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재능이에요." 룅렌 양은 그렇게 결론을 내린다. "가지고 태어나는 재능이죠. 제 친척 아저씨 중에 노래 가사를 쓸 줄 아는 분이 계셨어요. 그런데 그 일은 그분을 소모시키더라고요. 노래 한 곡을 쓰고 나면 온몸의 힘이 다 빠져나가 버리는 것 같았거든요. 영매들이랑 똑같아요. 그 사람들도 그 일 때문에 완전히 지쳐 버리죠. 피곤하지 않아요, 디틀레우센 양?" 아니, 나는 피곤하지 않았고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지도 않았다. 다만 정말로 간절히, 진짜 시를 쓰는 연습을 할 수 있는 공간을 하나 갖고 싶다. 네 개의 벽이 있고 문이 닫힌 방 안에 있고 싶다. 침대 하나, 테이블과 의자와 타자기 한 대, 아니면 종이 한 뭉치와 연필, 그거면 된다. 아니, 아니다. 잠글 수 있는 문도 있었으면 한다. - P99

나는 주유 펌프와 집시 왜건이 자리 잡은 마당을 창문으로 내다본다. 나는 변하지않은 채 남아 있는 이 모든 것을 바라보면서 내가 변화를 싫어한다는 걸 깨닫는다. 우리를 둘러싼 것들이 변할 때, 우리 자신을 통제하기는 어려워진다. - P105

나는 내 시들이 출판돼서 시에 대한 감각을 갖춘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즐길 수 있기를 바란다. 그 바람이 왜 그토록 간절한지는 나 자신에게도 설명할 수가 없다. 어쨌든 나는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그것이 내가 어둡고 구불구불한 길들을 지나며 다가가고 있는 목표다. 그것이 내가 아침마다 일어나고, 인쇄소에 나가고, 룅렌 양 맞은 편에 앉아 백 개의 눈을 가진 아르고스 같은 그의 시선을 여덟 시간 동안 버틸 수 있게 해 주는 힘이다. - P115

우리는 얄따란 잔에 담긴 커피를 마시고, 편집자는 가야 할 시간이 된 것처럼 시계를 본다. 그러지 않았으면 나는 훨씬 더 오래 거기 앉아 있으려 했을 것이다. 밖으로 나가면 내 일상이 기다리고 있다. 사무실에서의 급한 일들, 선술집에서의 저녁, 집까지 데려다 주는 젊은 남자들, 그리고 나치당원인 집주인 여자가 있는 내 추운 방. 이 삶에 주어진 위안이라고는 한 줌의 시들뿐인데, 그것들은 시집으로 묶기엔 아직 편수가 충분치 못하다. 그리고 나는 시집을 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계산을 마친 묄레르 씨는 색색깔의 식탁보 위에 올려진 내 손 위에 갑자기 자기 손을 올린다. "손이 참 아름답군요." 그가 말한다. "길고, 가느다랗고." 그는 내 손을 몇 번 어루만진다. 마치 내가 헤어지기 아쉬워한다는 걸 아주 잘 안다는 듯이, 내 인생에서 자기가 지금 당장 사라지지는 않을 거라고 보장하고 싶다는 듯이, 나는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다. 이유는 모르겠다. - P188

"가족들이란." 그가 말한다. "절대 예술가들을 이해 못해요. 예술가들이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서로밖에 없죠." - P203

어머니의 장기에 나타나는 걱정스러운 증상들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데지친 나는 부모님 댁에 그다지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어머니에게 연민을 느낀다. 어머니는 이세상에서 많은 것을 가져 본 적이 한 번도 없는 사람이고, 또 그나마 가질 수 있었던 얼마 안 되는 것들마저모두 잃어버린 사람이니까. 어느 날 내가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자 크고 노란 봉투 하나가 내 방 테이블 위에 놓여 있다. 거기 들어 있는 게 뭔지 아는 나는 실망으로 다리에 힘이 풀린다. 봉투를 뜯는다. 그들이 돌려보낸 건 내 노트다. - P212

나는 그 편지를 가지고 비고 F.에게 건너간다. "아, 그래요." 그가 말한다. "그럴 줄 알았어요. 레잇셀 출판사에 보내 봅시다. 이런 일로 상처받지 말아요. 자신을 믿어요. 안 그러면 믿을 사람은 어디에도 없으니까." 우리는 시들을 레잇셀 출판사에 보내고, 그것들은 한 달 뒤에 되돌아온다. 나는 일이 점점 재미있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시들이 훌륭하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비고 F.는 거의 모든 유명한 작가가 시련을 겪어 왔다고 했다. 그렇다, 만약 모든 게 너무 순조롭게 진행되면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 시들은 거의 모든 출판사를 한 번씩 거쳐 내게 돌아오고, 용기를 계속 유지하기는 점점 어려워진다. 그러자 비고 F.는 이 상황이 그저 돈 문제일 뿐이라고 말한다. - P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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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01 09: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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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02 14: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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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실한 숙련공

"계속 그렇게 별나게 굴면," 어머니는 말한다. "너 절대 결혼 못 한다." "어차피 하고 싶은 마음도 없는 걸요." 멍하니 앉은 나는 사실 그 절망적인 대안을 떠올리고 있지만, 대답은 다르게 한다. 나는 어린 시절에 내가 두려워했던 것을 하나 떠올린다. 착실한 숙련공. 나는 숙련공에 대해서는 아무런 거부감도 없지만, 미래의 모든 밝은 꿈을 가로막는 건 ‘착실한‘이라는 단어다. 그 단어는 비 내리는 하늘처럼 온통 회색으로 물들어 있어서 스며 나오는 밝은 햇빛을 느낄 만한 부분은 어디에도 없다. "그럼," 어머니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만 가서 자야겠다. 알겠지만 우리 일찍 일어나야 돼. 잘 자렴." 어머니는 문가에 서서 인사를 건넨다. 의혹과 상심으로 물든 모습. 어머니가 사라지자 나는 커피포트를 치우고 부고를 다시 읽는다. 그의 이름 위에 검은색 십자가 표시가되어 있다. 그의 다정한 얼굴이 눈앞에 떠오르고, 목소리가 들린다. "2년 있다가 다시 와요, 학생." 단어들 위로 눈물이 떨어지고, 나는 오늘이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날일 거라고 생각한다. - P22

"크로그 씨네 건물이 헐렸어." 내가 말한다. "그 사람이 어디로 갔는지 혹시 아니?" "아니." 루트는 청년의 어깨 너머로 말한다. "그리고 그건 나랑은 개뿔 상관없는 일이야." 그들은 서로의 품속으로 다시 파고들고, 나는 그들을 지나 마당을 가로지른다. 나는 단지 뒤채의 계단을 오르다가 내가 태어난 이곳에서 결코 도망칠 수 없을 거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문득 이곳이 참을 수 없게 느껴지고, 이곳의 모든 기억들이 어둠과 슬픔으로 다가온다. 여기서 사는 한, 나는 외롭고 이름 없는 삶을 살아갈 운명에 처해 있다. 세계는 내 어떤 부분도 인정해 주지 않고, 내가 모서리 하나를 겨우붙잡을 때마다 내 손아귀를 슬쩍 빠져나간다. 사람들은죽고, 그들 머리 위의 건물들은 헐려 나간다. 세계는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지속되는 건 오직 내 어린 시절의 세계뿐이다. 거실로 올라와 보니 언제나와 똑같은 풍경이 펼쳐져 있다. 아버지는 자고 있고, 어머니는 식탁에 앉아 뜨개질을 하고 있다. 어머니의 흰머리는 사라졌는데, 어머니가 극비리에 머리를 염색했기 때문이다. - P48

신념 때문에 시련을 겪은 나는 아버지에게 이 이야기를 털어놓고픈 마음이 굴뚝같다. 마치 잔 다르크나 샤를로트 코르데처럼, 나 역시 세계 역사에 이름을 새겨 넣을 한 명의 젊은 여성이 된 것 같다. 그러기에는 시 쓰는 속도가 너무 느리기는 하지만, 뭐 어쨌든 말이다. 나는 허리를 똑바로 펴고 고개를 높이 든 자세로 계단을 올라가고, 상처 입은 존엄을가득 품은 채 들어선 거실에서는 아버지가 세상을 향해 등을 보인 자세로 누워 자고 있다. 왜 이렇게 집에 일찍 왔느냐고 묻던 어머니는 내 이야기를 듣더니 자신과 상관없는 일에는 말려들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더니 그 일자리는 좋은 자리였고, 끊임없이 직장을 바꾸는 여자와 결혼하려는 남자는 아무도 없다는 식으로 말을 이어 가며 점점 화를 낸다. 어머니는 이번에는 나를 지지해 주지 않고, 그래서 나는 아버지가 깨어나도록 큰 소리로 목을 가다듬고 식탁에서 약간의 소음을 낸다. 드디어 아버지가 깨어난다. - P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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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스타우닝은 그게 아니라고, 실업 문제는 순전히 전 세계적인 경기 침체 때문이라고 말하고, 나는 ‘침체‘가 재미있고 매력적인 표현이라고 느낀다. 나는 상상한다. 별 하나 없는, 위로할 길 없는 회색빛 하늘에서 빗줄기가 쏟아지는 동안 모두가 자기 집 차양을 내린 채 불을 끄는 장면을, 그 깊고 깊은 슬픔에 잠긴 세계를 "그리고 이제," 마침내 스타우닝이 말한다. "우리의 대의를 위한 노고에 보상하는 의미로, 부지런한 당원 모집 담당관 여러분 각자에게 상품을 수여할 수 있게 되어 대단히 기쁩니다!" 우리 아버지가 그들 중 한 명이라는 자랑스러움으로 얼굴이 빨개진 나는 아버지가 앉아 있는 곳을 곁눈질로 바라본다. - P106

나는 가상의 인물에게, 루트에게, 그도 아니면 아무도 대상으로 하지 않고서 사랑 시들을 썼다. 나는 내 시들이 아직 완전히 떨어져 나가지 않은 딱지 밑에 매끈하게 돋아난 새 피부처럼 내 어린 시절의 휑한 공간들을덮어 준다고 생각했다. 내가 쓴 시들이 어른으로서의내 모습을 빚어내게 될까? 나는 궁금했다. 그 시절 나는 거의 언제나 우울했다. 거리에 부는 바람은 세상 전체가 못마땅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내 키 크고 여윈 몸을 차갑게 뚫고 지나갔다. 어른들을 보면 항상 그랬던 것처럼, 학교에서도 나는 언제나 눈을 부릅뜨고 선생님들을 노려보았다. 어느 날 대리 교사로 온 음악 선생님이 내 자리로 조용히 건너오더니 조용하지만 또렷한목소리로 말했다. "난 네 얼굴이 맘에 안 드는구나." 집에 온 나는 수납장 위에 있는 거울 속의 내 얼굴을 노려보았다. 얼굴은 창백했고, 두 뺨은 통통했고, 두 눈은 겁에 질려 있었다. - P111

들이고 있는 듯하다. 아버지는 언제나 내가 학교를 마치면 ‘연금이 나오는 안정적인 일자리‘를 잡아야 한다고 이야기하지만, 그건 내게는 숙련공만큼이나 끔찍하게 느껴지는 일이다. 미래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나는어느 방향으로 가든 벽에 부딪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내가 이토록 절실하게 어린 시절을 연장하고 싶어 하는 건 바로 그 때문이다. 거기서 빠져나갈 길이 조금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 P130

"잘 가요, 학생." 그가 말한다. 나는 온통 부서진 희망들을 끌어안고 어찌어찌 문 밖으로 걸어 나온다. 천천히, 아무런 감각 없이, 나는 도시의 봄을, 다른 사람들의 봄을, 다른 사람들의 기쁨 어린 변화를,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뚫고 걷는다. 나는 절대로 유명해질 수 없을 것이다. 내 시들에는 아무 가치도 없다. 나는 술을 안 마시는 착실한 숙련공과 결혼하든지, 아니면 연금이 나오는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게 될 것이다. 그렇게 죽도록 실망하고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나는 시 노트에 다시 글을 쓴다. 아무도 내 시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해도 나는 시를 써야만 한다. 시가 내마음 속의 슬픔과 갈망을 무디게 만들어 주니까. - P157

여러 시험을 끝낸 우리는 학교에서 졸업 파티를한다. 모두가 ‘붉은 감옥‘을 떠나게 된 것에 환호했고,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큰 소리로 환호를 보낸다. 내게는 무척 신경 쓰이는 일이 있다. 이제 나는 어떤 진짜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듯하고, 그래서 항상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흉내 냄으로써 내게도 감정이 있는 척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오직 내게 간접적으로 다가오는 것들에만 마음이 움직이는 모양이다. 집에서 쫓겨난 불운한 가족의 사진을 신문에서 보고 눈물을 흘릴 수는 있지만, 현실에서 그것과 똑같은 흔한 광경을 볼 때는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 나는 언제나 그랬듯 지금도 시와 서정적인 산문에는 감동하지만, 그 글 속에 묘사된 사물들에 대해서는 철저히 냉정한 마음이 된다. 현실이 중요하다는 생각은 내게 거의 떠오르지 않는다. - P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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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친구로 지내는 오랜 날들 내내, 나는 루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기를 두려워한다. 내가 정말로 어떤 앤지 그 애가 알게 될까 봐 겁이 난다. 루트를 사랑해서, 그리고 그 애가 너무도 강한 아이라서 나는 그애의 그림자가 되기를 자처하지만, 내면 깊은 곳에서 나는 여전히 나다. 내게는 이스테드가데를 벗어난 미래에 대한 꿈이 있지만, 루트는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그거리에 매여 있어서 절대 떨어지려 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 애와 같은 부류인 척하면서 그 애를 속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나는 이렇게 이해하기 힘든 방식으로 그 애에게 빚을 지고 있고, 이 사실은 두려움과 희미한 죄책감을 불러 와 내 마음을 괴롭힌다. 결국, 그빚은 우리의 관계에 영향을 끼친다. 훗날 내 인생에서친밀하고 오래 갔던 모든 관계에 영향을 끼치게 될 바로 그 방식으로. - P62

내가 어머니에게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냐고 묻자 어머니는 쾌활하게 대답했다. "음, 있지, 첫 아이는 임신 기간이 두 달을 넘지 않는 법이야." 그런 다음어머니는 웃었고, 에드빈과 아버지는 얼굴을 찡그렸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런 점이 어른들의 가장 나쁜 점같다. 그들은 자기들이 살아오면서 저지른 잘못된 혹은 무책임한 행동을 단 하나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은다른 사람들을 그토록 성급하게 판단하면서도 자기 자신을 심판대에 세우지는 않는다. - P81

아버지가 곧 도착할 거라서 그들은 서둘러야 한다. 어머니는 반짝이는 스팽글이 수백 개나 박힌 검은 튈로 한껏 치장한 채 서 있다. 스팽글들은 어머니의 덧없는 행복만큼이나 쉽게 떨어져 내린다. 그들이 막 문을 나서려는데 퇴근한 아버지가 집에 도착한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얼굴을 노려보고는 말한다. "하, 허수아비 할망구 같네." 어머니는 대답하지 않고 아버지를 그냥 미끄러지듯 지나쳐 에스테르를 바짝 뒤따라간다. 자기가 한 말을 내가 들었다는 걸 아는 아버지는내 맞은편에 앉아 아버지 특유의 온화하고 우울한 눈으로 자신 없는 표정을 짓는다. "넌 커서 뭐가 되고 싶니?" 아버지가 어색하게 묻는다. "밤의 여왕이요." 나는잔인하게 대답한다. 바로 이 사람이 언제나 우리 어머니의 즐거움을 망쳐야만 직성이 풀리는 그 ‘디틀레우’이기 때문이다. - P85

"죄다 뜬구름 잡는 소리들이야." 아버지는 경멸에 찬 목소리로 이렇게 말한다. "시들은 현실하고 아무 관련이 없어." 나는 현실을 좋아해 본 적도 없고, 현실에 관해 쓰지도 않는다. 내가 헤르만 방의 「길가에서」를 읽고 있으면 아버지는 두 손가락 사이에 그 책을 끼워 들어 올리고는 온갖 싫은 티를 다 내며 말한다. "이 사람이 쓴 건 아무것도 읽어선안 돼. 이 사람은 정상이 아니었다고!" 정상이 아니라는게 끔찍하다는 건 나도 안다. 정상인 척하려고 애를 쓰느라 나도 나름의 고생을 하고 있다. 그래서 헤르만 방 역시 정상이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되자 나는 되레 위로받는 기분이 든다. 열람실에서 나는 그 책을 마저 읽고 마지막 부분에서 울음을 터뜨린다. -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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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일하러 나갔고, 오빠는 학교에 있었다. 그러니 어머니는 내가 거기 있는데도 혼자였고, 내가 완벽하게 가만히 있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어머니의 수수께끼 같은 마 - P7

음속에 있는 아득한 고요함은 아침이 다 지나고 어머니가 보통의 주부들처럼 이스테드가데에 장을 보러 나가야 할 때까지 계속되곤 했다. - P8

그 책에 실려 있는 모든 노래는 주제가 비슷하고, 어머니가 그것들을 부르는 동안 나는 하고 싶은 모든 일을 할 수 있다. 자신만의 세계에 푹 빠져들었을 때의 어머니는 자기 바깥의 어떤 방해물도 감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래층에서 사람들이 싸우고 말다툼하기 시작해도 어머니는 듣지 못한다. 아래층에는 기다란 금발머리를 땋아 내린 라푼젤이아직 자신을 블루벨 한 다발에 마녀에게 팔아 버리지는 않은 부모와 함께 살고 있다. 왕자는 우리 오빠인데, 그는 자기가 머지않아 탑에서 떨어져 눈이 멀게 될 거라는 사실을 모른다. 판자에 못들을 탕탕 두들겨 박는 오빠는 가족의 자랑이자 기쁨이다. 그게 남자아이들의 역할인 반면, 여자아이들은 그저 결혼하고 아이들을 낳을 뿐이다. 여자아이들은 다른 누군가가 부양해 주어야하며, 다른 무엇도 바라거나 기대할 수 없는 처지다. - P19

"아이가 혼자 깨친 거예요. 저희 잘못은 아니죠." 나는 어머니를 올려다보고는 많은 것을 한꺼번에 이해한다. 어머니의 키는 다른 여자 어른들보다 작고, 어머니는 다른 어머니들보다 젊으며, 우리가 사는 구역 바깥에는 어머니가 두려워하는 세계가 있다. 그리고 언제든 우리 둘이서 그 두려움을 함께 마주하게 되면 어머니는 나를 배신할 것이다. 우리가 거기 그 마녀 앞에 서 있는 동안, 나는 어머니의 손에서 주방용 세제 냄새가 난다는 것도 알게된다. 나는 그 냄새가 몹시 싫다. 우리가 여전히 완전한 침묵에 잠긴 학교를 떠날 때, 내 마음은 그 순간부터 나머지 평생 동안 어머니가 내 안에서 불러일으킬 혼돈으로 가득 찬다. 분노와 슬픔, 연민이 뒤섞인 그것. - P27

생활 보호를 받으면 투표권이 상실되었지만, 어쨌게 우리는 굶주린 적은 없었다. 적어도 내 뱃속은 언제나 뭔가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경험을 통해 절반의 굶주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딱딱해진 페이스트리와 커피만으로 며칠씩 때우다가 더 잘사는 집의 문가에서 흘러나오는 저녁 식사 냄새를 맡을때 느껴지는 허기였다. 내가 먹던 페이스트리는 책가방 하나를 가득 채울 만큼 담으면 25 외레였다. - P34

한번은 내가 "비탄’이 무슨 뜻이에요, 아버지?"하고 물은 적이 있었다. 나는 막심 고리키의 작품에서 발견한 그 표현이 몹시 마음에 들었었다. 아버지는 말려 올라간 콧수염 양 끝을 쓰다듬으며 그 단어에 대해 오랫동안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했다. - P36

"그건 러시아어에서 온 단어야. 고통과 비참함과 슬픔을 뜻하는 말이란다. 고리키는 위대한 시인이었지." 나는 기쁨에 차서 말했다. "나도 시인이 되고 싶어요!" 그러자 아버지는 곧바로 얼굴을 찡그리더니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바보 같은 소리! 여자는 시인이 될 수 없어!" 상처받고 화가 난 나는 다시 내 안에 틀어박혔고, 그러는 동안 어머니와 에드빈은 그 터무니없는 생각을 비웃었다. 나는 다시는 누구에게도 내 꿈을 털어놓지않겠다고 맹세했다. 그러고는 어린 시절 내내 그 맹세를 지켰다. - P37

하지만 그런 지름길을 모른다면 당신은 어린 시절을 견뎌야만 한다. 매 시간 그 속을, 그 절대로 끝나지 않을 시절 속을 터덜터덜 걸어가야만 한다. 오직 죽음만이 당신을 거기서 해방시킬 수 있기에 당신은 오랜 시간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어느 날 밤에는 죽음의 모습을 그려 보기도 한다. 그때 죽음은 당신의 눈꺼풀이 다시 열리지 않도록 입맞춤해 줄 하얀 로브 차림의 친절한 천사가 된다. 또 나는 이런 생각도 한다.
결국 언젠가 내가 어른이 되면 어머니가 지금 에드빈을 좋아하는 것처럼 나도 좋아해 줄 거라고 말이다. 내 어린 삶은 나를 짜증스럽게 하는 만큼이나 어머니도 짜증스럽게 하는 까닭에, 우리가 함께 있으면서 행복할 때는 오직 어머니가 그것의 존재를 갑작스럽게 깜빡할 때뿐이다. - P48

어린 시절은 캄캄한, 지하실에 갇힌 채 잊혀 버린 작은 동물처럼 언제나 낑낑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다. 추운 날 나오는 입김처럼 당신의 목구멍에서 새어 나오는 그것은 가끔은 너무 조그맣고, 또 가끔은 너무 크다. 정확하게 딱 맞는 적은 한 번도 없다. 그것을 벗어던진 뒤에야 당신은 그것을 차분히 바라볼 수 있고, 마치 극복한 병처럼 그것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게 된다. 어른들 대부분은 자신의 어린 시절이 행복했다고 말하는데, 어쩌면 그들 자신은 정말로 그렇게 믿을지도 모른다. - P51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나는 그들이 간신히 시절을 잊는 데 성공한 거라고 생각한다. - P52

우리는 어디로 방향을 틀더라도 자기 자신의 어린 시절과 맞부딪히고단단하고 뾰족한 모서리 때문에 스스로 상처를 입는다. 그 일은 수많은 상처들이 우리를 완전히 갈기갈기 찢어 놓은 뒤에야 멈춘다. 모든 사람에게는 어린 시절이 있지만, 그 각각의 모양은 완전히 다른 것 같다. - P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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