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보탑으로부터 그런 얘길 건네들은 석가탑처럼, 그녀는 표정없이 커피 잔의 손잡이를 매만지기만 했다. 분명 우리보다는 탑들이 알프스에 오를 확률이 높을 정도로 우리는 가난했었다. 하지만그 순간 누구도 그것을 농담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는 스무살이었고, 이끼가 낀 탑보다는 확실히 푸른 인생의 가능성을 보유하고 있었다. 있잖아요, 하고 그녀가 속삭였다. 정말... 정말로 - P21

단지 뭐랄까... 무언가 갑자기 줄어든 느낌이야.
줄어들었다구요?
음... 이를테면 요구사항 같은 거야. 세상에 대한 요구... 이랬으면 좋겠다, 저랬으면 좋겠다 같은... 예전엔 온통 그런 것들로 가득 차 있었는데 말이야. 왠지 그런 것들이 사라진 기분이야. 더는그래선 안 될 것도 같고... 설명은 잘 못하겠지만 아무튼 그래. 뭐,
스무 살이 된 건 자기도 마찬가지잖아. 달라지거나 그런 거 없어?
예를 들면 이제부턴 말을 놔야지, 라든가. 路아, 아직은요. 그리고 전 정반대예요.
반대라니?
스무 살이 되면서... 처음으로 요구하고 싶은 게 생겼거든요.
요구?
하지만 잘 모르겠어요. 그래도 되는 건지. 또... 어떻게 해야 할지. 나... 단 한 번도 뭔가를 요구할 수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요구해선 안 된다고... 어떻게... 내가... - P30

그리고 하루, 요한이 결근을 한 날이었다. 장 그르니에의 『섬을들고 갔다 한 줄도 읽지 못한 날이었고, 가을과 겨울 사이에 친 커튼 같은 비가 종일토록 드리워진 날이었다. 비를 맞으며 외로운섬처럼 서 있던 나무들과... 가을과 겨울, 어느 쪽으로도 떠내려가지 못한 채... 배수구 속으로 사라지던 은행잎들이 생각난다. 늦은퇴근이라 주변은 캄캄했고, 나는 공중전화를 붙든 채 두 통의 전화를 걸고 있었다. 글쎄 별 일 없다니까. 어머니도 요한도 아무 일 없었지만, 드리워진 빗줄기처럼 왠지 매우 기분이 무거운 날이었다. - P161

모처럼의 휴일은갑자기 우리가 젊다는 사실과, 이 세상이 지하주차장처럼 칙칙한 곳이 아니란 사실을 동시에 느끼게 해주었다. 그렇군, 면도를하면서 나는 중얼거렸다. 실은 젊었던 얼굴이 마치 발굴된 화석처럼 거울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요한은 말했었다. 세계라는 건말이야, 결국 개인의 경험치야. 평생을 지하에서 근무한 인간에겐지하가 곧 세계의 전부가 되는 거지. 그러니까 산다는 게 이런 거라는 둥, 다들 이렇게 살잖아... 그 따위 소릴 해선 안 되는 거라구. 너의 세계는 고작 너라는 인간의 경험일 뿐이야. 아무도 너처럼 살지 않고, 누구도 똑같이 살 순 없어. 그딴 소릴 지껄이는 순간부터 인생은 맛이 가는 거라구. 이하동문이라고 - P16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서곡님의 글을 통해 알게 된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에서 열리는 박완서 작가의 아카이브 전시. 8월 주말에 가봐야지 생각하다가 마침 마지막 휴가날인 어제 시간이 있어 가보기로 했다. 낙성대역에 내려 중국집에서 가지튀김과 만두로 점심을 먹고 마을버스를 타고 중앙도서관 근처에서 내렸다. 이 학교 왜 이리 넓어…
일반인이 전시를 보려면 신분증을 제출하고 입장가능하다. 걸어가다보니 생각났다. 신분증을 가져오지 않은 것을… 분명 어제까지 챙겨야지 했는데… 홀라당 까먹었다. 남편의 신분증을 맡기고 내가 들어갈 수 있는지 물어나보자 하고 갔다.
그런데 중앙도서관이 소독 및 대청소로 임시휴관이란다. 홈페이지에는 아예 안내도 없다. 이런 불친절한 공무원 마인드. 아무도 오지 않는 전시인가.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ㅠ
무더위에 학교를 구경? 배회? 하다 커뮤니티센터에 교보문고가 있길래 마침 사려고 한 최승자 시인의 시선집 구매했다.
서울대입구역까지 걸어가려 했으나 너무 더워서 정문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지하철역 근처 교촌치킨으로. 시원한 맥주와 치킨으로 더위를 달래고.
박완서 아카이브는 8월 재도전!


댓글(5)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바람돌이 2026-08-01 12: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 공지도 없는 휴관이라니요. 저기까지 힘들게 간 사람은 어쩌라고요. ㅠ.ㅠ 제가 보기에 이런 일에 제일 무감각하고 느린게 우리 나라에서는 대학인거 같아요.
어제 제가 협조공문을 대학에서 하나 받았는데 말 그대로 제 상급기관도 아니고 협조잖아요. 뭐 좋은게 좋은거라고 좀 귀찮지만 해줄수는 있는데 진짜 무례하게 제 이름과 전화번호까지 개인 메일로 보내라고 해놨더라구요. 어이가 없어서 대학은 진짜 마인드 안 바뀐다 이러면서 보란듯이 직급과 공식 전화보내만 보내고 말았습니다. ^^

햇살과함께 2026-08-01 19:53   좋아요 1 | URL
그러니깐 말입니다! 산동네 있는 대학에 힘들게 갔는데 도서관 앞에만 공지를 떡하니 붙여놓고요.

건수하 2026-08-01 21: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카이브 저도 가볼까했는데 넘 더워서 움직이기가 싫네요. 이러다 못 가지 싶어요… 도서관 홈페이지에는 휴관이라고 써있지만 아카이브 전시 홈페이지에는 안 올려놨나보네요… 쯧쯧

낙성대 중국집 추천하시나요? :)

햇살과함께 2026-08-01 21:48   좋아요 1 | URL
그래서 주말엔 차 가지고 가야하나 생각 중입니다.. 맞아요 아카이브 전시 페이지에는 안내가 없더라고요..
여기 화상손만두라는 곳인데 가지튀김 맛있었어요! 여기 오시는 분들 죄다 쟝 블랑제리 낙성대본점 빵 쇼핑백 하나씩 들고 있더라고요. ㅎㅎ

건수하 2026-08-01 21:53   좋아요 1 | URL
장 블랑제리가 아직도 있군요… 가게 되면 가지튀김 먹으러 가겠습니다 ^^!
 
이것도 제 삶입니다 - 섭식장애와 함께한 15년
박채영 지음 / 오월의봄 / 202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정희진의 공부> 7월호를 통해 알게된 다큐멘터리 영화 <두 사람을 위한 식탁>과 이 책. 영화는 아직 보지 못했지만. 이런 삶도 있다. 이런 몸도 있다. 이런 가족도 있다. 정상성이란 무엇일까 정상성에 갇혀 사는 나를 돌아보게 하는 책이다. 나는 과연 벗어날 수 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원서를 조금 읽다가 도서관에서 번역본을 빌려와서 먼저 읽고 원서를 천천히 읽었다. 문장이 어려워서라기보다는 타임 슬립을 플롯으로 다루는 작품이라 영어로만 읽으면 제대로 읽은 것인지 헷갈릴 것 같아서. 성장 소설이자 미스터리 소설이며 타임 슬립이 들어간 약간의 판타지스러운 소설이다. 본격 타임 슬립류의 책이나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머리로 이해가 안 되니 몰입이 안되고 재미가 없다. 답답하다. 과거로 가서 성인인 내가 어린 나를 만난다. 내가 2명이다? 미란다도 마커스나 줄리아와 시간 여행에 관해 이야기하며 답답해하는데 그 심정이 내 심정이다. 이 책은 본격 타임 슬립은 아니어서 재밌게 읽었다. 미란다가 마커스와 샐을 먼저 만나게 했다면 그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까? 미란다가 편지를 썼지만 친구는 구하고 끝내 자신은 구하지 못한 것인가? 미래가 과거를 바꿀 수 있는 것인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처음 폭식을 한 날, 내가 느낀 것은 두려움보다는 자유였다. 음식 앞에서의 자유, 자제력에 대한 불안과 강박으로부터의 자유, 케케묵은 감정으로부터의 자유. 내 의지로 냉장고를 열고 음식을 선택하고 집어 먹으면서 오랜만에 자율성을 발휘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구토 또한 아주 주도적이고 적극적인 행위였다.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은 절대 소화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므로. 구토를 통해 몸에 대한통제권이 아직 나에게 남아 있음을 알 수 있었다. - P52

그러나 어디까지나 내가 지내는 집은 ‘남의 집‘이었다. 눕지 못하고 벽에 기댄 채 잠을 참을 때, 출출한데 냉장고를열 수 없을 때, 갈아입을 옷이 없을 때, 문득 내가 하루를 보낸 곳이 내 집이 아님을 깨달았다. 반찬 투정을 하는 아이옆에서 묵묵히 밥을 먹을 때, 이 집 식탁 위에 내가 고를 수있는 음식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밤이 되고 모두가 씻고 잘준비를 하는데 아직 난 엄마를 기다려야 할 때, 분위기에 걸맞지 않은 내 몸이 부끄러워 차라리 사라지고 싶었다. 초조한 마음을 달래려 입술을 깨물었다. 입 안 속살에 치아 자국이 깊게 파일 때까지 입술을 꽉 물고 놓지 못했다. - P67

모든 인간에겐 자신만의 아픔이 있고 그 아픔은 온 세상의 존중을 받아야 한다고 믿는다. 사회에는 한 인간이 자신의 상처를 딛고 일어날 수 있을 때까지 지지와 응원을 아끼지 않을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서로를 돌보고 회복을 기다리는 것. 실패에 기회를 주고 곁을 지키며 온기를 나누는1일 거기에 우리가 이 땅에 모여 사는 가치와 의미가 있음을믿는다. 내가 오늘 누군가에게 무심코 지은 미소 한 번이 그의 하루를 밝히는 작은 촛불이 될 수 있다는 ‘망상‘을 포기 - P93

하고 싶지 않다. 크고 묵직한 선물이나 관심보다 일상적이고 소소한 온정들이 방황하는 나를 지켜주었다.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인간이, 그런 어른이 되고 싶다. - P94

중요한 건, 내가 나의 상처를 ‘안다‘는 것이다. 나는 내아픔을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타인에게 내 고통과 치료의노력을 인정받을 필요가 없다. 내 상처와 아픔의 주인공은 ‘나‘이기 때문이다.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나밖에 없어"라는 말은 무기력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가능성의 말이기도 하다. 나라도, 타인과 다르게 나를 대할 수 있다는 가능성. 나라도, 내 상처를 보듬을 수 있다는 가능성. ‘이런 나’라도 나를 좋아해줄 수 있다는 가능성. 난 내가 가진 이 최소한의 가능성을 믿고 지지하고 싶다. - P96

아마 누군가는 내게 묻고 싶을 것이다. 폭식과 구토를하면서, 알코올 의존증을 가진 채로 어떻게 정상적인 삶을살 수 있느냐고. 그럼 나는 되물을 것이다. 정상적인 삶이 - P216

무엇이냐고. 폭식과 구토 증상이 있어도 친구를 만나고 공부하고 영화를 보고 생계 활동을 하고 연애하고 반려동물과의 삶을 꾸려가고 있는데, 이것은 왜 정상적인 삶이 아니냐고 말이다. 당신은 정상적인 삶을 살고 있는가? 그렇게생각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정상적‘이라는 개념은 상대적이다. 사람은 타고난 몸, 직장, 습관, 성향에 따라 삶의 형태가 달라진다. 거기에 정상/비정상은 없다. 그러나 질병을 갖게 되는 순간 한 개인의 삶은 쉽게 비정상으로 평가된다. ‘나는 비정상이다‘라는인식은 사람을 위축시킨다. 자신의 욕구를 불신하게 되며다른 사람들의 삶을 모방하기 위해 애쓰게 된다. 그리고 그럴수록 자신의 삶에서 소외된다. - P21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