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안부  

 

나는, 잘 있어요.
당신도 잘 있나요?

나는 괜찮다고 말하고 싶은 날이 있죠.
울었지만 웃고 있다 말하게 되는 날이 있죠.

고맙고도 그리워요.
이 모든 가을에 울고 있을 당신들이.

인연은 행운이 아니라 생각하고
인간은 불운의 존재라 생각해요.

나는 행운도 불운도 바라지 않지만
인간이기에 인연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인연에 손 내밀지 않던 내게 마음을 열어준 당신은 누구인가요.
당신도 가을이 많아 아팠던가요.
그래서 누군가의 가을을 기꺼이 안아줄 수 있었나요. 
 

 

 #2. 지나간 시간  

 

 <그해 가을>에 이성복 시인은 '아버지, 아버지...... 씹새끼, 너는 입이 열이라도 말 못해'라 말했던가요. 오랜만에 시집을 빌렸어요.   

 왜 하필 이 시집이었냐 하면 <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덕분이었죠. 이 책의 리뷰를 근사하게 써 볼 생각이었거든요. 하지만 이제 리뷰는 쓸 자신이 없어요. 바보같지만 써지지가 않을 듯해요. 대신에 책을 정말 열심히 읽었답니다, 하하. 강신주 교수는 첫장부터 이성복 시인을 소개하고 있는데 저는 그만 이 시집에 빠져버렸어요. 그중에 저를 가장 울게 하던 시를 적어봅니다.  

 


< 이제는 다만 때 아닌, 때 늦은 사랑에 관하여 > 

이제는 송곳보다 송곳에 찔린 허벅지에 대하여 
말라붙은 눈꺼풀과 문드러진 입술에 대하여 
정든 유곽의 맑은 아침과 식은 아랫목에 대하여 
이제는, 정든 유곽에서 빠져 나올수 없는 한 발자국을
위하여 질퍽이는 눈길과 하품하는 굴뚝과 구정물에 흐르는
종소리를 위하여 더럽혀진 처녀들과 비명에 간 사내들의
썩어가는 팔과 꾸들꾸들한 눈동자를 위하여 이제는
누이들과 처제들의 꿈꾸는, 물 같은 목소리에 취하여
버려진 조개 껍질의 보라색 무늬와 길바닥에 쓰러진
까치의 암록색 꼬리에 취하여 노래하리라 정든 유곽
어느 잔칫집 어느 상갓집에도 찾아다니며 피어나고
떨어지는 것들의 낮은 신음 소리에 맞추어 녹은 것
구부러진 것 얼어 붙은 것 갈라터진 것 나가 떨어진 것들
옆에서 한 번, 한 번만 보고 싶음과 만지고 싶음과 살 부
비고 싶음에
관하여 한 번, 한 번만 부여안고 휘이 돌고 싶음에 관하여
이제는 다만 때 아닌, 때 늦은 사랑에 관하여 

(112p 책의 본문과 똑같이 옮겼어요. 아직도 띄어쓰기를 이해 못하겠어요.) 

 

<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에는 문정희 시인도 소개되어요.  고백을 하자면  80년대 사춘기를 보낸 제가 기억하는 시인은 서정윤과 도종환이 마지막이래요.  어쩌다보니 여간해선  요즘 젊은 시인들의 시를 일절 읽지 않는 사람이 되었어요. 그런 제가 유일하게 가슴에 품은 시집이 문정희 시인의  <이 세상 모든 사랑은 무죄이다>입니다. 일년에 시집 한 권 안사는 주제에 시인을 존경한다 말한다면 염치 없음을 아는 제가 촌스럽게 들쳐보는 유일한 시집이지요. 이성복 시인의 시를 읽으면 이상하게도 잘 못 외우는 시지만 그래도 입에서 맴도는 문정희 시인의 시가 생각나요.  


< 목숨의 노래 >  

너 처음 만났을 때
사랑한다
이 말은 너무 작았다

같이 살자
이 말은 너무 흔했다

그래서 너를 두곤
목숨을 내걸었다

목숨의 처음과 끝
천국에서 지옥까지 가고 싶었다

맨발로 너와 함께 타오르고 싶었다
죽고 싶었다

 엄마의 젖가슴같은 시이죠. 매년 습관처럼 가을이 끝나고 겨울이 시작되려 할때 꼭 이 시집을 만지작 거립니다.  

 

<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에서 한용운의 시와 함께 롤랑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이 소개됩니다. 미루어 두었던 <사랑의 단상>을 다 읽고는 뒤늦게 베르테르의 자살에 깊은 애도를 했습니다. 많이도 사랑하고 싶었던 것인지 저는 그만 제가 아는 사랑을 떠들고 싶어 소설을 써야겠다 아주 무책임한 결심을 다하게 되었어요. 정말 좋더군요. 어줍짢은 제 언어로 무엇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요. 예, 저는 아무말도 할 수가 없어요. 내가 아프듯 그도 아플 것이라는. 내가 사랑이었다면 그도 사랑이었을 것이라는. 그래서 우리는 아무 말할 수 없다는.

   

 

#3. 가을을 닦다

 

저는 요즘 도올 서생의 <중용 인간의 맛>을 읽고 있어요. 아주 아껴가면서 페이지를 넘겼는데 얼마남지 않았어요. 이 책을 읽고 있으면 내가 아주 교양있는 사람처럼 느껴져요, 하하. 도닦는 기분도 들고요. 해설이 아주 재미나고 쉬우면서도 고개를 끄덕이게 되더군요. 이쪽과 저쪽의 중간이 중용인지 알았던 제 무지가 참으로 부끄러웠답니다. 마음에 드는 구절을 밑줄긋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생각같아선 두어줄 옮겨 놓고 싶지만, 그것도 저어하게 되네요. 저자의 주장과 논리가 좋다고 그것에 감동받았다고 하는 것이 제게는 어떤 트라우마가 될 듯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겠지요. 시간이 지나야 하는 것은, 시간이 지나면 되는 것이니까요.  

 

 

저는 이렇게 살고 있어요.
쓸쓸하고 가끔은 서럽지만 

아직은 괜찮습니다.
겨울은 누구에게나 오는 것인 걸요. 

이번 겨울엔 첫눈이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첫사랑이 그리울 것 같아서요, 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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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11-11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붉게 물들었네요. 잘 지내시죠?
안부를 듣고서 안부를 묻는, 아이러니한 상황 :)

한사람 2011-11-12 08:44   좋아요 0 | URL

예, 단풍이 질 때 까지만요^^
수다쟁이님도 좋은 가을,기쁜 주말 이여~

아이리시스 2011-11-12 0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집을 사지 않는 이유는 표면적으로는 읽어낼 자신이 없어서이고 내면적으로는 시집은 시가 어려운 줄 모를 때 막 살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저한테 읽히면 그건 시가 아닐 것 같거든요. 저한테는 그게 벽이고 그 벽은 한때 글을 쓰고 싶던 사람으로서 허물지 않아도 좋을 것 같아요. 좋으면 더 좋아하는 티를 못 내겠는 그런 마음. 언어가 말해줄 수 있는 건 없어요. [사랑의 단상]을 읽을 때 베르테르보다 사랑보다 먼저 느껴진 건 그거였어요, 한사람님.

예, 저는 아무말도 할 수가 없어요.

이미 다 알고 계실테니까요.^^

한사람 2011-11-12 08:47   좋아요 0 | URL

일년에 두어권 시집을 읽는 것 같구요.
그러다 우연히 가슴을 때리는 시를 만나는 것 같아요.
그럴때 무심했던 마음이 부끄럽지요.

<사랑의 단상>은 짜릿했어요.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다 느낄지라도 그런 글은 본적이 없었어요 ㅋ

아무 말 할수 없다는 말이라도 들어서 좋은걸요^^

이진 2011-11-12 0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정희 시인의 시, 너무 좋습니다.. 원래 시는 좋아하지 않았는데 요즘 감성적인 알라디너분들 덕분에 시에대해 관심이 팍팍 생기는것 같은걸요? [이제는-]이라는 시는... 아무리 읽어도 이해가 안되는군요. 해설집이 따로 없나요 ㅎㅎ

한사람 2011-11-12 08:50   좋아요 0 | URL

하하, 저도 다는 이해 못했어요.
다만 볼드로 눌러쓴 부분은 무슨말인지 어떤 기분인지 알것 같아서요 ㅠ
강신주 교수가 '정든 유곽'에 대해 친절히 설명해주시네요. 시집 뒷부분에도 해설이 있구요..

한 편의 시와 거기에 사용된 단어들은 시인의 삶을 알지 못하고선
이해는 불가능하다고 봐요. 그래서 전 늘 오독하는 독자랍니다^^

2011-11-12 11: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1-12 16: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1-13 12: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1-13 20: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연 2011-11-13 2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사하게 쓸 예정이었던 리뷰... 아쉽네요ㅠ 저는 요즘 잘 못지내고 있지만.. ㅎㅎ 저는 이번 겨울이 왠지 옆구리가 시릴 것 같아서 싫구먼요, 풋

한사람 2011-11-13 20:59   좋아요 0 | URL

어떤 일을 중단하게 되었을때 그 일에 쏟아지던 에너지는 반드시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고 봐요 ㅋ
이제 숙제같았던 리뷰쓰기(?)에서 벗어나 다른 글을 쓸수있는 기회가 생겼다고
생각하려구요

내일부터 추워질거라네요. 월요일부터 추워지는거 정말 싫습니다.
마음을 먹어야 하는 아침이 싫어요 ㅋ

2011-11-17 18: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1-17 19: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활동마감] 9기 신간평가단 마지막 도서를 발송했습니다.

 


1. 신간평가단 활동 시 가장 기억에 남았던 책과 그 이유


<인지자본주의, 조정환>

모두 이해하지 못했지만 가장 열심히 읽었던 기억이 난다. 학교 때 생각도 나고 리포트 내는 심정으로 리뷰를 작성했다. 처음엔 이렇게 어려운 책을 추천한 평가단 분들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나중에 책 덮고 나니 많은 도움이 되었다. 평가단이 아니었으면 이 책을 만날 기회도 없었을 것이고 읽었다고 리뷰까지 쓰지도 못했을 터이다. 불운이 행운으로 바뀐 우연적 필연이었다.


 
<강남좌파, 강준만>

평가단 책으로 리뷰쓴 것 중에 가장 많은 추천을 받았고 내용상 비판을 많이 했던 것 같아 미안한 책 중 하나이다. 강남과 좌파에 대해 논리를 연결해보는 것은 개인적으로도 시의 적절한 경험이었다. 이 책을 집어든 사람들 중에 적어도 강남좌파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을 듯 하다. 
 



<이것이 문화비평이다 , 이택광>

많은 기대를 했기 때문에 약간의 실망은 있었지만 나는 이 책을 시작으로 <문화로 먹고살기>, <아이콘>, <닥치고 정치>, <직설>같은 책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런 식의 비평집을 시작으로 사회 및 문화, 정치 비평 서적에 눈을 뜨게 되었다고 할까. 한수 배운 게 있다면 동전 뒤집기와 뫼비우스 띠처럼 생각하기가 될 것 같다.





2. 신간평가단 도서 중 내맘 대로 좋은 책 베스트 5


   기억에 남는 책과 좋은 책의 경계가 참 애매하다. 좋았기 때문에 기억에 남는 책도 있었기 때문에. 이 항목 때문에 위의 기억에 남는 책은 (크게 좋지는 않은 채로)기억에만 남는 책이 되어 버린 듯하다. 이건 기억에 남는 작품과 좋은 작가를 분류해 질문하는 방식을 떠올리게 한다. 이런 식의 분류로 인해 ‘좋은’의 사회적 해석이 마치 작품성이나 수준이 높은 책을 뜻하는 방향으로 합의를 본 듯하다. 김어준 식으로 답하면 이 질문은 후진 질문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질문을 위한 질문, 어떤 통계적 평가를 위한 질문. 그러나 나는 질문을 하는 위치가 아닌 답을 하는 입장이므로 좋다는 기준을 나름대로 정리해 보는 수밖에 없다. 어떤 사람이 일단 좋았는데 그 직관을 논리로 정리하는 심정이다. 그래서 사실 이 작업이 썩 마음 편하지만은 않았다.


   ‘좋은’ 책의 기준을 크게 도움의 정도와 재미의 정도로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나 자신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가. 그러면서도 얼마나 흥미로왔는가. 확실히 인문서적은 몰랐던 것들을 양파껍질이 벗겨지듯 천천히 알아가는 재미는 쏠쏠한 듯 하다.

 

1. 사르트르와 까뮈 '우정과 투쟁 - 로널드 애런슨

두 사람의 우정과 투쟁을 지켜보는 시간이 흥미진진했다. 지식인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많이도 유익했다. 아주 오랜만에 <이방인>을 다시 찾아 읽어보기도 했다. 그렇게 슬플 수가 없었다. 뒤에 실린 사르트르의 칼같은 해설도 나는 참 아프게 느껴졌다. 아직도 뇌리에 각인된 두 사람의 모습이 선명하다.


2. 언어의 감옥에서 - 서경식

어느 재일 지식인의 논리가 아름답다 못해 슬프기까지 했다. 나는 이 책을 읽고 처음으로 논리의 아름다움이 눈물을 자아낼 수 있다는 걸 느꼈다. 리뷰쓸 때 살짝 설레기 까지 했고 다 쓰고 나서 무언가 내 논리의 틀을 깨부순 느낌도 들었다.



3. 아렌트 읽기 -  엘리자베스 영-브루엘


말로만 듣던 아렌트에 대해 짧은 시간 집중적으로 요약해서 공부한 느낌이 들었다. 아렌트의 제자인 저자는 이 책이 단순한 평전이 아닌 독창적인 문학의 수준으로 느껴질 정도로 의미있는 사유를 보여주었다. 덕분에 다른 아렌트 서적을 선물받기도 했다.


4. 국가란 무엇인가 - 유시민


유시민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그는 말빨뿐 아니라 글빨도 수준급이었다. 학문적으로 의미있는 서적이었다. 국가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답하는 글이 아니고 스스로 배워왔고 알아왔던 국가를 유시민식으로 정리했다는 의미가 호감으로 다가왔다.


5. 직설 - 한홍구, 서해성


MB정권이 저지른 만행을 집약해서 정리한 느낌을 받았다. 우리 사회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것들과 투쟁하며 내일을 기다리는 분들이 많았다는 확인도 하게 되었다. 또 서해성이라는 구라문학의 선두주자도 알게 되어 그의 뼛속 구라로 두어번 감동 먹었다는 기억도 잊혀지지 않을 듯하다.





덧붙임 ) 

3. 신간평가단 도서 중 내 맘 대로 나쁜 책


<불안의 시대, 기디언 래치먼>


제목의 아우라에 제대로 낚인 책이다. 미국의 흑심과 서구의 시각을 정리한 책이라는 의미성만 빼면 불쾌하기까지 한 책. 나는 이 책을 추천한 과오로 인해 다음부턴 될 수 있으면 서점가서 책을 확인하게 되었다.



<나는 무엇을 보았는가, 버트런드 러셀>


저자의 콜렉션이라는 취지를 제대로 살리지 못한 책이다. 편집의 악덕만 발현한 책. 러셀 모르는 독자가 보기엔 러셀의 수준을 하향조정하게 될 위험이 있다고 본다. 이 책을 계기로 모음집의 유혹에서 좀 벗어나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할까. 
 




   그동안 평가단을 하면서 힘들었다고 느낀 건 거의 약으로 돌아오는 결과를 얻었다. 인문은 이번이 처음이었기에 사실 다른 분들의 리뷰를 읽을 여유가 없었다. 나는 콕 집어서 맘에 드는 한사람의 글만 읽는 습관이 있다. (다른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ㅋ) 이걸 그다지 고쳐야 할 필요성을 못 느끼는데 그렇다면 이번 평가단 할 때도 부디 내 맘에 드는 분이(?) 나타나주길 기대하는 쪽으로 물타기를 하게 된다. 나도 이웃 분들의 리뷰를 애써 찾아 읽어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 남의 글을 진심으로 꼼꼼히 읽어본다는 것이 얼마나 큰 수고인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길고도 지루한 내 리뷰를 읽어주신 모든 분께 고마움을 전한다.


어려운 책의 리뷰를 쉽고 이해하기 편하게 작성하는 건 어려운 말로 빈칸을 채우기 보다 사실 어렵다. 엊그제인가 강심장에서 조혜련이 뜻밖에도 <의식혁명>이라는 책을 읽고 나름대로 느낀 것을 강의하는 장면을 보았다. 인문 MD왈, 그 프로 덕에 책 주문이 늘었다고 하더라. (나도 평가단 책으로 추천은 했는데 다른 분들이 관심이 없는 통에 선택될 확률은 없다 ㅠ) 조혜련은 그 책을 가지고 쉽고 재미나게 사람이 더 행복해지는 법을 강의했는데 정말 머리에 쏙쏙 들어오는 수준이었고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한비야와의 개인적 만남과 책과의 연계성, 개인적인 의견까지 아주 좋았다.)

내가 바라는 게 있다면 내 리뷰를 읽어 본 사람은 그 책을 읽어본 것과 같은 느낌을 가지게 되거나 혹은 내 리뷰를 읽었기에 더 그 책이 궁금해지는 효과를 얻었으면 한다. ‘좋은 서평이 좋은 책을 살린다’는 말이 꼭 안 좋은 책도 좋게 말하라는 뜻은 아닐 게다. 나는 아직 좋은 리뷰는 어떤 리뷰인지 잘 모르겠는데 분명한 건 그 책을 읽고 느낀 것들을 진심을 다해 적는 것이 역시 진심을 전달하기 쉽다는 쪽에 고개를 끄덕인다. 한가지 아쉬운 건 평가단 활동을 하면서 많은 추천을 받아보았지만 쌩쓰투는 거의 평가단 책이 아닌 책이었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제공받은 도서에 대한 평가이니 객관성 면에서 그다지 호응도가 높은 건 아닌 듯하다. 더욱더 평가단 책은 리뷰로만 이해하려는 분들이 많은 것 같아 리뷰를 대충쓰기 힘든 이유이기도 하다.


   책을 많이 읽고 또 책 읽었다는 글을 많이 쓸수록 책에 대해 할 말이 많아진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책에 대해 또 맘껏 떠들 수 있는 기회가 생겨 참 행복하다. 9기 활동은 그렇게 많은 행복을 주며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허망하게 사라진 것만은 아니라는 뜻으로 이 페이퍼를 남겨본다. 
 

   

 

  정직한 인문정신이 건네는 불편한 목소리를 견디어 낼수록,
우리는 자신의 삶에 직면할수 있고, 나아가 소망스러운 삶에 대한 꿈도 키울수 있다.

- 강신주 <철학이 필요한 시간>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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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잘라 2011-10-20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서점에서 아리따운 아가씨가 카운터에서 '의식 혁명' 있냐고 물어봤어요. 직원이 '의식 혁명'을 보여주면서 "이 책인데 이건 다른 분이 주문해놓으신 거라서 손님께 드릴 수는 없어요." 그랬더니 그 아리따운 분이 "아 그래요? 그럼 지금 주문 하면 언제 와요?" 하더라구요. 그리고 조금 있다가 이번에는 잘생긴 총각이 와서는 "주문한 책 왔다고 해서 왔는데요." 하니까 직원이 '의식 혁명'을 꺼내서 주는 거예요. 여기서 또 이렇게 보게 되니 '우연이 세 번, 필연이다' 생각하면서 담아갑니다. 『언어의 감옥에서』는 제목 때문에 제꼈던 책인데('감옥'이란 말이 너무 두려워요.) '논리의 아름다움이 눈물을 자아낼 수 있다는 걸 느꼈다'는 말에 솔깃해서 같이 담아갑니다.

아이리시스 2011-10-20 14:37   좋아요 0 | URL
그래서 아리따운 아가씨하고 잘생긴 총각하고 뭐 없대요? 포핀스님. 히히히히히히. 그런데 서점에 왜 책이 주문해야 오는 거예요? 딱딱 제때 안 갖다놓고,,

한사람 2011-10-20 16:46   좋아요 0 | URL

하하, 그런 날이 있죠. 그런 책도 있구요.
저는 읽어볼까 하는 책이 주로 그렇던데 ㅋ
<언어의 감옥에서>는 세심한 논리전개가 압권인데 저는 평가단 책으로 맨처음 그 책을 읽었어요.
그래서 기억에 남고 공감도 많이하고 그랬어요.
감옥의 의미를 더 절실히 느끼게 되었구요.

어제 하루만 <의식혁명>이 <닥치고 정치>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고 하던데
조혜련효과가 크긴 컸나봐요^^

고마워요, 메리포핀스님!

아이리시스 2011-10-20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지자본주의, 게다가 저렇게 두꺼웠어요?ㅜㅜ 대여수준이네요. 집에 있으면 질식할 것 같아요, 푸하하. <의식혁명>은 제목도 고루한데 내용도 고루할라나 했는데 행복이라니, 조혜련이라니, 저도 아리따운 아가씨가 되어 '의식 혁명' 있냐고 물어봐야겠어요!

한사람 2011-10-20 16:49   좋아요 0 | URL

그렇죠..확실히 두껍죠? 저 책 받았을때 암담하던 심정이...벌써 옛날이 되었어요
<의식혁명>의 소개를 보니 사람의 의식수준을 점수화한 게 흥미롭던데
한비야님이 500이고 우리의 목표가 350이고
보통 사람은 200이라는데 웃기면서도 솔깃해요.
그 책도 책이지만 조혜련을 다시 봤습니다 ~

가연 2011-10-24 2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마지막 사진이 찡하네요ㅎ 저도 이 페이퍼를 보고 저거 따라해볼까, 하는 생각을 하였었지만 의욕부족으로...ㅠㅠㅠ 내 맘대로 나쁜 책은 저랑 똑같네요. 주로 한사람님의 리뷰를 스마트폰으로 보는데 집중이 더 잘되고 좋더군요ㅎㅎㅎ 10기에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ㅎㅎㅎ

한사람 2011-10-25 08:45   좋아요 0 | URL

서재 책꽂이 한칸에 모아놓았죠. 소설은 가져가는 지인들이 있었는데
인문은 싫어하시더라구요, 하하

리뷰 스마트 폰으로 보시는데 감동했어요
긴 리뷰는 힘들던데요 ㅠ
집중은 잘 되지만 더 길어 보이잖아요 ~

여튼, 가연님이 10기도 하신다고 해서 마치 같은 반이었던 친구와 또
만나는 기분이 들었어요.

보물선 2011-11-17 1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한나 아렌트가 같이 있네~
완전 폼난다!! ㅎㅎ
 
[직설]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직설 - 한국 사회의 위선을 향해 씹고, 뱉고, 쏘다!
한홍구.서해성.고경태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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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직설 '편'한 침묵


   나는 말로써 직설(直說)을 선호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직설은 문자 그대로 바른대로 있는 그대로 하는 말이다. 하지만 주체의 의도대로 바르게 전달되기가 힘든 것도 직설이다. 직설은 컨텐츠의 스탠스에 따라 양질의 충고 혹은 경고일 수도 유익한 비판이나 비탄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당하는 입장에선 대개 모질고 상처를 주는 독설이 될 경우가 많다. 세간에 성행하는 오디션 프로의 심사위원을 보더라도 돌려서 말하지 않고 대놓고 단점을 지적하는 경우 그들을 독설의 대가라고 칭하기도 한다. 상대를 향해 똑바로 날아오는 칼은 명중률이 높고 의도와는 별도로 상채기를 남기기 때문이다. 상처받은 입장에선 예고도 없이 공격에 노출된 상황에서 직설을 날린 주체에 동의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한 화법이 단점을 고치고 더 발전해야 하는 경우라면 고맙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그래도 상처 자체는 피할 수 없다. 그러므로 직설은 사후관리가 더 큰 몫을 차지한다. 말 못지 않게 글도 뼈아픈 상처가 될 때가 있는데 차라리 말은 얼굴 보며 털어버릴 기회라도 있지만 글로 새긴 상처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깊숙한 곳에 저장되기만 한다.

   언젠가부터 나는 말보다 글이 더 편해졌다. 누군가와 싸울 때도 나는 글 쓰듯이 똑같이 말을 하는 편이라고 하는데 이 습관이 언제 어디서부터 생겼는지 모르지만 여간해선 잘 고쳐지질 않는다. 같은 에너지라면 말보다 글로 의사를 전달하는 것이 더 논리적이고 분명하다고 느낀다. 그런데 보시다시피 문장 자체도 단문을 선호하지 않고 일관된 만연체 스타일에 되도록 종합적인 결론을 지향하는 성향이므로 이 또한 직설적인 과에 속하진 않는 것 같다. 그래서 난 돌려 말하지 않고 바로 본론부터 시작하는 직설의 능력자들이 많이도 부러웠다. 길게 늘여서 말하라는 건 하겠는데 요약해서 핵심만 말하라 하면 멈칫거리게 된다. 그래서 난 언제나 소설쓰는 작가보다 시쓰는 시인이 부럽고 대단하다 여겨왔다.

   직설을 우리말로 바꾸면 아마도 바른 말을 하는데 거침이 없다는 뜻의 ‘입바르다’ 정도가 되지 않을까. 나는 입바른 소리도 에둘러 말하는 편에 속하는데 경험상 입바른 소리야 말로 직설로 접근해야 효과적이었다고 본다. 콕 집어 예를 들지 않으면 입바른 소리의 대상이 광범위해지기 때문에 엉뚱한 오해를 살 확률이 발생한다. 여기서 일부러 특정 사건과 인물을 지칭하지 않으려 두루뭉실하게 넘어가려는 건 전형적인 정치적 행보이다. 정치라는 것이 꼭 정치인이 행해야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고 우리같은 일반 대중도 얼마든지 이곳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자기 이미지를 자기 뜻대로 다스려 운영하고들 있지 않은가. 언젠가부터 나는 입바른 소리에 해당하는 직설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는데 아마도 입바른 소리를 시도하는 귀찮음이 간혹 야기되는 오해를 설명하는 귀찮음과 동일시 되면서 자연 편하고 눈질끈 감는 쪽을 선호하게 되지 않았나 싶다. 나이 들어 깨닫게 되는 건 바로 입바른 소리는 그 의도만큼 썩 만족할만한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좋은 게 좋은 거다 식의 진부한 위선도 지향하고 싶은 마음이 없기는 마찬가지인데 위선과 직설 사이에서 방황하게 될 경우 대개 사람들은 그 사안에 대해 침묵을 택한다는 것이다.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고 무관심이듯 직설의 반대는 돌려막는 곡설이 아니라 침묵인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 책은 민감한 사안에 대해 침묵으로 자주 대항하는 나같은 대중들이 읽어야 할 책인 듯하다. 침묵을 미덕으로 활용하는 위선자들에게 훌륭한 자극제가 될 듯하다. 책의 부제도 ‘한국사회 위선을 향해 씹고, 뱉고, 쏘다’라 되어 있듯이 그동안 위선을 용인해오고 또 스스로 위선을 경쟁력으로 삼아온 사람들이 해가 넘어가기 전에 꼭 들쳐보아야 할 책이라 할 수도 있겠다. 최근에 이런 식의 직설화법은 ‘나꼼수’의 등장과 더불어 새로운 트렌드로까지 읽혀지고 있다. 이른바 개념구라, 구라작가, 구라MC의 테두리에 이 책의 문법도 어엿하게 한자리를 차지한 것으로 여겨진다. 최근 인터뷰에서 서해성 작가는 ‘직설이 문자로 나눈 꼼수였다면, 꼼수는 말로 하는 직설’이라 한 바 있다. 방법이 틀릴 뿐 이들이 말하는 방향은 한 곳이다. 나꼼수가 가카 헌정방송이라면 직설은 MB시대 헌정문학. 다른 게 있다면 나꼼수는 팩트를 모아 추정소설을 말로 연재하는 것이고 직설은 사람을 만나 그 사람 전공 분야를 가지고 MB를 향해 눈치 안보고 떠들어보는 기회를 마련한 것이다. 멍석 깔아주면 발목이 오그라 들 것이므로 한홍구와 서해성이 적당한 추임새로 용기를 부추기는 형국인 것이다. 무려 이 책에서 만나본 사람은 故 리영희 선생을 비롯해 사십 여명이 되는데 실컷 떠들었던 말들을 글로는 다 옮겨 적지 못한 점을 감안하면 그들이 성토한 직설들은 대단한 논픽션 소재로 흠잡을 데가 없다고 본다. 어딜 봐도 도통 불편했던 건 아무래도 MB 정권이라는 지극히 우울한 소재를 미션으로 하기 때문은 아니었을지.


‘놈현’과 ‘노무현’의 차이


   이 책은 무엇보다 생각처럼 쉽지도 편하지도 않은 책이다. 혹자들은 직설(直說)이라 하니 속이 시원하거나 그런대로 할 말은 했겠지 싶을 수도 있을 것이다. 모르긴 해도 이 책에 호기심을 가지는 독자들은 김어준에 준하는 직설화법을 기대하며 정곡을 찌르는 정치비평을 기대했으리라 생각한다. 이른바 MB 시대의 직설이라 함은 다른 누가 아닌 MB 들으라고 하는 소리인데 돌려서 말할 거면 차라리 말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여기는 실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은 그 목적만큼 고속도로의 직선도로를 달리진 않으며 결론만 강조하는 단순한 문법을 취하진 않았다. A를 말하는데 있어 B,C,D를 찬찬히 둘러보며 A이전과 A이후를 다각도로 살펴보는 쪽이므로 대화전개 방식 역시 직렬보단 병렬이 더 가깝다. 인터뷰가 오가는 방식에서도 얼굴보고 직접 만나서 서로 증상을 진단하며 환부를 확인하다보니 다른 설명없이도 이 통한스런 현실을 더 강렬하게 공감하는 결과를 야기하며 직설보다 직감(直感)적이라 할 수 있다. ‘직설’에선 어쩐지 자극적이고 말초적인 뉘앙스를 부인할 수 없는데 이 책은 문법적으로도 비교나 은유의 탁월한 수사가 매력적인 색다른 비평집이다. 그러니 직구보단 변화구, 직접보단 간접, 직선보단 곡선, 직행보단 완행으로 이루어진 느낌이라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직설>은 직설적이긴 하나 결코 직설만은 아니다. 직설을 표방한 곡진한 해설이라 해야 맞다.

   책을 덮으면서 나는 이 책이 결국 누구를 향한 무엇을 향한 직설이었는지를 생각했다. 과연 삿대질하는 방향에 위치한 그들만을 향한 쓴소리인지 고민해 보았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이 책의 저자 중 한 사람인 서해성 작가는 2010년 6월 11일 『한겨례』에 게재된 「<한홍구-서해성의 직설> DJ 유훈정치와 ‘놈현’ 관 장사를 넘어라」기사에서 바로 ‘놈현’과 ‘관 장사’라는 표현의 강렬한 직설을 사용한 주인공이다. 노무현을 ‘놈현’이라 말하고 유산계승을 ‘관 장사’로 빗댄 그 기사 때문에 유시민은 23년간 구독해온 한겨례를 절독하겠다고 선언했고 한겨례는 며칠 뒤 신문 1면 아래 편집국장 명의로 절절한 사과문을 싣기도 했다. 당시 ‘관장사’ 직설은 시작한지 몇 회 되지 않는 초반 개념 정립단계였다. 시청률로선 대박을 쳤지만 솔직한 토론이라는 최초 신선한 목적은 노 전 대통령을 비하하는 표현이라는 국민적 비난을 넘지 못했다. 한겨례측은 신문에서 정리하고 편집할 때 노골적 표현을 거르지 못하고 독자들에게 불쾌감을 전달한 것을 자신들의 불찰로 인정했다.(하지만 서해성 작가도 그렇게 생각할까?) 유시민은 이 사과를 보고 트위터를 통해 절교선언을 취소하는 해프닝도 보여주었다. 확인해보니 이 책에선 당시 천정배 의원과의 인터뷰를 실으며 ‘놈현’이 표시된 문장을 ‘노무현’으로 정정해 옮겨 놓았다. 물론 나는 그 사실을 크게 인지하고 그 문장을 접한 것은 아니었지만 문맥상에서 ‘노무현’이 ‘놈현’으로 표시되어 있었어도 ‘놈현’을 ‘노무현’의 구어체식 단순 줄임말 정도로 밖에 인식하지 않았을 것이다.(물론 난 노빠가 아니기 때문에 ‘노무현’과 ‘놈현’의 차이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구어체를 발음 그대로 실어야 직설이 된다는 원칙에 동감하는 수준이었을 터이다.


   
 
서해성 | 선거 기간 중 국참당 포함한 친노 인사들이 써 붙인 “노무현처럼 일하겠습니다”라는 플래카드를 보면서 쓴웃음이 나왔어요. 이명박이 가진 폭압성을 폭로하는데 ‘노무현’(기사에선 ‘놈현’)이 유효하겠지만, 이제 관 장사는 그만둬야 해요. 참여당 실패는 관 장사밖에 안 했기 때문이에요. 그걸 뛰어넘는 비전과 힘을 보여주지 못한 거예요.
-396p
 
   


   앞뒤 문맥상 여기서 중요한건 ‘놈현’이 아니고 ‘관 장사’하지 말라는 메시지인데 유시민은 틀림없이 ‘놈현’ 부분에서 목에 걸려 울컥한 것이렸다. ‘관 장사’만으로도 썩 기분 좋을 단어 선택은 아니었겠지만 이때 ‘놈현’이라는 구어체는 ‘관 장사’라는 풍유법을 더 굴욕적으로 몰고 가는 폭풍의 혀로 작용했다. 이렇듯 구어체로 표현된 직설의 한계는 어쩔수 없이 ‘노무현’과 ‘놈현’의 차이에서 싹트는 불쾌감을 내포하기 마련이다. 자칫 애티튜드만으로 메시지를 넘어설 수 있다는 근본적 한계를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논리로는 맞지만 기분은 드럽다는 것이 직설의 핸디캡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애티튜드 또한 메시지의 일환이라 줄기차게 주장하는 김어준이 반사적으로 겹쳐질 수밖에 없었다. 김어준은 구걸하지도 않고 덕 볼 생각도 안 할 테니 변함없이 쫄지 말고 기죽지 말자는 충고를 한다. 무례함이나 상식, 보편적 정서 따위로 직설화법에 브레이크를 걸고 싶다면 내 이야길 듣지 말라고 일갈한다. 그리곤 말한다. 그쪽은 훨씬 가진 것도 많고 떠들 곳도 많으니 이 조그만 곳과 그곳에서 오가는 말장난을 막지만 말아달라고. 떠들고 킬킬거리는 그곳에선 사실 <직설>에서의 지적질의 몇 배에 해당하는 욕설이 오가지만 매체의 특성상 아무도(한사람만 제외하고 ㅋ) 방식을 문제 삼진 않는다. 그런데 김어준도 같은 내용을 책이라는 매체로 전환할 땐 확실히 문어체의 화법을 지향하며 꽤 지적인 수사를 연출했다. 이 책이 안타까웠던 건 바로 인터뷰로서는 아무 문제가 없는 형식의 매력이 지면으로 똑같이 옮겨졌을 때 그 열의가 반감되는 듯한 차감효과였다. 다른 무엇의 점잖은 대담이 아니라 직설로 오가던 불꽃같은 애드리브와 통쾌한 구라문학의 포스가 종이로 박제되면서 직설의 본성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 각계 분투의 직설을 모두 모아 놓았더니 그만 핵심역량(?)이 떨어져 보인다는 느낌. 그래서 직통으로 환부를 관통했다는 짜릿함은 느낄 수 없다는 아쉬움. ‘놈현’과 ‘노무현’이 글자로 등장한다면 말로 했을 땐 있지도 않거나 중요치 않았던 새로운 역학이 증거로 발생한다는 왜곡의 염려. 그것이었다.


'펜대' 꼬나 잡고 '주둥이' 제대로


   하지만 이 책이 가지는 본질적인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말이 아니기 때문에 MB 시대의 당당한 구라문학으로 흔치 않는 의미성을 획득하였다. 그 일등공신은 아이러니하게도 ‘놈현 관 장사 사태’를 ‘한겨례 사과사건’으로 몰고 간 서해성이었다. 이 책을 통해 가장 눈에 띄던 주연아닌 주연. 질문으로 답하는 의도적 인터뷰어. 서해성과 한홍구는 약 사십 여명의 게스트에게 민감한 질문을 던지며 게스트의 답과는 별도로 스스로도 해답을 찾아 현상과 사건을 정리하는 지적인 사회자들이었다. 이 책의 핵심은 바로 게스트의 답변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힌트와 참조할 자료들을 기자식으로 시시각각 제공해주던 그들의 해박한 지식과 놀라운 통찰력이었다.(이 책을 덮고 서해성 작가의 다른 작품을 찾아 보았지만 그 흔한 소설집 하나 없다는 것이 참으로 아쉬웠다 ㅠ)  한명의 인터뷰가 끝나면 ‘잔설’이라는 해설과 논평이 이어지는 것이 이 책의 특징인데 나는 서해성의 ‘20년 만에 쓰는 부검입회보고서’를 읽고는 그만 다리가 풀려 버렸다. 서해성은 광주를 생각하면 아직도 ‘총을 든 사람들에게 미안하고 부끄러운 마음’이라 말한다. 그렇다고 지금 총을 들 순 없으니 ‘펜대 꼬나 잡고 주둥이 제대로 놀리는 것으로’ 내 할 일을 시작하자 다짐한다. 적어도 그때 총든 분들의 마음은 간직하자 호소한다. 감히 비슷한 심정이라 입에 올리기 조차 미안하지만 같은 시절 데모하다 경찰의 방망이에 맞아 죽은 나와 꼭 같은 나이의 꽃다운 청춘을 떠올리는 기분이었다고 고백 할까. 기껏해야 시국을 비판하고 MB 정권에 삿대질 하는 책이나 읽어야 그들을 향한 부채감을 간신히 기억해내는 기성세대가 되어 버린 지금 서해성이 적나라하게 칼질하는 그들 죽음의 부검 현장은 우리가 이 시대에 살아남은 이유가 무엇인지 한번쯤 자문하게 만들었다. 왜 그들은 죽었고 우리는 살았는지. 만약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지.  

   그래서인지 전쟁 때 또래들 절반이 사라진 통에 ‘자신의 실재는 다른 사람들의 부재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는 고은 시인의 넋두리가 가장 울림이 컸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고은 시인은 누적된 역사 속에서 시대가 자신에게 요구하는 건 바로 요절한 시인들의 결핍을 메우라는 명령이라 말했다. 사람은 누구나 살아가는 이유가 있다고 하는데 지금 우리 사회의 고등학생은 입시 때문에 죽고 대학생은 등록금 때문에 죽고 노동자는 해고당했다며 죽어버리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쌍용자동차 파업 후 2년 동안 열 일곱 명이나 되는 사람이 자살을 하였다고 하는데 나는 이러한 사회적 비극을 기껏해야 ‘나꼼수’를 통해서야 뒤늦게 알게 된 무심한 사람이었다. 이 책에는 인터뷰를 통해 홍대 청소노동자와 이주노동자의 직설도 확인할 수 있다. 지난 여름 강남 물난리때 침수된 대치동 은마아파트 지하실에서 감전사한 어느 아주머니가 떠올랐고 최근에 아주머니 유족에게 보상금을 지급할수 없다는 주민들의 기사도 겹쳐졌다. 우리는 과연 학원비 빠듯하다 앓는 소리 하는 같은 아파트 주민을 비난할 수 있을까. 그럴 자격이 있을까. 양길승 녹색병원 원장은 ‘비장애인은 장애인과 살아보지 못한 장애를 가진 사람’이라 말한다. 장애인과 같이 살아보지 못한 사람은 남을 배려하지 못하는 장애가 있다고 말한다. 뜨끔했다. 이명박을 분단 모순의 집적, 냉전의 찌꺼기로 규정한 백기완 선생은 죽어서도 억울하면 벌떡 일어날 수 있는 마지막 남은 저항심을 ‘안간’이라 말한다고 가르쳐 주셨다. 이 책에선 유난히도 어느 유명한 정치인이나 유명인보다 이렇게 그 질긴 세월을 모질게 겪고 나이 들어 이렇게 꾸지람 하는 것도 자신이 마지막이라는 분들의 말씀이 기억난다.

   정치인들은 의외로 돌려 말하거나 묻는 것만 말하거나 민감한 사안은 회피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성공한 대통령에 대한 집착을 버렸으면 좋겠다는 정두언 의원이나 역사는 회의론자가 아닌 확신범이 바꾸는 것이라는 정동영 의원, 아침마다 김대중 대통령을 떠올리며 그분이 남겨주신 ‘국민 생각이 뭔지 알아봐라. 원칙 버리지 마라. 역사가 어떻게 평가할지 생각해라’ 이 세 가지를 생각한다는 박지원 의원 정도가 인상깊었다. FTA를 통상의 문제뿐 아니라 외교 전략의 문제이자 민주주의문제, 공공성의 문제로 같이 인식해야 한다는 이해영 교수의 견해도 좋은 말씀이었다. 각자 다양한 분야에서 자신이 걸어온 세월을 평가하고 현재 고난의 시점에서 문제점을 직시하며 모두가 함께 잘되는 앞으로의 미래를 전망해보는 것은 저들만의 일은 아닐 것이다. 별 탈 없이 만인이 자연사하는 사회가 민주사회라는 서해성 작가의 자조적 독백은 다시금 우리가 같은 시대, 같은 나라를 살고 있는 같은 인간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우리도 인간인 이상 크게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는 자각을 하게 한다. 그렇다면  남아있는 생동안 다른 사람의 죽음에 공감하지 못하는 장애를 가진 채 삶을 이어나가서는 안될 것이라는 뒤늦은 깨달음도 얻게 된다. 억울하고 원통하게 죽어간 우리 시대 모든 죽어진 삶에 우리는 어떤 빚을 갚아야 할까. 그들의 결핍을 메우는 것이 남은 사람들의 할 일이라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시골의사 박경철이나 안철수 원장, 박원순 후보, 오세훈 친족이라는 나경원 후보까지도 하나같이 주장하는 것은 사회적 약자, 그 소외된 약자를 위한 최소한의 생존권을 언급한다. 중국집 배달부 아저씨도 그 궁색한 살림에 죽는 날까지 기부를 하다가 가셨다. 나는 다시한번 이 책은 누구를 향한 무엇을 위한 직설이었는지 생각한다. 삿대질 하는 방향의 손가락을 제외한 나머지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 그곳이 어디였는지 가만히 응시해 본다.

   새삼 한국에서 가장 소중한 것들은 다 한 글자라는 서해성의 유머가 따스하다.


   밥, 몸, 일, 집,


   그리고 .


   무엇보다 .


   그러나 우리 사회 밑바닥에서 부터의 안간힘을 다해 다시 희망을 찾고 싶은 우리 모두의 .


   그  으로 빚어질 공동체의 .


   그 으로 탄생할 새로운 .


   <직설>은 아주 작은 단위의 빛으로 조각조각 쪼개어진 우리 모두의 간절한 '끈' 이라면 좋겠다. 무엇보다 정치적 결단이 요구되는 이 중요한 시점에 그 끈 하나로 이어져 마음이 하나되는 기특한 '책' 이었음 좋겠다.

   부디 당신의 펜대와 주둥이를 믿는다. 당신도 나처럼 이면 정말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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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1-10-20 0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요즘 이 책을 붙잡고 있는데, 이상하게 진도가 잘 안나가요. 어쩌면 그런 것이 내용보다도, 이야기를 하는 방식에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을 이 리뷰를 읽으면서 해봅니다. '나꼼수' 이야기를 하셨는데, 그 나꼼수 방송을 사실 제가 잘 못듣겠더라구요..(사실 한 번 시도해보았는데, 방송을 30분 듣다가 왠지 더 듣기가 싫어져서 그만두었습니다..가카님의 멋진 재테크, 인테크 기술들을 좀 더 배워야 하는데..하하;)

보물선 2011-11-09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에서 중요한 건 한글자라는. 콕 박힌다.

가연 2011-10-24 2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부검입회보고서를 보고 참 마음이... 그나저나 서해성 작가가 소설가로서 별다른 책이 없다는 것을 보고 사실 좀 놀라고 말았지요ㅎ 그런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누구였는지 정확히 기억은 안나지만 단 한 권의 책으로 여러 상들을 휩쓸고 난 후에 절필하고 사회운동에 뛰어든 소설가..같은 느낌을 주었달까ㅎㅎ 좀 과장된 점이 없지는 않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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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인만 Feynman
짐 오타비아니 지음, 이상국 옮김, 릴런드 마이릭 그림 / 서해문집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유명한 사람이 죽으면 왜 슬플까요. 지난주 스티브 잡스 사망 기사를 보고 근 일주일간 우울했습니다. 어떤 위대한 사람도 한번만 죽는 것이고, 아니 한번은 죽어야 하는 것이고 그 한 번의 죽음 앞에선 동일한 절망을 느끼리라 믿어요. 돌이켜보면 세상에 알려진 사람이 죽을 때 비로소 내 죽음도 실감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죽음이 있기 때문에 무언가를 결단할 수 있다는 그의 말이 가장 기억에 남았습니다. 우리가 영원히 죽지 않는 존재라면 행복도 슬픔도 사랑도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습니다. 지난 주 세계가 잡스의 죽음을 동시에 애도할 때 저는 한 사람의 과학자를 만났습니다. 숙연한 가운데 즐거웠습니다. 세상과 인류에 공헌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만난다는 건 새삼 큰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파인만씨는 듣던 대로 농담도 잘하시는 분이더군요. 이 과학자와 동시대를 살았던 것이 18년이나 된다는 사실이 놀랍고 감동스러웠습니다. 세상의 모든 책이란 어쩌면 모든 사람의 죽음 이후를 위해 존재하는 낯선 인연은 아닐까요.


   하지만 먼저 고백할게 있어요. 이 책을 읽기 전엔 파인만이라는 과학자와 그래픽 노블이라는 장르도 몰랐답니다. 책 읽기 전엔 그저 만화로 된 위인전쯤으로 생각했죠. 만화도 좋아하지 않고 위인전은 더욱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제 우린 어느덧 독자에게 무언가를 가르치려고 드는 책들이 부담스러울 나이가 되었네요. 그뿐인가요. 과학은 물론이고 그중에 물리는 특히나 완강하게 거부하던 과목이었습니다. 과학의 하위영역인 생물, 화학, 지구과학, 물리 중 물리가 가장 싫었더랬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참 알 수 없는 것이 저는 그 싫다는 물리를 공부한 사람과 결혼을 하기까지 했어요. 그래서 물리 좋아하는 사람들의 성향을 좀 알아요. 새로운 제품에 의심이 많고 남들 다 관심있는 대중적인 것에 관심이 없고 자기 혼자 궁금한 사실에 집요하고 어떠한 결과에 대체로 낙천적이죠. 심심하면 라디오나 컴퓨터를 잘 뜯어보고 다시 작동될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아요. 한마디로 시간에 둔감한 편입니다. 지각도 잘하죠. 그러다가 우연히 옷핀 같은 것으로 잠긴 문도 가끔은 열어준답니다. 계산은 잘하는데 계산적이진 않구요. 모르겠습니다. 제가 아는 물리 공부한 사람들은 크게 성공한 분들이 아니어서 그런지 다들 건전하고 착하다(?)는 쪽으로 평가를 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파인만씨는 크게 성공한 분인데도 아이같은 순수성을 잃지 않고 사신 분이더군요.


   저는 인문계였지만 수학을 잘했습니다. 계산이 딱딱 떨어질 때 마치 세상의 이치를 하나씩 깨달은 것 같은 느낌이나 누구도 못 푸는 문제를 끙끙대며 풀었을 때의 기분 같은 건 조금 알아요. 친구들이 제일 싫어하는 ‘증명’같은 단원을 가장 잘 했어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물리는 이해하기 힘들었어요. 가르치는 선생님복도 없었습니다. 나중에 아이아빠에게 물어보니 물리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아는 것을 남에게 잘 가르치기가 힘들다고 하더라구요. 설명한다고 알아질 문제가 아니라는 말도 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당연한 것을 모를 수 있느냐는 생각이 반 이상 이래요. 어떻게 이렇게 재미난 일에 관심이 없느냐고 말해요. 천재들 중에 물리 공부하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그 천재들은 대개 스무살 이전에 판가름이 난다고 합니다. 천재가 되지 못한 물리학도들은 그들 천재에게 죽을 때까지 경외심을 지니고 살아간대요. 그런데 그들은 막상 그 위대한 연구들을 가르치는 데는 젬병이라고 해요. 자기 혼자 온 세상의 이치를 모두 파악했을 뿐일 경우가 많죠, 하하. 그런데 파인만은 예외인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물리공부하는 사람들은 필수적으로 파인만의 육성 강의를 찾아서 들어본다고 합니다. 물론, 무슨 뜻인지 전공자들도 다 못 알아 듣는다고 해요. 그런데 중요한 건 물리 역사상 그렇게 쉽게 자신만의 방법으로 자기만의 그림을 이용해 물리를 가르친 사람은 없다고 하네요. 천재중에서도 또 예외에 해당하는 선생님형 천재였던 거죠. 이 책의 후반부에 파인만이 자신이 개발한 다이어그램을 가지고 그 유명한 QED 강의를 하는 장면이 디테일하게 소개되어요. 학계에선 그걸 파인만 도표라고 합니다. 전공자도 아닌 저라고 그걸 이해했을 리 만무했지만 뭐랄까 비록 대가들의 이해할 수 없는 미술작품을 보았지만 가슴은 웅숭깊어지는 그런 기분이었달까요. 조금은 신비로운 자연의 이치에 쉽게 그리고 편안하게 한발짝 다가선 느낌은 확실히 들었답니다. 전혀 다른 세계의 언어지만 하나의 이미지로 다가왔습니다. 모두 이해할 순 없지만 암튼 그 모르는 것들이 아주 가까이서 우리를 움직이게 하고 있었구나. 그러한 자연의 이치를 발견하는 일은 눈물 날 만큼 아름다운 일이구나, 하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예, 이 책은 묘하게 물리 전개도를 보고도 따스한 체온과 훈훈한 공기가 느껴졌어요. 흔치 않은 책입니다.


   이 책에는 아인슈타인을 비롯해 닐스 보어 같은 유명한 과학자와 1965년 같이 노벨상을 수상한 슈윙거도 파인만의 인생을 스치는 사람들로 등장합니다. 많은 영향을 미친 첫 번째 아내와 여동생, 아버지, 친구들 정도가 기억나네요. 그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고등학교 때 만나 결혼에 골인한 여자 친구 알린 이었습니다. 알린은 파인만과는 달리 철학을 공부했어요. 제 생각에 파인만이 세상이 돌아가는 규칙을 발견하는 데 희열을 느끼고 그것에 평생을 바칠 수 있었던 건 알린의 사랑과 배려, 그리고 사고방식의 영향이 컸다고 봅니다. 파인만은 알린의 철학적 질문들로부터 상대적인 관점과 그로인한 통찰력을 넓혀 갔으니까요. 알린 역시 파인만의 논리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어느 날인가 철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파인만에게 알린은 각자 사람마다 다른 입장이 있다는 것을 주장하고 싶었나봐요. 그녀는 파인만에게 ‘종이에 양면이 있듯 모든 문제에도 양면이 있다.’는 말을 선생님이 했다고 하죠. 그러자 파인만은 눈앞에서 종이를 길게 잘라 양끝을 이어 붙이곤 뫼비우스의 띠를 만들어요. 이때 종이는 양면이 아니라 한 면으로 이어지는 것을 증명해 보입니다. 알린은 수업시간에 모든 문제에도 두 가지 측면이 있다는 선생님에게 파인만처럼 뫼비우스의 띠를 만들어 보이며 그 말씀도 두 가지 측면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고 의견을 발표해요. 이런 식으로 두 사람은 어느 한쪽도 옳거나 틀리지 않고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가슴아팠던 건 파인만의 소심한 성격까지 바꾸어준 알린이 그다지 오래 살지 못하고 병마로 세상을 먼저 떠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어쩐지 그 이후에 파인만이 만나는 여자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심지어는 노벨상 탈 때 옆에 있었던 두 번째 아내 이름도 기억나지 않더군요. 그 자리엔 알린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저도 모르게 했습니다. 그리고 저와 마찬가지로 파인만도 얼마나 알린이 생각났을까를 생각하니 그만 목이 메더라구요. 예, 저는 이 책에서만큼은 파인만 자신의 죽음보다 알린의 죽음이 많이도 슬펐습니다. 어떤 위대한 인물의 가슴속에만 살아있었을 사람이지만 이야기는 이렇듯 숨겨진 사연과 감동을 복원해 내는 것이겠지요.


   파인만과 알린을 보면서 어떤 문제를 고민할 때 결국 철학과 과학은 방법만 다를 뿐 지향하는 곳은 같은 곳이 아닐까 싶더군요. 라이프니츠 같은 사람은 철학자이면서 과학자이고 수학자였잖아요. 러셀도 수학자면서 철학자였고 비트겐슈타인도 기계공학을 전공한 후 철학자가 되었다죠. 스티브 잡스도 원래 철학을 전공했다고 들었어요. 과학자들은 하나같이 사물들이 복잡하게 움직이며 얽혀있는 이 세상이 돌아가는 ‘규칙’, 그 신비한 법칙을 발견하고 싶어 하죠. 그 ‘규칙’을 알게 되었을 때 비로소 세상을 ‘이해’했다고 말해요. 그런데 치밀한 논리를 바탕으로 과학적인 주장을 하는 철학도 결국 끊임없는 의문을 통해 이 세계를 이해하고자 하는 것은 마찬가지인 듯합니다. 저는 그러한 태도가 통찰력이라 생각하는데 제가 이 책을 덮으면서 가장 감탄한 것도 바로 파인만의 독특한 통찰력이라는 생각입니다. 고백하자면 아이 아빠와 아마 결혼까지 할 수 있었던 것도 서로 너무나 다른데 이상하게도 세상을 향한 질문은 얼추 비슷했다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예를 들어 사람은 왜 저마다 다르게 살았지만 공통의 아름다움에 대한 공감이 가능할까. 사랑이라는 것을 양과 질로 구분이 가능하다면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그 사랑을 어느 정도까지 측정할 수 있을까. 없다면 그 사랑 바깥에 있거나 그 사랑이 지나간 후는 가능한 것일까. 가능하지 않다면 무엇으로 자신의 사랑을 상대화 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책에는 2차 세계대전 때 미국의 원자폭탄 계획인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한 일화도 소개되어 있어요. 말년에 나사에서 챌린저 우주 왕복선 폭발의 원인을 밝혀내는 과정도 있더군요. 파인만은 전쟁이 끝나고 훗날 자신이 만든 폭탄이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를 생각하며 생각에 잠깁니다. 파인만은 ‘독일이 폭탄을 만들지도 몰랐기 때문에 폭탄을 만들었다’고 회상해요. 처음부터 대량 살상의 무기를 계획하기 위해 참여한 것은 아니었겠죠. 하지만 국가 기밀작업에 참여하면서 ‘왜 그 일을 시작하게 됐는지 끝까지 염두에 못 둔건 도덕적인 실수’라고 결론 내려요. ‘어떤 일을 할 때 끊임없이 그 일을 하게 된 이유’를 잊어버리면 안된다고 충고합니다. 그 이후로 파인만은 어떤 국가 프로젝트도 안하게 되죠. 저는 그러한 파인만의 대외적인 업적보다는 생활 속에서 그가 질문을 시도하는 과정들이 참 신기했습니다. 예를 들어 몇 백번의 시도 끝에 금고를 열수 있는 방법을 알아내는 과정이라든가 레스토랑에서 접시 돌리는 사람을 보고 왜 '접시의 그림이 도는 속도가 흔들리는 부분의 속도보다 느린지' 궁금해 하는 장면들이 떠오릅니다. 밥 먹으러 갔다가 재미삼아 접시의 회전운동을 분석해보는 식이죠. 궁금하니까요. 대부분 어떻게 접시를 떨어뜨리지 않고 저렇게 돌릴 수 있을까, 몇 개쯤 돌려야 접시가 깨어질까, 접시가 깨어지면 저 사람은 일당을 못 받을까, 뭐 그런 생각을 하잖아요.


   과학을 하려면 굉장한 상상력이 요구된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파인만은 학생 때부터 그 많고 복잡하고 어려운 공식들을 보면 그것들이 통으로 색깔있는 무늬나 그림으로 인식되었다고 해요. 보는 방법이 다른 사람인 것이죠. 누구나 꽃을 관찰하며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데 꽃을 바라보는 방법이 보통 사람의 시야와 다르다고 할까요. 이건 예술하는 사람들이 가진 능력이자 특성이기도 한데 다른 방법으로 보는 사람은 결국 다른 걸 보게 됩니다. 그 다름을 발견하고 누군가는 그림을 그리며 파인만같은 과학자는 수식을 만들고 작가들은 글을 쓰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파인만이 말하는 상상력은 우리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선물인 것이네요. 제가 무릎을 탁 치면서 파인만에게 한수 배운 상상력을 마지막으로 소개해 볼까 합니다.


   파인만은 이런 고민을 합니다. 우리가 볼 수 없는 것도 아름답다고 상상할 수 있을 지 말입니다. 상상력이라는 게 볼 수 있는 것에만 해당된다면 그건 진정한 의미의 상상력이 아니지 않을까 생각했던 게 아닐까요. 예를 들어 우리는 누구나 하늘에 뜬 무지개를 아름답다고 말하는데 파인만은 무지개를 슬며시 과학의 전개도에 오버랩 시킵니다.



   
 
“좋아, 그러면 이 그래프도 아름다워 보일까? 여긴 좀 더 상세한 내용이 담겨있어. 우리 눈으론 주파수 분포의 정확한 모양을 볼 순 없으니까. 하지만 눈에는 무지개 그 자체가 아름다운거야. 주파수 분포를 나타내는 곡선에서 무지개를 직접 볼 때 느끼는 것과 같은 아름다움을 볼 수 있을 정도의 상상력이 우리에게 있을까?”
 
   


    파인만은 위와 같은 주파수 분포도에서도 무지개를 감상할 때와 마찬가지의 아름다움을 발견한다면 우린 충분히 주파수 분포도를 보면서도 아름답다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기발하지 않나요? 앞서 말했듯이 수학과 과학의 모든 공식을 그림으로 인식했던 파인만이니 파인만에겐 과학을 설명하는 모든 난해한 그림들을 이 아름다움을 자극하는 상상력에서 시작하여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아요. 파인만은 그 해답을 뜻밖에도 로마 바티칸 성당의 벽화에서 찾을 수 있었답니다. 성당의 천장에 웅장하게 그려진 그림들을 보고 느낀 아름다움에서 자신감을 얻었어요. 성당에는 미켈란젤로같은 대화가가 그린 그림도 있었지만 무명화가의 수준 떨어지는 작품도 있었던 것입니다. 파인만은 어떤 그림은 아름다운데 다른 그림은 그렇지 않다고 느낍니다. 그런데 왜 아름답고 그렇지 않은지 그 이유는 명확히 알 수 없었지만 바로 아름답거나 그렇지 않다는 걸 느낄 순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이유는 말할 수 없지만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 파인만은 현미경을 통해서도 혹은 현미경으로 보이지 않는 모든 단계에서도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다고 자신감을 얻은 것입니다. 물론 파인만 자신이 아름다움을 느꼈다고 모든 사람이 똑같이 느낄 순 없겠지요. 그랬기에 더욱 파인만은 자신이 본 자연 현상의 과학적 아름다움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설명하기 위해 평생을 노력하지 않았을까요. 

 



   파인만의 독특한 상상력을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문학으로 바꾸어 보자면 내가 느낀 아픔과 슬픔을 전달할 수 있는 상상력이 아닐까 하구요. 파인만의 아름다움에 공감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을까요. 마찬가지로 위대한 작가들은 마찬가지의 독자들을 자신의 상상력에 공감하도록 하는 사람일테죠. 저는 파인만이 그 상상력을 아름다움으로 받아들이고 모두가 그것을 느끼도록 자기 이론을 설파한 것이 갑자기 뭉클해지네요. 왜냐하면 위대한 사람은 자신이 이루지 못한 것들을 내적으로 승화시켜 외적으로 발산하게 되지 않나 싶어서요. 잡스만 해도 그의 상상력은 세상이 보다 더 소통될 수 있는 패러다임을 지향하는 것이었잖아요. 하지만 잡스 개인사로 볼 땐 그다지 소통에 원만한 성향의 인물은 아니었듯이 혹시 파인만에게도 젊은 날 다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환타지 같은 게 그의 상상력을 무의식적으로 지배하지 않았을까, 뭐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소견이네요. 소설이나 빡빡한 텍스트의 자서전이 아닌 고급스런 그림들속에서 파인만은 평생 기계와 연구실, 논문과 발표, 공식과 강의에 묻혀 사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자신이 제일 재미를 느끼는 공부였고 또 그냥 재미있으라고 매번 연구를 시작하는 파인만이었지만 어쩐지 한 평생 고독하고 쓸쓸해보였다고 할까요. 유머도 좋고 솔직함도 좋았지만 저는 인간 파인만이 과학이라는 외로움을 이기는 방법으로 아름다움을 택했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아름다움 너머의 운명일지도 모르죠.


   이 책. 어떤 하이라이트나 뚜렷한 결말은 없지만 잔잔한 그림과 함께 아름답게 살아간다는 것.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자기만의 상상력으로 아름답게 남긴다는 것. 그리고 사람들에게 그 아름다움을 나누어 준다는 것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책입니다. 과학자에게서 뜻밖에도 아름다운 인생을 배운다는 것이 신기하고 흥미롭지 않나요? 예, 저는 파인만씨를 누구보다 아름다운 과학자로 오래오래 기억하려고 합니다. 파인만씨를 떠올리면 마음이 아름다워 지듯이 저 또한 누군가에게 그러한 사람이 되고 싶은 밤입니다. 그런게 아름다운 세상이겠고 이런게 아름다운 사람이라면 좋겠습니다.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모두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는 것은 아닐거예요. 그렇기에 더욱 사람과 삶이 일치하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한번쯤 모두와 약속이라도 하고 싶네요. 책 한권이 선사하는 삶의 아름다움. 한 사람의 인생이 건네는 사람의 아름다움. 파인만씨, 그것이 바로 당신이 남긴 진심이기에 당신이 죽었다는 게 이리도 슬픈 이유입니다. 아마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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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1-10-14 0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쉽고 머리에 쏙쏙 들어오는 글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stella.K 2011-10-14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책이 그래픽노블이었군요.
중학교 때 물리를 가르쳤던 선생님이 서글서글한 예쁜 처녀 선생님이었어요.
그래도 난 물리는 도통 모르겠던데
같은 반 여자애 하나는 그 선생님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물리를 깨치더군요.
아무리 선생님을 좋아해도 그렇게는 안되는 것 같던데
그 아인 좀 특별하다 싶었어요.
유익한 리뷰였습니다.
한사람님 부군되시는 분도 조금은 알게구.ㅋ^^

아이리시스 2011-10-14 15: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게도 과학고 나와서 열아홉살에 물리학과 진학한 사촌동생이 있는데, 어제 문득 그 아이 소식을 들으며(물리학이 공부를 오래 해야하고, 타인에게는 지극히 살아가는데 도움 안되는 학문으로도 비쳐서, 외삼촌이 걱정이 많으시지만! 그 아이는 여전히 20살 어린아이일 뿐이고) 저는 이과반이었는데도, 수학도 못하고, 과학에도 전혀 흥미가 없고, 물리보다는 화학이 좀 더 낫다는 부류였는데, 과학은 기초 도서도 못 읽어내는 게 못내 부끄러워지더군요. 아무도 안읽는 어려운 책만 본다고 외삼촌이 말씀하신 모양인데, 저는 그게 그냥 부러울 뿐이고. 제게 과학은 너무 멀고, 저도 파인만을 알게 된 지는 얼마 안돼요. 아무래도 시작을 잘해야 겠어요. 과학, 물리, 연구, 지적 호기심 따위가 내 안에 있을까요, 받아들일 공간이?ㅋㅋㅋ

가연 2011-10-19 2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잔잔한 글인데 내용은 깊네요. 음.. 천재들은 스무살 이전에 판가름난다는 이야기는 괜히 슬프네요ㅎㅎ 파인만은 고개를 저을 이야기 같다고 혼자서 생각해봅니다. 만약에 그가 그렇게 생각했다면 일반인들을 위한 강의를 굳이 하려고 들지는 않았을지도 모르고.. 그에게 중요하였던 것은 자연에 대한 아름다움은 누구나 느낄 수 있다, 라는 이야기였을테니깐. 그러고보면 파인만은 소위 천재의 기준처럼 쓰이는 아이큐에서 125를 기록했다고 하던데.. 물론 표준편차가 얼마냐에 따라서 좀 다를 수 있지만 그래도 다른 물리학자들에 비하면 낮은 아이큐라고들 하지요. 하지만.. 그는 그 아이큐라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스스로 증명해내었지요
 
고구려 1 - 미천왕, 도망자 을불
김진명 지음 / 새움 / 201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만화를 뛰어넘는 가독성. 만화만큼만인 사유성. 만화만 못한 저장성. 그로인한 망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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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1-10-08 14: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2권이랑 3권을 제 돈 주고 못사겠는 거예요. 뭐랄까, 가독성은 좋지만 소설은 역시 소설일 뿐이랄까요. 미천왕 시대는 역사계에서도 드디어 막 연구되는 중의 왕이래요. 아무래도 고대사는 많이 가려져 있으니까. 그래서 예상기출이거든요, 한국사시험에서 고구려사가. 한국사강의 쌤이 그렇게 말씀하셔서 저는 그래도 <고구려> 끝까지 잘 읽어볼 참이에요.^^

2011-10-08 23: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1-10-08 2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사람님의 저 40자평이 책에 대해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 같군요.
그렇지 않아도 리뷰대회 한다고 해서 이 기회에 관심을 가져 볼까 하는 생각을
얼마 전에 해 봤는데, 역시 그쪽으로는 마음이 안 가더이다.
김진명은 역시 저랑은 인연이 없는 작가인가 봅니다.흑.

2011-10-12 15: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0-12 23:2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