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폭력 남편이 인식하는 아내 폭력

기존의 여성 폭력 가해자 연구들은 이들의 폭력 부정을 방어 기제 혹은 정당화로 설명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폭력을 나쁘다고 보는 연구자의 생각으로서, 폭력 남성의 사고방식을 그대로 드러내주지 못한다. 원래 자아방어기제 (ego defencemechanism)란 프로이트 심리학에서 발전된 것으로서 자아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개념이다. 그러나 그들은 아타(我他)의 경계로서 자아의 존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들에게는 방어할 자아가 없다. 세상이 모두 자기(남성)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자신의 확장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폭력 부정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믿는 바, 생각하는 바 그대로이기 때문에 다른 문제로 치환(置換)하여 인식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자기들의 행동이 정당하기 때문에 굳이 합리화‘, 정당‘화‘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들의 폭력 부정은 방어 기제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인식 구조를 확실히 하는 일종의 공격 방법이다. 자아가 없다는 것은 자신의 자아가 타인의 자아와 부딪칠 때 생기는 갈등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의 행위를 남편의 권리와 의무로 생각하기 때문에 아내를 구타한 후 죄책감이나 연민, 아내의 고통에 대한 반응(sensitive)이 없다. 이제는 남편으로서 ‘옳은 행동‘(폭력)을 법으로까지 제재하는 세상이 왔으므로 여자들이 ‘무서운‘ 지경이 된다. 자신이 폭력을 행사했다는 아내와 이 사회의 주장은 자신의 신념을 억압하는 것이다. - P112

아내를 어머니의 대체물로 보고 모성성을 요구하는 ‘한국적‘ 남성성의 특성은 조혜정 (1988)과 신용구(2000)의 연구에서도 지적되고 있다. 신용구는 <박정희 정신분석, 신화는 없다》에서 육영수가 박정희의 충동성을 조절하는 강력한 초자아(超自我)이자 구강기적(口腔期的) 욕구를 채워주는 어머니였다고 분석하고 있다. - P126

성 역할 구분은 ‘사소한‘ 폭력에서 범죄로 명명될 수 있는 극단적인 폭력에까지 모두 작동한다. ‘부부 싸움‘이나 가부장적 테러리즘은 결국 같은 사회 구조와 논리에 그 원인이 있는 것이다. 이는 ‘아내 폭력‘이 부부 관계의 극단적, 예외적 일탈적 사건이 아니라 부부관계를 유지하는 일상적인 ‘정상‘ 규범임을 말해준다. ‘맞을 짓‘이란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여성과 남성이 가족 제도를 통해아내와 남편이 되었을 때만 발효된다. 현재의 가족 제도에서 ‘맞을짓‘은 남녀의 역할 규범 그 자체에서 발생한다. - P152

5장 폭력을 수용하는 아내의 심리

남편은 가족 없이 살아가지 못한다. 결혼 관계에서 폭력은 남편이관계의 유지를 위해서건 청산을 위해서건, 자신의 요구를 관철하기위해 가장 손쉽게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이다. 두 사람 간의 이해 갈등 상황에서 남편은 아내보다 훨씬 쉽게 폭력을 선택할 수 있다는점에서 폭력은 남성적인 자원이다. 가정 외 폭력에서도 폭력 행위주체가 대부분 남성이라는 점에서 폭력은 성별화된 사회 현상이다. - P156

사례의 폭력 남편들은 자신의 남자다움을 위해 사회적으로 성공하거나 돈을 벌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본 연구의 50사례 49명)의 남편 중 약 40퍼센트인 19사례가 무직이었다. 직업이 있다 해도 부인과 함께 자영업을 하는 경우는 대부분 아내 혼자 일했다. 이 문제로 아내가 불만스러워하거나 항의하면 남편은 폭력으로 대응한다. 이는 현대 가부장적 자본주의 사회를 유지하는 근본 원리인 성별 분업‘ 논리가 실제로는 분업이 아니라 협박과 강제 속에서 여성의 이중 노동에 의해 유지된다는 것을 보여준다.(실제로 여성은 세계 공식 노동력의 3분의 1, 비공식 노동력의 5분의 4를 담당하면서, 전 세계수입의 10퍼센트만을 받으며 세계 재산의 1퍼센트만을 소유한다.) - P158

아내는 자신이 당한 폭력을 참아야 하는 -> 참을 수밖에 없는 -> 참을 만한 폭력으로 인식한다. 가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직면한 현실을 일시적, 우연적인 것으로 만들어 폭력 사건을 특수한 경험으로 축소해야 한다. 특히 남편의 폭력이 10년 정도밖에 되지 않은 아내들이 나에게 가장 많이 했던 질문은 ‘보시기에 몇 퍼센트나 고쳐지나요? 우리 남편이 고쳐질 타입인가요? 그것을 어떻게하면 알 수 있나요? 시간이 흐르면 나아지겠지요? 이렇게까지 했는데 설마 또 때리지는 않겠지요?‘ 등이다. 아내는 자신이 당한 폭력을 그 자체로 인식하지 않는다. 폭력을 ‘있는 그대로‘ 해석할 수 있는 언어도 없지만, 있는 그대로 해석한다면 남편/가족을 떠나야 하는 더 큰 문제와 마주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은 그들을 분열과 혼란, 끝없는 고민과 질문 속으로 밀어 넣는다. - P166

딸한테는 ‘아빠가 아파서 그런 거다. 저건 술 먹으면 생기는 병이다.‘ 아이한테 그렇게 안정을 시켜요. (34세, 대학원졸, 전문직, 여성)

아이들이 너무 충격을 받으니까 ‘지금 아빠는 깊은 병에 걸렸단다.
우리가 아빠를 도와서 어서 낫게 해 드려야 돼, 너희들은 아빠를 미워하면 안 돼.‘ (41세, 고졸, 자영업, 여성) - P173

이러한 사고방식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들이 갈등 상황에 직면했을 때 대응하는 익숙한 방식이기도 하다. 남성은 문제의 원인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지만(투사) 여성은 자기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크다(내사內射). 투사로 인한 분노가 남성의 질병이라면, 내사(introjection) 심리는 여성적 질병인 우울증의 가장 큰 원인이다.
아내는 남편의 규범을 자신의 인격 내부로 받아들임으로써 남편에 대한 적의를 자신의 문제로 만든다. 아내가 ‘맞을 짓‘을 해서 폭력이 발생했다는 논리는 남편만의 주장이 아니라 아내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이는 허위 의식이 아니라 성별 관계에 의해 폭력이 정당해진다는 진리 체계가 작동한 결과이다. 투사나 내사는 같은 문제에 대한 성별화된 심리 현상이다. 모두 타인과 자신을 분리하지 못해 나타나는 것으로 아내의 주체성과 개별성에는 혼란이 올 수밖에 없다. - P180

6장 아내 정체성과 가족 정치학

공적 영역에서 여성의 참여가 봉쇄되는 대신, 가정에서 여성의 책임과 역할은 극대화된다. 이른바 한국적 가부장제에 대한 많은 연 - P192

구들은 한국 사회 가부장제의 특성을 공사(내외) 유별(有別) 의식에 기초한 사적 영역에서의 여성의 ‘지나친 권력‘이라고 본다. 공적 영역에서 여성은 철저히 배제되었지만 사적 영역에서 아내, 어머니로서의 권력은 혹독한 가부장제를 견디게 하는 중요한 동인이었다는 것이다. 문제는 사적 영역에서 여성의 권력이 지나치게 비대한 한국 사회에서 왜 그토록 아내 구타가 많은가이다. 이 질문은 언뜻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일치한다. 사적 영역에서 여성의 권력은 사실 권력이라기보다 역할과 의무이다. 여성이 사적 영역의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여성이 사적인 존재로 인식되는 한, 그리고 가정이 권력 작용이 일어나는 정치적 공간이 아니라 자연적안식처라는 생각이 지배하는 한, 사회는 가정 폭력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므로 ‘아내 폭력‘은 지속될 것이다. - P193

‘아내 폭력‘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이 여성의 몸을 남성의 의지대로 규율하는 (아마도 가장 극단적인 상태이다. 폭력은 개인을전혀 다른 사람으로 만들 수 있는 권력이다. 폭력당한 사람은 그 이전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 고통(trauma)의 생존자들은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 환경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고 자신의 의지로 할수 있는 영역이 제한되는 것을 경험한다. 남편의 폭력을 기억하고있는 여성의 몸은 주체의 의지대로 이동하지 못한다.
공간 지각 능력은 개인이 세계와 만나는 방식에서 능동성과 관련이 있는데, 특히 오랫동안 폭력당한 여성들은 공간 지각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수학자들에 의하면 수학에서 성별 능력 차이가 가장 현격히발견되는 분야는 공간 지각력인데 이는 여성이 수동적으로 사회화되었기때문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존재한다 혹은 살아 있다는 근거는, 곧인간의 몸이 공간의 어느 구체적인 장소에 실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간이 그것을 인식하는 주체로부터 ‘객관적이지 않다는 사실은, 공간이 인식 주체자의 몸을 기준으로 삼아서만 특정하게 인식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몸이 없다면 공간도 인식되지 않는다. 폭력으로 인해 몸의 주체성을 상실한 여성은 자신의 육체가 머물고 있는 공간과 자기와의 관계성(공간에서 자기 몸의 위치성)을 파악하기힘들다. - P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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