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메로스 <일리아스> <오디세이아>
보르헤스 [바벨의 도서관]
오스카 와일드 <레딩 감옥의 노래>
베른하르트 슐링크 <책 읽어주는 남자>
루스 랜들 <활자 잔혹극>
치누아 아체베 <더 이상 평안은 없다>
레이 브레드버리 <화씨 451>
크리스토퍼 몰리 <파르나소스 이동서점>
미셸 푸코 <성의 역사>
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
조이스 <율리시스>

프롤로그

나는 책을 쓸 때마다 출발점으로, 첫 경험을 할 때마다 느끼는 거친 감정으로 돌아간다.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글쓰기란 우리가 글을 쓴 뒤에 무엇을 썼는지 발견하려고 애쓰는 일이라고 한다. 마치 발밑에 있는 바닥이 금이 가는 걸 느끼듯이 말이다. - P11

마케도니아인들은 자긍심을 지닌 사람들이었으나 외부에서는 자신들을 하찮은 부족사회로 치부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그리스의 속주였으며 아테네인이나 스파르타인의 혈통 아래에 위치해있었다. 마케도니아인들은 전통적 군주제를 유지하고 있던 반면에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대부분 훨씬 복합적인 통치 형태를 경험하고 있었다. 게다가 마케도니아인들은 여타 민족이 이해하기 힘든 방언을 사용했다. - P35

알렉산드로스는 보편성과 지식에 대한 의욕과 융화에 대한 독특한 열망으로 자신의 가장 중요한 꿈이던 도서관을 현실화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는 경계가 없었다. 그곳엔 그리스인, 유대인, 이집트인, 이란인, 인도인의 언어가 평화롭게 공존했다. 그 정신적 영토는 그들 모두가 환대받는 유일한 공간이었을 것이다. - P47

그렇지만 오늘날의 독자에게 바벨의 도서관은 가상세계, 즉 검색 알고리즘에 따라 나타나는엄청난 정보와 텍스트의 네트워크에서 우리를 미로 속 환영처럼 헤매게 만드는 거만한 인터넷에 대한 예언적 알레고리이다. - P49

갑작스러운 변화에 대한 놀라움과 불안 사이에서 경련하던 헬레니즘 문명에 상반된 충동이 나타났다. 찰스 디킨스의 말처럼, "최고의시절이자 최악의 시절이었다." 회의주의와 종교적 맹신, 호기심과 편견, 관용과 배척이 동시에 발생했다. 자신을 세계인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민족주의에 함몰된 사람도 있었다. 다양한 사상들이경계를 넘어 전파되면서 쉽게 뒤섞였다. 그리하여 절충주의가 나타났다. 헬레니즘 시대와 로마 시대를 가로지르는 스토아 철학은 평정과금욕과 내적 강화를 통해 번뇌를 벗어날 수 있다고 가르쳤다. 마치 불교 신자들이 행하던 수행처럼 말이다. - P61

아마도 그렇기에 우리처럼 읽게 된 초기 사람들, 다시 말해 침묵속에서 작가와 말 없는 대화를 하게 된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4세기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암브로시우스 주교가 이런 방식으로 글을 읽는 걸 보고 호기심을 느꼈으며 이 사실을 「고백록』에기록했다. 누군가 자기 앞에서 그런 행동을 하는 걸 처음 봤다고 한다. 그는 주교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느꼈다.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책을 읽는 그의 눈이 페이지를 훑어가며 글을 이해해갔다. 하지만 입은 꾹 다물고 있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주교가 물리적으로 가까이있으면서도 실은 자기 옆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에게 주교는다른 세계로 달아나 있으며 움직이지도 않은 채 찾을 수 없는 곳을여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 장면은 당황스러웠으며 동시에 그를매료시켰다.
따라서 당신은 아주 특별한 독자로서 혁신자들의 혈통을 물려받은 것이다. 침묵 속에서 이루어지는, 당신과 나의 자유롭고 비밀스러운 대화는 엄청난 발명품이다. - P73

장갑을 끼고 두 손에 양피지를 들던 그 순간, 인간의 잔인함이 떠올랐다. 오늘날 좋은 품질의 가죽옷을 만들려고 새끼 바다표범을 몽둥이로 내리쳐 죽이듯이 중세에도 가장 비싼 필사본은 극도의 잔학함을 요구했다. 비단처럼 부드럽고 아주 하얀 가죽으로 만든 아름다운 양피지가 있는데, 바로 ‘송아지 가죽‘이다. 갓 태어난 새끼나 어미의배 속에서 유산된 태아의 가죽이다. 과거의 말이 이 시대까지 이를 수있도록 수 세기 동안 피 흘린 동물들을 생각했다. 정교한 작업을 통해 만들어진 양피지 속에는 상처받은 가죽과 그들이 흘린 피가 숨겨져 있다. 우리는 진보와 아름다움이 고통과 폭력을 수반한다는 사실을 종종 망각한다. 인간의 그런 모순적 행동 속에서 무수한 책들이 사랑과 선과 동정에 대한 현자들의 말을 세계로 퍼트리는 데 활용됐다. - P100

좋은 필사본을 만들려면 한 무리의 가축이 소요될 수도 있었다. 오늘날처럼 책이 많이 출판됐다면 가축이 남아나지 못했을 것이다. 역사가 피터 왓슨(Peter Watson)의 계산에 따르면, 가죽 한 장의 크기를 50제곱센티미터로 가정하고 150쪽의 책을 만들려면 열 마리에서열두 마리의 가축이 필요했다. 또 다른 전문가에 따르면 구텐베르크성경을 만드는 데 100장의 가죽이 필요했다고 한다. 따라서 책을 보존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던 양피지 사본을 만드는 데는 엄청난 비용이 소요됐다. 그러니 책을 소유한다는 건 오랫동안 귀족과 종교인들의 절대적인 특권이었다. 한 서기는 13세기 성경에 재료의 결핍을 한탄하며 이렇게 말했다. "아, 하늘이 양피지고 바다가 잉크라면 좋았을 것을." - P101

성스러운 책이 없던 세계에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성서에 가까웠다. 호메로스에 열광하던 그리스인 작가들, 예술가들, 철학자들은 종교적 감시를 받지 않고 자유롭게 호메로스의 작품 세계를비판하고 탐험하고 확장할 수 있었다. 아이스킬로스는 자신의 비극이 "호메로스의 위대한 연회에 있는 작은 빵조각"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정도였다. - P108

호메로스의 수수께끼를 풀기란 불가능하다. 호메로스의 그림자는어스름한 대지에서 사라져버렸다. 그 점에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더욱 매력적이다. 두 작품은 구전의 시대, 잃어버린 말의 시대에접근할 수 있도록 해주는 예외적 작품이다. - P119

영속성을 위한 노력 속에서 그들은 운율적 언어가 훨씬 기억하기 쉽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리고 그 발견을 통해 시가 탄생했다. 낭송할 때, 말의 멜로디는 텍스트가 바뀌지 않고 반복되도록 도와준다. 실수를 저지르면 음악적 연속성이 깨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세월이 흐른 지금도, 너무나도 많은 것을 망각했지만, 어릴 적 학교에서 배운 시를 명확하게 기억할 수 있다. - P122

이런 변화는 아주 더디게 진행됐다. 우리는 새로운 발명품이 과거의 것을 순식간에 제거한다고 상상하지만, 그 과정은 광속이 아니라종유석이 만들어지는 속도처럼 더디다. 종유석 끝으로 물방울들이 미끄러지며 석회 성분을 남기듯, 문자는 새로운 의식과 정신을 키워나갔다. 고대 그리스에서 구전성이 사라진 시기는 기원전 8세기에서기원전 4세기경이다. 상당량의 책을 축적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엄밀한 의미에서 유럽 최초의 지식인이었다. - P128

다 자란 지금도 책에 대한 내 감성은 자아도취적이다. 하나의 이야기가 나를 파고들 때, 그 말들이 비가 되어 나를 적실 때, 이야기가고통스럽게 다가올 때, 책의 작가가 내 삶을 바꿔버렸다고 느껴질 때, 나는 그 책이 찾고 있던 독자가 바로 나라는 것을 다시금 믿게 된다. - P133

또 그것은 단 한 명의 관객이 있는 작은 연극이자 나를 자유롭게 해주는 기도와도 같았다. 누군가 책을 읽어주며 당신이 기뻐하길 바란다면, 그것은 사랑의 표현이자 삶이라는 전투 속에서의 휴전이다. 당신이 주의를 기울여 이야기를 듣는 동안 서술자와 책은 하나의 목소리로 용해된다. 밤의 어스름속에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을 당신은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 P134

약 6000년 전, 메소포타미아에 최초의 문자가 나타났다. 그 기원은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세월이 흘러 이집트, 인도, 중국에서문자가 생겨났다. 최근 이론에 따르면 문자 탄생은 소유물 목록을 작성해야 한다는 실용적 목적에 근원을 두고 있다고 한다. 이 가정대로라면 우리의 선조들은 문자 이전에 계산법을 먼저 이해했을 것이다. 문자는 소유물이 많은 자들, 통치권자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구술의 형태로는 계산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설이나 이야기를 쓰는 건 그 뒤의 일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경제적이고도 상징적인 존재들이다. 우리는 목록 작성 같은 계산을 위한 문자를 만들어낸 뒤 이야기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 P138

어쨌든 페니키아인들의 문자 체계에서 이후의 모든 알파벳 체계가 뻗어나갔다. 그 체계 중 가장 중요한 게 아람 사람들의 알파벳이었다. - P141

우리는 그 변화를 기원전 700년경에 자신의 주요 작품을 발표한헤시오도스(Hesiodos)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시의 구술성을 유지하면서도 새로운 요소, 즉 오늘날 우리가 팩션(autofiction)이라 부르는요소를 가미했다. 저자이자 서술자이자 인물로 등장한 헤시오도스는자신의 가족과 삶의 경험을 자세하게 묘사한다. 어쩌면 그를 유럽 최초의 개인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문학적으로는 프랑스 작가 아니에르노(Annie Ernaux)나 에마뉘엘 카레르(Emmanuel Carrère)의 먼 선조라 할 수도 있다. - P148

당시는 서정시의 시대였다. 일리아스』에 비하면 아주 짧았는데, 노래로 부르기 위해 쓴 시였고 고대 시대의 전통적 전설처럼 과거를지향하고 있지 않았다. 최근의 사건을 다루고 있었고 그들이 경험한느낌들을 포착하고 있었다. 바로 ‘지금, 여기, 나‘를 말이다.
처음으로 글쓰기가 당시의 시대적 가치와 충돌하는 반역적인 말들과 섞이기 시작했다. 그 놀라운 흐름은 그리스 전사이자 시인으로, 귀족층 그리스인과 야만인 노예 사이에서 태어난 서자 아르킬로코스에서 시작한다. - P167

예속된 세상에서 독립적이고 자유롭게살기 위해 배우려 했으며, 자기 능력을 최대한으로 끌어내어 자신에대한 비전을 향상하고 자신의 삶을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만들고자했다. 미셸 푸코가 『성의 역사를 집필하며 그리스인들을 연구할 때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이 바로 이 존재의 미학이었다. 고대의 사유와 관련한 인터뷰에서 푸코는 이렇게 피력했다. "우리 사회에선 예술이 개인이나 삶이 아니라 사물에 관련된 것으로 변해 있습니다. 왜사람은 자신의 삶을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만들 수 없는 거죠? 왜 전등이나 집은 예술작품이 될 수 있고 내 삶은 안 되는 겁니까?" - P183

그런데 2014년 자료에 따르면, 스페인 인구의 97퍼센트가 자신이 거주하는 도시에 공공도서관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스페인에는 4649개의 도서관이 있다.)이 자료는 그동안 도서관이 증식하며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라이프 오브 브라이언」에 나오는 유대인 인민전선의 엉뚱한 회원들처럼, 만약 그리스인과 로마인이 우리를 위해서 한일이 뭐냐고 묻는다면 분명 도로, 다리, 법률, 민주주의, 극장, 수로 등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어쩌면 할리우드의 시나리오 작가들을 유혹하는 웃통 벗은 검투사의 이야기나 사륜마차라고 대답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공공도서관을 떠올리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 P193

책이 쌓인 복도를 지나고 거의 보이지 않는 곳을 돌아다니면서도 보르헤스는 곡예사처럼 길을 열어갔다. 움베르토 에코는 그런 보르헤스에 대한 경외와 모독사이에서 장미의 이름』에 나오는 눈먼 수호자 호르헤를 상상했다. - P19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것이 인간인가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떻게 하면 더 춥고, 배고프고, 갈증나고, 힘들고, 비참하고, 더 인간이 아닌 것으로 취급할 수 있는지에 몰두한 저들. 저들은 인간인가. 유럽을, 독일을 휩쓴 광풍은 무엇인가. AfD 지지율이 20%가 넘는다는 뉴스를 접하는 요즘, 그 바람이 다시 불까 두렵다. 프레모 레비를 계속 읽어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늘은 맑은 날이다. 우리는 시력을 되찾은 맹인처럼 주위를 둘러본다.
서로의 얼굴을 본다. 한 번도 밝은 태양 아래에서 얼굴을 본 적이 없다.
어떤 사람은 웃기도 한다. 배만 고프지 않다면!
인간의 본성에 따르면 슬픔과 아픔은 여러 가지를 동시에 겪더라도 우리의 의식 속에서 전부 더해지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원근법에 따라 앞의 것이 크고 뒤의 것이 작다. 이것은 신의 섭리이며, 그래서 우리가 수용소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자유로운 삶에서, 인간이 만족할 줄모르는 존재라는 말을 그토록 자주 듣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사실이것은 인간이 애초에 완전한 행복의 상태를 누릴 수 없어서라기보다불행의 상태가 지니는 복잡한 성질을 늘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 - P110

이다. 그래서 수없이, 차례대로 늘어선 그 불행의 이유들이 단 하나의이름을, 가장 큰 이유의 이름을 갖게 된다. 그 이유가 힘을 잃어버릴 때까지 말이다. 그런데 그때 우리는 그 뒤로 또 다른 이유가 등장하는 것을 본다. 비탄에 잠길 정도로 충격을 받는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뒤로또 다른 이유들이 줄을 서 있다.
그리하여 겨우내 우리의 유일한 적이었던 추위가 가시자 우리는 배가고프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똑같은 오류를 범하며 오늘 "배만고프지 않다면!" 하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배가 고프지 않기를 바랄 수 있단 말인가? 수용소 자체가배고픔이다. 우리 자신이 배고픔, 살아 있는 배고픔이다. - P111

1941년 토리노에서 최우등으로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동안 나는 그가 내 말을 믿지 않는 것 같은 확신이 든다. 솔직히 나 자신도 믿기지 않는다. 더럽고 상처투성이인 내 손, 진흙이 덕지덕지 달라붙은 포로복만 봐도 충분하다. 하지만 나는 정말로 토리노에서 대학을 졸업한 그 사람이다. 사실 특히 이 순간에는 내가 그 사람이라는 사실에 대해 의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유기화학의 기억저장소가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무기력한 상태에 있었는데도 뜻밖에 고분고분 요구에 응한 것이다. 투명하고 기분 좋은 이 느낌, 피를 따뜻하게 해주는 이 흥분. 나는 이게 무엇인지 안다. 시험에 대한 열광, 나의 시험에 대한 나의 열광이며, 모든 논리적인 능력과 모든 개념들을 자연스럽게 동원하게 해주는 바로 그힘이다. 이것은 동창들이 그렇게도 부러워하던 것이기도 하다.
시험은 제대로 진행되고 있다. 그 사실을 차츰 눈치채자, 마치 키가 자란 것 같은 기분이다. 이번엔 그가 내 졸업 논문 주제에 대해 묻는다. 너무나 멀리, 깊이 파묻혀버린 일련의 기억들을 되살리기 위해 나는 필사적으로 노력해야만 한다. 전생의 사건이라도 기억해내듯.
무엇인가가 나를 지켜준다. 보잘것없이 오래된 내 ‘전기절연상수측정‘이 안전한 삶을 누리고 있는 이 금발의 아리아인의 흥미를 끈다. 그는영어를 할 수 있냐고 묻고는 내게 가터만의 논문을 보여준다. 철조망 너머 바로 여기에, 내가 이탈리아의 우리집에서 4년 동안 공부했던 그 사람과 똑같은 사람인 가터만의 논문이 존재한다는 이 사실 역시 불가능하고 기이한 일 같다. - P163

……단테는 어떤 사람인가. 『신곡』은 무엇인가. 『신곡』이 무엇인지를 간단하게 설명하려 애쓰다 보면 어느새 신선하고 낯선 감정이 생겨난다. ‘지옥‘이 어떻게 나뉘어 있는지, 거기서 어떤 벌을 받는지, 베르길리우스는 이성이고 베아트리체는 신학이다.
장이 매우 주의 깊게 듣는다. 나는 천천히, 정확하게 시작한다. - P171

나와 로렌초 사이에서는 이런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나와 비슷한수많은 다른 사람들 중에서 내가 시련을 견뎌낼 수 있었는지 그 이유를구체적으로 따져보는 것도 의미는 있겠지만, 나는 지금 내가 이렇게 살아 있게 된 것이 로렌초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물질적인 도움 때문이라기보다는 그의 존재 자체가 나에게 끝없이 상기시켜준 어떤 가능성 때문이다. 선행을 행하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평범한 그의 태도를 보면서나는 수용소 밖에 아직도 올바른 세상이, 부패하지 않고 야만적이지 않은, 증오와 두려움과는 무관한 세상이 존재할지 모른다고 믿을 수 있었다. 정확히 규정하기 어려운 어떤 것, 선의 희미한 가능성, 하지만 이것은 충분히 생존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인간이 아니다. 그들의 인간성은 땅에 묻혔다. 혹은 그들 스스로, 모욕을 당하거나 괴롭힘을 줌으로써 그것을 땅에묻어버렸다. 사악하고 어리석은 SS 대원들, 카포들, 정치범들, 범죄자들, 크고 작은 일을 맡은 특권층들, 서로 구별되지 않으며 노예와도 같은 해프틀링까지, 독일인들이 만든 광적인 위계질서의 모든 단계들은 역설적이게도 균등한 내적 황폐감에 의해 연결되어 있었다.
하지만 로렌초는 인간이었다. 그의 인간성은 순수하고 오염되지 않았다. 그는 이 무화의 세상 밖에 있었다. 로렌초 덕에 나는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을 수 있었다. - P187

우리의 배고픔이 한 끼를 굶은 사람의 그것과 같지 않듯이, 우리의 추위에도 특별한 이름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는 ‘허기‘라는 말을 쓴다. ‘피로’, ‘공포’, ‘고통‘이라는 말도 쓴다. ‘겨울‘이라는 말도 하지만 이것은전혀 다른 것들이다. 자기 집에서 기쁨을 즐기고 고통을 아파하며 살아가는 자유로운 인간들이 만들어내고 사용하는 자유로운 단어들이다. 만일 수용소들이 좀더 오래 존속했다면 새로운 황량한 언어들이 탄생했을것이다. 영하의 날씨에 바람 속에서 셔츠와 팬티, 올이 성긴 천으로 만든 윗도리와 바지만 입은 채, 더할 수 없이 허약해지고 굶주린 육체로, 종말이 다가와 있다는 것을 의식하면서 하루 종일 노동하는 것의 의미를 설명하려면 새로운 언어가 필요하다. - P189

알몸인 채로 타게스라움에서 10월의 차가운 공기 속으로 나온 우리들은 두 개의문 사이를 몇 걸음에 달려가서 SS 대원에게 카드를 넘기고 다시 숙소의문으로 들어가야 한다. SS 대원은 두 행동이 이어지는 불과 몇 초 사이에 우리의 얼굴과 등을 한눈에 보고 각자의 운명을 결정한다. 그렇게 하여 자기가 받은 카드를 오른쪽 남자에게, 혹은 왼쪽 남자에게 건네준다. 이게 우리들 각자의 죽음과 삶을 가르는 것이다. 3~4분 사이에 200명이 수용된 한 막사의 선발이 ‘완료‘ 되고, 오후에 1만 2,000명이 수용된전 수용소의 선발이 끝난다.
복잡한 타게스라움에 끼어 있던 나는 주위에서 나를 누르던 사람들의압력이 차츰 약해지는 것을 느꼈다. 곧 내 차례였다. 모두 그렇듯 힘있게 그리고 유연하게,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가슴을 쫙 펴고 근육을 모두긴장시켜 불거지게 하려고 애쓰며 지나갔다. 나는 뒤쪽을 보려고 곁눈질을 했다. 내 카드가 오른쪽으로 넘어간 것 같았다.
우리는 숙소로 다시 들어가 옷을 입는다. 아직은 아무도 자신의 운명을확실히 알지 못한다. 무엇보다 선발된 쪽이 오른쪽으로 넘어간 것인지,
왼쪽으로 넘어간 것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서로에게 자비를 베풀거나 미신적인 배려를 할 때는 아니었다. 모두들 제일 나이 많은 사람들,
제일 여윈 사람들, ‘무슬림들 옆으로 모여든다. 그들의 카드가 왼쪽으로 갔다면 왼쪽이 선발되는 게 틀림없다. - P196

오늘은 바람이 불지 않는 게 그나마 다행이다. 이상하게도 인간은 어떻게 해서든 자신이 운이 좋다고 생각한다. 어떤 상황이, 어쩌면 아주 보잘것없을 수도 있는 상황이 우리로 하여금 절망의 문턱을 넘지 않도록해주고 계속 살아가게 해준다. 비가 오지만 바람이 불지 않는다. 혹은비가 오고 바람이 분다. 하지만 오늘 저녁 내가 추가로 죽을 배급받을차례라는 것을 안다. 혹은 상황이 더 안 좋아서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보통 때와 다름없이 배가 고프다. 그러면 정말로 바닥에 누워 있는 것같을 때마다 종종 그렇듯 정말로 마음속에 고통과 지루함밖에 느껴지지않는데,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좋다, 나는 내가 원한다면 언제라도 전류가 흐르는 철조망을 건드리거나 달리는 기차에 뛰어들수 있다. 그러면 비는 끝이 날 것이다. - P201

오늘도 우리는, 아침에는 영원처럼 까마득해 보였던 하루의 분초를 통과했다. 이제 오늘 하루는 끝이 났고 곧잊혀진다. 이제 그것은 더 이상 하루가 아니며 그 누구의 기억 속에도남아 있지 않으리라. 우리는 내일도 오늘과 같으리라는 것을 안다. 어쩌면 비가 더 올 수도 있고 덜 올 수도 있다. 혹은 땅을 파는 대신 카바이드공장에 가서 벽돌을 나를지도 모른다. 아니면 내일 전쟁이 끝날 수도 있고 우리 모두 학살당하거나 다른 수용소로 이송될 수도 있다. 혹은 수용소가 수용소가 된 때부터 금방이라도 닥칠 듯, 확실한 것처럼 늘상 예고되어온 다른 격변 중 하나가 진짜로 일어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내일에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기억이란 희한한 도구다. 수용소에 있는 동안 아주 오래 전 내 친구가내게 써줬던 시 두 구절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어느 날, ‘내일‘이라고 말하는 게
아무 의미를 갖지 않을 때까지.

이곳이 바로 그렇다. 수용소의 은어들 중 결코 사용하지 않는 말이 무엇이인지 아는가? ‘Morgen früh‘, 내일 아침이다. - P204

코만도의 동료들은 나를 부러워한다. 그러는 게 당연하다. 어떻게 내가만족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아침에 내가 사나운 바람을 피해 실험실의 문지방을 넘어서는 순간 바로 내 옆에 한 친구가 등장한다. 내가휴식을 취하는 순간마다, 카베에서나 쉬는 일요일마다 나타나던 친구다. 바로 기억이라는 고통이다. 의식이 어둠을 뚫고 나오는 순간 사나운개처럼 내게 달려드는, 내가 인간임을 느끼게 하는 잔인하고 오래된 고통이다. 그러면 나는 연필과 노트를 들고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것을쓴다. - P216

부서진 창문이 수리되고 난로가 온기를 퍼뜨리기 시작하자 우리의 마음도 조금 누그러지는 것 같았다. 그러자 토바로프스키(23세의 프랑스계폴란드인으로 발진티푸스 환자)가 이런 일을 해낸 우리 세 사람에게 빵 한조각씩을 주자고 제안했고 다른 환자들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불과 하루 전만 해도 이런 일은 벌어질 수 없었다. 수용소에는 이런 불문율이 있었다. "네 빵을 먹어라. 그리고 할 수 있으면 네 옆 사람의 빵도 먹어라." 그리고 감사의 마음을 갖지 마라. 지금 이 일은 수용소가 죽었다는 분명한 증거였다.
우리 사이에서 일어난 최초의 인간적인 제스처였다. 나는 바로 그 순간이 어쨌든 살아 있던 우리가 해프틀링에서 다시 서서히 인간으로 변모한 그 변화 과정의 시작으로 기록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 P244

우리는 러시아군이 곧 도착할 거라고 서로에게 말했다. 우리 모두 그렇게 공언했다. 모두 그러리라 생각했지만 진심으로 그것을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수용소에서 지내는 동안 희망을 갖는 버릇, 자신의 이성을 신뢰하는 버릇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수용소에서는 모든 일이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벌어지기 때문에, 생각이라는 것은 쓸모없었다. 그것은 위험하기도 하다. 고통의 원천이자, 그 고통이 일정한계를 넘으면 자연의 섭리에 의해 무뎌져버리는 감수성이라는 것을 되살려내기 때문이다. - P262

부록 1 독자들에게 답한다

내가 보기에 위의 진술들에 거짓은 하나도 없다. 하지만 이 그림을 완성시키려면 다른 하나가 덧붙여져야 할 것이다.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다양하게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알고 싶지않았기 때문에 알지 못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 모른 척하고 싶었기때문에 알지 못했다. 물론 공포정치는 가장 강력한 무기로, 거기에 저항하기란 매우 어렵다. 그렇지만 독일 국민은 전체적으로 저항하려는 시도조차 해보지 않았던 것 역시 사실이다. 히틀러 치하의 독일에는 특별한 불문율이 널리 퍼져 있었다.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모르는 사람은 질문하지 않으며, 질문한 사람에게 대답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해서 독일인들은 자신들의 무지를 획득하고 방어했다. 그런 무지가 나치즘에 동조하는 자신에 대한 충분한 변명이 되어주는 것같았다. 그들은 입과 눈과 귀를 다문 채 자신들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환상을 만들어갔고, 그렇게 해서 자신은 자기 집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의 공범자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는 것, 그리고 알리는 것은 나치즘에서 떨어져 나오는 방법(결국 그리오래지 않아 위험에 처할 수밖에 없는 방법)이었다. 나는 독일 국민이 전체적으로 이런 방법에 의지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바로이런 고의적인 태만함 때문에 그들이 유죄라고 생각한다. - P276

모든 반란은 어떤 식으로든 특권을 가진, 그러니까 신체 상태나 정신 상태가 다른 일반 포로들보다 훨씬 나은 포로들에 의해 계획되고 지휘되었다. 이건 놀랄 일이 아니다. 고통을 덜받는 사람이 반란을 일으킨다는 건 처음에는 역설적으로 보일 수 있다. 수용소 밖에서도 룸펜프롤레타리아가 투쟁을 선도하는 일은 드물다. ‘거지들‘은 저항하지 않는다. - P279

이론적인 설교는 실제 행동으로 신속하게, 그리고 잔인하게 이행되었다. 1933년,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뒤 불과 몇 달 뒤에 최초의 강제 수용소인 다하우 수용소가 세워졌다. 같은 해 5월에는 유대인 저자들 혹은나치즘의 적들이 쓴 책이 처음으로 불태워졌다(100여 년도 더 전에 독일계 유대인인 시인 하이네는 이렇게 썼다. "책을 불태우는 사람은 조만간 인간들을 불태우게 될 것이다" ). 1935년에 반유대주의는 뉘른베르크 법안이라는 기념비적이고 매우 상세한 법안으로 체현되었다. 1938년에는상부의 명령에 따라 불과 하룻밤 사이에 191개의 시나고그가 불태워졌고 수천 개의 유대인 상점이 파괴되었다. 1939년 독일인에게 갓 점령된폴란드의 유대인들은 게토에 갇혔다. 1940년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문을 열었다. 1941∼1942년 대학살 장치가 완전하게 작동했다. 1944년 희생자의 수는 수백만이었다. - P298

부록 2 프리모 레비 작가 연보

물자 부족, 노역, 허기, 추위, 갈증들은 우리의 몸을 괴롭혔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정신의 커다란 불행으로부터 신경을 돌릴 수 있게 해주었다. 우리는 완벽하게 불행할 수 없었다. 수용소에서 자살이 드물었다는 게 이를 증명한다. 자살은 철학적 행위이며 사유를 통해 결정된다. 일상의 절박함이 우리의 생각을 다른 곳으로 돌려놓았다. 우리는 죽음을 갈망하면서도 자살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수용소에 들어가기 전이나 그후에는 자살에, 자살할 생각에 가까이 간 적이 있다. 하지만 수용소 안에서는 아니었다. - P312

부록 4 작품 해설

『이것이 인간인가』Se questoèun uomo(1947, 1958)
『휴전』 La tregua (1963)
『주기율표』 IⅡ sistema periodico(1975)
『지금이 아니면 언제?』 Se non ora, quando?(1982)
『익사한 자와 구조된 자』ll sommersie isalvati (1986) - P33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누구나 인생을 얼마쯤 살다 보면 완벽한 행복이란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그것과 정반대되는 측면을 깊이 생각해보는 사람은 드물다. 즉 완벽한 불행도 있을 수 없다는 사실 말이다. 이 양 극단의 실현에 걸림돌이 되는 인생의 순간들은 서로 똑같은 본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들은 모든 영원불멸의 것들과 대립하는 우리의 인간적 조건에 기인한다. 미래에 대한 우리의 늘 모자란 인식도 그중 하나다. 그것은 어떤 때에는 희망이라 불리고 어떤 때에는 불확실한 내일이라 불린다. 모든 기쁨과 고통에 한계를 지우는 죽음의 필연성도 그중 하나다. 어쩔 수 없는 물질적 근심들도. 이것들이 지속적인 모든 행복을 오염시키듯, 이것들은 또 우리를 압도하는 불행으로부터 끊임없이 우리의 관심을 돌려놓음으로써 우리의 의식을 파편화하고, 그만큼 삶을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어준다. - P18

10분도 채 안 돼서 튼튼한 남자들이 한데 모이게 되었다. 다른 남자들, 여자들, 아이들, 노인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우리는 당시에도 그후에도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밤은 아주 깔끔하고 간단하게 그들을 삼켜버렸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도 있다. 그 신속하고 간략한 선택의 과정 속에서 우리 각자가 제3제국에 유용한 일꾼인지 아닌지판단되고 있었던 것이다. 또 그렇게 해서 남자 96명과 여자 29명이 모노비츠(부나)와 비르케나우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다른 사람들, 즉 500명이 훨씬 넘는 사람들 중 이틀 후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이 밖에도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이 또 있다. 이렇듯 건장한 사람과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별하는 보잘것없는 원칙마저도 늘 준수된 것은아니고, 나중에는 새로 도착하는 사람들에게 미리 알리지 않은 채 객차의 문을 둘 다 여는 더 간편한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우연히 객차의 이쪽 문으로 내린 사람은 수용소로 들어갔고 다른 쪽 문으로내린 사람은 가스실로 향했다. - P23

이것은 지옥이다. 오늘날, 우리 시대의 지옥이 틀림없이 이럴 것이다.
우리는 크고 텅 빈 방에 지친 채 서 있고 수도꼭지에서는 물이 똑똑 떨어지는데 그 물을 마실 수 없다. 물론 우리는 훨씬 끔찍한 무엇인가를 예상했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계속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다.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더 이상 생각을 할 수도 없다. 우리는 죽은사람들 같다. 누군가 바닥에 주저앉는다. 시간이 한 방울씩 흐른다. - P27

우리의 삶은 그와 같을 것이다. 매일, 정해진 리듬에 따라 아우스뤼켄Ausrticken(나가다) 아인뤼켄Einricken(들어가다), 나갔다가 들어올 것이다. 일하고 자고 먹고, 아팠다가 낫거나 죽을 것이다.
…… 언제까지? 이런 질문을 하면 고참들은 웃는다.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이 수용소에 갓 들어왔음을 알아차린다. 그들은 웃기만 할 뿐 대답을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미래의 문제는 몇 달 전부터, 몇 년 전부터 빛을잃었다. 눈앞의 급박하고 구체적인 문제 앞에서 먼 미래의 중요성은 모두 사라져버렸다. 눈이 오지 않을까, 부려놔야 할 석탄이 있을까, 오늘은얼마나 먹을 수 있을까 하는 문제들 앞에서. - P49

그의 분명하고도 단호한 말들을, 과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하사관으로서 1914~1918년 전쟁에서 철십자훈장을 받은 슈타인라우프의 말들을 잊어버려 마음이 아프다. 그의 서툰 이탈리아어와 훌륭한 군인다운 단순어법을 믿음 없는 인간인 나 자신의 언어로 옮겨야 하다니 마음이 아프다. 하지만 나는 그 당시에나 나중에나 그 말의 뜻만큼은 잊지않았다. 그건 바로 이런 뜻이었다. 수용소는 우리를 동물로 격하시키는 거대한 장치이기 때문에,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동물이 되어서는안 된다. 이곳에서도 살아남는 것은 가능하다. - P57

낯선 외국어가 모든 사람들의 정신의 밑바닥으로 돌덩이처럼 떨어진다. ‘기상‘, 따뜻한 담요가 만들어내는 몽환적인 경계, 잠이라는 튼튼하지못한 갑옷, 고통스럽기도 한 밤으로의 탈출, 이 모든 것이 산산조각난다. 우리는 다시 무자비하게 잠에서 깨어나 벌거벗고 연약한 상태에서잔인하게 모욕에 노출된다. 이성적으로는 그 끝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긴, 다른 날과 똑같은 하루가 시작된다. 너무나 춥고 너무나 배고프고 너무나 힘이 들어 그 끝은 우리와 더 멀어진다. 그러므로 회색빛 빵한 덩이에 우리의 관심과 욕망을 집중시키는 것이 더 낫다. 빵은 작지만한 시간 후면 틀림없이 우리 것이 된다. 그것을 집어삼키기 전까지 5분동안 그것은 이곳에서 우리가 합법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모든 것으로변할 수 있다. - P94

부나 한가운데 서 있는, 꼭대기가 거의 항상 안개 속에 가려져 있는 카바이드 탑을 쌓은 건 바로 우리다. 부나의 벽돌들은 mattoni, Ziegel,
briques, tegula, cegli, kamenny, bricks, téglak이라고 불렸다. 그것을 쌓아올린 건 증오였다. 바벨탑처럼 증오와 반목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 탑을 바벨투름, 보벨투름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탑에 담긴, 우리의 주인들이 꿈꾸는 위대함을, 신과 인간, 우리 인간들에 대한 그들의멸시를 증오한다. - P10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완벽한 날들
메리 올리버 지음, 민승남 옮김 / 마음산책 / 2013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고요함, 잔잔함, 단순함에서 이야기와 삶, 경이와 기쁨 (때론 슬픔)을 찾아내는 자연의 이야기꾼 메리 올리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