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잃는 슬픔은 잔인한 종류의 배움이다. 우리는 애도가 얼마나 차분하지 않을수 있는지, 얼마나 분노로 가득할 수 있는지 알게 된다. 타인의 위로가 얼마나 겉치레처럼 들릴 수 있는지 알게 된다. 슬픔이 얼마나 말과 관련된 것인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과 말로 표현하려 애쓰는 것인지 알게 된다. 옆구리가 왜이렇게 쑤시고 아픈가? 너무 울어서 그렇단다. 울 때도 근육을 쓰는지 몰랐다. 마음이 아플 줄은 알았지만 몸까지 아플 줄은 몰랐다. 입맛이 - P14

참을 수 없이 쓰다. 맛없는 식사를 하고 나서 이닦기를 깜빡한 것처럼. 가슴에는 무겁고 끔찍한 돌이 얹힌 것 같다. 몸속이 영원히 녹아내리는 듯한 느낌이다. 그리고 심장은 ㅡ 내 진짜심장 말이다, 여기에 비유적 의미는 하나도 없다. — 내게서 달아나고 있다. 내 몸과는 별개의 존재가 되어 나와는 맞지 않는 박자로 너무빨리 뛰고 있다. 정신만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몸도 고통스럽다. 아프기도 하고 힘이 하나도 없다. 살, 근육, 장기들이 모두 멈췄다. 어떤자세를 취해도 편하지가 않다. 몇 주째 속이 울렁거린다. 불길한 예감 때문에 긴장되고 딱딱하다. 누군가가 또 죽을 거라는, 또 목숨을 잃을 거라는 확신이 가시지 않는다. 어느 날 아침에 평소보다 일찍 오케이 오빠한테서 전화가 오자 나는 생각한다. 그냥 말해. 빨리 말해 줘. 또 누가 죽었어. 엄마야? - P15

문자가 쏟아져 들어온다. 나는 그것을 안개너머로 보듯 바라본다. 이 문자는 누구에게 온것인가? "아버님의 별세를…………."으로 시작되는문자. 누구네 아버님 말인가? 언니가 자기 친구한테서 온 문자를 전달한다. 우리 아버지가 업적에 비해 너무 겸손한 분이었다는 내용이다. 손가락이 떨리기 시작해서 휴대폰을 치워 버린다. 아버지는 겸손한 분이었던 게 아니라 겸손한 분이다. 사람들이 음그발루, 즉 조의를 표하기 위해 우리 집으로 줄지어 들어오는 영상을 보자 - P20

화면 속으로 손을 뻗어서 그 사람들을 우리 집거실에서 끄집어내고 싶다. 어머니는 벌써 차분한 과부의 자세로 거실 소파에 자리 잡았고 사회적 거리 두기를 위한 탁자가 어머니 앞에 장벽처럼 놓여 있다. 친구들과 친척들이 벌써부터 이래라저래라 떠들어 댄다. 현관문 옆에 방명록을 놓아야 한다고 해서 언니는 탁자에 씌울하얀 레이스 한 필을 사러 가고 오빠가 딱딱한표지가 달린 공책을 사 오자 곧 사람들이 허리를 숙이고 방명록을 적기 시작한다. 나는 생각한다. 다들 돌아가! 왜 당신들이 우리 집에 와서 그이상한 공책에 이름을 쓰고 있는 거야? 어떻게 감히 이걸 현실로 만들 수가 있어? 왠지 몰라도 선의를 가진 이 사람들은 공모자가 되고 만다. 나는 내가 음모론으로 달콤쌉쌀해진 공기를 들이마시는 걸 느낀다. 여든여덟 살이 넘은 사람들, 우리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은데도 멀쩡히 살아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니 따끔따끔한 분통함이 내 - P21

안에 넘쳐흐른다. 내 분노가, 내 공포가 두렵다. 그 안 어딘가에는 수치심도 있다. 나는 왜 이렇게 화나고 겁먹었는가? 잠드는 것이 두렵고, 잠에서 깨는 것이 두렵다. 내일이 두렵고 그 뒤의모든 내일들이 두렵다. 내 안은 놀라움으로 가득 차 있다. 어떻게 평소처럼 집배원이 오고, 사람들이 나에게 강연을 요청하고, 휴대폰 화면에뉴스 알림이 뜰 수가 있는지 믿어지지가 않는다. 어떻게 세상이 계속 돌아가고, 변함없이 숨을 들이쉬고 내쉴 수가 있나? 내 영혼은 영원히 산산조각 났는데. - P22

나는 조의를 표하는 사람들을 피해 다닌다. 친절한 사람들이 좋은 뜻으로 하는 말이지만 그 사실을 안다고 해서 상처를 덜 받지는 않는다. 나이지리아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단어인 "사망"은 어둡고 뒤틀린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아버님의 사망에 대하여." 나는 "사망"을 혐오한다. "쉬고 계시다."는 위안이 되는 게 아니라 코웃음으로 시작해 결국 고통으로 끝난다. 아버지는 아바 집의 본인 방에서도 아주 잘 쉬고 있을 수 있었다. - P36

이보족 문화에는 내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도, 반발하는 것도 많지만 나는이보족 장례식의 축제 분위기가 싫은 것이 아니라 그 시점이 언제냐는 것이 문제다. 나에게는 시간이 필요하다. 지금은 엄숙함을 원한다. 한 친구가 내 장편 소설의 한 구절을 보낸다. "애도는 사랑에 대한 찬미다. 진정한 슬픔을 느낄 수 - P78

있는 자는 진짜 사랑을 경험한 운 좋은 사람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내가 쓴 글을 읽는 것이이토록 고통스럽다니. - P79

행복은 유약함이 된다. 슬픔 앞에서 사람을 무방비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여섯 남매 모두가 부모님에게 깊이 이해받고 사랑받았다고 느낀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각자 다른 방식으로 애도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각자 다른 방식으로 애도한다."라는 말을 머리로 받아들이기는 쉬워도 가슴으로 받아들이기는 훨씬 어렵다. 나는 그림자 속에 자신을 감춘 채 줌 회의를 두려워하게 되었다. 가족의 형태는 영원히 달라졌고 휴대폰 화면을 옆으로 밀었을 때 "아버지"라고 적힌 칸이 더 이상 없다는 것보다 더 가슴 아프게 그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은 없다. - P81

내가 변하길 원하는지 아닌지는 중요치 않다. 이미 변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목소리가 내 글을 뚫고 나오고 있다. 내가 죽음을 얼마나 가깝게 느끼는지와 내가 언젠가는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에 대한 아주 세밀하고 강한 인식이 가득 담긴 목소리. 새로운 급박함, 만연한 찰나성. 나는 이제 모든 것을 글로 써야 한다. 내게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누가 알겠는가? 하루는 오케이 오빠가 이런 문자를 보낸다. "아버지의 건조한 유머, 아버지가 기분 좋을 때 웃긴 춤을 추 - P104

시던 것, 아버지가 내 뺨을 토닥이면서 ‘신경 쓰지 마.‘라고 하시던 게 그리워."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물론 나는 아버지가 우리 기분을 풀어주고 싶을 때 늘 "신경 쓰지 마."라고 했던 걸 기억하지만 오빠도 그걸 기억한다는 말을 들으니 새삼 진짜였구나 하고 느낀다. 슬픔의 지독한 성분 중에는 의심의 시작이 있다. 그러니까 아니, 이건 내 상상이 아니다. 그래, 아버지는 정말로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 - P105

나는 지금 아버지에 대한 글을 과거시제로 쓰고 있지만 내가 아버지에 대한 글을 과거 시제로 쓰고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 - P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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