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와 빨강
편혜영 지음 / 창비 / 201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쥐와 재회하다

어쩔 수 없이 잊고 싶었던 순간이 내내 떠나지 않았다. 작년 이맘 때, 나는 술장사를 하는 어떤 가게의 안주인이었다. 주방장이 그만두고 잠시 공백이 생겨 할 수 없이 주방일을 보게 되었는데 당시 내게 주방은 음식을 준비하는 곳이 아닌 지친 몸을 잠시 휴식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손님이 없을 때 잠시 눈을 붙이거나 책을 보기도 했던. 가끔 한기가 느껴질 땐 오븐이나 밥통을 끌어안고 몸을 녹이기도 했다. 그날 아침은 막 첫추위가 시작되는 겨울의 초입이었는데 나는 가게문을 열고 들어가 주방문을 열자마자 미친듯이 다시 닫을 수 밖에 없었다. 고양이만한 쥐가 전날 밤 내가 끌어안았던 밥통옆에 얌전히 앉아서 똑바로 내 눈과 마주친 것이다. 살면서 그렇게 큰 쥐를 본 적도 처음인지라 놀라기도 했지만 더 소름끼치는 건 내가 그 자리에서 도망쳐도 될 사람이 아니라 다시 문을 열어 어떻게든 그 쥐를 쫓아내어야 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문을 열기 전에 잠시 생각했다. 쥐가 아직 있을까... 분명 쥐는 움직임 없이 휴식중이었고 내 눈을 쳐다보았다. 있어도 문제고 없어도 문제였다. 내 손으로 닫은 주방문을 다시 열어야 했던 그 순간의 공포를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쥐가 제발 알아서 도망가도록 충분히 시간을 준 다음 문을 열었다. 내가 연 문말고 창문, 뒷문 모든 문은 닫혀 있었다. 도대체 어디로 들어와 어디로 나간 것일까. 통로를 쥐잡듯이 찾아보았지만 그 덩치가 통과할만한 구멍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는지 나는 기다란 막대기를 들고 와서 그제서야 여기저기 쑤셔대었다. 삼십분을 들쑤셔도 쥐는 온데 간데 없었고 쥐하나 잡자고 경비업체를 부르기도 뭐해 그렇게 하루 일과는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쥐가 사라진 것을 알았지만 나는 쥐가 나타났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 싱크대, 냉장고, 선반 할 거 없이 질책이라도 하듯 그들을 닦고 문질렀다. 저녁에도 쥐가 나타날까 두려워 안절부절 못하던 나... 그 다음날은 도저히 내가 먼저 주방문을 열 용기가 나지 않아 옆지기에게 부탁했고 쥐가 없는지 확인하고도 한참 있다가 들어갈 수 있었다. 나는 그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내가 먼저 주방문을 열지 못했다. 그 후로 한번 더 옆지기가 그 끔찍한 쥐를 발견했지만 우리는 끝내 쥐를 찾지도 잡지도 못했다. 쥐라고 그때 나를 발견할 줄 알았겠는가. 그러니까 쥐와 나는 같은 공간에서 동거를 하고 있었던 것이지만 서로들 몰랐을 뿐이었다. 그날 마주친 쥐는 지금 잘 살고 있을까.

이 책을 읽는 내내 그 때 쥐의 안부가 궁금해 시종일관 소름돋은 채로 독서를 하다가 주방문을 닫아 버리듯 책을 덮었다. 꼭 다시 그날의 쥐와 재회하는 기분이었달까. 희미한 빛을 받아 더 부각되던 그녀석의 볼륨있는 몸체와 미동도 없던 태연한 자세는 여지껏 내가 알던 쥐와는 많이 달랐음이다. 그쪽 세계에서 어떤 황태자와도 같은 아우라가 느껴졌는데 우습지만 쥐도 고민이 있어 보였던 것이다. 미처 여기가 당신네 공간인지 몰랐다는 당황함이나 사람이 나타남에 있어 본능적인 경계, 민첩함은 전혀 감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훗날에도 그 쥐의 당당한 눈빛을 잊을 수 없어 도대체 '뭣하러 왔나'가 아닌 '뭐하던 중이었을까'를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추위를 맞아 살 궁리를 하는 아빠쥐의 고유한 사색의 시간이었을까. 그렇다면 그 쥐도 그 공간이 나름 마음에 들었음에 틀림없다. 어쩌면 쥐는 우리에게 피해를 주려고 그 곳에 도달했다기 보다 그냥 자신이 하던 일을 좀 새로운 공간에서 수행하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나의 공간을 두고 쥐와 경쟁을 했었다니... 사람이 쥐의 공간을 탐하지 아니하니 쥐도 사람의 공간은 넘보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은 우리중심의 편파적 입장인 게 아니었을까.

쥐와 공존하다

쥐를 발견했을 때 말처럼 때려잡기는 정말 어렵다. 돌이켜보면 내가 그토록 두려웠던 건 '쥐'라는 생물학적 동물이었다기 보다는 내가 발디디고 있고 내가 숨쉬는 공간에 '쥐'라는 최악의 불결한 덩어리가 나타났다는 사실, 저나 나나 같은 생명체이긴 하지만 나름 고상하고 청결한 생활을 해왔다는 믿음에 위배되는 증거로서 내 자존감의 훼손이었던 건 아닐까. 쥐는 시각적 정보가 아닌 위생적 정보이기에 쥐를 보았다는 사실은 쥐와 같이 있다는 공존감에 대한 인식이었고 그것은 곧 인간의 위치에서 심각한 추락을 의미하는 것과도 같았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이 쥐가 나타나면 악착같이 때려잡으려 하는 것도 실은 무의식적인 인간성의 추락에 육감적인 공포를 감지하기 때문은 아닐까.

이 작품은 쥐와 동격이 되 버린 한남자의 인간성의 추락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추락을 유도하는 매개체로 '쥐'와 '쓰레기'를 사용한 듯 하다. 쓰레기 환경에서 서식하는 동물로 대표적인 것이 쥐이지만 쓰레기는 인간이 생산했고 쥐는 인간이 창조하지 않았다. 쥐는 쓰레기 때문에 생겨난 생명체도 아니다. 즉, 애초부터 쥐는 쓰레기와 원인상관 관계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쥐는 인간에서 기인한 쓰레기 세상에서도 잘 살아 나가지만 인간은 자신이 만든 그 곳에서 살아갈 수가 없다. 첫 번째 아이러니의 시작이다. 한 가지 잘 사는 방법은 쥐처럼 살면 되는 것. 다만, 어쩔 수 없이 죽어도 그곳에서 살아야 한다면 말이다. 그런데 그 사람은 하필 쥐를 박멸하는 연구를 하는 사람이었다. 보통 사람들 보다 조금은 더 쥐에 대해 많이 알고 있었던 사람이 틀림없다. 쥐를 살리거나 죽이는 방법도 자세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두 번째 아이러니이다. 그랬던 그가 어느 날 우연히 남들이 두려워하던 쥐 한 마리를 시원하게 때려잡은 후로 쥐와 같거나 쥐보다 못한 생활을 하게 되는 고통에 휘말리게 된다. 그런데 또 쥐와의 인연은 운명이었던 것인지 바로 쥐를 잘 잡을 수 있는 그 능력으로 인해 공식적으로 쥐를 잡는 일을 맡게 된다. 세 번째 아이러니이다. 쥐를 때려 잡아야 쥐와 같은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것이다. 즉, 인간이다 보니 쥐를 잡아야 했었던 것인데 자신이 인간이 되는 길은 쥐를 잡는 일로부터 시작되는, 쥐가 인간을 먹여 살리는 형국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쥐가 없어져 버리면 그는 무엇으로 살아가나. 쥐를 잡는 일은 곧 자신을 잡는 일은 아닐까. 마지막 아이러니는...우리의 몫이었다.

쥐잡기처럼 이어지는 아이러니, 쥐와 인간의 이 오래된 역학관계를 끝도 없이 질문하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쥐를 잡는 것에서 시작해 쥐를 잡는 것으로 끝나는 이 작품에서 한인간의 몰락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편혜영의 소설은 인간의 불행에 동감토록 하지 않고 불편하고 불쾌하여 불가할 정도의 불만을 조장한다. 우연의 연속인 것 같아도 실은 우연으로 생각하고 싶은 인간의 선택이었음을 깨우치게 한다. 처절한 불행앞에 연민의 눈물대신 그러한 불행을 야기한 스스로를 자각하게 한다. 그동안 그녀의 단편에서 끝내 동감할 수밖에 없었던 심각한 수준의 불쾌감은 이번 작품에서 더욱 총체적, 강박적으로 집결된 느낌이다. 조금 더 길고 자세한 단편을 읽은 느낌덕분에 다행히 마지막에 허탈하진 않았다. 하지만 도저히 이해불가한 상황이 아니라 어느 정도 이해가능하다는 사실자체가 계속하여 씁쓸한 여운을 선사하며 각자가 짊어지고 가는 인생의 무게를 실감토록 만들었다. 그리고 그 무게 역시 내가 선택해온 인생의 대가라는 알고는 있었지만 듣고는 싶지 않았던 목소리와 정면에서 마주치게 했다. 그 목소리는 어쩌면 쓰레기더미에서 타고남은 재처럼 뿌옇기도 하겠지만 우리들 가슴에 벌겋게 각인될 것이 틀림없었다.

빨강의 예언

소설의 처음은 공항에서의 검역으로 시작된다. 위험의 경고인 것이다. 주인공 그는 C국으로 파견된 방역업체의 약품개발원이다. 나는 C국이 어떤 나라인지는 알 수 없으나 미국이나 유럽등의 선진국이 아닌 전염병 바이러스가 퍼지고 있는 개발도상국 혹은 후진국임을 상상할수 있었다. 그는 여기서 '내용을 알 수 없는 붉은 색 도장'을 받아온다. 마치 앞으로 펼쳐질 불행한 미래에 대한 예언장처럼. 붉은 색 도장이라면 나도 뒤지지 않을 선명한 추억이 있다. 바로 9.11 테러 이후 미국 방문시 이루어진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의 참변(?)이다. 나는 공항 입국심사를 무사히 통과하지 못하고 어느 덩치 큰 흑인의 뒤를 따라 미국입국검사대 바로 뒤편에 따로 마련되어 있는 사무실로 인솔되었다. 문제가 된 것은 내 인상착의였는데 테러용의자로 지목된 중국인 여성과 외모가 비슷하다는 이유로 삼십 여분 동안 되지도 않는 영어로 내 자신을 변호해야 했던 것이다. 다행히 공항 내 한국직원 덕에 풀려날 수 있었지만 그들은 내게 다른 외국인들과는 다른 출구에서 생화학적 세균을 제거하는 방역가스를 한차례 확실하게 살포한 후에야 보내주었다. 그리곤 여권엔 주홍글씨의 낙인처럼 secondary도장을 빨갛게 찍어 주었다. 한순간에 미국입국의 조건을 갖추지 못한 사람으로서 조사를 받은 기록이 새겨진 것이다. 지금은 웃으며 이야기 할 수 있지만 당시엔 얼마나 공포스럽고 굴욕적인 순간이었는지... 2005년 이후 나는 미국을 다시는 가기 싫어졌는데 그것은 내 여권에 빨갛게 표시된 도장의 역할이 크다. 검역에 통과하지 못한 사람, 기록으로서의 빨강은 현재의 불안이자 미래에 대한 경고이다. 이미 돌아온 나야 미국을 다시 안가면 그만이지만 그는 그길로 모국을 다시 밟지 못하고 만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의 붉은색 도장은 영원한 출국금지의 낙인이 되었던 것은 아닐까.

위험의 경고로 받아온 도장은 기어이 위력을 행사해 그를 나락으로 내모는 붉은 주술을 발휘한다. 그가 공항을 빠져나와 도착한 주거지는 C국의 수도인 Y시의 중심부 외곽지역을 재개발해 조성한 제 4구의 어느 독신자 아파트였다. 그런데 그곳은 지독한 악취와 검은 쓰레기라는 다리를 통과해야 어른거리던 쓰레기더미 위에 건축된 난개발의 장소였다. 그는 제 4구의 6번지 아파트 4층에서 형사와 대치하던 중 투신하여 스스로 쓰레기 더미로 추락한다. 절박한 순간에 이루어진 최후의 결정이었을까. 그런데 추락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맨홀 아래 하수도, 진짜 쥐의 서식지로 이어지게 된다. 이 모든 것이 재수없게 닥쳐진 불운의 연속이었던 것일까. 작가는 지상의 아파트에서 부랑자가 떠도는 공원, 쓰레기 소각장으로 다시 지하의 하수도로 점점 인간의 세계와 멀어지는 주인공 그의 추락에 한 가지 의문점으로 그가 본국에서 수행한 일을 끝까지 추궁하는 서사를 고집한다. 즉 C국에 운좋게(?) 파견된 서사까지는 그런대로 우연이라 생각할 수 있겠지만 바로 C국에 파견결정이 내려진 직후 그가 보여준 행보를 그의 추락과 연결지은 것이다. 그것은 C국에 누구보다도 출국하고 싶었던 그의 심리를 설명해주며 C국에서 쓰레기장으로 투신할 수밖에 없었던 결정을 이해시키는 중요한 소설적 장치이자 이 작품의 실마리이기도 했다. 그는 과연 전처를 살해한 사람일까.

검정의 선택

그가 제 4지구 아파트 4층에서 전처와 재혼한 남편 유진과의 통화에 의해 자신이 전처 살인범으로 누명을 쓰게 되었다는 사실을 인지한 순간 그가 내린 결정과 당시상황을 우리는 다시금 짚어보아야 할 것이다. 먼저 그는 아파트에 도착해 본사에서 인사를 담당하는 몰이라는 인물과 통화를 하지만 자신의 출근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고 무작정 연기되었음을 알게된다. 이것이 C국의 특수한 사정때문이지 본사의 오류때문인지는 전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그는 자신의 휴대전화와 그것이 들어있는 트렁크마저 잃어버렸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약을 사러나간 거리에는 검은 쓰레기 봉지만 나뒹굴며 어렵사리 구한 약은 살충제와 쥐약이 전부였다. 살충제와 쥐약마저 약탈당할 뻔 한 그는 쓰레기 더미에 쓰러진 자신이 어느덧 스스로 냄새를 풍기는 세계가 되었음을, 마침내 노략질과 폭력이 정당한 세계로 진입했음을 처연히 깨닫는다. 집단감염에 대한 우려로 아파트는 격리되고 계속되는 불안과 두려움속에서 그는 전처와의 소소한 일상이 그리워지며 연이어 전처의 개, 전처의 남편이자 자신의 친구인 유진등이 차례로 생각나지만 그것은 그들과는 다른 세상에 놓이게 된 자신을 더 뚜렷이 인식하는 계기가 될 뿐이었다. 그는 타지에서의 외로움, 불확실한 상황의 연속에 따른 막다른 두려움에서 탈피하기위해 마침내 자신을 쓰레기로 폐기처분하게 된다. 여기서 한 가지 또렷하게 남아있는 그의 기억이라곤 익숙하게 칼을 쥐던 손의 느낌뿐이었다. 형사를 피해 투신한 그는 이후에 17명의 부랑자가 생활하던 공원과 쓰레기 소각장을 떠돌게 되고 그곳에서 보디백에 담겨져 하수구로 내던져 진다. 일련의 과정으로만 판단컨대 서사속에서 그가 자신의 의지대로 선택한 것은 없어 보인다. 모든 건 정해져 있던 것일까.

작가는 꼭 그렇지 만은 않다고 말하기 위해 그와 전처와의 과거의 추억인 '원숭이숲'을 근거로 내세우는 전략을 시도한다. 바로 그가 아내와 마지막 관계회복을 위해 떠났던 T국으로의 여행에서 고집을 피워 방문한 장소, '원숭이 숲'이었다. 둘만의 조용한 대화를 원했던 그는 위험을 무시하고 그곳을 방문했지만 원숭이 숲을 지나 사원을 향해 가는 길은 그들이 가진 것들을 하나씩 잃어가는 과정과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모자나 선글라스를 빼앗아 가던 원숭이와 뒤엉켜 육탄전을 벌이던 그의 모습은 '아내와의 관계회복'이나 '조용한 대화'와는 거리가 먼 원숭이 보다 못한 무모한 폭력에 불과했다. 원숭이의 꼬리뼈까지 씹어가며 아내를 지키려 했지만 결국 그는 원숭이에게 여권과 지갑이든 가방을 빼앗겨 아내와 돌이킬 수 없는 파탄으로의 여행이 되고 만 것이다. 원숭이숲에선 원숭이의 방식이 있었던 것일까. 자신의 이기심이 담긴 여행도 무리수를 둔 원숭이숲도 모두 그가 선택한 결정이었다는 점에서 그로 인해 발생한 과정상의 사건 역시 지혜롭지 못한 대처를 이미 예고하는 에피소드였다.

그렇다면 그는 우발적으로 전처를 죽이고 도망치듯 C국에 입국한 것일까. 칼에 대한 구체적인 감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그만큼이나 우린 서사를 통한 이 의문점에서 끝까지 자유롭지 못했다. 그 역시도 자신이 왜 파견근무를 순조롭게 시작할 수 없게 된 것인지 끝까지 의문을 버리지 못한다. 독자의 의문과 주인공 그의 의문이 두 개의 축을 유지하며 서사를 밀고나가는 작가의 집중력과 압박감이 어쩌면 쓰레기 현실에 놓인 주인공의 쓰레기만 못한 처지를 자꾸만 잊도록 만들었다. 우리로선 전처를 살해했을지 모를 당신이 선택한 길이니 마땅한 벌이 아니겠는가하는 공공연한 암묵적 냉담을 감추기 어려웠고 그로서는 하루아침에 자신을 허공에 뜨게 한 모기업의 무책임을 사회적으로 고발하고 싶은 분노를 억누르기 힘겨웠을 것이다. 즉, 독자인 우리가 계속해서 불편을 느끼고 불쾌한 이유가 여기 있었다. 그는 개인적 가해자이기도 했지만 사회적 피해자이기도 했기에 가해자로서 비난하기엔 피해자된 그가 우리의 자화상인 듯 했기 때문이다. 우리라고 매번 합법적, 도적적 테두리 안에서 정상적으로 살아가라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 아무도 잘못은 없는 것 같은데 누구도 잘하지는 않았다는 생각, 현실은 외롭게도 Mall로 상징되는 거대공중에서 빈 트렁크를 짊어지고 칼을 한손에 쥔 슬픈 당신과 나의 모습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몰Mall과 몰沒의 공평

이 작품의 주인공은 이름이 없이 무작정 3인칭 '그'로 서술된다. 등장하는 인물중 가장 상징적인 명칭은 본사의 인사담당 '몰'로 생각된다. 어렵지 않게 대형쇼핑몰의 mall로 대변되는 자본주의 사회와 沒落(몰락)한 인생 두 가지를 의미한다고 여겨진다. 몰은 주인공 그가 C국에 입국하여 자신에게 최초로 전화를 한 인물로 그가 추락을 거듭하면서 계속하여 애타게 만나고자 했던 인물이지만 끝내 그의 실체와 만나지 못한 사람으로 그려진다. 더 의미심장한건 그가 우연히 주워 입은 티셔츠에 새겨진 이름 몰 그대로 부르기 쉽고 익숙한 이름 몰로 불려지며 살아가길 원했다는 것이다. 그토록 만나고자 했던 몰을 강조하며 그가 경비원에게 내민 명함에는 그가 찾던 몰의 이름이 박혀있었다. 이름을 보고 웃었던 경비원은 '이사람 찾고 있는 사람이 자신이었나' 하는 우스운 사람에 대한 페이소스는 아니었을까. 어쩌면 그는 진짜로 자기 자신을 찾고 싶었을테니 말이다.

그가 몰이 되기전에 이미 몰沒의 운명은 예정되 있었다. 그는 쓰레기 더미에서 기적적으로(?) 항공사 마크가 그려진 그을린 칼과 자신이 잃어버린 트렁크를 찾게 된다. 그 무딘 칼로 억지로 열어본 트렁크의 주머니엔 죽은 지 오래되어 화석처럼 굳은 쥐가 있을 뿐이었다. 마치 칼을 사용하고 돌아와 처참한 신세가 된 자신의 모습처럼. 그는 무딘 칼이나마 자신을 보호해줄 마지막 무기임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 칼에 대한 구체적인 감각에 대한 기억은 다시 칼을 사용함으로써 비로소 자신을 확인하라는 마지막 경고였는지 모른다. 그는 하수구에서 쥐를 잡는 능력을 인정받아 우연히 근무하게 된 방역일을 하며서 마침내 그 무딘 칼을 사용할 기회를 얻게 된다. 불성실과 요령을 알게 된 주인여자에게 그가 느낀 감정은 쥐잡이 생계에 대한 위협이었으며 그것은 곧 생존을 결정해야 할 기회이기도 했던 것. 여기서 우리는 그가 칼에 대한 구체적 감각을 행위로 복원하는 장면을 확인하며 그가 느낀 안도감만큼이나 어떤 카타르시스를 함께 경험하게 된다. 사람은 얼마나 자신이 한 잘못을 인정하기 힘든 존재인가. 때때로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인정하기 싫어 우리의 기억체계는 의도적 망각이나 불의의 상실을 경험하기도 한다. 어쩌면 그는 더 이상 모국을 그리워하지 않고 전처를 기억하지 않고 C국에서 남은 평생을 그런대로 살아가야 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그 인생이 꼭 불행하리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전염병이 창궐하고 대지진이 일어날지 모르는 도시에서도 사람들은 행복할 권리가 있는 것처럼. 쥐도 자신의 살길을 찾아 가끔은 인간의 공간에 침입하는 것처럼.

그는 칼을 버리고 공중전화를 택했다. 불을 밝힐 수 있고, 전적으로 혼자 있을 수 있고, 자신의 부재를 확인 할 수 있는 곳. 그는 회사로 전화를 시도하지만 그때마다 자신은 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가 확인하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자신을 기억하는 누군가를 기대하며 과거를 추억하고 싶었을까. 혹시 앞으로 영원히 자신을 모른다고 해주길, 자신은 그 세계에서 사라진 사람으로 인식되길 원했던 것은 아닐까. 자신이 잊혀지는 것이 이곳 쓰레기 더미를 헤쳐 나온 그가 살아가는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그는 실수로 약품이 얼굴에 흘러내려 역겨운 순간에도 눈물을 흘리지 않고 코를 풀며 다시 일상을 준비한다. 자신이 투신했던 제 4지구 쓰레기 더미를 재개발해 만든 마트에 들러 먹거리를 구할 생각을 한다. Mall에 몰락하지 않고 그것을 이용하기로 한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남은 쥐처럼 끈질기게 살아남아 다시 인간으로서 살아가길 원했던 것이다. 쥐에게도 인간에게도 공평한 결말이었다. 잔인하도록 공평한 이 섬칫함이 이 책의 가장 불쾌한 미덕이었지만.

다시 피는 빨강

『재와 빨강』은 피가 넘치고 냄새가 역겨운 쓰레기의 외피 속에서 그러한 쓰레기를 조장하고 또 쓰레기를 헤쳐 나온 쥐와 다를 바 없는 인간의 본성을 집요하게 쪼아대는 작품이었다. 거대한 시스템과 자본 앞에서 우리는 항상 무력하고 소심하다. 거리에 나가면 하루에 교통사고로 몇 십명이 죽는 다는 것을 알지만 자동차를 이용할 수 밖에 없다. 보행자라는 피해자도 될 수 있지만 운전자라는 가해자도 될 수 있는 것이 언제나 우리 현실인 것이다. 그래서 우린 누가 누굴 함부로 비난할 수 없다. 어쩌면 쥐의 삶까지도 비난할 자격은 없지 않을까. 쥐 역시 인간 때문에 못살기는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다만 우리가 쥐가 아니고 인간임을 잊지 말아야 할 이유는 우리가 사는 세상은 쥐가 아닌 인간만이 아름답게 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전염병과 환경오염, 난개발에 시달리는 거대 다국적 기업의 시대에도 여전히 아름다울 수 있는 존재들은 인간들 밖에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인간은 비록 쥐보다 못한 쓰레기를 천연덕스럽게 생산할지 몰라도 그 쓰레기를 수거해 다시 인간의 영혼을 살찌게 할 꽃을 피울 수 있는 존재들일 것이다.

부랑자를 태우고 남겨진 검은 재가 바람을 타고 꽃잎처럼 허공에 흩어지던 인간같지 않음을 떠올린다. 한줌의 쓰레기 보다 못한 그의 영혼처럼 쓸쓸히 가벼운 재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지독한 바이러스가 공기중에 꽃가루처럼 퍼져가던 벌건 불신과 두려움을 기억한다. 그럼에도 우리가 태워야 할 것은 폐수와 오물로 넘치는 인간의 쓰레기 말고도 우리 안에 스며든 무심한 마음의 쓰레기가 아니었을지. 인간쓰레기가 아닌 쓰레기인간 이야말로 우리가 각자 태워야 할 마음의 부산물은 아니었을까. 그렇게 태운 그 곳에 분명 검은 재가 아닌 붉은 꽃이 다시 필 것이라 믿고 싶다. 그것은 이토록 붉은 피의 댓가로 이루어진 인간들의 붉은 심장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 곳에 흐르는 피는 분명 인간을 아름답게 할 빨강의 꽃과도 같은 색이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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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르발 남작의 성
최제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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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방 비상구 (The eight points of the emergency exit)
- 스테레오 타입을 탈출하기 위한 방향을 중심으로 -


가끔 책을 덮고 나면 이 사람이 원래 뭐하던 작자(?)인지 궁금할 때가 있다. 이른바 전직이 의심스러운 사람들, 처음부터 걸어온 길이 꼭 문학이라는 가시밭길 같지는 않아 보이는 사람들, 그런데 타고난 운명은 거부할 수 없어 자석에 이끌리듯 그만 방향을 바꾼 사람들. 최제훈이라는 작가를 알지 못했지만 어쩐지 이 분도 그런 느낌이 든다. 나는 문학 평론가는 아니지만 독자라는 책값만큼의 권리로 서평분량만큼만 그의 뒷조사를 하고 싶었다. 허나 세상에 알려진 그의 이력은 두어 줄에 불과했기에 심플한 그 두 줄을 바탕으로 빈약한 상상의 문어발을 뻗을 수 밖에 없었다.

예전 직장생활에 한참 목을 메고 있을 그때 그 시절, 우리 팀에 학부에서 물리학을 전공했지만 다시 디자인이 하고 싶어 그 분야 이름있는 전문대에 늦깍이 학생으로 졸업 후 교수추천으로 입사한 친구가 있었다. 나이는 나와 같았지만 나는 이미 사회생활의 쓴맛 단맛 신맛을 골고루 섞어 마신 꽤 깐깐한 팀장이었고 그 친구는 이제 막 신입으로 합류했으니 그 친구나 나나 사이가 매끄러울 리가 없었다. 한번은 신입 여러 명에게 A3용지를 열장씩 나누어 주고 주어진 목차대로 페이지를 채워오라 숙제를 내준 적이 있는데 어쩐 일인지 꼬박 하루가 걸릴 분량을 혼자 반 나절만에 해결해서 내 앞에 들이민 신입이 있었으니 그치가 그치였던 것이다. 이 친구는 다른 친구들이 아이디어 스케치부터 대충 해치우고 그걸 가지고 자신의 디자인 의도를 설명하는 식의 페이퍼를 작성하지 않고 종이와 자, 계산기를 가지고 남다른 시작을 한 것이다. 즉 최종으로 제작될 제안서 A3 용지의 레이아웃에 딱 들어 맞게 상하좌우 여백을 제하고 거기서 또 목적, 배경, 의도, 연출등의 칸을 정확하게 자로 잰 후 그렇게 나누어진 공간 안에서 한 항목당 10포인트의 글자가 몇 개가 들어갈 지 계산을 한 다음 다른 제안서에서 딱 그 항목에 부합하는 문단을 낱말 수에 맞추어 복사한 후 다시 그 위에다 몇 개의 단어만 바꾸어 페이지를 완성 한 것이었다. 물론 그림은 그 나머지 공간에 어울리는 이미지를 일단 찾아서 붙여놓고 자신은 이렇게 그림을 그리겠다고 말이다. 하나의 틀을 만드는데는 시간이 걸리지만 그 후 10페이지를 똑같은 방법으로 복제하니 제일 빠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한 페이지당 소요시간을 재어본 후 10페이지 구성의 총 시간을 예상, 아예 목표시간을 맞추어 놓고 그 시간안에 작업을 하였다. 그 친구가 주장한 것은 일의 '효율성' 이었다. 그렇게 일을 진행하면 한페이지 때문에 다음이 막히는 일이 줄어들고 전체 분량을 알 수 있으니 일이 되어가는 큰 그림이 한눈에 보인다는 것이다. 그 친구는 항상 제일 먼저 퇴근했다.

물론, 그 친구의 아이디어가 항상 좋은 평가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 친구는 다른 일을 할 때에도 반복되는 일에 있어 항상 (시간이 걸리더라도)자신만의 틀을 먼저 만들고 그 안에다 내용을 삽입하는 성향이 있었는데 결과의 퀄리티는 매번 보장할 수 없었지만 속도면에서는 그를 따라갈 자가 없었다. 우리사이에서 그는 '퀵 페이퍼'라 불리었고 대세에 지장없이 빨리 제출해야 하는 문서는 그가 맡았다. 즉, 그는 동종업계에서 다소 늦게 출발한 자신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한 차별화로 업무의 효율성을 특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을 덮고 나서 소설쓰기에 있어 자신만의 차별화를 확실히 구축한 작가의 마음 한 구석을 엿보는 기분이었달까. 경영학을 공부한 사람이라 그런지 이야기를 아주 효율적으로 경영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미국 MBA 출신의 빈틈없는 CEO가 구조조정은 물론 M&A, 양자간 MOU도 일사천리로 진행하는 창의적인 비즈니스맨을 연상케 했다. 준비도 철저히 한 것 같았다. 8편의 이야기가 우연히 나왔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 아주 잘 계산된 치밀한 계획에 의해 탄생된 프로젝트라는 생각, 늦깍이 신인작가의 이 계획성에 나는 감동받았다. 바로 지난주에 베르나르 키리니라는 벨기에 작가의 <육식이야기>를 읽고 올해 건진 최고의 수확이라고 떠들었는데 '장님코끼리 만지기'라고 어디까지나 지난주까지의 이야기에 불과했다. 첫 소설집이라고 하니 아마 목을 빼고 장편을 기대하는 독자들이 한창 많아지지 않았을까 싶다.

우선, 내가 감지한 이 작가의 차별화 전략은 스테레오타입(Stereotype:고정관념)에의 탈피에 있는 듯하다. 이 부분에선 그가 기존의 소설 장르와 형식, 소재, 작법을 거부하고 애초부터 무언가 새로운 돌파구를 부러 찾아 그 부분을 집중공략 했다는 생각이 드는 건 사실이다. 그런데 그 다름의 완성도가 소름끼칠만큼 완벽하다. 어느 인터뷰를 보니 자신이 글쓰고 싶은 이유를 알고 싶어서 글을 쓴다는 대답을 하더라.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내가 왜 글을 써야 하는지'를 오래 생각해 온 사람으로서 글을 쓰는 이유를 밝히는 것이 소설가로서 소설행위가 되어 자신의 (작가로서의)정체성을 차별화하는 것이 역으로 글을 쓰는 이유가 되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그 정체성은 다시 여지껏 억눌려온 많은 사람들이 행해온 방식에서 벗어나 이야기로서 자신의 무한대를 밝혀보고 싶은 욕구로 발전하지 않았을 지.

스테레오 타입이라 함은 '어떤 특정한 대상이나 집단에 대하여 많은 사람이 공통으로 가지는 비교적 고정된 견해와 사고'(네이버 백과사전)를 말하는 것으로 흔히들 고정관념이라 말한다. 이 스테레오 타입이 없다면 새로운 방식은 존재 하지 않는다. 대중들이 스테레오 타입을 의심없이 인지하는 이유는 일상의 질서가 더 평화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달리 말하면 고정관념 바깥에 위치하는 어떤 신개념은 일상의 바깥에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우리로선 일상의 안쪽, 즉 기존의 질서에 순종하는 것이 더 효율적인 태도인 것이다. 그런데 이 작가, 효율성을 궁극의 골라인에 위치시킨 학문, 경영학을 공부한 사람이 어찌보면 전혀 효율적이지 않은 분야로 눈을 돌려 자신의 전공인 효율성을 적용한 지점은 바로, 소설의 질서를 깨뜨리는 일이었다. 기가 막히다. 자신이 가장 잘하는 무기를 가지고 자신의 한계를 넘는 방법이 소설의 효율을 무너뜨리는 것이었고 그것도 아주 최대한 효율적으로 진행한 후 결과적으로 전에 없이 효율적인 작품을 완성한 것이다. 고로 이 작가는 자신을 무너뜨리면서 자신을 쌓아나가는 흡사 자신의 작품들과 아주 일치하는 일을 한 것이다. 이 책의 구성 메카니즘이 곧 이 작가의 정체성을 대변한다고 생각된다.

이 책에는 총 8편의 이야기가 배치되어 있는데 마지막 이야기는 앞의 일곱 편의 후기처럼 정교하게 짜맞춘 작법을 휘날레로 장식하였다. 책을 덮고 나면 마치 희대의 사기극 완결편처럼 읽는 자의 카타르시스를 충분히 만족시켜주며 뇌리속엔 모든 작품이 '기존의 모든 것에 대한 탈피'로서 기분좋은 이야기 현상으로 남는다. 굳건히 닫혀있던 8개의 비상구가 하나씩 열리더니 마침내 동시에 열어 젖히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비상구라는 것이 모두 동시에 열리면 그건 이미 탈출이라기 보다는 개방이나 환영이 아닐까. 공교롭게도 팔방(여러 방향: in all directions)향의 탈출구가 오픈되는 이 현상을 무어라 해야하나. 이야기의 해방? 서사의 자유? 구조의 혁명? .... 탈출을 이룬 그의 방향성을 검토해 보고자 한다.

Gate 1 ... 출발, 릴레이 여행 ! 「퀴르발 남작의 성」

첫 번째 이야기는 1697년부터 2005년까지 대략 3백년간의 이야기 발전사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이야기 '이어달리기'라 할 수 있다. 한 주자가 다음주자에게 바톤을 넘겨주는 형식이다. 6월 9일에 일어난 총 12개의 에피소드들이 이야기 조각으로서 나열되며 각각의 조각은 서로 독립적이면서도 모아 놓으면 하나의 그림이 된다. 이야기의 원 순서는 최초 발생한 하나의 사실이 시발점이고 그 사실은 구전설화가 되더니 나중엔 소설로 발전하고 소설은 영화로 영화는 리메이크되는 식이다. 그 영화들은 강의실로 리포트로 모방범죄로 기자의 비평으로 관객의 감상으로 끊임없이 이어진다. 이야기가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면서 그때그때 전달자와 수신자간의 상호합의 혹은 일방통신에 의해 변형, 확대, 왜곡, 재생산되는 과정을 쉽고도 편하게 확인할 수 있음이 이 작품의 안 보이는 미덕이라 할 것이다. 프랑스에서 미국, 일본, 한국으로 건너오는 이야기 릴레이의 바톤에 해당하는 재료(source)는 '퀴르발 남작의 성'에 살고 있는 퀴르발 남작에 관한 믿을 수 없는 소문이다.

형식도 소재도 모두 신선했고 작가가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바도 분명한 이야기였다. 아마도 6과 9라는 숫자는 이야기를 뒤집어 보거나 역추적 한다는 의미가 내포되 있는 듯하고 서사의 전개가 시간순이 아닌 것은 이토록 이야기는 순리대로 체계를 가지고 변형되는 것이 아니라 우연에 의해 우발적인 사건에 의해 곳곳에서 진행되어 왔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변형에는 항상 이야기를 전달받아 그것을 재생하는 인간들의 이기심이 핵심에 자리하고 있어 각자 자신들에게 유리한 편으로 뼈대와 살점을 재구성하여 이야기 자체의 진심을 무시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작가는 이야기의 진심이 곧 우리 사는 현실에 진실은 아닐 수 있다고 말한다. 이야기가 해체되고 축적되는 과정에서 지금 우리 앞에 도달한 이야기의 결과만이 진실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왜곡된 진심이지만 현실에 용인되는 가치만이 진실이라고, 이야기가 거짓말인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원래 이야기한텐 미안하지만 영원히 살지 않는 우리로선 뼈아픈 진실이자 이해될만한 진심이었다. Originality 보단 Utility에 기우는 것이 퍼져가는 이야기의 속성인 것일까. 문득 우리 사는 오늘날, 진짜라고 믿는 진실이라는 것이 오늘까지의 이야기에 한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작품이었다.

Gate 2 ... 미스터리 다시짜기 「셜록 홈즈의 숨겨진 사건」


올해의 문제작으로도 알려진 이 작품이 미치도록 반가웠다. 나는 이 작품이 이번 소설집에서 가장 완성도가 높았다고 생각된다. 물론 내 맘대로 내 기준에서 완성도다. 읽는 내내 이 작가 머리가 너무 좋은 거 아닐까...감탄해 마지 않았다. 우선 문체는 홈즈가 왓슨이라는 옛조수에게 보내는 편지글이었다. 고전적인 우아함이 인상적인 말투와 끝까지 지적인 면모를 유지하는 홈즈의 캐릭터가 서사속에서 막대한 집중을 발휘하며 이야기가 끝남이 아쉽도록 만들었다. 서사의 줄기는 셜록 홈즈가 권태로운 일상에서 흥미롭게 발생한 살인사건의 전모를 밝히는 과정을 고백하는 것인데 피해자는 다름아닌 자신의 창조주인 아서 코넌 도일이었다. 소설속에선 홈즈가 전혀 코넌 도일을 모르는 것으로 등장하며 결국 홈즈는 자신을 탄생시킨 작가의 죽음을 추리하는, 우리로선 꽤 당황스런 농담의 시작인 것이다. 게임은 이제부터 인데 처음엔 타살로 추정했다가 여러 가지 추리에 의해 코넌 도일이 자살했음을 밝혀내는 과정이 곧 홈즈로선 이 사건을 묻어야 할 사유가 된다. 작가는 도일경이 설치한 함정을 밝혀내는 홈즈의 논리를 똑같이 셜록 홈즈라는 소설의 기법을 사용해 서사를 밀고 나가며 이미 알려진 소설과 작가, 주인공을 가지고 전혀 다른 이야기를 뻔뻔하게 창조해 낸다. 여기서 더 소름끼치게 아이러니한 것은 사람들이 허구 속 탐정(실제소설에서 자신)에 열광할수록 창조자(도일경)의 실존적 자아는 위태로와져 자신의 실체를 확인하는 방법은 자살밖에 없다고 결론내린 부분이다. 결국 도일경의 죽음은 실제 셜록 홈즈라는 소설의 주인공, 즉 자신(도일경)이 만든 인물 때문에 죽은 것인데 소설바깥 우리가 보기엔 자기(실제 소설속 홈즈)가 죽여 놓고 자기(이야기속의 홈즈)가 이유를 찾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이야기를 만드는 과정 자체를 소설화하는 이 작가의 고뇌가 그대로 반영된 듯한 홈즈의 독백이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자신이 만든 환상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침몰한 도일경과 자신을 매혹시킬 현실에 목말라 환각제에 의지한 나'는 곧 이야기속 홈즈와 작가를 말한 것은 아닐까. '덕분에 인간의 상상력이 감히 미치지 못하는 속도로 무한히 재창조 되는 현실 속에서 다시금 느끼는 자유'는 작가의 권태로운 현실에 다시금 피가 돌게 해주는 활력제와도 같은 소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미스터리를 다시 자신의 의도대로 조작하고 유용한 홈즈와 이야기를 다시 짜맞춘 그가 중첩되면서 홈즈의 숨겨진 진실이 곧 작가의 무기가 되었음을 서늘하게 자각하게 된 작품이었다.

Gate 3 ... 기억의 숨바꼭질 「그녀의 매듭」

이 작품은 이야기로서의 통속성은 가장 강하면서도 서사의 연결고리가 탄탄해 어떤 이야기보다도 작위적이고 거짓말 같으나 그 드라마틱한 내구성으로 가장 진실된 메시지를 똑바로 마주할 수 있었다. 나는 사람의 기억이라는 것이 자기보호를 위한 선택적 방어기제로 사용될 수 있음을 알고 있다. 분명 가족 모두가 같은 공간에서 주고 받은 대화인데 그 중 한사람만 당시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다. 모두들 그가 한 말을 기억하는데 정작 당사자는 전혀 그 순간을 자신의 일생에 있었던 일로 여기지 않는 것이다. 그 순간은 아버지의 부도로 가족 모두가 길거리에 나앉게 되자 모두 모여 다같이 죽자고 하는 절박한 상황이었는데 그만이 '나는 죽지 않겠다' 말하며 뛰쳐 나갔고, 그는 그때의 충격으로 아예 그 순간을 기억에서 삭제해 버린 것이다. 그 순간을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그 순간의 충격과 상처는 남아 언젠가는 다른 형태로 표출되지 않을까. 

이 작품은 이처럼 자신이 원하지 않는 기억, 선택하지 않은 삶이 꽁꽁 묶여진 매듭으로 뇌 속에 숨어 있다가 미래의 어느 순간 무의식의 변형된 형태로 부활하며 원치 않는 곳에서 그 매듭이 풀려질 수 있음을 이야기한 어느 정도 있을 법한 이야기이다. 과거의 어느 시기, 어느 장소에서의 기억이 마치 케? 한 조각처럼 잘려졌다가 모든 성분이 허물어진 원형질의 파편이 전혀 최초의 물질을 알 수 없도록 어느날 갑자기 기억체계를 교란시키는 것이다.

이야기는 차화연이라는 디자이너가 오랜 친구였던 성호라는 남자에게서 우정이 아닌 사랑을 느끼게 되기까지의 과정속에 그녀의 어두운 기억의 매듭이 풀어 헤쳐지는 구성이다. 화연은 성호의 여자친구에게 질투심을 느끼고 어느날 인터넷에 떠도는 이현정이라는 이름의 여자 사진과 성호의 사진을 합성해 그의 여자친구를 떨어뜨리는데 성공하지만 사진속 주인공 이현정이 실제 현실에 나타나 진짜 성호의 애인이 되버리는 말도 안되는 상황이 벌어진다. 비밀은 화연이 복수의 용도로 선택한 이현정이라는 가상의 인물이 실제 자신의 기억속에서 서로 치명적인 비밀을 공유한 친구사이라는 것에 있었다. 현정과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화연은 과거의 인생대본에서 선택적 삭제에 의해 상처를 최소화하며 살았던 것. 그리고 기억의 그림자는 끈질기게 오늘 살아가는 현실에 투사되며 피할 수 없는 새 대본을 만들어 가고 있었던 것. 사람들은 어쩌면 자신이 기억하고 싶은 것들만 기억하고 싶은 대로 기억하며 자신이 아닌 자신을 자신이라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또한 기억의 이야기를 첨가하고 삭제하는 이야기 재구성의 기본원칙에 기초한 진지한 이야기 였음이다.

Gate 4 ... 1인 4역 모노드라마 「그림자 박제」

화자의 1인칭 고백이 진술서처럼 펼쳐지는 이야기이다. 병력을 고백하는 것으로 보아 정신과 의사에게 자신이 저지른 살인사건의 전모를 술회하는 듯하고 병력이라 말하는 것으로 보아 범인은 정신병이 의심되는 사람일 것이다. 내안의 또 다른 나가 부지런히 그 안에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쌓아가는 이야기. 그런데 또 다른 나는 한명이 아니었다.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현재 회계사이며 기러기 아빠로 지내고 있는 강철수라는 남자가 왜 자신안에 거칠고 제멋대로인 한량 '톰'과 소심한 자폐증 예술가 '제리'와 배관공이자 목수인 아버지를 둔 친구 '강우빈'을 키우게 되었는지 알게되며 중요한 건 살인사건이 아니라 한사람의 과거에 숨어있던 그림자의 존재였음을 알게된다. 흔히들 파란만장한 자신의 인생을 소설로 쓴다면 한트럭일 것이라 농담을 하는데 이 작품은 한 사람이 어떻게 해서 오늘의 살인자로 살아가게 되었는지 마치 녹취록을 듣는듯 주인공의 목소리가 생생하다.

작가는 누구나 한번쯤 자신이어야 하는 자기, 자기가 알고 있는 자기 외의 인생을 살아보고 싶은 은밀한 욕구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보인다. 그런데 자신도 모르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자기 역시 어느날 갑자기 뜬금없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자신의 슬픔과 충격, 상처와 상실속에서 자라난 자신의 그림자일뿐이라 말한다. 이 분열된 자아가 미스테리를 유발하고 이야기를 조장한다. 주인공이 절대 과장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주장을 읖조리는 것에 상당한 설득력이 감지되며 독자가 이에 공감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자신을 향한 거울같은 연민이 아닐까. 마치 어느 유명한 연극배우가 몇 시간 동안 자신의 이야기를 허물고 쌓는 모노드라마를 보는 듯했다. 어떠한 살인범도 이 주인공처럼만 이야기 한다면 달리 유능한 변호사가 필요 없어 보일 정도로 연출이 감동적이었다. 소설가의 법적인 능력은 어디까지란 말인가.

Gate 5 ... 반성문의 업그레이드「마녀의 스테레오타입에 대한 고찰」

이 작품은 마녀에 대한 고정관념을 뒤집는 이야기다. 기자가 월간 '마녀스타킹'이라는 잡지에 기고한 기사형식의 글로 흡사 인문학 교양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있는 사실을 소설로 뻥치기 하여 교양의 수준을 끌어올리는 작가의 유머와 재치가 경이롭기만 했다. 고찰이 소설을 진행하는 키워드이니 사유의 힘이 매우 강박적이다. 기자는 사회현상을 날카롭게 파헤치는 시선이 매력이자 특기인 사람들이므로 마지막에 궁극의 질문도 회피하지 않는다. 마녀패션의 유행에서 시작된 마녀의 출현배경, 그리스 신화를 바탕으로 한 마녀의 본령 및 역할, 그들이 인간세계로 넘어와서 본모습이 어떻게 왜곡되었는지 서술하는 과정이 서사의 핵심이며 이 과정에서 인간들이 '마녀사냥'을 자행해온 집단이었음을 꼬집는다. 그러니 실은 마녀에 대한 고찰이 아니라 마녀사냥을 일삼아온 인간의 심리 고찰이 맞을 것이다.

작가는 신화나 구전된 이야기에서 스토리의 허점을 예리하게 발굴해 내어 그 지점에 자신의 상상력을 불어 넣는 틈새전략을 구사하는데 그 결과 대박의 소설이 탄생한 것이다. 마녀를 배신한 인간과 마녀의 개념을 훼손하여 자신들의 욕망에 투사한 인간들의 심리에는 자신들이 해결하지 못할 혐의를 무조건 뒤집어 씌우는 대상으로서의 희생양이 필요했음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 형벌까지 즐기던 인간의 그릇된 이기심도 함께 질문한다. 그럼으로 마녀외에도 우리가 고유의 전통으로 착각하고 있는 스테레오타입의 개념들은 그 왜곡을 본질로 하고 있으며 왜곡의 중심에 인간이 자리잡고 있음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는 차분한 목소리가 서늘하게 다가왔다.

이 글을 읽으면서 마녀처럼 우리의 고전들속에서 스테레오 타입으로 정형화된 '계모'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장화홍련전'과 같은 악독한 계모와 불쌍한 본처자식 구도에 익숙한 많은 고전들이 실은 철저한 가부장제의 피해자인 힘없는 후처들을 앞세워 자신들의 권위를 유지하려한 폭압장치였으며 결국 '사악한 계모의 스테레오타입화' 작업의 일환이었다는 시각이 중첩되었기 때문이다. 마녀나 계모나 인간의 탐욕과 모순에 의해 본질이 왜곡되기는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아...우리는 왜 우리 자신의 잘못을 누군가에게 전가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들일까. 마녀에게 아무 잘못도 하지 않은 내가 그동안의 오해를 반성하게끔하는 작품이기도 했다. 물론, 이 사실도 오해일 수 있겠지만.

Gate 6 ... 이야기로 용서하기 「마리아, 그런데 말이야」

가장 공감가는 이야기였다. 마리아 탄생설화에서부터 백미인 러브스토리에 이르기까지 어쩌면 우리들 대다수의 이야기라해도 무방했다. 자아의 그림자가 투사된 또 다른 자아가 마리아라는 정체불명의 인물로 묘사된 것이므로 앞선 이야기인 「그림자 박제」와 이야기 계보가 같다 할 것이다. 우리는 학교, 직장생활에서 자신이 본 사람, 겪은 사람 할 거 없이 그 사람의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전달할 때 사실을 그대로 전하기보다 과장과 첨삭이 자신도 모르게 발생하는 경우가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한술 더 떠 그 친구의 행동에 슬며시 내가 바라는 말, 내가 해보고 싶었던 행동을 추가하다보니 그 친구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나중엔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던 적은 없을까. 더 나중엔 있지도 않은 누군가를 자신의 아바타로 만들어 아바타의 일거수일투족을 내 맘대로 구성해 대화 속에 존립, 유지시킨 적은 없었을까.

드라마 촬영감독이며 이혼남인 성민과 결혼을 앞둔 대학후배 수연이 자신들의 아바타를 가공한 주인공들이다. 대화의 공통분모가 없어 수연이 가공한 마리아는 우리들 온갖 욕망과 부러움의 대상이며 질투와 비난의 대상이기도 하다. 어짜피 없는 인물이므로 한명의 캐릭터로 존재치 않으며 연출자의 작위적 센스에 따라 급변하는 성향이 있다. 어짜피 뻔한 드라마를 찍는 성민의 현실도 드라마 못지않게 드라마틱했지만 마리아는 수연이 연출한 드라마 주인공이었음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해주는 센스아닌 센스는 혹 뻔해도 다음이 궁금해지는 시청자의 심리가 아니었을까.

우린 가끔 가짜에 의지하며 진짜를 유지할 때가 있다. 그러다가 그 진짜가 자신도 느끼지 못한 가짜임을 알았을 그때, 자신을 용서하듯 누군가를 용서하고 싶어진다. 마리아를 용서하는 것은 마리아를 앞세운 수연을 용서하는 것이며 그것은 곧 그녀에 의지한 자신을, 나아가 자신을 속인 누군가를 용서하는 일일테다. 그러고 보면 가짜가 유용할 때가 있다. 인간은 모두 떠나야만 혼자임을 깨닫는 존재들이기에. 거짓을 확인해야 진실을 깨닫는 습관이 있기에.

Gate 7 ... 오해는 설득의 배경 「괴물을 위한 변명」

나는 이 작품을 <현장 비평가가 뽑은 2010 올해의 좋은 소설>이라는 소설집에서 만난 적이 있다. 그때의 기억은 단연 많은 작품들중 가장 참신함으로 남았다. 달랐기에 선뜻 이해하기도 어려웠다. 이렇게도 소설이 될 수 있구나...이야기라는 것이 자체 생명성을 가지고 진화한다는 생각을 갖게한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실제소설과 소설의 작가를 주인공으로 한다. 앞선 작품 「마녀의 스테레오타입에 대한 고찰」에서도 보았듯이 작가는 한 가지 고착된 생각을 추적해 그 허점을 자신의 소설 실마리로 끌어들이는데 탁월한 재능이 있는듯 하다. 작가는 메리 셰리의 소설 『프랑켄슈타인』을 분석, 재해석하는 과정을 서사로 이끌어 가면서 마녀처럼 프랑켄슈타인이 괴물로 인식되기까지의 그 변질된 진실을 허구로 구성해낸다. 그런데 마찬가지로 괴물에 대한 오해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사이 중요한 인간의 역할이 있었다. 즉, 괴물이라는 환상에 대한 개념 사용여부와 그 목적및 이용행태는 모두 인간의 몫이었다는 것.

첫 번째는 이야기의 전승과정에서의 진실의 누락및 수정 여부를 추적, 질문한다. 이른바 '카더라'통신으로 서술된 괴물이 빅터에게, 빅터가 월턴 선장에게, 선장이 사빌부인에게, 사빌부인이 메리  셀리에게, 셀리여사가 우리에게....그리고 마지막 작가가 나에게... 그리고 두 번째는 허구의 절정에 빅터의 동생 에르네스트를 내세운다. 작가의 분신으로 여겨지는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동생은 형의 괴물창조 동기에 대해 신이 부여한 정체성 외에 또다른 자아, 즉 형의 광기와 죄의식, 공포와 분노, 절망의 총체가 투사되었음을 주장한다. 박사의 괴물적 자아가 괴물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주장은 곧 인간들, 우리의 괴물은 무엇이냐고 묻는 의미심장한 설득장치로 여겨진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그동안 보아온 프랑켄 슈타인이라는 괴물이 결국 우리안의 온갖 추악한 욕망과 허영, 광기의 조각들을 한데 묶어놓은 또 다른 나의 집합체였음을 환기하는 것 아니겠는가. 이 작품을 덮으면서 문득 작가의 괴물은 소설이라는 문학으로 포장하였구나 하는 생각이 소름끼치게 전해졌다. 그의 변명은 결국 괴물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것...아니었을지

Gate 8 ... 예술로 사기치기 「쉿! 당신이 책장을 덮은 후……」

분리수거된 쓰레기의 재활용장과도 같은 이야기였다. 앞선 이야기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총출동해 갑론을박을 펼치는 이야기는 어느 이벤트 행사장에서 해외유명 영화나 광고, 다큐에서 뽑은 명장면들로 다시 재구성된 편집영상물과도 같았다.

퀴르발 남작의 성에 모인 주인공들은 자신의 캐릭터를 십분 살려 의미심장한 대사를 쏟아내고 그와중에 시체조각들을 발견해 한데 모아놓는다. 여기서 작가는 세상에 떠도는 이야기 조각을 꿰매어 자신만의 새로운 이야기보따리로 만들어 내는 자신이 소설하는 방식을 우리에게 내비친다. 사체의 조각들이 짜맞추어 온전한 사람의 형태가 이루어질수록 이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괴이한 형태가 되지만 그것들은 또 직소퍼즐처럼 아구가 딱딱 맞아 떨어지는 것이다. 마치 자신의 소설들처럼. 홈즈는 발견된 사체조각의 숫자에서 자연계의 일반법칙을 설명하는 피보나치 수열을 발견해내는데 이것은 가장 조화롭고 아름다운 황금비율이라 극찬하기까지 한다. (이것은 자신의 소설이 완벽하다는 이야기?) 더불어 발견되지 못한 제 8항(21)에서 제외된 두조각, 즉 머리와 성기는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는 탐정의 센스까지 발휘한다. 퀴르발 남작이 오픈하라고 한 자신의 책장 너머엔 아마도 중성이 아닌 여성, 남성의 독자들이 우르르 모여있지 않았을까. 작가는 허구라는 안전그물안에서 자신의 의문점을 마음껏 풀어헤쳤듯이 독자인 우리도 자신이 조작한 허구안에서 무한한 호기심을 펼쳐보라는 메시지로 생각된다. 독자인 우리들중 누군가는 이 작품을 이야기 조각삼아 자신처럼 이야기를 재생산할지 모를 일이다. 영특하고도 재치있는 미덕이 아닐 수 없다. 희대의 사기꾼의 기술력이 전수되는 순간임에 틀림없다. 한국문학에서 역사적 순간이라 해야 할까.


비상구로 돌아오다

이야기를 추론해 내는 과정 자체가 소설인 작품을 신나게 독파했다. 읽는 즐거움은 물론 생각의 재미를 선사하는 독특한 독서였다. 창의적 영재만들기 프로젝트에 출품된 발명품을 만난 듯하다. 새롭지 않다면 신인의 의미가 없고 신인이라면 새롭지 않고서는 주목받기 힘들 것이다. 이 작가는 이야기를 꾸며내는 생산자 입장에서의 소설 말고도 다른 형태로 인간에게 전달되어온 수많은 이야기에 투사된 인간의 욕망을 파헤치는 것이 자신이 할 일이라 생각하는 것 같다. 그것이 곳 자신이 알고 싶은 인간을 이야기하는 방법일 것이다.

그동안 수많은 원작은 인간의 편의와 욕심이 투사되어 변형되었다. 하지만 진심은 왜곡되어도 진실이 될 수 있는 것이 현실인 것이다. 오늘을 사는 것은 옛날 이야기의 교훈을 얻고자 함이 아니다. 변형되어 도착한 이야기에서 조차 또 다른 나를 발견하고 의문을 나누는 일일 것이다. 그것이 서로 인간됨을 고찰하고 그럼으로 위로하는 방식일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이야기야말로 또 다른 내일에 도착하여 내일의 진실이 되지 않을까. 진실을 변형하면서도 진실은 발전해 나가는 것이 아닐까.

스테레오 타입은 인간의 편의와 질서를 위해 고안된 장치이다. 그러나 스테레오 타입이 인간을 옥죄고 불편하게 할 때 일상의 그림자는 이야기로 탈출을 시도한다. 인간은 자신들이 만든 스테레오 타입이 힘겨워 이야기를 생산하고 그속에서 비상구를 찾는다. 작가가 개방한 여덟 개의 비상구는 다시 우리 삶의 스테레오로 돌아오는 소중한 환송로였다. 다시 비상구가 열릴 날을 기대해 보겠다. 그땐 출구와 입구가 동일한 한 개의 게이트이길 바래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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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준의 한국미술사 강의 1 - 선사 삼국 발해 유홍준의 한국미술사 강의 1
유홍준 지음 / 눌와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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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것과 느끼는 것

나는 오랫동안 박물관(Museum)기획으로 밥을 먹었다. Muesum 의 영역에는 크게 역사관과 기념관, 사료관을 비롯해 과학관, 홍보관, 비지터 센터등의 하위 분야가 있다. 그런데 돌이켜보니 공모를 하면 이상하게도 역사관련 분야에서는 성적이 좋지 않았고 과학관, 홍보관 쪽은 승승장구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성적대로 전문분야가 정해지는 꼴이었다. 역사를 특별히 미워하지 않았음에도 과학을 남달리 사랑하지 않았음에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나름대로 원인을 분석해보면 거기엔 늘 사람이 있었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지만 역사박물관을 하나 건립하려면 그 분야의 역사학자와 고미술 전문가에게 시공하는 순간까지 자문을 받아야 한다. 나는 계획초기 단계에서부터 그들과의 만남이 순조롭지 않았던 것이다. 미술사 전공자들의 자존심과 역사학자들의 자긍심과 늘 싸워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매번 달라지는 Museum의 주제에 따라 해당분야의 다양한 전문가들을 만나왔지만 그들만큼 고집이 세고 생각을 바꾸지 않는 사람들은 본 적이 없다. 어쩌면 내 일이라는 것이 그들이 가진 전문적인 지식과 일반 관람객이 느끼는 전시를 이어주는 가교의 역할임에는 분명했지만 그들 앞에서만 서면 나는 역사도 미술도 뭣도 모르면서 가벼운(?) 디자인으로 유물을 망치는 기획자가 되어 있곤 했다. 그래서 내게 있어 역사, 그중에서도 특히 고미술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소통 불가한 대화상대'라는(그분들께는 죄송하지만) 낙인이 찍힌 지 오래되었다. 그런데 부끄럽지만 이번에 유홍준의 『한국미술사 강의 Ⅰ』를 접하면서 어렴풋이 그들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왜 이런 책이 그때는 없었는지 모르겠다. 나도 그들 앞에서 망신당하지 않기 위해 나름 열심히 공부를 하고 미팅에 임했는데...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그때 시험치듯 내용을 암기한 것이지 전시물이 될 뻔했던 그 유물들을 한 번도 제대로 느껴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아는 것과 느끼는 것. 이 책은 우리에게 그 차이를 시원하게 한방 가르쳐준 책이었다고 할까.

이 책은 저자의 소개대로 '한국미술사 입문사'를 표방하고 있다. 말 그대로 발을 처음 들여 놓음에 있어 부담스럽지 않은 개론적 지식과 통사通史를 풀어 놓았다. 한번 마음먹기 어려워서 그렇지 실은 시작이 반인 분야이기도 하다. 그런데 어쩌면 우리같은 비전공자로서 일반 독자들은 이 책이 시작이자 마지막이 될 가능성이 많을 듯하다. 이로써 넘치게 충분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단답형 수준의 단편적인 지식들이 한자리에 총체적으로 모인다는 기념비적 의미는 물론이고 대외적으로 보아도 화보의 질이나 부록으로 첨부된 요약노트까지 어디 한군데 빠지는 곳이 없어 그 소장가치도 뛰어나다. '내가 꼭 제대로 정리를 하고 말겠다'는 학자로서의 결연한 의지가 페이지마다 결결이 느껴졌다. 시작은 학생들의 요구로 부터였다 하지만 기왕 칼을 빼어들었으니 그의 바램대로 앞으로 '통일신라, 고려시대'와 '조선시대'까지 3년 안에 정리된다면 한국미술사에도 커다란 분기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큰일을 하셨다.

가을이 시작되자 마자 이 책을 선물받았다. 지난 두주 가량 소설을 읽다가 마음이 멀어지면 지나간 강의노트를 들쳐보듯 책을 집어 들었다. 이 책은 쉬이 넘겨가며 서두를 필요도 없지만 편한대로 한번 마쳤다고 덮어둘 책은 아니다. 머리가 복잡하면 텍스트를 외면하고 사진만 보아도 마음이 정돈되는 일종의 심리안정격의 뉘앙스를 가진 서적이다. 아주 아주 오래전 같은 나라에 살았던 같은 민족이 만들었다는 예술품이다. 그들이 붓을 든 것을 본 적이 없으며 그들이 칼을 만지는 걸 본 적이 없으나 이상하게도 살아가는 삶의 기운이 느껴진다. 20세기 프랑스의 대표적인 미술사가인 앙리 포시옹은 '삶은 형태이며, 형태는 삶의 방식'이라고 했던가. 포시옹은 미술가로서의 삶을 형태라는 독립적 가치로 보고 결국 미술사 연구는 형태의 삶을 찾아내는 것이라 하였다. 형태를 단순한 대상으로서의 존재가 아닌 변화가능하고 무한대로 증식할 수 있는 생명성을 띤 가능성의 존재로 생각한 것이다. 그렇다면 형태의 변화를 알고자 하는 것은 굉장히 미래적인 욕구이며 과정 또한 역동성을 수반한다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동안 국사시간에 삼국시대 고분의 형태와 신라시대 불상의 외양적 이미지를 주어진 대로 정지된 존재로서 감상하고 암기해왔다. 마치 과거 어느 시대에 잠시 발을 멈추고 한 장의 스틸 컷을 박아 넣듯 그렇게 차곡차곡 데이터베이스를 쌓아 온 것이다. 그러므로 다시 그 사진을 찾으려면 붙박이 사진을 떼어내듯 정확하게 그 부분만 뽑아야 했었다. 단순해 보이지만 세월이 지나 우린 앞뒤 맥락없이 다시 그 사진을 스스로의 힘에 의해 찾기는 불가능해 보인다. 이 책은 어찌 보면 그동안의 우리 역사와 미술 교육이 참 획일적이고도 무책임했구나 하는 생각을 들게 한다. 이 책에선 예술품이 가지는 형태를 정사진이 아닌 움직이는 활동사진화 하는 신비한 힘이 있다. 그리고 그 형태를 다시 명상화, 감성화 하는 텍스트의 진심이 있다. 분명이 살아있다고 느껴지는데 나는 오히려 차분해지는 것이다. 생명의 신비란 그런 것일까. 살아있는 것을 지켜보고 생명의 힘을 느끼는 것은 숨막히는 일일지 모른다. 이 책은 분명 형태가 가지는 '생명의 신비'와 그로인한 '정적인 감동'을 보여주고 가르쳐준다.


발견의 기쁨

책은 선사시대부터 삼국시대, 발해까지 시대별 미술의 특징을 역사 속에서 서술하고 있다. 모든 시대에 공통으로 서사를 관통하는 두 가지 키워드는 '관계'와 '미학'에 있다. 즉, 공히 각장에서 중국과 일본과의 교류를 상세히 밝히고 있으며 하나하나의 예술품에 대한 미학적 표현을 곁들였다는 것이다. 어디서 누구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며 그것은 어떻게 발전했는지를 소상히 알려주면서 독창적인 예술적 가치를 저자만의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와 미술 각 분야를 아우르는 이 설명방식은 어떤 부분에선 철학적이기까지 하다. 나는 특히 작품 하나를 공들여 표현해내는 풍부한 언어의 유려함과 그 전문성이 가장 인상깊었다. 우리는 그동안 유물을 머리로만 기억한 것이지(그 기억도 이제 희미하지만) 마음으로 느낀 적은 없지 않은가. 그동안 내 눈으로 본 것들이지만 다시 가슴으로 볼 수 있도록 도와준 감성적 가이드였다.

선사시대에서 발견한 우선된 느낌은 '추상성'이었다. 잘 알려진 신석기 시대의 빗살무늬토기를 비롯해 타래무늬, 번개무늬의 토기를 나란히 배치해 바라보면 그것은 의미없는 직선과 곡선의 반복이 아니라 그 반복에서 전해지는 生의 리듬과 또렷한 패턴이 있다. 특히 타래무늬, 번개무늬 토기를 바라보면 그것을 제작한 사람들이 어떤 신명이나 활기를 지닌 채 작업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책에는 신석기인들이 사물을 '의식'으로 파악했기에 부호화, 개념화, 상징화하려는 경향이 추상무늬로 나타난 것이라 설명한다. 왜 나는 빗살무늬의 직선이 생선뼈를 상징했으며 생선뼈는 정복의 의미로서 사냥과 주식의 풍요로움을 소원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일까. 어디선가 한번은 들었을지 모르나 전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신선함이었다. 삶의 형식이 예술적 태도를 지배한다는 진리를 새삼 깨우쳐준 무늬들이기도 했다.



<잔무늬거울. 청동기. 지름 21.3cm,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소장>


이 추상성이 결정타를 날린 것은 청동기 시대의 잔무늬거울이었다. 페이지를 넘기다가 나도 모르게 소름이 끼치던 순간이었다. 처음 보는 유물이기도 했고 무늬의 정교함이 아주 편집적인 집요함을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청동거울은 얼굴을 들여다 보는 용도가 아니라 제관이 햇빛을 반사시키는 용도였다. 무당의 놋거울처럼 제관의 상징적 지물이라는 것이다. 2400년 전 한반도의 청동기 시대 어느 장인은 지름 21.1cm의 원에 1만3000여 개의 선과 100여 개의 동심원을 0.3㎜ 간격으로 그려낸 것이다. 확대경이나 초정밀 제도기구없이 어떻게 이토록 복잡하고 고난이도인 무늬를 그려낼 수 있었는지도 신비스럽고 이등변삼각형과 동심원의 반복이 이루는 패턴의 조형미는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할 정도이다. 전체적인 구도상으로 보았을 때도 중앙의 원을 중심으로 3단계로 확산되는 레이아웃에 대칭성을 이루는 안정감이 손이 아닌 컴퓨터를 사용한 느낌이 들 정도로 정확하고 매끄럽다. 잔무늬거울의 무한대 삼각형이 빛을 받아 반짝이는 빛무늬를 퍼트릴때 사람들은 어떤 환상의 세계를 보지 않았을까 싶다. 오늘날 잔무늬거울의 제작 비밀을 풀기위해 주석과 구리의 비율, 거푸집의 재질, 문양 제도 방법 등을 연구한다고는 하나 아직 시원스레 비밀을 풀지 못했다고 한다. 인간의 예술적 의지라는 것이 어쩌면 시대와 환경과 지식, 조건을 훌쩍 뛰어넘는 신성한 영역이라는 생각이드는 작품이었다.




< 손잡이잔. 가야. 국립김해박물관 >



< 손잡이잔. 가야. 개인소장 >


삼국시대로 넘어와 나를 멈칫하게 한 것은 고구려, 백제, 신라도기를 제치고 현대미가 물씬 풍겨 나오던 가야의 손잡이잔 이었다. 세계문명사에도 1500년 전에 질그릇으로 다양한 손잡이잔을 만들어 사용한 나라는 없다고 했다. 오늘날 커피잔은 물론이고 와인잔, 호프잔, 머그컵을 연상시키는 디자인이 실은 우리나라가 최초였다는 것이 놀라우면서도 뿌듯한 순간이었다. 다양한 모양의 잔으로 미각을 느낀다는 것은 다양한 미감美感을 음미하는 것이다. 당시 음료의 종류가 얼마나 다양하였을까 마는 담아내는 음료에 따라 컵이 달라진 것이 아니고 술과 물을 이토록 다양한 컵을 이용해 마셨다는 사실 자체가 가야인들의 심미안의 다양성을 상징하는 극적인 예 일 것이다. 지금으로 치면 영국 황실의 커피잔을 생각해보자. 인간의 조형수준은 곧 높은 생활수준을 의미하지 않을까. 가야의 손잡이 잔을 보면서 당시 왜와 밀접한 교류를 하는 가야국의 왕족들이 그려졌다. 한 잔의 차와 한모금의 물을 마셔도 저토록 세련된 손잡이잔에서 그 기품과 세련미를 잃지 않았던 우리의 자부심을 엿볼 수 있었다.


막연함의 구체화


 
< 금동해무늬맞뚫림장식. 고구려. 조선중앙역사박물관 소장 >


우리는 흔히 금속공예의 정점을 신라시대로 익히 알고 대표적 작품들을 머릿속에 그려볼 수 있다. 특히 신라의 금관은 세계역사상 어느 나라의 왕관보다 화려하고 완벽하며 보는 이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믿기지 않는 절정의 완성미를 선사한다. 그런데 이번 책을 읽으면서 새롭게 발견하게 된 것은 고구려와 백제의 말로만 듣고 외우던 '강인함'과 '우아함'의 실제였다. 고구려의 금관에 사용되던 장식을 보면 강인하다는 것, 강렬하다는 것의 막연한 미사여구의 구체성이 여실히 드러난다. 내 눈길이 머물렀던 고구려의 금동관 장식 은 단연 불꽃무늬였다. 중심에는 원에 둘러쌓인 삼족오를 기점으로 용의 용트림과 봉황의 날개짓이 불꽃으로 형상화한 곡선의 디테일을 보라. 속도감은 물론이고 태양을 향한 역동적 에너지가 확실하고도 진취적인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사람으로 친다면 카리스마 있으면서 이목구비 또렷한 수려한 외모를 떠올리게 한다. 무늬의 조형미에서 어떤 음악적인 기운도 묻어난다. 이태리 명품 브랜드의 페이즐리한 문양이 떠올라 살짝 흥분되기도 했다. 물론 꽃이나 불꽃으로 된 단순한 시도였지만 오늘날 식물과 동물의 무늬를 패턴화하는 방식의 시초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 상아바둑알과 바둑판 바둑통. 일본 도다이지 쇼소인 소장 >


고구려가 고분벽화, 신라가 금속공예라면 백제의 고분미술은 도굴로 인해 그 결과가 빈약하다는 사실을 알기는 했지만 이 책을 읽기전까진 일제가 그토록 지속적으로 도굴을 해왔다는 사실을 실감하진 못하였다. 백제는 개방적인 나라였기에 일본에 불교를 전하고 공예품도 많이 하사하였다. 백제왕이 왜왕에게 보내준 선물을 도리어 자신들에게 바친 선물이라 칭하며 식민사관화 하였다는 것은 치졸하기 그지 없으며 참으로 파렴치한 행위였다. 한눈에 보아도 일본풍임이 감지되는 상아바둑알과 바둑판 이 알고 보니 백제 의자왕이 보내준 선물이라는 것 또한 가슴 아프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아름답다는 바둑판과 바둑알이 일본에 소장되어 있다는 것도 그것을 보고 우리 것이 아닐 것이라 생각한 선입견도 울컥하던 순간이었다. 검은색과 빨간색의 바둑알에 새겨진 흰새만 하더라도 나리타 공항에서 판매되는 기모노 의상과 기념품을 연상시키기 충분했다. 새삼 당시는 따라가는 입장에서 이러한 문화와 문화재의 중요성을 일찍부터 통렬하게 인식하여 우리것을 자기것화하는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그네들이 대단해보였다. 우리가 중국에서 보고들은 문화를 받아들여 우리 나름의 독창적인 문화를 발전시켰듯이 일본도 우리 것을 빼앗아 후세에 자기 나름의 우수성을 입증하지 않았던가. 미국의 어느 쇼핑몰 푸드코트엔 김밥과 우동과 함께 비빔밥이라는 메뉴도 Japanese에 분류되어 함께 팔리고 있는 것을 본적이 있다. 이 책은 문화재를 통한 한국인의 정체성을 깨우치는데도 어지간한 자극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절대감의 승리


 
< 금동신발. 신라 5세기. 국립 경주박물관 소장 >


신라의 고분미술에서는 금관이 주를 이루나 나는 특이하게도 왕릉급 고분에서 출토된 금동신발을 발견하곤 이들의 장려壯麗취미가 어디까지 였는지 비로소 궁금해지기도 했다. 금구슬의 현란함에서 일종의 자신감을 엿보았다면 금동신발 의 정교함은 매니아적인 호기심을 느낄 정도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중앙 육각의 무늬안에 동물과 인물의 형상이 패턴화되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우리가 잘 아는 페르시안 양탄자를 떠올리기 충분하다. 금관, 금허리띠에 이어 신발의 밑창에 까지 당시 유행한 타국의 사조가 반영된 것을 보면 추구한 예술성의 경지가 상당히 혁신적이며 도전적으로 느껴진다. 나는 직장 다닐 때 좋은 광고는 좋은 광고주가 만들고 디자인 좋은 차는 윗선에서 간섭하지 않은 차라는 자조적인 이야길 밥먹듯이 들었다. 즉 아무리 참신하고 훌륭한 디자인이라도 그것을 선택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택해주지 않으면 디자인은 발전이 없다는 것. 페르시안 문양을 신발에 적용한 디자인 의도보다 그것을 지시했거나 수용한 관계자들이 자랑스럽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는 지금 신라시대의 윗선보다 한참 떨어지는 안목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실제로 한국의 디자이너들이 누구보다 독창적이고 감각있다는 말을 많이 들었지만 오랜 관료주의와 무사 안일주의는 오늘날 자동차번호판처럼 세계적으로 보았을 때 중간이하 정도의 보편성을 뛰어넘지 못하는 결과를 양산해내지 않았던가. 우린 결코 색감이 없고 조형감각이 떨어지는 나라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이 책을 보면서 다시금 확인한다.

이 책에서 내가 가장 감명받은 것은 바로 백제의 석탑과 백제의 향로였다. 흔히들 백제미의 대표성으로 알고 있는 '우아미'라고 하는 것은 어쩌면 공식과도 같은 진부함의 표현일 지 모른다. 다시 보는 백제의 석탑은 그 절제가 선사하는 단정함에 있어 어떤 절대성의 가치에 천착했다는 느낌을 받는다. 책에는 정림사 오층석탑의 아름다움의 핵심은 체감률에 있으며 이 같은 비례감각이 우아한 건축물을 탄생시켰다 정리하고 있다. 소름끼치는 비례감은 뒤편에 등장하는 불상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디테일이나 조형미보다는 절대비율에서 오는 안정감이 가시적인 웅장함보다 더 큰 매력으로 다가온다. 그리곤 그 와중에 적당한 기울기를 지닌 추녀끝 곡선은 절대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명품의 그것처럼 존재감을 입증하고 있다. 나는 절대감을 자극하는 비례나 절제된 디자인을 볼 때 그것이 우아하다고 생각하진 않는 편이다. 오히려 완벽이 주는 절대성은 심리적인 폭력성을 내포하고 있다고까지 생각한다. 오늘날 여심을 선동하는 많은 명품의 디자인을 보면 그 단순미가 어떻게 사람의 심미안을 만족시키는지 쉽게 이해될 수 있을까. 그것은 발칙한 도전에 가깝다. 아무것도 안하면서 그 자체로 보여줄 수 있는 자신감이고 상대의 숨을 멎게도 할 수 있는 내공인 것이다.





< 백제 금동대향로. 백제. 높이 64.0cm,  국립부여박물관 소장 >


엊그제 2010 세계백제대전이 화려하게 막을 내렸다. 수도권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대전, 충청권에서는 큰 행사였다. 개막식과 폐회식 행사 장면을 보면서 익숙한 조형물이 제일먼저 눈에 띄었다. 바로 백제 금동대향로 였다. 그뿐 아니라 행사에서는 백제금동향로 속 5악사를 불러내어 그들의 악기와 음원, 복장을 그대로 복원해 공연을 펼치기도 했다. 금동대향로의 설명을 읽어내려 가면서 또 한번 나의 무심함을 깨우치기도 했다. 그저 꽃봉우리를 형상화 한 것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산봉우리엔 피리, 비파, 거문고, 북등을 연주하는 다섯명의 악사와 봉황, 용은 물론 여러 날짐승이 포진해 있었던 것이다. 공예품에서도 드라마같은 종합연출을 담아내는 예술혼의 경지가 어쩐지 애틋해 보였다고나 할까. 3차원 조형물에 단순한 이미지가 아니고 복합적인 상황을 입체적으로 구현해 내었다는 것은 예술품을 하나의 무대로 생각했다는 뜻과 같을 것이다. 이것은 2차원 도화지에서도 화가의 실력에 따라 그 수준차가 천차만별인 과제이다. 담아낸 이야기를 보면 신선이 살고 있는 영생의 세계에 음악이 울려 퍼지고 봉황이 날아드는 몽환적 환타지를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창의력과 기술력이 조화된 예술품으로서 두고두고 자랑할만하다. 악사의 표정과 악기의 디테일에서도 완성도가 상당하여 아마도 이 작품을 제작한 예술가는 일생일대의 명작을 남기었음에 틀림없다. 저자의 말마따나 그 절정에서 딱 멈추어 버린 백제문화에 대한 아쉬움과 말로만 듣던 백제미에 대한 경의가 절로 끄덕여지는 순간이었다.


도전하는 마음



< 금동관음보살 입상(뒤). 백제. 높이 21.1cm, 국립중앙박물관소장> 


< 나한 두상. 백제. 높이 11.5cm, 국립부여박물관 소장> 
 

불상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나라의 불상은 중국에 동참한 후 일본에 전파하여 동아시아 불교미술의 흐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동안 주로 불상을 감상할 때 표정이나 미소위주로만 의미를 분석하고는 했는데 이번기회에 불상을 보는 법을 제대로 알게 되었다고 할까. 저자는 백제보살상의 전형이면서 백제미술의 진수라며 금동보살 입상들을 설명해 주었다. 그중 압권은 '미스백제'라 불리는 금동관음보살입상 의 뒷태였다. 비례도 세련되었지만 뒷모습에 표현된 의상의 실루엣과 가운데 꽃무늬를 중심으로 X자의 패턴을 강조한 드레시한 라인은 요즘말로 '간지짱'이라 할 수 있겠다. 각종 시상식에 등장하는 여배우의 등파인 드레스가 떠오르기도 했다. 백제 불상은 그 표정에서도 신라 이상의 다양성을 표현하고 있었는데 그중에 부여에서 출토된 나한 두상 은 리얼리즘의 정수라 생각되었다. 입을 벌리고 있는 불상은 처음이기도 했고 수도자의 내적인 고통이라는 의미로 표정을 음미하니 정지한 돌이라 하기엔 미안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대부분 신라의 불상에서 느껴진 편안한 미소와 상반되면서 백제 장인의 기술력에도 엄청난 평가가 있어야 할 것으로 생각되었다.


 
< 방형대좌 금동미륵반가사유상. 삼국 >         < 자코메티. 걷는 사람. 1960>


신라의 불상중에는 반가부좌를 튼 자세에서 주로 명상에 잠긴 듯한 금동미륵반가사유상들이 아무래도 정이 갔었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생각하는 부처' 특유의 고뇌를 신비하게 표현했다는 점에서 방식이나 기법이 독창적으로 느껴진다. 그런데 그중에 전체적 이미지가 기존의 사유상과는 달리 유달리 추상적인 불상이 있었는데 방형대좌 미륵반가사유상 이 그 주인공이다. 흡사 스위스 출신 현대미술의 거장 자코메티의 청동조각상 '걷는 사람 (L’homme qui marche, 1960)'에서 느껴지는 고독함에 단순화한 추상미가 더해져 묘한 아름다움을 자극하고 있었다. 여느 불상에서 시도되던 기법을 사용하지 않은 불상을 보면 파격을 시도한 차별화에 비록 후세에서라도 달려가 박수를 쳐 드리고 싶다.

상대적으로 부족한 발해의 유물들 중에는 생활도기로 알려진 구름모양도기 쟁반 이 기억에 남는다. 구름무늬를 현대적 감각으로 유려하게 도안한 쟁반의 크기는 86cm로 쟁반치고는 대형사이즈다. 전문가들은 고구려 풍과 중국의 영향을 받아 잘 융화되었다고 극찬했다. 내가 주목한 것은 자칫 심심할 수 있는 생활도기에 심미안을 발휘하여 대칭의 미를 극대화한 부분이다. 나는 대칭의 비례를 가진 상품을 선호하지는 않지만 시각적 즐거움이 주방용품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잘 알고 있다. 어떻게 보면 술안주를 담아내는 그릇을 연상할 정도로 곡선이 재미나고 자극적이다. 구름이라는 네이밍이 없었다면 네잎클로버나 호두 등 다양한 자연소재를 단순화했다는 생각도 들고, 현대의 기업마크나 엠블렘에 적용할수 있을 정도이다. 이탈리아 산업디자이너인 필립스탁이나 알레시의 주방기구와 나란히 디스플레이 한들 빠지지 않을 디자인감이다.


 
< 구름모양도기 쟁반. 발해. 너비 86.0cm > 


 
< ALESSI. Babyboop, Ron Arad > 


삶이 무늬로

나는 막연히 알고 있던 고구려의 강인함, 백제의 우아함, 신라의 화려함이라는 고전적 가치를 언어나 지식이 아닌 마음과 감성으로 느낄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어 마음이 부자된 기분으로 독서를 마치게 되었다. 세계문화사의 시각에서 보면 그 민족의 고유한 정서는 고대국가를 경험하면서 세련되어 진다고 한다. 즉, 고대국가를 거친 민족과 그렇지 않은 민족간의 정체성의 차이는 그 깊이와 양적인 면에서도 확연히 차이가 나는 것이다. 이 책은 한 민족의 정체성이나 자긍심도 양적, 질적으로 확산될 수 있다는 사실을 차근차근 알려주었다. 우리의 미적가치가 무자르듯 단지 저 세단어로 축약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 고대국가에서 존재했던 분명한 가치를 다시 되새김하며 그것을 발견하는 일은 혹시 내재해 있을지 모를 문화적 열등감이나 사대주의를 해소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기엔 마땅히 정당하다 생각한다.

미술을 보고 역사를 추정하고 역사에 따라 미술이 변화했음을 배우는 유익한 시간이었다. 이 책은 학부모로서도 아이들을 지도하는데 유용한 팁을 제공할 것이라 믿는다. 박물관에 손잡고 가자하면 숙제처럼 입이 나오는 아이들이 많은 실정이다. 우리 아이들이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무슨시대 무슨자기, 무슨 금관...이렇게만 달달 외우고 쇼케이스속의 유물로만 기억한다면 얼마나 슬픈 일인가. 느낀 사람만이 감정을 설명할 수 있다. 이 책에서 저자가 우리에게 전하려고 했던 역사속에서의 '관계'와 예술로서의 '미학'을 모두 기억할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지금의 이 그리운 감성만은 아이들에게 잘 전해주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세상에 유인원이 등장한 것은 500만 년 전이고 한반도에서 사람들이 빗살무늬 토기를 만든 시기는 기원전 4000년 무렵 부터이다. 빗살무늬 하나만 해도 약 삼 천 년 정도 변하지 않았던 양식으로 상상할 수 없도록 오랜세월의 결과물이었다. 기껏해야 백년도 살지 못하는 우리네 삶이 빗살무늬의 빗금 한줄만도 못하게 느껴지지 않는가. '삶은 형태이고 형태는 삶의 방식'이라는 명제가 자꾸 떠오른다. 미술사가 뿐 아니라 일반인으로서 우리 삶도 특정한 양식과 반복되는 패턴을 지니고 있다. 그 지겹도록 일상적인 형태가 결국 훗날 어느 시기에 빗살이 아닌 어떤 무늬로 남게 되는 것이다. 얼마나 지나고 또 얼마나 반복해야 하나의 무늬가 탄생되는 걸까. 그러고보면 인류의 미술사는 자신들만의 독특한 무늬를 만들어온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며 후세 사람들은 열심히 그 무늬를 이해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오늘의 더 나은 무늬를 창안해 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제 내 삶의 무늬를 떠올리며 더 나아가 우리나라의 다음 무늬를 기대해 보겠다. 부디 인상적이고도 아름다운,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무늬라면 좋겠다. 한점, 한줄도 되지 못할 우리네 삶의 형태도 고스란히 스며들어 빗살이 무늬가 되기까지 얼마나 울고 웃었는지 누군가는 기억해 준다면, 정말 좋겠다.  

우리 것은 좋은 것이 아니라 대단한 것이었다.
산다는 건, 좋지는 않지만 어쩌면 대단한 것인지도 모른다.


 <덧붙임>

책에서의 눈부실만큼의 고화질 화보에 비하면 인터넷 이미지들은 그 반절도 좇아갈 수 없는 표현의 한계가 있었다.
각 지역의 국립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유물 이미지를 중심으로 참고화 하였기에 질적으로 감상에는 부적절함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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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01 22: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1-01 22: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1-03 20: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빵과 장미 문학동네 청소년문학 원더북스 13
캐서린 패터슨 지음, 우달임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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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돌멩이, 하나

미국 워싱턴을 여행하는 한국인이라면 아마 링컨기념관과 근처 한국전쟁 참전용사 기념공원을 빼놓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기념공원엔 우비를 입은 참전군 동상 옆에 검은색의 화강암 기념비가 50m 가량 거대한 벽화처럼 세워져 있었다. 사람들은 장병의 이름은 물론이고 신기하게도 세세한 얼굴까지 그려져 있던 기념비 앞에서 하나같이 숙연한 표정을 지었다. 돌에서도 표정과 숨결이 살아 있다니...나 역시 기념비에 새겨진 'Freedom is not free'라는 문구를 아직까지 기억할 정도로 내심 저릿했던 순간, 단단하고도 오래된 뜨거움이었다. 바로 행군하는 병사들의 살아있는 듯한 표정의 동상을 조각하고 검은색 기념비를 상징적 조형물로 완성시킨 프랭크 게일로드(85)는 이 작품에 등장하는 화강암의 도시 베러 출신의 예술가였다. 그는 2차 대전 참전 용사이면서 소설 속 제르파티씨처럼 베러의 유명한 조각가였다. 워싱턴의 참전 기념비 이후로 한국의 많은 기념관에서는 도입부 전시물로 검은색 화강암에 연혁뿐 아니라 다양한 이미지를 그려 넣은 조형물을 하나의 공식처럼 계획하고는 했다. 이 작품을 덮고 나는 내 묘비에 어떤 문구를 써야 하는지 잠시 생각에 잠기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장미꽃과 같은 그림도 새길 수 있을지 상상해 보았다. 검은 돌에 새겨지는 하얀 꽃이라...그 과정이 더할 수 없이 차갑고 시리지만 그 결과만큼은 무엇보다도 뜨겁지 않은가.

그랬다. 이 작품은 마지막이 뜨겁게 달아 올랐다. 단단하고 찰진 돌멩이 하나가 오랜 시간 화덕에 구워져 꽁꽁 얼은 겨울손을 뭉근히 데워주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 옹골찬 뜨거움은 찬찬히 덥혀온 속도 그 몇 배로 가슴에 남아 자신의 자리를 표시하고 말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빵과 장미』는 그렇게 뜨거운 돌멩이 자국 하나를 남기었다. 미국 아동문학 발전에 크게 기여한 작가에게 수여한다는 '뉴베리상'에 대해 몰랐지만 『빵과 장미』는 분명 많은 이의 가슴에 돌멩이 한 개 만한 화덕 한자리를 기꺼이 내주는데 기여했다.


빵과 장미보다, 사람

요즘 언론에선 연일 프랑스의 파업사태를 발 빠르게 보도하고 있다. 그네들의 파업을 보면서 언젠가 프랑스는 '매일 파업하는 나라'라는 프랑스 유학생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런데 또 프랑스 시민들은 노동자의 파업에 굉장히 관대해 그로인한 공공 서비스에의 불편을 당연하게 감수한다는 그러므로 다같이 사회가 발전한다는 변론도 기억이 났다. 장미도 넘치면 향기의 진가를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우리보다 적게 일하고 더 많이 받으면서 빵은 물론이고 장미향기도 그윽할 것 같은 프랑스 아니던가. 지하철이나 버스가 중단되는 서울을 그리자니 그들의 태도는 참으로 신선했다. 그래도 역시 멀었다. 초유의 유혈사태는 물론이고 반복되는 구호, 관철되는 과정, 시민들의 불편...그 어떤 파업에도 불감해 진 현실이 우리 아니었나. 파업은 진부했다.

 
 
파업에 동참하는 시민행렬중 엄마손을 잡은 여자아이의 발걸음만이
내 발목을 잡았다. 아이는 하얀 손수건을 움켜진 채 손을 물고 있다.
훗날 파업을 추억하며 무엇을 떠올릴까.
핑크빛 소녀야, 너는 무엇이 두려웠던 거니. (2010,
프랑스)


작년에 내가 술장사를 할 때 그 지역에서 대대적인 화물연대 파업이 일어났다. 하루 종일 도시의 교통이 마비되고 사람들은 거리에서 술집에서 욕을 해대었다. 그런데 뉴스에 보도된 후 거리를 막아선 화물연대 주동자들이 파업을 마치고 우리가게에 들른 것이다. 조직의 우두머리 격인 사람들이라는 자칭소개와 함께 거나한 술잔치가 벌어졌다. 시간이 지나자 지인들과 부인들도 합석해 내일있을 파업을 같이 궁리하는 듯해 보였다. 부인들은 다소 진한 화장에 깔끔한 차림이었고 그녀들은 내일 새벽에 모여 전사적으로 남편들의 도시락을 쌀 것이라며 상기되있었다. 그들은 그렇게 파업기간중에 우리 가게에 자주 들러 그날 하루의 피곤을 달래곤 했다. 세상은 알 수 없는 것이다. 생존과 인권을 보장하라는 투쟁에 하루 종일 앞장선 사람들 덕에 우리 생계가 고만고만해진 날들이었다. 문득 같은 지역에서 시위하는 노동자들에게 그날 팔고 남은 전부의 빵을 지속적으로 제공했다는 전설의 빵집주인이 떠올랐다. 그래, 당신은 빵을..나는 술을...그렇게 자위해봐도 마음이 쓰라렸다. 그날 나는 한번도 본적이 없는 여성 노동자들의 인권을 유린하는 종류의 파업과 그들을 비교하면서 축제와도 다름 아닌 그들의 공동체의식을 내 생존과 바꾸었다.

언젠가 김훈의 칼럼에서 기자시절 시위현장에서의 점심시간은 고요하고 평화롭기까지 하다는 기사도 기억난다. 아무리 황사가 불어 닥쳐도 시위군중과 전경, 기자까지 제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밥을 외면하지 않는다고 했다. 철도 파업 시위대는 길바닥에 앉아 부인들이 싸준 도시락을 먹고 군중과 대치한 전경들은 된장국과 깍두기가 담긴 식판을 끼고 두 줄로 앉아 먹고 기자는 전경들이 밥을 먹는 거리 중국식당에 들어가 짬뽕국물을 마시며 기사를 작성한다고. 그 순간 각자의 고픈 배를 채워주는 각각의 도시락과 된장국과 짬뽕국물은 얼마간 역겹고 비루할지 모르나 세상 어느 누구의 밥상보다 위대해 보였음이다. 그렇다. 내 온전한 배고픔은 오로지 내 뱃속에 들어간 밥만이 해결할 수 있다. 내 목구멍을 통과한 것들에게만 유효하다. 어떤 시위나 어떤 진압을 뛰어넘는 가장 최고치의 서로에 대한 인권 존중이라는 점에서 그 어떤 파업의 구호보다 신선한 장면이었다.

이렇듯 나는 왜 파업의 정면보다는 측면, 뒷면에 자꾸 눈이 가는 것인지 모르겠다. 내게 있어 파업은 가보지 못한 군대만큼이나 해보지 못한 성역으로 남아 얼마간의 기회박탈에 대한 안도감과 잘 알지 못하는 심정으로서의 낭만이 뒤섞여 구경꾼 입장의 '진부함'이라는 건조성을 띄게된 지 오래이다. 그런데 왜 이리 파업 한번 해보지 못한 경력이 가슴을 콩닥거리게 하는 것일까. 이제 먹고 살기가 좀 나아진 세상에서 파업의 이야기도 식상한 컨텐츠로 전락한 오늘날, 프랑스 학생도 화물연대도 철도파업 시위군중들도 원하는 것은 오늘의 '빵'이 아니라 내일의 '장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나 역시 정작 코를 자극하는 빵의 향기는 물론 뇌를 자극하는 장미의 향기도 필요한 같은 입장이면서 그것들이 필요하다며 파업을 일으키는 노동자의 입장에는 절실한 공감을 해오진 않아왔다. 그렇게 도시는 같은 인간을 향한 무심, 무감, 무정을 상호 용인하면서 사람의 향기를 무디게 만드는 것이라 책임전가를 마다하지 않았다. 다가오는 겨울만큼이나 건조한 가슴에 백년 전 파업이야기가 이 가을, 사람을 말랑하게 만들었다. 어쩌면 파업의 정면이 아닌 그 이면에만 간간히 소심한 시선을 보내온 내 눈과 정면으로 마주친 이야기였다. 피할 수 없던 그곳에서 고소한 빵냄새와 붉은 장미향을 뛰어넘는 진한 사람의 향기가 피어올랐다. 우린 이제 빵과 장미보다 사람이...그립다.


두 눈의 동심



로렌스 지역의 빈민 주택가에서 한 소녀가 천조각을 만지고 있다. 소년은 무엇을 찾고 있는 걸까.
내다보는 여인, 망가진 자전거와 검은 고양이, 고양이보다 비쩍 마른 검은 양말...
로사와 베이크도 저렇게 만났을 것이다. 미국이었다. (1912. 로렌스, 매사추세츠)

 
작품의 주인공인 Jake와 Rosa는 Bake와 Rose와는 거리가 먼 쓰레기 더미에서 조우한다. 비록 즐거운 순간은 아니었겠지만 아직은 토끼와 사슴같은 눈이었을 것이다. 제이크는 추위와 배고픔, 아버지의 학대로부터 자유로운 잠자리가 필요했고 로사는 가족의 관심과 사랑이 더 필요해 고의로 구두를 숨겨 놓은 것이었다. 언뜻 보기에 아이들끼리 호기심어린 장난처럼 보이는 이 첫 만남은 사실상 작품의 주제를 상징하는 작가의 의도된 미장센으로 여겨졌다. 이들이 쓰레기 더미에서 각자가 찾으려고 했던 것은 기실 '빵'과 '장미'를 상징한다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것은 역으로 어린 소년과 소녀에게 '세상'이라는 쓰레기 더미에서 잃어버리게 될 지 모를 자신들의 최소한의 '욕구'가 아니었을까. 아직 세상을 향한 인간의 다양한 욕구를 경험, 발산하지 못한 이들에게 그러한 '욕구'는 그 나이의 제이크와 로사에겐 전부와 같은 '본능'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어른들이 아닌 열 네살 이들의 본능이 정작 어른들이 파생시킨 쓰레기 더미에서 마주쳤을 때 이들은 토끼와 사슴의 눈으로 서로를 바라볼 수 있었을까. 다행히도 이들은 어른이 아니었기에 어른처럼 서로를 경멸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한명은 구두를 찾아주고 한명은 잠자리를 마련해주는 첫 눈의 추억을 간직하게 된다. 아무런 조건없이 서로의 본능을 도와준 그들이 사랑스러웠다. 그리고 나는 이미 이들의 첫 만남에서 이루어진 서로를 향한 동심을 오래 간직하는 것이 결말까지의 힘겹지 모를 여행길에 이득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두 아이들은 시종일관 어린 사람으로서 최소의 욕구를 빼앗길까봐 두려워하고 그것을 잃지 않기 위해, 계속해서 그것을 얻기 위해 쓰레기 더미와도 같은 세상을 헤매고 뒤지게 될 것이 불을 보듯 뻔했으니까. 그리고 나는 그 불더미 속에서 어쩌면 한마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할 수도 있을 테니까...


두 가지 두려움

아이들의 눈앞에 펼쳐진 세상은 '파업'이라는 무시무시한 폭력적 현실이었다. 어른들의 파업은 이들에게 자신들의 본능을 더욱 절실하고 위태롭게 만들었을 것이다. 제이크는 이탈리아를 비롯한 이주민 노동자의 자녀는 아니었지만 알코올 중독과 폭력을 일삼는 무정하고 무식한 아버지를 둔 덕에 미국 토박이로서의 자존심은 어디에서도 내세울 게재가 되지 못했다. 외국인이 아닌데도 어쩌면 외국인 노동자만 못한 자신의 처지는 영어를 하지 못하는 것이 수치스러워야 할 미국에서 이탈리어를 쓰고 읽지 못해 부끄러운 상황에도 놓여 지게 되고 만다. 제이크의 관심사는 오로지 첫 번째도 '배고픔', 두 번째도 '배고픔', 그 다음은 '추위'였기에. 자신은 영문도 모를 파업현장에 동참하던 이탈리아계 노동자 안젤로 아저씨를 겁 없이 따라나선 계기도 음식에 대한 기대때문 이었고, 안젤로 아저씨와 헤어지게 되면서 느낀 가장 큰 아쉬움도 그가 푸짐하게 건네주던 음식때문 이었다. 시위현장에서 경찰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아이들의 소식을 들었을 때도 싸늘한 시신이 되어 자신과 한자리에 누은 아버지를 곁에 두고서도 가장 견딜 수 없었던 감정은 '배고픔'과 '추위'였었다.

어른이든 아이든 자신을 지배하는 감정이 바로 자신을 지배할 것을 선택하는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닐까. 제이크에게 있어 신자信者가 되거나 시위자 혹은 양자養子가 되기를 결심하게 하는 우선된 기준은 배부른 음식이 되버리고 만다. 이는 곧 자신이 가장 원하는 것이므로 당연히 타자에게 베푸는 최선의 선 역시 배고픔을 구원하는 음식이 되는 것과 동일한 의미였다. 신부님에게 새 옷과 맛있는 음식을 선사받고도 횡재처럼 받은 50센트로 제이크가 아버지에게 할 수 있었던 최선은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인 위스키를 사는 것이었다. 제발 술을 끊으라고 잔소리를 해대던 노동자의 아내가 모처럼 생긴 목돈을 가지고 자신의 남편이 가장 즐겨 찾던 술을 사가지고 가는 마음을 이해하고 남는다. 만약 아버지가 위스키가 아닌 다른 음식을 좋아했다면 제이크는 기꺼이 그것을 택하였으리라.



로렌스의 섬유공장에서 일하던 소년들. 그중 가운데 웃고있는
소년의 눈이 내 눈을 멈추게 한다. 그의 얼굴에서 어른된 우울함이,
노동의 피곤이, 세상을 너무 일찍 알아버린 조로함이 엿보인다.
제이크도 저렇게 웃지 않았을까. (1912. 로렌스 섬유공장, 노동자들)  


사리판단이 분명한 어른이 된 나이에도 배고픔은 견디기 힘든 본능에의 상처일 텐데 한창 발육이 왕성한 열 네살 제이크에게 배고픔은 거의 온 生의 전 가치라고 해도 무방해 보였다. 그리고 그 全 가치를 위해 남의 음식을 훔치는 것은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필수적인 행동이었을 것이다. 로렌스 공장지대의 파업이 아니 어쩌면 모든 지역의 파업이 궁극엔 지금보다 빵을 더 달라는 요구이겠지만 그럼으로써 지금 가지고 있던 빵마저 빼앗겨야 하는 어린 노동자의 믿기 어려운 현실이 지금으로부터 십년 전이 아닌 백 년 전의 미국에서 일어났었던 일이라는 것은 좀처럼 믿기 힘든 사실이기도 했다. 바로 백년의 세월이 무색하게 미국이 아닌 우리나라에선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는 사실이, 한술 더 떠 지금은 당당히 외국인 노동자를 같은 방법으로 착취하는 비인간적인 고용주로서의 면모를 열심히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부끄럽게 만들며 전혀 시간상의 낙차를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핀치 선생님의 교과서적 가르침에 혼란을 감지하던 로라는 흡사 내 학창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로사가 두려워했던 것은 학교에서 배운 가치에 반하는 행동에 대한 도덕적, 사회적 비난이었다. 그것은 진정한 미국인이 되는데 가장 결정적인 방해요소였을 것이다. 하지만 로사는 파업에 가담한 가족과 파업을 비난하는 학교사이에서 확실한 방향성을 찾지 못하고 자신 안에 머무르게 된다. 파업이 진행되면서 급기야 행진도 참여하지 못하고 학교도 가지 못한다. 둘 다 틀리지 않았고 그렇다고 둘 다 맞는 것 같지 않은 로사에게 어느 하나를 선택하라는 것 역시 두려움이 아니었을까.

우리 학교는 강 건너 대학교에서 데모를 하는 날이면 어김없이 오후 수업은 문을 꼭꼭 닫고선 수업을 해야 했다. 바로 강을 타고 넘어오던 최루탄 가스 때문이었다. 유난히도 데모가 심했던 그해 유월엔 최루탄 잔향으로 도무지 수업을 할 수 없어 오후엔 대거 집단 조퇴 사태까지 일어났었고 당시 선생님들은 더욱더 입을 꾹 다물고 우리들의 질문에 '모르쇠'라는 자물쇠를 굳건히 채우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도 그럴 것이 좌파성향의 국어 선생님이 해직된 후 사립이었던 우리 학교는 질문에는 일제히 입을 다무는 것을 지나쳐 아예 대학생이 되면 절대로 '데모하지 말 것'에 대한 예방과 세뇌를 노골적으로 강제시행한 후 학생들을 졸업시키는 여학교였던 것이다. 데모나 파업이 일어나는 사회적 배경과 원인보다는 데모를 해서 인생이 망가지는 백가지 사례나 파업이 가져오는 경제적 손실과 피해 백가지만을 알려주며 공산당 다음으로 파업이나 시위 주동자를 사회죄악시 하는 이데올로기를 주입시켰다. 창피한 이야기지만 나는 대학교에 입학하여 광주에서 올라온 같은 과 학생으로부터 처음 '광주사태'라는 단어를 들었을 정도로 정보와 진실이 꽁꽁 차단된 학창생활을 보내었던 것이다. 바로 로사가 자신의 엄마와 언니는 공장의 파업현장에서 노래부르고 있을 때 학교에서는 선생님의 편향적인 가르침을 받으며 무언가 가슴속에 응어리가 느껴지던 잘못 없는 '죄책감'과,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던 모범생으로서 학습된 통제가 요구하는 자신과 상반되는 그 '반동감'은 학교생활 내내 나를 짓누르며 보이지 않던 무의식으로 자리잡았다. 그래서인지 로사의 갈등을 보며 그때 그 시절 내 사고과정을 그대로 엿보는 것 같아 반갑기도 하면서 또 한편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결국 대학을 입학해서는 교육의 효과는 더욱 분명한 결과치로 나타나 시위현장을 본능적으로 두려워하게 되었고 로사처럼 가족의 안전이나 내 주변 인물의 안녕을 우선가치로 두는 무사안일, 보수세력이 되어버린 오늘의 내가 바로 그곳에서 자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도 그럴 만한 이유는 있었다.(물론, 이렇게 멍울지고 변명할 기회가 오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시인이 파업하는 것을 본 적 있는가. 영화판에서 월급도 없이 하루종일 라면한개로 버틴다고 파업하는 것을 본 적 있는가. 어떤 젊음은 그것이 '노동'이라 규정짓지 못할 훗날 핑크빛'꿈'앞에 가로막혀 자신의 시퍼런 인권을 유보하기도 한다. 글쓰는 노동이 감독 시다바리 노동이 공적이지 않고, 생산적이지도 않고, 규모적이지도 않을 때 그것은 그저 저 좋아 하는 일일뿐 고로 견디기 힘들면 조용히 때려치우면 그만인 일인 것이다. 내가 다니던 회사가 파업을 불러오지 않을 정도의 훌륭한 회사였는지, 아니면 내가 유난히 인내심이 탁월해 불합리한 상황을 잘 견딘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목구멍이 포도청이고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현실에서 조용히 다음달 월급명세서만 손꼽아 기다리느라 그들을 외면했는지는 고백하고 싶지 않다.

여하튼 나와 같이 피끓는 청춘의 시기에도 시위현장에 제대로 참여한 적이 없는 세대들은 늘 그렇듯 이런 작품을 만날 때마다 상당한 불편의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똑같은 시절에 아무 것도 생각지 않고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 같다는 무위에 대한 막연한 죄책감은 실제로 어떠한 사회적 운동에도 참여하지 않는 결과를 낳으며 스스로 정치에 무관심(할 수밖에 없는)한 유권자를 지향케 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용서와 함께 기득권세력을 향한 소심한 복수를 지향하게 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가만 놔두면 좋았을 나름의 과거를 용케도 정확하게 공략을 해대니 독자로서 그리 반가운 일은 아닌 것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하여 아무말도 할 말이 없지는 않은 터, 비록 늘 뒤편에서 돌아가는 상황만 주시하는 소심한 시민이 되어 있었지만 로사의 복잡한 마음을 들여다 보는 일만큼은 누구보다 공감했기에 가족과 친구들 사이에서 누구보다 힘겨웠을 로사의 외로움만은 가장 잘 알고 있다 말하고 싶었다. 로사는 알 턱이 없지만 그 시절 정치나 사회운동에 대한 내 자의식이 형성되어 가는 과정을 바로 코앞에서 내 살처럼 지켜본 덕에 몇 배의 에너지를 소모한 내 심정을 알아주길 바라면서 말이다.


두 개의 가슴

이렇듯 작품의 전반부는 어른들의 파업으로 인해 제이크와 로사앞에 닥친 비정한 현실보다는 그들을 바라보는 내 심정, 그들이 환기하던 내 학교, 그들을 통해 상기되는 우리의 오늘을 자극하면서 우리시절 장산곶매의 <파업전야>같은 노동영화를 삼삼오오 모여서 시청하는 기분이 들었다고나 할까. 금방이라도 누가 건드리기라도 하면 모두 밖으로 나가 부조리한 세상을 향해 소리칠 수 있을 것 같다가도 곧 배운 대로 본 대로 들은 대로 자신을 은밀히 통제하고 상황을 외면하던 냉정의 시간들을 반추하도록 하였다. 카리스마 넘치는 연설가 조 에터와 여성 조직 운동가 걸리 플린, 시인 조바니티까지 실제 로렌스 파업 지도부이기도 했던 이들의 신념넘치는 행보는 그 시절 지명수배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던 잘생긴 어느 총학생회장을 떠올리기 충분했고, 여성과 어린 아이들까지 단결에 합세하며 목청껏 불러대던 노동자의 노래는 그 시절 수많은 연대라는 이름으로 인연의 끈을 묶어버린 많은 우리네 노동자와 운동가를 그립도록 만들었다.

그런데 이 작품은 파업의 실상을 파헤쳐가며 공권력의 횡포를 고발하고 그 피해양상과 노동자들의 고통에 대해서만 낱낱이 말하려는 작품은 아니었다. 로렌스 지역의 외국인 노동자들의 파업의 시작과 함께 제이크와 로사를 번갈아가며 아이들의 시선으로 서사를 이끌고 있긴 했지만 보다 중요했던 사실은 파업이라는 위기속에서 두 아이들이 느낀 生에 대한 두려움과 그 두려움 속에서도 끝내 잃어버릴 뻔 했던 '빵'과 '장미'라는 기본적인 生의 욕구들을 되찾기 까지의 시련은 물론 그들 스스로 이루어낸 빵과 장미보다 더 향기롭고 놀랄만한 자신들의 용기에 있었다. 파업은 제이크와 로사로부터 베이크와 로즈를 앗아갈뻔 했던 위협적인 소설적 배경인 것은 틀림없었지만 이제 남은 숙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성장하고 내일을 기다려야하는 이유를 찾는 일이었던 것이다.

작가는 그 시점에서 아이들을 일가친척이 전무한 오지로 향하게 한다. 결과만 놓고 생각하면 마땅한 절차였고 당연한 해법이었겠지만(소설적으로도 새로운 환경이 절실한 시점이었기에) 같은 피와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이 파업 노동자의 아이를 돌보아 주는 프로그램은 소설과 상관없이도 참으로 신선했다. 백 년 전이다. 미국이었고 당면한 국가현실은 판이하게 달랐지만 지금의 우리로 시계를 맞추어 보아도 혁신적인 아이디어였으며 실천과정 역시 훌륭했다고 본다. 노동회관과 많은 지역민들이 아이들을 돌보아 주지 않았다면 그들의 어머니인 여성들이 강렬하게 거리로 뛰쳐나올 수 있었을까. 나는 이들 파업공동체의 목적과 행동강령 및 요구사항, 피해 학생들, 심지어 한마음된 노래에도 비교적 덤덤하다가 아이들을 돌보아주기 위해 서로가 합심한 그 마음에는 동화되어 나도 모르게 백 년 전의 베러지역의 노동회관에서 스프를 끓이고 있는 한명의 아줌마가 되어 보기도 했다. 제이크와 로사는 이 훌륭한 프로그램 덕에 우여곡절을 뒤로 하고 같은 집에 머물게 된다. 쓰레기 더미에서 조우한 이들이 각자 찾은 것은 달랐지만 다시 필연적으로 같은 장소에 놓이게 된 것이다. 두 사람을 맞이한 제르바티 부부 역시 실은 '빵'과 '장미'의 다른 이름인 것은 아니었을까. 제이크와 비슷한 나이의 외아들을 잃은 노부부의 선행과 호의는 파업으로 상처받은 두 아이를 재활케 하는 소설적 장치였을 테지만 이 역시 실제 사실을 근거로 구성된 서사라는 점에서 역시 현실은 더 소설적이라는 영화같은 교훈을 떠올리게 했다.

환경이 바뀌면서 제이크와 로사는 당연히 적응하고 극복해야 할 것이 있었다. 제르바티씨의 부인은 매 끼니마다 배부르고 맛있는 식사를 제공하며 제이크에게 배고픔에 대한 공포를 잊도록 해주었지만 이탈리아인이 아닌 미국 토박이로서, 학교 교육을 받지 않은 문맹자로서, 로사와는 혈연관계가 아닌 친구로서 계속해서 위배되는 거짓말과 아버지의 죽음을 방치하고 돌아온 죄책감으로 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집으로 도망치는 게 아니라 집에서 도망쳐야 했던 제이크로선 또다시 진짜 자신으로부터 도망쳐야 하는 막다른 순간이 찾아 온 것이다. 로사는 자신의 집보다 월등한 환경에서도 파업에 동참한 엄마와 언니의 소식에만 시시각각 귀를 귀울이며 좀처럼 그리움과 외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로렌스 파업현장이 아닌 베러 지방의 노부부 집에서도 제이크는 아버지의 죽음으로부터 끝까지 도망치고자 했으며, 로사는 가족을 잃게 될까봐 한시도 마음을 놓지 못했던 것이다. 이들의 어린 가슴에 무엇을 더 요구 할 수 있었을까. 어린 이들의 손을 잡아 준 것은 당연히 작가의 분신으로 생각되는 제르바티 부부였다.

제이크와 로사는 각각 '빵'이라는 배고픔에는 절대 굶주리지 않도록 도와준 노부인과 '장미'라는 인생의 비밀을 가지고 있던 제르바티씨와 함께 손을 잡고 부부가 이끄는 장소로 이동하게 된다. '빵'에 대한 본능은 어느 정도 채워진 제이크는 제르바티씨의 석공소에서 폐석을 치우는 일자리를 얻게 되고 '장미'에 대한 그리움이 간절하였던 로사는 노부인과 함께 기도를 한다. 서로 각자가 필요했던 것을 얻게 되고도 좀처럼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아이들에게 이들 노부부는 두려움을 이기는 것은 총이 아니라 가슴이라며 자신들의 안에 있는 '강한 가슴'으로 두려움을 이겨야 함을 타이른다.


두 송이 장미

이 작품에서 장미는 정열과 사랑의 향기를 대변하는 꽃의 여왕으로서의 그 외적인 상징성 보다는 인간의 영혼과 구원된 손길을 상징하는 내재된 의미로서 꽃을 피웠다. 실제로 제이크와 로사는 장미라는 꽃의 실체를 자의든 타의든 각자 자신의 현실에 오롯이 새기게 된다. 제이크는 대규모 환영인파 속에서 마치 신적인 존재를 만난 것처럼 걸린 플린 여사를 보고는 '그녀의 뺨은 흰 눈에 핀 장미꽃 같았다'고 비록 먼발치 서지만 자신을 선량하고 용감한 사람으로 생각해 주기를 소원했다. 그녀가 스쳐지나갈 땐 작고 예쁜 꽃에서 나는 향기로 취한 듯했다고 찬양해 마지 않았다. 모성이 부재했던 제이크에게 흰 눈밭의 장미꽃은 고결한 최초의 여성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신자가 아니었던 제이크에게 지긋지긋한 현실로 부터의 구원을 염원하는 신성의 증표로도 이해되었고 학교를 다니지 않았던 제이크에게 긍정적인 가치관을 심어줄 교사나 그러한 여성을 흠모하는 그리움의 대상으로도 해석되었다. 즉, 제이크의 가슴에 새겨진 장미는 모성이라는 여성성에 대한 사랑과 다름 아니었다. 그의 가슴엔 장미라는 母花가 피어 올랐던 것이다. 이렇듯 자신도 모르는 새 가슴에 장미를 그려 넣은 제이크와 만나게 된 제르바티씨는 기념비라는 차디찬 돌덩어리에 뜨거운 장미라는 추억을 새기는 사람이었다. 그는 화강암 조각가이자 석공소 사장이었으며 아들의 죽음을 잊지 않기 위해 묘비에 꽃을 그려 넣어 영원을 소원한 것이었다. 제르바티씨가 제이크의 고백을 듣고 아버지의 묘비를 만들어 주겠다고 한 것은 바로 제이크의 가슴 한 켠에 숨어 있던 장미라는 존경과 사랑의 母花를 아버지의 영전에 선사하도록 한 어른 된 가르침이자 배려였을 것이다. 비로소 제이크의 가슴에 고이 숨어있던 장미가 세상에 발아하는 순간이었다.

로사의 장미는 혼자만의 것은 아니었다. 로사는 미국인은 아니었지만 그들보다 더 똑똑한 모범생이었다. 비록 아버지는 공장사고로 잃었지만 언니, 동생들과 엄마, 이웃, 세입자 할머니 가족과 친밀한 유대관계를 형성해온 로사에게 장미는 가족간의 영원한 사랑과 행복을 상징한다 할 수 있다. 로사는 별로 내키지는 않았지만 엄마와 마리노 아줌마의 권유와 부탁으로 시위대의 피켓에 직접 장미라는 문구를 새기게 된 당사자였다. 로사가 종이에 직접 새긴 것은 바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표현했다는 것이고 피켓은 그것의 증거물로 남았다. 오늘날 어느 정도 자신들의 절실함과 사업주의 야만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되는 파업의 문구들은 '규탄', '철폐', '죽음' 등의 공격적이고 과격한 문구들이 아니던가. 당장이라도 때려죽일 그것에 익숙해진 나로서는 백 년 전에 쓰여진 '장미'라는 낭만적 명사가 동화속 그림처럼 낯설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 파업의 상황이나 전개양상에서는 별다른 시간차를 느끼지 못하다가 '우리는 빵을 원한다, 그리고 장미도' 에 이르러서는 '빵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치던 프랑스 시민혁명이나 '자유 아니면 죽음을 달라'던 미국 독립혁명이 연상되면서 비로소 심리적 시간차를 느끼기도 했다.

실제로 '빵과 장미'구호의 사실상 존재여부는 확실치 않으나 누가 짓고 누가 썼건 그 문구는 시로도 음악으로도 확산되는 놀라운 영향력을 행사하며 로사라는 장미보다 낭만적인 주인공을 탄생케 했다. 물론 소설속에서 '우리는 장미도 원해요'라는 생각을 로사가 한 것은 아니었다. 최초발안자는 엄마이었고 그것을 줄여서 고쳐 쓴 것이 로사였다. 하지만 여기서 장미라는 단어를 피켓에 새겨 넣었다는 행위는 마치 자신의 이름을 지은 것은 자신이 아니지만 이름표를 만듦으로써 자신을 자각하고 하나의 정체성을 스스로 부여하는 일종의 신고식을 의미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름표는 세상으로부터 불리워 졌을 때 비로소 자신과 객관적으로 동일시 된다. 로사의 피켓작업은 파업행위에 가담하였다는 죄책감보다는 오히려 파업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해소되는 계기를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음악이나 장미라는 가치에 대한 공감과 옳음은 곧 자신의 행위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며 스스로 옳고 그른 것을 사유할 수 있는 기회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그 시간 이후 로사에게 장미는 여러 사람이 힘을 합해 공동의 목표인 행복을 추구하는 人花로 인식된다. 이탈리아계 노동자 집안의 자녀로서 교육을 유일한 탈출구로 인식하던 로사는 누구보다도 교양있고 존경받는 미국인이 되길 원했기에 그러한 로사에게 가족의 안녕과 그들과의 행복은 바로 로사의 바램을 있게 한 근본이었으며 그 바램을 공고히 지탱해주는 버팀목이었을 것이다. 그러했기에 로사는 끊임없이 가족의 안부를 자신의 안녕과 동일시하며 집에서 나는 부드럽고 고소한 빵냄새 이상으로 가족간의 향기로운 대화나 격려를 잃게 될까봐 늘상 두려움에 떨었던 것이다. 제이크의 母花나 로사의 人花 모두 조금은 강해진 그들 어린 가슴을 찢고 피어나던 눈물겨운 장미가 아니었겠는가.


세상 모든 이의, 행복

이 작품은 결국 아이들이 두려움과 맞서는 용기를 얻는 이야기였다. 실제로는 패배한 적이 없었던 사람들이 주어진 패배감을 극복해 나가는 이야기였다. 삶의 조건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위해 용기내어 일어선 사람들의 이야기 였다. 작품 후반부에 돈을 훔치던 제이크에게 보여준 제르바티씨의 말과 행동은 우리 어른들에게 불러 일으키는 반향이 결코 적지 않았음이다. 만약 여느 의심많은 어른들처럼 제이크를 궁지로 몰아붙여 그동안의 범죄나 실수까지 찾아내어 사회에 다시는 적응하지 못하게 만들었다면 또 한명의 더 강력하고 소신있는 범죄자를 양성하는 결과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작품의 마지막에서 제이크는 제르바티씨 집에 남고 로사는 가족들 품으로 돌아간다. 두 사람은 결국 자기 이름과 자기 가족과 자기 보금자리를 그리고 자기 행복을 찾은 것이었다. 만약 제이크가 짜낸 도주 시나리오대로 일이 진행되었다면...로사가 상상한 불행이 가족들에게 닥쳤다면...(그렇게 되지 말란 법도 없는 법) 우리는 두 사람의 불행의 탓을 누구에게 전가해야 했을까. 실제 그러한 불행을 당한 사례는 없었던 것이 아니라 소설화되지 않았을 뿐이고 문학으로 재생된 것은 '빵'과 '장미'를 되찾은 열 네 살 아이들이었다. 자신처럼 행복해졌으면 좋겠다는 로사의 기도는 현명한 소녀의 최선이었고 제이크는 그 바램대로 행복해 질 것이었다. 문학은 이렇게 '빵이 넘치고 돌에서 장미가 자라는 새로운 삶'을 제이크와 로사는 물론 우리 모두에게 선사했다.

작가는 로렌스 지방에서 베러로 보내어진 서른 다섯 명의 아이들이 도착해서 노동회관 앞에서 찍은 한 장의 기념사진에 왜 발걸음을 멈춘 것일까. 사진 속 아이들은 웃고 있는 얼굴은 아니었지만 두려움보다는 희망의 의지쪽에 더 가까운 눈망울이었다. 그녀는 왜 그 눈빛을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일까. 절대 희망만은 버리지 말아야 할 아이들의 손을 잡아 주고픈 모성이 문학으로 탄생되는 순간이었다. 그래서인지 이 작품은 파업의 현장을 자세히 담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어머니의 가슴으로 포용하는 따스함이 시종일관 서사를 지배한다. 아이들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예민하고도 섬세한 통찰력이 어른된 우리들까지 위로하는 것이다. 실제 '빵과 장미' 파업이라고도 알려진 로렌스 파업은 사회적 최약자층인 여성노동자와 아이들이 주된 운동이었다. 당시 여성노동자들은 노동의 비숙련됨과 이주민임을 비하하는 남성노동자들과도 싸워야 했다. 여성들은 아이들에게 자장가를 불러주듯이 폭력과 유혈이 아닌 노래로 시위했으며 그 노래를 작가는 문학이라는 합창곡으로 편곡해 들려준 것이다. 그때 여성들은 '빵과 장미'의 소중함을 우리에게 알려줌으로써 세상에 이긴 것이며 지금의 작가는 '빵과 장미'를 되찾은 아이들을 격려함으로써 절망에 이긴 것이다. 문학이 파업을 막을 순 없다 해도 파업의 시대와 파업의 주인공과 파업의 피해자들을 오래도록 안아줄 수는 있다. 작가가 우리에게 장미향보다 진한 사람의 향기를 전해주었기 때문이다. 새삼 문학으로 시대를 껴안는 모성의 그릇이 더없이 크고 따스하게 느껴지지 않는가.

이제 나는 뜨거운 돌멩이 자국이 남기고 간 그 자리에 비로소 영원히 죽지 않을 꽃 한송일 새기고픈 욕심을 가져본다. 빵과 장미는 물론 사람의 향기가 나는 행복을 간절히 원하기 때문이다. 빵이 없어 배고파서 죽는 사람은 사라졌지만 아름다운 영혼의 장미도 넘쳐나지만 사람의 향기에 목말라 죽음을 택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현실이지 않은가. 저 서른 다섯 명의 아이들의 가슴에 피어난 장미가 혼자만이 아닌 누군가를 사랑하는 능력으로 만개하여 사람으로서 최고의 향기를 전할 수 있다면 우리삶은 얼마나 행복한 인생이겠는가. 머나먼 타지에 도착해 꽁꽁 언 겨울손을 잡아준 시민들처럼 그들도 누군가의 시린 손을 잡아주고 그 손에 장갑을 씌워주고 마음으로 호호 불어 준다면 그 가슴은 얼마나 뜨거워 질텐가. 제르바티씨 부부처럼 소중한 사랑을 잃고도 사람의 향기만은 잃지 않고 자신들의 가치를 소중히 지켜낸다면 그 세상은 한번 살아 볼 만한 곳인 게다.

검은 돌에 새겨진 하얀 장미앞에서 나는 기념하고 싶다. 영원히 시들지 않을 용기라는 줄기위에 잊지 말아야 할 희망의 꽃잎 위에 비로소 퍼져 나오는 사랑의 향기가 내안에 스며들어 그토록 강한 가슴으로 두려움을 이기게 해달라고. 그것만이 오늘을 살아가는 일이라고. 그것이야 말로 행복의 다른 이름이라고.


 
로렌스 지방에서 베러로 보내어진 서른 다섯명의 아이들. 웃고 있진 않지만 희망을 잃지는 않았다. 
작가는 베러에 살고 있는 시민으로서 이 한장의 사진을 보고는 아이들의 사연과 도움의 손길을 보내준 용기를
찾아 나섰다. 이 백 년 전의 흑백사진에서 뜨겁고 진한 사람의 향기가 전해질 수 있다는 것이
바로 『빵과 장미』가 이룬 문학적 성취일 것이다. (1912. 베러, 버몬트, Barre's Old Labor Hall) 



 
모든 인간에게
세상에서 한 가지 중요한 것은
그의 가장 깊은 곳
그의 영혼 그의 사랑하는 능력이라네
보리죽을 떠먹든 맛있는 빵을 먹든
누더기를 걸치든 보석을 휘감든
사랑하는 능력이 살아 있는 한
세상은 순수한 영혼의 화음을 울렸고
언제나 좋은 세상
옳은 세상 이었다네

- 행복해 진다는 것 中에서-
  헤르만 헤세



<덧붙임> 사진출처:  

http://oldlaborhall.com/history
http://www.corbisimages.com
http://www.yonhap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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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25 22: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25 22: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양철나무꾼 2010-10-26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노회찬 추천이라서 보고 싶었는데...
이 리뷰를 읽으니 꼭 봐야 겠습니다,불끈~^^

한사람 2010-10-26 21:52   좋아요 0 | URL

아...노회찬 추천이라는 말이...사회적으로 어떤 의미를 담고 있나요..?
진보..? 노동자...?
제 생각엔 이 책은 ..파업보다 그 속의 아이들에게 더 포커스를 맞춘 내용인 듯해요^^
파업의 테두리 때문에 선입견을 가지고 보았지만
주제는..파업의 바깥에 있더라구요~~

암튼, 전 좋았어요!!!

양철나무꾼 2010-10-27 01:07   좋아요 0 | URL
음~
거창하게 사회적 의미까지는 모르겠고요~
전 지난번 노회찬이 추천한 데니스 루헤인의 '운명의 날'이 참 좋았어요.
제가 데니스 루헤인에 홀라당 반해버려서요.

이 책 청소년 북스여서 망설였는데,노회찬 추천이라서 볼까 했었다는 얘기였어요.
암튼 님의 리뷰가 이렇게 끌어당기는 데 어떻게 그냥 지나갈 수 있겠어요?^^

다이조부 2010-11-09 0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혹시 예전에 빵과장미 라는 영화가 있지 않았나요?

고종석이 칼럼에서 추천 했던게 생각나네요

한사람 2010-11-09 11:40   좋아요 0 | URL

맞아요, 같은 제목의 영화도 있었어요
청소년 문고지만 어른들이 읽어볼 만하답니다^^
 
카시오페아 공주 - 現 SBS <두시탈출 컬투쇼> 이재익 PD가 선사하는 새콤달콤한 이야기들
이재익 지음 / 황소북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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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왜 지금 살고 있고 나중에 죽을 거면서 허구헌날 산다는 것, 죽는 다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려 하는 걸까. 그냥 살고 그대로 죽으면 안되는 걸까.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기 때문일까. 허나 생각한다고 해서 그리 달라질 건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산다고 하면 언젠가는 죽는 것에, 죽을려고 치면 다시 살아야 하는 것에 끊임없이 의미를 찾고 정답이나 최선까지는 아니더라도 유사하거나 차선인 답을 찾아서 자기 것으로 만드려고 하는 것일까. 별자리 하나 없는 하늘에 나는 가을만큼 서러운 질문을 던져본다. 언젠가부터 답을 기다리거나 그것을 찾지 않고 질문만 바꾸어가며 더 신선한 질문을 찾아보는 내 자신을 발견한다. 그러니까 질문함으로써 벌써 답이 된 것이다. 나이가 들면 가끔 누구에게라도 질문하기 참 민망한 것들도 있다. 더 서글픈 건 답해줄 사람이 없다는 사실도 알아간다. 자문자답...나는 무릎을 탁 치고선 쓴웃음을 지어본다. 이 소설, 이 작가는 자신에 묻고 자신이 답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왜 그런지 독자인 우리에게 무언가 물어본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이다. 그러한 의도도 보이지 않는다 하면 서운하실런가. 나는 이렇게 생각한번 해보았으니 당신네들도 한번 해봐요... 나쁘지 않을 겁니다. 저도 그랬으니까요. 고로 이 작가는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없다고 보여진다. 그리곤 자신에겐 상당히 만족한 것으로 보인다. 대단한 우월감이다. 나는 그렇게 느꼈다.

먼저, 이 작품의 표지를 한번 볼까. 꽤 알려진 일본의 일러스트 작가 마츠모토 시오리의 그림중 하나를 대문으로 걸고 있다. 흡사 잔혹동화를 연상시키는 그녀의 그림속에서 소녀의 눈동자는 주로 파랑이거나 초록의 섬칫한 무표정으로 몽환적 환타지를 물씬 제공해 준다. 강남출신의 일류대 졸업자로서 오랫동안 방송과 영화물을 괜히 먹은 게 아닌 작가의 탁월한 선택이었다. 이 작품의 흥행에 얼마간 일조한 그림이라 생각하기에 그녀의 홈피를 찾아 다시보기도 여간 즐거운 게 아니었음이다. 그런데 난 그림을 넘겨가며 처음의 호감과는 달리 단번에 그림들이 성적인 폭력을 암시하는 것을 감지 할 수 있었고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실제 어린 시절 성폭력에 대한 트라우마가 심하였기에 그것을 그림으로 치유하는 사연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그림이라는 것이 소비하는 입장에서 본다면 특히 남성의 시각에서 롤리타 콤플렉스를 상당히 만족시키는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이 그림은 (작품과 연관지어 본다면)역으로 남성들의 성적인 환타지를 자극하는 용도로도 유용될 수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만일, 여성학 분야에서 이 책과 그림의 상관관계를 분석한다면 작가는 어느 정도의 비난을 감수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쨋거나 작가의 최초 의도는 그림에 숨은 상처와 드러난 이미지를 다섯 편의 이야기가 가지는 초현실적 상상력과 짝짓기 하려고 하였다고 믿기에 감각의 촉수에 박수를 보낸다. 이른바 먹히는 그림이 아주 잘 어울리는 이야기 였음이다.

다음, 이야기를 살펴보자. 다섯편의 이야기는 모두 남녀 간의 사랑을 자극하는 멜로물이라 할 수 있다. 장르가 환타지, 미스터리, 호러등으로 다양화 하였다고는 하나 결국 서사를 관통하는 하나의 코드는 이루어지지 못했거나 이루어 질 듯한 사랑을 향하고 있다. 그런데 가만 들여다보면 결국 같이 잤거나 같이 잤을 번 한 꽤 말초적인 사연들을 상상력의 범위에 핵심적으로 위치시켜 놓은 덕에 은근히 남녀주인공 불문하고 남성위주의 성적인 우월감을 엿볼 수 있는 서사를 띠고 있다. 영화로 보자면 적당한 상업성을 포기하지 않은 작가의 치밀한 전략으로 느껴졌다. 실제 연극이나 영화를 염두해 두고 스토리 작업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문학에서 이를 대중성이라 이름 한다면 그는 재미난 이야기를 아주 신선한 문학으로 요리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든 이 책을 집어든 사람이라면 어떤 이야기였는지 그 이야기를 잘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이야기의 결론이 비교적 명확하다는 뜻과도 다름 아니다. 즉, 어떤 이야기도 모두 결론이 정해져 있다.(작가가 우리에게 원하는 게 없다고 느낀 부분이기도 하다) 스토리라인이 완벽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름대로 끄덕일 수 있는 부분은 충분했다. 각 이야기 마다 완벽해 보인 스토리라인이 지극히도 현실적인 도시인의 고민에서 출발하고 있고 초현실적인 소재로 사용한 설정들이 전혀 억지스러워 보이지 않다는 것, 외계인이나 연쇄살인범 같은 공격적 장치들이 물흐르듯 편안해 보이는 작가의 바느질이 결코 기분 나쁘지 않다는 것이다. 이야기는 충격적일지라도 덮고 나면 기분 좋아지는 작품이라고나 할까. 기발한 상상력과 소파같은 편안함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독특한 매력이 이 작품의 가장 큰 미덕이 아닐까 싶다. 


<카시오페아 공주>
 

                                                                   SECRET PROMISE, 2006


가장 슬펐다. 딸은 서초동에 있는 영어유치원에 다니고 남자는 아버지와 함께 약국을 운영하는 삼십대 중반이라면 그의 차는 BMW라면 방학을 맞아 코타키나발루 섬에 여행을 간다하면 그의 아버지는 <인류의 기원>을 읽고 계시다면 아마도, 마누라가 오년 전에 괴한에 칼을 맞아 죽은 것만 빼면 사는데 뭔 걱정이 있을까 싶었다. 남자는 딸아이의 유치원 선생님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는데 그녀는 사람과 사람간의 파동만으로도 대화가 가능한 외계인이란다. 특별한 일 없으면 한 천년쯤 살면서 이 행성 저 행성 돌아다니며 다른 생명체를 연구한다는. 누가 더 운이 나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하여튼 그들은 서로 눈이 맞은 것이 확실했다. 그런데 남자는 무슨 비밀이 있는지 그저 취미로 열정을 불사르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 이종격투기 선수로도 활동을 하고 있다. 먹고 살기 바쁜 사람들은 아니었던 것 이다. 한눈에 보아도 외계인 선생님이 지구에 오게 된 이유는 분명 남자와 관련이 있어 보이지 않는가. 남자는 마음을 읽을 줄 아는 초능력을 가진 여자에게 자신의 아내를 죽인 사람을 찾아 달라 부탁하고 여자는 거부한다. 아내가 죽은 후 오랫동안 복수의 칼을 갈았던 남자의 가슴은 새 사랑이 싹트기엔 너무나 불모지였던 것일까.

결국 여자가 말하지 않아도 남자가 알려고 하지 않아도 범인은 밝혀지지만 예정된 이별은 막을 수 없었다. 하필 우주적으로 이별하게 된 이들에게 남겨진 그리움은 카시오페아 별자리로 그려진다. 그녀는 떠나면서 피같은 남자의 복수심도 함께 가져간 것이었다. 누군가를 용서하는 가슴이 되지 않고서는 다시 사랑 할 수 있는 가슴이 될 수 없다는 우주적 진리를 깨우쳐준 이야기였다. 누군가를 용서한다는 것, 살면서 엄청난 상처와 고통을 준 사람에게 원망이나 복수심을 품지 않고 내 삶의 행로대로 걸어가기란 얼마나 비현실적인가. 그래, 어쩌면 내 자신보다 더 생생한 내 모든 원망을 외계인이라도 나타나 가져가 준다면 우린 언제든지 환영이다. 그와의 사랑을 포기할지라도 피로 얼룩진 내 가슴을 씻어 내리고 싶다. 두 번이 아닌 살면서 한번은 꼭 씻어내야 하지 않겠는가.


<섬집 아기> 

                                                       LITTLE GARDEN, 2005


가장 쓸쓸했다. 이번 남자도 집은 삼성동, 직업은 펀드매니저, 장인은 재력가...그림이 좋다. 차는 아우디쯤 되려나. 어느 날 우연히 그의 집에 수상하게 생긴 고향친구가 불쑥 찾아온다. 남자는 친구가 반갑지 않고 친구는 무언가 치명적인 비밀을 확실히 가지고 나타난듯 하다. 친구 태규는 야수의 몸뚱아리를 한 근육맨이기도 했다. 참, 남자는 스트레스가 심해 신경성 발기부전이란다. 이쯤 되면 고향친구 역시 원하는 것은 있어 보인다. 이들 두 남자는 고향에서 우연히 어떤 실성한 여인을 살해한 후 사체를 유기한 것이었다. 끝에 가서 치정극으로 막을 내린 결말이 지극히 드라마타이즈 했다. 다만, 다소 유치할 수 있는 서사를 남자의 불안한 심리묘사를 중심으로 끌고 간 것은 끄덕 일만 했고 섬집 아기(제목인 만큼)의 정체성에 공포를 더해주는 에피소드가 빈약했던 것은 옥의 티만큼만 아쉬웠음이다.   


<레몬>

 

                                                        START SIGNAL. 2004


가장 난해했다. 이야기의 구성을 탄탄하게 하려는 의지는 많았으나 나는 어쩐지 주인공의 논리가 가장 마음에 안들었던 작품이다. 이런 류의 작품은 호흡이 긴 연출가를 만나 멋진 배경음악을 뒤로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감상이 새롭지 않을까 싶다. 역시나 한남대교를 주로 건너온 남자의 여자 친구는 아나운서, 자신은 외국계 은행에 합격해 놓은 상태로 일상의 균열속에 '사랑은 레몬같은 거야'라 말하는 풋풋한 처자가 다가오는 이야기. 남자의 여자친구인 윤미는 <성공하는 그대를 위한 100가지 충고>의 충고를 따라 화가날 때 상대를 보지 않고 다른 곳을 응시하는 여자. 섹스 뒤에 남자가 담배를 피우는 것을 싫어하는 여자. 이 여자의 도시적인 야망과 실천의지에 매력을 느껴 일상을 의지한 남자가 갑자기 레코드 가게를 차려놓고 하루종일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면서 소설을 쓰고 싶다며 입사를 망설인다면, 그건 헤어지자는 이야기와 무에 다른가. 크게 와닿지 않았던 개연성의 진부함이었다. 차라리 우연히 알게 된 핸드폰 매장의 알바를 하던 여자애 때문에 혼란스럽다 말하는 용기가 더 비현실적이지 않았을까. 아버지와 오랜 남자친구를 사고로 잃고 쉬이 마음을 열지 않던 레몬녀가 이벤트 요원이나 요릿집 종업원 아르바이트를 하는 설정으로 나타나 또 미국으로 유학을 간다는 느닷없음이 이들 두 사람의 애틋함을 자꾸 견제하는 듯 했다. 어짜피 들어갈 외국계은행을 다니며 그녀를 기다리는 남자가 사랑은 레몬같다고 하는 것이 나는 왜 이해되지 않았던 것일까. 차라리 그녀가 권해준 핸드폰을 자꾸 어루만지면 마술처럼 그녀(진이)가 찾아오는 느낌을 툭 터넣고 사랑은 요술같다고 하는 것이 더 소년스럽지 않았을지.  



<좋은 사람>
                                                                                                   

                                                                     TWIN BIRDS, 2008 


가장 끔찍했다. 역시 여자는 패션잡지의 기자이며 강남 유흥가 한 구석 오피스텔에서 거주. 여자는 우연히 디자이너에게 소개받은 남자의 인상착의와 행동이 수상쩍어 여간해서 마음을 열지 못하고 있던 차에 쌍둥이였던 동생의 실종이라는 상처를 떨쳐버리지 못하는 불안이 자꾸 환기되면서 급기야 정신과를 찾게 되는 상황으로 전개된다. 때마침 선배는 기획으로 연쇄살인범의 기사를 작성하게 되고 여자는 반사적으로 소개받은 남자를 떠올리며 공포에 노출된다. 이때 마치 연쇄살인범과 유사한 이미지를 가졌다고 생각되는 여자의 소개팅남 때문에 정신과를 찾은 여자는 뜻밖에도 정신과 의사가 연쇄살인범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반전의 수사를 선보이며 비극을 예고한다. 정신과 의사는 소개팅남을 이용해 그녀를 압박해오고 실종된 동생의 비밀까지 엮어내는 공포의 아노미를 연출한다. 여기까지...이었어야 하지 않을까. 후반부에 누군가 그녀를 구출하러 등장하는 구성과 해피엔딩의 결말은 너무 허리우드식이었음이다. 장편을 압축했다는 상황이 그 부분에서 이해가 되던 끄덕임은 다시 단편으로 압축하지 말았으면 하는 아쉬움으로 남겨졌다. 그럴 필요성이야 작가의 영역이겠지만 어짜피 영화로 제작까지 한다고 알려진 이 작품을 굳이 단편으로 요약(?)해야 할 당위성이 질문으로 남는다.  


<중독자의 키스>

 

                                                          BLUE MOON, 2007


가장 여운이 길었다. 역시나 직업은 영화프로듀서, 동호대교 건너 언니네 아파트에 얹혀살고 있는 서른의 미혼녀. 이야기는 두 가지 에피소드가 평행을 이루는 듯 하다가 마지막에 합체되며 접점부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모양새다. 그 하나는 그녀를 스토커처럼 미행하며 그녀의 그림자로서 거리를 유지하는 남자이며, 대학 1학년 철학동아리에서 만난 남자친구로 죽음을 알고 싶어 하는 수인이 두 번째이다. 이들 세 명은 도시의 고독을 견디는 방법으로 모두 중독이라는 기제를 사용했다. 여자는 스크린에 그림자는 타인을 엿보는 것에 수인이는 죽음이라는 실체에. 우리는 현실이 힘겨워 매달리는 그 무엇이 다시 현실과 자기를 파괴한다는 것쯤은 도시인된 경력으로 익히 알고 있음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멈출 뾰족한 방안을 갖고 있지는 못하다. 결국 인생은 중독되거나 그렇지 않거나 고독한 것이다. 가볍게 즐기면서 그 위에서 모든 걸 감당하는(하곤 했던) 작가의 우월을 느꼈다면 독자된 오해일런지. 사실 도시에 살면서 고독을 즐기지 않으면 그마저도 너무 피곤할 테니까. 이들 세명이 각자 자신의 고독을 소중히 지키는 모습이 가장 설득적이었다. 세 명이 현실에선 한군데서도 마주치지 않지만 그림자가 찍은 사진 속에 그녀와 수인이 행복하게 마주한 모습은 쓸쓸하면서도 위로가 되는 마지막이었다. 서로의 고독함을 존중하는 것도 행복이 될 수 있구나...세개의 오롯한 외로움이 한자리에 따스하게 마주한 느낌으로 책을 덮었다.


다섯 가지 이야기를 모아놓고 보니 참신한 신상이 된 느낌이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든 작품에서 주인공들은 강남에 거주하며 직업은 자영업, 펀드매니저, 아나운서, 패션잡지 기자, 영화 PD등의 도시적이면서 주로 청담동, 신사동에서 한잔들 하시는 서울의 남쪽 사람들이었다. 뭐랄까 외람되지만 서사에서 인생의 패배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작가의 당연한 자연미를 엿본 기분이랄까. 살아온 직업적 지식으로 많은 이야기를 알고 있는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한가지 아쉬운 점을 짚으라 한다면 자기성취, 자기만족에 더 가깝다고 느껴지는 글들에서 독자와의 소통은 소원했는지 궁금하다. 전화해주는 사람이 있어야 받을 것이 아닌가. 훌륭한 첨단의 전화기를 가지고 있는 작가임에 틀림없다. 전화를 걸 생각인 것도 알겠다. 어쩌면 계속 걸었을 수도 있다. 다만 그 울림이 분명치 않아 자칫 놓칠 수 있다는 걸, 받고 싶어도 듣지 못할 수 있다는 걸, 알아주길 바란다면 독자된 욕심이 지나친 것인가. 한국에서 방송국의 PD이면서 대접받는 작가하기 쉽지 않다. 그것은 누가보아도 근사하고 확실한 밥벌이가 있는 상태에서 목구멍은 포도청 같지 않기 때문이라는 걸 서로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작품, 한국 문단을 향한 것이 아니라, 한국 청취자들을 향한 소설이라면 충분히 성공이다. 단, 그에 만족하고 말 것 같지는 않아보임이, 안타깝다. 현재로선.


<덧붙임> 

책에서는 마츠모토 시오리의 일러스트가 흑백인 게 아쉬워 홈피에서 원본을 슬쩍했다.
(그림/ 마츠모토 시오리 홈피 : http://www.ne.jp/asahi/secret/label/index.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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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0-10-22 16: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러스트가 참 보면 볼수록 독특하네요. 환상적이면서도 뭔가 차가운 냉기가 흐르고 있는거 같아요.
우리나라에 출간된 책에서도 일러스트가 칼라였으면 괜찮을거 같은데,,,
출판 비용을 어느 정도 절감하기 위한 출판사의 선택인 거 같아서 참 씁쓸하네요.
멋진 글 잘 읽었습니다^^

한사람 2010-10-22 18:56   좋아요 0 | URL

일러스트가 제대로 한몫한 거 같습니다
요즘엔 일본소녀도 그리던데
보면 볼수록 더 보고 싶어지는 그림이 독특한 감수성을
자극하는 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