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과 장미 문학동네 청소년문학 원더북스 13
캐서린 패터슨 지음, 우달임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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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돌멩이, 하나

미국 워싱턴을 여행하는 한국인이라면 아마 링컨기념관과 근처 한국전쟁 참전용사 기념공원을 빼놓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기념공원엔 우비를 입은 참전군 동상 옆에 검은색의 화강암 기념비가 50m 가량 거대한 벽화처럼 세워져 있었다. 사람들은 장병의 이름은 물론이고 신기하게도 세세한 얼굴까지 그려져 있던 기념비 앞에서 하나같이 숙연한 표정을 지었다. 돌에서도 표정과 숨결이 살아 있다니...나 역시 기념비에 새겨진 'Freedom is not free'라는 문구를 아직까지 기억할 정도로 내심 저릿했던 순간, 단단하고도 오래된 뜨거움이었다. 바로 행군하는 병사들의 살아있는 듯한 표정의 동상을 조각하고 검은색 기념비를 상징적 조형물로 완성시킨 프랭크 게일로드(85)는 이 작품에 등장하는 화강암의 도시 베러 출신의 예술가였다. 그는 2차 대전 참전 용사이면서 소설 속 제르파티씨처럼 베러의 유명한 조각가였다. 워싱턴의 참전 기념비 이후로 한국의 많은 기념관에서는 도입부 전시물로 검은색 화강암에 연혁뿐 아니라 다양한 이미지를 그려 넣은 조형물을 하나의 공식처럼 계획하고는 했다. 이 작품을 덮고 나는 내 묘비에 어떤 문구를 써야 하는지 잠시 생각에 잠기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장미꽃과 같은 그림도 새길 수 있을지 상상해 보았다. 검은 돌에 새겨지는 하얀 꽃이라...그 과정이 더할 수 없이 차갑고 시리지만 그 결과만큼은 무엇보다도 뜨겁지 않은가.

그랬다. 이 작품은 마지막이 뜨겁게 달아 올랐다. 단단하고 찰진 돌멩이 하나가 오랜 시간 화덕에 구워져 꽁꽁 얼은 겨울손을 뭉근히 데워주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 옹골찬 뜨거움은 찬찬히 덥혀온 속도 그 몇 배로 가슴에 남아 자신의 자리를 표시하고 말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빵과 장미』는 그렇게 뜨거운 돌멩이 자국 하나를 남기었다. 미국 아동문학 발전에 크게 기여한 작가에게 수여한다는 '뉴베리상'에 대해 몰랐지만 『빵과 장미』는 분명 많은 이의 가슴에 돌멩이 한 개 만한 화덕 한자리를 기꺼이 내주는데 기여했다.


빵과 장미보다, 사람

요즘 언론에선 연일 프랑스의 파업사태를 발 빠르게 보도하고 있다. 그네들의 파업을 보면서 언젠가 프랑스는 '매일 파업하는 나라'라는 프랑스 유학생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런데 또 프랑스 시민들은 노동자의 파업에 굉장히 관대해 그로인한 공공 서비스에의 불편을 당연하게 감수한다는 그러므로 다같이 사회가 발전한다는 변론도 기억이 났다. 장미도 넘치면 향기의 진가를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우리보다 적게 일하고 더 많이 받으면서 빵은 물론이고 장미향기도 그윽할 것 같은 프랑스 아니던가. 지하철이나 버스가 중단되는 서울을 그리자니 그들의 태도는 참으로 신선했다. 그래도 역시 멀었다. 초유의 유혈사태는 물론이고 반복되는 구호, 관철되는 과정, 시민들의 불편...그 어떤 파업에도 불감해 진 현실이 우리 아니었나. 파업은 진부했다.

 
 
파업에 동참하는 시민행렬중 엄마손을 잡은 여자아이의 발걸음만이
내 발목을 잡았다. 아이는 하얀 손수건을 움켜진 채 손을 물고 있다.
훗날 파업을 추억하며 무엇을 떠올릴까.
핑크빛 소녀야, 너는 무엇이 두려웠던 거니. (2010,
프랑스)


작년에 내가 술장사를 할 때 그 지역에서 대대적인 화물연대 파업이 일어났다. 하루 종일 도시의 교통이 마비되고 사람들은 거리에서 술집에서 욕을 해대었다. 그런데 뉴스에 보도된 후 거리를 막아선 화물연대 주동자들이 파업을 마치고 우리가게에 들른 것이다. 조직의 우두머리 격인 사람들이라는 자칭소개와 함께 거나한 술잔치가 벌어졌다. 시간이 지나자 지인들과 부인들도 합석해 내일있을 파업을 같이 궁리하는 듯해 보였다. 부인들은 다소 진한 화장에 깔끔한 차림이었고 그녀들은 내일 새벽에 모여 전사적으로 남편들의 도시락을 쌀 것이라며 상기되있었다. 그들은 그렇게 파업기간중에 우리 가게에 자주 들러 그날 하루의 피곤을 달래곤 했다. 세상은 알 수 없는 것이다. 생존과 인권을 보장하라는 투쟁에 하루 종일 앞장선 사람들 덕에 우리 생계가 고만고만해진 날들이었다. 문득 같은 지역에서 시위하는 노동자들에게 그날 팔고 남은 전부의 빵을 지속적으로 제공했다는 전설의 빵집주인이 떠올랐다. 그래, 당신은 빵을..나는 술을...그렇게 자위해봐도 마음이 쓰라렸다. 그날 나는 한번도 본적이 없는 여성 노동자들의 인권을 유린하는 종류의 파업과 그들을 비교하면서 축제와도 다름 아닌 그들의 공동체의식을 내 생존과 바꾸었다.

언젠가 김훈의 칼럼에서 기자시절 시위현장에서의 점심시간은 고요하고 평화롭기까지 하다는 기사도 기억난다. 아무리 황사가 불어 닥쳐도 시위군중과 전경, 기자까지 제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밥을 외면하지 않는다고 했다. 철도 파업 시위대는 길바닥에 앉아 부인들이 싸준 도시락을 먹고 군중과 대치한 전경들은 된장국과 깍두기가 담긴 식판을 끼고 두 줄로 앉아 먹고 기자는 전경들이 밥을 먹는 거리 중국식당에 들어가 짬뽕국물을 마시며 기사를 작성한다고. 그 순간 각자의 고픈 배를 채워주는 각각의 도시락과 된장국과 짬뽕국물은 얼마간 역겹고 비루할지 모르나 세상 어느 누구의 밥상보다 위대해 보였음이다. 그렇다. 내 온전한 배고픔은 오로지 내 뱃속에 들어간 밥만이 해결할 수 있다. 내 목구멍을 통과한 것들에게만 유효하다. 어떤 시위나 어떤 진압을 뛰어넘는 가장 최고치의 서로에 대한 인권 존중이라는 점에서 그 어떤 파업의 구호보다 신선한 장면이었다.

이렇듯 나는 왜 파업의 정면보다는 측면, 뒷면에 자꾸 눈이 가는 것인지 모르겠다. 내게 있어 파업은 가보지 못한 군대만큼이나 해보지 못한 성역으로 남아 얼마간의 기회박탈에 대한 안도감과 잘 알지 못하는 심정으로서의 낭만이 뒤섞여 구경꾼 입장의 '진부함'이라는 건조성을 띄게된 지 오래이다. 그런데 왜 이리 파업 한번 해보지 못한 경력이 가슴을 콩닥거리게 하는 것일까. 이제 먹고 살기가 좀 나아진 세상에서 파업의 이야기도 식상한 컨텐츠로 전락한 오늘날, 프랑스 학생도 화물연대도 철도파업 시위군중들도 원하는 것은 오늘의 '빵'이 아니라 내일의 '장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나 역시 정작 코를 자극하는 빵의 향기는 물론 뇌를 자극하는 장미의 향기도 필요한 같은 입장이면서 그것들이 필요하다며 파업을 일으키는 노동자의 입장에는 절실한 공감을 해오진 않아왔다. 그렇게 도시는 같은 인간을 향한 무심, 무감, 무정을 상호 용인하면서 사람의 향기를 무디게 만드는 것이라 책임전가를 마다하지 않았다. 다가오는 겨울만큼이나 건조한 가슴에 백년 전 파업이야기가 이 가을, 사람을 말랑하게 만들었다. 어쩌면 파업의 정면이 아닌 그 이면에만 간간히 소심한 시선을 보내온 내 눈과 정면으로 마주친 이야기였다. 피할 수 없던 그곳에서 고소한 빵냄새와 붉은 장미향을 뛰어넘는 진한 사람의 향기가 피어올랐다. 우린 이제 빵과 장미보다 사람이...그립다.


두 눈의 동심



로렌스 지역의 빈민 주택가에서 한 소녀가 천조각을 만지고 있다. 소년은 무엇을 찾고 있는 걸까.
내다보는 여인, 망가진 자전거와 검은 고양이, 고양이보다 비쩍 마른 검은 양말...
로사와 베이크도 저렇게 만났을 것이다. 미국이었다. (1912. 로렌스, 매사추세츠)

 
작품의 주인공인 Jake와 Rosa는 Bake와 Rose와는 거리가 먼 쓰레기 더미에서 조우한다. 비록 즐거운 순간은 아니었겠지만 아직은 토끼와 사슴같은 눈이었을 것이다. 제이크는 추위와 배고픔, 아버지의 학대로부터 자유로운 잠자리가 필요했고 로사는 가족의 관심과 사랑이 더 필요해 고의로 구두를 숨겨 놓은 것이었다. 언뜻 보기에 아이들끼리 호기심어린 장난처럼 보이는 이 첫 만남은 사실상 작품의 주제를 상징하는 작가의 의도된 미장센으로 여겨졌다. 이들이 쓰레기 더미에서 각자가 찾으려고 했던 것은 기실 '빵'과 '장미'를 상징한다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것은 역으로 어린 소년과 소녀에게 '세상'이라는 쓰레기 더미에서 잃어버리게 될 지 모를 자신들의 최소한의 '욕구'가 아니었을까. 아직 세상을 향한 인간의 다양한 욕구를 경험, 발산하지 못한 이들에게 그러한 '욕구'는 그 나이의 제이크와 로사에겐 전부와 같은 '본능'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어른들이 아닌 열 네살 이들의 본능이 정작 어른들이 파생시킨 쓰레기 더미에서 마주쳤을 때 이들은 토끼와 사슴의 눈으로 서로를 바라볼 수 있었을까. 다행히도 이들은 어른이 아니었기에 어른처럼 서로를 경멸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한명은 구두를 찾아주고 한명은 잠자리를 마련해주는 첫 눈의 추억을 간직하게 된다. 아무런 조건없이 서로의 본능을 도와준 그들이 사랑스러웠다. 그리고 나는 이미 이들의 첫 만남에서 이루어진 서로를 향한 동심을 오래 간직하는 것이 결말까지의 힘겹지 모를 여행길에 이득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두 아이들은 시종일관 어린 사람으로서 최소의 욕구를 빼앗길까봐 두려워하고 그것을 잃지 않기 위해, 계속해서 그것을 얻기 위해 쓰레기 더미와도 같은 세상을 헤매고 뒤지게 될 것이 불을 보듯 뻔했으니까. 그리고 나는 그 불더미 속에서 어쩌면 한마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할 수도 있을 테니까...


두 가지 두려움

아이들의 눈앞에 펼쳐진 세상은 '파업'이라는 무시무시한 폭력적 현실이었다. 어른들의 파업은 이들에게 자신들의 본능을 더욱 절실하고 위태롭게 만들었을 것이다. 제이크는 이탈리아를 비롯한 이주민 노동자의 자녀는 아니었지만 알코올 중독과 폭력을 일삼는 무정하고 무식한 아버지를 둔 덕에 미국 토박이로서의 자존심은 어디에서도 내세울 게재가 되지 못했다. 외국인이 아닌데도 어쩌면 외국인 노동자만 못한 자신의 처지는 영어를 하지 못하는 것이 수치스러워야 할 미국에서 이탈리어를 쓰고 읽지 못해 부끄러운 상황에도 놓여 지게 되고 만다. 제이크의 관심사는 오로지 첫 번째도 '배고픔', 두 번째도 '배고픔', 그 다음은 '추위'였기에. 자신은 영문도 모를 파업현장에 동참하던 이탈리아계 노동자 안젤로 아저씨를 겁 없이 따라나선 계기도 음식에 대한 기대때문 이었고, 안젤로 아저씨와 헤어지게 되면서 느낀 가장 큰 아쉬움도 그가 푸짐하게 건네주던 음식때문 이었다. 시위현장에서 경찰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아이들의 소식을 들었을 때도 싸늘한 시신이 되어 자신과 한자리에 누은 아버지를 곁에 두고서도 가장 견딜 수 없었던 감정은 '배고픔'과 '추위'였었다.

어른이든 아이든 자신을 지배하는 감정이 바로 자신을 지배할 것을 선택하는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닐까. 제이크에게 있어 신자信者가 되거나 시위자 혹은 양자養子가 되기를 결심하게 하는 우선된 기준은 배부른 음식이 되버리고 만다. 이는 곧 자신이 가장 원하는 것이므로 당연히 타자에게 베푸는 최선의 선 역시 배고픔을 구원하는 음식이 되는 것과 동일한 의미였다. 신부님에게 새 옷과 맛있는 음식을 선사받고도 횡재처럼 받은 50센트로 제이크가 아버지에게 할 수 있었던 최선은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인 위스키를 사는 것이었다. 제발 술을 끊으라고 잔소리를 해대던 노동자의 아내가 모처럼 생긴 목돈을 가지고 자신의 남편이 가장 즐겨 찾던 술을 사가지고 가는 마음을 이해하고 남는다. 만약 아버지가 위스키가 아닌 다른 음식을 좋아했다면 제이크는 기꺼이 그것을 택하였으리라.



로렌스의 섬유공장에서 일하던 소년들. 그중 가운데 웃고있는
소년의 눈이 내 눈을 멈추게 한다. 그의 얼굴에서 어른된 우울함이,
노동의 피곤이, 세상을 너무 일찍 알아버린 조로함이 엿보인다.
제이크도 저렇게 웃지 않았을까. (1912. 로렌스 섬유공장, 노동자들)  


사리판단이 분명한 어른이 된 나이에도 배고픔은 견디기 힘든 본능에의 상처일 텐데 한창 발육이 왕성한 열 네살 제이크에게 배고픔은 거의 온 生의 전 가치라고 해도 무방해 보였다. 그리고 그 全 가치를 위해 남의 음식을 훔치는 것은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필수적인 행동이었을 것이다. 로렌스 공장지대의 파업이 아니 어쩌면 모든 지역의 파업이 궁극엔 지금보다 빵을 더 달라는 요구이겠지만 그럼으로써 지금 가지고 있던 빵마저 빼앗겨야 하는 어린 노동자의 믿기 어려운 현실이 지금으로부터 십년 전이 아닌 백 년 전의 미국에서 일어났었던 일이라는 것은 좀처럼 믿기 힘든 사실이기도 했다. 바로 백년의 세월이 무색하게 미국이 아닌 우리나라에선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는 사실이, 한술 더 떠 지금은 당당히 외국인 노동자를 같은 방법으로 착취하는 비인간적인 고용주로서의 면모를 열심히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부끄럽게 만들며 전혀 시간상의 낙차를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핀치 선생님의 교과서적 가르침에 혼란을 감지하던 로라는 흡사 내 학창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로사가 두려워했던 것은 학교에서 배운 가치에 반하는 행동에 대한 도덕적, 사회적 비난이었다. 그것은 진정한 미국인이 되는데 가장 결정적인 방해요소였을 것이다. 하지만 로사는 파업에 가담한 가족과 파업을 비난하는 학교사이에서 확실한 방향성을 찾지 못하고 자신 안에 머무르게 된다. 파업이 진행되면서 급기야 행진도 참여하지 못하고 학교도 가지 못한다. 둘 다 틀리지 않았고 그렇다고 둘 다 맞는 것 같지 않은 로사에게 어느 하나를 선택하라는 것 역시 두려움이 아니었을까.

우리 학교는 강 건너 대학교에서 데모를 하는 날이면 어김없이 오후 수업은 문을 꼭꼭 닫고선 수업을 해야 했다. 바로 강을 타고 넘어오던 최루탄 가스 때문이었다. 유난히도 데모가 심했던 그해 유월엔 최루탄 잔향으로 도무지 수업을 할 수 없어 오후엔 대거 집단 조퇴 사태까지 일어났었고 당시 선생님들은 더욱더 입을 꾹 다물고 우리들의 질문에 '모르쇠'라는 자물쇠를 굳건히 채우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도 그럴 것이 좌파성향의 국어 선생님이 해직된 후 사립이었던 우리 학교는 질문에는 일제히 입을 다무는 것을 지나쳐 아예 대학생이 되면 절대로 '데모하지 말 것'에 대한 예방과 세뇌를 노골적으로 강제시행한 후 학생들을 졸업시키는 여학교였던 것이다. 데모나 파업이 일어나는 사회적 배경과 원인보다는 데모를 해서 인생이 망가지는 백가지 사례나 파업이 가져오는 경제적 손실과 피해 백가지만을 알려주며 공산당 다음으로 파업이나 시위 주동자를 사회죄악시 하는 이데올로기를 주입시켰다. 창피한 이야기지만 나는 대학교에 입학하여 광주에서 올라온 같은 과 학생으로부터 처음 '광주사태'라는 단어를 들었을 정도로 정보와 진실이 꽁꽁 차단된 학창생활을 보내었던 것이다. 바로 로사가 자신의 엄마와 언니는 공장의 파업현장에서 노래부르고 있을 때 학교에서는 선생님의 편향적인 가르침을 받으며 무언가 가슴속에 응어리가 느껴지던 잘못 없는 '죄책감'과,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던 모범생으로서 학습된 통제가 요구하는 자신과 상반되는 그 '반동감'은 학교생활 내내 나를 짓누르며 보이지 않던 무의식으로 자리잡았다. 그래서인지 로사의 갈등을 보며 그때 그 시절 내 사고과정을 그대로 엿보는 것 같아 반갑기도 하면서 또 한편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결국 대학을 입학해서는 교육의 효과는 더욱 분명한 결과치로 나타나 시위현장을 본능적으로 두려워하게 되었고 로사처럼 가족의 안전이나 내 주변 인물의 안녕을 우선가치로 두는 무사안일, 보수세력이 되어버린 오늘의 내가 바로 그곳에서 자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도 그럴 만한 이유는 있었다.(물론, 이렇게 멍울지고 변명할 기회가 오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시인이 파업하는 것을 본 적 있는가. 영화판에서 월급도 없이 하루종일 라면한개로 버틴다고 파업하는 것을 본 적 있는가. 어떤 젊음은 그것이 '노동'이라 규정짓지 못할 훗날 핑크빛'꿈'앞에 가로막혀 자신의 시퍼런 인권을 유보하기도 한다. 글쓰는 노동이 감독 시다바리 노동이 공적이지 않고, 생산적이지도 않고, 규모적이지도 않을 때 그것은 그저 저 좋아 하는 일일뿐 고로 견디기 힘들면 조용히 때려치우면 그만인 일인 것이다. 내가 다니던 회사가 파업을 불러오지 않을 정도의 훌륭한 회사였는지, 아니면 내가 유난히 인내심이 탁월해 불합리한 상황을 잘 견딘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목구멍이 포도청이고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현실에서 조용히 다음달 월급명세서만 손꼽아 기다리느라 그들을 외면했는지는 고백하고 싶지 않다.

여하튼 나와 같이 피끓는 청춘의 시기에도 시위현장에 제대로 참여한 적이 없는 세대들은 늘 그렇듯 이런 작품을 만날 때마다 상당한 불편의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똑같은 시절에 아무 것도 생각지 않고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 같다는 무위에 대한 막연한 죄책감은 실제로 어떠한 사회적 운동에도 참여하지 않는 결과를 낳으며 스스로 정치에 무관심(할 수밖에 없는)한 유권자를 지향케 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용서와 함께 기득권세력을 향한 소심한 복수를 지향하게 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가만 놔두면 좋았을 나름의 과거를 용케도 정확하게 공략을 해대니 독자로서 그리 반가운 일은 아닌 것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하여 아무말도 할 말이 없지는 않은 터, 비록 늘 뒤편에서 돌아가는 상황만 주시하는 소심한 시민이 되어 있었지만 로사의 복잡한 마음을 들여다 보는 일만큼은 누구보다 공감했기에 가족과 친구들 사이에서 누구보다 힘겨웠을 로사의 외로움만은 가장 잘 알고 있다 말하고 싶었다. 로사는 알 턱이 없지만 그 시절 정치나 사회운동에 대한 내 자의식이 형성되어 가는 과정을 바로 코앞에서 내 살처럼 지켜본 덕에 몇 배의 에너지를 소모한 내 심정을 알아주길 바라면서 말이다.


두 개의 가슴

이렇듯 작품의 전반부는 어른들의 파업으로 인해 제이크와 로사앞에 닥친 비정한 현실보다는 그들을 바라보는 내 심정, 그들이 환기하던 내 학교, 그들을 통해 상기되는 우리의 오늘을 자극하면서 우리시절 장산곶매의 <파업전야>같은 노동영화를 삼삼오오 모여서 시청하는 기분이 들었다고나 할까. 금방이라도 누가 건드리기라도 하면 모두 밖으로 나가 부조리한 세상을 향해 소리칠 수 있을 것 같다가도 곧 배운 대로 본 대로 들은 대로 자신을 은밀히 통제하고 상황을 외면하던 냉정의 시간들을 반추하도록 하였다. 카리스마 넘치는 연설가 조 에터와 여성 조직 운동가 걸리 플린, 시인 조바니티까지 실제 로렌스 파업 지도부이기도 했던 이들의 신념넘치는 행보는 그 시절 지명수배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던 잘생긴 어느 총학생회장을 떠올리기 충분했고, 여성과 어린 아이들까지 단결에 합세하며 목청껏 불러대던 노동자의 노래는 그 시절 수많은 연대라는 이름으로 인연의 끈을 묶어버린 많은 우리네 노동자와 운동가를 그립도록 만들었다.

그런데 이 작품은 파업의 실상을 파헤쳐가며 공권력의 횡포를 고발하고 그 피해양상과 노동자들의 고통에 대해서만 낱낱이 말하려는 작품은 아니었다. 로렌스 지역의 외국인 노동자들의 파업의 시작과 함께 제이크와 로사를 번갈아가며 아이들의 시선으로 서사를 이끌고 있긴 했지만 보다 중요했던 사실은 파업이라는 위기속에서 두 아이들이 느낀 生에 대한 두려움과 그 두려움 속에서도 끝내 잃어버릴 뻔 했던 '빵'과 '장미'라는 기본적인 生의 욕구들을 되찾기 까지의 시련은 물론 그들 스스로 이루어낸 빵과 장미보다 더 향기롭고 놀랄만한 자신들의 용기에 있었다. 파업은 제이크와 로사로부터 베이크와 로즈를 앗아갈뻔 했던 위협적인 소설적 배경인 것은 틀림없었지만 이제 남은 숙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성장하고 내일을 기다려야하는 이유를 찾는 일이었던 것이다.

작가는 그 시점에서 아이들을 일가친척이 전무한 오지로 향하게 한다. 결과만 놓고 생각하면 마땅한 절차였고 당연한 해법이었겠지만(소설적으로도 새로운 환경이 절실한 시점이었기에) 같은 피와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이 파업 노동자의 아이를 돌보아 주는 프로그램은 소설과 상관없이도 참으로 신선했다. 백 년 전이다. 미국이었고 당면한 국가현실은 판이하게 달랐지만 지금의 우리로 시계를 맞추어 보아도 혁신적인 아이디어였으며 실천과정 역시 훌륭했다고 본다. 노동회관과 많은 지역민들이 아이들을 돌보아 주지 않았다면 그들의 어머니인 여성들이 강렬하게 거리로 뛰쳐나올 수 있었을까. 나는 이들 파업공동체의 목적과 행동강령 및 요구사항, 피해 학생들, 심지어 한마음된 노래에도 비교적 덤덤하다가 아이들을 돌보아주기 위해 서로가 합심한 그 마음에는 동화되어 나도 모르게 백 년 전의 베러지역의 노동회관에서 스프를 끓이고 있는 한명의 아줌마가 되어 보기도 했다. 제이크와 로사는 이 훌륭한 프로그램 덕에 우여곡절을 뒤로 하고 같은 집에 머물게 된다. 쓰레기 더미에서 조우한 이들이 각자 찾은 것은 달랐지만 다시 필연적으로 같은 장소에 놓이게 된 것이다. 두 사람을 맞이한 제르바티 부부 역시 실은 '빵'과 '장미'의 다른 이름인 것은 아니었을까. 제이크와 비슷한 나이의 외아들을 잃은 노부부의 선행과 호의는 파업으로 상처받은 두 아이를 재활케 하는 소설적 장치였을 테지만 이 역시 실제 사실을 근거로 구성된 서사라는 점에서 역시 현실은 더 소설적이라는 영화같은 교훈을 떠올리게 했다.

환경이 바뀌면서 제이크와 로사는 당연히 적응하고 극복해야 할 것이 있었다. 제르바티씨의 부인은 매 끼니마다 배부르고 맛있는 식사를 제공하며 제이크에게 배고픔에 대한 공포를 잊도록 해주었지만 이탈리아인이 아닌 미국 토박이로서, 학교 교육을 받지 않은 문맹자로서, 로사와는 혈연관계가 아닌 친구로서 계속해서 위배되는 거짓말과 아버지의 죽음을 방치하고 돌아온 죄책감으로 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집으로 도망치는 게 아니라 집에서 도망쳐야 했던 제이크로선 또다시 진짜 자신으로부터 도망쳐야 하는 막다른 순간이 찾아 온 것이다. 로사는 자신의 집보다 월등한 환경에서도 파업에 동참한 엄마와 언니의 소식에만 시시각각 귀를 귀울이며 좀처럼 그리움과 외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로렌스 파업현장이 아닌 베러 지방의 노부부 집에서도 제이크는 아버지의 죽음으로부터 끝까지 도망치고자 했으며, 로사는 가족을 잃게 될까봐 한시도 마음을 놓지 못했던 것이다. 이들의 어린 가슴에 무엇을 더 요구 할 수 있었을까. 어린 이들의 손을 잡아 준 것은 당연히 작가의 분신으로 생각되는 제르바티 부부였다.

제이크와 로사는 각각 '빵'이라는 배고픔에는 절대 굶주리지 않도록 도와준 노부인과 '장미'라는 인생의 비밀을 가지고 있던 제르바티씨와 함께 손을 잡고 부부가 이끄는 장소로 이동하게 된다. '빵'에 대한 본능은 어느 정도 채워진 제이크는 제르바티씨의 석공소에서 폐석을 치우는 일자리를 얻게 되고 '장미'에 대한 그리움이 간절하였던 로사는 노부인과 함께 기도를 한다. 서로 각자가 필요했던 것을 얻게 되고도 좀처럼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아이들에게 이들 노부부는 두려움을 이기는 것은 총이 아니라 가슴이라며 자신들의 안에 있는 '강한 가슴'으로 두려움을 이겨야 함을 타이른다.


두 송이 장미

이 작품에서 장미는 정열과 사랑의 향기를 대변하는 꽃의 여왕으로서의 그 외적인 상징성 보다는 인간의 영혼과 구원된 손길을 상징하는 내재된 의미로서 꽃을 피웠다. 실제로 제이크와 로사는 장미라는 꽃의 실체를 자의든 타의든 각자 자신의 현실에 오롯이 새기게 된다. 제이크는 대규모 환영인파 속에서 마치 신적인 존재를 만난 것처럼 걸린 플린 여사를 보고는 '그녀의 뺨은 흰 눈에 핀 장미꽃 같았다'고 비록 먼발치 서지만 자신을 선량하고 용감한 사람으로 생각해 주기를 소원했다. 그녀가 스쳐지나갈 땐 작고 예쁜 꽃에서 나는 향기로 취한 듯했다고 찬양해 마지 않았다. 모성이 부재했던 제이크에게 흰 눈밭의 장미꽃은 고결한 최초의 여성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신자가 아니었던 제이크에게 지긋지긋한 현실로 부터의 구원을 염원하는 신성의 증표로도 이해되었고 학교를 다니지 않았던 제이크에게 긍정적인 가치관을 심어줄 교사나 그러한 여성을 흠모하는 그리움의 대상으로도 해석되었다. 즉, 제이크의 가슴에 새겨진 장미는 모성이라는 여성성에 대한 사랑과 다름 아니었다. 그의 가슴엔 장미라는 母花가 피어 올랐던 것이다. 이렇듯 자신도 모르는 새 가슴에 장미를 그려 넣은 제이크와 만나게 된 제르바티씨는 기념비라는 차디찬 돌덩어리에 뜨거운 장미라는 추억을 새기는 사람이었다. 그는 화강암 조각가이자 석공소 사장이었으며 아들의 죽음을 잊지 않기 위해 묘비에 꽃을 그려 넣어 영원을 소원한 것이었다. 제르바티씨가 제이크의 고백을 듣고 아버지의 묘비를 만들어 주겠다고 한 것은 바로 제이크의 가슴 한 켠에 숨어 있던 장미라는 존경과 사랑의 母花를 아버지의 영전에 선사하도록 한 어른 된 가르침이자 배려였을 것이다. 비로소 제이크의 가슴에 고이 숨어있던 장미가 세상에 발아하는 순간이었다.

로사의 장미는 혼자만의 것은 아니었다. 로사는 미국인은 아니었지만 그들보다 더 똑똑한 모범생이었다. 비록 아버지는 공장사고로 잃었지만 언니, 동생들과 엄마, 이웃, 세입자 할머니 가족과 친밀한 유대관계를 형성해온 로사에게 장미는 가족간의 영원한 사랑과 행복을 상징한다 할 수 있다. 로사는 별로 내키지는 않았지만 엄마와 마리노 아줌마의 권유와 부탁으로 시위대의 피켓에 직접 장미라는 문구를 새기게 된 당사자였다. 로사가 종이에 직접 새긴 것은 바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표현했다는 것이고 피켓은 그것의 증거물로 남았다. 오늘날 어느 정도 자신들의 절실함과 사업주의 야만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되는 파업의 문구들은 '규탄', '철폐', '죽음' 등의 공격적이고 과격한 문구들이 아니던가. 당장이라도 때려죽일 그것에 익숙해진 나로서는 백 년 전에 쓰여진 '장미'라는 낭만적 명사가 동화속 그림처럼 낯설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 파업의 상황이나 전개양상에서는 별다른 시간차를 느끼지 못하다가 '우리는 빵을 원한다, 그리고 장미도' 에 이르러서는 '빵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치던 프랑스 시민혁명이나 '자유 아니면 죽음을 달라'던 미국 독립혁명이 연상되면서 비로소 심리적 시간차를 느끼기도 했다.

실제로 '빵과 장미'구호의 사실상 존재여부는 확실치 않으나 누가 짓고 누가 썼건 그 문구는 시로도 음악으로도 확산되는 놀라운 영향력을 행사하며 로사라는 장미보다 낭만적인 주인공을 탄생케 했다. 물론 소설속에서 '우리는 장미도 원해요'라는 생각을 로사가 한 것은 아니었다. 최초발안자는 엄마이었고 그것을 줄여서 고쳐 쓴 것이 로사였다. 하지만 여기서 장미라는 단어를 피켓에 새겨 넣었다는 행위는 마치 자신의 이름을 지은 것은 자신이 아니지만 이름표를 만듦으로써 자신을 자각하고 하나의 정체성을 스스로 부여하는 일종의 신고식을 의미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름표는 세상으로부터 불리워 졌을 때 비로소 자신과 객관적으로 동일시 된다. 로사의 피켓작업은 파업행위에 가담하였다는 죄책감보다는 오히려 파업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해소되는 계기를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음악이나 장미라는 가치에 대한 공감과 옳음은 곧 자신의 행위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며 스스로 옳고 그른 것을 사유할 수 있는 기회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그 시간 이후 로사에게 장미는 여러 사람이 힘을 합해 공동의 목표인 행복을 추구하는 人花로 인식된다. 이탈리아계 노동자 집안의 자녀로서 교육을 유일한 탈출구로 인식하던 로사는 누구보다도 교양있고 존경받는 미국인이 되길 원했기에 그러한 로사에게 가족의 안녕과 그들과의 행복은 바로 로사의 바램을 있게 한 근본이었으며 그 바램을 공고히 지탱해주는 버팀목이었을 것이다. 그러했기에 로사는 끊임없이 가족의 안부를 자신의 안녕과 동일시하며 집에서 나는 부드럽고 고소한 빵냄새 이상으로 가족간의 향기로운 대화나 격려를 잃게 될까봐 늘상 두려움에 떨었던 것이다. 제이크의 母花나 로사의 人花 모두 조금은 강해진 그들 어린 가슴을 찢고 피어나던 눈물겨운 장미가 아니었겠는가.


세상 모든 이의, 행복

이 작품은 결국 아이들이 두려움과 맞서는 용기를 얻는 이야기였다. 실제로는 패배한 적이 없었던 사람들이 주어진 패배감을 극복해 나가는 이야기였다. 삶의 조건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위해 용기내어 일어선 사람들의 이야기 였다. 작품 후반부에 돈을 훔치던 제이크에게 보여준 제르바티씨의 말과 행동은 우리 어른들에게 불러 일으키는 반향이 결코 적지 않았음이다. 만약 여느 의심많은 어른들처럼 제이크를 궁지로 몰아붙여 그동안의 범죄나 실수까지 찾아내어 사회에 다시는 적응하지 못하게 만들었다면 또 한명의 더 강력하고 소신있는 범죄자를 양성하는 결과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작품의 마지막에서 제이크는 제르바티씨 집에 남고 로사는 가족들 품으로 돌아간다. 두 사람은 결국 자기 이름과 자기 가족과 자기 보금자리를 그리고 자기 행복을 찾은 것이었다. 만약 제이크가 짜낸 도주 시나리오대로 일이 진행되었다면...로사가 상상한 불행이 가족들에게 닥쳤다면...(그렇게 되지 말란 법도 없는 법) 우리는 두 사람의 불행의 탓을 누구에게 전가해야 했을까. 실제 그러한 불행을 당한 사례는 없었던 것이 아니라 소설화되지 않았을 뿐이고 문학으로 재생된 것은 '빵'과 '장미'를 되찾은 열 네 살 아이들이었다. 자신처럼 행복해졌으면 좋겠다는 로사의 기도는 현명한 소녀의 최선이었고 제이크는 그 바램대로 행복해 질 것이었다. 문학은 이렇게 '빵이 넘치고 돌에서 장미가 자라는 새로운 삶'을 제이크와 로사는 물론 우리 모두에게 선사했다.

작가는 로렌스 지방에서 베러로 보내어진 서른 다섯 명의 아이들이 도착해서 노동회관 앞에서 찍은 한 장의 기념사진에 왜 발걸음을 멈춘 것일까. 사진 속 아이들은 웃고 있는 얼굴은 아니었지만 두려움보다는 희망의 의지쪽에 더 가까운 눈망울이었다. 그녀는 왜 그 눈빛을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일까. 절대 희망만은 버리지 말아야 할 아이들의 손을 잡아 주고픈 모성이 문학으로 탄생되는 순간이었다. 그래서인지 이 작품은 파업의 현장을 자세히 담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어머니의 가슴으로 포용하는 따스함이 시종일관 서사를 지배한다. 아이들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예민하고도 섬세한 통찰력이 어른된 우리들까지 위로하는 것이다. 실제 '빵과 장미' 파업이라고도 알려진 로렌스 파업은 사회적 최약자층인 여성노동자와 아이들이 주된 운동이었다. 당시 여성노동자들은 노동의 비숙련됨과 이주민임을 비하하는 남성노동자들과도 싸워야 했다. 여성들은 아이들에게 자장가를 불러주듯이 폭력과 유혈이 아닌 노래로 시위했으며 그 노래를 작가는 문학이라는 합창곡으로 편곡해 들려준 것이다. 그때 여성들은 '빵과 장미'의 소중함을 우리에게 알려줌으로써 세상에 이긴 것이며 지금의 작가는 '빵과 장미'를 되찾은 아이들을 격려함으로써 절망에 이긴 것이다. 문학이 파업을 막을 순 없다 해도 파업의 시대와 파업의 주인공과 파업의 피해자들을 오래도록 안아줄 수는 있다. 작가가 우리에게 장미향보다 진한 사람의 향기를 전해주었기 때문이다. 새삼 문학으로 시대를 껴안는 모성의 그릇이 더없이 크고 따스하게 느껴지지 않는가.

이제 나는 뜨거운 돌멩이 자국이 남기고 간 그 자리에 비로소 영원히 죽지 않을 꽃 한송일 새기고픈 욕심을 가져본다. 빵과 장미는 물론 사람의 향기가 나는 행복을 간절히 원하기 때문이다. 빵이 없어 배고파서 죽는 사람은 사라졌지만 아름다운 영혼의 장미도 넘쳐나지만 사람의 향기에 목말라 죽음을 택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현실이지 않은가. 저 서른 다섯 명의 아이들의 가슴에 피어난 장미가 혼자만이 아닌 누군가를 사랑하는 능력으로 만개하여 사람으로서 최고의 향기를 전할 수 있다면 우리삶은 얼마나 행복한 인생이겠는가. 머나먼 타지에 도착해 꽁꽁 언 겨울손을 잡아준 시민들처럼 그들도 누군가의 시린 손을 잡아주고 그 손에 장갑을 씌워주고 마음으로 호호 불어 준다면 그 가슴은 얼마나 뜨거워 질텐가. 제르바티씨 부부처럼 소중한 사랑을 잃고도 사람의 향기만은 잃지 않고 자신들의 가치를 소중히 지켜낸다면 그 세상은 한번 살아 볼 만한 곳인 게다.

검은 돌에 새겨진 하얀 장미앞에서 나는 기념하고 싶다. 영원히 시들지 않을 용기라는 줄기위에 잊지 말아야 할 희망의 꽃잎 위에 비로소 퍼져 나오는 사랑의 향기가 내안에 스며들어 그토록 강한 가슴으로 두려움을 이기게 해달라고. 그것만이 오늘을 살아가는 일이라고. 그것이야 말로 행복의 다른 이름이라고.


 
로렌스 지방에서 베러로 보내어진 서른 다섯명의 아이들. 웃고 있진 않지만 희망을 잃지는 않았다. 
작가는 베러에 살고 있는 시민으로서 이 한장의 사진을 보고는 아이들의 사연과 도움의 손길을 보내준 용기를
찾아 나섰다. 이 백 년 전의 흑백사진에서 뜨겁고 진한 사람의 향기가 전해질 수 있다는 것이
바로 『빵과 장미』가 이룬 문학적 성취일 것이다. (1912. 베러, 버몬트, Barre's Old Labor Hall) 



 
모든 인간에게
세상에서 한 가지 중요한 것은
그의 가장 깊은 곳
그의 영혼 그의 사랑하는 능력이라네
보리죽을 떠먹든 맛있는 빵을 먹든
누더기를 걸치든 보석을 휘감든
사랑하는 능력이 살아 있는 한
세상은 순수한 영혼의 화음을 울렸고
언제나 좋은 세상
옳은 세상 이었다네

- 행복해 진다는 것 中에서-
  헤르만 헤세



<덧붙임> 사진출처:  

http://oldlaborhall.com/history
http://www.corbisimages.com
http://www.yonhap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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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25 22: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25 22: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양철나무꾼 2010-10-26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노회찬 추천이라서 보고 싶었는데...
이 리뷰를 읽으니 꼭 봐야 겠습니다,불끈~^^

한사람 2010-10-26 21:52   좋아요 0 | URL

아...노회찬 추천이라는 말이...사회적으로 어떤 의미를 담고 있나요..?
진보..? 노동자...?
제 생각엔 이 책은 ..파업보다 그 속의 아이들에게 더 포커스를 맞춘 내용인 듯해요^^
파업의 테두리 때문에 선입견을 가지고 보았지만
주제는..파업의 바깥에 있더라구요~~

암튼, 전 좋았어요!!!

양철나무꾼 2010-10-27 01:07   좋아요 0 | URL
음~
거창하게 사회적 의미까지는 모르겠고요~
전 지난번 노회찬이 추천한 데니스 루헤인의 '운명의 날'이 참 좋았어요.
제가 데니스 루헤인에 홀라당 반해버려서요.

이 책 청소년 북스여서 망설였는데,노회찬 추천이라서 볼까 했었다는 얘기였어요.
암튼 님의 리뷰가 이렇게 끌어당기는 데 어떻게 그냥 지나갈 수 있겠어요?^^

다이조부 2010-11-09 0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혹시 예전에 빵과장미 라는 영화가 있지 않았나요?

고종석이 칼럼에서 추천 했던게 생각나네요

한사람 2010-11-09 11:40   좋아요 0 | URL

맞아요, 같은 제목의 영화도 있었어요
청소년 문고지만 어른들이 읽어볼 만하답니다^^