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0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김화영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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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8년 동안 흥신소에서 일한 것이 사건(?) 해결-기억 회복, 자아 발견-에 이르게 한다. 그런 경험이 있다고 해서 누구나 주인공처럼 해낼 수는 없겠지. 주인공이 자기가 누구인지를 파헤쳐 가는 과정이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는 듯 느껴졌다. 어떻게 그리도 자신을 차분히 바라보고 정리해 나갈 수 있을까.

 

 나라면 조바심 내고 답답해하다가 허둥지둥,  뒤죽박죽 헛발질하다 일을 그르치고 더 큰 혼란에 빠지고 말텐데. 긴가민가, 있는 듯 없는 듯 은근하게 끄는 힘이 있다. 이렇다 할 큼지막하고 극적인 뭔가도 없이 호기심을 자극해 자꾸 궁금해지는 걸. 주인공을 따라 옆에서 함께 추리해가는 재미도 쏠쏠하겠다.

 

 어쩌면 몰라서 마음 편한 구석도 있겠지만 자기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이 얼마나 두려울지 상상하기 싫다. 자기가 아닌 누군가로 산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자신을 아는 사람을 만나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것이 얼마나 불안하고 불편할지.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알 수 없는 어둠 뿐일테니. 아, 그래서 어두운 상가. 가 주인공이 사는 곳이구나. 하지만 또 보통으로,  그저 인간으로 살아가는 인간의식 수준으로 해석하는 것일 뿐 우리가 믿고 있는 우리가 과연 진짜 우리인가,  내 자신이 맞는가... 파고 들어가면 도무지 알 수 없어지니까.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지. 그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고 인생이니.

 

한번만 읽고 말 소설은 아닌데 번역이, 번역이 에휴~ 한숨 나오게 별로여서 영 읽을 맛이 안 난다. 우리식 어법에 어긋나는 듣도 보도 못한 표현은 물론이고 영어식(프랑스어니까 라틴어식이라고 하는게 맞을까) 표현이 난무하다. 서구에서 유학한 사람들이 자주 쓰는 표현법을 그대로 따랐다.

 

 "왜냐하면~하기 때문이다.", 현재완료거나 과거완료식 표현이라고 할까. 우리말에서 잘 쓰지 않는 "그랬었었다",  "했었다" 그리고 관사 위치가 지나치게 서구식이다. "긴 의자 하나" 라고 하면 될 것을 "하나의 장의자" 같은 식으로 "의" 를 너무 자주 썼다. 어순이 우리말과 반대이다. 복수형도 지나치다. 우리말엔 굳이 "~들" 이라 하지 않아도 앞 뒤 문맥을 보고 그것이 복수인지 단수인지 알 수 있는데. 이런 정도는 차라리 애교라 할 수 있고 대화에서 구어체보다 문어체에 어울리는 표현도 많이 쓰고 있다. 글 전체가 부자연스럽다. 가장 어색하고 이상한 건 책 제목이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라니. 겉멋이 잔뜩 든 되다 만 문구다. 어두운 상점가, 어두운 상가, '거리 가' 라는 글자가 좀 그렇다면 어두운 상점들이 있는 거리라고 하면 될 것을. 겉멋이 들었다는 건 '멋'을 모르는 뭣 모르는 사람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원서 읽을 능력이 안 되거든 닥치고 읽으면 될 것을, 난 여전히 역자가 옮긴 글에 일일이 화내며 트집잡고 토달고 있다. 좋은 작품인데 다른 사람이 번역한 책이 없다는 게 아쉽다. 작가가 쓴 글이 무척 아름다울 거란 짐작은 가는데 원문 그대로 읽어낼 수가 없어 속상하다. 한국어를 잘 아는 프랑스어 번역가님하, 이 책 좀 번역해 달란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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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주정뱅이
권여선 지음 / 창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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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땐 단편을 참 좋아했다. 빨리 결론이 나는 게 좋았고 여러가지 이야기들을 읽을 수 있어 좋았다. 나이들면서 게으름이 더 심해져 길고 끝없이 이어지는 이야기가 좋아졌다. 잘 쓴 단편을 찾기가 어려웠던 것도 단편을 피하게 되는 이유가 되었다. 처음에 권여선 장편을 사려다 평이 좋아서, 제목에 이끌려-술 못 먹는 남편이 맥주 한 병, 안동소주 두 잔이 주량인 내게 늘 하는 말이 "이 주정뱅이" 이다- 골랐더니 역시나 건질 만한 단편이 몇 편 안 되네. 일곱 편이 실려있는데 그 가운데 딱 두 편이 좋다. 제목부터 마음에 드는 봄밤과 이모. 내가 좋아하는 단어들이네.

 

봄도 밤도 모두 설레는 것들인데 그 둘을 합친 봄밤은 달콤하고 저릿하고 우지끈하다. 잠들지 못해 길을 나선 그 밤, 낮보다 더 운치있고 환한 벚꽃을 보며 걷노라면 괜스레 얼굴이 붉어진다. 콩닥콩닥 들뜬 마음으로 너에게 편지를 쓰던 봄밤. 차가운 밤공기도 부드럽고 훈훈했다. 춘래불사춘의 "사" 자를 죽을 사로 잘못 알고 봄이 죽지도 않고 다시 왔다는 헛소리를 했다가 그 말의 유래를 알게 되고 왕소군이라도 된 듯 처연한 기분으로 밤길을 뚜벅뚜벅 걷다가 다시 또 편지쓰다가 사랑에 빠진 봄밤. "흐음~" 하고 기분 좋은 콧소리가 나는 'ㅁ' 받침 마저도 황홀했지.

 

이 소설 첫 단편, 봄밤을 읽다가 소리내지 않으려 입을 틀어막았지만 덜컥, 꺽꺽 울음이 터져버렸다. 참으려다보니 더 힘겨워 어깨를 들썩이며 통곡에 가까운 울음을 토했다. 주먹을 악물어 참아야 할 만큼 둘의 사랑이 예쁘고 아팠다. 둘이 불행의 끝자락에서 만나지 않았다면 서로를 알아볼 수 있었을까. 갑자기 영화, 해바라기에서 남자주인공(여주인공 이름만 기억하고 있다.)이 바닷가에서 장난치다가 소피아 로렌 귀걸이를 삼켰던 장면과 징용을 피하기 위해 병원에서 미친 척하던 장면들이 떠오른다. 연애를 막 시작하던 때라서 그 장면들만 보고도 엉엉 울어댔다. 네가 얼마나 보고싶었는지 모든 장면에서 네가 보였어. 이 소설 봄밤은 그랬다. '사랑은 그런 거야.'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사랑을 하는 이, 사랑을 아는 이 가슴으로 후두둑 파고든다.

 

이모는 내 60대, 70대 절친과 닮았다. 한없이 열려있고 따뜻하고 자유로운 분들. 세상 불행 다 지고도 제 몫이라 여기고 우뚝우뚝 살아온 당신들에게 어찌 그 세월 버틸 수 있었나 물으면 살 만했다 하신다. 소설 속 이모는 우리 언니같고 친구같고 자주 만나 마구 수다떨고 싶은 존재다. 같이 있으면 평온하고 행복해지는 사람. 언제든 달려가 기대어 울 수 있는 다감한 품을 내어주는 당신이 그리워 바람이 불면 문득 전화를 하거나 그분들 댁에 찾아가고는 한다. 그러고는 고양이처럼 가르릉 거리면 그저 예쁘다 하신다.  

 

나머지 단편 5편은 이야기를 서둘러 끝낸 느낌이거나 처음부터 결론이 없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단편이 으레 결론 없는 이야기들이 많지만 그래도 무언가 하려는 얘기는 있어야 하는데 술 먹고 어딘가에서 들은 이야기들보다 알맹이가 없다. 참, 이 소설은 취기에 읽게 되는 치명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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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13 09: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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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14 00: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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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터에서
김훈 지음 / 해냄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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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 생선 가시를 발라 남편 밥 위에 올려주며 내게 그리 해주신 아부지 얘기를 했는데, 마차세가 이도순 유품을 태우던 장면을 보다가 목이 멘다. 못난이인 나를 그저 사랑해 준 사람. 갈색 점퍼를 당신 몸처럼 입고 사셨던 분. 평생 좋은 옷 한 벌 못 입힌 게 한이라며 서럽게 우시던 엄마가 양복 한 벌과 구두 한 켤레를 아부지 무덤 앞에서 태우셨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양복 위에 가지런히 놓아둔 구두가 타던 모습을, 연기냄새를 잊지 못하겠다.

지독한 가난속에서 10대 초반부터 홀어머니와 누이 셋을 책임져야 했던 고단한 삶을 살아온 청년이었던 우리 아부지는 다시, 육남매를 먹이고 입히느라 하루도 주름 펴보지 못했다. 우리네 어미, 아비가 어두운 한국 현대사에서 짊어져야 했던 질곡이 우리 아부지에게만 특별히 무거웠던 것은 아닐테지만, 곁에서 지켜보고 자란 자식 눈에는 절절하고 애끊는 일이다. 마장세, 마차세에게 아버지, 어머니 인생이 버거웠듯 그렇게도 아픈 날들이 소설에 촘촘히 박혀있다.

인민군이 서울에 진주할 때 고등학생들이 불렀다던 인민항쟁가 가사가 임화가 쓴 시에 곡을 붙인 거구나. 가사가 "일어나라 노예되기 싫은 사람들아" 로 시작하는 중국 국가와 닮았다. 작가가 의도한 것인지 모르지만 문재인 대통령 아버지가 겪으셨다던 흥남철수 얘기가 실려있다. 그때 모습을 상상하니 끔찍하다. 동족상잔이 가슴 찢어지게 와닿는다.

"어머니 글씨는 가나다라를 겨우 엮어가면서 비틀거렸는데 혈연에서 달아나는 일의 어려움을 일깨워주었다." 라고 한 마차세 독백에 공감했다. 난 아직도 엄마가 서툰 글씨로 "이모집에서 자고 오깨(맞춤법도 틀린)" 라고 내게 쓴 별 것 아닌 메모를 지갑에 넣고 다닌다. 글씨에 새겨진 엄마가 귀엽고 가엾고 그립다.

김훈 작품은 『칼의 노래』이후로 일부러 읽지 않았다. 능력도 없으면서,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작가를 질투했다. 내키지 않았지만 독서모임 때문에 강제로(?) 읽기 시작한 소설에 여전히 시같은, 칼끝같은 감성이 살아있다. 김훈 글은, 담배를 피우지 않는 내 마음대로 상상한 거지만 담배 한 모금 머금고 내뿜는 몽롱하고도 멍한 눈에 들어오는 저 먼 하늘을 닮았다.

텅 빈 몸짓으로, 허깨비로 일생을 후여후여 걸어온 사람들을 바람에 날려 이리저리 흔들거리는 빨래 그림자로, 바싹 마른 검불로 묘사한 것에 하아~감탄한다. 마동수가 몇 번이나 중얼거린 '여기가 거기인가'가 이 책 제목, 『공터에서』를 뜻하는게 아닐까. 공허하고 허무한 삶을 못견디게 힘겨워한 마동수, 아버지를 닮지 않으려 발버둥치던 형제들이, 삶의 허무를 지고 가는 우리들 모두가 짠해진다. '삶이 그러하단다.' 하고 먼저 간 이들이 속삭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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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30 10: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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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adhi(眞我) 2018-01-30 11:53   좋아요 0 | URL
잘 지내셨죠? 사람이 얼마나 게을러질 수 있는지를 체험하고 사느라 그랬어요.
 
우체국
찰스 부코스키 지음, 박현주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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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첫 장부터 푹, 웃음이 터졌다. 공공장소에서 크게 너털웃음 떠뜨리며 웃고 또 웃었다. 남편에게 첫 장을 보여주며 이 작가, 조르바같은 사람이래. 그러다가 둘이 조르바 얘기를 나눈다. "작가는 조르바라는 인물을 어떻게 만들었을까?",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실제로 그런 인물을 만났던 게 아닐까?", "조르바는 주체적으로 살았잖아, 그런 인간형 드물지 않아?", "음주가무 좋아하는, 넉살좋은 그리스, 이탈리아쪽엔 그런 한량(?)이 꽤 있지 않을까?", "우리가 만나보지 못해 그렇지, 우리나라에도 많이 있을걸."  오래 전에 조르바를 나보다 먼저 읽은 남편은 키득거리며 조르바가 나랑 비슷하다고 하며 그래서 더 자주 웃는다고 했다. 난 그저 멋대로 책임지지 않고 살아갈 뿐 주체적이지도 자유롭지도 못하는걸.

 

작가가 우체국 일을 하며 겪은 사람들 일화 끝에 자연스레 비틀어 얘기하는 것이 그렇게 좋은거야. 꼭 한 마디씩 덧붙이는 말에 웃음을 멈출 수가 없다. 시끄럽게 떠드는 사람 때문에 자기가 살해되고 있다는 말에 내가 죽겠네 이 사람아.

 

사람을 경계하는 겁먹고 반 벌거벗은 여자를 강간하던 것만은 이해해 줄 수 없다. 엄청난 거부감이 들고 언짢았다. 선을 넘어다니는 건 좋지만 이건 아니지요, 치나스키씨. 그 부분은 실화가 아니길 바란다.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소설을 해치는 이야기를 꼭 해야 했을까. 그래서 별점 하나를 뺐다.

 

끔찍한 반복노동과 악조건, 지주보다 더한 마름같은 상사들의 갈굼을 자기 나름의 개김(?)으로 질기게 견디어낸게 용하다. 그러면서 의미없이, 쓸데없는 나날을 보내는 심정을 십분 이해할 것도 같다. 어차피 삶이란 무의미. 그러니 이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일들과 말도 안 되는 삼류 인간들에게 시달린들 어떠리. 나 또한 삼류인걸. 그런 쓸데없는 짓거리가 그런대로 괜찮거든. 이른바 구질구질(?)하지 않고 안정적(?)으로 사는 그대들이, 날 짠하게 여기지만 '뭣도 모르는 것들이!' 하고서 자기 위안 삼는다. 틀 따위 개나 줘버리는 부코스키 형님이 몇 수 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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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31 12: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3-31 12: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7-03-31 16: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부코스키, 좋죠.. 전 이 사람 소설 읽고 나면 묘하게 우울한 면이 몰려오더군요..
부코스키형, 진짜 쿨한 인간형이죠..ㅎㅎㅎ

samadhi(眞我) 2017-03-31 17:46   좋아요 0 | URL
이 형아는 욕심이 없더라구요. 술 빼고^^. 신발 밑창으로 못이 뚫고 들어와도 생필품 살 돈을 술 마시는데 다 써버리는 징한 고래형님.

컨디션 2017-03-31 18: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조르바를 안읽어봐서 모르겠지만(엄청난 바람둥이로 알고는 있는데) 여기 우체국 직원 치나스키랑 맞아떨어지는데가 많은 인물인가 봅니다.^^

이참에 두 작가를 좀 찾아보니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1883년생 그리스 출신이고 유럽 아시아등 안가본 데가 없이 살다갔고, 찰스 부코스키는 1920년생 독일 출신이긴 하지만 일찌감치 미국으로 건너가 활동한 케이스네요. 암튼 두사람 이름도 비슷한 게(안틀리게 쓰느라 진땀 뺏음요 ㅎㅎ) 참으로 인생 걸쭉하게 살다갔네요.

samadhi(眞我) 2017-03-31 19:35   좋아요 0 | URL
구름처럼 바람처럼 살고 싶어하는 이들의 로망을 몸으로 보여준 사람들이죠. ㅋㅋㅋ
조르바가 조금 더 순박한(?) 느낌 같고요.
조르바도 읽어보세요. 그 매력적인 인물에게 빠져들 겁니다.
 
한티재 하늘 1
권정생 지음 / 지식산업사 / 199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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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죽여 흐느끼다가 서러움에 받쳐 꺽꺽 운다. 한티재 사람들은 그 힘든 시절을 어찌 살아냈을꼬. 먹을 것이 없어 내내 곯고 그래도 살겠다고 주린 배를 안고  우리네 어미 아비들이 후여후여 지나온 길을 오늘 우리는 당연한 듯 걷는다. 책을 읽는 내동 눈물 마를 새가 없다. 그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틀림없이 있었던 일을 권정생 선생은 옛이야기 하듯 들려준다.

 

한티재 하늘은 한티재에서 고단하고 숨가쁜 세월을 살아낸 사람들을 이르는 것이리라. 책 속에 박혀있는 말들에 취해 홈빡 빠져든다. 책에 쓰인 말들을 되뇌어 보고 여러 번 소리내 발음해본다. 책에 나온 풀꽃들과 나무들을 찾아 백과사전을 뒤져 그 모습을 보며 아아, 그 꽃, 그 풀이구나. 한다. 이순이, 분옥이, 귀돌이... 정다운 이름을 가진 이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이적지 이렇게 우리 땅, 우리 하늘 닮아 우리다운 말글을 본 적이 없다. 이런 예쁜 말이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았구나.

 

책에 쓰인 모든 단어, 문장이 아름다워 빙긋 웃게 된다. '흰구름이 나실나실 떠 있고 햇빛이 자랑자랑했다.' . '나실나실'이라는 말은 '짧고 연한 풀이나 털 따위가 늘어져 자꾸 가볍게 흔들리다' 이다. 구름이 솜털처럼 나부끼는 느낌을 뜻하는 것일 수도 있고 '넘실넘실'(부드럽고 가볍게 자꾸 움직이는 모양)을 뜻하는 말일 수도 있겠다. 어느 것이든 솜사탕처럼 퐁신퐁신한 구름이 나풀거리는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자랑자랑'은 '자꾸 높고 맑게 울리는 소리 또는 그 모양' 이다.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모양이 떠오른다.

 

가장 잘 쓴 소설은 전지적 작가시점을 취한 것이라고 들었다. 전지적 작가 시점 하면 고대소설이 떠올라 시시하고 빤한 느낌이 들어 그 말에 수긍하지 못했는데 권정생 선생의 인간미가 스며있는 글을 보니 오호, 알갔다. 등장인물들이 겪는 수난을 묘사하면서 그 속에 다그치듯 가르치는 말이 아닌 고통을 넘어서는 깨달음이 아픈 이들, 책을 읽는 이들을 시나브로 감싼다.

 

경상도 사투리라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 투성이지만 우리동네 말과도 닿아 있어 미루어 짐작해 읽는다. 멋대로 알아듣고 잘못 이해한 것도 많을 것이다. 선생에게 무슨 뜻인가 여쭙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이 책을 갈무리하지 못하고 먼 곳으로 떠나셨다. 시처럼, 꽃처럼 쓰인 글이 포근하고 달콤하고 아릿하다. 이 땅에 사는 이들이 모두 읽었으면 하는 책이다. 이처럼 고운 말글을 닮아 우리도 말갛고 아리따워 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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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30 08: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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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30 08:5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