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에 대한 좋은 얘기는 널렸고, 일기를 쓰는 법도 누구든지 안다. 아니, 그런 건 모르는 게 더 낫다. 일기를 쓰는 법이란 원래 없으니까.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일기‘란 거창하지 않다. 한자를 풀이한 ‘하루의 기록‘이라는 뜻도 아니다. 그저 ‘날마다 쓴다는 마음가짐으로 진실하게 (사실적으로가 아니라) 쓰는 글‘일 따름이다. 그것 말곤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 마음가짐이면 일 년에 서너 번만 써도 좋다. 무슨 상관이랴. 내 일기도 그렇다. 거짓되지 않은 마음으로 ‘끊어질 듯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은 채‘ 지금까지 써 온 기록일 뿐이다. - P9

2022년에는 나의 일기 기념일도 50주년을 맞는다. 기념일 가운데서도 특별한 기념일이니 그날만은 더욱 특별하게 보내고 싶다. 나같이 축하하고 기념하는 일에 진심인 사람에게 ‘50주년 일기 기념일‘이라니! 그동안 쓴 일기 150권을 처음부터 쭉 다 읽어서 이번 기념일을 맞는 마음이 조금은 떳떳하다. 그 특별한 기념일은 151권에 담길것이다.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도 50주년에 맞추어 출간되는 이 책이야말로 50년 전 처음 일기를 시작한 열세 살의 나에겐 최고의 선물이 되리라. 어쩌면 하늘나라에 있을 천사 언니에게도 그럴 것이다. 이제는 내가 늙어 버려 차마 ‘언니‘라고 부르기도 미안하지만. 이렇게 나는 해마다 12월 14일, 일기 기념일을 축하하며 살아간다. - P47

일기는 그날 있었던 일, 그날 한 생각, 그런 것들이 낙엽 떨어지듯 툭툭 쌓이는 글이다. 짧은 기간의 일기는 그런 부스러기들의 기록으로 엄연한 수필이다. 그런데 긴 시간을 다룬 일기를 읽다 보면 놀랍게도 뒷날 일어날 일들이 앞선 세월에 복선으로 깔리는 장면을 숱하게 만난다. 복선이란 그 복선이 다다르는 지점을 알게 될 때에야 그것이 복선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짧은 시간의 일기는 거기까지 다다르지 않기 때문에 똑같은 사실이 적혀 있어도 그것이 ‘알고 보니복선‘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챌 수 없다. 일기에도 이런 생각을 적어 놓은 부분이 보인다. - P73

긴 시간의 일기를 쭉 읽어 보면 그런 실감이 어찌나 강렬하게 드는지 온몸에 소름이 돋을 때가 종종 있다. 어렸을 때 겪은 어떤 장면이 복선이 되어 시간이 흐른 뒤 나의 일생에서 이야기를 만들거나, 스쳐 지나간 사람이 장차 뜻밖에 큰 의미를 갖게 되는 일처럼 어떤 사건이나 말, 심리 상황 등이 얽히고설키며 다음에 일어날 일의 복선이되는 장면과 몇 번이고 부딪힌다. 나는 소설을 쓰는 사람이기 때문에 더욱더 그런 점들을 잘 알아챌 수 있는데 그럴 때 느끼는 전율은 오직 오랜 시간 일기를 쓴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그럴 때면 그것은 정말로 신이 쓰는 소설 같고, 신이 찍는 영화나 드라마 같다. - P74

《제2의 성》은 나를 너무나 매혹시켜서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 책은 바로 내 자신을 그려 주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내 흉을 보는것을, 몰래 엿보는 기분으로 그 책을 읽어냈다. 여태 모르고 있던 사실모르는 채로 다른 구실로 위장한 채 행한 태도들이 그 책 속에 적나라하게 파헤쳐져 있었다. 많이 생각해 본 문제들이므로 충격적이지는 않았지만, 답답했던 문제들을 시원스럽게 해결해 준 경우가 많았다.
공감, 거의 완전에 가까운 공감이었다. 여성이 동등한 인간으로 대접받 - P101

고, 그 자신이 그렇게 되는 것은 진실로 힘든 일이다. 어느 세월에나 우리들은 남성들과 그러한 아름다운 관계를 누릴 수가 있을까.
1980, 10. 12. 일 - 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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