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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와 빨강
편혜영 지음 / 창비 / 201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쥐와 재회하다
어쩔 수 없이 잊고 싶었던 순간이 내내 떠나지 않았다. 작년 이맘 때, 나는 술장사를 하는 어떤 가게의 안주인이었다. 주방장이 그만두고 잠시 공백이 생겨 할 수 없이 주방일을 보게 되었는데 당시 내게 주방은 음식을 준비하는 곳이 아닌 지친 몸을 잠시 휴식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손님이 없을 때 잠시 눈을 붙이거나 책을 보기도 했던. 가끔 한기가 느껴질 땐 오븐이나 밥통을 끌어안고 몸을 녹이기도 했다. 그날 아침은 막 첫추위가 시작되는 겨울의 초입이었는데 나는 가게문을 열고 들어가 주방문을 열자마자 미친듯이 다시 닫을 수 밖에 없었다. 고양이만한 쥐가 전날 밤 내가 끌어안았던 밥통옆에 얌전히 앉아서 똑바로 내 눈과 마주친 것이다. 살면서 그렇게 큰 쥐를 본 적도 처음인지라 놀라기도 했지만 더 소름끼치는 건 내가 그 자리에서 도망쳐도 될 사람이 아니라 다시 문을 열어 어떻게든 그 쥐를 쫓아내어야 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문을 열기 전에 잠시 생각했다. 쥐가 아직 있을까... 분명 쥐는 움직임 없이 휴식중이었고 내 눈을 쳐다보았다. 있어도 문제고 없어도 문제였다. 내 손으로 닫은 주방문을 다시 열어야 했던 그 순간의 공포를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쥐가 제발 알아서 도망가도록 충분히 시간을 준 다음 문을 열었다. 내가 연 문말고 창문, 뒷문 모든 문은 닫혀 있었다. 도대체 어디로 들어와 어디로 나간 것일까. 통로를 쥐잡듯이 찾아보았지만 그 덩치가 통과할만한 구멍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는지 나는 기다란 막대기를 들고 와서 그제서야 여기저기 쑤셔대었다. 삼십분을 들쑤셔도 쥐는 온데 간데 없었고 쥐하나 잡자고 경비업체를 부르기도 뭐해 그렇게 하루 일과는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쥐가 사라진 것을 알았지만 나는 쥐가 나타났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 싱크대, 냉장고, 선반 할 거 없이 질책이라도 하듯 그들을 닦고 문질렀다. 저녁에도 쥐가 나타날까 두려워 안절부절 못하던 나... 그 다음날은 도저히 내가 먼저 주방문을 열 용기가 나지 않아 옆지기에게 부탁했고 쥐가 없는지 확인하고도 한참 있다가 들어갈 수 있었다. 나는 그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내가 먼저 주방문을 열지 못했다. 그 후로 한번 더 옆지기가 그 끔찍한 쥐를 발견했지만 우리는 끝내 쥐를 찾지도 잡지도 못했다. 쥐라고 그때 나를 발견할 줄 알았겠는가. 그러니까 쥐와 나는 같은 공간에서 동거를 하고 있었던 것이지만 서로들 몰랐을 뿐이었다. 그날 마주친 쥐는 지금 잘 살고 있을까.
이 책을 읽는 내내 그 때 쥐의 안부가 궁금해 시종일관 소름돋은 채로 독서를 하다가 주방문을 닫아 버리듯 책을 덮었다. 꼭 다시 그날의 쥐와 재회하는 기분이었달까. 희미한 빛을 받아 더 부각되던 그녀석의 볼륨있는 몸체와 미동도 없던 태연한 자세는 여지껏 내가 알던 쥐와는 많이 달랐음이다. 그쪽 세계에서 어떤 황태자와도 같은 아우라가 느껴졌는데 우습지만 쥐도 고민이 있어 보였던 것이다. 미처 여기가 당신네 공간인지 몰랐다는 당황함이나 사람이 나타남에 있어 본능적인 경계, 민첩함은 전혀 감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훗날에도 그 쥐의 당당한 눈빛을 잊을 수 없어 도대체 '뭣하러 왔나'가 아닌 '뭐하던 중이었을까'를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추위를 맞아 살 궁리를 하는 아빠쥐의 고유한 사색의 시간이었을까. 그렇다면 그 쥐도 그 공간이 나름 마음에 들었음에 틀림없다. 어쩌면 쥐는 우리에게 피해를 주려고 그 곳에 도달했다기 보다 그냥 자신이 하던 일을 좀 새로운 공간에서 수행하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나의 공간을 두고 쥐와 경쟁을 했었다니... 사람이 쥐의 공간을 탐하지 아니하니 쥐도 사람의 공간은 넘보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은 우리중심의 편파적 입장인 게 아니었을까.
쥐와 공존하다
쥐를 발견했을 때 말처럼 때려잡기는 정말 어렵다. 돌이켜보면 내가 그토록 두려웠던 건 '쥐'라는 생물학적 동물이었다기 보다는 내가 발디디고 있고 내가 숨쉬는 공간에 '쥐'라는 최악의 불결한 덩어리가 나타났다는 사실, 저나 나나 같은 생명체이긴 하지만 나름 고상하고 청결한 생활을 해왔다는 믿음에 위배되는 증거로서 내 자존감의 훼손이었던 건 아닐까. 쥐는 시각적 정보가 아닌 위생적 정보이기에 쥐를 보았다는 사실은 쥐와 같이 있다는 공존감에 대한 인식이었고 그것은 곧 인간의 위치에서 심각한 추락을 의미하는 것과도 같았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이 쥐가 나타나면 악착같이 때려잡으려 하는 것도 실은 무의식적인 인간성의 추락에 육감적인 공포를 감지하기 때문은 아닐까.
이 작품은 쥐와 동격이 되 버린 한남자의 인간성의 추락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추락을 유도하는 매개체로 '쥐'와 '쓰레기'를 사용한 듯 하다. 쓰레기 환경에서 서식하는 동물로 대표적인 것이 쥐이지만 쓰레기는 인간이 생산했고 쥐는 인간이 창조하지 않았다. 쥐는 쓰레기 때문에 생겨난 생명체도 아니다. 즉, 애초부터 쥐는 쓰레기와 원인상관 관계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쥐는 인간에서 기인한 쓰레기 세상에서도 잘 살아 나가지만 인간은 자신이 만든 그 곳에서 살아갈 수가 없다. 첫 번째 아이러니의 시작이다. 한 가지 잘 사는 방법은 쥐처럼 살면 되는 것. 다만, 어쩔 수 없이 죽어도 그곳에서 살아야 한다면 말이다. 그런데 그 사람은 하필 쥐를 박멸하는 연구를 하는 사람이었다. 보통 사람들 보다 조금은 더 쥐에 대해 많이 알고 있었던 사람이 틀림없다. 쥐를 살리거나 죽이는 방법도 자세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두 번째 아이러니이다. 그랬던 그가 어느 날 우연히 남들이 두려워하던 쥐 한 마리를 시원하게 때려잡은 후로 쥐와 같거나 쥐보다 못한 생활을 하게 되는 고통에 휘말리게 된다. 그런데 또 쥐와의 인연은 운명이었던 것인지 바로 쥐를 잘 잡을 수 있는 그 능력으로 인해 공식적으로 쥐를 잡는 일을 맡게 된다. 세 번째 아이러니이다. 쥐를 때려 잡아야 쥐와 같은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것이다. 즉, 인간이다 보니 쥐를 잡아야 했었던 것인데 자신이 인간이 되는 길은 쥐를 잡는 일로부터 시작되는, 쥐가 인간을 먹여 살리는 형국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쥐가 없어져 버리면 그는 무엇으로 살아가나. 쥐를 잡는 일은 곧 자신을 잡는 일은 아닐까. 마지막 아이러니는...우리의 몫이었다.
쥐잡기처럼 이어지는 아이러니, 쥐와 인간의 이 오래된 역학관계를 끝도 없이 질문하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쥐를 잡는 것에서 시작해 쥐를 잡는 것으로 끝나는 이 작품에서 한인간의 몰락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편혜영의 소설은 인간의 불행에 동감토록 하지 않고 불편하고 불쾌하여 불가할 정도의 불만을 조장한다. 우연의 연속인 것 같아도 실은 우연으로 생각하고 싶은 인간의 선택이었음을 깨우치게 한다. 처절한 불행앞에 연민의 눈물대신 그러한 불행을 야기한 스스로를 자각하게 한다. 그동안 그녀의 단편에서 끝내 동감할 수밖에 없었던 심각한 수준의 불쾌감은 이번 작품에서 더욱 총체적, 강박적으로 집결된 느낌이다. 조금 더 길고 자세한 단편을 읽은 느낌덕분에 다행히 마지막에 허탈하진 않았다. 하지만 도저히 이해불가한 상황이 아니라 어느 정도 이해가능하다는 사실자체가 계속하여 씁쓸한 여운을 선사하며 각자가 짊어지고 가는 인생의 무게를 실감토록 만들었다. 그리고 그 무게 역시 내가 선택해온 인생의 대가라는 알고는 있었지만 듣고는 싶지 않았던 목소리와 정면에서 마주치게 했다. 그 목소리는 어쩌면 쓰레기더미에서 타고남은 재처럼 뿌옇기도 하겠지만 우리들 가슴에 벌겋게 각인될 것이 틀림없었다.
빨강의 예언
소설의 처음은 공항에서의 검역으로 시작된다. 위험의 경고인 것이다. 주인공 그는 C국으로 파견된 방역업체의 약품개발원이다. 나는 C국이 어떤 나라인지는 알 수 없으나 미국이나 유럽등의 선진국이 아닌 전염병 바이러스가 퍼지고 있는 개발도상국 혹은 후진국임을 상상할수 있었다. 그는 여기서 '내용을 알 수 없는 붉은 색 도장'을 받아온다. 마치 앞으로 펼쳐질 불행한 미래에 대한 예언장처럼. 붉은 색 도장이라면 나도 뒤지지 않을 선명한 추억이 있다. 바로 9.11 테러 이후 미국 방문시 이루어진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의 참변(?)이다. 나는 공항 입국심사를 무사히 통과하지 못하고 어느 덩치 큰 흑인의 뒤를 따라 미국입국검사대 바로 뒤편에 따로 마련되어 있는 사무실로 인솔되었다. 문제가 된 것은 내 인상착의였는데 테러용의자로 지목된 중국인 여성과 외모가 비슷하다는 이유로 삼십 여분 동안 되지도 않는 영어로 내 자신을 변호해야 했던 것이다. 다행히 공항 내 한국직원 덕에 풀려날 수 있었지만 그들은 내게 다른 외국인들과는 다른 출구에서 생화학적 세균을 제거하는 방역가스를 한차례 확실하게 살포한 후에야 보내주었다. 그리곤 여권엔 주홍글씨의 낙인처럼 secondary도장을 빨갛게 찍어 주었다. 한순간에 미국입국의 조건을 갖추지 못한 사람으로서 조사를 받은 기록이 새겨진 것이다. 지금은 웃으며 이야기 할 수 있지만 당시엔 얼마나 공포스럽고 굴욕적인 순간이었는지... 2005년 이후 나는 미국을 다시는 가기 싫어졌는데 그것은 내 여권에 빨갛게 표시된 도장의 역할이 크다. 검역에 통과하지 못한 사람, 기록으로서의 빨강은 현재의 불안이자 미래에 대한 경고이다. 이미 돌아온 나야 미국을 다시 안가면 그만이지만 그는 그길로 모국을 다시 밟지 못하고 만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의 붉은색 도장은 영원한 출국금지의 낙인이 되었던 것은 아닐까.
위험의 경고로 받아온 도장은 기어이 위력을 행사해 그를 나락으로 내모는 붉은 주술을 발휘한다. 그가 공항을 빠져나와 도착한 주거지는 C국의 수도인 Y시의 중심부 외곽지역을 재개발해 조성한 제 4구의 어느 독신자 아파트였다. 그런데 그곳은 지독한 악취와 검은 쓰레기라는 다리를 통과해야 어른거리던 쓰레기더미 위에 건축된 난개발의 장소였다. 그는 제 4구의 6번지 아파트 4층에서 형사와 대치하던 중 투신하여 스스로 쓰레기 더미로 추락한다. 절박한 순간에 이루어진 최후의 결정이었을까. 그런데 추락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맨홀 아래 하수도, 진짜 쥐의 서식지로 이어지게 된다. 이 모든 것이 재수없게 닥쳐진 불운의 연속이었던 것일까. 작가는 지상의 아파트에서 부랑자가 떠도는 공원, 쓰레기 소각장으로 다시 지하의 하수도로 점점 인간의 세계와 멀어지는 주인공 그의 추락에 한 가지 의문점으로 그가 본국에서 수행한 일을 끝까지 추궁하는 서사를 고집한다. 즉 C국에 운좋게(?) 파견된 서사까지는 그런대로 우연이라 생각할 수 있겠지만 바로 C국에 파견결정이 내려진 직후 그가 보여준 행보를 그의 추락과 연결지은 것이다. 그것은 C국에 누구보다도 출국하고 싶었던 그의 심리를 설명해주며 C국에서 쓰레기장으로 투신할 수밖에 없었던 결정을 이해시키는 중요한 소설적 장치이자 이 작품의 실마리이기도 했다. 그는 과연 전처를 살해한 사람일까.
검정의 선택
그가 제 4지구 아파트 4층에서 전처와 재혼한 남편 유진과의 통화에 의해 자신이 전처 살인범으로 누명을 쓰게 되었다는 사실을 인지한 순간 그가 내린 결정과 당시상황을 우리는 다시금 짚어보아야 할 것이다. 먼저 그는 아파트에 도착해 본사에서 인사를 담당하는 몰이라는 인물과 통화를 하지만 자신의 출근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고 무작정 연기되었음을 알게된다. 이것이 C국의 특수한 사정때문이지 본사의 오류때문인지는 전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그는 자신의 휴대전화와 그것이 들어있는 트렁크마저 잃어버렸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약을 사러나간 거리에는 검은 쓰레기 봉지만 나뒹굴며 어렵사리 구한 약은 살충제와 쥐약이 전부였다. 살충제와 쥐약마저 약탈당할 뻔 한 그는 쓰레기 더미에 쓰러진 자신이 어느덧 스스로 냄새를 풍기는 세계가 되었음을, 마침내 노략질과 폭력이 정당한 세계로 진입했음을 처연히 깨닫는다. 집단감염에 대한 우려로 아파트는 격리되고 계속되는 불안과 두려움속에서 그는 전처와의 소소한 일상이 그리워지며 연이어 전처의 개, 전처의 남편이자 자신의 친구인 유진등이 차례로 생각나지만 그것은 그들과는 다른 세상에 놓이게 된 자신을 더 뚜렷이 인식하는 계기가 될 뿐이었다. 그는 타지에서의 외로움, 불확실한 상황의 연속에 따른 막다른 두려움에서 탈피하기위해 마침내 자신을 쓰레기로 폐기처분하게 된다. 여기서 한 가지 또렷하게 남아있는 그의 기억이라곤 익숙하게 칼을 쥐던 손의 느낌뿐이었다. 형사를 피해 투신한 그는 이후에 17명의 부랑자가 생활하던 공원과 쓰레기 소각장을 떠돌게 되고 그곳에서 보디백에 담겨져 하수구로 내던져 진다. 일련의 과정으로만 판단컨대 서사속에서 그가 자신의 의지대로 선택한 것은 없어 보인다. 모든 건 정해져 있던 것일까.
작가는 꼭 그렇지 만은 않다고 말하기 위해 그와 전처와의 과거의 추억인 '원숭이숲'을 근거로 내세우는 전략을 시도한다. 바로 그가 아내와 마지막 관계회복을 위해 떠났던 T국으로의 여행에서 고집을 피워 방문한 장소, '원숭이 숲'이었다. 둘만의 조용한 대화를 원했던 그는 위험을 무시하고 그곳을 방문했지만 원숭이 숲을 지나 사원을 향해 가는 길은 그들이 가진 것들을 하나씩 잃어가는 과정과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모자나 선글라스를 빼앗아 가던 원숭이와 뒤엉켜 육탄전을 벌이던 그의 모습은 '아내와의 관계회복'이나 '조용한 대화'와는 거리가 먼 원숭이 보다 못한 무모한 폭력에 불과했다. 원숭이의 꼬리뼈까지 씹어가며 아내를 지키려 했지만 결국 그는 원숭이에게 여권과 지갑이든 가방을 빼앗겨 아내와 돌이킬 수 없는 파탄으로의 여행이 되고 만 것이다. 원숭이숲에선 원숭이의 방식이 있었던 것일까. 자신의 이기심이 담긴 여행도 무리수를 둔 원숭이숲도 모두 그가 선택한 결정이었다는 점에서 그로 인해 발생한 과정상의 사건 역시 지혜롭지 못한 대처를 이미 예고하는 에피소드였다.
그렇다면 그는 우발적으로 전처를 죽이고 도망치듯 C국에 입국한 것일까. 칼에 대한 구체적인 감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그만큼이나 우린 서사를 통한 이 의문점에서 끝까지 자유롭지 못했다. 그 역시도 자신이 왜 파견근무를 순조롭게 시작할 수 없게 된 것인지 끝까지 의문을 버리지 못한다. 독자의 의문과 주인공 그의 의문이 두 개의 축을 유지하며 서사를 밀고나가는 작가의 집중력과 압박감이 어쩌면 쓰레기 현실에 놓인 주인공의 쓰레기만 못한 처지를 자꾸만 잊도록 만들었다. 우리로선 전처를 살해했을지 모를 당신이 선택한 길이니 마땅한 벌이 아니겠는가하는 공공연한 암묵적 냉담을 감추기 어려웠고 그로서는 하루아침에 자신을 허공에 뜨게 한 모기업의 무책임을 사회적으로 고발하고 싶은 분노를 억누르기 힘겨웠을 것이다. 즉, 독자인 우리가 계속해서 불편을 느끼고 불쾌한 이유가 여기 있었다. 그는 개인적 가해자이기도 했지만 사회적 피해자이기도 했기에 가해자로서 비난하기엔 피해자된 그가 우리의 자화상인 듯 했기 때문이다. 우리라고 매번 합법적, 도적적 테두리 안에서 정상적으로 살아가라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 아무도 잘못은 없는 것 같은데 누구도 잘하지는 않았다는 생각, 현실은 외롭게도 Mall로 상징되는 거대공중에서 빈 트렁크를 짊어지고 칼을 한손에 쥔 슬픈 당신과 나의 모습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몰Mall과 몰沒의 공평
이 작품의 주인공은 이름이 없이 무작정 3인칭 '그'로 서술된다. 등장하는 인물중 가장 상징적인 명칭은 본사의 인사담당 '몰'로 생각된다. 어렵지 않게 대형쇼핑몰의 mall로 대변되는 자본주의 사회와 沒落(몰락)한 인생 두 가지를 의미한다고 여겨진다. 몰은 주인공 그가 C국에 입국하여 자신에게 최초로 전화를 한 인물로 그가 추락을 거듭하면서 계속하여 애타게 만나고자 했던 인물이지만 끝내 그의 실체와 만나지 못한 사람으로 그려진다. 더 의미심장한건 그가 우연히 주워 입은 티셔츠에 새겨진 이름 몰 그대로 부르기 쉽고 익숙한 이름 몰로 불려지며 살아가길 원했다는 것이다. 그토록 만나고자 했던 몰을 강조하며 그가 경비원에게 내민 명함에는 그가 찾던 몰의 이름이 박혀있었다. 이름을 보고 웃었던 경비원은 '이사람 찾고 있는 사람이 자신이었나' 하는 우스운 사람에 대한 페이소스는 아니었을까. 어쩌면 그는 진짜로 자기 자신을 찾고 싶었을테니 말이다.
그가 몰이 되기전에 이미 몰沒의 운명은 예정되 있었다. 그는 쓰레기 더미에서 기적적으로(?) 항공사 마크가 그려진 그을린 칼과 자신이 잃어버린 트렁크를 찾게 된다. 그 무딘 칼로 억지로 열어본 트렁크의 주머니엔 죽은 지 오래되어 화석처럼 굳은 쥐가 있을 뿐이었다. 마치 칼을 사용하고 돌아와 처참한 신세가 된 자신의 모습처럼. 그는 무딘 칼이나마 자신을 보호해줄 마지막 무기임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 칼에 대한 구체적인 감각에 대한 기억은 다시 칼을 사용함으로써 비로소 자신을 확인하라는 마지막 경고였는지 모른다. 그는 하수구에서 쥐를 잡는 능력을 인정받아 우연히 근무하게 된 방역일을 하며서 마침내 그 무딘 칼을 사용할 기회를 얻게 된다. 불성실과 요령을 알게 된 주인여자에게 그가 느낀 감정은 쥐잡이 생계에 대한 위협이었으며 그것은 곧 생존을 결정해야 할 기회이기도 했던 것. 여기서 우리는 그가 칼에 대한 구체적 감각을 행위로 복원하는 장면을 확인하며 그가 느낀 안도감만큼이나 어떤 카타르시스를 함께 경험하게 된다. 사람은 얼마나 자신이 한 잘못을 인정하기 힘든 존재인가. 때때로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인정하기 싫어 우리의 기억체계는 의도적 망각이나 불의의 상실을 경험하기도 한다. 어쩌면 그는 더 이상 모국을 그리워하지 않고 전처를 기억하지 않고 C국에서 남은 평생을 그런대로 살아가야 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그 인생이 꼭 불행하리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전염병이 창궐하고 대지진이 일어날지 모르는 도시에서도 사람들은 행복할 권리가 있는 것처럼. 쥐도 자신의 살길을 찾아 가끔은 인간의 공간에 침입하는 것처럼.
그는 칼을 버리고 공중전화를 택했다. 불을 밝힐 수 있고, 전적으로 혼자 있을 수 있고, 자신의 부재를 확인 할 수 있는 곳. 그는 회사로 전화를 시도하지만 그때마다 자신은 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가 확인하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자신을 기억하는 누군가를 기대하며 과거를 추억하고 싶었을까. 혹시 앞으로 영원히 자신을 모른다고 해주길, 자신은 그 세계에서 사라진 사람으로 인식되길 원했던 것은 아닐까. 자신이 잊혀지는 것이 이곳 쓰레기 더미를 헤쳐 나온 그가 살아가는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그는 실수로 약품이 얼굴에 흘러내려 역겨운 순간에도 눈물을 흘리지 않고 코를 풀며 다시 일상을 준비한다. 자신이 투신했던 제 4지구 쓰레기 더미를 재개발해 만든 마트에 들러 먹거리를 구할 생각을 한다. Mall에 몰락하지 않고 그것을 이용하기로 한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남은 쥐처럼 끈질기게 살아남아 다시 인간으로서 살아가길 원했던 것이다. 쥐에게도 인간에게도 공평한 결말이었다. 잔인하도록 공평한 이 섬칫함이 이 책의 가장 불쾌한 미덕이었지만.
다시 피는 빨강
『재와 빨강』은 피가 넘치고 냄새가 역겨운 쓰레기의 외피 속에서 그러한 쓰레기를 조장하고 또 쓰레기를 헤쳐 나온 쥐와 다를 바 없는 인간의 본성을 집요하게 쪼아대는 작품이었다. 거대한 시스템과 자본 앞에서 우리는 항상 무력하고 소심하다. 거리에 나가면 하루에 교통사고로 몇 십명이 죽는 다는 것을 알지만 자동차를 이용할 수 밖에 없다. 보행자라는 피해자도 될 수 있지만 운전자라는 가해자도 될 수 있는 것이 언제나 우리 현실인 것이다. 그래서 우린 누가 누굴 함부로 비난할 수 없다. 어쩌면 쥐의 삶까지도 비난할 자격은 없지 않을까. 쥐 역시 인간 때문에 못살기는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다만 우리가 쥐가 아니고 인간임을 잊지 말아야 할 이유는 우리가 사는 세상은 쥐가 아닌 인간만이 아름답게 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전염병과 환경오염, 난개발에 시달리는 거대 다국적 기업의 시대에도 여전히 아름다울 수 있는 존재들은 인간들 밖에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인간은 비록 쥐보다 못한 쓰레기를 천연덕스럽게 생산할지 몰라도 그 쓰레기를 수거해 다시 인간의 영혼을 살찌게 할 꽃을 피울 수 있는 존재들일 것이다.
부랑자를 태우고 남겨진 검은 재가 바람을 타고 꽃잎처럼 허공에 흩어지던 인간같지 않음을 떠올린다. 한줌의 쓰레기 보다 못한 그의 영혼처럼 쓸쓸히 가벼운 재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지독한 바이러스가 공기중에 꽃가루처럼 퍼져가던 벌건 불신과 두려움을 기억한다. 그럼에도 우리가 태워야 할 것은 폐수와 오물로 넘치는 인간의 쓰레기 말고도 우리 안에 스며든 무심한 마음의 쓰레기가 아니었을지. 인간쓰레기가 아닌 쓰레기인간 이야말로 우리가 각자 태워야 할 마음의 부산물은 아니었을까. 그렇게 태운 그 곳에 분명 검은 재가 아닌 붉은 꽃이 다시 필 것이라 믿고 싶다. 그것은 이토록 붉은 피의 댓가로 이루어진 인간들의 붉은 심장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 곳에 흐르는 피는 분명 인간을 아름답게 할 빨강의 꽃과도 같은 색이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