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주정뱅이
권여선 지음 / 창비 / 2016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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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땐 단편을 참 좋아했다. 빨리 결론이 나는 게 좋았고 여러가지 이야기들을 읽을 수 있어 좋았다. 나이들면서 게으름이 더 심해져 길고 끝없이 이어지는 이야기가 좋아졌다. 잘 쓴 단편을 찾기가 어려웠던 것도 단편을 피하게 되는 이유가 되었다. 처음에 권여선 장편을 사려다 평이 좋아서, 제목에 이끌려-술 못 먹는 남편이 맥주 한 병, 안동소주 두 잔이 주량인 내게 늘 하는 말이 "이 주정뱅이" 이다- 골랐더니 역시나 건질 만한 단편이 몇 편 안 되네. 일곱 편이 실려있는데 그 가운데 딱 두 편이 좋다. 제목부터 마음에 드는 봄밤과 이모. 내가 좋아하는 단어들이네.

 

봄도 밤도 모두 설레는 것들인데 그 둘을 합친 봄밤은 달콤하고 저릿하고 우지끈하다. 잠들지 못해 길을 나선 그 밤, 낮보다 더 운치있고 환한 벚꽃을 보며 걷노라면 괜스레 얼굴이 붉어진다. 콩닥콩닥 들뜬 마음으로 너에게 편지를 쓰던 봄밤. 차가운 밤공기도 부드럽고 훈훈했다. 춘래불사춘의 "사" 자를 죽을 사로 잘못 알고 봄이 죽지도 않고 다시 왔다는 헛소리를 했다가 그 말의 유래를 알게 되고 왕소군이라도 된 듯 처연한 기분으로 밤길을 뚜벅뚜벅 걷다가 다시 또 편지쓰다가 사랑에 빠진 봄밤. "흐음~" 하고 기분 좋은 콧소리가 나는 'ㅁ' 받침 마저도 황홀했지.

 

이 소설 첫 단편, 봄밤을 읽다가 소리내지 않으려 입을 틀어막았지만 덜컥, 꺽꺽 울음이 터져버렸다. 참으려다보니 더 힘겨워 어깨를 들썩이며 통곡에 가까운 울음을 토했다. 주먹을 악물어 참아야 할 만큼 둘의 사랑이 예쁘고 아팠다. 둘이 불행의 끝자락에서 만나지 않았다면 서로를 알아볼 수 있었을까. 갑자기 영화, 해바라기에서 남자주인공(여주인공 이름만 기억하고 있다.)이 바닷가에서 장난치다가 소피아 로렌 귀걸이를 삼켰던 장면과 징용을 피하기 위해 병원에서 미친 척하던 장면들이 떠오른다. 연애를 막 시작하던 때라서 그 장면들만 보고도 엉엉 울어댔다. 네가 얼마나 보고싶었는지 모든 장면에서 네가 보였어. 이 소설 봄밤은 그랬다. '사랑은 그런 거야.'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사랑을 하는 이, 사랑을 아는 이 가슴으로 후두둑 파고든다.

 

이모는 내 60대, 70대 절친과 닮았다. 한없이 열려있고 따뜻하고 자유로운 분들. 세상 불행 다 지고도 제 몫이라 여기고 우뚝우뚝 살아온 당신들에게 어찌 그 세월 버틸 수 있었나 물으면 살 만했다 하신다. 소설 속 이모는 우리 언니같고 친구같고 자주 만나 마구 수다떨고 싶은 존재다. 같이 있으면 평온하고 행복해지는 사람. 언제든 달려가 기대어 울 수 있는 다감한 품을 내어주는 당신이 그리워 바람이 불면 문득 전화를 하거나 그분들 댁에 찾아가고는 한다. 그러고는 고양이처럼 가르릉 거리면 그저 예쁘다 하신다.  

 

나머지 단편 5편은 이야기를 서둘러 끝낸 느낌이거나 처음부터 결론이 없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단편이 으레 결론 없는 이야기들이 많지만 그래도 무언가 하려는 얘기는 있어야 하는데 술 먹고 어딘가에서 들은 이야기들보다 알맹이가 없다. 참, 이 소설은 취기에 읽게 되는 치명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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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13 09: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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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14 00: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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