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 11장

<밤의 끝으로의 여행> 셀린

6장 셀린 - 희극 배우도, 순교자도 아닌

한 문장의 리듬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 문장 자체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니체의 <선악의 피안》에서 - P201

7장 고통 / 공포

친족이건 그렇지 않건간에 인간이란 결국에는 썩은 고깃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밤의 끝으로의 여행> 셀린 - P218

공포와 고통, 그리고 그것들의 아브젝시옹으로의 집중이야말로 셀린의 글쓰기가 지닌 묵시록적인 세계관에 가장 적합한 지적인 것으로 보인다. - P234

8장 모든 영원성을 망쳐 놓는 여성들…

삶을 주는 자이면서 삶을 빼앗는 자, 이렇듯 셀린의 어머니는 또한 아름다움과 죽음이 결합하는 야누스이다. 아름다움과 죽음의 결합이야말로 글쓰기의 조건이다. 왜냐하면 한정된 삶이 자신의 말로 된 레이스의 추가 부분의 발견을 갈망하기 때문이며, 또한 삶자체가 인간의 죽음이라는 삶의 가차없는 종말과 승화 작용의 덧없음을 표시하는 검은 힘이기 때문이다. - P244

이같은 아버지 살해 이야기는 페르디낭이 천장을 바라보며 몽상하던 지극히 개인적인 꿈속에서 찾아내려 하는 이야기가 아닐까.

음유 시인 티보의 모습이 보인다………… 그는 언제나 돈이 필요했던것이다……… 그는 아버지 조아드를 죽일 것이다………… 어쨌든 이 세상에서 아버지 하나가 줄어드는 셈이 되니까……… 천장에서 기마 시합이 벌어지는 것이 보인다……… 창을 들고 싸우는 기사의 모습이 보인다…………

이 광란의 열쇠가 아버지 살해 라면 아버지 살해는 단지 죄책감만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제동이 걸리지 않는 어떠한 영향력이나 통제로부터도 자유로운 여성 앞에서의 무시무시한 공포와연결된다. 셀린에게서 나타난 아브젝시옹의 원천 중의 하나는 이같은 아버지의 몰락이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괴물 같은 아들은, 셀린의 눈에는 유일한 진실로 보이는 무한성이 고갈된 세상에 대해 아버지의 권력을 빼앗기에 충분한 만큼의 권력을 가장하고 나타난다. 아들이자 작가는 오귀스트가 질병에까지 이르는 비명·악몽 · 기진맥진·착란, 머리 주변의 찬 수건의 상태로 이해되도록 한다. 그리고 독자는 이같은 지옥이 페르디낭에게도 공통적이라는 사실을 설명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 한편 처음부터 아버지의 모습은 어린아이와 우스꽝스런 남자다움이 혼합되어 그려진다. - P259

9장 유대인이 되든가, 죽든가

이같은 논리적 균형을 가로질러 충격을 주는 진실의 말은 밝혀지고야 만다. 그것이 펼쳐지는 장은 사회학적이거나 정치적인 경험의 장과는 다르다. 우리는 그 속에서 이성이 통합하려 하고 일체시키려 하며 전체화시키려 하는 순간부터 환상과 착란으로 변할 뿐인, 무엇도 대신할 수 없는 생생한 기록을 발견하는 것이다. 부정주의처럼 담화를 짓누르는 무정부주의나 허무주의는 이제 전복되어 하나의 대상으로 나타난다. 증오하는 동시에 욕망하는 위협과 공격성, 선망하면서 동시에 혐오하는 대상으로.
그 대상은 바로 유대인이다. 그들을 통해서 비로소 모든 모순들이 풀리고 설명되는, 이를테면 유대인이야말로 모든 사고의 중심지인 것이다. 우리는 셀린의 팜플렛을 구성하는 공통된 두 개의 특징을 밝혀냄으로써 셀린식 담화의 체계 속에서 유대인의 역할을 보다 더 명료하게 관조해 낼 수 있을 것이다. - P270

유대인이란 허섭스레기와 욕망의 대상, 시체와 삶, 대변과 쾌락, 살해의 공격성과 가장 승화된 권력 사이의 합접물인 것이다. "내가 무엇을 아는가?" "유대인이 되든가, 죽든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사실만이 분명해진다……… 이제 본능이 명하는 대로 곁눈질하지 말고 앞으로! 유대인은 지배자로 승격되고 여성이 된다. 양가적이고 자기와 타자, 주체와 객체, 좀더 깊이는 안과 밖 사이의 완고한 한계를 잃어버린경계선, 변질된 지배자로서의 여성 말이다. 공포와 매혹의 대상, 아브젝트 자체인 여성이 되는 것이다. 유대인은 아브젝트하다. 더럽게 오염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런 그와 동일시하려는 것이다. 그를 욕망하는 이같은 치명적인 형제애는 한계를 잃게 하고, 나를 아브젝시옹으로 축소시켜 대변, 여성, 수동적인 부패한 육신으로 만든다. 그래서 ‘셀린, 이 저열한 자식‘이 되는 것이다. - P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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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성서> 속의 혐오에 대한 기호학
5장 …너,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자여

4장 <성서> 속의 혐오에 대한 기호학

《성서》에 나타나는 부정(不淨)에 대한 해석은 크게 두 흐름으로나누어진다. 첫번째는 로버트슨 스미스(《셈족 종교에 관한 강의》,1889)의 해석으로서, 부정이란 신의 뜻에 위반하는 것이기 때문에《성서》의 부정을 운명적인 의지에 복종하는 유대 유일 신앙에 나타나는 내면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입장이다. 따라서 부정은 신성함과는 이질적인 악마적인 힘이라기보다는, 그것이 신의 의지에 복종한다는 관점에서 터부에 대한 일종의 중화 작용(더러움에 대한의식 고유의 것)이다.
바루크 A. 레빈‘에 따른 또 하나의 해석은 부정은 성스러움을 위협하는 악마적인 힘의 지표이다. 그에게 부정함은 성스러움과 독립해서 작용하는 것으로서 악의 정신의 자율적인 힘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이 대립되는 두 해석을 통해, 사실은 부정에 관련된 《성서》의 사상이 복잡한 역동성을 지니고 있음을 강조코자 한다. - P143

처음부터 《성서》의 텍스트는 인간과 신의 차이가 그 음식물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한다. - P149

혐오의 대상(l‘abominé)이란 결국 성스러움에 대한 맞장구이다. 동시에 성스러움의 고갈, 즉 종말이다. - P169

5장 …너,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자여

더러움은 내재화 운동을 통해 《성서》 속에 이미 내재하는 상징성이나 도덕률에 관련된 죄의식과 혼동된다. 그리고 이러한 물질적인 가증함과 보다 대상 지향적인 융합으로부터 새로운 하나의범주가 만들어진다. 그것은 죄이다. 삼켜지고 흡수되었다고 말할수 있을 그리스도교의 더러움은 이교주의의 앙갚음이자 모성적 원칙과의 화해이다. 프로이트는 《모세와 유일 신앙》에서 그리스도교란 이교주의와 유대적 유일 신앙 사이의 협약이라고 밝히면서 그같은 사실을 강조한다. 《성서》의 논리는 전복되었음에도 불구하고《성서》의 기만적인 논리는 밖이 아니라 안에 있다) 그대로 지속된다. 우리는 《성서》의 논리가 지속됨을 차이화의 과정·분리·분할의 작용들 속에서 발견한다. - P179

그리스도만이 이같은 이질성을 성공시켰으므로 죄 없는 육체이다. 신성한 심판에 거역해서 안으로 부정한 자들은 그같은 잘못을 고백하고 예수가 성취한 승화에 가까이 가야 한다. 그리스도교의 존재가 환상으로의 도피임이 틀림없음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범우주적 신앙의 대상이 되는 까닭은, 신도들이 자신의 죄를 고백하기만 하면 각자가 유일신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승천을 갈망해도 된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너희 죄는 용서받았느니라." - P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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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01-25 08: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늘 아침 출근길에는 성서 부분 읽었어요. 이 책에서 저는 현재까지 성서 부분이 제일 재미있어요. 그렇다고 이해를 하는 건 아니지만 좀 그랬어요.

햇살과함께 2024-01-25 08:51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성경 읽기도 하셨으니!
저도 그나마 앞 장들보다는 성경 문구는 조금 익숙한 문장들이라..
그러나 정신을 똑바로 차려도 이해가 안되는 마당에 감기약 먹고 몽롱한 상태로 비몽사몽...
자꾸 남은 날과 남은 페이지를 비교하고요 ㅎㅎ

다락방 2024-01-25 11:28   좋아요 1 | URL
저도 오늘 뒤에 얼만큼 남았나 안읽어도 되는 부분은 얼마나 되나 한 번 들춰봤어요. ㅋㅋ 같은 마음 ㅋㅋㅋ
 

7장 가족 중심 관점에서 여성 인권 관점으로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이 글의 초점은 가족이라기보다 폭력이다. 즉 본 연구가 밝히고자 한 것은 가족이 해체되어야 하는 이유가 아니라, ‘아내 폭력‘이 재생산되는 구조에 관한 것이었다. 이 연구는 가족 관계에서는 폭력이 발생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족에서는 폭력이 발생할 리가 없다‘는 담론에 대한 비판이다.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포함하여 모든 인간 관계가 권력 관계라면, 어떤 의미에서 폭력은 불가피한 인간 문제이다. 나의 관심은 부부 간에 폭력이 발생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부부 간에는 폭력이 발생할 리 없다고 믿게 하는 사회적 권력은 무엇인가에 관한 것이었다. ‘아내 폭력‘이 문제화되어야 하는 이유는 폭력이 가족 관계에서 발생해서라기보다는 가족 내 성 역할 규범을 통해 폭력이 정상화, 사적화(私的化, privatization)되기 때문이다. - P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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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폭력 남편이 인식하는 아내 폭력

기존의 여성 폭력 가해자 연구들은 이들의 폭력 부정을 방어 기제 혹은 정당화로 설명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폭력을 나쁘다고 보는 연구자의 생각으로서, 폭력 남성의 사고방식을 그대로 드러내주지 못한다. 원래 자아방어기제 (ego defencemechanism)란 프로이트 심리학에서 발전된 것으로서 자아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개념이다. 그러나 그들은 아타(我他)의 경계로서 자아의 존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들에게는 방어할 자아가 없다. 세상이 모두 자기(남성)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자신의 확장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폭력 부정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믿는 바, 생각하는 바 그대로이기 때문에 다른 문제로 치환(置換)하여 인식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자기들의 행동이 정당하기 때문에 굳이 합리화‘, 정당‘화‘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들의 폭력 부정은 방어 기제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인식 구조를 확실히 하는 일종의 공격 방법이다. 자아가 없다는 것은 자신의 자아가 타인의 자아와 부딪칠 때 생기는 갈등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의 행위를 남편의 권리와 의무로 생각하기 때문에 아내를 구타한 후 죄책감이나 연민, 아내의 고통에 대한 반응(sensitive)이 없다. 이제는 남편으로서 ‘옳은 행동‘(폭력)을 법으로까지 제재하는 세상이 왔으므로 여자들이 ‘무서운‘ 지경이 된다. 자신이 폭력을 행사했다는 아내와 이 사회의 주장은 자신의 신념을 억압하는 것이다. - P112

아내를 어머니의 대체물로 보고 모성성을 요구하는 ‘한국적‘ 남성성의 특성은 조혜정 (1988)과 신용구(2000)의 연구에서도 지적되고 있다. 신용구는 <박정희 정신분석, 신화는 없다》에서 육영수가 박정희의 충동성을 조절하는 강력한 초자아(超自我)이자 구강기적(口腔期的) 욕구를 채워주는 어머니였다고 분석하고 있다. - P126

성 역할 구분은 ‘사소한‘ 폭력에서 범죄로 명명될 수 있는 극단적인 폭력에까지 모두 작동한다. ‘부부 싸움‘이나 가부장적 테러리즘은 결국 같은 사회 구조와 논리에 그 원인이 있는 것이다. 이는 ‘아내 폭력‘이 부부 관계의 극단적, 예외적 일탈적 사건이 아니라 부부관계를 유지하는 일상적인 ‘정상‘ 규범임을 말해준다. ‘맞을 짓‘이란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여성과 남성이 가족 제도를 통해아내와 남편이 되었을 때만 발효된다. 현재의 가족 제도에서 ‘맞을짓‘은 남녀의 역할 규범 그 자체에서 발생한다. - P152

5장 폭력을 수용하는 아내의 심리

남편은 가족 없이 살아가지 못한다. 결혼 관계에서 폭력은 남편이관계의 유지를 위해서건 청산을 위해서건, 자신의 요구를 관철하기위해 가장 손쉽게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이다. 두 사람 간의 이해 갈등 상황에서 남편은 아내보다 훨씬 쉽게 폭력을 선택할 수 있다는점에서 폭력은 남성적인 자원이다. 가정 외 폭력에서도 폭력 행위주체가 대부분 남성이라는 점에서 폭력은 성별화된 사회 현상이다. - P156

사례의 폭력 남편들은 자신의 남자다움을 위해 사회적으로 성공하거나 돈을 벌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본 연구의 50사례 49명)의 남편 중 약 40퍼센트인 19사례가 무직이었다. 직업이 있다 해도 부인과 함께 자영업을 하는 경우는 대부분 아내 혼자 일했다. 이 문제로 아내가 불만스러워하거나 항의하면 남편은 폭력으로 대응한다. 이는 현대 가부장적 자본주의 사회를 유지하는 근본 원리인 성별 분업‘ 논리가 실제로는 분업이 아니라 협박과 강제 속에서 여성의 이중 노동에 의해 유지된다는 것을 보여준다.(실제로 여성은 세계 공식 노동력의 3분의 1, 비공식 노동력의 5분의 4를 담당하면서, 전 세계수입의 10퍼센트만을 받으며 세계 재산의 1퍼센트만을 소유한다.) - P158

아내는 자신이 당한 폭력을 참아야 하는 -> 참을 수밖에 없는 -> 참을 만한 폭력으로 인식한다. 가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직면한 현실을 일시적, 우연적인 것으로 만들어 폭력 사건을 특수한 경험으로 축소해야 한다. 특히 남편의 폭력이 10년 정도밖에 되지 않은 아내들이 나에게 가장 많이 했던 질문은 ‘보시기에 몇 퍼센트나 고쳐지나요? 우리 남편이 고쳐질 타입인가요? 그것을 어떻게하면 알 수 있나요? 시간이 흐르면 나아지겠지요? 이렇게까지 했는데 설마 또 때리지는 않겠지요?‘ 등이다. 아내는 자신이 당한 폭력을 그 자체로 인식하지 않는다. 폭력을 ‘있는 그대로‘ 해석할 수 있는 언어도 없지만, 있는 그대로 해석한다면 남편/가족을 떠나야 하는 더 큰 문제와 마주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은 그들을 분열과 혼란, 끝없는 고민과 질문 속으로 밀어 넣는다. - P166

딸한테는 ‘아빠가 아파서 그런 거다. 저건 술 먹으면 생기는 병이다.‘ 아이한테 그렇게 안정을 시켜요. (34세, 대학원졸, 전문직, 여성)

아이들이 너무 충격을 받으니까 ‘지금 아빠는 깊은 병에 걸렸단다.
우리가 아빠를 도와서 어서 낫게 해 드려야 돼, 너희들은 아빠를 미워하면 안 돼.‘ (41세, 고졸, 자영업, 여성) - P173

이러한 사고방식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들이 갈등 상황에 직면했을 때 대응하는 익숙한 방식이기도 하다. 남성은 문제의 원인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지만(투사) 여성은 자기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크다(내사內射). 투사로 인한 분노가 남성의 질병이라면, 내사(introjection) 심리는 여성적 질병인 우울증의 가장 큰 원인이다.
아내는 남편의 규범을 자신의 인격 내부로 받아들임으로써 남편에 대한 적의를 자신의 문제로 만든다. 아내가 ‘맞을 짓‘을 해서 폭력이 발생했다는 논리는 남편만의 주장이 아니라 아내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이는 허위 의식이 아니라 성별 관계에 의해 폭력이 정당해진다는 진리 체계가 작동한 결과이다. 투사나 내사는 같은 문제에 대한 성별화된 심리 현상이다. 모두 타인과 자신을 분리하지 못해 나타나는 것으로 아내의 주체성과 개별성에는 혼란이 올 수밖에 없다. - P180

6장 아내 정체성과 가족 정치학

공적 영역에서 여성의 참여가 봉쇄되는 대신, 가정에서 여성의 책임과 역할은 극대화된다. 이른바 한국적 가부장제에 대한 많은 연 - P192

구들은 한국 사회 가부장제의 특성을 공사(내외) 유별(有別) 의식에 기초한 사적 영역에서의 여성의 ‘지나친 권력‘이라고 본다. 공적 영역에서 여성은 철저히 배제되었지만 사적 영역에서 아내, 어머니로서의 권력은 혹독한 가부장제를 견디게 하는 중요한 동인이었다는 것이다. 문제는 사적 영역에서 여성의 권력이 지나치게 비대한 한국 사회에서 왜 그토록 아내 구타가 많은가이다. 이 질문은 언뜻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일치한다. 사적 영역에서 여성의 권력은 사실 권력이라기보다 역할과 의무이다. 여성이 사적 영역의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여성이 사적인 존재로 인식되는 한, 그리고 가정이 권력 작용이 일어나는 정치적 공간이 아니라 자연적안식처라는 생각이 지배하는 한, 사회는 가정 폭력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므로 ‘아내 폭력‘은 지속될 것이다. - P193

‘아내 폭력‘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이 여성의 몸을 남성의 의지대로 규율하는 (아마도 가장 극단적인 상태이다. 폭력은 개인을전혀 다른 사람으로 만들 수 있는 권력이다. 폭력당한 사람은 그 이전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 고통(trauma)의 생존자들은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 환경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고 자신의 의지로 할수 있는 영역이 제한되는 것을 경험한다. 남편의 폭력을 기억하고있는 여성의 몸은 주체의 의지대로 이동하지 못한다.
공간 지각 능력은 개인이 세계와 만나는 방식에서 능동성과 관련이 있는데, 특히 오랫동안 폭력당한 여성들은 공간 지각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수학자들에 의하면 수학에서 성별 능력 차이가 가장 현격히발견되는 분야는 공간 지각력인데 이는 여성이 수동적으로 사회화되었기때문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존재한다 혹은 살아 있다는 근거는, 곧인간의 몸이 공간의 어느 구체적인 장소에 실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간이 그것을 인식하는 주체로부터 ‘객관적이지 않다는 사실은, 공간이 인식 주체자의 몸을 기준으로 삼아서만 특정하게 인식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몸이 없다면 공간도 인식되지 않는다. 폭력으로 인해 몸의 주체성을 상실한 여성은 자신의 육체가 머물고 있는 공간과 자기와의 관계성(공간에서 자기 몸의 위치성)을 파악하기힘들다. - P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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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당사자: 연구자, 피해자, 운동가로서 나

나는 증언자들이 어디에도 말할 수 없는 이야기를 털어놓음으로써 그들의 상처가 조금이라도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그것은나의 자기 중심적 기대였을 뿐 그들은 망각하고 회피함으로써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여기서 고통은 신체적 고통(‘아픔‘, pain)과 정신적 고통(‘괴로움‘,
suffering)을 모두 의미한다. 근대 서구 철학에서 고통은 ‘pain‘과
‘suffering‘으로 구분되었고, 의식 작용을 수반하는 정신적 괴로움이 몸의 고통보다 우위에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고통당하는 사람에게 고통은 몸에서 일어나는 정신적이고 감정적인 것으로서 이러한 구분은 무의미하다. 그들의 고통은 절대적인 고통이다. 몸에가해지는 아픔의 느낌은 보편적이어서, 우리가 흔히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로할 때 쓰는 ‘생각하기 나름‘이라든가 ‘네가 강하면 이겨낼수 있다‘ 따위의 고통을 상대화하는 언어는 그들의 고통을 치유하는 데 무기력하며 때론 아무 의미가 없다. - P55

재판 이혼 시 남편의 과실(過失)이 많을수록 위자료나 재산 분할에서 아내에게 유리하지만 사례 여성은 소송장에 남편이 딸과 조카, 이웃집 어린이를 성폭행한 사실을 적지 않았다. 그런데 그 이유가 무려 여덟 가지이다. 내용은 남편에 대한 증오, 사랑, 주변 사람에 대한 걱정, 자책감, 실리적 이익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이 여성의 삶의 맥락에서 ①~⑧이 모두 같은 비중은 아닐 것이다. 내가 그녀의 이야기 중 어느 부분에 긍정적 혹은 부정적으로 (무)반응하느냐에 따라, 그녀는 위와 다르게 진술할 수도 있다. 증언자의 이야기는 연구자의 가치 개입, 듣는 사람과 말하는 사람을 둘러싼 정치적상황과 상호 주관성(inter-subjectivity)에 의해 의미 있는 자료로 선택되기도 하고 그냥 버려지기도 한다. - P75

3장 여성의 눈으로 보는 ‘아내 폭력’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은 모든 여성이 피지배자로서 근본적인공통점이 있다고 보았다. 이들은 여성의 종속이 가부장제가 규정한 남녀 간의 신체적 성차에 근거하기 때문에, 억압의 원인은 여성의 출산과 성행위에 대한 남성의 통제, 곧 여성의 육체에 대한 남성의 통제에 있다고 보았다. 즉, 여성의 몸이 여성 동질성의 최소 단위가 되는 것은 신체 구조가 같기 때문이 아니라 성 차별 사회가 여성의 몸에 부여하는 사회적 평가 때문이다. 따라서 여성의 몸에 대한 - P86

통제는 계급이나 인종에 따른 여성 억압보다 더 근원적인 억압의 형식, 모든 사회적 모순들의 마지막 원인이라는 것이다. - P87

여성 폭력에 대한 급진주의 페미니즘 이론의 가장 핵심적인 통찰은 폭력과 폭력을 통한 위협, 공포는 권력 관계의 부산물이나 이차적인 것이 아니라 위계 관계의 구조적인 토대로서 남성 지배와 여성 종속의 중요한 동인(動因)이라는 것이다. 즉, 남성 폭력은 그 자체로 독립적인 권력의 한 형태이다. - P88

‘아내 폭력‘처럼 남성 중심적(가해자 중심적) 시각이 가시적이고 체계적인 영역도 없다. 사회는 남성의 폭력행동 자체에 대한 정치적인 분석과 비판보다는 남성이 폭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는 상황과이유에 초점을 둔다. 남편은 아내를 때릴 수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기 때문에 언제나 ‘아내 폭력‘ 현상은 성(차)별적으로 해석된다. 피해 여성과 가해 남성의 경험이 해석, 재현, 담론화되는 데 이미 그출발선이 다른 것이다. ‘아내 폭력‘은 현재의 가족 제도와 사회 구조를 지탱하고 있는 성별 관계에 의한 여성 문제들 간의 연관성을 이해하지 않고는 설명하기 어렵다. ‘아내 폭력‘에 대한 질문은 (안때릴 수도 있는데 왜 때리는가‘보다는, ‘아내를 때릴 수 있는 권력은 어디에서 나오는가‘로 전환되어야 한다. - P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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