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당사자: 연구자, 피해자, 운동가로서 나

나는 증언자들이 어디에도 말할 수 없는 이야기를 털어놓음으로써 그들의 상처가 조금이라도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그것은나의 자기 중심적 기대였을 뿐 그들은 망각하고 회피함으로써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여기서 고통은 신체적 고통(‘아픔‘, pain)과 정신적 고통(‘괴로움‘,
suffering)을 모두 의미한다. 근대 서구 철학에서 고통은 ‘pain‘과
‘suffering‘으로 구분되었고, 의식 작용을 수반하는 정신적 괴로움이 몸의 고통보다 우위에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고통당하는 사람에게 고통은 몸에서 일어나는 정신적이고 감정적인 것으로서 이러한 구분은 무의미하다. 그들의 고통은 절대적인 고통이다. 몸에가해지는 아픔의 느낌은 보편적이어서, 우리가 흔히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로할 때 쓰는 ‘생각하기 나름‘이라든가 ‘네가 강하면 이겨낼수 있다‘ 따위의 고통을 상대화하는 언어는 그들의 고통을 치유하는 데 무기력하며 때론 아무 의미가 없다. - P55

재판 이혼 시 남편의 과실(過失)이 많을수록 위자료나 재산 분할에서 아내에게 유리하지만 사례 여성은 소송장에 남편이 딸과 조카, 이웃집 어린이를 성폭행한 사실을 적지 않았다. 그런데 그 이유가 무려 여덟 가지이다. 내용은 남편에 대한 증오, 사랑, 주변 사람에 대한 걱정, 자책감, 실리적 이익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이 여성의 삶의 맥락에서 ①~⑧이 모두 같은 비중은 아닐 것이다. 내가 그녀의 이야기 중 어느 부분에 긍정적 혹은 부정적으로 (무)반응하느냐에 따라, 그녀는 위와 다르게 진술할 수도 있다. 증언자의 이야기는 연구자의 가치 개입, 듣는 사람과 말하는 사람을 둘러싼 정치적상황과 상호 주관성(inter-subjectivity)에 의해 의미 있는 자료로 선택되기도 하고 그냥 버려지기도 한다. - P75

3장 여성의 눈으로 보는 ‘아내 폭력’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은 모든 여성이 피지배자로서 근본적인공통점이 있다고 보았다. 이들은 여성의 종속이 가부장제가 규정한 남녀 간의 신체적 성차에 근거하기 때문에, 억압의 원인은 여성의 출산과 성행위에 대한 남성의 통제, 곧 여성의 육체에 대한 남성의 통제에 있다고 보았다. 즉, 여성의 몸이 여성 동질성의 최소 단위가 되는 것은 신체 구조가 같기 때문이 아니라 성 차별 사회가 여성의 몸에 부여하는 사회적 평가 때문이다. 따라서 여성의 몸에 대한 - P86

통제는 계급이나 인종에 따른 여성 억압보다 더 근원적인 억압의 형식, 모든 사회적 모순들의 마지막 원인이라는 것이다. - P87

여성 폭력에 대한 급진주의 페미니즘 이론의 가장 핵심적인 통찰은 폭력과 폭력을 통한 위협, 공포는 권력 관계의 부산물이나 이차적인 것이 아니라 위계 관계의 구조적인 토대로서 남성 지배와 여성 종속의 중요한 동인(動因)이라는 것이다. 즉, 남성 폭력은 그 자체로 독립적인 권력의 한 형태이다. - P88

‘아내 폭력‘처럼 남성 중심적(가해자 중심적) 시각이 가시적이고 체계적인 영역도 없다. 사회는 남성의 폭력행동 자체에 대한 정치적인 분석과 비판보다는 남성이 폭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는 상황과이유에 초점을 둔다. 남편은 아내를 때릴 수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기 때문에 언제나 ‘아내 폭력‘ 현상은 성(차)별적으로 해석된다. 피해 여성과 가해 남성의 경험이 해석, 재현, 담론화되는 데 이미 그출발선이 다른 것이다. ‘아내 폭력‘은 현재의 가족 제도와 사회 구조를 지탱하고 있는 성별 관계에 의한 여성 문제들 간의 연관성을 이해하지 않고는 설명하기 어렵다. ‘아내 폭력‘에 대한 질문은 (안때릴 수도 있는데 왜 때리는가‘보다는, ‘아내를 때릴 수 있는 권력은 어디에서 나오는가‘로 전환되어야 한다. - P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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