작가 자신을 깨운, 시대를 앞서간 배우 글로리아 스완슨에 대해 검색해봤다. 무성영화 시대 배우라면 찰리 채플린 밖에 몰랐으니. 


현대사회에서 설탕을 완전히 끊는게 가능할까. 우유에도 설탕이 들어가 있고. 플레인 요거트에도 설탕이 들어간다. 술과 담배에까지 설탕이 들어간다고 하니 뭐. 생협을 표방하는 오아시스에서 산 파김치에도 단 맛이 많이 느껴져서 김치에도 설탕을 많이 넣는다는 사실에 놀랐다. 더 놀란 건 김을 사려고 후기를 봤더니 김 맛이 너무 달더라는 후기에 그 김에 대해 찾아보니 정말 설탕을 많이 넣었던 거다. 달게 해야 사람들이 맛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모든 가공식품에는 설탕이 꼭 들어간다. 


속세를 버리고 자연인으로 살지 않는 이상 완전한 자연식을 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저자가 살던 시대와 달리 가공식품, 밀키트, 외식에 노출돼 있는 우리는 어떻게 해도 설탕을 피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단 것을 썩 좋아하지 않는 나도 설탕을 끊지는 못하겠다. 원하지 않아도, 의도하지 않아도 알게 모르게 먹게 되는 게 설탕이 들어간 음식일테니. 그러고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몸 속에 쌓여서 야금야금 몸을 망가뜨리겠지. 완전히 끊는 대신 설탕 함량을 확인하고 설탕이 적거나 전혀 들어있지 않은 식품을 선택하는 수밖에 없겠다. 전에 담뱃값을 인상한 정부에 대한 저항으로 담배를 끊었다가 스트레스 때문에 죽을 것 같다고 한 사람처럼 설탕을 완전히 끊으려다 신경을 과도하게 사용해서 폭발할 지도 모르니 그냥 안 끊을란다.


이 글을 쓸 당시 저자는 일본 말고는 우리나라를 경험하지 못해 그런가 아시아를 거의 일본으로 이해하고 있다. 마지막 장에 자연식품 조리법도 거의 일본식 식재료 위주이다. 지금처럼 한류가 대세라면 아마도 우리식 나물 무침에 대해 적어놓았을지 모르겠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2-06-13 14: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6-13 14: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태고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모두가 주인공인 세상은 이상에서나 일어나는 일이겠다. 세상은 주인공과 주인공 아닌 지나가는 사람 1, 2...로 돌아가니까.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드는 공간이기도 한 태고에서는 모두가 주인공이다. 그 가운데서도 작가는 이지도르와 루타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나와 이지도르가 품은 기대와 달리 루타가 너무 일찍 떠나버렸다. 나중에라도 루타가 헐레벌떡 이지도르를 찾아와 쉴 새 없이 떠들어대는 이지도르 얘기를 들어줄 줄 알았는데 아쉽게도, 세상을 너무 일찍 알아버린 탓에 그냥 휑하니 속타는 애를 버려두고 가버렸네. 세상이 그렇듯 헛된 바람이 그저 덧없네.


가브리엘 마르께스, [백년동안의 고독]을 읽는 듯, 대하소설을 읽는 듯 세대를 거치고 거쳐 이야기가 이어진다. 설화처럼, 모닥불 피워놓고 둘레에 둘러앉아 듣는 옛날이야기처럼 편안하고도 그렇게 그렇게 흘러간다. 은밀한 목소리로 "옛날이야기 들려줄까?" 하며 손짓하는 것 같다. 밥 먹으라고 엄마가 불러도 들은 척도 않고 이야기를 듣고 있다. 으레 들어왔던 이야기와 조금 다르게 고요하고 담담하게 풀어나간다. 지나치게 빠져들지도 않고 그러려니 하고 듣게 된다. 다음 이야기가 너무 궁금해 빨리빨리, 전부 다 풀어놓으라고 보채지 않을 만큼이다. 딱 그 만큼 관찰자 시선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지나치게 처절하지도, 웃겨서 미친 듯 웃어재끼지도 않고 흘러 흘러 흘러가는 강줄기처럼, 저 구름처럼 평온하지 않았던 시대 마저도 인간 역사가 그래왔던 것처럼 그저 지나간다. 시체를 몽땅 파묻었던 구덩이를 다시 파헤쳐 시체들을 거둬들이고 난 뒤에도 인간은 변함없이 그 터에서 살아간다. 


인간을, 인간이 만물 영장이라 믿는 것이 우스꽝스럽다는 것을 알려주듯, 만물을, 세상을 관조한다. 담담하게 보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야. 4가지로 세상을 정의내리려 했던 이지도르처럼, 어린아이가 만들었다는 게임에 빠져있던 포피엘스키처럼 단순한 것이 분명한 것이라고. 그래야 비로소 느끼게 된다고.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2-06-11 15: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6-11 16: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6-11 16: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6-11 16: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0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하드보일드 형태 소설을 처음으로 읽어서인지 아직 그다지 와닿지는 않다. 부적응 상태라고 해야겠지. 추리소설을 좋아하지만 하드보일드 만큼은 제외하고 읽었다. 대부분 꽤 오래된 책들이어서 읽으려고 시도했을 때 곰팡이 냄새에 가로막혔다. 그만큼 시도가 적었다는 얘기다. 평소에 책을 읽고도 같은 책에 대한 서평을 잘 읽지 않는 편이다. 읽기 전에는 더욱 영향 받아 내 감상과 다른 사람 느낌을 착각할까봐. 이 책에 대해 하나같이 극찬을 하는데 이번엔 일부러 다른 사람 서평을 읽어봤다. 도대체 뭐라고들 적어둔건가 해서. 서평이라기 보다 리뷰라면 후기겠지만. 대부분 줄거리를 읊어놨다. 줄거리는 책을 읽으면 되는 건데 굳이 줄거리들을 적어놓았다는 건 나처럼 잘 모르는 거 아닐까. 내멋대로 짐작해 본다.


책은 쭉쭉 읽힌다. 무엇 때문에 읽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게 문제다. 처음에 읽고 나서 느낌이 나쁘지 않아 하드보일드 유형 책을 더 읽어보면 그 깊은 맛을 알겠다. 그냥 담배도 아니고 줄담배를 피워줘야 할 것 같다. '가이후 마사미'가 실제로 담배를 계속 피워달라고 요청하는 것을 보고 약간 질리기도 했다. 음... 애타는 마음은 알겠는데 난 또 현실화시켜 줄담배 피는 그 속을 걱정하고 있다. 마감시간을 얼마 남기지 않은 채 한 손에는 연기가 나는 담배를 끼워두고 한 손에는 펜을 들어 원고지에 글을 써내려가는 모습을 상상하며. 작가가 이 책을 쓸 때 딱 그랬을 것만 같다. 타자기를 쓰는 건 '사와자키'라는 인물을 만든 작가와 어울리지 않으니까. 


건조하기 이를 데 없다. 건조해서 오히려 자연스럽기도 하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아서 여느 추리 소설과 느낌이 많이 다르다. 관찰자로 사건을 풀어나가는 것이 탐정이라는 직업에 잘 들어맞아서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이 생겨난 건지 모르겠다. 탐정 뿐만 아니라 다른 인물들 감정표현도 약한 편이다. 소설 전체가 다 회색, 연기색이다. '사와자키'라는 인물을 만든 하라 료 작가도 평범한 환경에서 살아오지는 않았을 것 같다. 책 처음에 등장인물들이 여럿 소개되는 것을 보며 이 많은 인물들이 어떻게 얽혀있을까 상상해보았다. 그러고보면 세상이라는게 더 복잡하고 많은 사람들끼리 서로 옷깃을 스쳐지나가는 거니까. 


직장상사에게 갈굼당하고 퇴근 후 동료들과 필름이 끊기도록 술을 마시며 길바닥에 피자를 부치고 게임하다 마누라에게 걸려 등짝을 얻어맞는 동안 아이는 울어대고... 사람들과 티격태격하거나 지지고볶는 그런 일상과는 거리가 먼, 주인공 '사와자키'는 '거리두기'가 일상인 사람이다. 외로운 게, 밤이, 혼자 마시는 술이 좋은. 작가가 그랬겠구나.


책을 읽을 때 교정하면서 읽는 불편한 버릇을 가진 나는 번역에 민감하다. "저 만치 앞서가다" 같은 문장은 익숙하지만 이 책에 나온 문장, " ~생각할 수 없을 만치 실감이 났답니다." '만큼' 이나 '정도' 가 아닌 '만치'라는 단어가 낯설다. 왠지 사어같은 느낌이 난다. 이 문장을 보고 역자가 꽤 나이든 사람이겠구나 짐작했다. 그 외에도 잘 안 쓰는 단어 몇 가지가 있었는데 굳이 나열하지 않겠다. 이 책이 2008년 번역본이고 10년 뒤에도 같은 사람이 이 책을 번역했던데 그 책에도 이 문장을 여전히 '만치' 라는 단어를 썼는지 궁금하다. 역자 소개를 보니 1987년부터 번역을 시작했다고 한다. 예상대로다. 전체 번역은 일본식 어투가 잘 느껴지지 않고 자연스러워 좋다. 번역이 좋아서 읽기 편하다. 외국도서는 누군가 번역에 대해 꼭 얘기해 줬으면 좋겠다 싶어서 가능하면 번역평도 덧붙이려고 한다.


밤이 내는 분위기를 아주 잘 드러내는 소설이다. 매번 밤을 붙들어보려고 그렇게 많은 밤을 지새고 남은 것은 불면증과 무거운 피로감과 만성염증이다. 삼십 대 초반에 여자 헬스트레이너에게 '건강미가 없다'는 말을 들었다. 한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말이어서 그때 꽤 충격을 받았다. 그 말을 듣고 그 사람을 보는데 과연 몸이 탄탄하면서 얼굴이 빛이 나는 듯하다. 직장 생활에 찌들어 칙칙한 얼굴빛을 하고 히마리(?) 없는 나와 달리. 아, 저런 게 건강미 라는 거구나. 그걸 처음 알았다. 


[A가 X에게]에서 '베드'라는 사람이 하는 말인데 이름도 '베드'라니. 원어도 Bed인지는 모르겠지만.

밤에는 또 다른 삶이 펼쳐져. 불켜진 약국에서 당신이 야근하는 모습을 본 적도 있지. 당신과 거기에 대해 이야기해 본 적은 없지만 우리 둘 다 알고는 있을 거야, 밤에는 또다른 삶이 펼쳐진다는 거, 아주 다르지. 아주 달라, 그리고 밤에 일하는 사람들은 밤은 물론 그 밤에 일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과도 아주 가까워지지. 밤에는 시간도 훨씬 친절해지는데, 아무것도 기다릴 게 없고, 밤에는 아무것도 구식으로 보이지 않아. - P46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기억의집 2022-06-04 12: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진짜 건조하죠. 세세한 감정 묘사가 없더라고요. 귀찮아서 묘사를 안 하는 건지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저는 어제 감시 당하는 여자 읽으면서 그게 95년작이니깐 거의 삼십년 전 작품이잖어요. 근데 나름 탐문 과정을 재밌게 읽었어요. 그 단편 읽고 .. 감정의 과잉을 많이 드러내는 묘사가 좋은지 아니면 드라이하게 쓰는 게 좋은지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저는 좀 성격이 건조해서.. 잘 맞는 작가예요!!!!!

samadhi(眞我) 2022-06-04 12:31   좋아요 0 | URL
우리가 어린시절 ‘어른‘이라고 보았던 어른에 가까운 느낌같기도 해요. 이 작가가 기억의집 님과 비슷한 성격일 수도 있고 비슷한 취향이거나 지향점이 비슷할 지도 모르고요. 말을 많이 하면 꼭 실수를 하게 되는 걸 잘 아는 걸 수도 있고. 저는 딱 그렇구요^^ 지금은 관찰자, 객관자, 목격자 쪽으로 마음이 쏠려서 가려고 하는데 습관이 무서워서. 잘 모르지만 인간 본연에 이르려는 시도같기도 해요. 하드보일드라는게요.

감은빛 2022-06-04 23: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번역에 대한 평을 꼭 넣는 것, 좋은 것 같아요. 대부분 그러시겠지만, 저도 번역이 거슬리면 딱 책을 덮어버리고 싶더라구요.

밤이란 시간을 참 좋아했는데, 요즘은 피곤해서 밤에 뭘 하기가 힘드네요. 하고 싶은 건 많지만, 언제나 시간은 부족하네요

samadhi(眞我) 2022-06-05 03:14   좋아요 0 | URL
「프롤레타리아의 밤」을 도저히 못 읽겠더라구요. 원서를 읽을 능력이 된다면야 좋겠지만. 설마 원작자가 그렇게 횡설수설했을까 싶을 만큼 번역이 엉망이었어요. 읽고 싶은 책인데 속상해요.

몇 년 만에 동아리 모임 다녀와서 내내 웃다 노래부르다 조금 전에 집에 왔네요. 갈까, 말까 망설였는데 가길 잘했어요. 그리운 얼굴들 보니 가슴이 확 트이고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