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 나와 오롯이 만나는 시간
이경혜 지음 / 보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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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살부터 시작하여 무려 50년간, 150권의 일기를 쓴 것도 대단하지만, 그 일기를 단지 간직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책 삼아 자주 읽는다는 게 더 대단하다. 일기 사랑꾼의 일기 예찬에 혹하게 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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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모르는 사람이 내 일기만 읽는다면 오히려 나에 대해 왜곡된 생각을 가질 수 있겠다는 두려움. 앞에서 썼던 ‘부분의 진실은 오히려 거짓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과 통하는 얘기다. 그러니 왜곡의천재인 기억에 맞서서 일기를 쓰지만 일기야말로 실체를 왜곡할 위험을 가지고 있다. 어쩌면 ‘진실‘의 얼굴을 하고 있기에 그것은 더욱위험한 왜곡이 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잊지 않기 위해 일기를쓰고, 기억을 못 믿어 일기를 쓴다. 일기로 인해 나의 본질이 더욱 왜곡될 수 있다는 위험을 무릅쓰고.

이렇게 나는 일기의 왜곡을 두려워하면서도 기억의 왜곡에 맞서 일기를 쓴다. - P127

11) 모닝 페이지마지막으로 추천하고 싶은 일기는 ‘모닝 페이지‘다. 이것은 《아티스트 웨이》란 책에 나오는 개념인데, 내 식으로 간단히 말하면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비몽사몽한 상태 그대로 아무 말이나 자유롭게 쓰는 작업이다. 쓰는 동안 멈추거나 생각을 하지 말고 떠오르는 대로 마구 쏟아 놓는 게 핵심이다.
이것은 사실 일기라기보다는 일정 기간 동안 창조성을 개발하기 위한 방법으로 나온 것인데 나는 이것도 일기의 한 종류라고 본다. 내 경우, 창작을 할 때 이 작업을 함께하면 확실히 무의식이 활성화 되어 - P147

큰 도움을 받는다. 뭐랄까, 의식과 무의식을 잇는 복도에 쌓인 쓰레기를 치워 버리는 작업 같다고나 할까? 깨끗해진 복도로 무의식이 더 쉽게 의식으로 흘러들어오는 느낌이 들고, 글을 쓰다 보면 ‘생각지도 않은 아이디어‘가 많이 솟는 기쁨을 맛본다.
그러나 창작이 아닌 일상생활에서도 모닝 페이지는 상당히 괜찮은 작업으로 여겨진다. 일상생활에서도 모닝 페이지를 써 보면 머리가 개운해지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잡생각을 글로 쏟아 내서 머릿속이 정돈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 P148

물론 흔적 남기는 것을 질색하는 깔끔한 분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다. 나는 흔적을 질질 남기며 살아왔고, 그 흔적을 다시 더듬으며 복기하는 것을 좋아하는 취향의 인류라 이런 글을 적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어느 날 일기를 쓰기 시작한 일은, 그 일기를 오래오래 써 온 일은 태어나서 내가 한 일 가운데 가장 잘한 일이다. 다시 태어나도 나는 일기 쓰는 인류로 태어나고 싶다. 이 책을 읽고 ‘어느 날 일기를 쓰기 시작‘하는 인류가 늘어나기를 바라며 일기에 대한 길고 긴 ‘자랑‘을 마친다. - P149

겁내지 말고 이 길을 가야 하는 걸까. 행복하다면 기쁨을 얻을 거고, 고통을 얻는다면 성장할 것이다. 어느 쪽이든 나쁜 쪽은 없다.
2007. 9. 13. 목 - P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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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에 대한 좋은 얘기는 널렸고, 일기를 쓰는 법도 누구든지 안다. 아니, 그런 건 모르는 게 더 낫다. 일기를 쓰는 법이란 원래 없으니까.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일기‘란 거창하지 않다. 한자를 풀이한 ‘하루의 기록‘이라는 뜻도 아니다. 그저 ‘날마다 쓴다는 마음가짐으로 진실하게 (사실적으로가 아니라) 쓰는 글‘일 따름이다. 그것 말곤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 마음가짐이면 일 년에 서너 번만 써도 좋다. 무슨 상관이랴. 내 일기도 그렇다. 거짓되지 않은 마음으로 ‘끊어질 듯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은 채‘ 지금까지 써 온 기록일 뿐이다. - P9

2022년에는 나의 일기 기념일도 50주년을 맞는다. 기념일 가운데서도 특별한 기념일이니 그날만은 더욱 특별하게 보내고 싶다. 나같이 축하하고 기념하는 일에 진심인 사람에게 ‘50주년 일기 기념일‘이라니! 그동안 쓴 일기 150권을 처음부터 쭉 다 읽어서 이번 기념일을 맞는 마음이 조금은 떳떳하다. 그 특별한 기념일은 151권에 담길것이다.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도 50주년에 맞추어 출간되는 이 책이야말로 50년 전 처음 일기를 시작한 열세 살의 나에겐 최고의 선물이 되리라. 어쩌면 하늘나라에 있을 천사 언니에게도 그럴 것이다. 이제는 내가 늙어 버려 차마 ‘언니‘라고 부르기도 미안하지만. 이렇게 나는 해마다 12월 14일, 일기 기념일을 축하하며 살아간다. - P47

일기는 그날 있었던 일, 그날 한 생각, 그런 것들이 낙엽 떨어지듯 툭툭 쌓이는 글이다. 짧은 기간의 일기는 그런 부스러기들의 기록으로 엄연한 수필이다. 그런데 긴 시간을 다룬 일기를 읽다 보면 놀랍게도 뒷날 일어날 일들이 앞선 세월에 복선으로 깔리는 장면을 숱하게 만난다. 복선이란 그 복선이 다다르는 지점을 알게 될 때에야 그것이 복선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짧은 시간의 일기는 거기까지 다다르지 않기 때문에 똑같은 사실이 적혀 있어도 그것이 ‘알고 보니복선‘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챌 수 없다. 일기에도 이런 생각을 적어 놓은 부분이 보인다. - P73

긴 시간의 일기를 쭉 읽어 보면 그런 실감이 어찌나 강렬하게 드는지 온몸에 소름이 돋을 때가 종종 있다. 어렸을 때 겪은 어떤 장면이 복선이 되어 시간이 흐른 뒤 나의 일생에서 이야기를 만들거나, 스쳐 지나간 사람이 장차 뜻밖에 큰 의미를 갖게 되는 일처럼 어떤 사건이나 말, 심리 상황 등이 얽히고설키며 다음에 일어날 일의 복선이되는 장면과 몇 번이고 부딪힌다. 나는 소설을 쓰는 사람이기 때문에 더욱더 그런 점들을 잘 알아챌 수 있는데 그럴 때 느끼는 전율은 오직 오랜 시간 일기를 쓴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그럴 때면 그것은 정말로 신이 쓰는 소설 같고, 신이 찍는 영화나 드라마 같다. - P74

《제2의 성》은 나를 너무나 매혹시켜서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 책은 바로 내 자신을 그려 주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내 흉을 보는것을, 몰래 엿보는 기분으로 그 책을 읽어냈다. 여태 모르고 있던 사실모르는 채로 다른 구실로 위장한 채 행한 태도들이 그 책 속에 적나라하게 파헤쳐져 있었다. 많이 생각해 본 문제들이므로 충격적이지는 않았지만, 답답했던 문제들을 시원스럽게 해결해 준 경우가 많았다.
공감, 거의 완전에 가까운 공감이었다. 여성이 동등한 인간으로 대접받 - P101

고, 그 자신이 그렇게 되는 것은 진실로 힘든 일이다. 어느 세월에나 우리들은 남성들과 그러한 아름다운 관계를 누릴 수가 있을까.
1980, 10. 12. 일 - 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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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에 대하여 - 지금, 깊은 상실을 겪고 있는 당신에게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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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로 갑작스런 상실과 단절을 경험한 모두에게 전하는 아디치에 작가의 아버지 죽음에 대한 이야기. 분노와 부정, 거부로 시작하지만 애도로 나아가는. 그러나 모두 각자 다른 방식과 속도로 애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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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3-04-30 05: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윽, 아디치에 책이 나왔구나....했는데 수필집이네요. 전 수필은 안 읽는 관계로. ㅎㅎ

햇살과함께 2023-04-30 18:29   좋아요 1 | URL
ㅎㅎ 전 아디치에 작가 수필 밖에 안 읽어봤는데 소설도 읽어봐야겠어요~!
 

누군가를 잃는 슬픔은 잔인한 종류의 배움이다. 우리는 애도가 얼마나 차분하지 않을수 있는지, 얼마나 분노로 가득할 수 있는지 알게 된다. 타인의 위로가 얼마나 겉치레처럼 들릴 수 있는지 알게 된다. 슬픔이 얼마나 말과 관련된 것인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과 말로 표현하려 애쓰는 것인지 알게 된다. 옆구리가 왜이렇게 쑤시고 아픈가? 너무 울어서 그렇단다. 울 때도 근육을 쓰는지 몰랐다. 마음이 아플 줄은 알았지만 몸까지 아플 줄은 몰랐다. 입맛이 - P14

참을 수 없이 쓰다. 맛없는 식사를 하고 나서 이닦기를 깜빡한 것처럼. 가슴에는 무겁고 끔찍한 돌이 얹힌 것 같다. 몸속이 영원히 녹아내리는 듯한 느낌이다. 그리고 심장은 ㅡ 내 진짜심장 말이다, 여기에 비유적 의미는 하나도 없다. — 내게서 달아나고 있다. 내 몸과는 별개의 존재가 되어 나와는 맞지 않는 박자로 너무빨리 뛰고 있다. 정신만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몸도 고통스럽다. 아프기도 하고 힘이 하나도 없다. 살, 근육, 장기들이 모두 멈췄다. 어떤자세를 취해도 편하지가 않다. 몇 주째 속이 울렁거린다. 불길한 예감 때문에 긴장되고 딱딱하다. 누군가가 또 죽을 거라는, 또 목숨을 잃을 거라는 확신이 가시지 않는다. 어느 날 아침에 평소보다 일찍 오케이 오빠한테서 전화가 오자 나는 생각한다. 그냥 말해. 빨리 말해 줘. 또 누가 죽었어. 엄마야? - P15

문자가 쏟아져 들어온다. 나는 그것을 안개너머로 보듯 바라본다. 이 문자는 누구에게 온것인가? "아버님의 별세를…………."으로 시작되는문자. 누구네 아버님 말인가? 언니가 자기 친구한테서 온 문자를 전달한다. 우리 아버지가 업적에 비해 너무 겸손한 분이었다는 내용이다. 손가락이 떨리기 시작해서 휴대폰을 치워 버린다. 아버지는 겸손한 분이었던 게 아니라 겸손한 분이다. 사람들이 음그발루, 즉 조의를 표하기 위해 우리 집으로 줄지어 들어오는 영상을 보자 - P20

화면 속으로 손을 뻗어서 그 사람들을 우리 집거실에서 끄집어내고 싶다. 어머니는 벌써 차분한 과부의 자세로 거실 소파에 자리 잡았고 사회적 거리 두기를 위한 탁자가 어머니 앞에 장벽처럼 놓여 있다. 친구들과 친척들이 벌써부터 이래라저래라 떠들어 댄다. 현관문 옆에 방명록을 놓아야 한다고 해서 언니는 탁자에 씌울하얀 레이스 한 필을 사러 가고 오빠가 딱딱한표지가 달린 공책을 사 오자 곧 사람들이 허리를 숙이고 방명록을 적기 시작한다. 나는 생각한다. 다들 돌아가! 왜 당신들이 우리 집에 와서 그이상한 공책에 이름을 쓰고 있는 거야? 어떻게 감히 이걸 현실로 만들 수가 있어? 왠지 몰라도 선의를 가진 이 사람들은 공모자가 되고 만다. 나는 내가 음모론으로 달콤쌉쌀해진 공기를 들이마시는 걸 느낀다. 여든여덟 살이 넘은 사람들, 우리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은데도 멀쩡히 살아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니 따끔따끔한 분통함이 내 - P21

안에 넘쳐흐른다. 내 분노가, 내 공포가 두렵다. 그 안 어딘가에는 수치심도 있다. 나는 왜 이렇게 화나고 겁먹었는가? 잠드는 것이 두렵고, 잠에서 깨는 것이 두렵다. 내일이 두렵고 그 뒤의모든 내일들이 두렵다. 내 안은 놀라움으로 가득 차 있다. 어떻게 평소처럼 집배원이 오고, 사람들이 나에게 강연을 요청하고, 휴대폰 화면에뉴스 알림이 뜰 수가 있는지 믿어지지가 않는다. 어떻게 세상이 계속 돌아가고, 변함없이 숨을 들이쉬고 내쉴 수가 있나? 내 영혼은 영원히 산산조각 났는데. - P22

나는 조의를 표하는 사람들을 피해 다닌다. 친절한 사람들이 좋은 뜻으로 하는 말이지만 그 사실을 안다고 해서 상처를 덜 받지는 않는다. 나이지리아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단어인 "사망"은 어둡고 뒤틀린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아버님의 사망에 대하여." 나는 "사망"을 혐오한다. "쉬고 계시다."는 위안이 되는 게 아니라 코웃음으로 시작해 결국 고통으로 끝난다. 아버지는 아바 집의 본인 방에서도 아주 잘 쉬고 있을 수 있었다. - P36

이보족 문화에는 내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도, 반발하는 것도 많지만 나는이보족 장례식의 축제 분위기가 싫은 것이 아니라 그 시점이 언제냐는 것이 문제다. 나에게는 시간이 필요하다. 지금은 엄숙함을 원한다. 한 친구가 내 장편 소설의 한 구절을 보낸다. "애도는 사랑에 대한 찬미다. 진정한 슬픔을 느낄 수 - P78

있는 자는 진짜 사랑을 경험한 운 좋은 사람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내가 쓴 글을 읽는 것이이토록 고통스럽다니. - P79

행복은 유약함이 된다. 슬픔 앞에서 사람을 무방비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여섯 남매 모두가 부모님에게 깊이 이해받고 사랑받았다고 느낀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각자 다른 방식으로 애도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각자 다른 방식으로 애도한다."라는 말을 머리로 받아들이기는 쉬워도 가슴으로 받아들이기는 훨씬 어렵다. 나는 그림자 속에 자신을 감춘 채 줌 회의를 두려워하게 되었다. 가족의 형태는 영원히 달라졌고 휴대폰 화면을 옆으로 밀었을 때 "아버지"라고 적힌 칸이 더 이상 없다는 것보다 더 가슴 아프게 그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은 없다. - P81

내가 변하길 원하는지 아닌지는 중요치 않다. 이미 변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목소리가 내 글을 뚫고 나오고 있다. 내가 죽음을 얼마나 가깝게 느끼는지와 내가 언젠가는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에 대한 아주 세밀하고 강한 인식이 가득 담긴 목소리. 새로운 급박함, 만연한 찰나성. 나는 이제 모든 것을 글로 써야 한다. 내게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누가 알겠는가? 하루는 오케이 오빠가 이런 문자를 보낸다. "아버지의 건조한 유머, 아버지가 기분 좋을 때 웃긴 춤을 추 - P104

시던 것, 아버지가 내 뺨을 토닥이면서 ‘신경 쓰지 마.‘라고 하시던 게 그리워."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물론 나는 아버지가 우리 기분을 풀어주고 싶을 때 늘 "신경 쓰지 마."라고 했던 걸 기억하지만 오빠도 그걸 기억한다는 말을 들으니 새삼 진짜였구나 하고 느낀다. 슬픔의 지독한 성분 중에는 의심의 시작이 있다. 그러니까 아니, 이건 내 상상이 아니다. 그래, 아버지는 정말로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 - P105

나는 지금 아버지에 대한 글을 과거시제로 쓰고 있지만 내가 아버지에 대한 글을 과거 시제로 쓰고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 - P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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