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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티재 하늘 1
권정생 지음 / 지식산업사 / 1998년 11월
평점 :
숨죽여 흐느끼다가 서러움에 받쳐 꺽꺽 운다. 한티재 사람들은 그 힘든 시절을 어찌 살아냈을꼬. 먹을 것이 없어 내내 곯고 그래도 살겠다고 주린 배를 안고 우리네 어미 아비들이 후여후여 지나온 길을 오늘 우리는 당연한 듯 걷는다. 책을 읽는 내동 눈물 마를 새가 없다. 그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틀림없이 있었던 일을 권정생 선생은 옛이야기 하듯 들려준다.
한티재 하늘은 한티재에서 고단하고 숨가쁜 세월을 살아낸 사람들을 이르는 것이리라. 책 속에 박혀있는 말들에 취해 홈빡 빠져든다. 책에 쓰인 말들을 되뇌어 보고 여러 번 소리내 발음해본다. 책에 나온 풀꽃들과 나무들을 찾아 백과사전을 뒤져 그 모습을 보며 아아, 그 꽃, 그 풀이구나. 한다. 이순이, 분옥이, 귀돌이... 정다운 이름을 가진 이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이적지 이렇게 우리 땅, 우리 하늘 닮아 우리다운 말글을 본 적이 없다. 이런 예쁜 말이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았구나.
책에 쓰인 모든 단어, 문장이 아름다워 빙긋 웃게 된다. '흰구름이 나실나실 떠 있고 햇빛이 자랑자랑했다.' . '나실나실'이라는 말은 '짧고 연한 풀이나 털 따위가 늘어져 자꾸 가볍게 흔들리다' 이다. 구름이 솜털처럼 나부끼는 느낌을 뜻하는 것일 수도 있고 '넘실넘실'(부드럽고 가볍게 자꾸 움직이는 모양)을 뜻하는 말일 수도 있겠다. 어느 것이든 솜사탕처럼 퐁신퐁신한 구름이 나풀거리는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자랑자랑'은 '자꾸 높고 맑게 울리는 소리 또는 그 모양' 이다.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모양이 떠오른다.
가장 잘 쓴 소설은 전지적 작가시점을 취한 것이라고 들었다. 전지적 작가 시점 하면 고대소설이 떠올라 시시하고 빤한 느낌이 들어 그 말에 수긍하지 못했는데 권정생 선생의 인간미가 스며있는 글을 보니 오호, 알갔다. 등장인물들이 겪는 수난을 묘사하면서 그 속에 다그치듯 가르치는 말이 아닌 고통을 넘어서는 깨달음이 아픈 이들, 책을 읽는 이들을 시나브로 감싼다.
경상도 사투리라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 투성이지만 우리동네 말과도 닿아 있어 미루어 짐작해 읽는다. 멋대로 알아듣고 잘못 이해한 것도 많을 것이다. 선생에게 무슨 뜻인가 여쭙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이 책을 갈무리하지 못하고 먼 곳으로 떠나셨다. 시처럼, 꽃처럼 쓰인 글이 포근하고 달콤하고 아릿하다. 이 땅에 사는 이들이 모두 읽었으면 하는 책이다. 이처럼 고운 말글을 닮아 우리도 말갛고 아리따워 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