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스탁필드가 마치 굶주린 수비대가 살려 달라는 애원도 없이 항복하듯 여섯 달 동안의 포위에서 빠져나오는지를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십 년 전이면 저항의 방법이 훨씬 적었을 테고, 적도 포위된 마을들 사이의 접근로를 거의 완전히 손아귀에 넣고 있었을 겁니다. 이런 사실들을 고려할 때 "똑똑한 친구들은 대부분 떠나는데 말이지."라는 하먼의 말이 어떤 불길한 힘을 간직한 것처럼 느껴졌지요. 하지만 사정이 그랬다면 도대체 어떤 방해물이 뒤얽혀 있었기에 이선 프롬같은 사람의 탈출을 막았을까요? - P13
그는 이렇게 느끼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자기 말고 또 있는지, 아니면 자신이 이 애처로운 특권의 유일한 희생자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그러다가 또 하나의 영혼이 똑같은 경이의 감정으로 떨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바로 그의 옆에, 같은 지붕 밑에 살면서, 그가 제공하는음식을 먹는 생명을 지닌 존재였다. 그가 "저 밑에 저것이 오리온자리, 그 오른쪽으로 저 큰 것이 알데바란, 그리고 떼 지어 있는 저 조그마한 별들, 마치 벌 떼처럼 말이야, 그건 플레이아데스성단이고……."라고 말할 수 있는 영혼 말이다. 혹은 그가 양치식물 사이를 뚫고 나온 화강암 바위 선반 앞에서 빙하 시대의 거대한 파노라마와 그 뒤의 막연하고도 기나긴 시대를 펼쳐 보이는 동안 넋을 잃는 바로 그런 영혼 말이다. - P35
이선은 왜 조섬 파월한테 목재를 스탁필드로 가져가게 하고 그가 직접 플래츠까지 태워다 주지 않는지 의심할지 모른다는 것을 알았다. 처음엔 그러지 않을 구실을 생각해 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가 당신을 데려다주고 싶지만 목재 대금을 현찰로 받으러 가야 해서."라고 말했다.이 말을 입 밖에 내자마자 곧 후회했다. 사실이 아니기 때문만이 아니라 - 헤일에게서 현찰로 대금을 받을 가망은 없었다 — 경험에 비춰 보아 지나가 치료받으러 가기 직전에 돈이 생긴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은 경솔한 짓인 줄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순간 이선의 단 한 가지 바람은 어떻게 하 늙은 밤색 말 뒤에서 그녀와 함께 천천히 말을 타고 가는긴 길을 피하는가뿐이었다. - P63
장례가 끝난 뒤에 지나가 떠날 차비를 하는 것을 보고 이선은 농장에 혼자 남게 된다는 근거 없는 공포감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자기도 무슨 말을하는지 깨닫지 못한 채 지나에게 자기 집에 계속 머물러 달라고 부탁했다. 그 후로 가끔 그는 어머니가 겨울이 아니라 봄에만 돌아가셨어도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곤 했다……. - P67
매티가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났고, 이선도 일어서서 매티를 따라갔다. 매티는 부엌 찬장 위에 깨진 접시 조각들을 펼쳐놓았다. 그에게는 산산조각이 난 둘만의 밤이 놓여 있는 것만 같았다. - P81
이선의 말투가 갑자기 열을 띠자 매티는 다시 얼굴을 붉혔다. 다만 한 가지 생각이 가슴에 천천히 스며드는 것처럼 조금 미묘하게……. 매티는 바느질감을 손에 꼭 쥐고 잠자코 앉아 있었다. 이선은 따뜻한 해류가 그들 사이에 놓인 천 조각을따라 자기 쪽으로 흘러오는 느낌이었다. 그는 손끝이 천의 끝자락에 닿을 때까지 조심스럽게 손바닥으로 식탁을 따라 미끄러지듯 손을 뻗었다. 가늘게 떨리는 속눈썹이 그녀가 그의몸짓을 알아차렸고, 그것이 그녀에게 역류를 흘려보냈다는사실을 보여 주는 듯했다. 매티는 천 조각의 다른 쪽 끝자락에 가만히 손을 얹고 있었다. - P89
이선은 그들의 집을 향해 다시 길을 따라 내려갔다. 그러나몇 미터쯤 가다가 얼굴이 붉어져 별안간 걸음을 멈췄다. 금방들은 말을 곰곰이 생각하면서 처음으로 지금 자신이 무얼 하려고 하는지 깨닫게 되었다. 지금 헤일 부부의 동정심을 이용하여 거짓 핑계로 돈을 얻어 내려고 계획하는 것이 아닌가. 황급히 스탁필드로 걸음을 내딛은 것이 그 수상쩍은 목적을 명백히 보여 주는 증거였다.광기에 사로잡혀 어떠한 행동을 했는지 갑자기 깨닫자 그광기가 사라지며 자기 앞에 놓인 삶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있었다. 그는 가난한 농부였고, 자기가 버리면 고독과 가난 속에 남게 될 병든 여인의 남편이었다. 설령 아내를 버릴 배짱이있더라도 그를 동정하는 인정 많은 두 사람을 속이지 않고서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그는 발길을 돌려 천천히 농장으로 돌아왔다. - P130
현재 지구는 운 좋게도 태양의 생명 거주 가능 영역에서 안쪽 가장자리에 들어 있다. 하지만 그 영역은 매년 약 1미터씩 바깥쪽으로 이동하는 중이다. 지구는 이미 가장 쾌적하게 지낼 수 있는 시간의 70퍼센트를 썼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아직 수억 년이 남아 있으니, 그동안 탈출 전략을 짜고실행하면 된다. 태양의 은총이 우리를 떠나 다른 행성들로 옮겨 간다면, 그래서 지구가 더 이상 생명의 정원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까? 우리 종은 망망대해 같은 은하에 흩어진 머나먼 섬들로 항해를 떠날까? 우리가 코스모스의 변화를 영원히 회피할 은신처는 없다. 어디든 최대 수십억 년 머무를 수 있을 뿐, 그 이상 더 머무를 안전한 장소는 없다. - P372
태양도 우리처럼 늙는다. 언젠가 태양은 핵에 품고 있는 수소 연료를 다 써 버릴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50억~60억 년 뒤에는 수소 핵융합이 벌어지는 영역이 서서히 바깥쪽으로 넓어질 것이다. 열핵반응이 벌어지는 껍질이 점점 더확장되는 것이다. 그러다가 온도가 약 1000만 도 미만으로 낮아지는 때가 올테고, 그러면 태양 내부의 수소 핵융합로가 작동을 멈출 것이다. 그 후 수억년 동안, 태양의 자체 중력에 힘입어서 이제 헬륨을 풍부하게 가진 핵이 다시한번 수축할 것이다. 수소가 타고 남긴 재가 연료가 되어 태양의 핵융합로를재가동시킨다. 그 덕분에 태양은 수억 년의 시간을 더 벌 것이다. 그 반응에서 탄소와 산소 같은 원소들이 생성될 것이고, 추가 에너지가 생산되어 태양이 계속 빛날 것이다. - P374
태양은 대기가 일종의 별 폭풍을 일으키면서 우주 공간으로 확장됨에따라 서서히 기체를 잃을 것이고, 결국에는 황색 왜성에서 적색 거성으로 바뀔 것이다. 그러면 금성과 지구에 미치는 중력이 약해져서 두 행성이 좀 더 안전한 거리로 이동하겠지만, 그 시기도 잠시일 것이다. 불그레하게 팽창한 적색거성은 수성을 잡아 삼킬 것이다. 생명 거주 가능 영역이라는 은총의 영역은더 멀리 더 빠르게 바깥쪽으로 이동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 우리 인류가 제대로 해낸다면, 우리도 그렇게 이동할 것이다. 태양의 진화는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우리에게는 새집을 찾아볼 시간이 10억 년쯤 있으니 코스모스 - P374
에서 우리의 새집이 될 만한 세계들을 탐색할 시간은 충분하다. 그때쯤이면인간 자체도 거의 틀림없이 지금과는 사뭇 다른 존재로 진화했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의 먼 후손들은 별의 운명 자체를 통제하거나 조절할 방법을 알아냈을지도 모른다. - P375
멕시코의 수리 물리학자 미겔 알쿠비에레(Miguel Alcubierre)는 「스타 트렉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영감을 얻어, 이론적으로 광속보다 빠르게 달릴 수 있는 우주선을 만드는 계산을 해 보았다. 만약 성공한다면, 그 우주선 - P392
은 태양에서 그 먼 행성계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을 1년 미만으로 줄여 줄것이다. 그런데 잠깐, "무엇도 빛보다 빨리 움직일 수 없다." 라는 것은 과학의기본 중의 기본 법칙이 아니던가? 맞다. 하지만 알쿠비에레 워프 드라이브(Alcubierre warp drive)의 멋진 점이 무엇인가 하면, 우주선이 아니라 우주가의 움직인다는 것이다. 우주선은 마치 공처럼 그것을 감싼 시공간 속에 가만히 들어 있고, 그 속에서 어떤 물리 법칙도 깨뜨리지 않는다. 미국의 공학자 해럴드 화이트(Harold White)는 그런 우주선을 날리는 데 드는 막대한 에너지 문제를 비롯해 알쿠비에레 드라이브의 몇 가지 난점을 살펴봤고, 그 결과 광속보다 빠르게 움직이는 우주선이 최소한 이론적으로는 가능하다고 결론 내렸다. 물론 아직 우리에게는 먼 이야기다. - P393
울프가 죽기 2년 전 1939년부터 1940년 사이 영국 침공의 불안감 속에서 로저 프레이의 전기를 쓰던 시기에 간간이 써내려간 미완성 회고록이다. 어린 시절 이부오빠의 성추행(이 책에서는 아주 잠깐 언급된다), 집안의 기둥이자 중심이었던 어머니의 이른 죽음과 그후 어머니 역할을 대신하던 이부언니 스텔라의 갑작스런 죽음. 이들의 죽음 이후 무뚝뚝하고 자기 중심적인, 어찌보면 자라지 못한 어른인 아버지를 직접 대면해야 하는, 이해받지 못하는 언니 바네사와 버지니아의 상황이 반복적으로 서술되고 있다.남성 중심적인 가부장적 시대에, 믿고 의지하던 여성가족의 죽음과 자기 중심적인 남성가족들의 폭력과 억압의 과정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버지니아가 겪은 심리적 충격와 슬픔이 절절하게 전해진다. 어린시절의 행복하고 아름답던 추억들에 대한 묘사도 있지만, 그 중심인 어머니와 언니가 사라지면서 모든 행복이 연기처럼 사라지고 이 두 죽음이 평생 그녀의 의식 속에 잠재되어 그녀의 현재를 형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울프의 책은 3기니와 이 책 밖에 읽지 않았는데, 그녀의 책을 더 부지런히 읽어야겠다(3기니 읽기 어려웠는데 이 책은 3기니보다 잘 읽혔다).
그는 말없는 우울한 풍경의 한 부분인 것만 같았고, 그 안의 온기와 마음은 표면 아래에 꽁꽁 묶인, 말하자면 얼어붙은 슬픔의 화신과도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침묵에 어떤 적의가 담겨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나는 단지 쉽게 다가가기에는 그가 너무나 깊은 정신적 고립 속에 살고 있다고 느꼈을 뿐이에요. 또한 그의 외로움이 단순히 비극적이리라고 생각되는 개인적인 곤경의 결과가 아니라 그 속에 하먼 가우가 넌지시 말한 것처럼 스탁필드의 허다한 겨울 추위가 엄청나게 축적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 P18
눈이 다시 내리기 시작했는데도 이번에는 바람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치기는커녕 오히려 모진 강풍으로 변해 이따금 넝마처럼 갈기갈기 찢어진 하늘에서 창백한 햇빛을 쓸어다가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는 풍경 위에 내동댕이쳤습니다. - P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